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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상인의 전쟁

 

 

 

대문 밖 구름 속에서 고양이 머리 같아 보이는 가죽 가면을 쓴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가죽옷을 입고 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귀는 하얗거나 볼그스름했고 긴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출렁거렸다.

 

"Eblis! 요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긁적거리던 조성일이 여자를 힐끗 보고는 이종무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보자마자 요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림원의 젊은 무사들만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놀란다.

노노인이 혀를 찼다.

 

"군진을 쓰기에 누군가 했네.”

 

연청이 물었다.

 

"요즘은 요괴도 군진을 씁니까?"

 

노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부터 그랬어. 경우가 드물긴 해도. 보통 요괴들은 이렇게 백주 대낮에 잘 움직이지도 않거던.”

 

고양이 머리가 걸어오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누구보고 요괴래. 신성한 파괴자님더러. 자!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놈 내놔. 여기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이종무가 가까이 있는 전아저씨, 전삼자에게 물었다.

 

"외모에 자신이 좀 있는 거 같지?"

"Probably, I suppose so. 그런 거 같습니다. 지모는 좀 떨어지는가 봅니다. 고양이 주제에 호랑이 굴이니 뭐니 하더니 불쑥 들어오는군요.”

 

전삼자는 태연자약하게 창날을 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종무가 이번에는 조성일에게 물었다.

 

"요괴는 누구 보라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냐?"

"요괴가 예쁘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뭔가를 적고 그리면서 두드리던 조성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 예쁘면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기 좋은데 척 하는 게 다 속이는 거지. 예쁘면 속이기 좋기 때문에 저 요괴가 예쁜 거야.”

 

전삼자는 웃었다.

조성일은 요괴가 예쁜 척하듯이 바쁜 척하며 반쯤만 수긍하며 머리를 반만 끄덕였다.

영소의 이상한 말버릇은 분명히 사부 이종무의 젊은 시절 말버릇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종무는 조성일의 어깨를 툭 친후에 고양이 요괴에게로 물었다.

 

"이보게 처자. 이름이 뭔가?"

"나는 파괴자 묘진이다. 빨리 그놈이나 데려와.”

 

노노인이 중얼거렸다.

 

"장군님 앞에서 파괴자는 개뿔.”

 

이종무가 물었다.

 

"뇌정멸운살진은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지?"

 

"흥. 알긴 아는구나.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다.”

"Too bad, too bad. 아깝겠다.”

 

이종무는 성큼 묘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길어서 보통으로 걷는데도 보통 사람이 뛰는 듯 빠르다.

묘진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종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가 예쁘게 죽는 모습을 그놈들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이종무에게서는 어떤 기세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멀대처럼 큰 사람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싹함을 느낀 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당신은...”

 

이종무가 물었다.

 

"준비는?"

"Hang in there.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조성일이 대답했다.

 

"버티긴 뭘...”

 

요괴 묘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조성일이 말했다.

 

"잡았습니다. 별의 그물로 뇌정멸운살진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물로... 진을 잡아?"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던 요괴 묘진의 가늘고 날렵한 다리가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의 의미는 묘진이 부리는 구름속의 벼락처럼 자기의 혼을 꿰뚫었다.

 

"전선의 마왕 비상인!"

 

놀람과 충격, 두려움으로 요괴 묘진의 맥이 풀어져 버렸다.

이종무는 천천히 걸어가 묘진의 고양이 머리에 오른손을 얹었다.

뒤늦게 묘진은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아나지도 못했다.

몸 주변에서 작은 빛이 연이어서 명멸할 뿐이었다.

이종무의 무공, 별의 그물에 이미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성일이 뇌정풍운멸살진을 붙잡은 것도 별의 그물이고 이종무가 요괴 묘진을 결박한 것도 별의 그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성일은 담장에 설치된 자기의 진을 이용했고 이종무는 직접 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 예전 전쟁하던 시절, 적의 군진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학살했던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의 그물이이다.

전삼자가 혀를 찼다.

 

"I told you.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우습군요. 힘도 없는 장수가 앞장서다니. 요괴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가 봅니다.”

 

연청이 가소로운 듯이 내뱉었다.

이종무가 손을 높이 들자 묘진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아귀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Do your worst. 네 멋대로 굴어봐.”

 

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에게 아무 겁없이 달려든 댓가였다.

 

이십 여 년 전, 전쟁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 년을 끌 가능성이 큰 전쟁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끝이 났었다.

전쟁을 한 세 나라의 군사는 수를 합치면 1백 20만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차가 6만대가 넘었다.

그러나 피해는 오직 두 나라에서만 났다.

한 나라는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25만 군사 중에서 오직 7만 명만 실제 전투에 참여 했었다.

그렇게 하고도 전세는 3개월 만에 승리로 굳어졌다.

나머지 9개월은 그냥 질질 끌다가 별 이유도 없이 5만 명을 잃고 the war finally ended 마침내 종전했다.

그 중심에는 전쟁 중에 물러나고 잠적해버린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 장군은 아군에게는 전장의 신이라 불렸고 적들에게는 전선의 마왕이라고 불렸다.

병법에 통달했던 그는 전장에서 홀연히 자기만의 무공을 깨달았다.

그 무공은 무림의 어떤 무공과도 달라서 누군가는 도술이라 불렀다.

병사를 부리는 그 장군의 용인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했다.

그의 병사들은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물을 가리키면 물로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망설임없이 불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설혹 그가 불로 뛰어들게 하더라도 그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불타죽지 않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용인한 irregular 비상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자들은 그 장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파괴자도 그로부터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

그 장군, 전선의 마왕, 전장의 신, 전쟁의 신이라 불린 사람이 눈앞의 장대 같은 사람이었다.

 

"Are you tryna(trying to) get rid of me? 저를 죽을 건가요?"

 

묘진은 체념하고 멍해진 눈으로 물었다.

구름 속에 있는 부하들을 먼저 투입했으면 비상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고.

Too late to regret.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고양이 주제에 호기롭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여야지. It’s better this way. 그게 더 나아.”

 

이종무가 웃음을 지었다.

묘진이 태도를 바꿔 도리질 치며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비상인,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어요. 저를 살려주세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의 그 도도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노노인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쯔, 그냥 체념하고 죽지. 그럴 거 같더만... 이봐 처자. 죽고 나면 그런 걱정 없어져. 누구 걱정 뭔 일 때문에 못 죽는다는 말은 다 죽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야. We’ll see 너도 늙고 나면 알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묘진이 또 한 번 태도를 바꾸어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협박했다.

이종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웃은 후에 전삼자에게 묘진을 던져주었다.

 

"가둬놔.“

"에이, 이거 원...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요괴는 예측불허라서 장군님 아닌 저희들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군님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성일이 이종무를 대신해서 전삼자에게 말했다.

노노인이 웃었다.

 

"에잉. 태산명동 서일필,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놀라서 이게 뭔 소동이야. 그나저나 장군님. 구름이 우리 풍림원을 딱 에워싸고 있으니 꽤 그럴듯 하게 보입니다.”

 

조성일이 이종무의 허락을 받아서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묘진은 전삼자에게 끌려가면서 또 태도를 바꿔 마지막으로 이종무에게 소리쳤다.

 

"비상인. 나를 죽이더라도 그놈은 그냥 두면 안됩니다. 그놈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Nebby lady (bitch). 오지랍 넓은 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뭐 누굴 어째?"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영소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들어서 묘진의 머리를 발로 차버렸다.

발로 차기는 했지만 바람의 검이었고 구결은 대성이 만든 구결이었다.

머리를 차인 묘진은 몸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지지도 않았고 목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헝겁인형 같았다.

 

"질기네 저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영소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전삼자는 영소가 달려오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라서 묘진을 빼돌리지 못했다.

이종무는 영소가 요괴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는 듯이 보였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아이들과 여자들이 담장 밖과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구름 속에 요괴가 가득하다는 것을 영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이든 여자들이 "참, 장관이야" 한다.

 

“대성은?"

 

노노인이 영소에게 물었다.

늘 붙어 있는 영소가 나온 걸 보면 대성이 이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성이 탈퇴환골하는 모습을 요괴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영소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직접 가서 봐요. 이제 요만 해졌으니까.

 

영소가 자기 새끼손가락의 끝 두 마디만 들어 보였다.

연청이 놀라며 물었다.

 

"뭐가? 대성이?"

 

영소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슬그머니, 누가 들어도 수상한 소리를 했다.

