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5. 09:31 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7화 기막힌 재주들
7화
기막힌 재주들
“사과가 맛있어요. 처녀 맛 나는 사괍니다.”
양손에 사과를 든 정칠이 신이 나서 외쳤다.
철두는 과일 좌판 옆에 뻘쭘한 표정으로 서있다.
좌판의 주인인 정씨 노인은 고개를 설레 저으며 사과를 닦고 있다.
“처녀 맛 나는 사과?”
“망측해라!”
지나가던 여자들은 눈을 흘기거나 얼굴이 발개진다.
반면 사내들은 히죽거리며 오고간다.
“싱싱할 때 사세요. 여자든 사과든 때를 놓치면 맛이 갑니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처럼 정칠은 익살스럽게 호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칠 저 새끼... 갈보집하는 작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호객에는 도가 텄어.)
철두는 부러움 섞인 눈으로 정칠을 힐끔거렸다.
(뭐 갈보들을 파는 것과 사과 파는 게 다를 것도 없지. 물 좋을 때 팔아야 제값을 받는 건 똑같으니...)
하릴없이 좌판의 사과를 뒤적이며 철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나! 형님! 이거 한 번 잡숴바! 누나는 때깔 좋아지고 형님은 물건 실해져!”
흥이 오른 정칠이 지나가던 남녀 한 쌍에게 사과를 들이밀며 수작을 건다.
(정칠이 놈이야 어딜 내놔도 제 밥벌이는 할 놈인데... 문제는 나다. 이 뻘쭘한 짓을 한 달이나 계속해야한다니 죽을 맛이다.)
정칠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철두 자신도 오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 특히 젊은 여자들의 흘겨보는 시선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뚝뚝한 성격에 숫기도 없는 철두에게는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때려 치고 싶다만... 그랬다가는 부운이 새끼가 지랄지랄 할 게 뻔하니 그럴 수도 없고...)
철두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창피하면 그만 가봐.”
사과를 닦던 정씨 노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백정 같이 생긴 놈이 옆에 서있으니 될 장사도 안돼! 성의를 보인 걸로 됐으니 돌아가.”
“됐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할배는 신경 끄슈.”
철두도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괜스레 좌판의 사과들만 뒤적거렸다.
정씨 노인이 콧방귀를 꿨다.
“퍽이나 좋아서 하는 일이겠다 이놈아. 마지못해 자리 지키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아 사람이 말 하면 좀 믿어주던가...”
성질을 내려던 철두는 입을 다물었다. 정칠의 호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양손에 사과를 든 정칠이 굳어져서 누군가를 보고 있다.
한 눈에 봐도 남다른 외모의 노인이 정칠의 앞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칠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인데 머리카락이 녹색이고 눈빛은 쪽빛같이 푸른 벽안(碧眼)이다.
색목인(色目人)인가 싶지만 얼굴 생김은 전형적인 한족이다.
노인답지 않게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데 해골에 가죽을 씌운 듯한 얼굴은 녹색을 띠고 있다.
눈에 띠지 않을 수 없는 외모라 오가던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을 돌아본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듯 녹발벽안(綠髮碧眼)의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칠은 노인이 지나가는 동안 석상처럼 굳어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정칠이 놈이 쫄만한 행색의 늙은이구만.)
좌판 근처를 지나가는 녹발벽안의 노인을 곁눈질하며 철두도 침을 꿀꺽 삼켰다.
노인에게서는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넘쳐서 보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이윽고 노인은 좌판을 지나 멀어져 갔다.
“뭐냐?”
철두는 노인을 곁눈질하며 정칠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가까이 가보니 정칠은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덜덜 떨고 있다.
철두는 피식 웃었다.
“저 괴상한 늙은이가 원인이냐? 왜 개장수 만난 똥개 시늉인 거냐?”
“야... 야 빨리 온고당에 가서 부운이 불러와라.”
정칠은 철두에게 사과를 안기며 흥분해서 말했다.
“부운이 새끼를 불러오라고?”
