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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려진 거물(巨物)

 

 

 

흥륭객잔(興隆客棧)은 흥륭(힘차게 번성함)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최근 가장 성업 중인 객잔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입구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으며 식음료를 파는 식당도 북적거린다.

금릉에서 좀 논다하는 남녀들이 반드시 들려야하는 곳이 흥륭객잔이다.

 

흥륭객잔 맞은편에는 폐업 중인 상가가 있다.

포목상을 하던 가게로 장사는 잘 되었지만 영업을 안 한지 꽤 오래 되었다.

원인은 유산 다툼이다.

포목상 주인이 죽자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자식들의 욕심 때문에 성업 중이던 가게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래저래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폐업한 포목상 가게의 이층 창문 중 하나가 조금 열려있다.

한 뼘 쯤 열린 창문 틈으로 흥륭객잔을 염탐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부운 일행이다.

정칠과 철두 뿐만이 아니라 굳이 따라온 분이도 있다.

마주 선 철두와 정칠이 창문 틈에 아래위로 얼굴을 댄 채 밖을 살피고 있다.

두 놈 사이에는 분이가 쪼그려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다.

부운은 창문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손바닥만한 크기에 제법 두꺼운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저 늙은이가 정말 그 노독물(老毒物) 맞는 것 같냐?”

열린 창문 틈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밖을 살피던 철두가 정칠에게 물었다.

흥륭객잔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삼층은 모두 식당이다. 실내장식이 화려한 식당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다.

틀림없대도 그런다. 금릉 일대에서 나 정칠만큼 눈썰미 좋은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철두의 맞은편에서 정칠이 코웃음을 쳤다.

부운 오빠가 있잖아.”

창틀에 턱을 괸 채 앉아있던 분이가 눈을 흘겼다.

?”

정칠이 분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는 눈썰미 좋기론 부운 오빠에게 못 당한다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 하는 거야?”

... 그게...”

정칠은 당황하여 부운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뺀질이 정칠을 잡는 건 분이 밖에 없구나.”

철두가 고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노독물, 아직 객잔에 있냐?”

작지만 두툼한 책을 보고 있던 부운이 창문으로 다가왔다.

! 반주까지 곁들여서 밥 먹느라 아직 흥륭객잔에 머물고 있다.”

머쓱해하던 정칠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말 그 노독물인지 확인해보자.”

분이 뒤에 선 부운은 창문이 열린 틈으로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날이 더워서 흥륭객잔의 모든 창문은 열려있다. 덕분에 북적이는 식당 내부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먹고 마시는 손님들 사이에 눈에 확 띠는 노인이 있다. 특이하게 머리와 피부색이 녹색이고 눈동자는 새파란 노인이다.

정칠이 뒤를 밟았던 그 노인이다.

녹발벽안의 노인은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서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떠냐? 저 늙은이가 당금 무림의 최고고수들인 우내칠절(宇內七絶)중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맞지?”

정칠이 흥분해서 부운에게 물었다.

독천존 서래음... 못 다루는 독이 없고 누구든 독살 시킬 수 있다는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

부운은 들고 있는 작은 책을 다시 보았다.

책의 펼쳐진 곳에는 녹발벽안인 노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흥륭객잔에서 먹고 마시는 중인 노인의 모습이었다.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척총림(盜跖叢林)이라는 조직이 있다.

양상군자, 즉 도둑들의 모임으로 총수는 당대의 도수가 맡는다.

도척총림에서는 작업할 때 주의해야할 고수들의 용모파기(容貌把記)와 내력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한다.

삼년마다 한번씩 개정되는 이 책자의 제목은 강호인명록(江湖人名錄)이다.

오대신투 중 한명을 외조부로 둔 부운은 어려서부터 강호인명록을 접해왔다.

망산쌍독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강호인명록 덕분이다.

강호인명록의 맨 앞부분에는 현 무림의 최고 고수 칠인의 용모파기와 내력이 수록되어 있다.

우내칠절이라 불리는 일곱명의 절세고수들이다.

우내칠절은 각기 한 방면에서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아무리 간이 큰 도둑이라도 우내칠절을 대상으로 작업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강호인명록의 내용과 일치한다. 저 늙은이는 틀림없는 독천존 서래음이다!”

강호인명록에 그려진 초상화를 확인한 부운이 말했다.