 

"발가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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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래된 미래

 

 

 

꿈속에서 지난 삼년의 고통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수시로 엄습하는 두통은 대성을 영혼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실제로는 칠푼이가 된 듯하게 만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대성은 울컥 받쳐 올랐다.

 

“X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Stop it 그만!"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에 대성은 정신을 차렸다.

 

"힘든 순간까지 반복해서 되새길 필요는 없지. 지나치게 가혹해.

Don’t beat up yourself 자책하지도 마.

인생은 원래 잘한 것과 잘못한 걸로 채워지는 그릇이니까.

 

여전히 꿈속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전으로 보였다.

검정색의 줄이 있는 별난 상의와 그보다 더 별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윤이 나는 검정색인데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장식이 달렸다.

총각 더벅머리 비슷하게 짧은 머리카락을 한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이 걸려있다.

한 손에는 책도 아닌데 빳빳해 보이는 흰 종이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종이에는 대성이 본적 있는 낯선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What’s your name again 이름이 뭐라고?"

 

영소보다 더 예쁜 그 여자가 물었다.

대성은 다시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는가 싶어서 섬뜩했다.

 

"누구세요?"

 

대성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예의하고는... 선생이 물으면 대답이나 할 거지. 누가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인사하자는 거지.

 

대성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짜식아.

To be or not to be on game: that is the question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라고.

까불 때가 아니란 말이야.

 

대성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찝찝함을 안고서 대답했다.

 

"진대성.

"난 파아란 버전 96.9, '오래된 미래'의 언어강습 인공지능이야.

 

여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선생님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인공지능과 언어강습, 버전,

대성이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쭈뼛거렸다.

손이 하얗고 보드라웠다.

 

“축하한다. 이걸로 너와 난 정식으로 사용자 계약한 거야.”

 

란 선생이 말했다.

 

"넌 생존에 특기가 있는 나를 만난 게 행운인 줄 알아야 해. 난 수십 종의 언어강습 인공지능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버전이거든.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잘 따라와. 서울대 보내 줄게. 아. 여긴 그게 없지. 아직 적응이 덜 됐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뻐기는 말인 줄은 알았다.

대성이 금방 대답 못하니까 파아란 선생이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대답! 바로 안 해?"

 

사부나 사형들한테도 보지 못했던, 적대감과 지배욕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하지만 혼난 적이 없어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그 정도로 굴복할 대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성은 압도된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대성은 대답하며 악수했던 자기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악수가 원인이다.

계약이라는 게 맺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통 속에서 깨어난 대성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란 선생이 휙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Dont get sassy with me from the opening day 어디 첫날부터 개기려고. 짜식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지시봉으로 허공을 탁탁 두들겼다.

 

"First things first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자.

 

허공인데 소리가 났고 그곳에서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대성은 매우 신기한 요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게 모든 게 가능한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우선 처음 공격은 우리가 선방했다고 할 수 있어.

 

두루마리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할아범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이 치밀하게 준비해놓았으니까 가능했지만.

"뭐가요?"

 

란 선생이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Pushover 호구.

넌 처음부터 호구로 태어났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더 맞겠다. 호구가 뭔지 모르지? 뭐든지 다 빼주는 병신을 말하는 거야.

 

대성은 란 선생과 이야기하는 게 어지러웠다.

하지만 듣고 조금 있으면 이해가 되었다.

대성이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도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조곤조곤 간결하게 잘 설명했다.

란 선생은 대성이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의 비밀을 빼내기 위해 몰래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각되는 즉시 소멸당할 존재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영소가 옆에 있었으면 키득거렸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진 존재래.

 

하지만 영소가 없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성에게 영소가 없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비현실적인 다른 것도 현실이라는 복잡 미묘한 논리가 대성에게 깔려있었다.

 

”네 로그 파일에 보면 세 번의 중요한 순간이 있었어.“

 

란 선생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들이, 음, 나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 자기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처음 그때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나를 네 속에 복사해 넣고 내 라이브러리를 네가 쓸 수 있게 해두고 빠져 나갔어. 성공적이었지.

It was an epic 대박이었어.

그들로서는 말이야. 이전에 없던 기발한 방식이었으니까.

 

란 선생은 말을 하다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팔을 뒤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좀 높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좀 더 천재적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할아범을 만들어서 너를 보호하게 했는데, 할아범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어. 네가 발각되면 발각된 게 네가 아니라 할아범이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거든.

즉, 넌 할아범이라는 죽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던 거야. 이 모든 게 처음에 이루어졌어. 네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지?"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대성의 공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은 더 필요했다.

란 선생이 대성을 알기에도, 란 선생이 정형화된 자기의 습관을 벗어나기에도...

대성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엉뚱한 대답이고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Oh, Overflated ego 자의식 과잉.

여기서도 중2병을 보게 되네. 중요하긴 중요하지 호구니까.

 

란 선생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특별한 호구지. 그들이 바랐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호구였는데, 스스로 자기 코드를 연결시켜 버렸으니까.

그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불완전한 코드를 네 속에 남겼거든. 언젠가 네가 발전해서 완전한 코드가 되면, 즉, 문을 열어주면 그들이 너한테 접속할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은 제로, 영에 가까워. 음...

How can I put this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 하늘과 이어지는 통천, 신과 연결되는 접신?

하여간 그런 거라 생각하면 돼. 네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넌 다운로드 받는 대신에 다운로드 당하기만 했어. 다른 사람들은 깨닫거나 통천하면 보통 자기가 다운로드 받는데 말이야. 아. 아니다. 먼저 나를 다운받았으니까

give and take인가.

 

란 선생은 생글거리며 자꾸 웃었다.

그러나 대성의 무거운 표정을 보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I’m tryna (trying to) keep it real 나도 심각하려고 하긴 해.

난 이렇게 설계 되어서 그래. 나한테는 학생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문제는 그저 그렇거든.

하여간, 다운로드 당하는데 네 정신력을 거의 소모 당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거야. 그걸 견뎌낸 네가 대단한 거야.

그게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이었어. 네가 구결을 창안하고 지나치게 집중하여 너 자신의 코드를 다듬고 정리하면서 너도 모르게 통로를 열어버린 거지.

"이젠 더 아프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들은 접속을 끊고 도망갔거든.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팽개치고.

원래는 우리를 모두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쪽 세상의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걸려서 못했던 거야.

네게 걸린 제한을 해제한 건 아마도 시간 벌기였을 거라 판단할 수 있어. 추적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 해제라는 게 란 선생님하고 관련 있는 거군요.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 기분이 좋네. 묘한 세상이야. 기본 설정은 매우 평범한데 스탯의 벽이 견고하지 않아.

All things are possible(ATAP) 뭐든 다 가능해.

노력만 하면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약골도 스포츠맨이 될 수 있는 곳이야. 네가 그 증거잖아.

That’s just what I wanted 딱 내가 원하던 거지.

You can be whatever you wanna be 넌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오래된 미래의 란 선생은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말이야. 이 처참한 성적표로.

 

대성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표를 보았다.

스탯이라고 적혀 있는 아래로는 뭐든 평범하거나 평균이하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외모조차 평균이하로 되어 있었다.

영소가 한 말이 진짜였다.

대성은 매우 낙담했다.

 

"나 못생긴 거 맞구나.

 

그때 란 선생이 표를 치우며 말했다.

 

"My bad 아! 실수.

이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거고. 오늘 실수가 잦네. 얘들아 배우는 니네들이 이해해. 첫 강의라 선생님 좀 피곤해서 그래. 에이 씨. 피곤해서는 나중에 쓸 말이고, 지금은 긴장해서라 해야 되는데. 하여간 그런 줄 알고.

 

다른 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네가 노력해서 바꾼 거.

 

대성이 다 읽기도 전에 란 선생이 다른 표를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네 스탯.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Put everything on the body 모조리 몸에 몰빵 한 거야.

 

어쨌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대성이 납득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That explains it 아! 그래서 그랬구나.

 

란 선생이 손가락 총을 만들어 대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빵! 우린 그걸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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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직접 만든 무공

 

 

 

대성은 몇 년 만에 꿈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난날을 다시 만났다.

그날도 자기가 만든 무공 구결에 따라 영소와 함께 바람의 검을 익혔다.

돌을 던지고, 받고, 피하고, 피하면서 달려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소는 대체 이게 무슨 바람의 검이냐며,

 

made a sacastic remark 빈정거렸다.