철두는 정칠이 건네는 사과를 받으면서 어리둥절했다.
“잘 하면 한 달 동안 장씨 영감 장사 돕는 쪽팔리는 짓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정칠은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녹발벽안의 노인을 따라갔다.
“저 새끼가 뭔 소리를 씨부리는 건지 감이 안 오는군.”
녹발벽안의 노인을 몰래 따라가는 정칠을 보며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정칠이 아주 없는 소리 지어내는 놈은 아니니 믿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영감,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오겠수다.”
철두는 사과를 좌판에 내려놓았다.
“잠깐 다녀오지 말고 가서 아주 오지 말어. 네놈들이 바람 잡는다고 안될 장사 잘 되는 거 아니니까.”
정씨 노인이 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도 그러고 싶소. 어쨌든 다녀오겠수다.”
철두는 뛰듯이 성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여간 온고당 조영감의 손자가 난 놈은 난놈이야.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저 왈짜 놈까지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걸 보면...”
정씨노인은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철두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금릉의 번화가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해하촌의 시장통도 제법 북적 대고 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구경이나 소일거리 삼아 해하촌을 찾는 외부 손님들이 적지 않다.
온고당 앞에서는 분이가 한 쌍의 남녀를 상대로 흥정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부유해 보이는 뚱뚱보 중년인과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은 기생 분위기의 여자다.
가게 안쪽 응접실에서는 부운이 탁자 앞에 서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탁자 건너편에는 조노인, 천불투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부운은 족자로 만들만한 긴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털옷을 걸치고 비파를 품에 앉은 미녀가 말에 탄 채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유목민 행색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미녀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며 짐을 이고 진 궁녀와 하인들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모두 울상인 궁녀와 하인들 뒤로 유목민 기마병들이 따라간다..
(불가사의로다. 단 한번 본 그림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려지는 그림을 보며 천불투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부운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탁자 위에는 둘둘 말려진 두루마리가 하나 놓여있다.
부운은 그 두루마리의 그림을 한 번 본 후 똑같이 모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건 보는 눈이 탁월하세요 손님.”
부운의 그림 솜씨에 감탄하던 천불투의 귀에 분이의 낭랑(朗朗)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옥두꺼비는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아끼던 물건이라고 해요.”
돌아보니 분이가 뚱뚱보 중년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주먹만한 크기의 옥두꺼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양산을 쓴 기생은 지루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오오! 이게 풍류황제(風流皇帝)로 이름난 휘종 조길(趙佶)의 애장품이란 말이지?”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휘종이 풍류황제라 불린다는 것과 휘(諱)가 길(佶)이란 것까지 아시고... 손님, 정말 박학다식하시네요.”
분이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어흠! 내가 역사와 예술에 조예가 깊긴 하지.”
분이의 찬사를 들은 중년인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림을 그리던 부운은 피식 웃었다.
천불투도 쓴웃음을 지었다.
분이가 사람 비위 맞추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두꺼비들은 한 쌍이었는데 어제 최상서(崔尙書) 댁의 둘째 공자님께서 한 마리를 업어갔지 뭐에요?”
분이의 안타까워하는 말이 이어졌다.
“최상서댁의 이(二)공자께서 한 마리를 가져갔다고?”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래는 둘 다 가져가고 싶어 하셨지만 마침 갖고 계신 돈이 얼마 없으시다면서 한 마리만 데려갔어요. 조만간 다시 들르셔서 가져간다고 하셨는데 오늘은 아직 안 보이시네요.”
분이는 길거리를 살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물론 다 지어낸 말이다
“그... 그래서 이걸 얼마에 팔려고 내놓은 것이냐?”
중년인이 조바심을 내며 흥정을 걸어왔다.
“할아버지! 이 옥섬(玉蟾;옥두꺼비) 얼마에 팔까요?”
분이는 기다렸다는 듯 가게 안쪽에 대고 외쳤다.
천불투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사백 냥? 알았어요.”
분이가 즉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백 냥?)
