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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속의 참극(慘劇)

 

 

 

요문천은 주먹만한 돌을 주워 우물 안쪽으로 던져보았다.

첨벙!

잠시 기다리자 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이 우물에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은 철접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요문천은 무언가 깨닫고 서둘러 우물 턱으로 올라섰다.

휘익!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우물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너무 무모했나? 내 생각이 틀렸으면 우물물에 빠져 익사할 텐데...)

뛰어내리자마자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출렁!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래로 추락하던 요문천의 몸은 도로 위쪽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생각했던 대로다.)

몸이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요문천은 안도했다.

우물은 상당히 깊은데 지상에서 칠, 팔장쯤 되는 곳에 그물이 쳐져 있었다.

재질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가늘면서도 탄력이 아주 좋은 밧줄로 짜여진 그물이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침투와 탈출 등에 사용하는 밧줄일 것이다.

철접이 우물 안으로 뛰어내렸음에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 그물 덕분이었다.

텅 텅!

요문천은 그물 위에서 몸이 퉁겨지는 사이에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우물은 몹시 깊어서 달빛이 흘러들지 못하는 바람에 상당히 어둡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우물의 한쪽 벽에 크지 않은 동굴이 있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동굴 입구가 매끈한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물 속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동굴이 숨겨져 있었구나.)

요문천은 그물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동굴로 다가갔다.

(혹시 저 동굴이 갈태독이 천독친왕부의 어딘가에 만들어 놓았다는 보물창고의 입구가 아닐까?)

동굴로 다가가며 요문천은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독친왕 갈태독이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았었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천독친왕부가 죽음의 귀역이 되고 갈태독이 실종되면서 그의 재보 역시 세상에서 사라졌다.

만일 갈태독이 숨겨놓은 재보를 찾아낸다면 단번에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족함이 없이 자란 요문천인지라 재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태독의 보물 창고와는 관련이 없더라도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요문천은 흥분을 억누르며 동굴로 기어들어갔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아서 엉금엉금 기어야 들어갈 수 있다.

헌데 동굴로 기어들어가면서 요문천은 섬뜩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굴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피가 흐른 후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끈적이는 감촉이 양손과 무릎에 느껴진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다.)

요문천은 동굴 바닥 전체에 피가 덮여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서리를 쳤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그 여자 혼자 흘린 피는 아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동굴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동굴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의 양은 엄청 나서 한 사람이 흘릴 수 있는 정도의 피가 아니다.

마르기 시작하여 끈적이는 피에 섞여 가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피도 손바닥에 느껴진다.

그 피는 아마도 철접이 동굴을 기어들어가는 동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 것이다.

(그 여자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앞서서 이 동굴을 기어들어갔다. 대량의 피를 흘리면서...)

 

요문천이 몸서리를 치며 기어가는 동안 동굴은 점점 넓고 높아졌다.

잠시 후에는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었는데 요문천의 양손과 무릎은 동굴 바닥을 뒤덮고 있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다.

동굴 천장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그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어 그리 어둡지 않다.

요문천은 달빛에 의지하여 바닥을 살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어진 동굴의 바닥에 여러 가닥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사람이 대량의 피를 흘리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이다.

(아마도 여기가 영락폐하를 습격했던 인자들의 비밀 거점이었을 것이다.)

요문천은 핏자국을 따라 걸어 들어가며 깨달았다.

영락제를 암살하기 위해 중원으로 잠입한 동영 이가류의 자객들은 오래전부터 인적이 끊긴 이곳 천독친왕부를 은신처로 삼았을 것이다.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죽음의 귀역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으니 은신처로 천독친왕부만한 곳은 없다.

이 우물 속의 은밀한 동굴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천독친왕부를 거점으로 삼은 후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일 테고...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살아남는 자는 이 동굴로 피신한다는 약조가 사전에 있었겠지.)

요문천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멀지 않은 앞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불빛쪽으로 걸어갔다.

 

불빛은 동굴의 끝에 자리한 한 칸의 석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요문천이 문이 부서진 그 석실로 다가갈 때였다.

안돼! 안된다!”

석실에서 그리 높지 않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나직하지만 내장을 칼로 긁어내는 듯한 처절한 고통이 실려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요문천은 서둘러 석실로 다가갔다.

오장육부를 다 토해내는 듯한 울음소리의 주인이 철접임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

 

부르르!

석실로 들어서던 요문천의 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석실 안에는 요문천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벽에 걸린 원통형의 등이 흘려내는 불빛 아래 여섯 구의 시체가 석실 바닥에 널려있다.

입구에 가까운 곳에는 이남이녀(二男二女)가 죽어있다.

이남이녀 중 부부로 보이는 삼십대의 남녀는 무릎을 꿇은 채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아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은 자세로 죽어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줄줄 흘러나오는 남녀는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넣고 왼팔로는 서로의 몸을 감싸 안고 있다.

회생불가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동반자살을 한 모습이다.

이남이녀의 다른 한 쌍은 부녀지간으로 보인다.

아직 앳된 모습이 보이는 소녀가 목이 부러져 죽어있으며 그 소녀의 시체 위에 중년의 남자가 엎드린 자세로 죽어있다.

