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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난(劫難) 중의 인연 (2)

 

 

한동안 미친 듯이 사방을 뒤지던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다시 모옥 앞으로 왔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철선동시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면혈도가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고 모옥에 불을 질렀다.

곧 불꽃이 일렁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투타탁! 투탁!

불속에서 뭔가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뒤통수에 대고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한 곳이 못되는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마면혈도는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계곡의 입구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마면혈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철선동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말대가리... 아직 멀었다. 네놈의 심력(心力)은 좀 더 소모되어야 한다. 흐흐흐... 몽선도(夢仙圖)의 주인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황이 뭐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몽선도...!

몽선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얻기만 하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황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지금 철선동시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과 음모의 근원은 몽선도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불측한 의도를 품고 있는 철선동시도 걸음을 옮겨 비련곡을 빠져 나갔다.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자가 혹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휴의다.

철선동시는 불타는 모옥이 만든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밟고 곡구에 다다랐다.

화를 내며 먼저 갔던 마면혈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는 바위섬들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구나.”

임청우는 불꽃을 보면서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악귀에게 유린당한 어머니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집은 불타고 있으며, 이제 자신은 농산을 떠나야한다.

임청우 모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은 모옥 앞 초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과 약초들뿐이다.

애잔한 아쉬움이 임청우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이미 그녀와의 정이 오래전에 끊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세속에서 말하는 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임청우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청우는 고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은 네가 질렀느냐?”

임청우는 이같은 음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그러나 위엄으로 가득 차있으며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한 번 듣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있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불은 네가 놓았느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임청우는 엇!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있었다. 머리는 반백이고 네모 난 얼굴에는 짧게 깎은 수염이 은빛을 발한다.

으악!”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임청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말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은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 족했다. 노인의 어깨에 걸려있는 장검조차도 주인의 위풍에 의해 있는 둥 마는 둥하다.

노인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비틀거리는 임청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노인의 커다란 손에서 흘러나와 임청우의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임청우는 떨리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나 감히 노인의 눈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데 임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놈...!)

노인은 마음속의 커다란 놀라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히 다른 손으로 임청우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천골(天骨)이로다!)

임청우의 골격을 만져보는 노인의 눈에 놀라움과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임청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노인조차 임청우만한 골격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게다가 임청우의 몸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말 그대로 갈지 않은 원석인 셈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구나.)

임청우의 골격을 어루만지고 몸을 살펴보면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생각지도 않게 기막힌 보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임청우가 용기를 내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야(老爺)께서는 낮에 길게 소리쳤던 그분이십니까?”

길게 소리를 쳐? !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말이로군.”

검주 유소기요?”

허허허.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인물이지!”

노인은 진심으로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고 노부는 노부다. 노부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진 않아. 실상 지르지도 못하지만...!”

노인은 웃으면서 임청우의 손을 놓고 절벽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임청우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네 집이냐?”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인의 음성은 마치 사방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아니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임청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산봉과 그 위의 하늘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이곳에 이름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비련곡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비련곡?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야. 자당(慈堂)은 아마도 한이 많으셨던 분인 모양이군.”

“...”

자당은 어디 계시는가?”

노인이 임청우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임청우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흠칫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청우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있기만 했다.

노인 옆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임청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기묘한 기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폭염 중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청량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이 지나갔다.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훨씬 넘어 인시(寅時)가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연히 고개를 들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노부는 우협(愚俠) 장백승(莊百勝)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별호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협객이라니...

우협 장백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인지라 이 노인이 저 일왕(一王) 금포염왕과 비견되는 일세고수 일협(一俠)임을 알 리 없었다.

무림의 은원 때문에 환난을 겪은 것 같거늘 무림을 모른다?”

장백승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함께 살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청우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노부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저는 노야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람의 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럼 노부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게 되자 임청우는 느긋한 마음을 회복하고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선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검술(劒術)이다.”

장백승이 짊어지고 있던 검을 풀어서 내리며 말했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런 검술입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보겠느냐?”

노야께 제가 검술을 배운다면 말대가리같이 생긴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임청우는 혈도를 휘두르던 마면혈도의 공포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

장백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면혈도를 만났구나!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노야께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장백승은 곡구를 힐끗 보다가 탄식하고 말했다.

마면혈도... 그놈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이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건만...”

그는 임청우가 여전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말을 이었다.

당금의 무림에는 최절정으로 꼽히는 열 두 명의 고수가 있지. 그들을 사람들은 일왕(一王) 일협(一俠) 삼괴(三怪) 칠절(七絶)이라 부른다.”

임청우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장백승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만난 마면혈도는 삼괴의 둘째로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열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노부의 검술을 배워서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노부라 하더라도 그놈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장백승을 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장백승의 기도는 마면혈도 따위가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장백승이 태양이라면 마면혈도는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장백승이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니...

장백승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노부는 마면혈도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노야께선 함자를 <백승(百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이런 경우를 들어서 허명(虛名)이라고 하는 것이지. 백승은 이름뿐이야. 젊었을 때 노부를 가르치신 은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임청우가 다시 물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것은 무()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까?”

장백승이 그렇다고 끄덕이자 임청우는 또 물었다.

노야께서는 그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장백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명은 여기에도 있지. 일왕 일협 중의 일협이 바로 우협, 이 바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청우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일왕 다음에 일컬어지는 일협이라면 당연히 그 무공의 강함도 측량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헌데 아무도 이긴 적이 없고 이길 수도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로 보아 마면혈도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만약에 노부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이걸 증표로 종적을 물으면 노부에게 안내해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백승은 풀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임청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 장식이 없는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인데 단지 손잡이 부분에 한 마리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투박하게 음각되어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임청우가 장백승의 따스한 말에 감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협 장백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신선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장백승은 임청우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 중에 홀홀히 밤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마치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남겨져 있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장백승의 마치 천신(天神)같던 기도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 가서 노야를 찾는단 말입니까.”

임청우는 장백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장백승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더욱 초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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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겁난(劫難) 중의 인연 (1)

 

 

“쯧쯧! 하여간 계집만 보면 물건을 세운단 말이야!”

비틀거리며 초지에 내려선 철선동시는 혀를 찼다.

모옥 앞 꽃밭에서는 마면혈도가 임단심을 찍어 누른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저년이 대체 무슨 암기를 날렸기에 피할 수가 없었지?”

철선동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벅지에 박힌 철정(鐵釘)을 뽑아들었다. 새파란 빛을 발하는 길쭉한 쇠못 형태의 암기였다.

“사망정(死亡釘)!”

그 쇠못을 본 순간 철선동시는 독사라도 만진 듯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음성으로 외쳤다.

사망정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신물(信物)이다.

비록 그 인물이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공포스러운 무공과 잔혹한 술수를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철선동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허벅지의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멍석을 말아간 듯이 화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흔적은 서쪽의 절벽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마면혈도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의혹을 가슴에 품고 두려움을 손끝에 간직한 채 철선동시는 모옥 앞으로 갔다.

임단심을 화초 위에 던져놓고 겁탈하는 마면혈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둔부를 들썩이고 있고 혈도가 제압당한 임단심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그 짓이나 할 때냐 말대가리야?”

팟!

철선동시는 버럭 외치며 마면혈도의 등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면혈도는 갑자기 임단심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우라질 미친놈아! 마음이 있으면 이 형님이 먼저 즐긴 후에 즐길 것이지 도중에 방해를 해?”

마면혈도의 말의 그것처럼 거대한 남성에는 임단심을 유린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는 대신 왼손을 불쑥 그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철선동시의 손에는 사망정이라고 부르는 쇠못이 들려있었다.

“사... 사망정!”

순간 마면혈도의 성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변해버렸다.

그자는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설마 저 계집이 마황(魔皇)과 관계가 있다는 말...!”

마면혈도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강간하던 임단심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탕한 눈빛이 아니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철선동시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형이 말한 삼보면천을 저 계집이 펼쳤다. 어쩌면 대형이 찾고 있는 자는 마황, 바로 그자인지도 모른다.”

마면혈도가 거듭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그건 안돼! 안돼! 대형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마황은 결코 당할 수 없다.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철선동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대가리, 그럼 마황과 관계가 있는 계집을 강간한 자넨 무슨 짓을 한 건가?”

“으으으..."

마면혈도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마면혈도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에 속한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이같은 공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마황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마면혈도가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던 마면혈도가 갑자기 흉포한 눈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이 계집을 죽여서 수십, 아니 수백 수천 토막을 내고 기름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마면혈도의 음성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자는 혈도를 뽑아들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마황에게 불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철선동시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황이 이번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쓴 것은 말대가리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가 모르면 더욱 좋고...)

철선동시는 마면혈도가 내릴 결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기 위해 말로써 그자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교활한 심보가 깔려 있는 행동이었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쓰러져 있는 임단심 앞으로 다가간 마면혈도는 눈을 질끈 감고 혈도를 내리쳤다.

번쩍!

혈도가 붉은 빛과 함께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쉿!

한 가닥의 붉은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마면혈도의 혈도를 가로막고 튕겨나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칼도 붉은 빛이고 날아온 물건도 붉은 빛이었다.

“억!”

마면혈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자의 혈도는 금옥(金玉)을 무우 베듯 할 수 있는 보도(寶刀)다.

그런데도 옆에서 날아온 붉은 빛은 튕겨져 나갔을 뿐 베어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단심을 없애려던 순간이었다.

그때에 맞춰서 자신의 행위를 방해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마면혈도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쉬쉭!

그 사이에 튕겨져 나갔던 붉은 빛이 방향을 바꿔 다시 마면혈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번쩍! 번쩍!

마면혈도도 이번에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터텅! 쉬익!

붉은 빛은 혈도에 맞아 튕겨나갔다가 다시 빛살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마면혈도는 손아귀에서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 마면혈도를 위해 손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삼괴의 일원으로서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앙숙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상대방을 도울 관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붉은 물체가 언제 철선동시 자신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다.

철선동시는 붉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면혈도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서던 마면혈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금관혈린사! 금관혈린사다!”

그자를 공격했던 붉은 물체는 바로 척포였다.

임청우도 모르게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척포가 임단심을 죽이려는 마면혈도를 막아선 것이다. 천고의 영물답게 척포는 임단심과 임청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

마면혈도의 외침에 철선동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독사만 먹고 산다는 금관혈린사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연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마면혈도를 공격하는 붉은 물체는 머리에 황금빛 뿔이 달려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타는 듯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뱀이었다.

뱀들의 제왕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독물(毒物)들의 제왕이기도 한 금관혈린사의 모습이 틀림없다.

금관혈린사는 품고 있는 독이 지독할 뿐 아니라 도검이 불침하여 쉽사리 죽일 수도 없다.

번쩍! 텅! 텅!

그 사이에도 마면혈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금관혈린사, 즉 척포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만약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상승의 무공을 익혀 무림의 최절정 고수의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금관혈린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금관혈린사의 독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가 독기를 내뿜으면 이장 밖에 있는 황소도 쓰러뜨린다.

한데 금관혈린사는 집요하게 마면혈도를 물려고 덤빌 뿐, 독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저 놈이 왜 독기를 뿌리지 않는 건가?)

마면혈도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척포가 임단심에게 해가 갈까봐 독기는 뿜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철선동시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계집이 없어졌다!”

“뭐?”

마면혈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척포에게 물릴 뻔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다시 절벽위로 올라오려던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철선으로 내뿜은 냉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가 떠올랐다.

상하 좌우로 경계가 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광막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그 별의 바다에 비하면 자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는 실바람만도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이 깃들어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자신을 움켜쥐려던 철선동시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감각은 돌아왔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는 몸으로 절벽을 향해 굴러갔다.

철선동시의 시선을 피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임청우는 동굴 입구의 돌출부에 떨어졌다.

그곳에 누워 몇 번인가 긴 호흡을 들이고 내쉬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벌벌 기어 동굴로 기어들어간 임청우는 떠나면서 남겨두었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마귀같은 두 괴물에게 화살이 통할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헌데 화살 통을 등에 짊어지고 활은 목에 건 채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려는데 철선동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니...

어머니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벽의 삐져나온 부분을 잡고 기어 올라간 임청우는 머리만 내밀고 모옥 쪽을 살펴보았다.

