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0. 17:52 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22화 비익조의 꿈
22화
비익조(比翼鳥)의 꿈
손부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어둑한 주변 다른 저택들과 달리 대낮같이 환한데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불빛들도 있었다.
손자경의 거처 앞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녀들은 울고 있고 하인들은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자신들이 모시던 아가씨가 잘못된 게 확인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천금같은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으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게 주인을 섬기는 인생들의 숙명이다.
“어쩜... 어쩜 좋아? 아가씨가 정말 색마살귀에게 납치된 거라면 어떻게 해?”
“재수 없는 소리 하지마! 선녀처럼 착한 아가씨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 없잖아.”
하녀들은 울기도 하고 서로를 타박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고 긴장하며 한쪽을 보았다.
바깥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월동문으로 한 노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대쪽같은 인상에 관복차림인 그 노인이 태자태부 손충이다.
손충 뒤로는 늙은 집사와 손부를 지키는 호원무사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정의 일로 바빠서 퇴청을 못하고 있던 손충이 집사가 보낸 하인으로부터 급보를 받고 서둘러 귀가한 것이다.
“주... 주인님!”
“주인님을 뵈옵니다!”
하녀와 하인들은 겁에 질려 허리를 꺾었다.
“설명해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충이 딸의 거처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이... 이각(二刻) 전쯤이었사옵니다. 주무시기 전에 드시는 탕제를 갖고 왔는데... 그때 이미 아가씨는 보이지 않으셨사옵니다.”
하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손충의 눈치를 보며 보고했다.
손충이 따라온 늙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외적이 침입했던 흔적이 있었는가?”
집사가 비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흉수가 이런 짓에 경험이 많은 자였는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관부에는?”
“아직... 부주님께서 퇴청하시면 지시를 받는 게 옳을 듯하여...”
“잘 했네. 집안 일로 나라에 폐를 끼치는 것은 불충(不忠)! 우리 집안 힘만으로 자경이를 찾아야하네.”
듣고 있던 나이 든 하녀가 울먹거렸다.
“하... 하지만 아가씨를 촌각이라도 빨리 구해드리려면 관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늙은 집사도 주인의 눈치를 보며 거들었다.
“아가씨의 안위가 우선이니 관부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떠할런지요?”
하지만 손충은 단호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집안 일로 나라에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예...”
집사와 하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몹쓸 일을 당했다면 그것도 자경이의 운명이겠지.”
손충은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하녀와 하인등이 참담하여 모두 고개 떨굴 때였다.
“무슨 일인가요?”
덜컹!
갑자기 손자경 거처의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안에 변고라도 생겼는가요? 이 늦은 시간에 모두 깨어있다니...”
머리가 헝크러졌고 몸에는 잠옷을 걸친 소녀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 아가씨!”
“아가씨!”
하녀와 하인들이 비명처럼 자지러졌다. 잠옷 차림의 소녀가 자신들의 아가씨 손자경이었기 때문이다.
손충은 허연 눈썹을 찡그렸지만 딱히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되신 건가요?”
“납치당하셨던 게 아니셨는가요 아가씨?”
하녀들이 창문 쪽으로 달려가며 울음을 터트렸다.
“납치당하다니 무슨 소리야?”
손자경이 하녀들을 내려다보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옷장 가장 안쪽에 누워있었어.”
손자경은 헝크러진 머릿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그... 그런...”
“옷장 속에 쓰러져 계신 것도 모르고...”
“다행이에요! 정말 잘 되었어요 아가씨!”
하녀들은 창문 앞에 모여 펑펑 울었다. 개중에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버지, 소동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손자경은 부친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었으면 되었다. 밤도 늦었으니 그만 자도록 해라.”
손충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딸의 인사를 들으며 손충은 뒷짐을 짚고 월동문으로 걸어갔다.
늙은 집사도 호원무사들과 하인들을 손짓으로 불러 손충의 뒤를 따라갔다.
하녀들도 대부분 흩어지고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 몇 명만이 서둘러 손자경의 거처로 들어갔다.
(아닌 척하셨지만 따님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셨었구나.)
늙은 집사는 손충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뒷짐 쥔 손충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자경이 거처의 경비를 배로 늘려라.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소동이 벌어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월동문을 나서며 손충이 말했다.
(두번 다시라...)
(태부께서는 자경아가씨께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손충의 지시를 들은 늙은 집사와 호원무사들은 깨달았다. 어떤 경로로 무사히 귀환했는지 모르지만 딸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었다는 걸 자신들의 주인이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
“난 그만 자야겠어. 놀라셨을 어머니에게는 너희들이 가서 말씀드려라.”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던 손자경이 침실을 정리하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예 아가씨.”
“안녕히 주무세요.”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고마워요 은공.)
혼자가 된 손자경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오늘 밤 그녀는 너무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
납치당해 발가벗겨졌으며 외간 사내들의 징그러운 손에 온몸을 유린당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규중처자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모였고 공포였다.
