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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06 [무림일기] 11화 시체가 남긴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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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체가 남긴 기연(奇緣)

 

 

 

어둠 속에 끝이 없을 듯 이어진 통로의 대부분은 두꺼운 이끼로 뒤덮여 있다.

바로 근처에 조백하가 흐르는 탓에 사시사철 습한 때문일 것이다.

(습할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도 하다. 지하라면 당연히 서늘해야하는데...)

요문천은 등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북경은 중원의 동북쪽 끝에 자리한 탓에 겨울이면 추위가 매섭다.

설령 계절이 여름이라 해도 깊은 지하는 서늘해야 정상이다.

헌데 요문천이 지금 걸어가는 지하의 통로는 습기로 가득 차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까지 하다.

이끼가 무성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마 지하의 깊지 않은 곳으로 화맥(火脈)이 지나가는 때문일 것이다.)

바닥에도 두텁게 깔린 부드러운 이끼를 밟고 걸어가며 요문천은 나름대로 지하통로가 더운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화맥, 즉 땅 속의 화기가 흐르는 경로가 지상에 가까워지면 화산으로 분출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하의 물을 데워 온천을 만든다.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팔달령 일대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천독친왕부 아래로 화맥이 지나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반짝!

어둑한 동로 저편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앞쪽에 빛을 발하는 무언가 있다!)

요문천은 등을 쳐든 채 서둘러 그 반짝이는 물체로 다가갔다.

() 아닌가?”

이윽고 반짝이는 물체 앞에 이른 요문천은 눈을 치떴다.

통로가 직각으로 꺾어지는 곳인데 좌측의 벽에 한 자루의 검이 깊이 박혀있다.

특이하게도 검날이 유리처럼 투명한 검인데 검신의 중앙으로 붉은 선이 한 가닥 길게 그어져 있다.

검의 손잡이 끝에 귀신의 머리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징징!

유리같이 투명한 검날이 낮으막히 진동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검날에서 서늘한 빛이 뿜어진다.

요문천이 멀리서 본 빛은 바로 투명한 검날이 진동하면서 산란(散亂) 시킨 빛이었다.

(검날이 저절로 진동하고 있다. 절대 평범한 검은 아니다!)

요문천은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가 그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의 손잡이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귀신의 머리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로 <地獄橋>라는 글이 전자(篆字), 즉 오래 된 옛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지옥교(地獄橋)? 지옥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검명(劍名)을 확인한 요문천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이 검이 휘둘러지면 반드시 상대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뜻일 텐데...)

요문천은 등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런 후 오른손으로 지옥교라는 이름을 지닌 그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감촉은 비록 서늘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의 손잡이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벽에서 조심스럽게 뽑았다.

검날이 돌로 이루어진 벽에 깊이 박혀있어서 뽑을 때 상당한 저항을 예상했다.

스윽!

하지만 지옥교는 석벽에서 너무도 쉽게 뽑혔다.

뽑히는 과정에서 검날에 닿는 순간 석벽이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으며 간단히 갈라진 때문이다.

(단단한 석벽을 마치 두부처럼 갈라버린다. 정말 날카로운 놈이다!)

요문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지옥교를 얼굴 앞에 수직으로 세워 검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옥교의 검날은 유리처럼 투명하여 맞은편이 비쳐 보인다.

그 투명한 검날 중앙으로 방금 전 사람의 몸에서 흐른 피처럼 선명한 붉은 선이 떠있다.

웅웅!

그와 함께 요문천의 손에 들려진 지옥교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진동한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걸 휘둘러서 무엇이든지 베어보고 싶다!)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는 요문천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갔다.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와 무엇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민 탓이다.

(설마 이검이 내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살의(殺意)와 파괴본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인가?)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던 요문천은 오싹한 느낌을 받고 급히 시선을 떼었다.

지잉!

요문천의 시선이 이탈하자 지옥교의 진동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내가 보지 않자 칭얼거림이 잦아든다. 검 주제에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고 이해한다는 건가?)

요문천은 아래로 내려트린 지옥교를 곁눈질로 보며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이놈이 신검(神劍) 아니면 마검(魔劒)이라는 건데... 살기가 강하니 신검이라기보다는 마검이겠구나.)

징징!

요문천이 곁눈질로 보자 지옥교는 다시 진동을 일으킨다.

(내가 자길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무섭다면 무섭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이 마검이 어쩌다가 이런 외진 곳에 버려진 것일까?)

요문천은 급히 지옥교에서 시선을 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요문천이 걸음을 옮기는 앞쪽에는 밀로가 거의 직각으로 꺾여있다.

!”

헌데 그 직각의 통로를 돌아나간 직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리며 주춤거렸다.