“말 대가리! 넌 계곡 입구 쪽을 살펴봐라!”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에게 고함을 치며 모옥 앞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면혈도는 여전히 척포에게 밀리며 계곡 입구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 임단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작은 천 조각 하나를 임청우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본 순간 임청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앞을 스치고 절벽 밑으로 사라지는 천조각에는 어머니의 체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임단심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임청우는 그녀의 옷이 마면혈도에 의해 갈가리 베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어떤 이해하지 못할 느낌에 머리끝이 쭈뼜해졌을 뿐이다.

 

펑펑!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내어 척포를 날려버린 마면혈도는 모옥 앞에 망연하게 서있는 철선동시 곁으로 달려갔다.

임단심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척포는 더 이상 마면혈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옥 앞에 심어져 있었던 화초들은 짓이겨져 있고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임단심이 당한 무참한 유린의 흔적이다.

철선동시는 냄새로 임단심의 종적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네 곳의 마혈(痲穴)을 짚어놓았는데...”

다가온 마면혈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라진 여자가 보통 여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황과 관련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겁에 질려 모옥을 뒤지고 비련곡의 풀뿌리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허둥대는 두 괴물을 숨어서 지켜보던 임청우는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음이 틀림없다.

“저 말대가리가 어머니를...!”

임청우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저 멀리서 마면혈도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허둥대며 돌아다니고 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 말대가리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감히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죽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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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온 마두들 (2)

 

 

정말 묘한 곳이야. 여기라면 유가 놈도 우릴 쉽게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마면혈도가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의 눈에 절벽 가에 서있는 두 개의 대나무가 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나무의 위쪽, 달이 만든 절벽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임청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마면혈도의 얼굴은 더욱 말같이 보여 공포스럽다.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갔으니, 발각되기만 하면 자신은 두 토막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선동시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풍(寒風)이 불어나온다는 건 안쪽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뒤쪽마저 막혀 있다면 금상첨화고...”

캇캇캇!”

마면혈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래도 히히힝! 하고 웃지는 않는군.)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웃음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말울음 소리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신기해했다.

그 마면혈도가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봐! 얼어 죽은 놈! 도망쳐 다니는 것도 질렸으니 그만 이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자.”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바람 속에 사람냄새가 묻어있어. 골짜기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철선동시가 철선을 흔들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면혈도에게 보냈다.

그자의 말에 임청우는 자신이 발각된 줄 알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죽마에서 떨어질 뻔 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죽여야지.”

휘익!

마면혈도가 등에서 혈도를 꺼내들고 앞장서서 비련곡 안으로 사라졌다.

철선동시는 느긋한 웃음을 흘리면서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마면혈도를 따라갔다.

임청우는 두 괴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죽마에서 내려왔다.

죽마를 절벽 그늘진 곳에 숨겨놓은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좁고 긴 계곡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모옥 쪽에서 앙칼지게 외치는 어머니 임단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싱싱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하하핫! 늙은 암고양이가 살고있을 줄은 몰랐는걸.”

즐거운 듯 웃는 마면혈도의 웃음소리가 임단심의 음성에 이어 들려온다.

바닥에 엎드린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등이 보이는 곳까지 기어갔다.

!

그 직후 모옥의 문을 부수고 어머니 임단심이 날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빼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임청우도 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날아 나와 선녀처럼 옷깃을 나부끼며 내려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놀라 눈이 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다.

철선동시는 한쪽으로 슬쩍 비키면서 웃고 말했다.

이같은 경계에 이인(異人)이 살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지. 한데 신법을 보아하니 우리와 동류(同類)인 듯하군.”

... 당신은!”

임단심은 시뻘건 칼을 들고 서있는 괴물같은 마면혈도의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마면혈도...!”

그녀는 주춤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았다.

크캇캇캇! 본좌를 알고 있다니... 그럼 저 친구도 알아보겠는가?”

마면혈도가 광소를 터뜨리고 철선동시를 가리켰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임단심은 철선동시 역시 알아보고 파리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흉포하기로 유명한 삼괴(三怪) 중 두 놈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삼괴...!

일왕(一王) 일협(一俠)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자들은 사파(邪派)를 대표하는 고수들로서 독선적이고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이었다.

삼괴의 첫째는 무비옹(無比翁)이라 불리는 늙은이인데 외호를 스스로 지은 자다.

무비(無比)라는 말은 견줄 곳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오만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비옹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삼괴의 둘째인 마면혈도와 세째인 철선동시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비옹의 무공이 두 사람에 비해 월등할 뿐만 아니라 흉폭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비옹을 본 사람도 거의 없고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더더욱 없다.

대신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지가 찢어지고 몸통은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가 발견되면 그것이 무비옹의 짓이라고 사람들은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그 흉악 잔인함은 이름 그대로 무비, 견줄 곳이 없는 인물이 무비옹이다.

삼괴의 둘째 마면혈도는 살인과 방화, 강간을 밥 먹듯이 하는 자다.

삼괴의 셋째이며 강시(疆屍)같은 몰골을 한 철선동시는 교활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이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나 형제마저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자가 철선동시인 것이다.

 

(오늘밤 어쩌면 나 혈관음(血觀音) 임단심의 모진 목숨이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임청우의 어머니, 혈관음 임단심은 푸른빛이 감도는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삼괴의 우두머리인 무비옹이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삼괴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비록 첫째인 무비옹이 함께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임단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면혈도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흐! 약간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팽팽할 것 같군. 이 나으리를 즐겁게 해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어.”

그자의 주먹덩이 같은 눈동자가 음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임단심은 흠칫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면혈도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인과 강간을 저지른다는 말은 익히 들었었다.

그러나 임단심은 이내 차가운 눈빛을 내쏘며 분노에 저민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 네놈 따위가 감히...”

번쩍!

순간 한줄기 혈광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위험하다!)

임단심은 날카로운 도기를 느끼며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흔들리며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스악!

그러나 혈광은 허공에서 빙글 방향을 돌리더니 임단심의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싸늘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얽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흐흐흐...”

혈도 끝을 임단심의 가슴에 댄 마면혈도가 음탕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삼보면천(三步免天)! 세 걸음이면 하늘의 그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보법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사성(四成) 수준의 삼보면천으로는 이 나으리의 혈도를 피할 수 없지. 자 순순히 옷을 벗어라.”

사삭!

마면혈도가 칼끝을 약간 아래로 내리자 임단심의 앞가슴 옷이 예리하게 베어지며 흰 속살이 드러났다.

임단심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와 수치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녀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삼보면천이라고?”

그때 한쪽에 서있던 철선동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임단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해라! 삼보면천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 그렇지. 대형께서 삼보면천을 사용하는 자를 보면 즉시 잡아두라고 하셨지!”

마면혈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설마 내 신분을 알아차린 것일까?)

임단심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 괴물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기화요초가 무성한 초지에 엎드려서 보고 있던 임청우는 다급해졌다.

그 바람에 척포라고 이름 지어준 금관혈린사가 호리병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마면혈도가 혈도로 어머니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그는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주먹만한 돌을 주워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마면혈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

바람소리를 들은 마면혈도는 뜻밖이라는 듯 몸을 빙글 돌리며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돌을 낚아챘다.

누구냐?”

철선동시도 벼락같이 소리치며 임청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화악!

날아오며 휘두르는 그자의 철선에서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같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들켰다!)

휘리릭!

임청우는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의 몸에 깔린 화초와 약초들이 땅에 납작하게 눌려졌다.

쩌저적!

임청우가 누워있던 곳의 기화요초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철선동시가 휘두른 철선에서 뿜어진 지독한 냉기 때문이다.

재빨리 몸을 굴렸지만 임청우도 그 냉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털썩!

머릿속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기화요초 사이에 널부러졌다.

암고양이뿐 아니라 쥐새끼도 숨어있었구나!”

철선동시가 까마귀같은 음성으로 웃으며 임청우를 덮쳐왔다. 그자는 아직 임청우가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임은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헌데 철선동시가 막 임청우를 낚아채려 할 때였다.

쉬쉬쉭!

돌연 미미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크윽!”

그와 함께 마면혈도의 쥐어짜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마면혈도의 비명소리에 임청우를 낚아채려던 철선동시는 급히 허공에서 빙글 돌아 솟구쳐 올랐다.

우욱!”

직후 철선동시 역시 허벅지에 예리한 흉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몸이 기우뚱했다.

철선이 뿜어낸 냉기에 피가 얼어붙어서 널부러졌던 임청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휘리릭!

정신이 돌아오자 임청우는 다시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구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벽 쪽으로 굴러가는 임청우의 눈에 얼핏 어머니가 무언가를 던진 자세로 훌쩍 물러서는 것이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임청우의 몸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몇 번 구른 사이에 절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크윽!”

마면혈도는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자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길이 한 뼘쯤 되는 쇠못이 목에 박힌 것이다.

하지만 그 쇠못은 피부를 뚫고 들어왔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피가 심하게 뿜어지는 것은 목을 지나는 혈관중 하나가 찢어진 때문이다.

쿨럭! 쿨럭!”

임단심도 연신 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

마면혈도는 목에 박힌 쇠못을 확 잡아 뽑아 멀리 집어던지면서 짐승같이 고함쳤다.

쉬쉭!

흐윽!”

직후 혈도가 빛을 발하고 혈광이 어지럽게 번득이는가 싶더니 임단심이 걸친 옷이 조각조각 나서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이이... 천한 것이 감히...”

삽시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이 되어버린 임단심은 급히 치부를 가리면서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입가에 가득한 선혈과 살기어린 그녀의 눈빛에 마면혈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면혈도는 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을 적시자 다시금 강한 분노와 함께 음욕이 들끓어 올랐다.

임단심은 마면혈도가 날아온 돌을 잡느라 뒤를 돌아보고, 철선동시가 임청우를 향해 몸을 날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세 대의 쇠못을 발출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상이 발작하여 기혈이 막혀버렸다.

그 때문에 공력의 상당부분이 흩어지면서 쇠못의 겨냥도 약간 비틀어져 버렸다.

바로 코앞에 있던 마면혈도의 목을 겨냥했던 쇠못은 요혈을 조금 비켜서 박혀버렸다.

철선동시의 등을 노렸던 나머지 두 대의 쇠못 중 하나는 그자가 피해버리고 겨우 한 대 만이 허벅지에 격중 되었을 뿐이었다.

(... 틀렸나?)

아득한 절망감이 임단심을 휩쓸었다.

흐흐흐... 두 번 다시 뻗대지 못하게 해주마.”

마면혈도가 음욕을 참지 못하는 웃음을 흘리며 칼을 흔들었다.

흐윽!”

붉은 빛이 눈앞에서 다시 한 번 번득이는 순간 임단심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스름 달빛 아래 혈도가 봉쇄되어 쓰러진 그녀의 나신이 파랗게 빛났다.

흐흐흐...”

마면혈도는 칼을 집어넣고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임단심의 얼굴은 서른을 넘긴 나이와 오랜 투병생활에 초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내를 뇌쇄시킬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우악스런 손길로 임단심의 알몸을 화초들 위로 집어던지고, 그 위로 숨을 씩씩거리며 덮쳐갔다.

내상이 도져 정신이 혼미해진 임단심은 배추 속같이 새하얀 두 팔을 양쪽으로 힘없이 떨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헌데 그런 그녀의 왼쪽 팔뚝에는 작고 붉은 점 하나가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수궁사(守宮沙)!

그것은 바로 처녀(處女)의 상징이라는 수궁사였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처녀의 상징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토록 고이 지켜온 처녀성이 지금 색마의 손길아래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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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온 마두들

 

 

밤공기가 서늘하다.

독수리들의 부리에 찢기고 피에 절은 옷을 벗어버린 탓에 벌거숭이가 된 상체에 소름이 돋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웃은 임청우는 모옥 앞으로 가서 바닥에 흩어진 약초들을 주워 모았다.

뿌리 채 뽑아온 약초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에 심고 물을 주었다.

나머지는 그늘에 말려놓은 다른 약초들과 함께 부엌으로 가져가서 다렸다.

