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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외로운 천재

 

 

암자의 이름은 십지암(十智庵)이다.

십지암은 봉우리 정상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있다.

몇 구비 절벽을 따라 돌면 두 개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틈에 채 열 평도 안되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법당 한 칸, 방 한 칸, 부엌이 전부인 작은 암자다.

곽범은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매일 물을 긷고 밥을 지었다.

곽범의 사부는 스님이다.

곽범이 사는 곳도 암자다.

하지만 곽범은 중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규율을 배운 적도 없다.

오로지 사부의 지시대로 살아왔다.

사부는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온다.

가을 무렵이다.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으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이 된다 해도 사부가 언제 올지는 모른다.

항상 사부를 위한 찻물을 준비해놓아야 했다.

찾아온 사부는 곽범의 몸을 꼼꼼히 살펴본다.

그런 후 연마하는 무공에 대해 조언해주고 떠났다.

오래 머물러야 보름 정도다.

그래서 곽범은 늘 혼자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일꾼과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

말할 기회가 적으니 말하는 게 투박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암자에 있는 책이라고는 두 권의 무공비급이 전부다.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제목은 없다.

한권에는 내공을 기르는 심법이 적혀있다.

다른 한권에 적혀있는 건 경신법이다.

사부는 다른 책은 일절 주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는 게 심심함과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밤이면 두 권의 비급을 반복해서 읽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읽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밤만 되면 다시 읽었다.

오전에는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했다.

오후에는 봉우리를 달려 내려갔다.

골짜기에서 원숭이를 쫓으며 경신법을 익혔다.

산에는 원숭이 외에 늑대도 있고 곰도 있으며 표범도 있다.

그놈들 덕분에 곽범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곽범은 사부로부터 검을 받지 못했다.

숲에서 단련할 때는 늘 도끼를 메고 다녔다.

도끼만 있으면 곰도 범도 무섭지 않았다.

곽범은 곰을 여러 마리 잡았다.

정면 대결해서 잡은 건 아니다.

곰이 쫓아오면 나무 위로 도망간다.

대부분의 곰은 따라 올라온다.

그러면 옆의 나무로 건너뛰든가 휘어지는 가지에 매달려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 다음 도끼로 나무를 찍었다.

곰은 곽범처럼 나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곽범이 나무를 찍기 시작하면 포효는 해도 움직이지 못했다.

떨어질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매달려 있다가 나무가 쓰러지면 함께 떨어진다.

곰은 육중한 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거나 죽는다.

표범을 만날 때도 방법은 비슷했다.

나무에 올라가면 표범은 이것 봐라 하며 따라 올라온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나무의 거의 끝까지 올라간다.

그쯤 되면 표범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표범은 영악하다.

하지만 일단 나무 위로 유인당하면 도망치지 못한다.

동작은 제한되고 민첩성은 없어져 버린다.

그저 매달려 있기도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그때를 기다려 반격한다.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표범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다.

저항도 제대로 못한 표범은 머리가 깨져 땅으로 떨어진다.

곰이나 표범을 죽이면 고기를 구워먹었다.

원래 날쌨던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더 민첩하고 빠르고 강해졌다.

 

심법에 따라 기운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인다.

매일 열 번 이상 심법을 수련했다.

그러나 공력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쌓였다가도 이 빠진 바구니에서 물이 빠지듯 흩어졌다.

공력 중에서 특히 정순한 것들만 앙금처럼 기해혈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공력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강한 흡착력을 지녀 다른 힘을 끌어들인다.

다만 쌓이는 양은 매우 미미하다.

작년에 비해서도 거의 늘지 않았다.

곽범은 사부가 왔을 때 벌을 줄까 무서웠다.

사부는 게으름을 피웠다고 할 게 분명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사부님이 가르치신 대로 수련하는데 공력은 왜 늘지 않는 걸까?)

밥을 지으며 곽범은 생각했다.

전에는 품지 않았던 의문이 일어났다.

하늘에 빠질 뻔한 경험으로 머리가 트인 덕분이다.

지금까지는 늘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했었다.

명료해진 머리로 고민다운 고민을 처음 했다.

(사부님이 일부러 틀리게 가르치실 리는 없고... 혹시 심법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사부님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부를 의심할 수는 없다.

