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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천하제일인의 죽음 (3)

 

 

-서악(西岳) 화산(華山)!

 

밤새 내린 서리가 아직 햇살에 녹으면서 은구슬이 되어 풀위에 굴렀다.

지난 여름 검푸르던 푸른 숲의 잎들은 이제는 불타는 홍엽(紅葉)이 되어 떨어져 뒹굴고, 성마른 놈들은 벌써부터 바싹바싹 소리를 내고있다.

서리에 눅눅해졌을 만도 하건만 메마른 가을날씨라 속까지 그렇진 않은가 보다.

천년을 이어온 무림(武林)의 정통(正統) 명문(名門)인 화산파로 올라가는 산길은 구비구비 돌고돌아 어지럽기조차 한데,

물러가지 않은 안개속에 걸어올라가는 희끄무레한 두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한사람은 당당한 장부이고 그옆에 선 사람은 불과 십삼사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들이 말없이 산길을 오르는 동안 햇살은 안개를 녹이며 점점 그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햇빛 받은 두 얼굴,

그들은 동정호를 떠났던 석두공과 혼장서생 금사종이었다.

완전히 굽은 길을 접어들면서 문득 금사종이 말했다.

[여기서 부터는 화산파가 직접 경계를 서고 있는 곳이오. 원래 생각대로 그대로 지나칠 것이오?]

그는 자기보다 열살은 어려 보이는 석두공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반 경어를 사용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명목상으로 금사종은 석두공에게 오년 동안 머리를 빌려주기로 한 하인에 불과한 신세가 아닌가?

두공이 물었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했었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죠.]

그는 자신이 한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듯했다.

금사종은 앞서 걸으면서 다시 물었다.

[대체 화산파에는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오?]

[장문인을 만나러 왔어요.]

[삼비철검자(三臂鐵劒子)?]

금사종의 의문에 대해 두공은 씨익 웃었다. 더이상 물어도 답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도무지 속을 짐작할 수가 없단 말이야. 자신이 했던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틀림없는 바보인데, 또 그런가 하면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데는 도저히 귀신도 따를 수 없을 것같으니...)

금사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휙휙!

갑자기 그들의 앞으로 두사람의 검객이 날아서 떨어졌다.

짙은 검미에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불툭 솟아오른 관자놀이는 그들의 내공이 얕지 않음을 말해주는데, 각기 등에는 청과 홍의 수실이 늘어져 있는 고검(古劒)을 매고 있었다.

[두분은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곳은 속인이 함부로 오는 데가 아니오.]

왼쪽에 선 약간 마른듯한 검객이 말했다.

금사종은 포권을 취하고 말했다.

[소생은 복우파의 금사종이라 하오. 화산파의 위명은 끊임없이 들었소이다.]

복우파의 제자가 화산파의 위명을 거론하자 두 검객의 얼굴이 약간 부드럽게 변했다.

방금 전에 말했던 검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화산오검(華山五劒)의 셋째인 장간위(張干韋),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넷째인 연주국(燕珠菊)이오. 복우파의 형제가 우리 화산파엔 어쩐 일이시오?]

[귀파에 용무가 있는 사람은 소생이 아니라 소생이 모시고 있는 사람이외다.]

금사종은 석두공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장간위와 연주국은 이상한 듯이 석두공과 금사종을 번갈아 보았다.

연주국이 물었다.

[소형제가 본파에 용무가 있는가?]

[그렇소. 나는 삼비철... 뭐더라?]

옆에서 금사종이 재빨리 말했다.

[철검자!]

[삼비철검자! 그 삼비철검자를 만나러 왔소. 이곳으로 좀 불러주실 수 있소?]

석두공은 어른들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했다.

그것은 어이없다기 보다는 우스광스러웠다.

연주국이 금사종에게 물었다.

[금형제! 대체 이 소년은 누구신가? 어느 고인의 자제분이신가?]

[그는...]

금사종이 막 입을 열려는 찰라,

[말하지 말아요. 함부로 내게 대해서 말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석두공이 준엄하게 소리쳤다.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성에는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서려있었다.

화산오검의 두사람인 장간위와 연주국은 그 소리하나 만으로 석두공을 다시 보았다. 순간적이나마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던 것이다.

장간위가 연주국에게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두분을 모시고 있게. 내가 사부님께 알려드리겠네.]

장간위는 이미 석두공이 범상한 소년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잠시 후, 장간위는 삼비철검자를 대동하고 석두공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왔다.

삼비철검자는 매화꽃 문양이 그려진 장삼을 입은 팔십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매는 칼날처럼 매서웠고 몸은 전혀 무게가 없는듯이 가벼워보였다.

또한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조용하면서도 파도같은 무형의 기도는 화산파라는 검문을 수십 년 동안 맡아온 일대검호(一代劒毫)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장간위로 부터 말을 들었는지 그는 대뜸 석두공에게 물었다.

[존사(尊師)가 뉘신가?]

[노인께서 삼비철검자이십니까?]

석두공은 마주 질문을 했다.

삼비철검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렇게 나를 부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건만...)