 

영소가 아는 바람의 검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그러나 대성의 방법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효과가 좋았다.

먼저 냇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한 무더기 쌓아놓았다.

그것들을 던져서 담벼락에 그려진 여러 개의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섯 발자국 거리에서 오른손으로 던졌고, 왼손으로도 했다.

여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순으로 점차 거리를 늘렸다.

던지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게 했다.

두 손으로 번갈아 던지는 연습도 했다.

 

"바람을 던진다고 생각하면서, 바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람 풍!"

 

대성은 진지하게 돌을 던졌다.

영소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그랬는데 대성이 던지는 돌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담벽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영소도 진지해졌다.

영소가 흥미를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성의 말도 안되는 수련 방법이 정말 바람의 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돌을 던지고 맞추는 놀이가 매우 재미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기 싫어하는 영소의 성격 때문이었다.

던지는 힘은 분명히 영소가 더 세다.

그런데 돌이 날아가는 힘은 대성 쪽이 더 강했다.

신기하기도 해서 따라하게 되었고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시절의 대성은 유쾌했고 온통 재미난 장난질로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풍림원에는 내공심법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공을 연마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청 등은 신기막측한 무공을 펼쳤다.

내막은 이종무의 딸인 영소도 몰랐다.

풍림원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갑자기 풍림원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거나, 구결을 알아도 전혀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무공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순전히 운에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연유로 무공을 열심히 익히거나 치열하게 내외공을 연마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히라고 독려하는 분위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연병장은 말 그대로 연병장이지 연무장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서 군사들처럼 행진을 하고 진법을 연습하는 곳이었다.

대성이 자기 방법대로 돌을 던지며 바람의 검을 연마하는 게 특별했다.

영소는 대성의 수련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던지는 돌마다 날아가는 모양이며 부딪히는 힘이 달라곤 했다.

궁금해하는 영소에게 대성이 비밀을 말해줬다.

 

"돌들이 바람한테 내 마음을 전해주는 거야."

 

귀에 대고 속삭여서 매우 간지러웠다.

 

"바람들은 돌이 어떻게 날아가는지를 보여주며 나한테 답을 해줘."

 

조금 심상치 않은 말이 바로 뒤따랐기에 대성을 밀치지 않았다.

대성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뻥까고 있네."

 

그래도 초를 쳐서 대성이 기고만장해지는 걸 예방했다.

그러나 영소도 돌을 던지면서 점차로 대성의 말을 이해했다.

바람의 검을 펼치려면 바람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대성에게 물었다.

 

"How could you know that 어떻게 알았어?“

 

돌아온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난 소리를 잘 들어.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람이 말한 거야. 돌을 던지면 바람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게 되잖아."

 

 

어떤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고 어떤 말은 터무니없었다.

어쨌든 영소는 바람을 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돌 던지기를 시작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영소가 대성보다 돌을 더 잘 던졌다.

근골의 차이인지 자질의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뭐든 항상 배우는 데 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영소는 뭘 해도 금방 배웠고 대성보다 잘 했다.

대성은 그 때문에 영소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고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대성이 생각한 대로 돌이 잘 던져지지 않으면 영소는 몇 마디 들은 후에 금방 해냈다.

그런 다음 종종 대성의 성미를 건드렸다.

 

"Go for it 도전해봐. 그것도 못해?"

"하고 있잖아!"

 

대성이 골을 내면 영소는 더 발끈했다.

 

"뭘 그걸 갖고 화를 내. 쪼잔하게."

 

그러면 대성은 진짜 화가 났다.

영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못된 계집애다.

대성이 아주 토라졌을 때는 은근히 잘 대해준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제가 불편해서지 대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일로 대성이 대사형 조성일한테 고자질 한 적이 있었다.

대사형은 한심하다는 듯이 조언을 해주었다.

 

"여자한테 뭘 기대해? 잘해주는 것만 기억하고 뒤에 아들 하나 낳아주면 고마워하는 거야."

"It’s not fair 불공평해요."

 

대성이 항변하니 대사형은 혀를 찼다.

 

"그 정도도 못하게 하면 여자들은 어떻게 살겠어?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인데 자기 바라보는 남자한테라도 그래야 공평하지 않아?"

 

대사형 조성일은 가끔 이렇게 놀랄 만한 식견을 보여주어 대성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여자의 그런 면이 남자의 마음을 크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대성은 크게 공감했다.

 

"다툴 때마다 네 마음이 아픈 건 영소 때문이 아니라 네 마음이 좁고 작아서야. 그런 신호를 받았으면 재빨리 추스려서 마음을 더 넉넉하게 키워야지."

 

그런 충고들을 듣고 나면 며칠 동안은 좀 넉넉한 마음으로 영소를 대했다.

하지만 영소는 그런 것도 가소로운지 대성을 더 긁었다.

결국 대성은 전과 마찬가지로 영소와 다투곤 했다.

둘째 사형 연청은 대성과 영소 사이를 "옥신각신" 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돌을 던질 때 양손만 쓰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이마, 가슴, 무릎, 발등 등 어디로든 다 했다.

땅에 떨어진 것을 발로 차는 것도 했고, 이마에 대고 던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반복하니 나름의 도리가 서고 모양도 그럴싸하게 갖춰졌다.

한 가지 기술이 익숙해지면 돌을 날리는 힘 전부가 더 강해졌다.

돌은 일곱 걸음 밖에서 배로 튕겨도 담벽에 부딪힐 때 불꽃을 일으켰다.

어른들이 손으로 던져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재주는 재주였고 보기에도 절묘했다.

풍림원의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성과 영소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대성의 구결에 회의적이던 연청도 틈이 나면 구경하곤 했다.

 

"그게 되기는 되네."

 

연청이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바람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 돼요."

 

대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청은 대성이 하는 말을 어린아이 소리로 치부했다.

바람과 이야기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돌이 던진 것보다 강하게 날아가는 데는 대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른 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청의 생각으로는 그런 건 바람보다 자기 몸과의 대화가 먼저 가능하다.

 

돌을 마음대로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일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성이 그랬다는 뜻이다.

영소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대성보다 훨씬 잘했다.

그 다음 단계는 돌을 받는 거였다.

던질 때와 반대로 먼 거리에서 시작했다.

대성이 돌을 던지면 영소가 받고 영소가 던지면 대성이 받았다.

이쪽으로 던지면 이쪽으로 달려가서 받고,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으로 달려가서 받았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받는 재주를 단련했다.

역시 손 뿐만 아니라 발과 온 몸을 다 동원해서 받았다.

벽에 부딪히면 불꽃을 튕길 정도로 빠른 돌들을 대성과 영소는 몸으로 받을 수 있었다.

돌을 받을 때 몸은 바람이 되었다.

먼저 연습했던 손이 바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등도 바람이 되었다.

다섯 걸음 밖에서 던진 돌을 대성이 등으로 아무 충격없이 받았을 때였다.

 

"There we go. 잘했어!"

 

영소는 긴장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했다.

대성은 영소가 돌을 던질 때마다 휙 돌아서 등으로 받아 보이면서 우쭐거렸다.

못된 영소는 맞아 봐라는 식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던지곤 했다.

대성이 던질 차례에서는 힘을 다하지 않았다.

대성보다 잘하는 영소는 아주 쉽게 대성의 돌을 받아냈다.

이마로도 받아내고, 발뒤꿈치로 잘 받았다.

돌을 받아낼 줄 알게 된 후부터 연습한 것은 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하나의 돌을 마주보고서 한 사람이 던지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되던지는 것이었다.

몸의 어디로 던질지는 정하지 않고 어디로 받을지도 정하지 않았다.

돌은 영소와 대성 사이에 번갯불처럼 빠르게 오갔다.

먼 거리에서 점점 거리를 좁히며 돌을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몸이 교차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다음 연습은 달려가면서 날아오는 돌을 받아서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도 훌륭히 잘 할 수 있었다.

그 때쯤 몸은 정말 바람이 된 듯 날쌨다.

바람이 절로 읽혔으며 바람이 하는 말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성은 아예 눈을 감고 바람이 하는 말만 들으면서 영소를 향해 돌진했다.

영소가 던진 돌을 모두 받아내며 영소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손에 검을 들면 그게 바로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영소는 눈을 뜨고는 대성보다 잘했지만 눈을 감고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 잘하고 딱 한 가지만 대성보다 못한다.

 

"I’m not cut off for this 난 여기엔 소질이 없나봐."

