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1. 18:44 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23화 어라, 그쪽 속곳이 왜 내 손에...
23화
어라, 그쪽 속곳이 왜 내 손에...
(이게 무슨... 경신술 덕분에 날수비연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내가 떨쳐버릴 수 없는 상대라니...)
신소심은 경악하면서도 양쪽 허리에 차고 있는 칼들을 뽑았다.
그녀는 빼어난 경신술 뿐만 아니라 신랄하고 치명적인 도법으로도 이름을 날려왔다.
스악! 쩍!
신소심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수많은 칼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경신술과 도법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이크!”
부운은 짐짓 비명을 지르면서 신소심의 뒤쪽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움직였다.
그가 익힌 삼보면천은 은밀한 것과 함께 타인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게 장점이다.
그 바람에 신소심이 아무리 빨리 몸을 돌려도 부운을 볼 수가 없었다.
직접 볼 수 없으니 신랄한 도법으로도 부운을 어쩌지 못한다.
“크아!”
팽! 팽!
악에 바친 신소심이 양손의 칼들을 교차해서 좌우로 던졌다. 그녀가 쓸 수 있는 최강의 절초 비도회륜참(飛刀廻輪斬)이 펼쳐진 것이다.
가가강! 스악!
두 자루 칼은 맹렬히 휘돌며 신소심 뒤쪽을 따라 돌던 부운을 베어갔다.
비도회륜참은 일종의 어검술이라 칼이 손에서 떠난 후에도 내공으로 조종할 수 있다.
“어이쿠! 나 죽네!”
부운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스악! 사악!
좌우에서 날아들던 칼들은 간발의 차이로 부운의 머리와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잡을 수 있다!)
신소심은 부운의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홱 몸을 틀며 양손을 휘저었다.
가가강! 기잉!
부운을 스쳐 지나갔던 칼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신소심에게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소저의 칼춤 추는 솜씨는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
신소심의 귀에 부운의 속삭임이 들렸다. 두 자루 칼이 신소심의 손에서 떠나길 기다린 부운이 등 뒤로 바짝 달라붙었던 것이다.
“크아!”
신소심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부운을 뒤통수로 들이받으려 했다.
볼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공격해야했다.
“하하하! 이 정도로 해둡시다!”
부운은 껄껄 웃으며 뒤로 확 멀어졌다.
신소심은 그제야 부운을 볼 수 있었다.
휘익!
뒤로 날아간 부운은 십여장 떨어진 건물 지붕 위에 내려서고 있었다.
“죽인다!”
신소심은 되 날아든 칼들을 받아들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더라도 초면에 죽이니 마니 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소?”
부운은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이 자초한 화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오늘 여기서 너 아니면 내가 세상 하직...”
이를 갈며 부운을 노려보던 신소심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 직후였다.
‘자자 진정하시오 소저! 내가 이렇게 사과하겠소!“
너스레를 떨며 포권하는 척 하는 부운의 양손에는 각기 한가지씩의 물건이 들려있었다.
오른손에는 반으로 접은 작은 봉투가 들려있다.
왼손에는 붉은색의 상당히 큰 사각형 천이 들려있는데 네 귀퉁이에는 긴 끈이 달려있다.
(저... 저건...!)
부운이 들고 있는 붉은 천을 본 신소심은 숨이 콱 막혔다.
동시에 그녀는 가슴 부분이 왠지 서늘한 것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잘 여미고 있던 저고리가 벌어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골이 상당히 깊어 보인다.
”흑!“
신소심은 기겁하며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소저가 지닌 물건들 중 이 봉서(封書)가 가장 귀중한 것같아서 실례를... 어!”
봉투를 흔들면서 너스레를 떨던 부운의 눈이 왼손을 돌아보며 휘둥그래졌다.
“어라! 봉투만 꺼내려 했는데 이 천까지 딸려 나왔군.”
부운은 붉은 천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맹주님의 지령서(指令書) 뿐 아니라 내 속곳까지 순식간에 빼내갔어!)
양팔로 가슴을 가린 채 신소심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치를 떨었다. 부운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붉은 천은 신소심이 젖가슴을 가리고 있던 속곳이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걸. 대체 무엇에 쓰는 천일까?”
킁! 킁!
부운은 한술 더 떠 붉은 속곳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내놔!”
투학!
악에 바친 신소심이 부운에게 쇄도하며 칼질을 했다.
“으악!”
부운은 신소심의 칼질에 몸이 세 토막 나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부운을 벤 직후 신소심은 섬뜩해져서 급히 건물 용마루 위에 멈춰 섰다.
(분명 베었는데 칼 끝에 걸리는 게 없다!)
신소심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뒷걸음질 칠 때였다.
스스스!
세 토막이 쳐진 부운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펄럭!
그와 함께 허공에서 신소심의 붉은 속곳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역시!)
신소심은 이를 갈며 칼들을 칼집에 넣었다.
(내가 벤 것처럼 보였던 건 엄청난 속도로 몸을 흔들어 일으킨 놈의 잔상(殘像)이었다.)
신소심을 허공에서 떨어지는 붉은 속곳을 낚아채며 이를 갈았다.
“죽일 놈의 색귀야! 네놈이 주변에 숨어있는 거 안다.”
속곳을 회수한 신소심을 주위를 둘러보며 악을 썼다.
“날 우롱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으아아아!”
휘익!
악에 바친 신소심은 고함을 지르며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뭐야?”
“무슨 소리야?”
“어떤 미친년이 한 밤중에 악을 쓰고 지랄이야?”
근처의 건물들에서 불이 켜지며 주민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장난이 조금 심했나?”