(가짜 옥돌로 만든 조잡한 두꺼비 가격이 금릉 성내의 기와집 한 채 값...?)
부운과 천불투는 어이가 없었다.
기세를 탄 분이가 흥정을 이어갔다.
“주인 할아버지가 사백 냥 말씀하시는데... 에이 기분이다. 백 냥 깎아드릴게요.”
“이 귀한 걸 삼백 냥에 주겠다고?”
감격한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백 냥 중 백 냥쯤은 제게 떨어지는 판매수당이에요.”
분이는 그런 중년인에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손님 인상이 너~무 좋으시고 또 오늘 마수걸이라 남기는 거 없이 드리는 거예요.”
분이는 눈웃음을 치며 팔꿈치로 뚱보를 슬쩍 치기까지 했다.
“허어! 꼬마 아가씨가 배포도 크고 호탕하구만.”
중년인은 입이 귀에 걸려서 전낭(錢囊)을 꺼냈다.
“자! 신용도 으뜸인 대륙전장(大陸錢莊)에서 발행한 전표(錢表;지폐)다.”
중년인은 전낭에서 빳빳한 종이 세장을 꺼내 내밀었다. 중원의 삼대전장(三大錢莊) 중 하나인 대륙전장에서 발행한 전표들이었다.
“고마워요 손님. 귀한 옥섬을 손에 넣으셨으니 머잖아 떡두꺼비같은 아드님을 얻으실 거예요.”
분이는 두 손으로 전표를 받으며 기생에게 눈웃음을 쳤다.
“그... 그렇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
중년인은 헤벌레 하며 기생을 끌어안았다.
“어린 동생이 혀에 꿀을 발랐네.”
기생도 눈을 흘기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또 들려주세요.”
분이는 끌어안고 가게 앞을 떠나는 중년인과 기생 뒤에 대고 간드러지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분이가 오늘도 한 건 했어요.”
그리고는 신이 나서 가게로 들어왔다. 전표를 흔들면서...
“장사 수완이 좋은 건지 사기를 잘 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구나.”
천불투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네 냥에 팔아도 남는 조잡한 옥섬을 삼백 냥에 파는 건 지나치지 않느냐?”
“뭐 어때요? 골동품이란 게 원래 정해진 가격이 없는 거잖아요. 아까 그 손님에게는 옥섬이 삼백 냥 이상의 값어치를 할 걸요?”
분이는 천불투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표들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네가 번 돈이니 네가 가져라.”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그냥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분이는 전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양하지 말고...”
“어서 오세요 손님!”
천불투가 다시 권하려는데 분이는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며 외쳤다. 또 몇 명의 손님들이 가게 밖에 진열된 골동품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찬찬히 둘러보세요. 저희 온고당이 비록 이런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긴 해도 물건 구색으로는 금릉 성내의 어떤 골동품 가게보다도 다양하답니다.”
분이가 손님들에게 가게 자랑을 시작했다.
“분이 저년 요즘은 온고당에서 아예 사는구만.”
“자기 가게처럼 장사를 하고 있어.”
지나가던 마을 여자들이 손님들에게 물건을 권하고 설명하는 분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온고당 주인 조영감의 외손자 부운이 때문이야.”
“부운이가 왜?”
“왜긴 왜야? 조영감에게 잘 보여서 손주며느리 자리 차지할 꿍꿍이지.”
“옳거니! 부운이하고 잘 되어 보려고 제 어미가 하는 선술집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온고당에서 사는구만.”
여자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눈으로 분이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요즘은 분이가 부운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구나.)
가게 밖에서 손님들 상대하는 분이를 보며 천불투는 생각에 잠겼다.
(하긴 이곳 해하촌에서 부운이만큼 계집아이들의 마음을 잡아끌 사내 녀석은 없긴 하지.)
천불투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부운이가 언제까지 해하촌에 머물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분도 다르고 사는 세계도 다르니 필연적으로 분이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부운이에 대한 분이의 마음이 더 영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천불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다 그렸어요.”
부운이 붓을 그림에서 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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