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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버림받은 천재

 

 

사부는 5일이 지난 후에 왔다.

그동안 암자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성질을 연구하느라 모든 걸 망각했다.

밥도 짓지 않았다.

사부를 위해 차를 다릴 물도 없었다.

곽범은 미친 놈 행색으로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부는 보자마자 혹독한 매질을 했다.

곽범은 고통 속에서 혼절하고 고통으로 깨어나길 반복했다.

사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8년 지은 농사였는데... 네놈이 스스로 망가졌구나!”

매질을 하며 사부가 악다구니를 썼다.

곽범은 자신이 뭔가 잘못 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놈!”

환청처럼 울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부는 떠났다.

 

곽범은 사흘 동안 암벽 앞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가을비 추적거리는 밤에 기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싯돌을 어찌 어찌 쳐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 앞에 웅크려 몸을 데웠다.

솥에 들어있던 물도 데워졌다.

데워진 물을 겨우 겨우 마셨다.

텅 빈 속에 며칠 만에 들어가는 게 물이다.

그럼에도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스스로 깨우친 심법의 효험을 봤다.

곽범은 전보다 몇 배 빠르게 공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복잡한 혈도와 경맥을 지나는 데도 그렇다.

빨라진 공력이 몸을 보호해주었다.

맞는 부위로 즉시 공력이 달려가곤 했다.

덕분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팔 다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엉금엉금 기어 방으로 들어갔다.

두 권의 무공비급은 사라졌다.

사부가 사왔다가 던져 놓은 옷 보따리만 뒹굴고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구나.)

곽범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금 세상에서 곽범이 아는 사람은 사부뿐이다.

정은 없지만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부였다.

버림받는 고통은 외로움보다 더 깊다.

곽범은 눈을 감았다.

그 무엇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자신의 몸 상태가 관조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 훤히 보였다.

혈도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간 기운이 상처에 이르며 치유하는 과정을 느꼈다.

혈도들은 얕게는 피부에, 깊게는 오장육부와 사지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모양과 성질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았다.

혈도마다 숲의 짐승들처럼 관장하는 영역이 있었다.

영역의 기능과 모양을 따라 혈도도 달랐다.

사부의 장력에 손상되었던 오장육부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혈도에 쌓여있는 공력을 근처의 상처로 이끌어 집중시켰다.

다치지 않은 곳보다 다친 곳들로 점점 더 많은 공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새벽이 왔을 때였다.

곽범은 굳어진 핏덩어리를 토했다.

오장육부는 어느덧 활기를 되찾았다.

속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한 뼈와 근육, 피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이면 근육은 대부분 나아있겠구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시간문제일 뿐 다친 몸은 결국 회복될 것이다.

잠이 밀려왔다.

회복에 집중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컸다.

곽범의 눈이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감길 때였다.

꾸욱 꾹!

어디선가 일찍 먹이를 찾아 나온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곽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지암 주변에는 나무나 풀이 거의 없다.

벌레도 없다.

숲에 사는 새가 이곳까지 올라와서 울 까닭이 없다.

높은 곳에 사는 새는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뿐이다.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곰이나 범, 늑대 같은 짐승을 만나기 전에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달려야 한다!

아직 다리로는 일어설 수 없었다.

네발로 기어 방을 나왔다.

벽에 기대두었던 도끼를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섰다.

모든 기운을 다리의 뼈와 근육을 치유하는 데로 모았다.

곽범은 부들부들 떨면서 걸었다.

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도끼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큰 짐승과 싸워야 한다면 도끼가 있어야한다.

 

곽범은 있는 힘을 다해서 30 미터 정도 움직였다.

돌아보니 어슴푸레하게 십지암이 보였다.

더 움직일 힘이 없다.

뱃속은 텅 비었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꾸욱 꾹! 꾹!

요란한 새소리가 가까워졌다.

도망치기는 늦었다.

바위 뒤에 몸을 우겨넣어 숨었다.

저벅 저벅

새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새벽의 맑은 공기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게 한다.

미약한 냄새도 선명하게 느껴지게 한다.

곽범은 바람 속에 흐르는 피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뿐만이 아니다.