멀어지는 신소심을 보며 부운은 머쓱해졌다.
그가 있는 곳은 손부 근처 어느 저택의 정원이다.
정성들여 가꾼 정원에는 밤이 깊은 탓에 인적은 없다.
(성격이 드세고 무공도 범상치가 않다. 그럼에도 도척총림에서 매년 발행하는 강호인명록에는 등재되어있지 않았다.)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 신소심을 떠올리며 부운은 복면을 벗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백대고수(百大高手) 안에도 낄 수가 있을 텐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도척총림의 요주의 대상에 들지 않은 것일까?)
부운은 복면을 품속에 넣으며 근처의 정자로 올라갔다.
(무려 속곳 안쪽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편지라면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은 부운은 봉투에서 편지를 한 장 꺼냈다.
<지령(指令) 일(一); 팔비나타 당천성의 여식 당아연의 행방을 찾는데 전력을 경주할 것.
지령(指令) 이(二); 천마련의 사신마재(四神魔才)의 넷째 사사천(史使天)이 황태자의 측근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온 정황이 포착 됨. 사실 여부를 탐문하되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검후(劍后)>
편지에 적혀있는 내용은 이러했다.
(그 여자...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일지도 모르겠구나. 무림맹의 현 맹주인 검후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은 걸 보면...)
부운은 읽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운도 세상 모든 도둑들의 결사인 도척총림에 속해있다.
덕분에 현 무림의 상황도 잘 알고 있다.
무림맹과 격돌했다가 패망 직전까지 몰렸던 천마련은 극적으로 재기하여 무림의 패권을 차지했다.
십팔 년 전 있었던 무림맹 맹주 사자천존 초천강의 이해 못할 은퇴의 결과였다.
천마련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련주인 철면마존 섭장천(葉長天)은 명실상부 무림의 패자가 되었다.
(도척총림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무림맹은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다. 사자천존을 보위하던 사대장로를 중심으로 재건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운은 편지를 다시 넣은 봉투를 눈앞으로 들었다.
(재결성되고 있는 무림맹의 신임 맹주는 검후라는 여자인데... 이름이 대려화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봉투를 들고 집중하니 그것을 만졌던 인간들이 떠오른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에 검후 대려화로 보이는 여자는 없었다.
편지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개방에서 작성하여 발송한 것이었다.
(천마련에서도 장차 자신들의 강호 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검후 대려화의 정체를 알아내려 무진 애를 써오고 있지만 성과가 없다던가?)
부운은 봉투에서 시선을 떼며 생각에 잠겼다.
(직접 지령을 받은 걸 보면 아까 그 여자는 검후 대려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속곳을 돌려주지 말 것을....)
부운은 입맛을 다셨다. 신소심의 속곳을 갖고 있었다면 그걸 통해서 검후 대려화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편지에는 범상치 않은 이름들이 언급되어 있다. 사신마재, 황태자등의 이름이 그것인데...)
봉투를 가볍게 흔들며 부운은 생각에 잠겼다.
철면마존은 네 명의 제자를 두고 있다.
삼남일녀(三男一女)인 그들은 사신마재라 불리는데 이론의 여지도 없이 마도무림의 최고 인재들이다.
철면마존은 칠순을 넘겼지만 슬하에 후손이 한 명도 없다.
이에 후사가 걱정이 된 철면마존이 고르고 골라 거둔 제자들이 사신마재다.
자연스럽게 사신마재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철면마존의 제자들 중 막내인 사사천이 황태자의 측근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라...)
부운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걸터앉아있던 정자 난간에서 일어났다.
(천마련이 마침내 황실의 후계자 다툼에까지 개입한 것일까?)
일어난 부운은 한쪽의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월동문 밖에서 불빛이 어른거린다. 순찰을 도는 호원무사들일 것이다.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할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봐야겠다.)
스스스
걸음을 옮기는 부운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직후 월동문을 통해서 두 명의 호원무사가 들어왔다.
“헉!”
등을 들고 앞장서서 들어오던 자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정자 안에서 뿌옇게 흐려지며 사라지는 부운의 형상을 본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뒤따라오던 자가 앞쪽을 기웃거렸다.
“저기... 저기 유령이...”
등을 든 자가 달달 떨며 정자를 가리켰다.
“유... 유령?”
뒤따라오던 자 역시 겁에 질리면서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물론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구만.”
“분... 분명 정자에 사람 그림자가 있었단 말일세.”
“계집 좀 그만 밝혀! 허구 헌날 기루나 드나드니 기가 허해져서 헛 게 보이는 게 아닌가?”
“헛 걸 본 게 아닌데...”
호원무사들의 쓰잘데 없는 대화를 들으며 부운은 지붕 위를 걷고 있었다.
(오늘밤에도 색마살귀의 종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비참해질 뻔 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구원해주었으니 헛고생을 한 건 아니다.)
발걸음이 용마루 끝을 벗어난 부운의 몸은 허공으로 깃털처럼 날아올랐다.
(그 여자, 환장하게 예쁘긴 했지.)
손자경의 인형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부운은 침을 꼴깍 삼켰다.
손자경이 한번 본 부운을 영영 잊지 못하듯 부운도 손자경의 이 세상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여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손자경은 오직 부운 생각뿐이지만 부운에게 손자경은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부운에게는 평생 지켜줘야 하고 또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자는 분이다.
그렇다고 부운에게 중요한 여자는 분이뿐만이 아니다.
(새벽이 멀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고 계실 테니 서둘러 돌아가야만 한다.)
휘이익!
뿌옇게 변해 해하촌을 향해 날아가는 부운의 모습은 호원무사가 말한 대로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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