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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기다려온 여인

 

 

 

섭대낭은 벽혈마희(碧血魔姬)라 불리며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력이 있다.

다시 무림에 나가면 구대문파 장문인들일지라도 그녀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헌데 겨우 반 년 수련한 요문천의 무공이 섭대낭에 필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터무니없는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광효는 섭대낭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요문천은 영특할 뿐 아니라 놀라운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불과 십여 년 공부한 것만으로 천하의 재사(才士)들이 모여 있는 한림원(翰林院)의 어떤 학사(學士)에게도 뒤지 않는 학문을 쌓았었다.

그런 요문천이 식음과 수면까지 전폐하고 무공 수련에 매진해왔다.

반년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히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무공에 대한 이해야 워낙 영특한 분이니 막힘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천녀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도련님의 심후한 공력이옵니다.”

섭대낭이 아미를 모으며 말했다.

“석 달 전쯤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문천이의 내공이 일갑자(一甲子)를 상회하는 것같긴 했다.”

요광효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광효도 정심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현재 도련님의 내공은 삼갑자(三甲子)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추측되옵니다.”

섭대낭이 조금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삼갑자!”

요광효도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말이 쉬워 삼갑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팔십 년의 세월동안을 쉬지 않고 수련해야 쌓을 수 있는 공력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인간이 백팔십 년을 살 수는 없다.

아무리 내공이 심후한 무림고수라도 백오십 년 정도 사는 것이 한계다.

당연히 삼갑자 수준의 내공을 지니려면 수련하는 것 외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직접 수련하지 않아도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데에는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흡정대법(吸精大法)으로 타인의 공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다만 흡정대법을 쓰면 대개는 끝이 좋지 않다.

이질적인 내공이 몸속에서 뒤섞인 채 존재하게 되는 탓이다.

사마외도의 인간들이 다양한 흡정대법을 구사하면서도 절세고수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타인에게서 공력을 물려받는 개정대법(開頂大法)이 있다.

흡정대법과 달리 개정대법은 동일한 내공심법을 수련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시전이 가능하다.

같은 성질의 무공을 익혔으므로 흡정대법처럼 주화입마에 빠지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다만 개정대법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십 년 수위의 공력을 전수받으면 일이 년 수위 정도의 내공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개정대법의 이같은 비효율이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대파들이라고 해서 늘 절세고수가 나오지는 못하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내공 증진에 효과가 있는 약초나 그것들로 만든 영약을 복용하면 단 시일 내에 내공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대표적인 약초가 성형하수오(成形何首烏)나 삼왕(蔘王)등이며,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영약으로는 소림사의 대환단(大丸丹)이 있다.

대환단은 내상의 치료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삼십 년 동안 면벽 수련한 것에 필적하는 내공을 단번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영약에도 한계는 있다.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영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 영약의 약효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유다.

 

“본부의 연공관에도 다양하고 효능이 탁월한 영약들이 준비되어 있긴 하다만... 불과 반 년만에 삼갑자의 내공을 쌓은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요광효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인물은 불과 열 명 남짓일 것이다.

“천녀의 생각으로는 철접... 동영의 그 야차같은 년에게 납치되셨을 때 어떤 기연을 만나셨던 것같사옵니다.”

섭대낭도 약간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요문천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파사의 내단을 얻었겠군.”

요광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예?”

갑작스러운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아니다. 문천이의 내공이 심후해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요광효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내일 있을 폐하의 개선식(凱旋式) 준비 때문에 올해의 기제사(忌祭祀)에는 참석할 수 없다. 그러니 네가 문천이를 데리고 영은사(永恩寺)에 다녀와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름과 출신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요광효의 처, 즉 요문천의 생모의 기일(忌日)이다.

마씨(馬氏)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은 십팔 년 전 바로 오늘 죽었다.

그래서 오늘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무렵에 제사를 지내야한다.

요씨 집안에는 따로 사당이 없다.

대신 북경 외곽의 영은사라는 절에 조상들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요광효가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불문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문이다.

“영은사의 주지 무진사태(無塵師太)에게는 기별을 넣어놓았으니 문천이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예...”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제사를 지내러 외출한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요문천과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낭아.”

속마음을 들킬까봐 서둘러 방을 나가려는 섭대낭을 요광효가 불러 세웠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섭대낭은 문고리를 잡다가 요광효를 돌아보았다.

“문천이도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다. 응석을 전부 받아주지는 말거라.”

요문천이 그런 섭대낭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명... 명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요광효의 방을 나서면서 섭대낭은 가슴 한 구석에 전에 없는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요광효의 마지막 당부에 복잡한 심사가 서려있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

 

퍼억! 푸스스!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청강석(靑剛石) 기둥이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럭저럭 지옥장강(地獄掌罡)도 쓸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요문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청강석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뒀다.

그가 손바닥을 대고 있던 청강석은 옥(玉)의 일종으로 단단하기가 강철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지옥장강이 흘러들어간 결과다.

지옥장강이 주입된 대상은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하지만 내부는 강한 진동으로 인해 완전히 으스러져버린다.

