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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공(武功)을 건 내기

 

 

 

금릉을 에워싼 성벽 남쪽에 해하촌(蟹蝦村)이란 마을이 있다.

금릉 성내에서 살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른 바 빈민가다.

해하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게()나 새우() 같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비록 삶이 곤궁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이긴 해도 제법 활기가 넘친다.

좁은 골목에서는 헐벗고 꾀죄죄한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조금 넓은 길에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술집, 옷가게, 잡화점, 푸줏간, 대장간등 없는 업종을 찾아보기 힘든 나름대로의 시장이다.

여러 가게들 중에는 골동품점도 있다.

입구에 걸린 낡은 간판에는 <溫故堂(온고당)>이라는 글이 고풍스러운 서체로 적혀있다.

가게 앞 좌대에는 각가지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외지에서 온 듯한 손님들이 골동품들을 구경하고 만지기도 하지만 응대하는 점원은 없다.

점원은 없어도 주변의 다른 가게 주인들이 보고 있어서 손님들이 허튼 생각은 못한다.

 

온갖 골동품과 잡동사니가 가득한 가게 안쪽에는 응접실 같은 공간이 있다.

응접실 끝에는 방 두 칸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안채가 있다. 안채의 뒤쪽은 금릉을 지키는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막혀있다.

응접실 가운데 놓인 탁자에 노인과 소년이 마주 앉아있다.

얼굴이 주름으로 덮여있는 노인이 온고당의 주인 조()노인이다.

소년은 균형 잡힌 몸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녔다. 항상 웃는 얼굴이라 누가 보면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자란 귀한 집안 자제라 여길 것이다.

부운(浮雲)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조노인의 외손자다.

삼대삼(三對三)... 드디어 할아버지를 따라잡았네요.”

달각 달각

부운은 주사위 두 개가 들어있는 사발을 흔들며 웃었다.

조손(祖孫)은 주사위로 내기를 하는 중이다. 주사위 두 개의 점수를 고하(高下)로 가리는 간단한 내기다.

처음에는 조노인이 일방적으로 이겼다.

하지만 부운은 네 번째 판부터 연승을 해서 마침내 동점을 만들었다.

한두번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세 번이나 거푸 이긴 걸 보면 할애비가 모르는 술수를 부렸겠구나.”

조노인은 진무른 눈을 가늘게 뜨며 외손자의 표정을 살폈다.

술수라니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걸요.”

!

부운은 능청맞게 웃으며 주사위가 든 사발을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

떼구르르... 달칵

사발 안의 주사위들이 구르다가 멈추는 소리가 조노인의 귀에 들렸다.

(()과 오()구먼.)

조노인은 보지 않고도 주사위들의 점수를 알아차렸다.

조노인의 청력(聽力)은 매우 뛰어나다. 수천, 수만 번 금고를 열어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능력이다.

조노인은 주사위 아랫면이 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의 미묘한 차이만으로도 숫자를 구분할 수 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네 번째부터는 연이어 외손자놈에게 지고 있는 중이다.

(분명 뭔가 수작을 부렸는데 짐작이 가지 않는구만.)

조노인은 사발을 누르고 있는 외손자의 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이 마지막 승부이니 내기의 조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죠.”

부운이 사발에서 손을 떼며 싱글거렸다.

할아버지는 제게 투도(偸盜;도둑질)의 재주 외에는 제대로 된 무공을 한 가지도 안 가르쳐주셨죠.”

부운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조노인은 수많은 종류의 무공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외손자에게 가장 기초적인 내공심법인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과 삼보면천(三步免天)이라는 보법만을 가르쳐주었다.

외손자가 다른 무공도 가르쳐달라 조를 때마다 조노인은 아직 때가 안되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부운은 주사위 노름으로 내기를 건 것이다. 자신이 이기면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할애비가 네게 내공심법과 보법 외의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게다.”

조노인은 탁자 가운데에 엎어져 있는 사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손자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싸움에 쓸 수 있는 무공을 배우면 도망쳐야할 때 도망치지 않고 객기를 부릴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요.”

부운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면 되었다.”

조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무공을 배우려면 한 분야에서 최강인 것을 배워야만 한다. 어설픈 무공은 목숨도 어설프게 만들 뿐이다.”

오대신투(五大神偸)에 드는 할아버지시니 최강의 무공도 몇 가지쯤은 알고 계실 텐데요?”

부운이 외조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왜소하고 노쇠해 보이지만 조노인은 사실 세상을 통틀어도 가장 뛰어난 다섯 도둑 중 한명이다.

훔치기로 작정한 물건은 반드시 훔쳐서 천불투(天不偸), <못 훔치는 건 오직 하늘뿐이다.>라는 대단한 별호로 불려왔다.

부운은 철들기 전부터 외조부로부터 온갖 투도술(偸盜術)을 배웠다.

재능이 있었고 또 재미도 느껴서 부운은 도둑질하는 방법의 수련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덕분에 열여섯 살 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외조부 못지않은 투도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금릉 일대 부호들은 황당한 도둑질에 시달려왔다. 어떤 도둑이 잠입하여 가장 아끼는 보물에 흔적을 남기고 가는 일이 빈발한 것이다.

도둑은 보물은 훔쳐가지 않는다.

대신 보물의 진가(眞假)를 평가하고 사라진다.

가짜이면 가()라는 글자를 보물에 새겨놓고 진짜라면 보물에 얽힌 사연과 이력을 적어서 남긴다.

보물의 주인들은 놀라고 낙심하지만 도둑에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보물에 손을 대긴 해도 훔쳐가진 않으니 화를 낼 수도 없다. 그저 체면이 조금 손상되는 피해를 입은 것 뿐이다.

