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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가죽(人皮)으로 만든 비급(秘笈)

 

 

 

<본성의 형제들이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중과부적! 우내사천과 그놈들이 이끌고 온 중원 무림의 인간들에게 본성의 식솔들은 몰살당했으며 오직 노부와 노부의 애첩 혈미인(血美人)만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도 내상이 깊어 곧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지옥일맥(地獄一脈)의 멸망을 의미하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여 노부는 애첩 혈미인을 죽여 그녀의 살가죽에 본성의 비전절기들을 기록하게 되었다. 달리 절기들을 적어 놓을만한 재료가 없어서...>

 

"... 인피(人皮)!"

털썩!

요문천은 기겁하며 들고 있던 저주마경을 떨어트리면서 뒤로 주저앉았다.

그는 비로소 저주마경의 재질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촉감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으으으! ... 저 책이 사... 사람 가죽으로 지어진 것이었다니... 그것도 여자의 살가죽으로..."

요문천은 덜덜 떨면서 바닥에 떨어트린 비급을 곁눈질로 보았다.

설마 사람 가죽으로 지은 책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자신의 애첩을 죽여 그 살가죽으로 책을 만들다니... 너무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요문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저주마경을 곁눈질했다.

(문파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비전의 절기를 남겨야하는데 기록할 수단은 없고...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된 애첩을 미리 죽여서 그 살가죽으로 책을 엮었구나. 먹물 대신 피를 뽑아내어 글을 썼을 테고...)

요문천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떨리는 손을 저주마경 쪽으로 뻗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물건이지만 버릴 수도 없다. 끝까지 한 번 읽어나 보자!)

그리고는 용기를 내서 집어든 저주마경을 다시 펼쳤다

 

<노부는 우내사천 중 만겁마종(萬劫魔宗)이 날린 단맥마장(斷脈魔掌)에 맞아 온몸의 경맥이 끊어진 상태라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본래 우리 지옥성에는 지옥십결(地獄十訣)이라는 열 가지 절기가 있지만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적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아무쪼록 저주마경을 얻은 그대가 우내사천의 후손들을 꺾어 우리 지옥일맥(地獄一脈)의 절기가 결코 우내사천의 잡기(雜技)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길 바란다!

지옥검조 하륜이 죽어가며 적는다.>

 

표지 안쪽 첫 번째 지면의 글을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다음 지면부터 아주 난해하고 기괴한 무공비결들이 적혀있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세 배의 힘으로 돌려보내는 호신무공 저주마벽(詛呪魔壁),

철벽도 모래처럼 으깨버리는 지옥장강(地獄掌罡),

마검 지옥교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검법 마검팔식(魔劍八式)...

하지만 저주마경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은 그 세 가지가 전부였다.

또한 저주마경 전체 지면중 절반 이상이 빈 상태로 남아있었다.

스스로 우려했던 대로 지옥검조 하륜은 지옥십결이라는 지옥성의 열 가지 절기 중 단 세 가지만을 기록한 후 절명했던 것이다.

(유감이로구나. 지옥십결이라는 무공들 중 일곱 가지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요문천은 아쉬운 마음에 비어있는 지면을 넘겨보았다.

저주마벽, 지옥장장, 마검팔식등의 무공비결을 읽는 동안 어느덧 저주마경이 사람의 가죽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진 상태였다.

(글이 또 있다!)

헌데 저주마경의 맨 뒤쪽 지면을 펼쳐보던 요문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곳에 또 다른 글이 어지러운 필체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맨 뒷장에 적힌 이 글은 지옥검조가 남긴 것이 아니다!)

요문천은 한눈에 그 글이 지옥검조의 필체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글은 전자체가 아닌 초서체(草書體)로 적혀있으며 급히 휘갈겨 쓴 듯 글씨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또 지옥검조처럼 먹물 대신 피로 글을 썼다.

지옥검조가 남긴 글이 아주 검은 것에 반해 맨 뒷장에 적힌 글은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 글들이 적힌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님을 뜻한다.

 

<노부의 이름은 초패강(楚覇强)이다. 홍무(洪武) 폐하로부터 사해무존(四海武尊)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하사받았던 어리석은 인간이 사람을 잘못 본 대가로 비참하게 죽어가며 이 글을 남긴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사해무존 초패강!"

그리고 그 글을 읽은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저 시신이 지난 오십여 년간 무림을 지배해온 무존성(武尊城)의 성주 사해무존의 것이었다니...!"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앞쪽 석벽에 기댄 자세로 죽어있는 시체를 돌아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

 

그는 바로 오십이 년 전 천독친왕 갈태독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젊은 검객이었다.

