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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신공을 완성하다.

 

 

곽범은 열여섯 살이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도적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혼자 살아남았다.

외갓집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2년 동안 거지로 살았다.

그러다가 사부를 만나 산으로 왔다.

글은 일찍 배워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 세상의 이치 같은 건 몰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기 때문이다.

곽범에게 인의도덕이며 군자 같은 말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세상과 연결되는 점이 없었다.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것도 밥 먹기 전에 손 씻어야 한다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는 건 부모가 죽었으니 뜬 구름 잡는 소리였다.

곽범이 겪은 2년의 세상살이와 8년의 산중 생활은 똑 같았다.

사람도 짐승이고 짐승도 짐승이다.

도리를 가져다 따질 대상이 아니다.

그냥 서로가 할 일을 하는 존재들이다.

사냥을 하거나 당하거나,

부리거나 부림을 당하거나.

곽범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도리였다.

무공은 그런 도리들 중에서도 높은 도리다.

말보다 느끼고 깨닫는 게 더 많다.

오히려 말하려면 더 어렵고 힘들다.

 

새장 아래에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금왕경(禽王經)이라는 책이 나왔다.

금왕(禽王) 오신,

날짐승들의 왕이라 불리던 자가 남긴 책이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리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새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법이 적혀 있는 게 아니다.

새들에게 외공(外功)을 가르치는 법까지 있었다.

특별히 조제한 약을 먹이고 훈련시킨다.

그러면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놀랍도록 단단해진다.

탁양앵무라는 새들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 이유다.

새의 말을 알아듣는 법도 있었다.

새들에게 사람 말을 가르칠 수도 있다.

금왕경의 내용은 읽을수록 신기했다.

또 이상하기도 했다.

곽범이 보기에 금왕 오신의 무공은 형편없었다.

금왕경에는 철포삼(鐵袍衫)의 수련비결이 적혀 있었다.

철포삼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의 일종이다.

외공들 중에서도 손을 꼽는 절기다.

철포삼 수련비결 뒤에는 금왕 오신의 주석이 달려있다.

그 주석에 오류가 상당했다.

곽범은 머리가 명료해진 덕분에 오류들을 알아차렸다.

주석의 수준으로 보아 금왕 오신의 철포삼 성취는 6성 정도에 그쳤다.

곽범은 철포삼의 구결과 미흡한 주석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런 후에 6성에 그친 금왕의 이해를 확장시켰다.

칠주야에 거쳐 노력한 끝에 철포삼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었다.

 

***

 

"우린 물새가 아니야.”

새장에서 물고기를 쪼던 새 한마리가 들으라는 듯이 제제 거렸다.

"물고기만 먹고는 못 산다고.”

곽범이 말했다.

"나도 그래.”

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새 고기가 맛있었어.”

곽범은 입맛을 다셨다.

새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새장 밖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곽범과 새들에게 제공해온 겁쟁이는 더 겁을 냈다.

곽범이 새장 열기 귀찮아서 자기부터 먹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곽범은 겁쟁이에게 도망가면 새장 속에 있는 두 마리를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겁쟁이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추적당하다가 죽을 게 뻔했다.

"난 물고기 좋아해.”

새장 속의 어떤 놈이 큰 소리로 말하며 부리로 생선의 머리를 쪼았다.

새들은 여섯 살 때의 곽범 같았다.

천방지축이고 아는 것 같으면서 물어보면 바보다.

그러면서도 입은 주워들은 소리를 지껄이느라 조잘거렸다.

그리고 흉악했다.

세상에 못 먹는 것이 없었다.

풀과 열매는 물론이고 벌레와 고기를 먹었다.

심지어 소화를 돕기 위해서 돌도 쪼아 먹었다.

탁양앵무는 이름 그대로 양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금왕이 번식시키고 훈련시켜서 천적이 없는 포식자가 되었다.

곽범은 철포삼을 정리하느라 묻지 못했던 걸 물었다.

"내가 죽인 그놈이 금왕이야?”

"금왕은 무슨.”

"금왕이 살았으면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자식은 어쩌다가 금왕한테 걸려서 제자가 된 놈이야.”

"철포삼을 익힌 것 같지 않던데.”

"크하하하하. 그놈이 철포삼을 익혀?”

“이판은 인내심이 없었어. 십 년을 단련해도 부족한 철포삼을 무슨 재주로 익혀.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들이 의기양양해서 재잘거렸다.

새장수의 이름은 이판이었다.

"그래도 이판은 새소리를 잘 알아들었어. 아마 스무 가지도 넘게 알았을 걸? 그 때문에 금왕의 제자가 됐지만.”

"너희들 철포삼 별거 아니잖아. 입에 넣고 씹으니 툭 터지던데.”

곽범이 새들을 자극했다.

한 마리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대답했다.

"사람 턱 힘이 얼마나 센데. 양쪽 어깨 힘보다 더 셀 때도 있어.”

"나한테 씹히고도 터지지 않을 놈 누가 있어?”

새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 시험하는 거 아니야.”