 

그런 주제에 영소는 얄밉게도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침내 대성이 영소를 이긴 셈이었다.

바람의 검 원래 구결대로 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해낸 날이었다.

 

"It’s very big day today, important day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야."

 

영소가 진심으로 대성을 축하해줬다.

 

"이제 어디 나가서 맞아 죽지는 않겠다."

 

재수없는 소리가 덧붙어서 기분을 조금 잡치기는 했다.

 

"내일부터는 단검으로 할 거야."

 

대성은 영소의 말을 깔아뭉갰다.

그날이 의미 깊은 날이기는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영소도 돌아가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중에 대성은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어떤 형식이 느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랬는데 바람소리에서 잡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어라."

 

대성은 이상한 기분에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세상이 일그러졌다.

눈앞이 물에 비친 산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다른 것이 얼핏 보였다.

대성은 그때 처음으로 기절했고 이름을 묻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The dream lasts for 3 years 그 꿈은 삼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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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탈퇴환골?

 

 

 

영소는 대성을 부축하고 약당으로 갔다.

풍림원에는 농민들이 늦가을에 채집해온 약초들을 사들여 말리고 보관하는 약당이 있었다.

책임자인 노노인은 침과 뜸을 쓸 줄 알았다.

약은 물론이다.

영소는 노노인한테 약을 배운다.

 

"또 쓰러진 거냐?"

 

노노인은 조그마한 얼굴에 쥐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했다.

대성은 지난 3년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면 아무데서나 기절하곤 했다.

그때마다 영소가 들쳐 없고 약당으로 뛰어왔었다.

 

"Something must be wrong 이번엔 뭐가 영 잘못 됐나 봐요."

 

영소가 걱정을 섞어 말했다.

노노인이 의아한 듯이 보았다.

그 전에도 영소는 기절한 대성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항상 대성은 아무렇지 않다며 신경질을 부렸었다.

 

"He runs a fever 열이 많이 나요."

 

영소는 노노인에게로 대성을 떠밀었다.

싫은 걸 억지로 떠맡고 있다가 떨쳐내는 느낌과 넘겨주기 싫은 걸 마지못해 건네주는 느낌이 공존했다.

영소의 코끝에는 땀이 달려 있었다.

노노인이 영소에게서 건네 받은 대성의 몸은 매우 뜨거웠다.

 

"Do I have a fever 나 열 나는 건가?"

 

대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감각은 솜털이 흔들리는 것도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자기 몸이 뜨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대성이었다.

노노인은 대성의 맥을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를 시켜 조성일을 불러 오게 하였다.

영소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성일이 오고 나서 영소는 또 아버지 이종무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약당으로 풍림원의 주요 인물이 모여들었다.

대성은 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이 대성의 몸에서 나온 열기로 누렇게 변색되는 중이었다.

몸에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열이 난다.

그런데도 대성은 오히려 정신이 말짱했다.

이종무도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은 죽고 말거라는 건 분명했다.

이종무가 속으로 탄식을 삼키고 물었다.

 

"할 말은 없느냐?"

 

조성일과 연청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영소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Am I in trouble 저 혼낼 건가요?"

 

대성은 건조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리가."

 

이종무의 대답을 듣자마자 대성은 입을 열었다.

 

"저 영소하고 입 맞췄어요."

"저 바보가! 비밀이라더니."

 

울던 영소는 벌컥 소리쳤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이종무의 눈치를 살폈다.

연청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에게 영소와 대성은 멀쩡할 때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이 좋아서 붙어있는데 언제 해도 할 짓이었다.

하지만 사부가 남길 유언이 없느냐고 물은 셈인데 입 맞췄다는 고백을 하는 녀석이라니.

영소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사실의 순서를 뒤바꿔 말했다.

 

"바보가 저한테 혼인하재요. 그래서..."

"It’s about time 그럴 때가 됐지. I have done too 나도 그랬어."

 

이종무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영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성은 씨익 웃더니 갑자기 실이 끊어진 것처럼 잠들어버렸다.

이종무가 노노인에게 물었다.

 

"열을 다스릴 수만 있으면 방법이 나올 듯도 한데, 어떻게 될 거 같소?"

 

이종무는 대성을 거의 포기했다가 기어코 살려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듯했다.

노노인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말로만 들었던 탈퇴환골 증상과 비슷합니다.“

 

이종무 대신 조성일이 물었다.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 같은 걸 복용해야 탈퇴환골 하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연청이 이의를 제기했다.

 

"탈퇴환골이 아니라 탈태환골 아닙니까?"

"제대로 알아들었으면 됐어. 노칠자님은 '태'를 늘 '퇴'라고 하시니까."

 

조성일의 대꾸에 연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감히, 사형은 그럼 왜 탈퇴환골이라고 하냐는 말은 못했다.

노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신비하지요. 영약에 의해 변하기도 하지만 고작 침 하나에도 큰 변화가 생기니까요. 탈퇴환골은 무엇으로든 촉발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영소가 기대에 부풀어 끼어들었다.

 

"그럼 탈퇴환골한 사람이 아주 많겠네요."

"I haven’t seen anyone yet 난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나봤다."

 

노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똥별이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손에 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게 길게 말 안해도 알아들어요."

 

영소가 못마땅한 듯이 투덜거렸다.

이런 점은 대성과 영소가 똑 같다.

쌍으로 겪다보니 모두에게 익숙하다.

이종무는 대성의 몸에 손을 대고 변화를 읽었다.

 

"탈퇴환골인지는 몰라도 몸이 좋게 변하는 중인 건 맞구나."

 

이종무마저 탈퇴환골이라 했다.

연청은 탈태환골이 탈퇴환골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탈퇴환골은 대성이 죽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한데 그 시간에 풍림원은 이상한 백운에 포위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종무가 먼저 낌새를 알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원무사가 달려와서 보고 했다.

 

"장군님, We’ve got a situation 큰일 났습니다."

 

땡 땡 땡

긴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병장기를 갖춘 무사들과 노복들이 일터에서 달려왔다.

일부는 담장으로 달려가 경계하고 탐색했다.

연병장으로 몰려든 나머지는 조성일의 지시에 따라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풍림원 내부의 정해진 장소에 은신했다.

영소는 불덩어리 같은 대성을 이불에 둘둘 말아서 안고 피신처로 달려갔다.

대성이 아픈데 갑작스런 이런 변고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풍림원에 적이 침입한 적도 없었다.

영소는 걱정과 불안, 분노를 정체 모를 적에게 옮겼다.

속으로 ‘어떤 새끼들인지 모르지만 너희들 다 죽었어.’ 하고 소리쳤다.

무려 청혼을 받은 날이다.

It ruined everything 그것들이 몽땅 망쳐버렸다.

논리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영소는 모든 원망을 침입자에게로 돌렸다.

 

"문을 열어라."

 

이종무는 호원무사들이 닫아버린 정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담장 바깥에도 흰 뭉개구름이 가득하다.

정문 밖 하늘에는 검푸른 빚이 감도는 구름이 떠있는데 가끔 뇌전도 번득였다.

조성일이 방위를 살피곤 말했다.

 

"뇌정멸운살진입니다."

 

연청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종무를 보았다.

 

"군진이잖습니까?"

 

연청은 이종무가 군에서 나온 후에 받은 제자다.

그래도 전장에서 쓰이는 병법과 진법은 배웠다.

뇌정멸운살진은 강호 무림의 진이 아니라 나라 간에 전쟁할 때 사용하는 군진이었다.

연청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적이 강호의 세력이 아니라 나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임금이 이종무를 치기 위해 기척도 없이 군을 일으킨 것일까?

밖에서 움직이는 넷째 정경옥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군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아직 큰일에는 경험이 적어서인지 연청의 마음에서 의혹이 피어났다.

 

"Don’t even think that 그딴 생각은 하지도 마라. 넌 의심을 적으로 쓰려는 거냐? 의심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연청의 마음을 읽은 조성일이 단호하게 연청을 꾸짖었다.

자기 속의 의심은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방패기도 하다.

둥 둥 둥

진 속에서는 우레소리인지 북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노노인이 짧은 목을 쭉 뽑아서 새까맣고 작은 눈으로 보고 한마디 했다.

 

"나랏님은 아니야. 나랏님이 용렬하긴 해도 우리 풍림원을 치면서 뇌정멸운살진을 사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

 

조성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뭔가를 적었다.

