2024. 12. 21. 11:13 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4화 어린 괴물
4화
어린 괴물(怪物)
부운은 사당을 등지고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철두와 정칠이 사당 뒷문으로 빠져나와서 도망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교활한 새끼! 입구에 미리 철질려를 뿌려두었구나!”
구괴는 깨금발로 펄쩍이며 발에 박힌 철질려를 뽑아냈다.
금강불괴이거나 철판을 댄 신발을 신지 않은 이상 철질려에 찔릴 수밖에 없다.
(겨자 가루와 산초 태운 연기로 눈을 자극했던 건 뿌려놓은 철질려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구나.)
구적 역시 발바닥에 박힌 철질려를 뽑으며 부운을 노려보았다.
부운은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걸어가며 돌아보고 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버러지새끼!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휘익!
발바닥에서 철질려는 뽑아낸 구괴가 악을 쓰며 부운을 덮쳐갔다.
구적도 뽑아낸 철질려를 던져버리며 구괴의 뒤를 따랐다.
(날 따라와라. 그래야 철두와 정칠이 안전해질 테니...)
부운은 뒤를 힐끔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철두와 정칠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사당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저 애송이 놈...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다!)
앞서 달려가는 구괴를 따라가며 구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부운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으아아아!”
단번에 부운에게 육박한 구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우오오오!
지팡이 윗부분을 가리고 있던 천이 날아가며 귀신이 우는 듯한 괴음이 터졌다.
구괴의 지팡이 끝에는 주먹 두 개만한 해골이 달려있다. 그 해골의 뻥 뚫린 눈과 쩍 벌린 입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오싹한 소리를 낸다.
촉루괴장(髑髏拐杖)이라는 지팡이는 해골이 내는 괴음만으로도 사람의 기절시킬 수 있다.
그 촉루괴장의 해골이 부운의 머리통을 후려치려 할 때였다.
휘릭!
부운은 아이들이 놀이를 하듯 앞구르기를 해서 촉루괴장을 피해버렸다.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회피였다.
“조심해라!”
구괴를 따라오던 구적이 다급히 외쳤다.
“!”
구괴도 무언가 느끼고 눈을 부릅뜰 때였다.
피핑!
굴린 몸을 일으키며 휘두르는 부운의 손에서 별 모양의 표창 두 개가 구괴에게 날아들었다.
“억!”
팅! 핏!
표창 하나는 구괴의 지팡이에 맞아 튕겨졌지만 다른 하나는 그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를 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구적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쇠 피리를 뽑으며 달려갔다.
그자의 앞쪽에서는 뺨이 피로 물든 구괴가 비틀거리고 있다.
“독공의 고수들이라 독 묻은 표창도 소용이 없는 건가?”
부운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섰다.
구괴에게 상처를 입힌 표창에는 즉각적으로 마비를 일으키는 독이 묻어있었다.
표창 뿐 아니라 망산쌍독이 밟은 철질려에도 같은 독을 묻어있다.
하지만 망산쌍독은 상처는 입었어도 중독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자들이 독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개새끼가...”
부악!
악에 바친 구괴가 다시 부운을 덮쳐가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부운 앞쪽에 나있는 풀들을 밟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등줄기를 뚫고 정수리까지 치달렸다.
다시 철질려가 발바닥에 깊이 박힌 것이다.
“아이쿠!”
콰당탕!
철질려를 밟을 발이 반사적으로 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구괴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뭐냐?”
쇠 피리를 뽑아든 채 달려오던 구적이 놀라 급히 멈춰 섰다.
“발... 발밑을 조심해라! 저 찢어죽일 놈이 이 근처에도 철질려를 뿌려놨다.”
구괴가 철질려가 박힌 발을 쳐들며 구적에게 외쳤다
“눈치 챘어도 소용없어. 이 주변은 풀로 덮혀 있어서 어디에 철질려가 뿌려져 있는지 보이지 않을 테니까.”
부운은 웃으며 돌아섰다.
