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3화

 

                      성공한 사냥

 

 

“도철영감한테 배운 무공이 뭔지 말해봐.”

새장수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럼 안 아프게 죽여줄게. 아니면 새들이 살아있는 채로 네 살점을 뜯어먹을 거야.”

오싹한 협박이 이어졌다.

곽범은 오래전 사부로부터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아무에게도 이 무공을 말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라.

-무공을 줬으면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라.

-죽더라도 내 말을 어겨선 안 된다.

 

곽범은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무공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사부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돼. 난 고문을 길게 할 인내심이 없어.”

새장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철영감 무공이 탐나긴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인내심이 늘어나지는 않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말해봐.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더 안 물으마.”

새장수가 애원했다.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에 대한 의리나 두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고 손을 썼다.

사부의 은혜는 죽음과 상쇄되었다.

그러나 곽범은 입을 다물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은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기 싫었다.

아픈 것보다 죽는 건 비교할 수도 없이 괴로울 것이다.

"그 눈깔. 새까만 그건 없어도 되겠네.”

새장수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파다닥!

두 마리 새가 벼락같이 곽범의 눈으로 달려들었다.

“안돼!”

곽범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타탁! 푹!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새장수의 발이 곽범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새들은 부리로 새장수의 발등을 쪼았다가 날아올랐다.

"것봐. 너도 눈 빠지는 건 싫어하잖아.”

새 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눈두덩에 문질렀다.

"말할게요.”

곽범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어.”

새장수가 발을 치우며 씨익 웃었다.

"뻔한 걸 가지고 뭘 어렵게 가? 그냥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그런 후에 볼일 보면 되는 거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말할 힘도 없어요.”

곽범이 힘없이 말했다.

"그걸 생각 못했네.”

새장수가 자기 이마를 툭 쳤다.

"내가 널 위해 밥을 지을 순 없고, 술과 새 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걸 먹을래?”

곽범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술!”

"이놈 남자네.”

새장수가 껄껄 웃었다.

"나라서 주는 거지 아무나 못 주는 술이야. 그러니 알고 마셔.”

 

곽범은 새장수가 건네준 술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날짐승 냄새가 밴 술이 입안을 태우며 뱃속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몸에 열기가 돌았다.

통증은 가시고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그냥 자면 안 되지. 잠은 조금 있다가 푹 자고, 먹은 만큼 토해내야지. 자 말해봐.”

새장수가 곽범의 뺨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곽범은 귀찮은 듯이 그의 손을 밀쳤다.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해요. 길게 들이쉬기, 길게 내쉬기.”

새장수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래. 내공심법이구나. 이름은 뭐냐?”

"곽범.”

"이 바보 자식, 네 이름 말고 심법 이름.”

"이름 없어요. 아는 게 그것뿐인데 이름 지어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곽범은 술기운이 오른 입으로 중얼거렸다.

"도철영감이 무공 이름은 숨긴 모양이군. 그러고도 남을 영감이지. 계속 말해.”

"오래 참아요. 숨이 막혀 죽을 만큼 참았다가 쉬는 걸 계속하면 가슴에서 구멍이 뻥 뚫려요. 진짜 구멍은 아닌데, 그 구멍으로 숨을 쉬면 숨을 쉬는 듯 마는듯해요.”

"바로 그거구나!”

새장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구멍이 없으면 허사예요. 구멍을 뚫을 때는 밀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죽을 듯 말 듯한 상황을 넘나들어야 해요. 그래도 안 죽어요. 정신은 죽음으로 넘어가면 몸이 생으로 돌아오거든요.”

곽범의 졸음 묻은 말이 이어졌다.

“많이 해야 돼요. 자꾸 하면 구멍이 뚫려요. 그 구멍을 뚫고 나서 숨을 쉬면 기운이 기해혈에 쌓이기 시작해요. 아. 그때까지는 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 물하고 생콩만 먹어야 해요. 아니면 죽는대요. 단계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 따로 있는데...”