충격이 너무 커서 미쳐버렸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손자경은 정신을 놓지도, 공황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준 신비한 사내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마치 동화나 옛날이야기의 영웅처럼 위기의 순간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에게 안겨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하면서 이보옥 일행에게 당했던 만행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황홀해서 잠시 전에 겪었던 일들 따위는 아스라이 잊혀졌다.
그 사람은 자신을 품에 안고 하늘 끝까지라도 날아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손자경에게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 사람과 비익조(比翼鳥;암수의 날개가 한쪽뿐인 전설 속의 새)가 되는 것이었다.
(그분은 누구였을까? 정말 인간이긴 하신 걸까?)
부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뛴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유실(乳實;젖꼭지)들은 너무 단단해져 아플 지경이다. 다리 사이 깊은 곳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리고...
부운에게 알몸을, 심지어 가랑이를 벌려 은밀한 부분을 보인 것조차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걸 그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안돼! 무슨 망측한 생각을...)
손자경은 세차게 머리를 저어 부끄러운 망상을 떨쳐버렸다.
(은공께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를 데려다 주신 덕분에 쓸데없는 뒷말이 생기지 않게 되었어.)
손자경은 억지로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집중했다.
자신을 범하려던 이보옥은 고자가 되는 변을 당했다.
하지만 그자의 애비 이세창도 이보옥이 고자가 된 경과를 감히 자신과 연관지어 폭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황실의 노여움을 입어 첩혈당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 손부야 첩혈당과의 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은공은 그자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어.)
그저 예쁘기만 한 게 아닌 손자경은 부운을 걱정하고 있었다.
흑사회의 인간들은 무림인들과는 또 다르다.
무림인들은 정파건 마도건 나름대로의 명분을 중시하고 규율도 존재한다.
하지만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인생들에게는 인의도덕도 대의명분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이해득실과 은원관계만 따질 뿐이며 한번 맺은 원한은 반드시 되갚음을 하고야 만다.
관부, 심지어 황실조차 흑사회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그 독하고 악랄한 속성 때문이다.
관부고 황실이고 구성원은 개개인일 뿐이다.
자신과 가족들이 흑사회의 표적이 되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무시하고 흑사회와 대놓고 척을 질 수 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첩혈당 당주 소면첩혈 이세창은 외아들을 고자로 만든 부운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점이 손자경을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분이 첩혈당 따위에게 해를 입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손자경은 화끈거리는 두 볼을 가녀린 두 손으로 가렸다.
어느덧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운은 신선(神仙)이나 신장(神將)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신선이나 신장이 하찮은 인간들 따위에게 해를 입을 리는 없다.
(과연 은공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선같은 무공을 지닌 것에 비해 나이는 젊어서 내 또래인 것같았는데...)
손자경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두손을 모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을 지난 둥근 달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부디 은공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달님!)
손자경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
(저 계집이 자길 구해준 인간에게 제대로 반했네.)
두 볼이 발개진 채 무언가 기원하고 있는 손자경을 보며 실소를 흘리는 여자가 있었다.
날수비연 신소심이었다.
그녀는 손자경의 거처가 멀리 보이는 건물 지붕 위에 서있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밟아봤는데 그자는 허튼 짓 하지 않고 저 계집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신소심은 한 시름 덜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자경을 안고 날아가는 부운을 추적했었다.
부운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혹시 부운이 손자경에게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다행히 부운은 진회하에서 곧장 손부로 날아와 손자경을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거처에 들여보내 주었다.
“천마련의 세상이 되어 도의가 바닥에 떨어진 작금의 세태에서는 보기 드문 인간인데... 과연 그자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하구나.”
신소심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였다.
“나도 소저의 정체가 궁금한 걸?”
갑자기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신소심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밤손님이라는 직업상 뒤를 밟히는 건 영 기분이 찜찜하거든.”
스윽!
신소심의 어깨 너머로 검은색 복면을 쓴 얼굴이 나타났다.
물론 그 복면인은 부운이었다.
(어느 틈에...)
스팟!
신소심은 앞쪽으로 벼락같이 날아가면서 몸을 돌렸다.
자기 뒤쪽에 서있을 부운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없었다!
번개처럼 앞으로 날아가며 돌아보았지만 뒤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신술이 수준급이로군.”
스으!
등을 뒤로 하는 자세로 날아가는 신소심의 어깨 너머로 다시 부운의 얼굴이 나타나며 속삭였다.
(당... 당한다!)
팽!
소름이 돋아 숨을 멈추면서도 신소심은 다시 전력을 다해 몸을 돌렸다.
“대단해! 경신술로만 따지자면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겠어.”
부운은 팽이처럼 돌아가는 신소심을 따라서 함께 돌아가며 웃었다.
그 바람에 신소심은 여전히 부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보아봤자 복면 때문에 진면목을 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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