침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약사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아려 보니 오늘은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만에 만난다는 날이지만, 임청우는 어머니를 떠나가야만 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

 

***

 

모옥을 나온 임청우는 서쪽의 절벽으로 갔다.

천길 벼랑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길 정도 아래쪽에는 임청우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인 작은 동굴이 있다.

임청우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동굴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에 내려섰다.

절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는 임청우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다.

입구 맞은편에는 임청우가 직접 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든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위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도 임청우가 힘들게 모은 책 수십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임청우는 돌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름등에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후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끼이!

호리병을 돌침대 위에 내려놓자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삐죽 내밀며 두리번거린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라.”

임청우는 이불과 함께 개어놓은 여벌의 옷을 집어들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영물답게 금관혈린사는 머리를 다시 호리병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치는 자식이라니...!)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자신의 팔자가 너무도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안의 물건들 중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수십 권에 이르는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렵게 채집한 약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한 산짐승들을 팔아서 산 책들이다.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그 책들은 임청우가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견뎌온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옛 성현들의 지혜가 깃든 책을 읽을 때만큼은 비참하고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귀하지 않은 건 단 한권도 없다.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니 다 가져갈 수는 없다.

다른 책들은 굳이 가져갈 필요 없고... 장자(莊子)와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일옹청풍일지(一翁淸風日誌)만 가져가자.”

임청우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단 두 권만 챙겼다.

장자는 도교(道敎)의 비조(鼻祖)인 노자(老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일컬어지는 장주(莊周)의 존칭이면서 그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옹청풍일지를 쓴 육일거사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당나라의 한유(韓愈)의 뒤를 이어 고문(古文)을 일으켰던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스스로 정한 호().

말하기를, 집고록(集古錄) 일천 권과 장서(臧書) 일만 권, 거문고 한 채, 바둑판 한 개가 있고 항상 술 한 단지를 두고 구양수 자신이 늙어가니 이를 육일(六一)이라 한다고 했다.

임청우는 또 다른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던 구양수를 좋아했다. 그의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칠 것이 없는 장자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임청우는 장자와 일옹청풍일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저 책 두 권을 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든든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임청우는 동굴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늘 어머니의 학대와 독설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이 동굴로 숨어들면 안전하고 편안했었다.

정이 들었던 피신처를 떠나려니 복잡한 감회가 치밀어 오른다.

동굴을 둘러보던 임청우의 눈에 금관혈린사가 들어있는 호리병이 들어왔다.

금관혈린사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 영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뱀은 뱀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꺼림칙한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청우는 호리병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끼이!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리병이 약간 흔들리더니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한다. 나를 따라 갈 테냐 여기에 남을 테냐?”

임청우는 붉은 보석같은 금관혈린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스르르르!

임청우의 말을 들은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리병의 잘룩한 부분을 꼬리로 감아 끌면서 임청우에게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

임청우가 확인하듯 묻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너라도 길동무가 되어주면 덜 쓸쓸하겠지!”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자 금관혈린사도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들을 긴 혀로 핥았다.

대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너 먹기 없기, 너는 나 먹기 없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해결하기다.”

임청우의 말에 금관혈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 뭐가 좋을까?”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관혈린사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임청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먹이의 길이를 먼저 잰 후에 먹는 게 네 식성이니까 척포(尺飽)라고 하자!”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북두무랑 앞에서 몸길이를 재어 똑같은 길이의 뱀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척포, 어때? ?”

임청우가 묻자 금관혈린사는 고개를 주억 거려 좋다는 표시를 했다.

좋다고? 그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척포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르르!

척포라는 이름을 얻은 금관혈린사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호리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되자 친구를 대신 얻게 되었구나.”

임청우는 척포가 들어간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몸, 세상에 나서는데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겠는가? 어차피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는데...”

척포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차며 임청우의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비록 미물이긴 해도 동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늘 하던 대로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는 돌출부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국자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이다.

모옥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임청우가 다가가자 모옥 안쪽에서 임단심의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납니다 어머니!”

임청우는 모옥을 향해 절을 했다.

, 마음에도 없는 헛치레는 집어 치워라.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넌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겠느냐?”

저는 그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임청우는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한다고 비꼬는 것이냐?”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모옥의 문이 덜컹 열렸다.

죽일 놈!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놔?”

이를 바득 갈며 집 밖으로 나서는 임단심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여서 귀기스럽다.

평소였다면 임청우는 어머니가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아비가 누구냐고?”

임청우를 노려보는 임단심에게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임청우는 말없이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단심의 표정과 눈빛이 짧은 사이에 여러 번 변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목숨이 몇 번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눈 몇 번 깜박이는 정도로 짧았지만 임청우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났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이윽고 임단심이 침묵을 끝냈다.

금포염왕을 찾아가서 물어봐라. 그럼 네 아비가 누군지 가르쳐줄 것이다.”

임단심은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임청우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으며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인적 드물고 궁벽한 농산에서 살아온 탓에 금포염왕이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의 뇌리에는 어떤 인물의 형상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북두무랑을 빠져나올 때 진법 속에서 보았던 인물!

태산처럼 웅장하게 느껴지는 몸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이 안개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관혈린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안개 속에 누군가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포염왕... 금포염왕이란 인물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인지요?”

임청우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네놈을 위해서 더 말해줄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임단심의 매정한 말이 임청우에게서 모든 기대를 앗아갔다.

그러시다니 소자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필요한 약초는 대부분 옮겨 심어놓았으니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임단심에게 절을 하고 일어난 임청우는 계곡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금포염왕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살기와 연민이 망설임으로 반죽이 되어 그녀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은밀하게 쥐어져 있던 머리가 뭉툭한 한 대의 철정(鐵釘)이 쩡! 소리가 나면서 떨어졌다.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단심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결국 내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구나.”

헌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임단심은 마침내 왁! 하고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임청우의 모습은 이내 좁고 어두운 계곡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청우! 네 놈을 세상으로 내쫓는 진짜 이유는 고질이 되어 버린 내 내상(內傷) 때문이다. 바로 네 아비에게 당한...”

잇달아 두 번 더 피를 토한 임단심은 가슴을 부여잡고 뇌까렸다.

더 이상 네 놈을 괴롭힐 수도 없기에...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무림에 내보내 고생하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원한 맺힌 눈으로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임단심은 비틀거리며 모옥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옥 앞 초지에 가득 심겨져 있는 화초와 진기한 약초들만이 바람결에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

 

임청우는 세상을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어머니란 존재마저도 잊어버리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비련곡(悲戀谷) 입구에 다다랐다.

곡구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늘 내뱉는 말처럼 자기가 인간같지 않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걸려있는 호리병을 툭 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척포란 놈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 화난 듯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쏙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비련곡 밖에 있는 천류폭포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다.

임청우는 한쪽 절벽에 세워둔 대나무 죽마를 집어 들었다.

곡 밖에 있는 호수 같이 넓게 퍼진 물이 비록 깊지는 않지만 그냥 건너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배를 이용할 만한 곳도 아니다.

대나무 죽마는 임청우가 비련곡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다.

한데 그가 막 대나무 죽마에 올라타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익!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새처럼 날아 들어와 비련곡 입구에 내려섰다.

임청우가 서있는 곳은 절벽 아래쪽의 달빛 그림자에 가리워진 부분이라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청우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인물이 그에게서 불과 일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저 괴물들이 어떻게 여길...)

임청우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난 자들은 그가 낮에 표운봉에서 만났던 마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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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이 새겨지다.

 

 

안개의 벽속에는 여전히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형상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법에 의해 만들어진 환각일 거라고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임청우였다.

기괴한 형상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임청우는 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에 찍혀있는 광점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안개의 벽을 절반 쯤 지났을 때였다.

“...!”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기괴한 형상들의 모호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같이 강렬한 시선이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뭐지?)

임청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수많은 기괴한 형상들 속에 어떤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서 임청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모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옷!

건장한 몸에 걸쳐진 화려한 비단옷은 무채색인 기괴한 형상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부각된다.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진법 속에 있다.)

임청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인물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부르르!

바로 그때 허리춤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호리병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뱀 중의 왕인 이놈이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임청우는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물이라 보지 않고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건데...)

호리병에 잠깐 시선을 돌렸던 임청우는 다시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속으로 반문해보았다.

(나 혼자 잘못 본 것이라면 영통한 이놈까지 두려움에 떨 리가 없다.)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아직도 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임청우는 자신이 결코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임청우는 겁에 질려 안개의 벽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훼손된 북두무랑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임청우가 안개의 벽 속에서 보았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

북두무랑으로 들어선 인물은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참하게 훼손된 북두무랑의 참상이 그 인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임청우조차 분노했던 만행을 보면서도 그 인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서있던 그 인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사사!

그 인물이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훼손되었던 북두무랑의 양쪽 벽이 매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매끈해진 벽면에는 수많은 글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던 무학비결들이었다.

북두무랑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진 흑옥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벽 속에서 북두칠성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고 북극성 자리에는 북두홀이 끼워져 있다.

달칵!

그 인물이 손을 대자 북두홀은 간단하게 흑옥의 벽에서 분리되었다.

“...”

벽에서 떼어낸 북두홀을 어루만지는 그 인물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한숨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인물은 오른쪽의 월동문으로 나왔다.

북두무랑을 나온 그 인물은 월동문 옆에 새겨져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인물은 벽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파팟!

그러자 불꽃과 돌가루가 튀며 새로운 이름이 서명에 추가되었다.

서명의 맨 아랫줄에 새겨진 이름은 <林靑牛>였다.

 

***

 

농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류폭포(天流瀑布)는 높이가 오십 장이 넘는다.

높을 뿐 아니라 수량도 엄청난 폭포다. 혹시 세상이 너무 좁아서 천류폭포가 쏟아내는 물로 인해 잠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다.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수는 호수처럼 넓게 퍼졌다가 다시 급해지고 가늘어지면서 황하(黃河)로 흘러간다.

물이 퍼지면서 만들어진 호수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을 서서 왼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그 왼쪽 봉우리 아래쪽에는 진짜 말의 귀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말의 귓구멍 같은 부분은 아래위로 좁게 갈라진 틈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그 틈새 안쪽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계곡이 숨겨져 있다.

 

별들 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밀고 물위에는 별들이 아가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빛을 발한다.

어둠이 농산에 무게를 주어 만물을 침묵하게 했다.

오직 특권을 허락받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밤의 적막을 깰 뿐이다.

첨벙! 첨벙!

문득 물소리가 들리며 키가 껑충하게 큰 괴물이 폭포 아래쪽의 호수에 나타났다.

반달을 등지고 나타난 괴물의 다리는 두 개뿐인데 아주 가늘면서 길이는 무려 이장(二丈;6미터)이 넘는다.

괴물의 몸뚱이는 그 긴 다리의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몸뚱이의 허리 어림에는 대가리인 듯한 것이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첨벙! 첨벙!

괴물은 기다란 다리로 한 번에 일장 넘게 움직여 호수를 가로질렀다.

징검다리처럼 깔려있는 바위섬들을 지난 괴물은 왼쪽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다가갔다.

말의 귓구멍인 듯 움푹 들어간 계곡 입구는 수면에서 일장 남짓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이른 괴물의 몸뚱이가 마치 줄을 타는 거미처럼 다리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윽고 계곡 입구에 내려선 그것은 괴물도 뭐도 아닌, 망태를 짊어진 소년이었다.

바로 해질 무렵 표운봉 아래의 계곡을 떠난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길이가 이장이 넘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竹馬)를 사용하여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두개의 대나무 죽마를 암벽에 기대어 놓은 임청우는 계곡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휘이잉!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찬바람이 불어나온다.

이곳은 농산의 다른 곳과 달리 한여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다.

 

바위 사이의 좁고 긴 틈새가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서있다.

모옥 앞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가 있고, 모옥 옆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다.

모옥은 절벽 위의 암반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모옥 바로 앞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를 지나며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 꺼진 모옥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이 깊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머니!”

덜컹!

임청우는 급히 모옥의 문을 열었다.

쉬잇!

헌데 문이 왈칵 열린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모옥 안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임청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짜악!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임청우의 오른쪽 뺨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

콰당탕!

임청우는 시리도록 새하얀 손에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무고하셨군요.”

