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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01 [무림칠보] 제 4장 난파선에서 만난 마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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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난파선에서 만난 마녀

 

 

 

뱃전에 선 능풍운은 수평선 쪽을 살피고 있었다.

[난파선인가?]

손을 이마에 댄 능풍운의 미간이 모아졌다.

시간은 막 오시(午時)를 지났다.

능풍운이 있는 곳은 해복진에서 남동쪽으로 오십여 리쯤 떨어진 해상이다.

그물을 내리던 능풍운은 수평선에 작은 점 하나가 떠있는 걸 발견했다.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그 점은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다.

능풍운은 직감적으로 그 점이 추진력을 잃은 배임을 알아차렸다.

(가볼까?)

호기심이 일었다.

무림인들이 수십 명 죽고 여러 척의 배가 난파당했다는 왕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물을 치고 물고기가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갔다 오자.)

능풍운은 빠르게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그물에는 말린 박에 밀납을 발라 만든 부표가 여럿 달려 있다. 부표들은 그물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그물 친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부표들이 제대로 그물을 지탱하는 것까지 확인한 능풍운은 난파선이 보이는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끼익 끽!

구릿빛 팔의 근육이 노를 저을 때마다 굼실거린다.

촤아...!

노가 저어질 때마다 뱃전의 물살이 좌우로 쩍쩍 갈라졌다.

능풍운을 태운 조각배는 경쾌하게 파도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얼마나 갔을까?

작은 점으로만 보였던 물체가 뚜렷하게 형태를 드러냈다.

(역시 난파선이었다.)

능풍운의 눈이 반짝였다.

점이었던 물체는 길이 이십여 장에 수면으로부터 뱃전까지의 높이가 삼장이나 되는 거대한 배였다.

배 위에는 이층누각까지 세워져 있었다.

뱃사람인 능풍운도 본 적이 없는 크고 화려한 누선(樓船;누각이 있는 배)이다.

누선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선체 아래쪽이 깨져서 바닷물이 스며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누선에 가까이 접근한 능풍운은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괴괴한 적막만이 거대한 배를 휘감고 있을 뿐이었다.

(올라가 보자.)

능풍운은 뱃전 밖으로 늘어져 있는 밧줄에 타고 온 조각배를 묶었다.

그리고는 밧줄을 잡고 누선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헉....]

이윽고 누선의 갑판 위로 얼굴을 내밀던 능풍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밧줄을 놓치고 바다에 떨어질 뻔 했다.

누선의 갑판이 흥건한 피와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끔... 끔찍하구나.]

진저리를 치면서도 능풍운은 누선으로 올라갔다. 강렬한 호기심이 공포와 혐오조차 눌러버렸다.

그래도 갑판에 올라서자마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야했다. 너무도 역겨운 피비린내에 구토가 치밀어 오른 때문이다.

능풍운은 사람 시체를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난파를 당해 익사한 시체가 종종 해변으로 밀려오곤 한다. 그 시신들을 거두고 안장해주는 일은 바닷가 사람들의 일상 중 하나다.

능풍운도 마을 어른들을 도와서 익사한 시신을 수습하곤 했었다. 그래서 시체를 보고 만지는 것쯤은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몸서리가 쳐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누선의 갑판 위에 펼쳐진 지옥도는 상상조차 못해본 것이었다.

갑판 위에 널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는 그 형상이 실로 끔찍했다.

팔 다리가 잘려나간 자,

목이 동체와 분리된 자,

허리가 끊어져 내장과 피를 꾸역꾸역 쏟고 있는 자...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시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일격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시체에 남아있는 상처는 한 곳에 불과했지만 예외없이 치명적이었다.

(무섭구나. 인간이 어찌 이토록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능풍운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면서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발치에 둥그런 동패(銅牌)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동패를 집어들었다.

피에 흠씬 젖어있는 동패 전면에는 정교한 교룡(蛟龍)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흑룡선단의 표기 아닌가?)

교룡 문양을 본 능풍운은 흠칫 놀랐다.

 

-흑룡선단(黑龍船團)!

 

남해 일대를 횡행하는 해적들 중 가장 규모가 큰 해적 무리다.

수백 척의 배를 지녔다는 흑룡선단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바다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세력이 전무한 실정이다. 대륙을 구석구석까지 장악하고 있는 황실의 권위도 흑룡선단에게는 미치지 못할 정도다.

흑룡선단의 단주는 독안용왕(獨眼龍王)이라는 인물이었다.

해적무리의 수괴답게 독안용왕은 수중공부(水中功夫)에 탁월하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그자를 당해낼 상대가 없다고 할 정도다.

독안용왕 휘하의 흑룡선단은 먼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아왔다. 대륙을 통일해서 한창 기세가 등등해진 황실과 충돌해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풍운도 흑룡선단의 이름만 들었을 뿐 직접 조우한 적은 없었다.

그 흑룡선단의 표기가 난파선에서 발견된 것이다.

능풍운은 다른 시체에서도 흑룡패(黑龍牌)를 몇 개 더 찾아냈다.