곽범은 새장 문을 열었다.

새들은 의아해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들의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동굴 천장에 나있는 구멍으로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새들은 지난 칠 일동안 곽범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았다.

곽범은 하루 두 시간 정도 동굴 벽을 옆으로도 거꾸로도 달렸다.

날래기가 자신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섣불리 달아나려 했다가는 잡힐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곽범 뱃속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곽범은 새를 먹을 줄 아는 놈이었다.

새를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새를 깃털 채 불에 그슬려 먹는다.

그슬린 새의 깃털은 양념이 되어 새고기에 맛을 더한다.

정말 좋아하는 인간들 중에는 털 채로 새를 씹어 먹고 찌꺼기만 뱉어버린다.

곽범은 그것도 하지 않고 다 삼키는 놈이다.

새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겁쟁이는 곽범의 겨드랑이 근처로 숨었다.

"뭐하자는 거야?”

마침내 새 한 마리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시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 했잖아.”

곽범은 옷을 벗어서 바위 위에 올렸다.

"나를 쪼아봐.”

"헹. 그래놓고는 쪼았다고 잡아먹으려고.”

“안 속아. 안속는다구.”

"쓸모없네. 다 잡아먹을까?”

곽범이 중얼거렸다.

순간 한 마리가 뛰쳐 나오며 외쳤다.

"내가 할게.”

새떼가 와르르 쏟아져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새의 부리와 발톱을 느껴지면 공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쪼면 받아서 튕겼다.

백 여 마리나 되는 새들이 전신에 달라붙고 튕겨나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부분은 살이 뚫리고 피가 쏟았다.

새들은 한동안 고기를 못 먹었었다.

피 맛과 생살에 흥분한 새들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고통으로 숨이 멎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곽범은 버텼다.

대처가 늦어서 상처를 입은 부분에는 더 많은 공력을 보내 치료했다.

곽범의 철포삼은 공력을 바탕으로 한 철포삼이었다.

철포삼은 겉을 단련하여 구리로 된 내장과 쇠로 된 뼈를 가진다는 외공이다.

그 철포삼을 뒤집어서 공력을 겉으로 보냈다.

피부를 강화하며 공력의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했다.

시간이 지나며 곽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부리가 닿기 전에 먼저 느끼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면 곽범의 공력은 피부가 부리에 찍히지 않게 단단해졌다.

단단해지자마자 새의 부리를 튕겨냈다.

다만 피는 많이 흘렸고 공력은 소모가 심했다.

"그만.”

곽범이 선언했다.

대부분의 새들이 멈추고 물러났다.

두 마리만은 비어있는 곽범의 가슴과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 맛에 눈이 까뒤집힌 것이다.

곽범은 양손으로 한 마리씩 잡아서 차례로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도독. 팍팍.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새들은 바닥에 내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공포에 떨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새들은 조용히 새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좌정하여 자기 몸을 관조하는 곽범은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철포삼을 외공 아닌 내공으로 펼치다 거두었다.

전신이 거문고의 현처럼 통통 튕겨지고 있었다.

몸 곳곳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같았다.

몸속의 공력은 이제 길을 아는 것처럼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치유와 반탄과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달려들어 쫀 곳을 또 쪼고 할퀴는 흉악한 새들에 공력이 반응한 것이다.

새들의 공격은 그쳤지만 공력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몸속의 새떼라도 된 것처럼 날 뛰었다.

심법을 운용하여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곽범은 자기의 몸이 더 작아지고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굴 벽을 달려보니 공력을 더 적게 쓰면서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내공과 외공이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

 

새들을 이용한 수련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곽범이 새들에게 지시하는 말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새들은 그 말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곽범이 놀 때는 무슨 말을 하든 괜찮았다.

곽범은 권각법도 새들을 이용해서 연습했다.

그가 배운 것은 다리 힘을 기르고 팔 힘을 기르는 매우 기본적인 훈련 방법뿐이었다.

공방은 없었다.

곽범은 새들이 공격하는 것을 손발로 막는 훈련을 했다.

아무 격식도 없었으나 하는 중에 점차 길이 생겼다.

동작에 따라서 공력이 이동한다.

공력에 따라 동작에 힘이 가해진다.

그것을 느낀 후에는 저절로 공방의 길이 만들어졌다.

금왕경을 읽으면서 새소리를 알아듣는 법도 배웠다.

곽범은 자기가 이전에도 새소리는 좀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2년 동안 동굴을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간 세상이나 숲이나 동굴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새들은 두 번 털갈이를 하면서 울긋불긋하던 색깔이 하얀 물새처럼 되었다.

어떤 놈은 물고기만 먹으니 물새가 되어버렸다고 투덜거리며 물새처럼 끼룩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동굴이 좁고 갑갑했다.

2년 전 봉우리 근처 샘물에서 보았던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숲을 달리며 곰의 노랑내와 딸기의 새콤한 맛이 그리워졌다.

고운 꽃도 보고 싶고, 보드라운 것도 만지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맡고 싶었다.

곽범은 새장을 지고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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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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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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