하지만 임청우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 볼을 문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응당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임청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별일 없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시냐?”

모옥 안쪽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경(三更;11~새벽 1)에 막 접어든 것 같습니다.”

임청우는 밤하늘의 별 자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북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국자가 왼쪽으로 많이 일어서 있다.

갑자기 피핏!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임청우의 어머니 임단심이다.

반 시진(한 시간)만 지나면 오늘도 끝이다.”

기름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인 임단심이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경고한 대로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라. 일각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내손으로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임청우를 돌아보는 임단심의 눈이 새파란 빛을 흘린다.

어머니는 온통 저를 죽일 생각뿐이시군요.”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상 당해온 냉대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자정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네 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임단심은 표정을 굳히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그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는 않겠군요.”

화악!

임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으려던 임단심이 유령처럼 임청우를 덮쳐왔다.

!

약초가 담긴 망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임단심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지만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임청우는 망태를 들어 뺨을 가렸던 것이다.

임단심이 임청우가 서있던 곳에 내려섰을 때 임청우는 서쪽으로 다람쥐처럼 달려가 절벽 끝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모습도 아니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늘상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듯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어머닌 저를 죽일 수 없어요. 벌써 천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실패만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은 놈!”

임단심이 살기어린 눈으로 임청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은 그 귀신같은 눈치도 눈치지만 내게 네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각기 반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

임청우의 말을 들은 임단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그러나 임청우는 절벽가로 한걸음 더 물러섰을 뿐,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병이 깊어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께서 저를 괴롭히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인들 더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저를 죽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왜 절벽가로 도망치느냐? 죽지 않을 자신 있다면서...”

무엇이든 참는 것이 수양(修養)에는 더할 바 없이 좋은 것이라지만...”

임청우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통을 당한다는 건 왠지 사람답지 않은 것같아서입니다.”

임단심은 무서운 눈초리로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닫혀진 방문 안쪽에서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사람이 아니다. 네놈의 아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임청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살수(殺手)에 수시로 노출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태연히 웃으며 응대하던 임청우였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 한마디에 고소를 지으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작은 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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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뱀을 먹는 뱀

 

 

퍼억!

임청우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억겁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임청우는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근육이 열기에 녹은 엿가락처럼 풀어지고 관절 마디가 전부 벌어져버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에 젖은 솜처럼 퍼져 누운 채 임청우는 멍하니 흑옥의 벽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깊고도 검은 흑옥의 벽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이 내 몸 속으로 빨려 들어왔던 것같은데...)

투명하게 변해가던 자신의 몸으로 북두칠성이 하나씩 흡수되었었다.

환각인가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인간의 생사와 운명,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차례차례 임청우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었었다.

덕분에 광활한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가던 임청우는 다시 형상을 갖추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임청우였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모른다.

이윽고 풀어졌던 근육에 탄성이 돌아오고 벌어졌던 관절도 맞물려졌다.

임청우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옥의 벽에 박혀있는 북두홀을 만져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임청우는 아쉬움을 남기고 흑옥의 벽 앞을 떠났다.

 

***

 

임청우는 북두무랑을 나왔다.

두 개의 월동문 중 <>자가 새겨진 오른쪽 월동문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북두무랑 안에서 보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단 한 구절의 무공비결도 얻을 수 없었다.)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북두무랑을 나섰다.

(하긴 기연이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림고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밖으로 나온 임청우는 아쉬운 마음에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왼쪽 월동문처럼 오른쪽 월동문 옆의 벽에도 상당히 많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게 들어왔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글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서명은 수십 줄인데 한 줄에 하나의 이름만 새겨진 경우도 있고 십여 개가 나란히 적혀있기도 했다.

(살아서 북두무랑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한 줄이 한 세대를 의미할 테고...)

임청우는 서명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았다.

윗부분의 십여 줄은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어서 판독이 불가능했다.

중간쯤부터는 읽을 수가 있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이름의 주인이 직접 새겨 넣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름들 가운데 임청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을 살펴보자. 어쩌면 북두무랑을 훼손한 범인도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몸을 숙여서 맨 아랫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천영(趙天永), 번리충(樊利忠), 풍건군(馮建軍), 왕천달(王千達), 당소광(唐小光), 양시우(梁翅祐)...

여섯 개의 서명 중 앞쪽의 다섯 개는 파인 부분의 색이 절벽과 비슷하다. 이름을 새긴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양시우(梁翅祐)라는 이름에는 바위 안쪽의 밝은 색이 남아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그 이름이 새겨진 후 이십 년 이상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찾았다! 바로 이자다!”

임청우는 마지막에 새겨진 서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풍화된 정도로 봐서 양시우란 이 이름은 북두무랑의 무학비결들이 훼손되었을 무렵에 새겨졌다. 거의 틀림없이 이자가 범인이다!”

임청우는 양시우라는 자가 북두무랑을 통과한 후 다른 사람이 북두무제의 무학비결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해버렸음을 확신했다.

하긴 범인을 알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북두무제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북두무랑의 상태나 알려주도록 하자.”

임청우는 월동문을 등지고 돌아서 안개의 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헌데 임청우는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기겁하며 멈춰 섰다.

월동문 앞쪽의 땅 바닥에 수많은 뱀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한 뼘 쯤 되는 작은 새끼 뱀이 있는가 하면 대들보만한 크기의 구렁이도 보인다.

그 많은 뱀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미동도 않고 누워있다.

... 이 뱀들, 왜 갑자기 몰려든 건가?”

소스라치듯 놀란 임청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산을 타다보면 뱀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저 놈 뭐하는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임청우는 금관혈린사를 발견했다.

금관혈린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뱀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인데 하는 짓거리가 기이했다.

그 놈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거만하게 고개를 세운 채 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뱀 옆에 이르면 쭉 몸을 펴서 길이를 잰다.

금린혈관사가 자기 옆에 몸을 누이면 비교당하는 뱀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에 길이를 잰 뱀은 금관혈린사보다 한 뼘쯤 더 크다

툭툭!

금관혈린사는 불만스럽게 그 뱀을 꼬리로 건드렸다.

금관혈린사의 꼬리에 닿은 뱀은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안도하며 긴장을 푼다.

다른 뱀들의 길이를 재고 있는 건가?”

임청우가 어리둥절할 때 금관혈린사는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떠는 그 뱀 옆에 몸을 쭉 펴며 누웠다.

이번에는 길이가 딱 맞다.

쉿쉿!

그걸 확인한 금관혈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쳐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스스스! 사사삭!

그러자 다른 뱀들은 안도하며 일제히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있고 조각상처럼 보이는 시체들 사이로 숨는 놈도 있다.

이제 동굴 앞쪽의 바닥에는 금관혈린사와 그놈이 길이를 잰 놈만이 남았다.

(죽은 듯 누워있던 뱀들이 마치 황제의 칙명을 받은 신하들처럼 흩어진다.)

임청우가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감탄할 때 금관혈린사는 홀로 남은 뱀의 머리를 붉은 혀로 핥았다.

금관혈린사의 혀가 머리에 닿은 뱀은 보기에도 딱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

(뭘 하려고 몸길이를 비교했을까? 설마 짝짓기 상대를 찾은 것일까?)

임청우가 의아해할 때였다.

금관혈린사가 남아있는 뱀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뱀을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뭐야? 잡아먹기에 적당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길이를 재본 건가?”

후루룩!

임청우가 놀라는 사이에 금관혈린사는 순식간에 뱀을 다 삼켜버려서 꼬리만 입 밖으로 나와 흔들리고 있다

참 빨리도 먹는다!”

그 꼬리마저 이내 삼키는 금관혈린사를 보며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끄억!

자기 몸 길이만한 뱀을 삼킨 금관혈린사는 사람처럼 트림까지 하는데 어느덧 그놈의 몸은 전보다 배로 통통해져 있었다.

트림까지하고... 참 골고루 한다.”

꼬르륵!

쓴웃음을 짓는 임청우의 배에서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저놈이 배 채우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출출해지는구나. 먹을 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면서 백초주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간다.

그러자 배를 채우고 누워있던 금관혈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꼴꼴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임청우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금관혈린사가 그의 발치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왜 또?”

임청우는 경계하며 호리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거냐?”

임청우가 혹시나 해서 묻자 금관혈린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참... 뱀이 술을 달래기도 하고...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임청우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리병을 금관혈린사의 머리 위로 가져가 기울였다.

조금 맛만 봐라. 넌 덩치가 작아서 술에는 약할 거다!”

쪼르르!

임청우가 아래로 기울이는 호리병에서 술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금관혈린사는 그 즉시 입을 쩍 벌려서 술을 받아마셨다.

술맛 좋지? 백가지 약초를 삭혀서 만든 백초주라는 거다. 내가 이래 뵈도 사냥과 채약뿐 아니라 술도 잘 담근다는 거 아니냐?”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에게 술을 먹이며 자랑할 때였다.

!

갑자기 금관혈린사가 호리병 입구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임청우는 기겁하며 호리병을 쳐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금관혈린사는 단번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관혈린사는 머리에 뿔도 달려있고 식사를 한 직후라 몸통도 호리병 입구보다 더 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혈린사는 마치 연기나 물처럼 변해 호리병에 들어가 버렸다.

놈은 임청우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빨리 나와! 잘못 하면 너 뱀술 된다!”

당황한 임청우는 호리병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금관혈린사가 다시 불쑥 머리를 호리병 밖으로 내밀었다.

끄억!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트림을 한다.

호리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 그 새 남아있던 술을 다 마신 거냐?”

스르르!

임청우가 놀라는데 금관혈린사는 뿔을 몸통에 찰싹 붙이더니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롱! 고로롱!

이어 호리병 속에서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술 병 속에서 잠들고... 뭐 이런 벽창호가 다 있는 건가?”

임청우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금관혈린사는 호리병 속이 아늑해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을 꺼내려면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을 찢어야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호리병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

어쩔 수 없이 금관혈린사를 넣은 채 호리병을 가져가야한다.

하긴 너같은 친구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잘 자라! 술 깨면 풀어주마!”

임청우는 호리병을 허리띠에 묶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길 빠져 나가자!”

호리병을 허리에 찬 임청우는 서둘러 안개의 벽으로 다가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흐려졌지만 점점이 광점이 남아있다. 금관혈린사가 임청우를 안내하며 남겼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청우는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는 광점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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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두무랑(北斗武廊), 천하제일인을 만드는 복도

 

 

표운봉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안개의 벽을 빠져나온 임청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청우가 들어선 곳은 계곡의 막다른 곳인데 아주 높은 안개의 벽이 반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다.

(내가 통과한 안개의 벽은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의해 형성된 게 틀림없다. 안개 속에서 배회하던 기괴한 존재들도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 테고... 만일 뿔 달린 작은 뱀이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절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안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을 살펴보았다.

삼십여 장쯤 앞쪽에는 얼마나 높은지 정상 부분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서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그 절벽은 마침 서쪽 멀리에서 비치는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는 <北斗武廊>이라는 사람크기 만한 글씨들이 옛날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북두무랑(北斗武廊)...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무예의 복도라는 뜻인데...“

임청우는 절벽에 세로로 새겨진 큰 글씨들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북두홀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북두무랑이라는 글과 북두홀이 관련이 있는 기분이 든다.

쉬쉭!

그 사이에도 임청우를 인도한 금관혈린사는 절벽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금관혈린사를 따라가던 임청우는 절벽 아래쪽에 두 개의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륙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뚫려있는 그것들은 멀리서 봐도 천연동굴은 아니다. 동굴 입구가 원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월동문을 방불케 한다.

그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앞쪽 바닥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널려있었다. 앉거나 누운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은 얼추 보기에도 백여 개나 된다.

(시체!)

헌데 절벽으로 다가가던 임청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각상들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시체였기 때문이다.

앉고 누운 시체들은 모습이 다양할 뿐 아니라 죽은 시기도 제각각으로 보였다.

이끼로 뒤덮여 진짜 조각상처럼 보이는 해골이 있는가 하면 아직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도 있다.

육탈(肉脫)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아서 살이 붙어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나 몸이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빠져 죽은 사람들일까?)

