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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소년 어부

 

 

 

-해복진(海復津)

 

절강성(浙江省) 남단에 자리한 어촌이다.

산이 가까이 다가와 있어 배후지가 넓지 않다. 큰 포구가 될 수는 없는 지형인 것이다.

그래도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보금자리다. 활 모양으로 휘어진 산맥의 끄트머리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덕분이다.

 

새벽 무렵이다.

바다에는 해무가 자욱하게 깔려있다.

해무 너머로 붉은 기운이 긴 띠처럼 어리기 시작한다.

또 하루가 밝아오고 있다.

그렇긴 해도 육지 도처에는 어스름이 서려 있다. 날이 완전히 밝으려면 제법 시간이 흘러야한다.

 

해복진 남쪽 끝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펼쳐져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송림 속에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엌 하나, 방 하나 뿐인 작은 초가집이다.

삐걱

[오늘도 날씨는 괜찮겠네.]

초가집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양 볼에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소년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체격은 건장하다. 육척(六尺) 가까운 키에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피부는 짙은 구릿빛이다.

긴 머리를 빛바랜 천으로 대충 묶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단정해서 잘 빚은 조각상을 연상케 한다.

성숙한 어른과 천진한 아이의 분위기가 함께 느껴지는 소년이다.

[으라차차! 오늘도 신나는 하루가 되겠구나.]

집을 나선 소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벌써 바다에 나가려는 게냐?]

소년이 나온 집안에서 여인의 연약한 음성이 들렸다.

열려있는 방문을 통해 검박하고 단출한 실내가 보인다. 가구라고는 탁자 하나와 침대 두 개가 전부다.

그래도 벽에 몇 폭의 고서화가 걸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두 개의 침대 중 하나에 누워있던 여인이 힘겹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불면 꺼질 듯 가냘픈 몸매에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한 여인이다.

삼십대 중반 정도인 여인은 비록 병약하게 보이지만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몸에는 단아한 기품이 배어있다.

삼단같은 머릿결은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 때문에 얼굴은 더 한층 창백해 보였다.

[해가 뜨려면 이각 넘게 남았다.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여인이 가냘프지만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출항하기 전에 그물을 좀 손봐야 할 것 같아서요. 좀 더 주무세요 어머니.]

소년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쪼록 무리하지는 마라. 너무 먼 바다까지 나가지 말고...]

[명심할게요.]

소년은 여인을 안심시키고는 방문을 닫았다.

(가엾은 것...)

문이 닫히자 여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용서하거라. 천벌을 받아 마땅한 어미와 오라버니를...!)

주르르...!

여인의 창백한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그러다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흐느낄 때마다 여인의 삼단같은 머릿결이 물결같이 일렁거린다.

과연 그녀는 무슨 말 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 것일까?

 

***

 

쏴아... 철썩!

파도는 끊이지 않고 밀려와 바위에 부딪힌다.

소년은 높직한 바위 위에 서서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 바다를 덮고 있는 해무, 하늘의 구름 등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아침의 일기만으로도 오늘 하루 바다의 상태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오년 넘게 고기를 잡으며 쌓아온 경험 덕분이다.

어부로서의 경력은 제법 길지만 소년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다.

 

이름이 능풍운(陵風雲)인 소년은 해복진 출신이 아니었다.

십육 년 전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작은 난파선이 해복진에 표착(漂着)했었다.

난파선에는 이십대 초반의 미녀와 갓 태어난 듯한 핏덩이가 타고 있었다.

능풍운 모자였다.

능부인(陵婦人)이라 불리는 능풍운의 어머니는 본명을 비롯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표류해올 당시 능부인은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난파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아니었다. 누군가와 싸워서 입은 부상이었다.

해복진 주민들은 그녀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의 사람이 아님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정 많은 주민들은 죽어가는 모자를 방치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고 덕분에 능풍운 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부상이 완쾌된 후에도 능부인은 해복진을 떠나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 능부인 모자를 해복진 주민들은 흔쾌히 이웃으로 받아 주었다.

박식했던 능부인은 해복진 아이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 해복진의 젊은이 중 몇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지방관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 공로도 있어서 능부인은 해복진 주민들로부터 극진한 존경을 받아왔다.

핏덩이였던 능풍운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났다.

반면 능부인은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녀가 눈에 띄게 병약해져 가는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능부인은 자신의 병명을 아는 듯했다.

하지만 이웃이 아무리 물어도 쓸쓸히 웃기만 할뿐 병명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능풍운은 마을 어른들을 따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열한 살이 되던 오년 전부터였다.

