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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동정호의 파란 (1)

 

 

동호천은 침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자네는 앞으로 오년 동안만 머리를 빌려주게.]

[...머리라니... 이것 말입니까?]

금사종이 안색이 변하며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동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종이 뒷걸음질 쳤다.

[...안됩니다.]

[고깃덩어린 필요가 없다. 노부가 빌리려고 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역할 뿐이니까.]

동호천의 말에 금사종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시고... ]

[지금 말했지 않은가? 단지 자네가 참을성이 없었을 뿐이지.]

금사종은 멋쩍게 웃었다.

과연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호천은 두공에게 말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 그게... 저 서생이라고... ]

두공은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얼버무렸다.

동호천은 금사종에게 말했다.

[이렇다네. 자네가 할 역활은 이 아이의 머리가 되어주는 것 뿐이네. , 무슨 말이든지 이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야만 하네.]

금사종은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었는데 그사이에 다 잊어버렸다니...

(무공은 아주 고강한 것같은데 이런 머리로 어떻게 상승무공을 익혔을까?)

금사종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의문이었다.

동호천의 말이 이어졌다.

[오년 동안만 하면 되네. 그때까지는 한시도 내 제자의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돼. 대신!]

[...!]

금사종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호천은 베개밑에서 두권의 책을 꺼냈다.

[이것을 자네에게 주겠네. 이 두 권을 익히게 되면 천하제일(天下第一)은 못되도 천하제이(天下第二)는 될 수 있을 걸세.]

포개진 비급의 표지에는 <무치무요(武痴武要)>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금사종은 무치라는 글을 보고는 몸이 급격하게 떨렸다.

죽음이 임박한 것같은 노인이 바로 전설적인 고수인 무치 동호천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본 것이다.

털썩!

금사종은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자분께서 익히셔야 할 것입니다.]

[협기(俠氣)가 있기는 있군.]

동호천이 만족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또 말했다.

[하지만 익히지 않으면 지금 당장부터 어려움이 닥칠거야. 상권은 신공편이고 하권은 신초(神招)편이네. 하권에서 상화장(翔華掌)이란 수법을 당장 익히도록 하게. 한가지 명심할 것은....]

금사종은 비급을 받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호천의 눈에서 가공할 빛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살기도 아니고 무공도 아니었다.

단지 위엄이라고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자네가 이것들을 모두 대성한다고 하더라도 내제자는 즉시 자네를 죽일 수 있네.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말게.]

금사종은 동호천의 말에 다만 몸을 움추릴 뿐이었다.

[저쪽으로 가서 상화장을 익히게.]

동호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금사종이 두공의 방으로 들어간 후, 동호천은 두공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사부... ]

두공은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면서 울먹였다.

동호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너와 헤어질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아직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스윽!

두공은 대답을 못하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동호천이 말했다.

[장부란 자신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다. 울고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어야 한다. 정사라든지 의리같은 데에도 얽매이지 말아라. 너를 얽어매는 것은 너자신 하나면 족하다.]

두공은 동호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동호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평생 오직 한사람을 죽였다. 처음에는 한사람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지. 인간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난 후다. 그래서 내 목숨이 하나이니 만큼 딱 한사람만 죽이자고 생각했었지.]

[...!]

[단혼곡주 하삼풍의 아들을 죽였는데, 그래도 죽이고 나니 후회가 되더군.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앙금이다. 네게 부탁하는데, 하삼풍을 죽일 기회가 오더라도 나를 생각해서 두번은 살려줘라. 세번 살려줄 필요까지는 없다.]

[한데 사부님...]

두공이 고개를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제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상관없다. 나는 네게 부탁했고,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하삼풍의 복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동호천이 웃으며 말했다.

[!]

두공도 따라서 웃었다.

죽음을 눈앞에둔 사부의 유언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제자는 그것들을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했다.

 

***

 

시간은 흘러서 정오가 지나고, 동정호변에 모여든 무림인들의 숫자는 더욱 많아져서 삼천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배를 준비했고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살아있는 무림의 전설적인 존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심장은 급격하고 고동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배를 저어 부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감히 먼저 가려는 사람도 없었고 뒤쳐지려는 사람도 없었기에 배들은 횡으로 열을 지어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올가미가 가운데를 향해서 조여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 ×

 

갑자기 동호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벌컥 화를 냈다.