만일 인간의 몸에 지옥장강이 닿으면 뼈가 가루가 되고 살과 내장은 곱게 갈은 곤죽처럼 변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하며 죽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옥장강은 직접 대상에 닿아야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지옥장강의 내력에 대해 아는 적이라면 직접적인 접촉을 피함으로써 지옥장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저주마경에 적힌 바로는 지옥장강은 십성(十成)에 이르면 벽공장(闢空掌)처럼 거리를 두고도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는 지옥장강에 직접 닿지 않는다 해도 내부가 으스러져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실로 지난(至難)하다.

요문천도 팔성(八成)까지는 석달만에 이르렀지만 그후로는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지옥장강을 벽공장처럼 구사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니 조급해할 건 없다.)

요문천은 모래가 되어 흩어진 청강석 기둥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이곳은 승상부의 연공관이다.

승상부에는 아주 넓고 무공 수련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연공관이 존재한다.

직접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 외에도 수천 권의 무공비급으로 채워진 서고(書庫)와 온갖 종류의 무기가 마련되어 있는 무고(武庫)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서고와 무고뿐 아니라 승상부의 연공관에는 무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영약들을 모아놓은 약고(藥庫)도 있다.

열의와 결심만 충분하다면 이 연공관에 들어오는 사람은 절세고수가 되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요문천은 연공관 내의 무공비급과 영약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무공은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면 충분하다.

또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상태라 공력을 증진시켜주는 영약은 먹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문천이 연공관에서 가끔 드나드는 곳은 무기들이 마련되어 있는 무고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저주마경과 함께 독왕보궁에 남겨두고 왔다.

지옥교가 워낙 특이하게 생긴 탓에 남의 눈에 띄일 것을 우려해서였다.

지옥교가 없으니 마검팔식(魔劍八式)을 수련하는 데는 다른 검을 쓸 수밖에 없다.

요문천이 무고에서 고른 검은 검날이 얇으면서도 날카로워 금석을 무 베듯 한다.

날카로움으로는 지옥교에 비교해도 그리 뒤지지 않는 그 검은 전설속의 명검인 청평(淸平)이다.

 

(근접전에서는 지옥장강이 절대적이고 거리를 둔 싸움에는 마검팔식이 무적의 위력을 발휘한다.)

요문천은 청평검을 집어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검법의 초식들은 공격과 방어를 겸하게 되어 있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산 후에 적을 죽인다는 위기(圍碁;바둑)의 격언이 여지없이 통하는 것이 무공이다.

설령 내가 적을 베더라도 나 역시 적에게 베어지면 소용이 없다.

그 때문에 공격보다는 방어에 보다 비중을 두는 일반적인 무공이고 검법이다.

하지만 마검팔식은 오직 적을 베고 죽이는 데만 집중한다.

자신의 안전은 도외시하고 적의 약점과 실수를 맹렬하게 파고 들어가 공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검팔식을 상대하는 적은 기필코 피를 보게 된다.

이 검법에 마검(魔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마검팔식이 이토록 무모하게 적을 쓰러트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저주마벽 덕분이다.

저주마벽은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탁월한 호신공부다.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최대 세배의 힘으로 타격을 돌려보낸다.

저주마벽의 이같은 막강한 힘에 보호되는 덕분에 오직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지옥검조가 애첩 혈미인을 죽여서 그녀의 살가죽에 지옥성의 무공을 적을 때 저주마벽과 지옥장강과 마검팔식을 우선적으로 적은 이유가 있다.

지옥성의 열 가지 무공 지옥십결(地獄十訣)중 그 세 가지가 다른 일곱 가지보다 특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만으로도 지옥성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만 수련해왔다.

연공관의 다른 무공비급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요문천은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멀지 않았다. 이제 곧 여길 나갈 수 있다.)

쩌억! 슈욱!

청펑검으로 빗발같은 검기를 그어내며 요문천은 눈을 번뜩였다.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마검팔식을 펼치면서 요문천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초겨울에 내리는 서리를 연상케하는 서늘한 분위기를 지닌 절세미녀...

순진하던 자신을 어른의 세계로 이끌어준 여인...

그녀를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그 여인은 철접 용천파다.

 

***

 

“요문천이 무공 수련에 미쳐있다?”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물었다.

삼단 같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삭도(削刀;머리 깎는 칼)에 의해 깎여 나가고 있는 중이다.

“어떤 계기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요문천은 반 년 전부터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데... 비록 섭대낭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로 확인한 것뿐이지만 요문천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고이옵니다.”

여인의 앞쪽에 무릎을 꿇은 젊은 비구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문천... 그 아이도 몇 달 후면 열아홉 살... 써먹을 수 있는 정도로 자라긴 했겠지.”

여인은 바닥에 흩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나이 든 비구니가 삭도로 머리를 밀어주고 있다.

“산동성으로 몰려든 주체(朱棣;영락제의 이름)의 졸개들이 제법 유능한 탓에 교착되어버린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북경에 잠입한 것인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로구나.”

어느덧 머리카락이 모두 밀려져서 비구니의 모습이 된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비로소 불모(佛母)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연재 종료 공지>

 

무림일기의 연재는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현재 유료로 연재중이라 형평상 더 이상 게시할 수는 없군요. 대부분의 싸이트에서는 1권 가량은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서 1권의 일부를 연재했었습니다.

이해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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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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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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