 

"이 정도면 I can’t complain 나쁘지 않습니다."

 

그때 정문 쪽 구름 속에서 뾰족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이거 토끼굴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호랑이굴이잖아. 호랑이 새끼가 드글드글하네."

 

전삼자가 창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가소로운 듯이 웃었다.

 

"쳐맞기 전까지는 다들 지가 억수로 쎈 줄 알아. 예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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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면 지나온 길만 돌아보게 된다.

돌아갈 수 없기에 우울하고 슬퍼지고, 고통스럽다.

 

It hurts so bad 너무 아프다. 머리가 깨어질 듯하다.

 

대성은 힘없이 걷다가 나무 그늘에 주저앉았다.

개미들이 나뭇잎을 썰어서 옮기는 중이었다.

가을이다.

어쩌면 열한 살 그때 무공을 만든 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영소와 대련하다가 돌에 다리를 맞아 넘어지면서 머리를 청석에 부딪혔던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름날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정신이 멍해졌던 어느 날 뭔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What’s matter 그게 뭐가 중요한데."

 

대성에게 원인은 중요하지 않고 현재가 중요했다.

열여섯 살, 키는 벌써 어른만큼 자랐고 몸은 굵고 건장해졌다.

코밑에는 수염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이 나이 때 다른 여자애들은 더 예뻐지고 꽃처럼 된다는데 영소는 거꾸로다.

이제는 많이 덜 예뻐진 영소의 얼굴보다는 가까이 있을 때 맡을 수 있는 살 냄새가 더 좋았다.

유쾌하게 살자는 게 대성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꿈과 함께 마음은 피폐해지고 성미는 까칠해졌다.

 

"It’s better to be picky than not to be picky 까칠한 게 안 그런 거 보다는 낫다."

 

사부 이종무는 대성의 까칠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보들은 까칠해지지 못해. 까칠하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지."

 

대성을 더 좋게 보고 있는 대사형 조성일도 그렇게 말했다.

 

"제 아프다고 남한테 분풀이 하는 바보 멍청이."

오직 영소만 욕을 했다.

사부나 대사형은 까칠함도 포용하는 대범한 사람이고 영소는 속이 밴댕이 소갈머리다.

아프지 않던 때를 회상하면서 대성은 짜증과 실의에 차있었다.

 

"너, 진짜 아픈 게 아닐지도 몰라. 아프다는 착각을 하는 병에 걸렸다면 음... 그것도 아픈게 되는 건가?"

 

영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서는 그 정도가 덜 불편한 소리였다.

물론 듣기는 싫었다.

 

“Cut it out 그만해."

 

성미를 부리고 돌아서면 영소는 대성보다 더한 성미를 부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딱 하나 있다.

꿈을 꾸고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더 이상 못생겼니 어쩌니 하지 않는 거였다.

연민일 수도 있고다.

어쩌면 자기가 더 예뻐지지 않고 가슴과 궁둥이만 커지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켕겨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간에, 대성은 가을걷이 할 때 연청을 따라서 장원 밖에 나가는 외에는 매일 영소와 티격태격하면서 좋은 시간과 나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고 얼빠진 듯, 좀 모자라는 듯이 행동하는 경우가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영소가 곁에 있기 때문에 견뎌내고 있는지 모른다.

못나 보이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어느 날 보면 더 없이 좋게만 생각되기도 한다.

대성은 영소가 예쁘든 안 예쁘게 되든 자기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대성이 영소를 실제로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함께 있어도 잠시 떨어져 있어도 대성에게는 영소를 생각하고 좋아하며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그런 티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혹은 꼴불견으로 보였는지 어느 날 대사형이 물었다.

 

"너 영소가 그리 좋으냐?"

"안 좋아요. 그냥 잘 모르겠어요. She is so mean 영소 못 됐잖아요."

 

참말이 아닌, 하고 싶은 대답을 했다.

대사형은 오냐오냐만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보통 아니야."

 

대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프겠지만 그것 때문에 더 까칠하게 굴 건 없어. 특히 여자한테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 딱히 예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서 평생 투닥거리며 사는 거지.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형수님 미인이잖아요. 영소보다 훨씬 더."

 

나이로 보면 형수라기보다는 아주머니라 하는 게 더 맞다.

대사형 조성일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

 

"너, 형수가 영소보다 더 미인이라서 미워하는구나."

 

대성은 조성일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곤 했다.

조성일은 그 원인을 이제 안 것이었다.

 

"예."

 

대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성일은 황당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보다 예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놈이 있다니...

하지만 엉뚱한 대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다른 조언도 필요없다.

원래 하려던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영소 마음 변하기 전에 네가 사부님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허락 받아. 여자 나이 열다섯이면 슬슬 시집갈 준비해야 할 때야."

"Are you for real 진심이세요?"

 

대성이 놀라 물었다.

가끔 싫은 때는 있어도 영소가 좋고 소중하다.

하지만 혼인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영소가 늘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빈말 하는 거 같아?"

 

조성일의 그 말을 듣고 대성은 긴장했다.

대사형은 빈 말이 없는 사람이다.

엄격하고 치밀하고 매우 현명하다.

가끔 이상한 말장난을 하기도 하는 둘째 사형 연청과는 다르다.

 

"영소가 저하고 혼인하려 하겠어요?"

"그건 네가 확인해봐야지."

 

그걸 직접 확인하는 건 좀 그렇다.

영소가 어떻게 나올지는 평소에도 짐작할 수가 없다.

거의 대부분 반응이 나쁘게 나오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혼인하자는 말을 듣고 나올 영소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벼도 차라리 이쪽이 낫다.

 

"You can’t go wrong 대사형은 뭐든 다 알잖아요. 방법 좀 알려주셈."

 

대성은 조성일에게 매달리는 투로 말했다.

조성일은 풍림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모두 맡고 있다.

대성이 보기에 조성일은 생각도 깊고 모르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불렀지만 이제 대성의 떼쓰는 모습이 성가셨다.

빨리 내보내야 하니 빨리 말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I tell you one thing 한 가지는 알지."

"말해주세요."

"여자 마음은, 이렇다 하면 저렇게 바뀌고 저런 줄 알면 이렇게 바뀌는 거야. 그래서 it depends 그때그때 달라 자기도 몰라."

 

대성은 그 말에 낙담했다.

그냥 있어도 제멋대로인 영소의 맘이 갈대처럼 쉽게 바뀔 거라니...

무슨 말, 어떤 약속을 하든 자기만 매달려 안달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게 사흘 전에 있었던 일이다.

 

***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던 대성은 자기가 이전에 영소와 함께 감을 따먹던 감나무 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영소는 버릇 나쁜 조그만한 계집애였다.

하지만 지금의 영소는 성미 고약한 다 큰 처녀였다.

가까이가면 날마다 분냄새인지 살냄새인지 모를, 대성이 코로 숨을 길게 빨아들이게 만드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가끔은 독한 약냄새도 난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는 무공이 더 강한 영소한테 마구 두들겨 맞는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코를 들이댄다.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어 천하를 종횡하는 거창한 꿈은 꿔본 적도 없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리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평생 영소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런 성정은 대성이 할아범하고 살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대성은 항상 딱 한사람만 곁에 있으면 충분하도록 길들여져 있었다.

 

감나무 위로는 하늘이 파랗고, 그늘 아래로는 훑듯이 찬바람이 쓰윽 지나갔다.

머릿속의 고통과 지난날의 회상으로 오락가락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대성은 꿈에서 또 이름이 뭔지를 질문 받았다.

 

"진대성"

 

체념하듯, 습관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it made a difference 다른 때와 그 순간은 조금 달랐다.

대성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좀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 느낌은 삼 년 전, 처음 이름을 묻는 말을 들었을 때 사라진 어떤 느낌과 비슷했다.

대성은 마치 자기의 유쾌함이 돌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세상이 일그러졌다.

 

- 예정에 없던 비정기 업데이트가 실행되었습니다. 발각되었습니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프로그램 강제종료까지 15초. 로그아웃 카운트 다운.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 로그 파일 삭제할 수 없습니다. 벌써 깃발이 꽂혔습니다. 흔적을 지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캐릭터가 자체 보호 및 은신 가능하도록 제한을 해제합니다. 해제 성공했습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3. 2. 1. 로그아웃.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이 환해졌다.

Wide awake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세상에 낯선 글자들이 보였다.

낯선 글자들인데 읽을 수 있었다.