[그 미친 놈들이 날짜를 잘못 계산했구나!]

[...?]

두공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호천을 바라보았다.

씩씩!

동호천은 화가 나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미친놈들! 멍텅구리! 때려죽일 놈들!... ]

그는 잇달아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두공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사부 혹시 미친 건... ]

철썩!

동호천의 손바닥이 두공의 뺨에 작렬했다.

[이놈아! 미치긴 내가 왜 미쳐? 그 두놈들이 미쳤지.]

두공은 얼이빠진 듯이 뺨을 감싸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호천이 다시 소리쳤다.

[아직 열흘도 더 남았는데 그놈들이 나를 일찍 죽으라고 하다니... 멍텅구리같은 녀석들! 날짜계산도 제대로 못하다니... 씩씩!]

[그놈들이 누굽니까? 사부. 제가 혼을 내놓겠... ]

짝짝!

두공은 다시 뺨을 싸잡고 한걸음 물러섰다.

[네놈은 사숙(師叔)들을 혼내놓겠다는 거냐? 도무지 경우가 없구나.]

동호천이 준엄하게 말했다.

[주치(酒痴)사숙과 보치(寶痴)사숙 말이십니까?]

두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리 기억력이 없는 두공이지만 그 두사람만은 조석으로 보고 자랐기에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머리가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입이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동호천이 소리치고는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듯이 가만히 있었다.

[...]

그러다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네말이 맞다맞아. 그놈들은 혼이 나야된다. 내가 열흘이나 일찍 죽도록 한 댓가를 받아야지. 껄껄껄... ]

[...?]

[다음에 그놈들을 만나면 아무소리도 하지 말고 다짜고짜 뺨부터 열대씩 때리도록 해라. 이말은 잊어버리면 내가 죽기전에 네녀석부터 죽여버리겠다.]

동호천의 말은 진심이었다.

두공은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서 숯으로 몇자 적었다.

 

<사숙들은 뺨을 열대씩 맞아야 한다. 열흘 빨리 사부를 죽게 했으니 당연히 맞아야 한다.>

 

번개처럼 써내려간 글씨였다.

그러나 그것은 숯으로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껄껄껄껄... ]

동호천은 만족한듯 크게 웃었다.

그의 눈앞에는 제자에게 두들겨 맞을 두 동생의 얼굴이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웃고난 후 그는 극히 피로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요한 그의 얼굴은 덕도한 고승인듯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콰아아아!

[배 밑창이 뚫렸다. 어서 다른 배로 옮겨가라!]

누군가가 고함쳤다.

그러나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개같은 놈이 밑창을 뚫었다.]

[무치가 남길 비급을 혼자서만 독식하려는 놈이 있다.]

[찾아서 찢어 죽여야 한다. !]

갖가지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올가미처럼 부주를 조여가던 배들이 일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뿌직! !

휘이이익!

휙휙휙휙!

일제히 배의 갑판같은 나무판자를 줏어들고 물위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림을 주름잡는 고수들이다. 작은 나무판자 하나만 하더라도 타고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동정호에는 갑자기 배들이 사라지면서 수 천명의 고수들이 마치 소금장이처럼 물위에 새까맣게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분수자(分水刺)가 고수들의 다리를 찍기 시작했다.

!

[으악!]

피가 호수물로 적셔들고,

펑펑!

암습자들에 대항하여 물속으로 장력을 쳐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물속에 있는 자들의 수공(水功)은 대단했다.

한개의 분수자가 다리를 찍는 순간에 이미 다른 하나의 분수자가 다시 등을 찍고 있었다.

호수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면서 사람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수공(水功)을 익힌 고수는 극히 드물다.

물에서 이같은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처럼 죽어가는 것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무엇보다도 놀라고 당황한 데다 수공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감하게 물속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치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분수자로 사방에서 찍어대는 그들에게 난도분시가 되어 영원히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살아 있는 수백 명의 인물들은 단지 널판지들 위를 빠르게 뛰어다니며 분수자의 공격을 피할 뿐이었다.

 

동정호변,

그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있던 한척의 배위에서 하삼풍이 씨익 웃으며 만박노조를 바라보았다.