시체들이 흑룡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 누선은 흑룡선단 소속의 해적선임에 틀림없다.

(누가 흑룡선단의 해적들을 몰살시켰을까? 바다에서는 무적이라 불리던 자들인데...)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시체들 사이를 지나 이층 누각의 일층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 달려있던 튼튼한 문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어져있다.

끼익!

능풍운은 반쯤 잘려나간 문을 조심스럽게 옆고 선실로 들어섰다.

(여자!)

한데 선실로 들어서던 능풍운의 눈이 치떠졌다.

널찍하고 호화롭던 선실 역시 폭풍이 스쳐 지나간 듯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 선실에서 능풍운은 처음으로 생존자를 발견했다.

[...]

선실 끝에 놓인 널찍한 침대에 한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두터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나이는 물론이고 용모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옷 밖으로 드러난 풍만한 몸매를 통해 중년에 접어든 여인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색 옷 때문에 소매 밖으로 드러난 양손이 눈부시게 희어 보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흑의여인의 허벅지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가로 놓여있었다. 본래 새파랬을 검날은 피를 머금어 검붉게 변해있었다.

(저 여인이 이 배의 선원들을 몰살시킨 장본인이겠구나.)

흑의여인의 허벅지 위에 놓인 피 묻은 검을 본 능풍운은 전후 사정을 짐작했다.

(여자의 몸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명의 사내를 죽이는 게 가능했구나.)

상황을 파악한 능풍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연약했다. 당연히 여자가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놀라움과 충격을 억누르며 능풍운은 선실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선실 안에는 흑의여인 외에도 세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자들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는 소매가 없는 가죽옷을 걸친 사내 두 명이 쓰러져 있다.

흉포하고 거친 인상을 지닌 자들인데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인 듯 얼굴이 비슷했다.

그자들은 허리가 잘려 네 토막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은 선실 입구, 즉 능풍운의 발치에 쓰러져 있다. 서생 차림을 한 그자는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하지만 준수한 얼굴과 달리 음산한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능풍운은 서생차림의 사내가 심기가 아주 깊은 모사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는지 서생은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서생이 입은 치명상은 목에 난 자상이었다. 그자의 목은 절반 넘게 베어져 대량의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서생의 오른손에는 부채가 꽉 쥐어져 있었다.

부챗살이 투명한 옥으로 만들어진 그 부채는 일견하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능풍운은 서생의 손에서 부채를 빼내어 펼쳐 보았다.

부르르!

직후 능풍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음양선(陰陽扇)>

 

부채 상단에 그같은 글이 적혀 있으며 그 아래로 아홉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데 그 그림이란 것이 실로 낯 뜨거웠다. 발가벗은 남녀가 각각 다른 체위로 뒤엉켜 있는 춘화(春畫)였던 것이다.

춘화는 그 묘사가 더할 수 없이 정교하다.

교합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듯 생생하다.

여인의 아랫도리에 핏줄이 툭툭 불거진 흉측한 살덩이가 결합되어 있는 것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너무도 음란하고 망측한 그림을 본 능풍운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못 볼 것을 보았다.)

그는 급히 부채를 접었다.

하지만 가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해서 능풍운은 남녀관계에 무지하다. 당연히 여자의 알몸을 본 적도 없다.

그런 그에게 적나라하게 묘사된 춘화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벌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음양선이란 부채에 그려진 아홉 폭의 춘화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단순히 춘화의 묘사가 떠오른 정도가 아니었다.

 

-환희음양법(歡喜陰陽法)!

 

첫 번째 그림 위에 적혀있던 춘화의 제목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추잡한 물건이다.]

휘익!

화가 치민 능풍운은 음양선을 선실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시선을 흑의여인에게로 돌렸다.

(이 여자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죽은 건 아닌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흑의여인을 살펴보며 능풍운은 의아해졌다,

무공에 문외한인 능풍운이다.

흑의여인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운공요상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능풍운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번-쩍!

굳게 감겨있던 흑의여인의 눈이 면사 위로 치떠지며 번개 치는 듯한 안광이 작렬했다.

(헉!)

능풍운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스악!

그 직후 능풍운은 흑의여인의 새하얀 손이 검을 잡더니 자신을 향해 검을 그어내는 걸 보았다.

그의 눈에는 흑의여인의 손짓이 느린 동작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눈으로는 볼 수 있어도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을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흑의여인의 느린 듯한 일검은 능풍운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제압하며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흑의여인과의 거리가 이장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척이 채 안되는 검에 베일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능풍운의 착각이었다.

쩌엉!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의여인이 휘두르는 검이 쭉 늘어났다. 반투명하게 보이는 검날이 무려 이장 가까이로 길어진 것이다.

실제로 검날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검날에서 거의 고형화 된 검기(劍氣)가 뿜어진 것뿐이다.

 

-검강(劍罡)!

 

그렇다! 흑의여인은 검강을 뽑아내 능풍운을 죽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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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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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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