“멀찍이 우회해서 잡으러 가자!”
구적이 옆으로 달리며 외쳤다..
“기필코 잡아서 껍질을 벗겨버리고 말겠다!”
쩔뚝거리며 일어난 구괴가 구적의 반대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나하고 노닥거릴 여유는 없을 텐데...?”
부운이 진회하 하류, 금릉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
“!”
부운을 포위하기 위해 좌우로 달리려던 구적과 구괴의 눈이 부릅떠졌다.
“색마살귀인 듯한 자들이 저기 있다!”
“놓치지 마라!”
강변을 따라 수십 명의 무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분이가 금릉부로 달려가서 불러온 관병들이다.
(관병들!)
달려오는 무사들의 복색으로 관병임을 알아본 망산쌍독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명색이 일문의 문주들인 망산쌍독에게 수십 명의 관병쯤은 딱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부와 문제가 생기면 피곤해진다.
수배령이라도 내려지면 한시도 편히 지낼 수가 없게 된다.
무림인들이 관부와 엮이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이유다.
“저자들이에요!”
그때 부운이 복면을 벗으며 관병들에게 외쳤다.
“저 인간들이 사당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어요.”
부운은 관병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망산쌍독을 손가락질 했다.
“잡아라! 절대 놓치면 안된다.”
“거기 서라 이 마귀들아!”
관병들은 부운의 손짓에 따라 방향을 틀어서 망산쌍독 쪽으로 달려왔다.
“저... 저 교활한 여우새끼...”
“관병들까지 달고 오고... 정말 치밀한 놈이다.”
관병들을 지나치면서 돌아보는 부운을 보며 망산쌍독은 이를 갈았다.
“젠장! 관부와 시비 붙어서 좋을 거 없다. 빨리 여길 뜨자!”
구괴는 쩔뚝거리며 사당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세.”
구적도 멀어지는 부운을 보며 구괴를 따라 사당으로 갔다.
삐익! 삑!
구괴는 사당으로 달려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쉬쉭! 쉭!
그러자 여섯 마리의 투명한 뱀들이 하백의 사당에서 날 듯이 기어 나왔다.
망산쌍독은 뱀들에게 달려가며 호리병을 내밀었다.
뱀들은 구괴와 구적이 내미는 호리병으로 주저하지 않고 기어들어갔다.
“뱀까지 부리고...”
“수상한 놈들이 분명하다.”
“이놈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관병들이 외치며 사당으로 몰려갔다.
부운이 지나쳤지만 관심을 두는 관병은 없었다
뱀들을 수습한 망산쌍독은 몸을 날려 사당에서 멀어졌다.
“잡아라!”
“멈추지 못할까?”
관병들이 망산쌍독을 따라가며 외치는 소리가 강변을 울렸다.
(망산쌍독... 할아버지가 작성하신 강호인명록(江湖人名錄)에 의하면 북망산에 자리한 독묘파라는 문파의 공동문주...)
부운은 달려가던 걸음을 늦추며 망산쌍독과 그들을 추격하는 관병들을 돌아보았다.
(독을 쓰는 재주로는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저자들이 무슨 일로 금릉에 나타난 것일까? )
망산쌍독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부운은 의혹을 느꼈다.
그자들은 북망산에 칩거한 채 강호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애들을 풀어서 뒤를 좀 캐봐야겠다. 물론 그전에 조져놓을 놈들이 있긴 하지만...)
금릉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부운의 표정은 나이답지 않게 음산해졌다.
***
해가 졌다.
강남 물산의 중심지답게 금릉은 불야성이 되었다.
금릉을 에워싼 높은 성벽 밖의 빈민가 해하촌에도 반딧불같은 불빛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해하촌 동쪽에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다.
그 언덕 위에는 낡은 건물이 한 채 있다.
오래 전부터 버려진 흉가인데 밤만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어른들도 다가가길 꺼려하는 흉가임에도 서너명의 소년들이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껄렁껄렁한 인상에 행색이 추레한 아이들이다.