임청우는 곁눈질로 시체들을 훔쳐보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산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시체나 해골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거의 백여 구의 시체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임청우는 각가지 형상을 한 시체들 사이를 지나 두 개의 동굴이 뚫려있는 절벽 아래쪽에 이르렀다.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중 왼쪽 것의 위쪽에는 <>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동굴 위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과 출()... 왼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오라는 뜻인데... 주화입마에 걸려 죽은듯한 시체들도 그렇고... 여긴 어떤 무림 문파의 성지인 모양이다!)

두 개의 월동문을 살펴보며 임청우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이런 걸 기연(奇緣)이라고 하나? 잘하면 절세의 무공비결을 얻어 무림인이 될 수도 있겠다!)

임청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입()자가 새겨진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갔다.

금관혈린사는 왼쪽 월동문 입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놈은 임청우를 여기까지 안내한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 여기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는 금관혈린사를 지나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가니 문 옆의 매끈한 벽에 글이 여러 자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북두무랑이란 곳을 통과하기 전에 읽어야하는 안내문인가?”

임청우는 가까이 다가가 글들을 읽어 보았다

 

<고금 이래 존재한 거의 모든 무공을 연구한 후 최악의 난제(難題)들만을 모아 북두무랑에 남긴다. 북두무랑을 통과하며 노부가 남긴 난제들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능히 세상을 굽어볼 수 있으리라.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

 

그리 길지 않은 글의 내용이다.

풍화된 상태로 보아 글이 새겨진 후 수백 년의 세월은 족히 흐른 것같다.

북두무제 섭장홍... 북두무랑을 조영한 분인 것같은데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임청우는 북두무제 섭정홍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다.

철이 든 이래 어머니와 단 둘이 외진 산중에서 살아온 탓에 무림에 대한 임청우의 견문은 일천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북두무제 섭장홍은 성당(盛唐) 시절의 인물이다.

아득한 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견문도 일천한 임청우가 알 리 없다.

무공과 관련된 최악의 난제들만을 모아놨다면 나같은 일초무학(一招無學)은 기웃거릴 곳이 못된다.”

내심 기연을 기대했던 임청우는 실망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다.

그런 그에게 무림 역사상 최고 난이도의 문제들이라면 전혀 쓸모가 없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시체들은 북두무제께서 남긴 무학의 난제들을 풀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희생자들이겠구나.)

임청우는 절벽 아래 널려있는 시체들의 사인이 무언지 짐작이 갔다.

북두무랑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임청우는 용기를 냈다.

(나같은 일초무학이 난해한 무학비결을 접한다고 주화입마에 빠질 리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

임청우는 긴장하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수가...!”

헌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선 직후 임청우의 눈이 충격과 분노로 부릅떠졌다.

 

북두무랑은 말굽자석이나 말의 편자 형태로 절벽을 파서 만든 복도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천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빛이 나는 구슬들이 박혀있어 그리 어둡지 않다.

전체 길이가 오십여 장인 말굽 형태의 복도 벽에는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었다.

헌데 그 글들을 누군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서 훼손시켜버렸다.

... 어떤 자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북두무제라는 분께서 남긴 무학비결들을 전부 훼손해버렸잖아!”

임청우는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가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복도에 새겨져 있던 글들은 철저하게 훼손되어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북두무제가 남긴 무학비결을 보길 원치 않은 누군가의 짓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북두무랑은 죽었다. 북두무랑이 죽어버렸으니 북두무랑을 바탕으로 세워졌을 문파도 절맥(切脈)되었다고 봐야한다.”

임청우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며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 판독이 가능한 글이 남아있을까 했던 임청우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두무랑의 무학비결을 훼손한 자의 만행은 실로 철저해서 단 한자의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임청우는 글자 대신 그림을 한 폭 발견할 수 있었다.

북두무랑의 가장 안쪽, 입구 쪽의 복도가 일단 끝나는 곳에 그 그림이 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부분의 벽은 전체가 칠흑같이 검은 옥(黑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색은 검지만 유리처럼 투명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흑옥이다.

높이 일장 남짓에 길이는 삼장이 넘는 흑옥의 벽에는 밝은 점들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 점들은 표면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흑옥 안쪽에서 반짝이는 이물질들이었다.

새카만 흑옥 안쪽에 박힌 채 반짝이는 그 이물질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 같다.

박혀있는 깊이와 밝기도 제각각이라 실제 밤하늘처럼 입체감이 느껴진다.

흑옥의 벽은 높고도 길어서 그 앞에 서면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 때문에 흑옥의 벽을 마주 보고 있자니 임청우는 마치 자신이 새카만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이건 천상열차분야도(天上列次分野圖).)

흑옥의 벽을 살펴보던 임청우는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다.

무질서하게 찍혀있는 점들 중에서 비교적 밝게 빛나는 점들이 눈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점들은 천문도경(天文圖經)이란 책에서 본 별자리의 그림이다.

천상열차분야도는 하늘의 형상을 분야별로 그린 천문도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옥석에 저절로 천상열차분야도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걸까?)

임청우는 놀라움에 휩싸인 채 흑옥에 박혀있는 별자리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흑옥의 벽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임청우는 다시 한 번 전율했다.

흑옥의 벽 정중앙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천상열차분야도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유달리 밝아서 놓칠 수가 없다.

헌데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회전할 때 중심축이 되는 북극성(北極星) 자리에 별 대신 길쭉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그 홈의 아래쪽은 평평하고 위쪽은 마름모꼴이다.

(북두홀과 형태가 같다!)

그 홈을 본 임청우는 어떤 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것을 느끼며 허리춤에서 급히 북두홀을 뽑아냈다.

북극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파여 있는 홈은 영락없이 북두홀의 형상이었다.

임청우는 떨리는 손으로 북두홀을 그 홈에 맞춰보려고 했다.

!

순간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을 떠나 그 홈에 그대로 딸려 들어가 끼워졌다.

!”

당황한 임청우는 홈에서 북두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홈과 북두홀은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같아서 틈새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흑옥의 벽 안쪽에서 어떤 강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 때문에 북두홀은 흑옥의 벽과 완전히 합쳐진 모습이 되었다.

안돼! 북두홀은 나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란 말이야.”

임청우는 울상이 되어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임청우의 능력으로는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북두홀과 흑옥의 벽에 나있는 홈은 면도날조차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딱 맞는데다가 흑옥의 벽 안쪽에서 강력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되는데...”

임청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북두홀 주변의 흑옥을 손톱으로 긁어댈 때였다.

갑자기 흑옥의 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

북두홀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어...”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움직임에 따라 임청우의 몸도 돌기 시작했다.

 

어느덧 임청우의 몸은 어둡고 광활한 밤하늘에 떠있었다.

북두칠성이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별과 별 자리와 성운이 함께 회전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별의 바다에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조차 의미가 없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끝이 없도록 넓은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하면 임청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하다.

그것을 절감하자 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감각도 급속히 사라져간다.

임청우는 자신이 물에 풀어진 종이처럼 시시각각 소멸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직전에 임청우는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응답이 있었다.

슈우!

임청우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북두칠성이 하나 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임청우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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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허억!”

털썩!

임청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아래의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임청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파르고 험한 절벽이라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어느덧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게 해가 진 때문인지 바위산 아래 계곡이 너무 깊어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절벽은 높고도 높아서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북두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려올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잘도 살아서 저길 내려왔구나.)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임청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등쪽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임청우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반쯤 크기의 반점(斑點)이 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반점은 얼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우(靑牛)라는 이름은 그 반점에서 딴 것이다.

 

임단심은 아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 대신 온갖 욕설과 악의가 섞인 말로 아들을 불렀었다.

어쩔 수 없이 임청우는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성을 모르니 어머니의 성인 임()씨를 썼고 가슴에 있는 푸른 소 형상의 반점에 착안하여 청우를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임청우였다.

 

한숨 돌린 임청우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끌렀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은 임청우와 함께 바닥에 패대기쳐졌었지만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다. 한쪽이 조금 이지러졌을 뿐이다.

!

호리병의 주둥이에 박혀있던 나무 마개를 뽑자 그윽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호리병에 든 것은 임청우가 여러 가지 약초와 과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다. 백초주(百草酒)로 이름붙인 그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꿀꺽! 꿀꺽!

목도 마르고 해서 독한 백초주를 거푸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 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영차!”

다시 마개를 막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찬 임청우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북두홀을 찾아야한다.

 

***

 

다행히 북두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뜨인 것이다.

북두홀을 찾았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헌데 북두홀을 허리띠에 끼우던 임청우의 코가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가 타는 듯한 그 냄새를 따라갔다.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삼, 사십 장쯤 갔을 때 임청우는 연기에 휩싸인 독수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푸스스스!

날개를 활짝 펼친 길이가 일장이 넘는 독수리들의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살은 이미 다 타서 굵은 뼈와 깃털들만이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는 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무서운 독이 살을 녹였구나.)

임청우는 놀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푸스스! 퍼석!

임청우가 보고 있는 사이에 굵은 뼈들도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에서 남아있는 것은 크고 작은 깃털들과 강철같이 번들거리는 발톱뿐이었다.

(이놈에게 잡혀가던 뿔 달린 작은 뱀의 짓일까?)

임청우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저절로 녹아내렸을 리는 없다.

그놈은 죽기 전에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던 게 분명하다.

바로 그때였다.

툭툭!

무언가가 임청우의 오른쪽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

무심코 내려다보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쉭쉭!

머리에 황금색 뿔이 돋아나있는 작은 뱀이 고개를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통이 피 칠을 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등줄기를 따라 갈기까지 나있다.

영락없는 용의 모습인 작은 뱀은 독수리들의 왕에게 잡혀가던 바로 그놈이었다.

(... 이놈이 독수리들의 왕을 물어죽였구나!)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서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를 녹여버릴 정도의 독을 지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다.

!

헌데 뒤로 물러서던 임청우의 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렸다.

!”

임청우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쪘다.

쉭쉭!

뿔 달린 작은 뱀이 그런 임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다가왔다.

(... 죽었다!)

임청우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저앉은 상태라서 그놈이 달려들어 물려고 하면 피할 수가 없다.

임청우의 몸이 공포로 굳어질 때였다.

임청우를 잠시 살펴보던 뿔 달린 작은 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냐

임청우는 어리둥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뱀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잖아!)

임청우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뿔까지 달려있고... 외양만 특이한 게 아니라 진짜 영물이란 건가?)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생긴 임청우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이 금관혈린사(金冠血鱗蛇)인 뿔 달린 작은 뱀은 세상 모든 뱀들의 왕이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안되지만 금관혈린사는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복사(蝮蛇)의 일종인 이놈은 한 때 몸길이가 삼장(三丈;9미터)이 넘는 대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연을 만나 무한한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오히려 작아졌다.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 정기(精氣)가 농축되자 몸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몸은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기뿐 아니라 독기도 농축이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관혈린사의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금관혈린사는 표적을 직접 물지 않고 독기(毒氣)를 뿜어서 죽일 수도 있다.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들의 왕의 입장에서는 모든 뱀들의 제왕인 금관혈린사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늘 금관혈린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었다.

금관혈린사가 비록 모든 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힘으로는 독수리들의 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려고 시도해봤지만 독수리들의 왕의 발목은 강철같은 비늘로 덮여있어서 상처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독기를 뿜어도 봤지만 허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독기가 바람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금관혈린사는 꼼짝없이 독수리들의 왕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임청우가 충동적으로 활을 쏴서 독수리들의 왕을 떨어트렸었다.

다만 임청우가 쏜 강철 촉의 화살도 독수리들의 왕의 숨통을 즉시 끊어놓지는 못했었다. 그놈의 깃털과 가죽이 단단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도 독수리들의 왕은 충격을 받아서 허우적대며 떨어졌었다.

그 바람에 금관혈린사는 강철같은 발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수리들의 왕의 몸통을 물어서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던 것이다.

 

(작고 다리가 없을 뿐 용을 빼닮은 놈이다.)

임청우가 금관혈린사를 보며 전설 속의 용을 떠올릴 때였다.

! !

금관혈린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동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인사치례도 했으니 그만 제 갈길 가나보다 생각했다.