하려면 익히고 있는 심법을 의심해야한다.

결함이 있는지는 몰라도 심법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이기는 한다.

그 양이 아주 적다는 게 문제다.

(쌓이는 양이 적다면 쌓는 횟수를 늘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법을 더 많이 운용하면 쌓이는 공력도 늘어날 것이다.

심법의 운용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기운을 정해진 경맥과 혈도로 신중하게 이끌어야하기 때문이다.

심법을 더 빨리 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운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어볼까?)

고민하던 곽범은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았다.

 

곽범은 몸을 산으로 간주해보았다.

심법을 운용하는 건 경신법을 펼쳐 달리는 것에 비유했다.

여름과 가을에 숲을 달리면 짐승도 있지만 열매들도 보인다.

나무 열매도 따고 넝쿨 열매도 따서 먹으며 달리곤 했었다.

공력을 쌓는 과정은 절벽과 숲을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심법을 한번 운용할 때마다 공력은 깨알만큼 늘어난다.

숲에서 작은 열매를 따먹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다.

숲에는 달리기 좋은 길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길이 없는 곳도 있다.

있어도 힘이 부족해서 가지 못할 길도 있다.

열매는 곳곳에 있다.

큰 짐승들은 자기 구역이 있어 그 근처에서만 볼 수 있다.

처음 숲에 갔을 때는 가장 쉬운 길로 갔다.

그런데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막힌 곳에서 길을 찾아냈다.

끊어진 곳에서는 노력을 거듭하여 건너뛰었다.

큰 짐승은 도끼로 맞섰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열매가 많은 곳으로 길을 만들고 달릴 수 있었다.

두려움은 어느덧 즐거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력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려면 혈도를 잘 알아야 한다.

심법을 아주 느리게 운용해보았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듯이 운용했다.

그동안 다닌 길을 꼼꼼히 살폈다.

열매뿐 아니라 토끼 같은 작은 짐승도 찾아보았다.

아주 가끔씩 열매는 만났다.

하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토끼는커녕 벌레도 없다.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공력이 전신을 한 바퀴 돌아서 기해혈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집중력이 떨어져 간과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운용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익힌 심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자주 다니는 길에서는 열매를 찾기 힘들다. 해가 바뀌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딸 수 있다.)

아궁이 속에서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불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열매를 계속 얻으려면 길을 바꾸는 게 답이었어. 지금까지 이 생각을 왜 못했지?)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한다.

밥 타는 냄새에 관조를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솥에서 퍼낸 밥을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숲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들면서도 생각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확신했다.

그동안 익혀온 심법은 너무 단조롭다.

사람 몸에는 12정경과 기경8맥이 존재한다.

그 중 극히 일부만 심법 수련에 사용해왔다.

더 많은 혈도에 기운을 소통시키면 더 많은 공력이 쌓일 것이다.

그 과정은 숲에서의 열매 찾기와 완벽하게 같다.

더 많은 길을 달려야 더 많은 열매와 만난다.

혈도는 달리면서 건너뛰는 나무나 바위와 갈다.

나무나 바위마다 크기와 모양, 성질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혈도는 성질이 다르다.

붙잡아 놓거나 밀고 당기거나 튕기고 쏘는 혈도도 있다.

어떤 혈도를 지날 때는 기운이 느려진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더 써야한다.

저절로 빨라지게 하거나 튕겨버리는 혈도도 있다.

그런 곳에서는 노력 없이도 공력이 다음 혈도로 움직여준다.

혈도의 성질을 알고 심법을 행하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걸렸던 일주천을 같은 시간에 세 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혈도와 경맥에 기운을 소통시키는 데도 그렇다.

반복할수록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곽범은 방으로 들어갔다.

혈도의 위치와 성질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른다.

어딘가에 그려놓고 보면서 더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십지암을 양쪽에서 가두고 있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돌로 긁어 보았다.

선이 그어졌다.

곽범은 기해혈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기해혈은 쌓인 공력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곳이다.

그래서 꿀이 담긴 그릇처럼 끈적거린다.

공력이 쌓이는 곳이면서 뽑아내기가 가장 어려운 혈도가 기해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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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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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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