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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기인의 선물

 

 

-낭왕 혁련사!

 

음산(陰山)과 관외(關外) 일대에서 패자로 군림해온 인물이다.

늑대의 왕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수천 마리의 늑대를 수족처럼 부린다.

게다가 늑대의 무리와 섞여 살며 독특한 무공을 창안하여 일문(一門)을 이루었다.

천랑마검은 바로 그 낭왕 혁련사의 제자였다.

물론 그자가 자랑하는 천랑십이식도 낭왕 혁련사가 창안한 검법이다.

무림인들이 천랑마검을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가 낭왕 혁련사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쯧쯧, 혁련사, 그 덜 떨어진 놈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송이를 무림에 내보냈군.]

마의노인은 천랑마검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마의노인은 관외 무림의 패자인 낭왕 혁련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욕했다.

그러나 마의노인이 스승을 욕하는 데에도 천랑마검은 찍소리도 못냈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천랑마검의 그같은 모습이 능풍운을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노인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기에 저 작자는 스승이 욕을 먹어도 억지웃음만 짓고 있단 말인가?)

능풍운은 새삼 마의노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의노인은 평범한 촌노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의노인의 눈동자가 녹색을 띠고 있다는 정도였다.

[하... 하교가 없으시다면 후배는 이만....]

천랑마검은 마의노인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있다면 굳이 더 잡지는 않으마.]

마의노인은 곰방대의 재를 능풍운의 뱃전에 탁탁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감사합니다.]

안도한 찬랑마검은 급히 마의노인에게 포권을 한 후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너를 그냥 보내면 섭섭하지 않겠느냐?]

그때 마의노인이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안도하던 천랑마검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으로 질렸다.

[노부는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어린놈들의 잡기를 재롱삼아 구경하는 게 그것이다.]

마의노인은 근처 어선의 뱃전에 걸터으며 말했다.

(휴... 난 또 뭐라고!)

천랑마검은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이 무서운 노독물(老毒物)은 자기보고 천랑일문(天狼一門)의 독문 검법 천랑십이식을 한 번 펼쳐 보이라는 것이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천랑마검으로서는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그럼 미거하나마 노야의 높으신 안목에 폐를 끼치겠습니다.]

천랑마검은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두 팔을 내려뜨렸다. 굶주린 늑대가 먹이를 덮치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 자세야말로 천랑십이식의 기수식인 아랑출림세(餓狼出林勢)였다.

[....]

능풍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천랑마검을 주시했다.

[카앗!]

다음 순간 천랑마검의 입에서 늑대가 울부짓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쉬학! 파츠츠...

뒤이어 시퍼런 검광(劍光)이 사위를 휘감았다.

섬뜩한 섬광과 날카로운 예기가 빗발치듯 아침하늘을 그어갔다.

천랑마검의 발검(拔劍)은 너무나도 빨라서 언제 검을 뽑아 검법을 시전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노야!]

스-윽!

그러던 어느 순간 검기가 싹 가시며 천랑마검의 모습은 삽시에 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랑십이식을 모두 펼쳐 보인 후 떠난 것이다.

괜히 우물쭈물 하다가는 마의노인이 또 어떤 명령을 내릴지 모른다.

(저것이 무공이란 것이구나!)

능풍운은 멍한 표정인 채 천랑마검이 검법을 펼치던 곳을 보고 있었다.

[모두 몇 가지 변화를 보았느냐?]

그런 능풍운에게 마의노인이 불쑥 물었다.

능풍운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열 두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아홉 개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놈 봐라? 기껏해야 천랑십이식중 삼사식 정도밖에 못 볼 줄 알았는데...)

능풍운의 대답을 들은 마의노인의 노안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노부의 눈이 정확했다. 이놈은 백 년 내 다시없을 천부지재(天賦之才)다!)

능풍운의 빼어난 재질을 확인한 마의노인은 희열과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잘만 다듬으면 철혈대제(鐵血大帝) 능무벽(陵無壁)에 못지않은 거목이 되겠구나!)

마의노인은 내심의 흥분을 숨기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능풍운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름은 풍운이라 하고 성은 능가입니다.]

[능풍운이라....]

마의노인은 능풍운의 이름을 되뇌이며 왠지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능무벽, 그 괴물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마의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능풍운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아비의 이름은 무엇이냐?]

마의노인이 다시 물었다.