부운은 강호인명록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고수들의 용모파기를 흑건회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었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한명이 금릉에 나타나면 작업을 해볼 생각에서였다.

강호인명록 상의 서열 백위 안에만 들어도 한 지역의 패자가 될만한 거물이다.

그랬는데 오늘 무려 무림칠절 중 한명이 금릉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싸!”

부운이 확인해주자 정칠은 주먹 불끈 쥐며 좋아했다.

“!”

그 직후 부운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칠대고수 중 한명인 독천존이 금릉에 나타난 걸 나 정칠이가 제일 먼저 알아낸 셈... !”

콰당!

신나하던 정칠은 부운의 발길질에 배가 차여 발라당 넘어졌다.

정칠을 걷어찬 부운은 철두도 옆으로 밀치며 창문에서 물러섰다.

눈치 빠른 분이는 다람쥐처럼 바닥에 몸을 굴렸다.

너 이 새끼...”

갑자기 발길질을 당한 정칠은 버럭 화를 내며 일어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부운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을 가리며 창문에서 물러서는 것을 본 때문이다.

!

분이 못지않게 눈치가 빠른 정칠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부운은 뒷걸음질 치면서 조금 열려있는 창문 틈으로 건너편 흥륭객잔을 보았다.

술을 마시던 독천존이 고개를 돌려서 부운 일행이 숨어있는 상가를 보고 있었다.

부운을 오싹하게 만든 건 독천존의 시선이었다.

(... 들켰어!)

(우리가 숨어서 자길 염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황을 알아차린 분이와 철두, 정칠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고수 중 한명이다.

밉보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이 건물에서 흥륭객잔까지의 거리는 대략 칠장(七丈;21미터) 정도... 비록 시장통이라 소란스럽긴 해도 독천존 정도의 고수라면 우리들의 대화를 걸러서 듣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부운은 창문 앞을 떠나 일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갔다.

분이등도 엉금엉금 기어 부운을 따라갔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만 한다.)

겁에 질린 분이등과 달리 부운은 흥분을 애써 누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독천존 서래음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건너편 건물을 보았다

영업을 하지 않고 있는 듯한 그 건물의 창문들 중 하나가 조금 열려있다.

별일도 다 있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까지 관심을 보이다니... 노부의 인기가 이렇게 대단했던가?”

독천존은 피식 웃으며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도 나이 든 인간들도 아니고 어린놈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지. 어쩌면 두 번 다시 금릉에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니...)

독천존은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마셨다.

 

***

 

부운은 포목상 뒷문으로 나왔다.

뒷골목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분이 등도 겁에 질린 채 부운의 뒤를 따라 건물을 나왔다.

(위험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만 시도해 봐야한다.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기만 하면 도척제전에서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니...!)

걸음을 옮기며 부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독천존 서래음은 무림인들에게는 사신(死神)과도 같은 존재다.

가공할 독공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쓰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무림인이라면 가차가 없다.

독천존에게 죄를 지었다가 한줌 독수가 되어버린 무림인의 숫자는 천명이 넘으며 멸문당한 문파도 수십 곳에 이른다.

다만 무공으로만 따질 경우 독천존이 천하제일인은 아니다.

무림칠절 서열 일, 이위인 사자천존(獅子天尊)이나 철면마존(鐵面魔尊)에 비하면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사자천존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武林盟)의 맹주였지만 지금은 은퇴한 상태다.

철면마존은 사자천존이 은퇴하면서 쇠락한 무림맹 대신 패권을 차지한 천마련(千魔聯)의 맹주다.

일천명의 절세적인 마두들로 이루어진 천마련은 사상최상의 마세(魔勢)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림칠절 중 사자천존과 철면마존 다음 서열이 독천존임은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변호에 존()이 들어가기도 해서 그들 삼인을 달리 절세삼존(絶世三尊)이라고도 부른다.

 

(독천존의 신물이라면 편복귀가 손에 넣었다는 왕희지의 서첩은 물론이고 야유귀가 내놓을 어떤 장물에도 지지 않을 것이다.)

부운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노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독천존을 노리는 것은 물론 도척제전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다.

도수가 되어야만 도척이 남겼다는 흑령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흑령장의 신통력을 빌면 어머니의 시력을 회복시켜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부운의 마음은 결의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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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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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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