헌데 금관혈린사는 조금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기어가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따라오라는 거냐?”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 !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임청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영물인 게 분명한 놈이 따라오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금관혈린사를 따라 오십여 장쯤 갔을까?

임청우 앞쪽에 안개의 벽이 나타났다.

계곡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마치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금관혈린사는 망설이지 않고 안개의 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째 좀 으스스한데...!”

임청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금관혈린사를 따라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섰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이토록 짙은 안개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짙은지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봐도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금관혈린사 덕분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금관혈린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반딧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나는 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독을 흘린 것인지 다른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점(光點)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앞서 가며 남긴 기이한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안개다. 마치 수초가 몸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 !)

헌데 광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시커먼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작은 것은 개만하고 큰 것은 사람 키의 몇 길이나 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짐승같고 어떤 것은 사람 같으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형상도 있다.

처음에는 한 두 개가 보이던 그것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진다.

괴상한 형상들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그것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눈인 모양인데 머리 뿐 아니라 몸통에도 달려있으며 하나를 단 놈이 있는가 하면 두 개, 세 개, 심지어 십여 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다.

(... 뭐지?)

소름이 오싹 끼친 임청우는 허리춤에 끼운 북두홀을 움켜잡았다.

(안개 속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있다!)

겁에 질린 임청우가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할 때였다.

쉭 쉭!

앞쪽에서 금관혈린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임청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서 금관혈린사의 뿔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뿔 아래에서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이 임청우를 보고 있다.

(... 길을 아니까 따라오라는 거겠지? 일단 저놈만 믿고 가보자!)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개 속을 배회하는 기괴한 형상들도 임청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아서 임청우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금관혈린사가 지나가며 남긴 광점들과 안개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그놈의 뿔이 아니었으면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을 것이다.

화악!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의 벽이 사라지며 임청우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마침내 안개의 벽을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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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은 강시(畺屍) ! 이제야 따라왔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둥그레졌던 마면혈도는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휘익!

껄껄 웃는 마면혈도 앞으로 사각 모자를 쓴 초로의 인물이 임청우의 멱살을 오른손으로 틀어쥔 채 훌쩍 내려섰다.

결코 가볍지 않을 임청우의 몸을 헝겊 쪼가리인 듯 흔들면서 내려선 인물은 왼손에 쥔 쇠로 만든 접는 부채, 철선(鐵扇)을 성마르게 부치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의 몰골도 마면혈도 못지않게 기괴하다.

안색은 시체처럼 하얗고 창백한 반면 입술은 피를 마신 듯 새빨갛다.

또 열흘은 굶은 듯 퀭한 두 눈은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낄낄낄... 얼어 죽은 송장 놈아! 이 형님보다 한발 늦었구나.”

마면혈도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어 죽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괴인의 별호는 철선동시(鐵扇凍屍).

철선동시는 성격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자였다.

우리를 본 놈을 살려서 보내려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마면혈도!”

!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한쪽에 던져버리며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자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바닥에 던져진 임청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낄낄낄... 그놈은 무림인이 아니야.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내버려뒀으면 살아남지 못했어.”

마면혈도가 다친 말이 우는 것같은 걸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악명 높은 마면혈도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군.”

철선동시는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엎어져 있는 임청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

마면혈도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맹세를 어겼단 말이냐? 나 마면혈도가 살인, 방화, 강간을 가리지 않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그래 그래,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는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빴을 뿐이로군.”

철선동시는 냉랭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 얼어 죽은 송장 놈이...”

!

대노한 마면혈도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손잡이만 핏빛이 아니라 칼날도 피를 칠한 듯이 붉었다.

토막 쳐 버리고 말겠다아아아!”

마면혈도는 날이 넓은 핏빛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철선동시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그자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하늘로 뻗어 올랐다.

! 서걱!

핏빛의 칼이 내뻗는 그 혈광에 스친 바위들이 마치 두부처럼 소리없이 베어졌다.

스슥!

그러나 철선동시는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면혈도의 사나운 칼질을 피해버렸다.

날 죽이려 드는 것만 봐도 자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머리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농산 표운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만도 다행이지.”

빗발치듯 날아드는 핏빛 칼을 흘려보내면서 철선동시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면혈도는 흠칫하며 칼질을 멈추었다.

네놈을 죽이려는 게 뭐 어떻단 말이냐? 나는 네놈만 죽어 없어지면 속이 후련하겠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유()가 놈을 완전히 따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철선동시의 그 한마디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마면혈도의 핏빛 칼, 즉 혈도(血刀)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보도(寶刀).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그 혈도를 아무 생각없이 마구 휘둘렀으니, 강적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혀서 붉으락푸르락 하는 마면혈도의 얼굴을 보면서 철선동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전한 곳에 숨을 때까지는 만나는 모든 놈을 죽여 버리자고 자네가 먼저 말했었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여서 화골산(化骨酸)으로 녹여 없앤 놈들만 하더라도 무려 이백 칠십 아홉일세. 한데 자네는 저 이백 팔십 번째 놈을 죽이지 않았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거지.”

철선동시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임청우를 가리켰다.

그만해! 지금이라도 저놈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마면혈도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야지.”

철선동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저놈을 구한 것도 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자네 손으로 저놈을 죽여야만 자네가 이부지자(二父之子) 개새끼가 아니게 될 테니...”

마면혈도는 성미가 급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철선동시의 말을 듣자 자기 손으로 임청우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개새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마면혈도는 혈도를 어깨위로 반쯤 비스듬히 돌려서 임청우를 향해 휘두르려 했다.

번쩍!

핏빛 칼에서 혈광이 다시 한 번 길게 일어났다.

기절한 임청우는 영문도 모르고 몸뚱이가 무 토막처럼 잘라질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

하늘을 뒤흔드는 용의 울음소리인 듯, 초목산천을 떨게 만드는 대호(大虎)의 포효인 듯한 웅혼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그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합창하듯 외쳤다.

그런 그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

다음순간 철선동시가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마면혈도도 혈도를 회수하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대가리를 깨서 골수를 파먹어도 시원찮을 유가놈 같으니...”

마면혈도는 표운봉 아래로 달려가는 철선동시의 뒤를 따라가며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표운봉에서 사라졌다.

우워어어어어!”

그와 함께 두 마두를 쫓아버린 고함소리는 바위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방향을 바꿔 멀어져갔다.

고함소리의 주인은 두 마두의 종적을 발견하고 추격해갔을 것이다.

이제 표운봉 정상에는 죽은 듯 미동도 않는 임청우만이 뜨거운 태양아래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 산봉우리 위로 기울어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그 노을 속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표운봉 정상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의 왕에는 못 미치지만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사람 키 정도는 되는 커다란 독수리들이다.

오래전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던 그놈들은 주린 배를 채워줄 희생물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퍼덕거리는 날개 짓이 돌먼지를 날리고, 날카로운 부리들은 임청우의 등을 쪼았다.

! 퍼퍽!

세차게 찍어대는 독수리들의 부리에 임청우의 등에서 살이 뜯기며 피가 번져 나왔다.

짊어지고 있던 망태와 입고 있던 삼베옷도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누더기가 되어갔다.

!

또 한 번 등을 깊이 쪼이는 순간 임청우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

뒤이어 다른 독수리의 부리가 임청우의 어깨 부위도 찍었다.

!”

순간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끼약! 카아악!

만찬을 즐기려던 독수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높이 날아올라갔다.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공으로 혈도를 막아버렸었다.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임청우의 혈도가 독수리들의 부리에 쪼이면서 풀어진 것이다.

망할 놈의 날짐승들 같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리는 임청우의 등과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털썩!

임청우는 누더기가 된 망태를 벗어 던졌다.

쫘악!

이어 피로 물든 웃옷도 찢듯이 벗었다.

등에 생긴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지나 뒤쪽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임청우는 벗은 옷을 수건처럼 둘둘 말아서 때를 벗기듯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거친 삼베 옷감이 상처를 쓸고 지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다.

빌어먹을!”

등에서 대충 피를 닦아낸 임청우는 피에 젖은 옷을 확 집어던졌다. 옷은 피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서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옷을 집어던진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절을 두 번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임청우는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대가리야! 얼어 죽은 송장같은 놈아! 네놈들이 살아있어도 내게는 죽은 놈들로 보인다. 이제 내가 두 번을 절했으니 네놈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오. 네놈들이 죽었다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독수리들의 먹이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임청우는 땅바닥에 패대기친 망태에서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약초들을 입안에 쑤셔 넣은 임청우는 우걱우걱 씹어 다진 후 근처 바위에 턱 붙였다.

그리고는 등의 상처를 바위에 붙인 약초에 대고 비벼대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신통하게 멎었다.

어머니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산을 타며 채약을 해온 임청우인지라 어떤 약초가 어떤 증상에 잘 듣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대낮에 귀신같은 것들을 만나서 십년감수하질 않나... 농산을 떠나긴 떠나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라면 진작 떠났을 농산이지만...”

상처에서 피가 멎으며 임청우의 화도 조금은 풀렸다.

옷은 포기해야겠구나.‘

집어던졌던 웃옷을 살펴본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웃옷은 원래 낡았었는데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헤집어져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피에 절고 살점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웃옷을 다시 던져버린 임청우는 망태를 챙겼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망태에 활과 화살을 우겨넣은 임청우는 절벽 끝으로 갔다.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절벽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북두홀을 찾는 건 포기해야하나?)

임청우는 갈등했다.

그는 멱살을 틀어쥔 마면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북두홀로 그자의 팔을 찍었었다.

하지만 북두홀은 강철같은 마면혈도의 팔뚝에 전혀 상처를 못 내고 임청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표운봉의 남쪽 절벽은 가파를 뿐 아니라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가 없다.

산을 타는데 능숙한 임청우라도 쉽사리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북두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북두칠성이 새겨진 북두홀은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북두홀은 임청우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보아온 물건이다.

임단심은 가끔씩 북두홀을 꺼내보며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북두홀이 아버지 것이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단심이 임청우를 데리고 농산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 전이다.

그 얼마 후 임단심은 북두홀을 깊은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임단심에게 북두홀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북두홀은 너무도 단단하여 훼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깊은 계곡에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임청우는 북두홀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청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으로 내려가 북두홀을 회수했었다.

임단심은 임청우가 북두홀을 찾아온 걸 알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후로 임청우는 북두홀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열두 살 때도 천길 벼랑을 타고 내려가 북두홀을 찾아왔었다.)

임청우는 망태를 등에 짊어지며 심호흡을 했다.

망태의 거친 표면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쓸어 오만상을 쓰게 만든다.

(어렸을 때 했던 일을 지금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절벽의 틈새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대가리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되었구나.)

깎아지른 절벽을 신중하게 타고 내려가며 새삼 마면혈도가 미워지는 임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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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두(魔頭)를 만나다!

 

 

층층산상(層層山上)-!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던 두꺼운 천이 다시 내려앉으며 겹쳐진 듯한 형상의 바위산이 있다.

모두 일곱 층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산의 뿌리 쪽은 사시사철 안개에 덮여있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깊은 계곡이다.

바위산은 높고도 험준한 농산산맥(隴山山脈)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다.

그 때문에 바위산 정상에 서면 사방 수백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임청우의 눈에는 그 절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째서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그토록 증오하시는 걸까?)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정상에 선 채 임청우는 벌써 이각(二刻; 30) 넘게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머니 임단심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건 아침 무렵의 일이다.

그 직후 집을 나섰지만 어머니 곁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임청우는 어머니의 경고대로 오늘 안에 농산(隴山)을 떠날 결심을 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해둘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고질을 다스리는 데 쓸 약초를 채집할 수 있는 대로 채집해야하고 또 산짐승도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갖다 드려야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임청우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핏줄이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식의 도리는 다 해야만 한다.

임청우가 서있는 바위산의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쪽 외의 세 방향은 험하긴 해도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어서 올라올 수 있다.

임청우는 전에도 여러 번 이 바위산에 올라왔었다.

사방이 확 트인 바위산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악담과 학대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낫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약초를 담는 망태와 사냥을 위해 준비한 활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망태에는 제법 많은 약초가 들어있다. 이 바위산까지 오는 동안 채집한 약초들이다.

임청우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큼직한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에는 산행 중에 지치고 힘들 때 마시기 위해서 준비한 술이 들어있다.

