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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몰려든 무림인들

 

 

 

해복진의 포구는 초승달 모양의 만(灣)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평선의 칠 할 이상을 가리고 있는 산맥의 꼬리부분이 난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 대부분을 막아준다.

덕분에 만 안쪽은 늘 호수처럼 잔잔하다.

해변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십여 척의 어선이 눈부신 백사장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혼자, 또는 서너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어선들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날이 완전히 밝았음에도 어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척의 어선들 중 단 한척에만 사람이 올라가 있다.

[어제 그 황새치 녀석이 크긴 컸네.]

건장한 청년, 아니 소년이 뱃전에 걸터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키가 육척 가깝고 구릿빛 팔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하다.

몸만 보면 건장한 청년이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다.

소년 어부 능풍운이다.

짧은 바지에 소매 없는 무명조끼를 걸친 능풍운은 그물을 손질하기에 바빴다. 올이 굵고 튼튼해 보이는 그물이다.

하지만 그물은 여기저기 끊어져 있었다. 어제 무려 삼백근이 넘는 대물 황새치가 걸렸었기 때문이다.

반나절 넘는 악전고투 끝에 황새치를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그물이 많이 상했다. 다시 조업을 나가려면 끊어진 올들은 모두 이어야한다.

어느덧 수평선 위로 시뻘건 불덩어리가 떠오르고 있다.

날씨도 좋으니 이맘때쯤이면 포구는 출어 준비로 부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능풍운을 제외하면 다른 배의 주인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상에서 무림인들이 죽고 죽이는 난투를 벌인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물을 손질하는 능풍운의 손길은 빠르고 능숙하다.

[휴... 겨우 끝났군.]

이윽고 능풍운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었다. 그물의 수리가 끝난 것이다.

물고기를 유인할 미끼와 다른 어구들은 준비가 되어있으니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때였다.

[네가 이 배 주인이냐?]

뒤쪽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능풍운이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한 인물이 서있었다.

검은색 경장을 걸친 서른 살 가량의 사내인데 오른쪽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옷 색깔과 달리 얼굴은 지나치리만치 하얗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얄팍한 입술까지 더해져서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무림인인가?)

흑의인이 차고 있는 검을 본 능풍운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무림인에 대해 마을의 형들로부터 듣긴 했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인상이 별로 안 좋네.)

사내를 찬찬히 살펴본 능풍운의 두 번째 생각이다.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흑의인이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는 좋아할 수가 없다.

능풍운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놈! 귀를 처먹었냐? 이 배가 네 배냐고 물었지 않느냐?]

흑의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초면인데 대뜸 욕설이 튀어나왔다.

능풍운의 응대도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다.

[맞소만 왜 묻는 거요?]

능풍운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흑의인의 눈꼬리가 꿈틀했다.

보통의 양민이라면 상대가 무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눅이 들어 굽신거린다.

그런데 이 어린놈은 뻣뻣하기가 바짝 마른 대나무 같다.

하지만 흑의인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눌러 참았다. 무림인이 이유 없이 양민을 해치면 공적(公敵)으로 지목되어 앞날이 고달파진다.

살인을 해도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현재 해복진 근처에는 흑의인 말고도 무림인들이 다수 몰려와있다.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혐의를 벗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양민을 해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지금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이 배가 네 소유라니 잘 되었다. 옛 다.]

흑의인은 작은 주머니를 소매에서 꺼내 능풍운의 배 안에 던졌다.

쩔렁!

주머니가 배의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금속성이 들렸다.

[이게 뭐요?]

능풍운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뱃삯이다. 오늘 하루 네 배를 빌려야겠다.]

흑의인이 마치 시혜를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능풍운이 당연히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보시오. 나는 어부이지 뱃사공이 아니....]

[좋게 말할 때 본좌를 지옥도(地獄島)까지 태우고 가라.]

불쾌해하는 능풍운의 항변을 흑의인이 손을 들며 저지했다.

[지옥도!]

능풍운은 흠칫하며 눈을 치떴다.

 

-지옥도!

 

해복진에서 남동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섬이다.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아 날씨만 좋으면 해복진에서도 바라다 보인다.

하지만 지옥도는 해복진의 어부들 뿐 아니라 남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모든 뱃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며 절대금지(絶代禁地)로 알려져 있다.

뱃사람치고 맨 정신으로 지옥도에 접근하려는 자는 없다.

이유는 지옥도 일대해역의 물길이 아주 험하기 때문이다.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지옥도 주변 바다 속에는 수많은 암초들이 숨어있다.

멋모르고 지옥도로 접근했다가는 그 암초들에 부딪혀 좌초당하기 십상이다.

암초뿐만이 아니다.

지옥도 일대 바다 속에는 수많은 수중동굴이 뚫려 있다.

그 수중동굴들 때문에 지옥도 주변에는 수많은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일단 그 소용돌이들에 휘말리면 배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끝장나버린다.