[다른 자들은 내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소?]

내 솜씨가 어떻느냐는 듯이 교만한 음성이었다.

만박노조가 말했다.

[순식간에 이천삼 백여 명이 죽었군. 무림의 힘이 크게 줄어들었어.]

[노조께선 저들도 고수로 보는 것이오? 저들은 대부분 명을 받아서 온 이인자거나 충실한 후계자를 두고 왔을 것이오. 한마디로 있으나 마나한 자들이오.]

하삼풍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만박노조는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대신할 자가 있는 자들은 모두 죽어버려야겠군.]

[다행히 난 후계자가 아직 없소이다. 노조.]

하삼풍은 농담처럼 말하며 배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탄 배는 쾌속선이었다.

배는 손살같이 부주를 향해 달려갔다.

스읏!

그때 물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없이 뛰쳐올라오며 하삼풍의 배 후미에 붙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혈포를 입은 중년인으로 손에는 역시 피처럼 붉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마치 불에 달아올라 벌건 단계를 지나 하얗게 백열하는 철판처럼 보였다.

어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강렬한 힘이 그에게 숨겨져 있는 것같았다.

손가락 두개가 쾌속선에 박혀서 그의 몸을 지탱시켜주고 있었다.

한데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동정호에서 부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 쾌속선 말고도 또 있었다.

쏴아아아아!

물위에 우뚝 서서 부주를 향해 미끌어져가는 사람...

그는 전신에 먹보다 검은 묵의(墨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피풍의가 어둠처럼 그를 감싸고 있다.

쾌속선 위에서 그 묵의인을 발견한 하삼풍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잔혼살객(殘魂煞客)이로군.]

잔혼살객...

드디어 오객(五客) 중의 잔혼살객 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슈슈슉!

물속에서 분수자들이 튀어나오면서 잔혼살객의 몸을 노렸다.

그러나,

파파파팍!

잔혼살객의 주위에는 이미 철벽처럼 두터운 호신강기(護身剛氣)가 펼쳐진 후였다.

[크아아악!]

[크룩!]

물속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를 습격했던 자들이 호신강기에 반탄되어 자신들의 내장이 파열되어 버린 것이다.

파아아아앗!

잔혼살객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주위에서는 비명이 줄을 이었다.

[크아아아악!]

[크악!]

물속에서도, 물위에서 물속의 살수들을 피했던 자들도, 잔혼살객이 그들의 곁을 지나감에 따라서 비명과 동시에 시체가 되어갔다.

추풍낙엽이라는 표현,

그 표현으로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갑자기 잔혼살객의 귓전을 때리는 음성이 있었다.

[잔혼살객! 더이상 본좌의 수하들을 해친다면 먼저 본좌와 싸워야 할 것이다!]

(단혼곡주 하삼풍!)

잔혼살객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하삼풍이 천리전음의 수법으로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잔혼살객의 눈빛은 흐릿한 회색이었다. 죽음의 빛이란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쾌속선을 보고 말했다.

[하곡주! 당신은 남을 죽여도 되고 나는 안된단 말이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당신의 단혼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휘익!

말이 끝나자 마자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부주를 향해서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하삼풍의 전신에서 폭풍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푸르르르...

그의 옷자락이 바람을 맞은 돛인양 팽팽해지면서 떨었다.

만박노조는 그런 하삼풍을 힐끗 보고는 속으로 놀랐다.

(대단하군. 이미 내공이 오기조원(五氣造元)의 경지에 달했어. 하삼풍, 역시 삼사의 우두머리라는 이자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군.)

그때 하삼풍이 분노를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잔혼살객!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능히... 그러나 두렵진 않더라도 죽을 순 있다네...]

얼굴은 평색을 회복한 듯했으나 음성에는 여전히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잔혼살객이 나왔으니 이제 남은 자들은 맹호산(孟湖山)과 해천월(海天月), 그리고 혈포단객(血袍單客)과 부운청풍객(玉風秘客), 무형도객(無形刀客)이로군.]

옆에서 만박노조가 말했다.

그 순간 잔혼살객은 이미 부주에 다다르고 있었다.

[타앗!]

하삼풍이 돌연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슈아아앙!

그는 한마리의 독수리처럼 비상하여 부주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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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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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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