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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신세(身世)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엾은 노친네의 생계 수단을 박살 내놓고도 느껴지는 게 없냐?”

철두와 정칠을 노려보는 부운의 눈에 번갯불이 흐르는 것 같았다.

... 미안하다.”

정칠이 부운의 시선을 피하면서 팔꿈치로 철두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철두도 마지못해 사과했다.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보살펴주며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폐를 끼치면 어쩌자는 거냐?”

부운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낮아졌다.

화가 풀려서가 아니라 화를 안으로 삭히느라 목소리가 잦아든 것임을 소년 소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운의 목소리가 가라앉으면 정말 조심해야만 한다.

여기 오기 전에 장씨 할아범네 집에 들렀는데 네놈들이 패대기친 사과들은 골병이 들어서 다 헐값에 넘겼다더라. 당장 내일 물건 떼올 돈도 모자란다고 한숨이 방바닥을 꺼트릴 것같았다.”

... 그런 줄은 몰랐다.”

내일 찾아가서 변상을 할 테니 용서해줘라.”

철두와 정칠은 부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변상은 해야겠지.”

부운은 코웃음을 쳤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너희 둘이 장씨 할아범 장사를 도와라. 물론 물건도 너희들 돈으로 떼어다 드리고...”

... 한 달씩이나 거리에서 과일을 팔라는 거냐?”

정칠이 울상을 지었다.

? 죄책감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한 달로는 부족하게 느껴지냐?”

부운이 냉소하며 노려보았다.

... 아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정성을 기울여서 장씨 할아범 장사를 돕도록 하겠다.”

정칠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너희들이 제대로 죄 값을 치루는 지는 지켜보겠다. 오늘 집회는 여기까지! 해산한다.”

부운은 돌아서서 입구로 갔다.

바짝 얼어있던 소년과 소녀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같이 가 오빠!”

복면을 쓴 소녀 한명이 밖으로 나가는 부운을 서둘러 따라갔다.

그만 일어나라.”

부운이의 지랄 맞은 성격에 한 대만 때린 걸 다행으로 여겨라.”

맞어. 운이 좋았다 생각해라.”

소년과 소년들이 철두와 정칠 주변으로 모이면서 위로했다.

운이야 확실히 좋았지. 하마터면 뱀 새끼들의 밥이 될 뻔했으니까.”

정칠이 속없이 히죽거리며 일어났다.

흡혈신사인가 뭔가 하는 투명한 뱀 새끼들이 덤벼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여기서 오줌 지리진 마라.”

그래 임마! 가뜩이나 냄새 지독한데 지린내까지 나면 상종 안해준다.”

소년들은 정칠을 툭툭 치며 웃고 떠들었다.

(개새끼! 나이도 많은 날 공개적으로 개망신 시켜? 그것도 네놈이 흑건회를 조직하기 전에는 다 내 똘마니였던 것들 앞에서?)

하지만 철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두고 보자! 오늘 당한 수모는 가슴에 새겨둘 테니...)

정칠을 에워싸고 희희덕거리는 소년과 소녀들을 곁눈질하는 철두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수고했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라.”

부운이 건물에서 나오며 경계를 하던 소년들에게 말했다.

그 뒤를 복면 쓴 소녀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 나온다.

알았어 형.”

내일 보자 회주!”

소년들의 대답에 손을 들어 대꾸하며 부운은 해하촌을 향해 내려갔다..

건물에서 나온 소녀도 쓰고 있던 복면을 벗으며 부운을 따라갔다. 소녀는 분이였는데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다.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오빠?”

분이는 벗은 복면을 품속에 넣으며 부운에게 물었다.

정칠오빠에게 들어보니 그 자들 망산쌍독이라고 아주 무서운 인간들이었다는데...”

네가 보낸 관병들이 제 때 도착해서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분이는 얼굴이 발개져서 부운의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끼자 분이의 봉긋한 가슴이 팔에 닿아 부운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하여간 철두오빠하고 정칠오빠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어. 어떻게 소매치기를 해도 망산쌍독같이 무시무시한 자들을 건드린데?”

분이는 부운의 팔짱을 낀 채 마을로 내려가면서 쫑알거렸다.

(분이에게서도 어느덧 여자 티가 나는구나. 코흘리개 꼬맹이였는데....)

분이가 의식적으로 가슴을 자기 팔에 누르는 걸 느끼며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운에게 분이는 누이동생같은 존재였다.

집이 서로 가까워 철이 들기 전부터 어울려 지냈다. 그래서 분이가 얼마나 자그마했는지, 또 얼마나 귀여운 아기였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운은 분이를 친남매처럼 여기고 있지만 분이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던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 교태를 부리거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여우 짓도 종종했다.

또 부운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면 발칵 화를 내기도 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부운이다. 분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를 리 없다.

분이가 자신을 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누이동생같은 분이를 여자로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분이의 마음을 마냥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분이는 나날이 예뻐지고 있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사내들이 꼬일 것이다.

자신이 매몰차게 대하면 분이가 홧김에 아무 사내와 사귈 수도 있다.