소녀는 왼쪽의 팔과 어깨가 강한 힘에 으스러져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반면 중년 사내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무수히 나있지만 치명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내의 입과 코에서 검푸른 피가 흘러나와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몸을 적시고 있다.

아마도 중상을 입은 딸이 고통스러워하자 아비가 딸의 목을 졸라 죽인 후 자신도 독을 먹고 죽었을 것이다.

나머지 두 명은 노인과 소년이다.

노인은 석실 가운데쯤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작은 칼로 배를 그어 자결을 한 모습이다.

노인의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 그의 하체와 바닥을 뒤덮고 있다.

그 노인의 앞쪽에는 앳된 소년이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다.

소년의 다리 하나는 허벅지쯤에서 잘려나갔으며 길게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있다.

소년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어 다닌 듯 내장이 터져서 오물과 피로 바닥이 칠갑아 되어 있다.

소년은 고통에 몸부림을 친 흔적은 바닥뿐만 아니라 석실의 벽에도 남아있다.

소년이 양손으로 마구 긁은 흔적이 입구 맞은편의 벽에 남아있는 것이다.

벽을 얼마나 세게 긁었는지 소년의 열 손가락은 손톱이 모두 빠지거나 부러져 있고 손가락 끝은 문드러진 상태다.

(그 아이다!)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는 소년을 본 요문천은 전율했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어젯밤 동대루의 기루에서 뛰쳐나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리던 순진해보이던 소년이 배가 갈라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것이다.

소년은 바로 철접의 동생인 용차랑이었다.

그리고 철접은 용차랑의 시체 뒤쪽, 늙은 인자 시바타가 할복한 근처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다.

눈물이 말라버린 듯 철접의 눈에서는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요문천은 이내 이 석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차렸다.

철접의 어린 동생도 영락제에 대한 암살에 참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에 늙은 인자 시바타와 네 명의 남녀 인자가 용차랑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이미 되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용차랑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었을 것이고 당주의 어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늙은 인자 시바타는 할복을 했을 것이다.

동행한 네 명의 남녀 인자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했고...

지로... 지로...!”

중얼거리던 철접의 입에서 꺽꺽 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쥐어짜듯 말하며 동생의 시체 쪽으로 기어갔다.

너를... 너를 꽁꽁 묶어서라도... 여기 남겨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맥이 빠져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용차랑의 시신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

털썩!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내 용차랑에게 기어가려던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충격과 비통이 극에 달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소저!”

요문천은 급히 철접에게 달려가 그녀의 가는 목에 손을 대어 진맥을 해보았다.

철접의 목에 손을 대는 순간 차가운 한기가 느껴져서 요문천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몸이 마치 시체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내 느리게나마 뛰고 있는 맥이 느껴져 요문천을 안심시켰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심장을 아주 느리게 뛰도록 조절하고 있다. 그 때문에 몸이 냉혈동물의 그것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문천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철접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요문천은 철접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다량의 출혈을 한 상태고 또 심장 근처를 금검존이 어검술로 날린 낙일금검에 꿰뚫리고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았다.

철접은 신진대사를 느리게 조절하여 기력의 소모를 최대한 늦춰왔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심장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덕분에 왼쪽 가슴이 낙일금검에 꿰뚫렸으면서도 즉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낙일금검이 꿰뚫은 상처 부위의 체온을 극한까지 낮춰서 출혈을 막고 있다. 동영의 인자들이 자신의 몸속 장기와 신진대사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요문천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관통상을 입은 가슴을 제외한 철접의 몸에 난 다른 상처들에서는 양은 적지만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동생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철접은 정신을 놓은 상태다.

이대로 방치하면 오래지 않아 철접도 죽어버릴 게 확실하다.

(치료를 해줘야한다.)

요문천은 결심하며 철접을 석실 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그녀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늘 목숨을 내놓고 사는 인자인 만큼 효과가 빠른 비상약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뭉클!

철접의 저고리 속으로 집어넣은 요문천의 손에 차갑지만 부드러운 살덩이가 만져진다.

(날씬한 외양과 달리 의외로 풍만한 젖가슴을 지녔구나.)

요문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모인 섭대낭을 제외하면 난생 처음 만져보는 여자의 젖가슴인 탓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크기는 유모 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탄력은 훨씬 뛰어나고 매끄럽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손을 철접의 품속으로 깊이 집어넣었다.

철접의 젖가슴은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매끄러우면서도 갓 쑨 묵처럼 탱탱한 탄력을 지니고 있다.

떨면서 그 젖가슴 주변을 더듬던 요문천의 손에 곧 가죽 주머니가 하나 만져졌다.

(찾은 것같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가죽 주머니를 철접의 품 속에서 꺼냈다.

상당히 크고 묵직한 주머니다.

(자객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있겠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투둑! !

그런 후에 거꾸로 뒤집자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여러 가지 물건이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진다.

아주 얇은 표창 십여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주머니들 서너 개, 그리고 몇 개의 약통등이다.

약통들은 충격을 받아도 쉽게 훼손되지 않도록 유리나 도자기 대신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다양했다.

물약이 든 작은 병의 형태도 있고 고약이나 분말 형태의 약이 든 납작한 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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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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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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