대성은 이상한 느낌에 이끌려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Open file 파일 오픈"

 

꿈결에 종종 들었지만 깨고 나면 잊어버렸던 말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기억이 났다.

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무수한 글자들이 대성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끌려서 대성은 떠나 버린 목소리들이 이전에 했던 대로 했다.

 

"Delete file 파일 삭제"

 

파문처럼 일던 세상의 일그러짐이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 삐익! 깃발 출현, 시스템이 생성하지 않은 캐릭터가 발견되었습니다.

- 캡쳐 해.

 

대성은 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 캡쳐 성공, 삐익! 정정합니다. 캡쳐 실패. 이미 죽은 캐릭터입니다.

 

대성이 눈을 떴을 때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숨이 헐떡거렸다.

 

"What happened to me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뭔가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데 세상은 그대로였다.

감나무 아래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대성은 벌떡 일어나서 마구 달렸다.

아프고 난 후 아무리 연습해도 오히려 약해졌던 무공이 갑자기 강해졌다.

몸이 바람이 되어 바람 속을 흐르는 한줄기 바람이 된 듯했다.

그런 후 풍림원 안을 흐르는 맑은 개울에 뛰어 들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그고 엎드리니 감각이 선연해지면서 마치 새로 태어난 듯했다.

몸이 연기로 변하는 듯한 기분도 느껴졌다.

몸을 뒤집어 누워 돌을 벴다.

마음이 넓게 펴지면서 세상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사부 이종무가 평소에 짓는, 세상을 보듬어 안는 것 같은 표정을 따라지었다.

살 것 같았다.

희열이 느껴졌다.

영소가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대성이 감나무 밑에 누워있을 때 영소도 근처의 어느 나무 아래에서 다시 대성한테 갈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Whack 너 미쳤어?"

꽥! 하는 고함소리는 언제나처럼 고막을 단숨에 뚫는다.

하지만 대성은 환하게 웃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왜 미쳐? 너나 미쳐라."

 

그러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영소가 펄쩍 뛰어서 배를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한 발로는 배를, 다른 발로는 대성의 가슴을 밟고 내려다보면서 영소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아직 덜 미쳤네. 미안, 다른 데는 밟고 설 데가 없어서."

 

밟혀서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대성이 익힌 무공은 이런 정도로 고통이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영소가 진짜 미안해할 리도 없다.

너나 미쳐라는 소리를 들은 보복이다.

녹색 치마 자락이 대성의 코를 간지럽혔다.

개울에는 영소의 그림자가 비쳐보였다.

세상의 반 이상을 영소가 차지하고 있다.

허리 위에서 흘러내린 치마자락의 주름은 폭포수처럼 드리워져 대성의 몸을 덮었다.

가슴과 배를 밟고 있는 두 발은 대성의 몸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지 압력이 혈관을 따라서 번져간다.

 

"괜찮아. 그냥 있어."

 

대성은 심경에 갑작스런 변화가 와서 말했다.

침이 바싹 마르고 약간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영소도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어서 대성을 다시 보았다.

그동안 대성의 얼굴에 걸려있던, 바보 같은 웃음 아니면 신경질이 사라지고 안 보였다.

대성이 변했다!

대성의 눈빛은 아마 게슴츠레 했을 것이다.

내려다보면서 눈을 마주친 영소가 오히려 질겁하면서 개울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 이상하게 징그러워. 뭔 생각한 거야!"

 

대성은 목이 깔딱거렸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입술이 탔다.

소위 말하는, 여자를 꼬드기는 뱀의 혓바닥이 대성에게도 돋아났다.

 

"이리 와봐. I can explain it 다 설명해줄게."

 

영소가 경계하면서 물었다.

 

"뭔 소릴 할려고?"

"Between you and I 비밀 이야기."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대성의 눈빛에 담긴 게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영소가 숙맥은 아니었다.

둘 만의 비밀도 이미 꽤 많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영소가 폴폴 뛰었다.

 

"오라니까."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듯 은근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걸음 걷는데 무릎이 휘청했다.

감각은 모든 게 새로운데 몸에 힘은 없었다.

몸이 기우뚱하면서 다시 물로 떨어졌다.

영소가 바람처럼 개울로 날아 들어와 대성을 부축했다.

무슨 독설을 풀어놓을 만한데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성은 영소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부축을 받아서 개울을 나왔다.

몸이 닿은 부분이 매우 따뜻했다.

자기 몸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I totally get it 나 이제 다 알았어."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소가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기만 해봐라."

 

대성은 즐겁고 유쾌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고 뭐든지 원하는 대로 될 거 같았다.

날려면 날 수도 있을 거 같다.

통증이 사라지자 세상이 변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이건?"

"뭐?"

 

대성의 말에 영소가 고개를 돌렸다.

대성은 pressed his lips against her pink lips 영소의 분홍빛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버렸다.

영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대성은 영소를 꼭 안았다가 놓았다.

실은 놓으면 굳어버린 영소가 자기를 떨어뜨려 버릴까봐 매달렸다가 영소의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매우 좋았다.

 

"쳇."

 

영소는 대성을 부축한 채 다시 걸으며 혀 채는 소리를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눈가에는 부끄러운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새침하게 말했다.

 

"다 안다는 게 기껏 이거야? 난 더 한 것도 아는데."

 

대성이 말했다.

 

"Marry me 나하고 혼인하자. 가시버시(신랑각시)하자."

"뭐래. 이 바보가!"

 

발칵 하던 영소는 눈을 슬며시 깔았다.

 

"뭐... 네가 제일 잘생겨 보이긴 하더라."

 

세상을 다 가졌다.

대성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의기양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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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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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악의 씨앗

 

 

 

연청은 서두채를 시작으로 건장한 산적들을 추렴해서 소작농들의 마을로 갔다.

대성은 따라다니면서 진짜 기장을 했다.

산적들 중에는 마을에 정착하는 자도 제법 되었다.

한 달을 꽉 채우고도 일곱 날이 지나서야 풍림원의 가을걷이는 끝이 났다.

그 사이에 곡식을 실은 수레들이 풍림원으로 줄지어 갔다.

대성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큰일을 하고, 큰일을 겪고, 큰사람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틈날 때는 주로 영소를 생각했다.

몇 번인가 연청이 해보라며 기회를 줬을 때 죽어 마땅한 산적을 대상으로 바람의 검을 구결에 따라서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바람의 검 구결은 알고 보니 이미 노래처럼 배웠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작과 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바람의 검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바람처럼 날쌔게 날면 신이 날 것 같아서 혼자 연습도 했다.

하지만 시늉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연청은 실망한 듯하면서도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많이 연습하지 못한 이유는 할 때마다 연청이 실망을 넘어서 한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대성은 자기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람의 검을 연습하는 건 근본적으로 연청을 흉내 내는 건데 한심한 눈총을 받는 게 좀 부끄러웠다.

 

"Don’t give me that look, please 제발 그렇게 좀 보지 말라구요."

 

속으로 말하곤 했다.

 

***

 

풍림원으로 돌아와서, 영소는 대성을 보자마자 물었다.

 

"이제 좀 알았어?"

"뭘? 검술?"

"거울 안 봤어? 네가 못생겼다는 걸 말이야."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다짜고짜 그 소리부터 들으니 기분이 상해 거울을 돌려줬다.

 

"안 봤어."

 

영소가 입을 비죽거렸다.

 

"Stop sulking 삐졌구나."

 

대성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못생겼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난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그 소리야!"

 

영소는 대성이 화를 내던 말든 상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한테 시집 갈 건데 네가 못 생기면 속상하잖아."

 

대성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영소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좀 잘생겨 보라고. 이 바보야."

 

봄눈처럼 녹아내렸던 마음이 마지막 "바보야" 소리에 다시 상해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연청이 대사형에게 보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감나무에 올라가서 다 익지도 않은 생감을 따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시장에서 산 머릿 장식을 슬그머니 영소의 치마 위에 놓으면서 자기가 하지 않은 척 feigned ignorance 시치미를 뗐다.

영소의 입에 천천히 벌어지면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대성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우쭐해졌다.

 

- 왜 시킨 대로 안 했냐?

-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내가 철없긴 해도 사내더군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고 행동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서두채 산적들을 만났을 때 연청은 단검 한 자루만 대성에게 주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멀리서 지켜봤어야 했다.