그러다가 자칫 삶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 분이를 적당한 거리에 머물게 하며 지켜줘야만 한다. 분이를 믿고 맡길만한 사내가 나타날 때까지...

그것이 오라비의 마음일 것이다.

(게다가 분이에게는 비밀이 있기도 하고...)

분이의 말랑한 가슴을 팔에 느끼며 부운은 어떤 부부를 떠올렸다.

부운은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접촉하면 지나온 삶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접촉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엿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집중해야만 보인다는 제약은 있다.

분이와 자주 몸이 닿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분이의 길지 않은 인생을 쭉 엿보게 되었다.

놀라운 건 분이의 부모 모습이 아주 생경하다는 점이었다.

분이에게는 선술집을 하는 과부 신세의 어머니가 있다.

한데 부운이 이능(異能)으로 엿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분이의 생모가 아니었다.

분이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본 기억 밖에 없다.

그래서 부운이 엿볼 수 있는 분이 부모의 모습도 상당히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분이에게 남다른 사연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연으로 해하촌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는 지켜줘야만 한다.)

부운은 붙임성 좋은 고양이처럼 앵겨드는 분이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며 다짐했다.

해하촌이 가까워졌다.

 

***

 

이경(二更;9-11)무렵이다.

여전히 불야성인 금릉과 달리 성벽 밖 해하촌은 어둑하다.

대부분의 집에 불이 꺼져 있다. 불을 밝히는 데 쓰는 기름 값이 비싸서 오래 등을 켜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골동품 가게 온고당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닫혀있는 문틈으로 흐릿하게 불빛이 흘러나온다.

삐꺽!

부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온고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늦었구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부운의 귀에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렸다.

온고당의 주인 조노인이 흐릿한 등이 밝혀진 탁자 앞에 앉아있다가 돌아본다.

탁자에는 십여 개의 원숭이 조각상들이 놓여있다. 한 뼘이 채 안되는 원숭이들은 표정과 자세가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날이 어두워져서 분이를 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분이 어머니가 저녁 먹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늦었어요.”

부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분이모녀가 애를 쓰는구먼.”

조노인은 원숭이 조각상 하나를 천으로 닦으면서 웃었다.

애를 쓰다니요?”

부운은 어리둥절하여 외조부에게 다가갔다.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조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부운은 안채로 통하는 문을 돌아보았다.

네 저녁상 차려놓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먼저 잠이 들었다.”

쓸데없는 일로 바빠서 어머니가 걱정하시게 했군요.”

부운은 멋쩍어 하며 조노인 맞은편에 앉았다.

별 탈 없이 돌아왔으니 되었다. 그보다 오늘 위험한 자들과 시비가 붙었었다고 하던데...?”

조노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저녁 무렵에 철두와 정칠이 건드린 자들이 망산쌍독이었더군요.”

부운은 소문 참 빠르다 생각하며 대답했다.

망산쌍독... 위험한 놈들이지. 일단 척을 지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수도 있는...”

조노인은 닦고 있던 원숭이 조각상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걱정하실 줄 알았으면 그자들을 죽여 버릴 걸 그랬네요.”

부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죽일 작정을 했다면 놈들을 죽일 수 있었느냐?”

조노인은 외손자를 지긋이 건너다보았다..

독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라 좀 까다롭긴 하겠지만... 위험을 무릅쓴다면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부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부운아.”

조노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예 할아버지.”

외조부의 표정이 심각해진 걸 본 부운은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긴장했다.

조노인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할애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도둑이지 살수(殺手)가 아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부운은 자세를 바로 하며 외조부의 말을 경청했다.

알고 있다면서 위험을 무릅쓴다면 망산쌍독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냐?”

조노인의 표정이 엄해졌다.

죄송합니다. 소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운은 아차 싶어 고개를 숙였다.

조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도둑은 싸우는 자가 아니라 숨고 피하고 달아나는 자다. 그 사실을 망각했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천불투라는 별호답게 할애비의 무공은 잠입하고 훔치고 도망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자연히 파괴력도 지구력도 부족하고... 그 때문에 살상이 목적인 무공을 익힌 자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경우 대책이 없게 된다.”

조노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그러므로 적과 마주칠 경우 삼십육계(三十六計) 주위상책(走爲上策), 즉 삼십육계중 달아나는 것이 최고의 계책이라고 한 자치통감(資治通統鑑)의 금언(金言)을 떠올려야만 한다.”

...”

부운은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네 무공이 약하거나 볼품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경신술과 보법, 은신술 등의 재주는 누구보다 뛰어나 적수가 드물 것이다

위축된 외손자가 안되었는지 조노인이 안색을 풀며 위로했다.

특히 지금의 네 공력은 할애비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거의 이갑자(二甲子)에 육박할 정도이니...”

할아버지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각가지 영약을 구해다 먹여주신 덕분이지요.”

부운도 한 시름 놓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할애비가 여러 문파와 가문의 영약을 훔쳐다 네게 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네 공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후한 것은 네 특이한 체질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외조부의 말에 부운은 놀랐다.

자신의 공력이 심후한 게 영약보다는 체질 덕분이라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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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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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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