어렸을 때 맡았던 닭똥 냄새 같은 것도 느껴졌다.

“도철(饕餮) 영감도 참 지독해. 죽일 거면 직접 죽일 것이지. 죽을 만큼 때린 후에 남 시켜 시체 치우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지 않아?”

투덜거림과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는 수많은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지고 있었다.

쌀가마니 두세 개쯤 되는 크기의 새장이다.

비어있는 작은 새장들이 큰 새장에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 시장에서 본 적이 있다.

새장수다.

꾹 꾸욱! 꾸룩!

새장 속의 새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람은 새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너희들 먹일 시체가 필요해도 그렇지. 젠장, 나도 무림에서 제법 신분이 있는데 말이야. 도철 영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시체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꾸룩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맞장구를 친다.

요란한 새소리는 그 자체로 섬뜩했다.

“기왕이면 다 자란 계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살이 야들야들하면서 양도 넉넉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

새장수의 중얼거림이 가까워졌다.

곽범은 숨을 죽인 채 그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새장수는 바위 근처에 멈추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사내새끼야. 계집도 어른도 아니라고.”

곽범은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

“게다가 죽어있어야 하는데.... 살아있네.”

새장수가 바위 뒤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곽범은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더 빨리 튀어! 그래서야 어디 살겠어?”

새장수가 곽범의 등을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십지암은 벼랑 끝에 서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지어졌다.

십지암으로 오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에 새장수가 있다.

십지암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새장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낫지 않은 다리뼈가 땅을 딛을 때마다 통증이 골을 울린다.

새장수는 십지암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에게는 곽범이 독 안으로 뛰어드는 생쥐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곽범은 법당을 목표로 달려갔다.

법당의 문은 두껍고 튼튼하다.

도금한 불상을 도적질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그 문을 걸어 잠그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다친 다리라 속도는 나지 않았다.

뒤에서는 새장수가 휘파람을 불면서 느긋하게 걸어온다.

법당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아이쿠. 저길 더럽히면 도철영감이 가만 안 있을 건데 깜박했다.”

새장수는 걸음을 멈췄다.

“잡자!”

파다다닥! 파닥!

새장수가 소리치는 순간 새들이 새장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막혀있던 굴뚝에서 그을음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곽범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주변이 요란한 새소리에 파묻혔다.

새떼가 달려들어 발톱과 부리로 옷을 잡고 물어 당겼다.

새들은 그리 크지 않다.

비둘기나 까치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힘이 아주 좋았다.

독수리에 못지않을 것 같다.

큰 독수리는 양을 채 가기도 한다.

게다가 새들은 숫자까지 많았다.

곽범의 몸뚱이는 간단히 들려졌다.

털썩

한길 쯤 들려졌던 몸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땅에 떨어질 때까지 새들이 옷을 붙잡아서 낙법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콱 막혔다.

뼈와 근육이 지르는 비명으로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쳤다.

새장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더 굴려 더.”

새들은 새장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곽범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들렸다가 던져지기를 반복했다.

옷은 돌부리에 걸려 찢어졌다.

피멍이 들었던 곳에서는 피와 고름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만, 이제 야들야들해져서 먹기 좋아졌을 거다.”

새장수의 명령에 새들이 곽범을 놔주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살아있었을 줄이야. 흐흐흐.”

새장수는 곽범을 내려다보며 희희낙락했다.

곽범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덮여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얘기 좀 하자.”

새장수가 곽범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눈 주변의 피와 흙이 술에 씻겨 내려갔다.

“너 도철영감 제자 맞지?”

새장수가 곽범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곽범은 울컥하고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네 사부가 시체를 없애라 해서 왔다. 그런데 살았으니 이걸 어쩐다? 도철영감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새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얼굴에 비비며 실실 웃었다.

술이 묻은 얼굴에 흙이 그림을 만들었다.

곽범은 따가운 통증에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사부가 도철이라 불린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다만 곽범은 도철의 뜻은 몰랐다.

무공비급 외의 책을 읽을 기회도,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철은 신화 속에 나오는 네 마리의 흉악한 괴물, 사흉(四凶) 중 하나다.

탐욕과 교만, 교활과 포악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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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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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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