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8

 

                 잠룡의 세월

 

 

 

흐윽!”

섭대낭은 요문천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오열을 터트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녀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요문천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정오 무렵에 돌아온 요문천으로 인해 승상부는 발칵 뒤집혔다.

섭대낭은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왔다.

요광효도 어제 있었던 영락제의 피습 사건 수습으로 분주하던 중에 승상부의 입구까지 나왔다.

몰려든 시녀들도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반면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만일 요문천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면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미안해 유모. 걱정 끼쳐서...”

요문천은 자신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오열하는 섭대낭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그런 요문천의 눈에 요광효가 곱게 늙은 노파와 함께 승상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머리카락은 백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는 서늘한 인상의 그 노파는 신비각 사대영반의 첫째인 고독모모(孤獨母母).

고독모모는 출신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인이다.

혹자는 그녀가 고려(高麗)의 전설적인 문파 치우령(蚩尤嶺)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고독모모는 갈태독이나 사해무존에 필적하는 고수였구나.)

요문천은 섭대낭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고독모모를 살펴보았다.

그전에는 몰랐었다.

하지만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덕분인지 요문천의 눈에는 고독모모의 몸 주위로 무형의 역장(力場)이 감돌고 있는 게 들어온다.

다친 곳은 없느냐?”

다가온 요광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요문천의 몸을 살피며 묻는다.

...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요문천은 요광효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되었다. 대낭이는 문천이를 데리고 가서 쉬게 해주거라.”

요광효는 요문천의 뒤에 붙어서서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섭대낭에게 말했다.

예 부주님.”

섭대낭은 대답한 후 요문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곧 전후 경과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할 때 얘기 하거라.”

요문천의 말에 요광효는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들어갔고 모여들었던 하인들과 무사들도 흩어졌다.

“...”

고독모모는 섭대낭에게 이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가는 요문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모의 눈에도 저 녀석이 전과 다르게 보이시는 것같소이다.”

요광효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지만 고독모모는 요광효보다 십여살 연상으로 백세(百歲)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영식이 복연(福緣)이 많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던 바인데... 이번의 소동을 겪으면서 오래되고 신령스러운 힘이 몸에 깃들었군요.”

고독모모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뜬 채 요문천을 보며 말했다.

기쁜 일이긴 하지만... 자식이 평온한 삶을 바라는 아비의 입장으로는 근심이기도 하지요.”

요광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한 저 녀석 어미와의 약속은 지키기 힘들지 모르겠구나.)

요광효의 늙은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리고 있었다.

 

***

 

(도련님의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섭대낭은 본능적으로 그같이 느꼈다.

그녀는 요문천을 목욕시켜주고 있는 중이었다.

욕조에 들어앉은 요문천을 씻겨주면서 섭대낭을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단 하룻밤 못 본 것뿐인데 어쩐지 요문천이 낯설게 느껴진 때문이다.

외양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헌데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요문천에게서 어른의 느낌이 난다.

의젓해졌고 진중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눈빛에 깊은 우수가 어려 있다.

그 눈빛이 먼 곳의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 느껴져서 섭대낭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대체... 섬나라의 야차(夜叉)같은 계집에게 끌려가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요문천의 몸을 닦아주는 섭대낭의 손끝이 떨린다.

그녀는 머잖아 요문천이 자신의 품을 떠날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깃털이 돋아나고 날개에 힘이 생긴 아기 새는 필연적으로 둥지를 떠나 이소(離巢)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뻐해야할 일이다. 도련님이 어른스러워지는 것은 마땅히 기뻐해야만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억지로 웃는 섭대낭의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

 

반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봄이었던 계절은 어느덧 초가을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세상은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영락제의 제삼차(第三次) 몽고 친정(親征)이 진행되었다.

오십만 명의 군사를 동원한 대규모의 정벌은 황실 재정의 고갈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부작용을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산동(山東)에서는 불모(佛母)를 자처하는 백련교(白蓮敎) 출신의 여걸 당새아(唐塞兒)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새아는 임삼(林三)이라는 농부의 아내라고 알려진 여인이다.

일찍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그녀는 기연을 만나 천서(天書)와 보검(寶劍)을 얻었다고 한다.

천서와 보검은 백련교에 전해지는 세 가지 보물 광명삼보(光明三寶)에 속한다.

광명삼보는 백련교의 마지막 교주 한림아(韓林兒)가 주원장에게 암살당할 때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혹자는 광명삼보가 한림아를 암살한 주원장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팔 년 전 금릉이 연왕의 군세에 함락당할 때 황실보고에 수장되어 있던 광명삼보의 행방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 광명삼보 중 천서와 보검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육십여 년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천서와 보검을 얻은 덕분에 당새아는 백련교의 새로운 교주로 추대되었다.

당새아도 스스로를 불모로 자처하고 있는데 천서와 보검의 힘을 빌어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자유자재로 하며 재물과 의식(衣食)을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전해진다.

이에 북원(北元), 즉 몽고 정벌을 위한 영락제의 혹독한 징발과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이 당새아 주변으로 몰려들어 삽시에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웠으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세상에서 사라졌던 백련교가 육십여 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당새아가 주도한 백련교의 반란은 초반의 기세가 많이 위축된 상태다.

관군의 지속적인 투입 덕분에 산동성 밖으로는 세력을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당새아의 난으로 인해 민심은 급격히 흉흉해지고 있었다.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안정되어가던 천하의 정세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승상부는 이같은 어지러운 풍파에서 온전히 비켜나 조용했다.

반 년 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 타이시의 사주를 받은 동영의 인자들이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는 변고가 있었다.

그때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중 한명이 승상부에 난입했던 일이 있었지만 철저하게 기밀에 붙어져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외면상 평온해 보이는 승상부는 그러나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승상부의 다음 대 주인이 될 요문천의 변화 때문이었다.

 

***

 

문천이는 요즘 어찌 지내느냐?”

요광효는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섭대낭에게 물었다.

늘 밝고 활기차던 섭대낭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사이 부쩍 표정이 어두워져 요광효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 두 번,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鍊功關)에서 나오지 않고 있사옵니다.”

섭대낭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만 읽던 녀석이 무공에 관심을 갖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구나.”

요광효도 한숨을 쉬었다.

 

반 년 전 철접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요문천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승상부에는 다양한 무공비급과 영약, 무기등이 갖춰진 연공관이 있다.

요문천은 자신의 안락한 거처 대신 그 연공관에 들어가 생활해오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두 번, 밥을 먹고 목욕을 하기 위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승상부에는 고수들이 많다.

호장무사들 외에도 요광효를 존경하여 모여든 식객(食客)들 중에 강호의 기인이사들이 다수 섞여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조차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충분히 드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요문천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청하지 않고 혼자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다.

요광효는 이와같은 요문천의 변화를 대견해했다.

하지만 유모인 섭대낭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무리하다가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혼자 무공을 수련하다 잘못되어 주화입마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노심초사해오고 있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 문천이의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인 것같으냐?”

요광효는 초췌해진 섭대낭을 측은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영락제가 몽고에 친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실상 정무(政務)는 요광효가 보고 있는 중이다.

영락제의 장남인 황태자 주고치(朱高熾)는 제법 성군(聖君)의 자질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주고치는 병약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데에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요광효가 주고치를 대신해서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요광효는 자금성에서 살다시피 해야만 했고,

지난 반년동안 요문천을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련님의 무공은 불과 반 년만에 천녀를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사옵니다.”

섭대낭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비록 걱정을 끼치긴 했지만 요문천이 지난 반 년동안 보인 놀라운 성취가 그녀를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그 정도냐?”

요광효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