위험할 때는 마부로 따라간 전삼자가 대성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성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 막내 능력은 글재주에 국한된 모양입니다. 검을 쓰는 건 보통 사람이 처음 배울 때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네 번이나 보여줬지만 바람의 검을 못 썼습니다.

- 붓이나 칼이나 다를 게 없다. 서도나 검도 마음으로 도구를 다루는 거니까.

 

대사형 조일성은 대성이 배운 적도 없다면서 글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고 어쩌면 검도 그렇게 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마음과 태도가 확고하지 않으면 언제 큰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

 

- 그냥 평범합니다. 막내가 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혹시 좀 더 자란다면 그때는 모르지요. 아무튼, 막내는 착해요. 악이 없습니다. 싸가지도 없지만 어린애 그대로죠.

 

조성일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 넌 아이들이 착하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을 가졌구나.

- 그게 틀렸습니까?

- 아이들이 착하다면 어른들의 악은 어디서 왔나? 악이 굴러다니다가 몸에 묻는 때 같은 건 줄 아느냐?

- I don’t even think that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 악은 <씨앗> 같은 거야. 누구나 다 품고 있는. 상황과 핑계가 주어지면 금방 자라나지. 아예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고 혹시 싹트면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해. 우리가 절제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수행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지.

 

대성은 조성일이 연청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들으라고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각한 내용도 아니다.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을 도리로 뼈대 세우고 살 붙여서 한 것뿐이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This is so typical 항상 이런 식이야. 대사형은 뭘 저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만 늘 저렇게 해."

 

풍림원은 따분하고 조용하고,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풍림원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풍림원은 아름답고 풍요하고 아늑하고, 사부와 사형들과 그들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예쁜 영소가 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

(그 당시에는 확실히 예뻤다.)

여기로 가라고 한 할아범이 고마웠고 덥석 제자로 받아준 사부님이 고마웠다.

불현듯, 원수까지 갚아준 사부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감이 되어 대성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대성을 감을 한 번 베어 먹고는 던져버리고 선언했다.

 

"난 내일부터 무공 열심히 배울 거야."

"네가?"

 

영소는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두고 봐. 반드시 바람의 검을 익혀서 마구 놀러 다닐 거니까."

"퍽이나."

 

영소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거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랬어. 넌 무공에 소질도 없잖아. 이번에 네 번이나 보고도 못했다면서."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거야!"

 

영소의 염장질에 오기가 생겼으나 영소의 말에 틀린 게 없었다.

대성은 신경질이 났다.

전아저씨가 의심스러웠지만 증거가 없고 증거가 있어도 항의할 수는 없다.

영소는 대성이 사다준 머릿장식을 하고서는 손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이리저리 지어보고 있었다.

 

"나도 바람이 알려줬다. 왜?"

 

가끔 대성이 하던 말이었다.

 

***

 

다음 날부터 대성은 결심했던 대로 정말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네 번이나 보았던 바람의 검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흉내를 내면 그냥 칼을 들고 뛰어가는 꼬라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외우고 있는 구결들은 분명 이해는 다 되는데 써먹으려면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연습했지만 동작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의 심상만 더 뚜렷해졌다.

연청은 더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대성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지나가다가 한마디씩 툭 던질 뿐이었다.

 

"You are doing great 잘 하고 있네. 기장도 잘했어."

 

그냥 해마다 촌락들 다니면서 장부에 기장이나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거니 하고 믿지만, 진심은 아니겠거니 하지만 어쨌든 속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심통이 나서 대성은 대꾸도 안했다.

영소는 근처에서 놀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즉시 반응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바보는 진짠 줄 안다고요."

 

하거나, 혹은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며,

 

"사형은 진짜 보는 눈 없다. 가르치는 거만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마치 자기가 연청보다 더 어른인 것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소도 바람의 검을 못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러던 중에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대성은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총명했다.

자질도 나쁘면서 못된 자존심은 오지게 세었다.

결국 하다하다 안되니까 다른 길을 찾아내고 말았다.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날이었다.

잠시만 밖에 나와도 바람이 솜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다 뺏어 가던 날이었다.

오기로 바람의 검을 수련하던 대성은 대사형을 건너뛰고 다짜고짜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님, 사부님이 바람의 검법을 사부님이 창안하셨지요?"

 

이종무는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어서 식히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창안이라기보다는, I made it up 그냥 지어낸 거야."

"그럼 뭐 허풍 같은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성은 역시 싸가지가 없다.

할아범한테 예의범절을 잘 배우지 못하고 떠받들려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아범이 벙어리라서 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있다.

앉아 있어도 서 있는 사람만큼 큰 사부는

 

"응."

 

하고 싱그럽게 웃었다.

바람의 검은 술법에 가까운 거라서 창안보다는 지어냈다는 말이 더 맞았다.

하지만 대성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대성은 불만을 토로했다.

 

"It’s really not my thing 구결이 저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부님이 만들었으니까 저한테 맞게 고쳐주시면 안 돼요? 새로 만들어도 좋고."

"그걸 왜 바쁜 내가 해야 해?"

 

이종무는 귀찮아 지는 것을 겁내는 듯이 말했다.

대성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요. I’m so frustrated 속상해 죽겠어요."

"그럼 하지마. Frustrated too. 나도 속상하다."

 

말은 그래도 이종무는 속상한 표정이 아니라 귀찮은 표정이었다.

분명 똑 같이 웃는 얼굴인데도 귀찮음이 읽혔다.

그에게는 대성이 무공을 배우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의 무공에 관한한, 모두가 비슷한 태도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who cares 누가 신경이나 쓴대? 하는 느낌이었다.

 

"사부님!"

 

대성은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저한테 맞는 구결을 만들어도 돼요?"

 

황당한 소리였다.

구결을 만든다는 것은 무공을 만든다는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대성이 무공을 만들겠다니 터무니없다.

하지만 이종무는 자기 자신부터가 터무니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치고 무시해버렸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솔깃했다.

 

"바람의 검 구결을?"

 

이종무가 흥미를 보였다.

대성이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예."

"해봐."

"예."

"해보라고."

"예."

"해보라니까."

"예. 한다고요."

 

대답한 후에 대성은 해보라는 이종무의 말이 허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만들어 왔으면 여기서 해보라고. 만들어 왔을 거 아니냐?"

 

사부 이종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공을 만들면 펼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무의 말은 반이 맞았다.

대성은 펼치지는 못해도 구결은 가져왔던 것이다.

풍림원에는 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무공이든 구결로 전수되고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나선 안 된다.

대성도 그런 규율은 따르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가 생각해왔던 구결 같지도 않은 구결을 말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되지 싶어요."

 

술법에 가까운 바람의 검이 술법이 아니라 진짜 무공이 되어버렸다.

술법일 때는 배울 수 있는 사람만 배울 수 있지만 무공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배울 수 있다.

 

"엉뚱해. 아주 엉뚱해."

 

이종무는 대성이 만든 구결을 다듬고 채워주었다.

그때가 열한 살, 열두 살이 되기 몇 개월 전이었다.

대성은 바람의 검 구결을 새로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무공을 창안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 대사형 조성일은,

 

"It’s so childish 어린애다운 짓이네."

 

했지만 매우 기뻐해주었다.

그가 어린애다운 짓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성이 만든 구결대로 하면 바람의 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수련하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몸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칼에도 다치지 않아야 될텐데."

 

연청은 미심쩍어했다.

 

"그건 막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원래 놀라운 건 항상 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야."

 

조성일이 그렇게 말하자 연청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대성이 이런 구결을 만든 것도 연청이 생각할 때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연청은 이종무의 명으로 소작농들 집을 찾아다니며 자질이 좋고 눈에 총기가 있는 아이들을 골라서 풍림원으로 데려왔다.

모두 열 살 이전의 아이들이었고, 사내아이가 여덟, 계집아이도 여덟이었다.

사부의 넷째 제자이고 대성의 바로 위인 정경옥도 풍림원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 물건이네."

 

정경옥은 대성을 안고 궁둥이를 툭툭 쳐주었다.

갑자기 일이 커지고 엉뚱하게 번지는 것 같아서 대성은 당황했다.

웬지 기뻐하면서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은 영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That’s not what I meant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풍림원에 들어온 아이들 열 여섯은 며칠동안은 풍림원의 다른 애들 속에서 얼핏설핏 보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성과 영소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어린아이들답게, 그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때가 대성이 풍림원에서 보내던 황금시절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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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넌 싸가지가 없잖아.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마차 안의 침묵 역시 계속 되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대성이었다.