임청우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은 호리병뿐만이 아니다.

왼쪽 허리춤에는 특이한 쇠붙이가 하나 끼워져 있다.

길이 한 자 정도인 쇠붙이는 끝이 뾰족하긴 하지만 칼이나 검은 아니다. 날이 서있지 않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전체 모양이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드는 홀()을 닮은 쇠붙이다.

먹물에 담았다가 꺼낸 듯 검은 색인 쇠붙이 양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임청우는 이 쇠붙이에 북두홀(北斗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날은 서있지 않지만 북두홀은 아주 단단해서 어떤 것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임청우는 호미나 칼 대신 북두홀을 써서 약초를 캐왔다.

 

(아버지를 거론한 게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 무렵, 임단심은 편치 않은 몸으로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임단심은 임청우가 어제 사냥해온 꿩과 비둘기로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을 들여다보던 임청우는 별 생각없이 말을 꺼냈었다.

 

<아버지도 날짐승 요리를 좋아하셨나요?>

 

그 한마디가 임단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거론하면 안된다는 금기(禁忌)를 임청우는 깜빡했던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어머니가 아버지를 철천지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임청우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학대는 점점 더 강도가 심해졌었다.

아마도 임청우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때문일 것이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

임청우는 머리를 흔들어서 번민을 떨쳐버리려 했다.

떠나라 하셨으니 떠나면 된다. 하긴 농산 따위는 나 임청우가 뛰어놀기엔 너무 작기도 하지. 하하하!”

!

임청우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 !

절벽 아래로 떨어진 돌멩이는 켜켜이 쌓인 바위에 부딪혀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모두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은 각층의 높이가 수십 장 이상이다.

그 때문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

임청우가 점점 멀리 들리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끼이이!

절벽 아래쪽에서 무언가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지?)

임청우는 고개를 내밀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악!

그런 임청우의 눈에 새 한 마리가 절벽 중간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활짝 편 날개 길이가 일장(一丈;3미터)이 넘는 거대한 독수리였다.

(독수리들의 왕!)

임청우의 눈이 커졌다.

바위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거대한 독수리는 임청우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그 놈은 농산 일대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그 놈이 산양이나 늑대, 심지어 다 자라지는 않았어도 곰까지 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하늘의 폭군이 무슨 일로 깊디깊은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던 것일까?)

임청우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수리들의 왕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기라도 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화악! 화악!

임청우가 물러서는 사이에 독수리는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절벽 위쪽으로 떠올랐다.

(!)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올려다보던 임청우는 한 번 더 놀랐다.

강철같이 번쩍이는 독수리의 두 발이 뱀을 한 마리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뱀은 독수리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았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되지 않아서 독수리의 끼니거리로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다만 독수리에게 잡혀가고 있는 그 뱀은 크기는 작아도 생김새는 매우 특이했다.

몸 전체가 피를 칠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머리에는 황금색 뿔이 두 개 돋아나 있다.

크기는 비록 세치 남짓에 불과하지만 황금색 뿔의 형상은 영락없이 용()의 그것이었다.

카아!

뿔이 달린 작은 뱀은 독수리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독수리의 발톱은 강철 족쇄같아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 !

뿔 달린 작은 뱀은 몸부림치면서 독수리의 발목을 연신 물고 있었다.

그러나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도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그놈의 다리는 아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어서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은 흠집조차 못 내고 있었다.

발목 위쪽의 깃털로 덮인 부분이라면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뿔 달린 작은 뱀의 몸이 워낙 작아서 주둥이가 그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뿔 달린 작은 뱀은 어떻게든 독수리 다리에 상처를 내보려고 반복해서 물고 있었다.

카아!

헌데 뿔 달린 작은 뱀이 연신 자신의 발목을 무는 걸 무시하고 날아오르던 독수리는 갑자기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바위산 정상에 서있던 인간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임청우는 짊어지고 있던 활을 벗어서 시위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반달처럼 부푼 활에는 강철 촉이 달린 화살이 매겨져 있다.

화악!

깜짝 놀란 독수리는 급히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십여 장쯤인 거리를 단번에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깊이 박혀버렸다.

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독수리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뒤집어졌다.

임청우가 쏜 화살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화악!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해온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이내 독수리들의 왕과 그놈이 쥐고 있던 뿔 달린 작은 뱀은 바위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임청우는 한숨을 쉬며 활을 내렸다.

잡혀가는 작은 뱀이 마치 운명에 희롱당하는 내 신세 같아서 충동적으로 쏘고 말았다.”

딱히 독수리들의 왕이 미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살려고 몸부림치던 뿔 달린 작은 뱀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서 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여기서 너무 지체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임청우는 하늘을 보며 돌아섰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헌데 임청우가 막 절벽을 등지며 돌아설 때였다.

여기가 농산 표운봉(飄雲峰)이냐?”

벼락 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임청우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틀어잡아서 쳐든 것이다.

!

놀라서 활을 떨어트리는 임청우의 눈앞에는 삼태기만큼이나 크고 길쭉한 말()같은 얼굴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손잡이와 칼집이 온통 핏빛인 칼을 등에 메고 있는 이 괴인의 키는 무려 팔척(八尺;2미터 40센티)이 넘어 보인다.

그 때문에 그리 작지 않은 키의 임청우였지만 말같은 얼굴을 한 괴인의 손에 멱살이 잡혀 쳐들려지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여기가 표운봉이냐고 묻질 않았느냐?”

성미 급한 괴인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끄윽...”

멱살이 틀어 잡히면서 옷깃에 목이 조여진 임청우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대답은커녕 숨조차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질식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임청우는 왼쪽 허리춤에 끼우고 있던 북두홀을 급히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괴인의 팔뚝을 북두홀로 힘껏 내리찍었다.

!

북두홀이 괴인의 팔뚝을 찍자 마치 철벽을 때리기라도 한 듯 요란한 쇳소리가 냈다.

!

이어 괴인의 팔뚝에서 일어난 강한 반탄력에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 따당! 휘익!

바닥에 떨어졌던 북두홀은 쇳소리를 내며 몇 번 튕겨졌다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놈이 감히 마면혈도(馬面血刀) 어르신의 말씀에 대답을 거부해?”

말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당돌한 반격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표정이 되었다.

! !

그자는 임청우를 패대기칠 생각인지 번쩍 쳐들어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이 말대가리 괴인의 머리위에서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뒈져라!”

스스로를 마면혈도라고 밝힌 말 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몸뚱이를 서너 바퀴 돌린 후 절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휘익!

던져진 임청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절벽으로 날아갔다.

맞소. 여기가 표운봉이오!”

멱살이 풀려서 숨을 쉴 수 있게 된 임청우가 날아가면서 소리쳤다.

?”

마면혈도가 의외라는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움찔했다.

화악!

움찔하는가 싶은 순간 그자는 어느새 임청우 앞에 이르러 다시 멱살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임청우의 몸은 이미 절벽 밖에 이르러 있었다.

임청우를 잡으려면 마면혈도 역시 발을 땅에 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막 임청우의 멱살을 잡으려던 마면혈도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우라질!”

뻗었던 손을 급히 거두어들인 마면혈도가 욕설을 내뱉었다.

말하려면 조금 빨리 할 것이지... 아가리를 찢어죽일 놈같으니...!”

바로 그때였다.

화라락!

절벽 아래로 추락하려던 임청우의 몸이 돌연 돌개바람에 휘말린 낙엽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임청우를 휘감아서 끌어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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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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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혀()와 검()의 합작

 

 

끼끼끼!

어디선가 미미한 금속성이 들렸다.

츠으으! 스스스!

그러자 아름드리 물푸레나무와 수양버들이 주변을 가리고 있는 연못이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녁 짓는 연기처럼 피어오른 그 안개는 삽시에 연못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그긍! 촤아아!

뒤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연못 속에서 석탑(石塔) 하나가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보천검문 후원에 자리한 고룡지(古龍池)라는 이름의 이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다.

고룡지는 보천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항간에는 오래 된 용이 산다고 전해진다.

그 고룡지의 수면 위로 치솟은 석탑은 나선형으로 뒤틀려 있어서 산양의 뿔을 연상케 한다.

높이 오장(五丈;15미터) 정도인 석탑은 아래위로 분리된 두 개의 큰 바위를 겹쳐서 만든 것이었다.

그그긍!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석탑의 윗부분이 맷돌처럼 한 바퀴 돌아갔다.

그러자 석탑의 아래 부분에 건장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휘익!

연못가에 서있던 보천검객 양시우가 먼저 몸을 날렸다.

스윽!

장광유설 주대곤도 발끝으로 땅을 찍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경신술의 달인이라는 무림의 평판대로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주대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시우의 등에 닿을 듯 말듯 바짝 따라붙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끼끼끼!

주대곤의 뒤쪽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동굴 입구가 사라져 버렸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동굴 안은 먹물 속인 듯 깜깜하여 눈앞에 댄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렵지 않은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양시우가 교묘하게 손을 놀려 주대곤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손목에 자리한 맥문은 주요한 사혈(死穴)중 하나다. 약하게 누르면 사지가 마비되는 정도지만 강하게 누르면 명줄이 끊어진다.

맥문을 잡힌 순간 주대곤은 흠칫했으나 이내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입만 조심하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이다.”

완전히 밀폐된 이곳에서는 빠른 발도 소용없다.

마음만 먹으면 양시우가 주대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다.

그러나 주대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양시우도 그를 죽여 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다.

주대곤이야말로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

슬그머니 주대곤의 맥문을 놓아준 양시우가 화섭자로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지자 드러난 것은 넓이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정방형의 작은 석실이었다.

한데 석실 벽에는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검무(劒舞)를 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선이 굵고 거칠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사면에 각기 하나씩 그려져서 네 가지의 모습으로 검무를 추는 사람은 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간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검술의 비결(秘訣)이다!)

검술을 익힌 바는 없지만 주대곤은 석벽의 그림들이 세상에 보기 드문 절세적인 검법의 이치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대곤은 자신도 모르게 힐끗 양시우를 쳐다보았다.

양시우는 주대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 그림들은 내 보천검법(補天劒法)의 모체가 되는 것일세. 노부는 수십 년을 연구하고도 겨우 십육 식의 보천검법을 만들어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가 보고 알 수 있을 것같으면 보아도 무방하네.”

너 따위는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에 숨은 깊은 뜻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대곤은 등골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양시우가 자신의 무공의 연원이 되는 곳으로 데려와 검법의 도해(圖解)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양시우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인 일왕일협삼괴칠절(一王一俠三怪七絶)에는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십사 세의 젊은 나이에 보천검문을 세웠을 뿐 아니라, 보천검법이라는 검법을 창안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양시우의 무공이 일왕(一王), 일협(一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삼괴(三怪), 칠절(七絶)과 비교하면 그리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주대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비밀이 양시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양시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한다면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주대곤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목숨을 판돈으로 놓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세.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타협을 해보도록 하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하는 양시우의 말에 주대곤은 웃으며 대답했다.

문주께 이런 대범한 면이 있으시기에 소생이 굳이 삼괴도 칠절도 아닌 문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노부가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이야기하게.”

양시우가 귀찮다는 듯이 주대곤의 말을 딱 잘랐다.

주대곤도 양시우와 마주 앉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문주께선 북두문(北斗門)이란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금시초문이네.”

양시우는 자신의 견문이 짧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이곳 고룡지에서 기연을 만나 수련에 매진해왔다.

보천검법을 창안하고 수련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무림에 대한 양시우의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대곤이 거론한 북두문은 무림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전설 속의 문파다.

양시우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생은 어렸을 때 은사(恩師)로부터 북두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중 대충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주대곤은 자신을 가르쳤던 사부 은일우사(隱逸羽士)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대곤의 사부 은일우사는 무림에서 명망이 드높은 현자(賢者)였다.

주대곤이 거친 무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부인 은일우사의 음덕 덕분인지도 모른다.

은일우사는 주대곤이 팔구 세 정도 되었을 때 북두문이라는 문파와 관련된 고사를 이야기 해주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황제(皇帝)의 신분을 버리고 서장(西藏)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가서 승려가 된 인물이 있었다.