능풍운은 마의노인이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능초(陵超)라는 분이신데 제가 어렸을 때 괴질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노부가 잘못 보았는가?)

능풍운의 대답을 들은 마의노인은 눈가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하긴 능가 괴물이 살아 있다면 이미 팔순을 넘었을 테니 이렇게 어린 아들놈을 두었을 리가 없겠지!)

염두를 굴린 노인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꽤 귀찮게 굴었지?]

[아닙니다.]

[허허허, 마음에 없는 소리할 것 없다. 예쁜 계집이라면 몰라도 노부같은 늙은이와 노닥거려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마의노인의 말에 능풍운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노부는 갈황(葛煌)이라는 늙은이다. 어린 것들은 노부를 노독물(老毒物), 또는 천독노조(千毒老祖)라 부르며 상종하지도 않으려 하지.]

마의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 노인의 이름을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그 즉시 아랫도리를 적시며 달아날 것이다

 

-천독노조 갈황!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나이 이미 이갑자(二甲子)를 넘긴 그는 천독곡(千毒谷)이란 문파의 주인이기도 하다.

무림에 적을 둔 인생치고 천독노조를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천독노조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전설 속의 고금제일독종(古今第一毒宗) 만독조종(萬毒祖宗)의 진전을 잇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천독노조는 마음만 먹으면 중원의 무림인 모두를 독살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독 다루는 재주, 용독술(用毒術)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용독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천독노조의 독공(毒功)이다.

천독노조는 백년 넘는 세월 동안 맹독을 상식(常食)하며 독공을 쌓아왔다. 그 결과 숨결만으로도 십리내의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히 독(毒)의 제왕(帝王)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 바로 천독노조다.

만일 천독노조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무림은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천독노조에게는 그런 야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천독곡에 칩거한 채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그 무서운 독의 제왕이 이 한적한 어촌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아깝구나 아까워. 무림칠보의 출토가 임박하지만 않았어도 이놈을 제자로 삼아서 물건으로 만들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천독노조는 능풍운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인물들의 가장 큰 소망은 뛰어난 후계자를 얻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친 성취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천독노조도 예외가 아니다. 천고의 기재인 능풍운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쉽고도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을 주마.]

천독노조는 아쉬움을 달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노야.]

능풍운이 난색을 표할 때 천독노조는 품속에서 한 장의 죽편(竹片)을 꺼냈다. 폭이 두 치, 길이 한자 정도의 죽편인데 오래된 물건인 듯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둬라.]

천독노조는 죽편을 능풍운에게 내밀었다.

[노부의 신물이니 곤란한 일이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보여 주거라. 그러면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능풍운은 천독노조가 내민 죽편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값이 나가거나 진귀해 보이는 물건이라면 사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저 대나무 조각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능풍운은 받아든 죽편을 살펴보았다.

죽편 앞면에는 곰방대를 물고 있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천독노조와 닮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죽편 위의 그림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 전에 새겨진 것이다. 천독노조의 모습일 수는 없었다.

앞쪽의 그림을 살펴본 능풍운은 죽편을 뒤집어보았다.

죽편의 뒷면에는 여러 가지 색의 얼룩이 찍혀 있었다. 적(赤), 황(黃), 흑(黑), 자(紫) 등의 색이 뒤섞인 얼룩이다.

(이런 대나무 조각이 무슨 신묘한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능풍운은 죽편을 살펴보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독노조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노야! 긴요하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고맙기는...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천독노조는 곰방대를 뱃전에 탁탁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능풍운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살펴 가십시오.]

능풍운은 천독노조의 등 뒤에 대고 다시 한 번 포권을 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광세의 기연을 만났다는 것을...!

 

<독성죽결(毒聖竹訣)>

 

천독노조가 능풍운에게 준 낡은 대나무 조각의 이름이다.

천독노조는 젊은 시절 어느 산동(山洞)에서 독성죽결을 얻었었다.

독성죽결에는 신묘한 용독심결(用毒心訣)이 숨겨져 있었으며 천독노조는 그 비밀을 풀어내어 천하제일의 독공 고수가 될 수 있었다.

멀어지는 천독노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능풍운은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해가 수평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천랑마검과 천독노조를 상대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햇님.]

능풍운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습관적으로 합장을 했다.

스으... 스으...

점점 강렬해지는 아침 햇살이 바다를 향해 우뚝 선 능풍운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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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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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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