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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정전야(出征前夜)

 

 

 

"내일,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죽는다."

너무도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인물은 아직 젊은 여인이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흰 반면 가느다란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목구비는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조각이 살아서 말을 하는 듯하다.

한 쌍의 눈은 가늘고 길다.

그런가 하면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고요하며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어둑한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여인의 눈빛에 동요가 떠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여인의 별호는 테츠노초우, 즉 철접(鐵蝶)이다.

오랜 세월 동영(東瀛;일본)의 밤을 지배해온 인자(忍者)들의 양대 파벌 중 이가류(伊賀)의 당대 당주(堂主)가 그녀다.

 

본래 이가류의 당주는 용사무(龍司戊)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가류는 삼 년 전에 벌어진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내분에 휘말려 멸문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용사무는 장남 용태랑(龍太郞)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가류 인자들은 용사무의 장녀이며 <강철(鋼鐵)의 나비()>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용천파(龍千波)를 자신들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게 되었었다.

 

"황제가 표적인 이상 척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역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철접 용천파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빛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가류 내에서도 엄선한 인자들답게 두려움 따위는 목숨에 대한 미련과 함께 온전히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곳은 동영이 아니라 이역만리 중원이다. 초목개병(草木皆兵)!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철접 용천파의 말에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인 그녀의 말 대로 이곳은 자신들의 고향 동영, 즉 일본(日本)이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주인을 죽이려는 처지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희망일 뿐이다.

"우리가 내일 죽는 대신 우리의 피붙이들은 막북(漠北)의 새로운 터전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고 맡겨진 바의 소임을 완수하기 바란다."

당주인 철접의 훈시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철접이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한다.

사람들도 철접을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을 한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이며 내일 치를 거사에 대한 결의의 표현이다.

절을 하는 여()인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지만 우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철접이 일어나 밀실을 나갔다.

당주가 자리를 뜬 밀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밀실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접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사내들의 짐승같은 신음이 천둥치듯 들려온다.

시노마츠리... <죽음()의 축제()>.

철접 자신은 혐오한다.

하지만 다른 인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는 광란의 축제가 밀실에서 밤새 이어질 것이다.

 

전란(戰亂)이 끊일 날 없는 동영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여자를 품게 해주는 전통이 있다.

여자를 품지 못하고 죽으면 그 미련 때문에 혼백이 성불(成佛)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인자들이 임무에 나서는 것도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인자들 역시 출정전야(出征前夜)에는 원하는 대로 여자를 품을 수 있다.

물론 여자 인자들의 경우는 남자를 구해 안기는 것이 전통이다.

극한의 쾌락에 몸을 맡기고 나면 목숨은 하찮게 느껴지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을 잊은 채 온전히 임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욕정을 해소할 대상을 밖에서 구하여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역만리 중원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상대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자칫 자신들이 내일 치를 막중한 거사가 들통 날 위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자신들끼리 뒤엉켜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남녀 인자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쾌락에 빠져들고 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목숨들이다.

인륜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본능을 채워줄 대상뿐이다.

 

(하늘 아래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다지만 우리네 인자들만큼 비참한 삶이 또 있을까?)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소음을 들으며 철접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자들의 도구가 되어 개처럼 부려지다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이 인자들의 숙명이다.

자신의 아버지 용사무와 오빠 용태랑 역시 권력에 눈이 먼 한 인간의 욕망에 휘둘렸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았었다.

그리고 가엾은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가 당한 처절한 최후를 떠올리면 지금도 슬픔과 분노가 전율이 되어 온몸을 훑고 지나는 철접이었다.

 

삼 년 전, 그녀는 중상을 입은 채 어머니와 함께 막부의 관군들에게 쫓겼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어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철접을 숨겨두고 관군들을 유인해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군들에게 사로잡힌 어머니는 철접이 숨어있는 근처로 끌려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혔으며 마침내 손가락과 발가락이 차례로 잘려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내 딸이 숨어있는 곳은 발설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악에 바친 관군들은 어머니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었다.

어머니는 이미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리고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유린당하며 어머니는 도살장에 끌려와 도축당하는 짐승같이 울부짖었었다.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때마다 부러진 뼈들이 장기를 찌르고 생살을 찢어댄 때문이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하는 어머니와 숨어있는 철접의 시선이 몇 번인가 교차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린당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너무도 다정하여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자 관군들의 만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관군들이 떠난 후에도 철접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다가는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때의 형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처참한 몸뚱이를 남겨두고 철접은 피눈물을 흘리며 현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다른 인간의 도구가 되어 결국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하는 것이 인자의 삶이고 숙명인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다른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내 의지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어머니의 처절한 죽음을 떠올린 철접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며 밀실의 문 앞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여자 인자들의 흐느낌과 남자 인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

 

"...!"

철접의 고요하던 눈동자에 오늘 밤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곳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은신하고 있는, 오십여 년 전에 버려진 황폐한 장원의 입구였다.

"... 미안해 누나."

철접의 평정심을 깨트린 것은 이제 십오륙 세쯤 된 소년이다.

얼굴이 계집아이같이 해맑고 눈이 유달리 커서 겁먹은 사슴을 연상케 하는 그 소년은 바로 철접의 하나뿐인 핏줄 용차랑(龍次郞)이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용차랑의 몸과 의복은 먼지에 덮여있고 땟국물로 얼룩져 있다.

용차랑의 뒤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수천 리 밖 막북(漠北)에 있어야할 어린 동생...

용차랑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을 본 철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절망감을 느꼈다.

유일한 핏줄인 이 아이가 예기치 않게 나타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이가류 종가(宗家)의 후손으로 안전한 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어. 나도 영락제(永樂帝)를 척살하는 살행(殺行)에 참가할 기회를 줬으면 해."

용차랑은 열두 살 위인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철접의 시선은 용차랑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당주님."

여든 살을 바라보는 늙은 인자 시바타(紫田)가 철접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연다.

"도련님께서 혼자라도 북경(北京)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타는 당장 할복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철접은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용차랑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한번 세운 뜻과 고집은 꺽은 적이 없는 아이다.

다시 막북으로 돌아가라거나 내일 있을 거사에서 빠지라고 해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거나 따돌리려고 시도했다가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내일의 거사를 무산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따라와라. 같이 갈 곳이 있다."

철접은 한숨을 쉬며 폐허가 된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용차랑과 늙은 인자 시바타가 눈치를 보며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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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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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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