오죽했으면 뱃사람들이 지옥도 일대 해역을 불귀마해(不歸魔海)라 하겠는가?

한데 음산한 인상을 지닌 흑의인은 능풍운에게 다짜고짜 지옥도로 가자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시오.]

철컹!

능풍운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돈주머니를 도로 흑의인의 발치로 던졌다.

(이 촌놈이...!)

흑의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지렁이 어부 따위에게 무시당했다 생각하자 살기가 치민 것이다.

[말했지만 난 고기 잡는 어부지 사람 태워주고 돈 받는 뱃사공이 아니....]

다시 어구를 정리하려고 허리를 숙이던 능풍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스악!

한 가닥 푸르스름한 섬광이 눈앞을 스쳐지나간 때문이다.

능풍운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굳어질 때였다.

펄럭!

능풍운의 이마를 동여매고 있던 머리띠가 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능풍운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발치에 떨어진 머리띠가 매끈하게 잘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능풍운은 반사적으로 흑의인을 돌아보았다.

흑의인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있는데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여전히 칼집에 들어있다.

능풍운은 그 자가 언제 검을 뽑아 자신의 머리띠를 잘랐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흑의인은 정확히 머리띠만을 잘라냈을 뿐 능풍운의 이마에는 상처 하나 내지 않았다.

실로 빠르고도 정확한 검법이 아닐 수 없었다.

[흐흐흐.... 나 천랑마검(天狼魔劍)이 지금껏 참고 있었던 것은 네놈이 일초무학의 무지렁이임을 감안해서다.]

흑의인은 놀라는 능풍운을 흘겨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

천랑마검이라 자칭한 흑의인의 시선을 접한 능풍운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자신이 마치 굶주린 늑대 앞에 벌거벗고 선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금부터 본좌를 모시고 지옥도까지 간다.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

천랑마검이 내뱉듯이 말했다.

 

-천랑마검!

 

좌수검(左手劍)의 달인인 그자는 무림에 출도 한 이래 한 번도 패해 본 적이 없다.

신랄하고도 빠른 그자의 천랑십이식(天狼十二式)은 무림의 십대검법(十大劍法) 중 하나로 꼽힌다.

어지간한 무림의 명숙들도 천랑마검과는 시비를 피할 정도다.

워낙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데다가 오른 손이 아닌 왼손을 쓰는 탓에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때문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림인들 간의 승부는 사소한 차이로 승부가 난다.

그런 면에서 왼손을 사용하는 좌수검은 무시못할 이점이 된다.

하지만 무림에 문외한인 능풍운이 이같은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하물며 능풍운은 나이는 어려도 협박에 굴하는 성격이 아니다.

[나도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오. 무어라 해도 귀하를 내 배에 태워줄 수는 없소.]

능풍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라?]

천랑마검은 능풍운의 단호한 어투에 두 눈을 부릅떴다.

[흐흐...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군! 감히 본좌의 명을 거역하다니....]

그 자의 표정이 냉혹하게 변했다.

[오냐! 네놈 스스로 판 무덤이니 나를 원망치 마라.]

천랑마검은 싸늘한 어조로 말하며 왼손을 오른쪽 허리에 찬 검에 가져갔다.

한데 그 직후였다.

부르르!

막 검을 뽑으려던 천랑마검의 몸이 갑자기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찢어질 듯 치떠진 그자의 눈은 능풍운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저 작자가 갑자기 왜 그러지?)

천랑마검의 돌변한 태도에 능풍운이 의아해할 때였다.

[후... 후배가 불민하여 노사(老師)의 왕림하심을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천랑마검은 두손을 모으며 굽신거렸다.

방금 전까지의 그 기세등등함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백지장같이 창백하게 변한 천랑마검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천랑마검이 보이고 있는 갑작스런 변화를 능풍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기에 그토록 사납던 이자가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지?)

능풍운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

능풍운 뒤에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인데 일신에는 낡은 삼베옷을 걸치고 있다.

사람 좋은 인상을 지닌 노인은 자기 키 만큼이나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마의(麻衣)의 노인을 일별한 능풍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마의노인에게서는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의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촌노였다.

[노야께서도 내 배를 빌리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능풍운은 무뚝뚝한 어조로 마의노인에게 물었다.

[글쎄다.]

마의노인은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검 좀 곤란한데...)

능풍운은 마의노인의 모호한 대꾸에 난감해졌다. 연로한 노인이 지옥도까지 태워다 달라고 하면 차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의노인은 그런 능풍운의 내심을 읽었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마라. 이 늙은이가 네게 신세를 지지 않을 테니까.]

이어 그는 시선을 천랑마검에게로 돌렸다.

[네 녀석은 낭왕(狼王) 혁련사(赫連射)의 전인이냐?]

천랑마검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 분이 후배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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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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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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