건물 안에서는 불빛이 흐릿하게 흘러나온다.
흉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소년들이 갑자기 긴장하며 해하촌 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 어서 와라 부운아.”
소년들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언덕으로 올라온 건 부운이었다.
부운은 소년들의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건물로 다가갔다.
한 소년이 서둘러 건물의 문을 열어주었다.
상당히 넓은 건물 안은 어둑하다. 흐릿한 등 몇 개가 드문드문 벽에 걸려있을 뿐이다.
좌우의 벽쪽에는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녀 이십여명이 죽 늘어서 있다.
소년과 소녀들 사이에 복면을 쓰지 않은 철두와 정칠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다.
“회주!”
“어서 와라 부운아.”
“수고했어 오빠!”
부운이 들어서자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녀들이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부운은 일절 대꾸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회주의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오늘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 같다.)
복면을 쓴 소년 소녀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했다.
부운은 철두와 정칠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부운보다 한 살 많은 철두의 키는 부운보다 한 뼘 가량이나 더 크다.
부운과 동갑인 정칠은 키도 고만고만하다.
부운은 말없이 두 놈을 노려보았다.
“고... 고맙다 부운아.”
“네 덕분에 살았어.”
철두와 정칠은 부운의 눈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퍽! 철썩!
직후 철두의 명치에 주먹이 박히고 정칠의 뺨이 홱 돌아갔다.
“컥!”
“캑!”
철두는 명치를 감싸며 주저앉았고 정칠은 팽이처럼 한 바퀴 돈 후 나뒹굴었다.
(손... 손 쓰는 게 보이질 않았어!)
(흑사회의 거친 어른들도 부운이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어!)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년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얼어붙었다.
철두를 주저앉히고 정칠을 나뒹굴게 만든 건 물론 부운이다.
부운은 내공을 지닌 데다가 손속의 빠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본격적인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일단 부운이 손을 쓰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왜 화를 내는 것 같냐?”
부운은 주저앉아 꺽꺽 대는 철두와 얼굴이 벌겋게 부은 채 일어나려 애쓰는 정칠을 노려보았다.
“작... 작업 상대를 잘못 고르는 바람에 너까지 나서게 해서...”
골이 울려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정칠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부운은 지긋이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반응을 하지 않았다..
“미... 미안하다.”
자기 대답이 틀렸다는 걸 알아차린 정칠이 시선을 피하며 무릎을 꿇었다.
철두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고 있다. 한 살 아래 동생인 부운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수치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흑건회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든 이유를 말해봐라.”
부운이 철두와 정칠을 쓸어보며 말했다.
“흑... 흑사회 파락호들로부터 마을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부운 네가 주도해서 만들었잖아.”
정칠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다. 가진 것 없고 배경도 없는 가엾은 인생들끼리 서로 돕고 지켜주자고 만든 게 흑건회다.”
부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흑건회의 규칙은 간단하다. 배신하지 말 것! 서로 돕고 보살 필 것! 자신과 가족과 회원을 지킬 목적이 아닌 이상 사람을 해치지 말 것!”
부운은 손가락 세 개를 쳐들며 말을 이어갔다.
“이상의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무슨 짓이든 용납이 된다. 도둑질을 하든 사기를 치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장사를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는 부운의 목소리는 더 가라앉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안된다. 그런 짓을 하면 흑사회의 쓰레기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부운은 낮으막히 말했지만 소년과 소녀들의 한층 더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고 등을 쳐도 되는 대상은 부자, 탐관오리, 권력을 지닌 자들로 한정해왔는데... 네놈들은 소매치기를 수월하게 할 목적으로 노점상 하는 장씨 할아범의 좌판을 엎어버렸다.”
부운은 무릎을 꿇고 있는 철두와 정칠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부운이가 평소답지 않게 살벌했구나.)
(역시...)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졌다.
부운이 화가 난 이유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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