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7

 

                 귀역(鬼域)에서의 초야(初夜)

 

 

 

하실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의아해진 요문천이 물었다.

철접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나란 계집,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밉거나 흉하게 보이지는 않느냐?"

철접은 그 창백한 얼굴에 살짝 홍조를 떠올리며 물었다.

"밉다니요? 소저는 제가 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답습니다."

요문천은 철접에 말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십팔 년의 세월동안 제법 많은 명문가의 미녀들을 보아온 요문천이다.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이 여()인자에 비견될만한 여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파팟!

철접이 갑자기 요문천의 가슴에 자리한 마혈(痲穴)을 찍었다.

"!"

요문천은 찌릿한 충격과 함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철접은 마혈이 찍혀 쓰러지는 요문천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서 품에 안았다.

"...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문천은 철접의 품에 안기며 당황하여 물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말은 할 수가 있는 상태였다.

"해치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거라!"

철접은 요문천을 두 팔로 안아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철접의 키가 훨씬 큰 탓에 그녀의 품에 안긴 요문천이 마치 아기처럼 보인다.

철접은 요문천을 품에 안은 채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첫번째 지하 광장으로 나섰다.

(이 여자 설마...!)

철접의 품에 안겨 보물의 산쪽으로 옮겨지며 요문천은 어떤 기대로 인해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파사의 내단까지 주저 없이 먹여준 철접이 새삼 자신을 해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저항하지 못하게 혈도를 찍었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어쩌면 이 여자는 특별한 방법으로 은혜를 갚을 생각인 것 같다.)

요문천은 기대와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접을 훔쳐보았다.

비록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철접의 창백하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다.

철접은 성벽처럼 쌓여있는 금괴의 벽을 지나 보물의 산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예상한 대로구나.”

보물의 산 중심부에 도착한 철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접이 요문천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마치 방처럼 꾸며져 있다.

탁자와 의자, 온갖 종류의 집기들과 함께 아주 넓은 침대도 하나 놓여있다.

언듯 보면 누군가의 침실같은 분위기다.

차이점은 침실을 구성하고 있는 집기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보물들이라는 점이다.

금괴를 천장까지 쌓아올려 벽을 만들었다.

바닥에도 금괴와 은괴를 벽돌 대신 깔아놓았다.

금괴의 벽으로 구획되어진 넓은 공간 안에 집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고 온갖 보석들로 치장이 된 물건들이다.

커다란 황금 탁자 위에는 수많은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가장 작은 접시 하나만 내다 팔아도 한 사람의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침실 한쪽에 놓여있는 침대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기둥과 틀은 황금이며 그 위에 깔려있는 것은 이무기의 껍질이다.

이무기의 가죽으로 만든 그 침대는 하룻밤만 자도 어떤 질병이든 낳게 해준다는 보물이다.

갈태독은 어느 군벌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진상했던 그 교피만복침(蛟皮萬福寢)을 거의 강탈하듯 받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삼았었다.

(여기는 갈태독이 자신의 보물들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장소겠구나.)

침대로 다가가는 철접의 품에 안겨 요문천도 주변을 곁눈질로 돌아보며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갈태독은 탐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가장 큰 도락(道樂)은 자신이 모은 보물들을 혼자 감상하는 것이었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들어온 이 공간은 바로 그럴 목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 이 공간에 있는 보물들이야말로 갈태독이 모은 보물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헤어지면 우린 아마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네게 진 빚을 마저 갚을 작정이다. 은혜와 원한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리 온미쯔(隱密宗;인자)의 전통이므로...!"

침대에 이른 철접은 요문천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그리고는 요문천의 몸에 걸쳐진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이러실 필요는...”

철접의 손길에 의해 옷이 벗겨지며 요문천은 헐떡거렸다.

하지만 말과 달리 요문천의 몸은 이미 기대와 흥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다.”

요문천의 옷을 벗기며 철접의 얼굴 역시 어쩔 수 없이 달아오른다.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에 처녀라니.,.. 하물며 인자라는 험한 직업을 가졌으면서...)