말소리가 줄어들다가 끊어졌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새장수는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새장수는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곽범을 죽이지 못했다.

도철은 무림에서 가장 흉악한 자들인 사흉신(四凶神) 중 한명이다.

도철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도철과 손을 섞는 자는 공력을 모두 빼앗기고 죽는다.

신화 속의 탐욕스러운 악귀 도철이나 마찬가지다.

도철의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세상을 횡행할 수 있다.

곽범을 살려둔 이유다.

그렇다고 죽이지 않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곽범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도 살아있었다.

곽범을 협박해서 독문무공을 뽑아냈다는 사실을 도철이 알면 매우 난감해진다.

 

새장수는 곽범의 맥문을 잡아서 기운이 흐르는 것을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이놈은 기운 움직이는 게 달라. 도철영감이 고강한 이유가 이거였어.”

곽범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읽은 새장수는 흥분했다.

곽범의 공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자석같은 흡입력이 느껴졌다.

새장수가 주입하는 공력을 끌고 간다.

(공력이 흐르는 길을 읽으면 흉내 낼 수도 있다.)

새장수의 가슴 속에서 탐욕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남의 공력 운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란 평생에 한 번 오기 어렵다.

게다가 그 남이라는 게 사흉신 중 한명인 도철이다.

도철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강해지면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

빼앗고, 즐기고, 존귀해질 수 있다.

도철의 무공을 반드시 익혀야한다.

곽범이 말했던 것처럼 호흡을 느리게 하여 죽을 듯 말듯한 경계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곽범의 기운을 새장수의 공력이 천천히 따라갔다.

곽범의 공력은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흘러갔다.

따라가기가 쉬웠다.

그러나 길이 몹시 난해했다.

조금만 속도가 빠르면 따라가다가 길을 잃을 판이었다.

새장수는 그 심오함에 놀랐다.

동시에 도철의 신공을 자기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온 정신을 다해서 공력이 흐르는 길을 외우고 거치는 혈도를 마음에 새겼다.

(절묘하다. 절묘해. 이렇게 복잡하고 오묘한 신공이라니.)

속으로 연신 감탄을 반복했다.

내공 운용의 오묘함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곽범의 공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새장수는 놓칠 새라 급하게 뒤쫓았다.

중대한 고비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만 잘 관찰한다면 신공이 자기의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가슴에 이어 어깨까지 시큰했다.

(아차! 공력이 부족해졌구나. 언제 이만큼 공력을 뽑았단 말인가?)

진퇴양난이었다.

물러서자니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쫓아가자니 공력이 고갈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공만 심후하다면 내가 도철영감보다 못할 리 없다. 평생 갈망했던 신공을 이제야 만났는데 물러서야하나?)

새장수는 짧은 순간에 깊은 갈등을 했다.

(이놈은 술에 취해서 순진하게 내력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들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입으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갈등은 곧 결론에 이르렀다.

(내공이 고갈되더라도 버틸 만큼 버티다 회수하면 된다. 이 어린놈은 몸이 만신창인데다 술까지 먹었으니 아무 위험도 없다. 더구나 나한테는 새들이 있다.)

새장수는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렸다.

진원지기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진원지기가 말라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절대 허물면 안되는 마지막 보루같은 것이다.

욕심에 눈이 먼 새장수는 그 진원지기까지 동원했다.

모자라는 내력을 진원지기로 보충하며 곽범의 공력을 따라갔다.

그러나 금방 끝날 듯 치달리던 곽범의 공력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새장수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곽범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공력을 다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속으로는 빨리 끝내라고 끝없이 외쳤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있었다.

마침내 곽범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갔다.

새장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빠르게 달릴 때의 경로는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끝이 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공력을 자기 몸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어...)

소리를 내고 싶은데 입술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가는 곽범의 공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식은땀을 더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곽범이 눈을 번쩍 떴다.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 같다.

(잘못되었다!)

새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기의 수소양삼초경을 끊었다.

진원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왁!”

그 대가로 한 웅큼의 피를 토하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곽범의 사냥이 성공한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