능풍운은 고기잡이에 금방 익숙해졌다.

또래보다 신체조건이 월등할 뿐 아니라 무엇이든 쉽게 배우는 재주 덕분이었다.

열여섯 살이 된 지금 능풍운의 체격은 어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힘도 장사여서 작은 배쯤은 혼자 번쩍 들어 옮길 정도였다.

어느덧 능풍운은 해복진의 누구보다도 숙련된 어부가 되어 있었다.

 

[후우....]

능풍운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바다를 주시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오늘 바다로 나가 어떤 일을 만날지 가슴이 뛴다.

능풍운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수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놀이터다.

물론 예기치 못한 폭풍을 만나 몇 번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바다는 매번 가슴을 뛰게 만드는 미지의 세계다.

헌데 능풍운이 일출을 기다리며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허허! 해복진에서는 역시 네가 가장 부지런하구나.]

뒤쪽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을 쪽에서 늙은 어부가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왕(王) 할아버지?]

능풍운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노인은 해복진의 늙은 어부 중 한 명이었다.

어렸을 때 능풍운은 왕(王)씨 성을 지닌 이 노인으로부터 낚시질과 그물 치는 법, 배 모는 기술등을 배웠었다.

[오늘도 바다에 나갈 작정이냐?]

왕노인은 주름진 얼굴로 능풍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능풍운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께 보약이라도 한재 지어드리려면 오늘도 잔뜩 잡아야지요.]

[허허, 풍운이 너는 역시 효자로구나.]

왕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해복진에서 능풍운이 병약한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능풍운은 왕노인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바위 아래에 도착한 왕노인은 근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출어를 그만 두는 게 좋을 것같다.]

왕노인은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째서인가요? 날씨가 나빠질 것 같지는 않은데...]

능풍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 때문이 아니다.]

왕노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날씨 때문이 아니라면 왜지요?]

[어제 강(姜)씨가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여러 척의 깨진 배와 수십 구의 시체들을 발견했다더구나.]

강씨는 해복진의 어부들 한명이다.

[해적(海賊)...입니까?]

능풍운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쎄다.]

왕노인은 자신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해적, 즉 바다를 무대로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들은 하나같이 포악한 자들이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가는 어부들이나 연안의 백성들에게 왜구(倭寇)를 포함한 해적들만큼 겁나는 존재도 없다.

동영에 근거지를 둔 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해적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바다로 도망쳐온 죄인들이다.

그자들에게는 인성(人性)도 양심이란 것도 없다. 그저 죽이고 빼앗고 노략질할 뿐이다.

다행히 오십여 년 전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후 해적들 대부분은 연안에서 구축(驅逐)되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남해 일대에 다시 해적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나마 해복진의 어부들 중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없다.

 

[해적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죽은 시체들이 하나같이 무림인들이었다는구나.]

왕노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림?]

능풍운의 두 눈이 번뜩 빛났다.

무림이란 말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자신의 운명이 무림이란 그 한 마디로 인해 어디론가 끌려갈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왕노인이 말을 이었다.

[소문이기는 하지만 남해 어딘가에서 무림인들이 몽매에도 원하는 보물이 곧 출토된다더구나. 그 때문에 무림인들이 몰려드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무림지보(武林之寶)라고요? 우리같은 어부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로군요.]

능풍운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왕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들은 사람 죽이는 걸 여반장으로 아는 자들이다. 해적들보다 오히려 더 포악하고 잔인한 무리지.]

[예....]

능풍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을의 형들로부터 무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무림인들은 신선이나 마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늘을 새처럼 날고 맨 주먹으로 바위를 깨트리며 검을 날려 수십 리 밖의 적도 죽인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얘기라고 새겨들었다.

능풍운에게 무림이나 무림인의 존재는 다른 세상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무림인들과 마주쳐서 좋을 일은 없다. 며칠 동안은 바다에 나가지 말거라.]

왕노인의 말에 능풍운은 싱긋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쯧쯧...)

왕노인은 내심 소리없이 혀를 찼다.

능풍운이 끝내 바다에 나갈 작정임을 안 것이다.

[내 말 잘 생각해 보거라. 병약하신 자당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왕노인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마을 쪽으로 멀어져 갔다.

왕노인이 떠나자 능풍운은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쏴아... 철썩!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연신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바다가 깨어나고 있다.

그걸 보는 능풍운의 가슴속에서도 벅찬 무언가가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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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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