 

-석경당(石敬瑭)!

 

오대십국(五代十國)중 후진(後晉)의 시조인 석경당이 바로 그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재위 칠년 만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결심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의 아들, 즉 조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달랍궁을 찾아가 출가했던 것이다.

그후 이십여 년 동안 석경당은 포달랍궁의 진산절예를 모두 익힌 후 중원으로 돌아왔다.

헌데 그는 중원으로 오기 전에 포달랍궁의 당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들이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을까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석경당이 다시 중원 땅을 밟았을 때, 포달랍궁에는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으로 돌아온 석경당은 황제였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승(魔僧)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리고는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열 두 개의 비밀문파와 열 네 개의 명문대파를 방문하여 모두 굴복시켰다.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 아니 마승 석경당이 벌인 그 일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삼십육 개의 문파들이 겪은 수모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네.”

양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승 석경당이 일으켰던 풍파는 워낙 유명해서 견문이 얕은 양시우도 알고 있었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숭산(崇山)에 모여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고 문파의 보전을 빌어야만 했다지?”

그렇소이다. 마승 석경당은 숭산에 무림성궁(武林聖宮)을 짓고 무림황제(武林皇帝)가 되고자 했었소이다. 한데...”

주대곤의 말이 이어졌다.

 

삼십육문파 수뇌들의 무릎을 꿇려 기고만장하던 마승 석경당은 그 직후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었다.

양시우가 알고 있는 고사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림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 후의 내막은 이러했다.

마승 석경당이 무림황제로 등극하려는 현장에 그때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한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신비노인은 단 일장(一掌)에 마승 석경당을 쓰러트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마승 석경당은 그대로 달아나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그 신비노인에게 북두호천패(北斗護天牌), <북두칠성이 하늘의 도리를 지켰다.>라는 뜻을 지닌 영패를 만들어 바치면서 한 가지 서약을 했소이다.”

주대곤은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양시우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북두호천패를 지닌 사람에게는 한 해에 단 한 번,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비록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파가 멸문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

양시우는 극도의 놀라움과 흥분으로 침묵했다.

강호 무림의 기둥인 삼십육문파에 대해 일 년에 단 한 차례일망정 생사여탈(生死與奪)과도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북두호천패...!

그것을 지닌다는 게 무림의 지존(至尊)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본 적도 없는 북두호천패가 양시우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승 석경당을 물리치고 북두호천패를 얻었던 노인은 북두문이라는 문파의 당시 문주였던 북두노조(北斗老祖)였소이다.”

주대곤은 양시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 무림에서 일왕(一王)으로 불리는 금포염왕 조천영은 바로 그 북두문의 당대문주이외다.”

“...!”

양시우는 가슴을 둔기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금포염왕이란 그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온 순간 양시우의 몸은 마치 돌처럼 굳어져 버리는 듯했다.

 

금포염왕...!

수십 년 간 무림을 굴러다니면서도 애써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그와 부딪힐 만한 언행 하나조차 감히 범하지 못했던 양시우다.

자신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이나 무림삼괴(武林三怪)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다가도 금포염왕에 생각이 이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금포염왕의 일초를 받아낸 인물이 있었던가?

금포염왕의 손아래에서 목숨을 건진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과 맞섰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이란 말에는 절대(絶對)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한 것이 아니던가?

그 금포염왕이 바로 북두문의 당대 문주였던 것이다. 무림황제를 꿈꿨던 마승 석경당을 단장(單掌)으로 물리친 북두노조의 후손인...

양시우는 금포염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더욱 더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일곱 층으로 쌓여있는 산, 바로 그 산에서 소생은 북두문의 표기를 발견했소이다. 북두문의 힘은 그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주대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양시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 삼십육문파 중 어느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당시의 비사를 그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양시우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발했다.

스승으로부터 들었다지만 그것만으로 자네 말을 믿기가 어렵네. 자네는 원래 입으로 사는 사람이니...”

주대곤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생의 은사이셨던 은일우사께서는 삼십육문파 중 문선곡(文仙谷)의 곡주였소이다.”

그랬군. 자네의 경신술이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생각했었지.”

양시우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문선곡이라면 지금은 그 명맥(命脈)조차 흐릿해져 버렸지만 기관진식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예의 달인들만이 살고 있던 특이한 문파였다.

양시우가 주대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손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굳게 잡혔다.

()와 검(), 지혜와 힘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일기 시작한 풍운의 서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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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옷을 입은 염라대왕

 

 

-금포염왕(錦袍閻王) 조천영(趙天永)!

 

무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錦袍)을 즐겨 입어 금포염왕이라 불리는 그의 시대는 어느덧 이십 년을 넘겼다.

금포염왕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맞설 상대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고수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목숨을 부지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비록 마도(魔道)에 속하진 않지만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는 인물이 금포염왕인 것이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이라는 별호에 걸 맞는 금포염왕의 폭압(暴壓) 아래 무림은 숨죽인 평화를 이어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힘을 기르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금포염왕의 시대를 끝내고 자신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야망에 찬 인물들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첩첩산중(疊疊山中)이 아니라 층층산상(層層山上)이라니...!”

산을 넘고 또 넘어가야 한다면 첩첩산중이겠지요. 하지만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면 층층산상이라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르다 했는가? 말인즉 맞는 말이네만... 그런 산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가?”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는 보천검객(補天劒客) 양시우(楊翅祐)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매만졌다.

양시우 앞에 공수(拱手)한 채 서있는 문사차림의 깡마른 중년인은 긴장으로 입이 마르는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른 후 힘주어 말했다.

소생이 직접 확인한 사실이외다.”

듣고 있던 양시우는 고개를 설래 저었다.

산이 무슨 시루떡도 아닐 터, 켜켜이 쌓인 산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자네 말은 믿을 수가 없군.”

양시우의 말에 중년문사의 표정이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믿으십시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 산은 존재하외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그 위치까지 말할 수 있소이다.”

중년문사는 초조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양시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문사를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양시우의 보천검문(補天劒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한다.

양시우가 태사의에 앉으면서 팔걸이 끝에 설치된 손잡이를 살짝 돌렸던 그 순간부터 보천검문은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되어있는 것이다.

양시우 앞에 서있는 삐쩍 마른 중년문사는 입으로 빌어먹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장광유설(長廣溜舌) 주대곤(朱岱崑)이란 인물이었다.

주대곤은 비록 무공은 별 볼 일 없으나,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달변과 재빠른 발, 그리고 그것보다 더 빠른 눈치로 살아가는 자였다.

(장광유설 주대곤! 무림을 통틀어도 네놈보다 입심이 센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겁먹은 듯한 그 표정마저도 네 공력(功力)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네놈의 치명적인 실수다.)

양시우는 염두를 굴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층층 뭔가 하는 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 없네. 노부는 한가롭게 같잖은 이야기나 들어줄 처지가 못 되니 그만 가보시게.”

노골적인 축객령(逐客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대곤은 양시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관심 없으시오?”

(이 작자가...)

양시우의 눈으로 얼핏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양시우는 속에서 불끈 치솟는 살의를 꾹 눌러 참았다.

주선생 나가신다. 정중히 모셔라.”

양시우는 주대곤이 강호의 소문과는 달리 당돌한 데가 있는 놈이라 생각하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어 큰 걸음으로 대전의 문쪽으로 걸어가며 양시우는 희미한 냉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무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본래 입만 살아있는 놈들이야 가둬놓고 족치면 금방 다 불게 마련이지.)

양시우는 주대곤의 말투와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어떤 것을 알고 있음을 느꼈었다.

기름칠한 미꾸라지같은 주대곤을 요리하자면 먼저 김이 좀 빠지게 한 후 잡아 가둬야한다.

주대곤이 다른 재주는 없어도 경신술 하나는 무림에서 일류 가는 인물이니 경솔히 다루면 놓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양시우가 대전을 나가려 하자 주대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의 뒷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양시우가 막 대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될 기회도 마다하는군.”

주대곤의 냉랭한 음성이 양시우의 귓전을 때렸다.

순간 양시우는 벼락에 맞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을 떨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천하제일!

 

()을 공부하는 자는 삼십 년을 배워도 글을 안다고 자부하지 못하지만 무()를 배운 자치고 삼 년이면 천하제일이 아닌 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무예를 배운 자는 하나같이 천하제일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가 있어 감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자부할 수 있단 말인가?

당금의 무림에는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까지 불리는 금포염왕이 존재하는데...

넘을 수 없는 벽!

극복할 수 없는 좌절!

무림인들에게 금포염왕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천하제일인은 여전히 모든 무림인들의 소망이며 궁극의 목표라 할 수 있다.

물론 보천검객 양시우도 예외는 아니다.

주대곤이 내뱉은 <천하제일>이란 한마디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떨려오는 양시우였다.

양시우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주대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월에 찌든 눈동자 속에 피어오르는 야망마저 감출 수는 없다.

야망은 감추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숨어있었고, 숨어있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주대곤은 양시우의 웃자라버린 그 야망을 노리고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

“...!”

양시우와 주대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치열하게 부딪혔다.

주대곤도 더 이상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세객(說客)이 아니었다.

그 또한 야망을 깊숙이 감춘 불타는 눈을 가진 자였다.

이윽고 양시우가 뇌까리듯이 내뱉었다.

장소를 옮겨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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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금포염왕 -錦袍閻王

 

                                             제1

 

 

서장

 

 

 

 

!

부엌칼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뒤로 나뒹구는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임청우(林靑牛)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퍼억!

간발의 차이로 임청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부엌칼은 마당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 둥치에 깊이 박혔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임청우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퍼억!

또 한 자루의 부엌칼이 임청우가 처음 나뒹굴었던 바닥에 박혔다.

이번에도 반응이 조금만 늦었으면 큰 사단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달군 철판 위의 콩처럼 튀어 오르며 임청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리 닥쳐!”

어둑한 부엌에서 임단심(林丹心)이 악을 쓰며 뛰어나왔다.

병이 깊어 초췌한 얼굴에 산발까지 한 여자가 부엌칼을 들고 뛰쳐나오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면서도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었다.

(정말 날 죽이시려는구나.)

임청우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신을 모질게 대해오긴 했었다.

악담과 저주, 매질과 학대가 없었던 날은 임청우의 기억에 단 하루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한 손찌검은 당하지 않았었다.

헌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핏발 선 눈과 온몸에서 뿜어내는 독기는 임단심이 살의(殺意)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주받을 악귀의 새끼야! 너 같은 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해!”

임단심은 부엌칼을 휘두르며 임청우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임단심의 무공은 일류고수라는 말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반면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어가지만 임청우는 무공다운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어머니는 절기를 여러 가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들인 임청우에게는 단 한 가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일류고수인 임단심이 죽일 작정을 했다면 임청우로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임청우는 체념하며 뒷걸음질을 멈췄다.

어머니가 죽이려든다면 죽어드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은 임청우가 죽을 날이 아니었던 듯 했다.

!”

콰당탕!

아들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임단심이 왈칵 피를 토하며 나뒹군 때문이다.

임단심은 아주 오래 전, 원수의 독수에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 상처는 뿌리가 깊고 악독하여 어떤 영약으로도 완치되지 않았다.

헌데 겨우 다스려놨던 그 상처가 격한 감정의 폭발로 인해 도져버렸던 것이다.

끄윽! !”

부엌 앞의 마당에 나뒹군 임단심은 손으로 흙바닥을 긁으며 연신 피를 게워냈다.

어머니...”

임청우는 급히 임단심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임청우는 몇 발 떼지 못하고 몸이 굳어졌다.

피를 게워내면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눈이 새파란 살기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진정하시고 몸을 돌보세요.”

꺼져라!”

걱정하는 임청우의 말을 임단심은 차갑게 끊었다.

더 이상... 단 한시도 네놈의 상판을 보고 싶지 않다.”

임단심은 억지로 일어나 앉으며 내뱉었다.

오늘 안으로 짐을 챙겨 떠나라. 만일 자정이 지나서도 내 눈에 뜨인다면...”

아들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얼굴에서는 추호의 모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내손으로 토막 쳐 버릴 것이다.”

어머니의 모진 말을 들으며 임청우는 가슴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자신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는 것을 절감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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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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