출신이 비밀에 쌓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주원장을 찾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었다.

비록 약관을 갓 넘긴 애송이였으나 초패강은 이름에 걸맞게 경이적인 무공을 지녔다.

주원장의 휘하에 운집했던 그 어떤 무림 고수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만족한 주원장은 초패강을 최일선에서 원나라의 군세를 상대하고 있는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보냈다.

서달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원장 막하(幕下)의 최고 명장이다.

당연히 언제 자객이 그의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의 선견지명대로 원나라 측의 최고 고수인 천독친왕 갈태독이 서달을 암살하기 위해 그의 군막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의 경과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대로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막지 못했던 갈태독의 독공이건만 초패강이 일으킨 저주마벽은 뚫지 못했다.

오히려 초패강이 지옥교로 구사한 마검팔식에 갈태독은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갈태독의 기습에서 서달을 지켜준 이후로도 초패강은 수다한 전공을 세웠다.

서달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몽고족의 근거지로 쳐들어가서 원나라 황실이 동원한 무수한 고수들을 베어 넘긴 것이다.

만일 초패강의 활약이 없었다면 명나라 측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자명했다.

특히 서달은 몽고족이 동원한 자객들의 손에 결국 쓰러졌을 것이다.

서달은 고비사막의 깊은 곳까지 원나라 황실을 추격하여 분쇄함으로서 몽고족으로 하여금 다시는 중원 정복을 도모하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서달이 원나라 황실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초패강의 조력과 활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같은 혁혁한 전공에 보답하기 위해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사해무존이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다.

사해(四海), 즉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의 지존(至尊)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뿐만 아니라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무림에 속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부여했다.

초패강의 애검인 지옥교가 어떤 인간을 죽이든 그 죄를 묻지 않겠다는 칙령(勅令)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초패강을 무림의 주인, 무림왕(武林王)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후 초패강은 주원장의 권유도 있고 해서 황산(黃山)에 무존성(武尊城)을 세우고 무림의 대소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던 탓에 무림인들은 초패강과 그가 세운 무존성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황실이 존엄한 존재인 것처럼 무림인들에게는 무존성이 자신들의 주인이며 지배자인 것이다.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강호 무림의 주인인 사해무존 초패강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시신이 되어있다니...”

요문천은 경악과 충격으로 전율하며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시체, 사해무존 초패강을 살펴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의 주인이고 제왕이 아닌가?

자연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문천이 알기로 사해무존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다.

(무존성에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강호 무림뿐만 아니라 황실까지도 뒤흔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음모가...!)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다시 저주마경의 마지막 장에 적혀있는 글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사해무존 초패강의 사문내력은 밝혀진 바가 전혀 없었는데... 그는 지옥성이라는 고대의 문파에서 유래한 지옥교와 저주마경을 얻어서 천하제일인이 되었구나!)

요문천은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불에 비춰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부를 죽게 만든 범인은 통탄스럽게도 둘째 제자인 옥면환룡(玉面幻龍) 옥사후(玉獅吼)란 놈이다. 그 놈이 오래전부터 만성독약(慢性毒藥)을 음식에 조금씩 넣어 노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놈은 아마도 무존성의 성주 자리를 노리고 이같은 패륜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이 둘째 제자라고?"

글을 읽어 내려가며 요문천은 경악과 함께 분노를 금치 못했다.

"세상 말세로구나. 제자가 스승을 독살하기까지 하다니...!"

그와 함께 요문천은 살이 썩으며 드러난 사해무존 초패강의 뼈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조금씩 사해무존의 몸에 축적된 만성독약 때문에 그의 뼈가 푸른 빛을 띠게 된 것이다.

요문천은 놀란 마음을 갈아 앉히려 애쓰면서 글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절명하기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던 듯 초패강이 남긴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만성독약에 중독된 사실을 알아차린 노부는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무존성을 떠나 이곳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노부가 중독된 만성독약의 독성은 아주 지독해서 천독친왕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갈태독의 독경(毒經)을 얻어야만 해독이 가능할 것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진 글에는 사해무존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죽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사해무존은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독약의 독기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에 사해무존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갈태독이 남긴 독경을 손에 넣으면 어떤 극독이라도 해독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해무존은 자신이 중독당한 사실과 천독친왕부로 갈태독의 독경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수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무림의 주인이며 천하제일인임을 자처해온 처지에 남의 독수에 어이없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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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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