요문천이 놀랄 때였다.

철접이 요문천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쥐고 끌어내렸다.

요문천은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번 본 것만으로 마음을 빼앗겨버린 미녀의 눈에 알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로...)

요문천을 발가벗긴 철접은 가슴이 미어졌다.

요문천에게서 비명에 간 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반면 요문천은 이 상황이 그저 황홀할 뿐이다.

(미안해 지로야!)

철접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들인 듯 조카인 듯 키워온 어린 동생...

그 가엾은 동생은 불귀의 객이 되어 멀지 않은 곳에 누워있다.

동생이 여자도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철접이었다.

지난 밤 그녀는 지로, 즉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었다.

하지만 기녀들이 너무 대담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용차랑은 기겁을 하며 도망쳐 나왔었다.

그후 철접은 용차랑에게 맛난 음식을 사 먹인 후 천독친왕부로 돌아와 함께 잤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 용차랑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철접은 동생이 무얼 원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접은 애써 용차랑의 눈길을 피했었다.

결국 철접과 용차랑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보냈으며...

용차랑은 허무하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그토록 원하던 걸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주르르!

마침내 철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아이가 지로 대신이다. 지로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것을 이 아이에게 해주자.)

어느덧 철접에게 요문천은 용차랑의 환생인 듯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린 어린 동생을 위해 해주지 못할 일이 없다.

철접은 정성을 다해 요문천을 귀여워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문천은 현실의 일이 아닌 듯한 황홀경의 극치를 맛보게 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요문천을 귀여워해주며 철접 역시 몽롱해졌다.

그녀는 비로소 여자 인자들이 그토록 이성과의 관계에 집착하는지 깨달았다.

이 순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온전히 황홀경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지로! 지로야!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두 손으로는 요문천의 얼굴을 보듬어 쥐고 울었다.

요문천의 입에서도 자지러지는 비명이 연신 터져 나왔다.

오늘 밤 요문천은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곤히 잠들었던 요문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철접은 사라진 후였다.

(갔구나.)

비어있는 옆 자리를 돌아보며 요문천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을 받았다.

침대 옆의 황금 탁자에는 지옥교와 저주마경은 놓여있다.

하지만 갈태독이 남긴 구독진경 상편과 묵린천독편은 보이지 않았다.

철접이 떠나면서 가져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날 동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철접과의 일을 떠올리며 요문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로... 미안해 지로. 나만... 누나만 살아서...!”

관계하는 내내 철접은 비탄이 서린 오열을 토해냈었다.

(가엾은 여자였다.)

요문천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철접이 느끼는 비탄이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그래서 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요문천과 철접은 밤이 새도록 특별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지칠 줄을 몰랐다.

복용한 파사의 내단과 천독시균 덕분이었다.

철접의 상처도 이미 대부분 완치되었을 정도다.

그래도 어느 순간 요문천은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몸에는 옷이 걸쳐져 있었다.

요문천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동안 누워있었다.

파사의 내단 덕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겠고 몸에는 힘이 넘친다.

한번 도약하며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아서 요문천은 쉽사리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이윽고 요문천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펴보니 지옥교와 저주마경이 놓여있는 탁자에는 글이 새겨진 금판(金板)이 한 장 놓여있었다.

금판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날 찾지 말거라. 네가 날 필요로 할 때면 내가 찾아갈 테니.. 날 위해 지로를 대신해준 배려는 잊지 않으마.>

 

금판에 적힌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길지 않은 그 글에 철접의 모든 심사가 깃들어 있는 것을 요문천은 느꼈다.

(철접 용천파...!)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든 채 철접을 떠올렸다.

요문천은 동침하는 도중에 나눈 단편적인 대화들을 통해서 철접이 누구며 본명이 용천파라는 사실도 알아낸 상태였다.

(내가 어찌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 요문천을 비로소 어른으로 만들어준 당신을...)

요문천은 철접의 글이 적힌 금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찾아내서... 두 번 다시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나 자신도 강해져야만 한다.)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쥔 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귀역(鬼域)으로 소문난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서 바야흐로 장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뜻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