오히려 그 도둑이 방문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부호들도 있었다.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쉽사리 이해 못할 도둑질을 해오고 있는 그 도둑에게는 진가대도(眞假大盜)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부운이 바로 그 진가대도다.

 

어떤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조노인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부운은 눈을 반짝이며 즉시 대답했다.

무공을 익혀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아요. 무기 대신 손이나 발을 쓰는 무공이면 좋겠어요.”

금룡신나수(擒龍神拿手)나 백보신권(百步神拳) 정도인가?”

조노인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금룡신나수와 백보신권은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잖아요.”

부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할아버지, 소림사의 장경각(藏經閣)을 터신 적도 있으셨어요?”

부운이 흥분하여 물었지만 조노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도둑들에게 소림사 장경각은 반드시 들려야하는 맛집 같은 곳이다. 수많은 고수들이 지키고 온갖 보안장치들로 덮여있는 장경각에 잠입했다가 들키지 않고 빠져나와야만 도둑다운 도둑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소림사는 천하무림의 본산이고 장경각은 소림사의 심장부다. 장경각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할지는 따로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무림에서 활약하는 도둑들에게 소림사 장경각을 털어보는 건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로라하는 도둑들이 소림사 장경각에 도전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참회동(懺悔洞)에 갇혀있다.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했었다는 증거로 무공비결 한 가지를 필사(筆寫)해서 갖고 나와야 한다.”

조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을 터셨군요.”

부운이 흥분해서 눈을 반짝거렸다.

결판을 내자. 할애비는 고()에 걸겠다.”

조노인은 사발을 손으로 덮으며 화제를 돌렸다. 영악한 손자놈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려면 직접 사발을 열어야한다.

그럼 저는 어쩔 수 없이 하()에 걸어야겠네요.”

부운은 양손으로 탁자를 잡으며 태연하게 웃었다.

(저 녀석이 어째 너무 태연한 걸? 제 놈도 주사위의 합이 팔()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조노인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며 사발을 뒤집었다.

부운의 청력도 조노인 자신에게 못지않다.

당연히 주사위의 점들이 삼()과 오()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태연자약 하는 외손자의 태도가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달칵!

사발이 작은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그러자 드러난 주사위들의 윗면에는 세 개와 두 개의 점이 있었다.

허어...”

조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흘렸다.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섯 개의 점이 찍혀 있어야할 주사위에 두 개의 점만이 찍혀있다.

아싸! 이제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부운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무얼 익힐까? 누구라도 잡아 족칠 수 있다는 금룡신나수? 백 걸음 밖에서도 바위를 박살낼 수 있다는 백보신권?”

부운은 드디어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입이 귀에 걸렸다.

두 가지 다 배우고 싶지 않으냐?”

조노인은 좋아 죽으려는 손자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둘 다 가르쳐주시게요?”

부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신 어떻게 오()를 이()로 바꿨는지 실토해라.”

, 그건 나만의 영업비밀인데...“

외조부의 제안을 들은 부운은 짐짓 난감한 척 했다.

조노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싫으면 관두고... 대신 네 녀석과는 두 번 다시 내기 하지 않을 게다.”

금룡신나수와 백보신권을 모두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한번 뿐이라는 얘기다.

어쩔 수 없네요.”

부운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이 비밀만은 숨기고 싶었는데....”

말하던 부운은 입을 다물었다. 외조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가게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운오빠!”

외조부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던 부운의 귀에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큰일... 큰일 났어 오빠!”

물건이 가득 쌓인 가게를 지나 놀란 토끼처럼 응접실로 뛰어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철두와 정칠이란 악동들이 망산쌍독에게 잡혀가는 걸 보고 있던 그 소녀였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분()이야?”

부운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분이라는 소녀는 근처에서 주점을 하는 과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한 살 많은 부운을 오빠처럼 따랐다.

가면서... 가면서 얘기할게! 빨리 나하고 같이 가!”

와락 달려든 분이가 부운의 팔을 잡으며 할딱거렸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그러다가 뒤늦게 조노인을 돌아보며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참 빨리도 아는 척 하는구먼. 네 녀석 눈에는 그저 부운이만 보이겠지?”

조노인이 혀를 찼다.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분이는 부운을 가게쪽으로 끌고 갔다..

급한 일이 생겼어요. 부운오빠 좀 빌려갈게요.”

오냐! 잘 쓰고 돌려주려무나.”

조노인은 가보라고 손짓하며 웃었다.

내가 물건이냐? 빌려가게?”

분이에게 끌려가며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큰일 났다는 게 무슨 소리냐?”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험상궂은 사람들에게 끌려갔어.”

분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부운의 고요하던 눈에 번뜩 빛이 스쳐지나갔다.

탁자 위의 주사위를 챙기던 조노인도 힐끔 돌아보았다.

구하러 가는 게 늦으면 철두오빠와 정칠 오빠가 죽을 지도 몰라.”

분이가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녀오겠습니다.”

부운은 골동품들 사이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하나 집어들며 외조부에게 말했다.

오냐!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겠다만 조심하거라.”

조노인은 당부를 흘려들으며 부운은 서둘러 가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분이도 울먹이며 다람쥐처럼 부운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골목대장 노릇도 쉽지가 않구먼. 똘마니들의 말썽이 끊이질 않으니...”

조노인이 고개를 설레 저을 때였다.

<아버님!>

덜컹!

누군가 안채에서 문을 열고 나오며 조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육성(肉聲)이 아니라 내공을 이용하여 뜻을 전하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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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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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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