모퉁이를 돌아간 그의 앞쪽에 한 구의 시신이 벽에 기댄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 시체...)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춤 주춤 시신쪽으로 다가갔다.

만일 밀로 밖의 석실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놀라 주저앉았을 것이다.

(혹시 천독친왕부의 지하로 숨어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던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가 아닐까?)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시체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시체가 갈태독의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가 완전히 육탈(肉脫)이 되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체는 체격이 아주 좋아서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어 보인다..

그 장대한 몸에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있는 시체는 반쯤 썩어서 살이 여전히 뼈에 붙어있다.

오십여 년 전에 죽은 것이 거의 확실한 갈태독의 시체가 아직도 부패가 진행 중일 리는 없다.

결정적으로 시체의 허리춤에는 빈 칼집이 하나 걸려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갈태독은 채찍과 비수, 암기들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갈태독이 검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빈 칼집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곤룡포를 걸친 시체가 갈태독의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비어있는 칼집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옥교라는 이 마검의 주인이었던 모양인데... 어쩌다 천독친왕부의 지하에 들어와 죽은 것일까?)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요문천은 몸을 숙여서 시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체는 얼굴 부위가 심하게 부패되어 있어 살아있을 때의 용모는 추측할 수가 없다.

살이 썩으면서 드러난 뼈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

뼈의 색으로 이 인물이 극독에 중독되어 죽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살이 이 정도 썩은 상태라면 불과 몇 달 전에 죽었다는 건데...)

등을 든 왼쪽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시신의 상태를 살피던 요문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시신의 가슴 부분이 불룩한 것이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품속에 무언가 들어있다!)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시체가 걸치고 있는 곤룡포의 가슴부분을 들쳐보려고 했다.

비록 두렵지는 않지만 썩어가고 있는 중인 시체에 직접 손을 댈 정도로 대범하진 못한 때문이다.

서걱!

헌데 지옥교의 날이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곤룡포가 간단히 갈라진다.

그만큼 지옥교의 날은 날카로운 것이다.

그리고 갈라진 곤룡포 속에 책이 한 권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한권 품고 있다.)

!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곤룡포를 좀 더 길게 아래로 찢었다.

털썩!

그러자 한권의 책이 시체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 두껍지 않은 그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표지가 검붉게 퇴색되어 있다.

(혹시 무공비급 아닐까?)

요문천은 지옥교를 바닥에 꽂은 후 왼손에 들고 있던 등을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었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와 그 안쪽의 지면까지 다 합쳐도 이십 장 남짓인 그 얇은 책의 재질은 종이가 아니었다.

양피지와 같은 가죽의 일종인데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만지는 감촉이 야릇했다.

(어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부드러울까?)

요문천은 갸웃하며 지옥교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의 불빛에 의지하여 책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검붉은 책의 표지에는 <저주마경(詛呪魔經)>이라는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있다.

"저주마경? 지옥교라는 검명에 못지않게 섬뜩한 제목이다."

요문천은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침을 삼키며 책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전자체로 적혀있다는 것도 저주마경이라는 이 책이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것을 품고 있던 시체는 불과 몇 달 전에 죽은 듯 아직 시신이 완전히 썩지 않은 상태다.

, 저주마경은 원래부터 요문천의 눈앞에 있는 시신의 소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곤룡포를 입고 있는 시체의 주인도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저주마경을 얻어서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목도 그렇고...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는 책이다.)

요문천은 꺼림칙했지만 용기를 내어 책을 펼쳐보았다.

겉표지를 젖히자 첫 번째 지면에 역시 전자체로 쓰인 글이 가득 적혀있다.

 

<지옥성(地獄城) 제구대 성주인 지옥검조(地獄劍祖) 하륜(河崙)이 한을 품고 죽어가며 이 글을 적는다. 노부가 남긴 저주마경과 지옥교를 얻는 자가 곧 지옥성의 제십대 성주(城主).>

 

어두운 책의 재질보다 더 짙은 검은색으로 적힌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옥성? 무림에 그런 문파가 있었나?"

글의 앞부분을 읽어본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이 요문천 역시 강호 무림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게다가 요문천은 승상부의 소부주라는 신분 덕분에 현재의 강호 정세에 대한 내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문천의 기억에 지옥성이라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지옥성이 중원 무림에 속하지 않거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문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지옥성을 멸망시킨 것은 우내사천(宇內四天)이라 불리는 중원의 인간들이었다. 그놈들은 악마삼보(惡魔三寶)를 노리고 서역(西域) 하미(合密)에 자리한 본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우내사천? 악마삼보? 역시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이름들인데...)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내사천이니 악마삼보니 하는 이름들도 요문천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옛날의 서체인 전자(篆字)로 쓰여진 것도 그렇고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사연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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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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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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