그러나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생각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억눌렀다.

그때 석두공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표정으로 보아서 삼비철검자가 맞는 모양이네요. 난 비무를 하기 위해 왔어요.]

멍청...

삼비철검자뿐만이 아니었다.

삼비철검자의 뒤를 따라 도착한 화산오검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멍청해져 버렸다.

다만 금사종만은 그들과 약간 다른 각도로 놀라고 있었다.

그는 석두공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비무를 하겠다고 화산까지 왔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기에 놀란 것 뿐이었다.

[허허허허...]

삼비철검자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화산오검도 덩달아 웃었다.

방금 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같던 분위기가 갑자기 늘어져 버렸다.

한데,

[하하하... ]

석두공도 함께 웃으며 손가락으로 삼비철검자의 코를 가리켰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금사종이 당황하여 외쳤다.

[그러면 않되네.]

하지만 그 순간에 삼비철검자는 깜짝 놀라며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났다. 마치 예리한 검이 날아들기라도 하듯이...

화산오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고,

[하하하...]

석두공은 하늘을 보면서 웃어젖혔다.

삼비철검자는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전의 것은 혹시 본파의 매화검지(梅花劒指)가 아닌가?]

[그게 매화검지였습니까?]

석두공은 싱글벙글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연관이 있을 것같아 해본 것인데 용케 맞아떨어졌군요.]

운래 매화검지는 화산파에서도 실전된 무공이었다.

한가닥으로 뻗어진 지풍이 상대방의 몸에 이르러서는 다섯줄기로 나뉘어 격중되면서 매화문양을 새기고 마는 것으로, 화산파의 진산(鎭山)의 절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삼비철검자는 무겁게 말했다.

[매화검지를 어떻게 익혔는가?]

[그냥요. 그런 쓸모없는 말보단 이제 비무를 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데요.]

석두공은 말꼬리를 돌렸다.

삼비철검자는 잠시 생각했다.

(쉽게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먼저 무공으로 제압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겠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비무를 수락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당연히 그래야죠.]

석두공은 얼굴가득 웃음을 피워올리며 말했다.

삼비철검자는 준엄하게 말했다.

[만약에 네가 진다면 매화검지를 돌려다오. 어떻게 해서 익혔는가는 추궁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지요. 그렇지만 내가 이길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석두공의 말에 삼비철검자는 말문이 막혔다. 증손자뻘은 될 꼬마녀석이 화산파의 장문인인 자신에게 도전하고, 게다가 이길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다.

삼비철검자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때는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목숨을 달라면 목숨을 주고 종이 되라고 하면 종이 되지.]

[사부님!]

화산오검이 놀라 외쳤으나 이미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두공이 금사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사람이 증인입니다.]

 

화산파의 장문인 삼비철검자는 열세살의 어린 소년을 상대로 검을 뽑았다.

소년은 적수공권(赤手空拳)...

강호의 뭇 고수들이 알면 실소할 일이었으나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석두공은 오른손의 검지로 삼비철검자의 발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데도 삼비철검자는 검으로 자신을 방비하기만 할뿐 움직일 줄 몰랐다.

어린 석두공에게서는 벌써부터 절세고수의 풍모가 엿보이고 있었다.

(이런 꼬마가 어찌... 남들은 이나이에 겨우 무학에 입문할 때거늘...)

삼비철검자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 앞에 몸을 떨었다.

눈앞의 석두공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삼비철검자는 내심 탄식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순 없다.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그때 돌연 석두공이 손을 거두고 물러서면서 말했다.

매화검지는 돌려드리겠어요. 그리고 이것도 돌려드리죠. 아마 알만 한 것일 거예요.”

화산오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사부가 이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삼비철검자의 안색은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예 새까맣게 보였다.

 

두공은 손가락으로 검결을 형성한 뒤에 한가지 검법을 천천히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동을 가리키고 서를 가리키며, 날아올랐다가 물러서고, 물러서는가 하면서 옆으로 돌아가는 기이막측한 검법이었다.

화산파의 무공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화산파의 것인 모양인데도, 삼비철검자는 그것이 어떤 검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열일곱 초식으로 이루어진 그 검법을 펼침에 있어서 왼손은 항상 자유로웠다.

두공이 연거푸 세번이나 초식을 세밀하게 펼쳐보인 후에 말했다.

[매화검지와 병행해서 펼칠 수 있는 검법이예요. 모든 제자들에게 동시에 전수하세요. 그리고...]

두공은 갑자기 손을 뻗어 석벽을 가리켰다.

순간,

파파파파팍!

뭉게뭉게!

석벽에서 돌먼지가 날아오르며 그사이에 용비봉무와도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매화검지의 구결이었다.

삼비철검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네 의도가 대체 무엇이냐?]

[내말을 듣기만 하세요!]

석두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두가지를 완전히 익힐 때까지 봉문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후에 단 한번만 나를 위해 그 무공들을 사용해 주시면 되요. 다른 조건은 없어요. 증인이 있는데 스스로 맹세한 것을 어기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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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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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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