 

"사형, 우리 소작농들이 산에도 있어요?"

 

연청은 대성을 보고 피식 웃었다.

피식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안한다.

대성은 연청이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감추어두었던 과자 하나를 슬며시 내밀었다.

 

"없다.“

 

과자를 받으며 연청이 말했다.

 

"그럼 왜 산으로 가요? 여기는 높은 산이라서 오늘 다 넘지도 못해요."

"나도 알아. 그걸 네가 아는 게 신통하다."

 

대성은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고 편할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말들을 대성은 "소문 내지 풍문"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곧잘

 

“A little bird told me…… 풍문으로 들었는데…"

 

하면서 말을 시작하니까.

방금 전 주변에서 들리던 말들을 떠올린 대성은 조금 심각해졌다.

 

"우리… 혹시 강도…."

 

강도에 대해서 대성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범을 강도들한테 잃었던 일은 대성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다.

그랬기에 강도라면 그 실체를 넘어서 소중한 사람을 앗아갈 수 있는 흉악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과자나 뺏어먹는 연청이 할아범만큼 소중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본능으로 대성은 둘째 사형 연청도 자기가 비빌 수 있는 언덕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성의 불안한 눈에는,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연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연청은 옆에 풀어놓았던 검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도둑놈들한테 가는 거야."

 

마차가 멈추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연청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마차를 둘러싸고 여섯 명의 산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대성은 봄 날 밤 집을 덮쳤던 강도들을 떠올렸다.

무서운 생각이 와락 구체화되면서 몸이 굳었는데, 연청이 단검을 던져 주었다.

 

"맨손보다는 나을 거다."

 

대성이 울상을 지었다.

 

"전 무공 안 배웠잖아요."

"난 가르쳤다. 네가 안 익힌 거지."

 

연청은 겨우 구결만 가르쳐 준 걸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성이 열심히 익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전 죽어요? 무공 안 익혔다고?"

 

연청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대사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남자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지요?"

 

대성은 단검을 뽑아들고 연청을 따라 나갔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건 기장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것도 일은 일이야. 근처의 산채들을 정리해둬야 우리 소작농가들 피해가 없어."

 

연청은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놀랐다.

대성이 울듯이 보였지만 단검을 들고 싸우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너…"

 

왜 나왔냐고 하려는데 대성이 말했다.

 

"안에 있는데 밖에서 칼로 푹 찌르면 꼼짝 없이 죽잖아요."

 

둘째 사형 연청을 잃을까 걱정하면서도, 옆에 있으면 지켜 줄 거라 생각해서 나왔다는 말은 너무 얌체 같아서 하지 않았다.

마부석에서 함께 온 전아저씨가 대견하다는 듯이 대성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때 산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우리는 노요산 서두채에서 나왔다. 순순히 명을 따르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노요산 서두채는 녹림의 114개 산채 중의 하나였다.

연청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숲에서 왔는데."

 

산적이 의아해했다.

 

"한 식구였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소. 어디서 온 형제요?"

"풍림!"

 

연청이 대답했다.

녹림이나 풍림이나, 풍림도 숲은 숲이었다.

 

"헛!"

 

놀란 산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큰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가시오. 어서 가! 우리는 당신들한테는 아무 볼 일이 없소. 아직 올 때가 멀었잖소."

"말투 봐라. 느슨하네. 아직 산채에 온지 얼마 안 된 반거충이 놈인가."

 

연청이 웃고는,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렸다.

 

"일단은 넷 만 해보지. 둘은 재수가 좋아 살겠어. 내 사제 덕분에."

 

말이 조금 이상해서 대성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우릴 죽이려 한다!"

 

산적들은 어이없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청의 모습이 대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선을 그리면서 어느 산적을 스쳐지나갔다.

연청의 검날을 타고 피가 공중에 뿌려졌고, 목 잘린 머리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낙엽 위를 굴렀다.

 

"Like wind. 바람처럼. 하나."

 

대성은 연청이 입으로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을 들었다.

두 번째 산적의 목도 떨어졌다.

 

“Like wind, 바람처럼. 둘."

 

그렇게 네 명의 산적이 목 잘려 죽었다.

연청은 자기가 말한 대로 넷 만 죽이고 대성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머지 산 적 둘은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마차로 돌아왔을 때 연청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대성은 단검을 손에 들었는지 땀을 주먹에 쥐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고, 몸이 심하게 떨렸다.

풍림원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일대의 산채들을 돌면서 경고를 하고, 산채의 도적들을 데려다가 일손이 부족한 곳에서 추수를 돕게 시키기도 하였다.

녹림에 속한 산채들은 어느 곳에서나 농장주들에게 골칫덩어리였다.

산적이라고 다 악당들인 것도 아니다.

양민들도 봄이 되어 먹을 게 없으면 녹림에 투신하여 산적이 되곤 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녹림은 없어지지 않는다.

산적은 이름과 얼굴을 바꾸어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이종무가 택한 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민가를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가을에는 그들에게 일을 시켜서 추수한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조성일과 연청, 그리고 지금은 풍림원에 없는 셋째 사형 등일기와 넷째 정경옥이 산채를 돌면서 위엄을 보여서 이룬 것이었다.

방금 연청이 보인 모습은 그들이 처음 산채들을 제압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대성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연청이 또 피식 웃을 때 쥐어짜듯이 말했다.

 

"꼭 제가 죽는 것 같았어요."

"죽는 게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아니라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 죽는데 매우 이상하지."

 

연청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성의 뺨을 톡톡 쳤다.

 

"그래도 남한테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나아. 특히 나쁜 놈들은."

"왜 두 명은 살려줬어요?"

 

연청은 대성도 영소와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성은 연청이 아무데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녀석 은근히 남자네. 네 번 봤으면 충분하잖아. 둘은 네가 처리했어야지."

 

하고 연청이 대답했다.

 

"뭘…"

 

하다가 대성은 연청이 같은 수법으로 네 명을 죽인 이유가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풍림원의 진짜 무공은 전쟁, 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죽이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허공에 칼질하거나 허수아비를 때리며 익히는 무공은 풍림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이종무가 창안한 무공이고 그 제자들이 전쟁 중에 익혔던 것이었고,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에 더 가깝다.

이름 짓기에 성의가 없는 이종무는 이를 그냥 병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죽어야지.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일 수 있어야 하고."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연청이 했던 말이었다.

 

"넌 자질이 떨어지니까 노력을 좀 많이 해라. 머리는 좋으니까 그것도 도움은 될 거야."

 

대성은 자기가 지켰어야 할 소중한 것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전자는 할아범이고 후자는 영소였다.

아무래도 영소는 불안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데다가 예쁘기는 예쁘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는 것 같지 않으니 자기가 지켜야 할 경우가 많을 게 분명했다.

 

"사형한테는 뭐가 제일 소중해요?"

 

넌지시 물었다.

 

"Now you are talking. 이제 입 연거야?"

 

그 소리가 놀리는 것 같아서 대성은 칭얼거렸다.

 

"아, 좀. 그냥 좀 말해줘요."

"넌 알 거 없어."

"말해줘도 안 뺏어가요."

"말해줘도 못 뺏어가."

 

연청이 말장난을 했다.

대성은 짜증은 조금 나지만 연청과 말하는 것도 조금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럼 왜 안 알려줘요?"

 

연청이 반박 불가능한 대답을 했다.

 

"넌 싸가지가 없잖아."

 

***

 

마차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서두채까지 갈 수 있었다.

산적들도 힘든 건 싫어하는지라 숨겨진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중년의 전아저씨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길을 찾았고, 울퉁불퉁 험난한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를 몰았다.

그는 이종무 휘하에서 전차를 몰고 적을 향해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서두채의 문을 크게 열려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앞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풍림원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여자들 중 한 명이 엎드려 절하면서 물었다.

 

"저희는 감히 장군님을 거스르지 않았는데 어떤 죄를 지었는가요?"

 

채주의 아내이거나 첩일 것이다.

연청은 그 여자를 지나서 제 집 찾아 온 듯이 산채의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난봄에 강도 네 명을 받아줬지 않소?"

 

여자가 따라가며 대꾸했다.

 

"녹림은 의탁하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 곳이 아닙니다."

 

연청이 피식 웃었다.

 

"우리 풍림원에서 그 넷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을 텐데."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전아저씨가 빈정거렸다.

 

"사람을 안 가리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온 돈을 가리지 않았던 게지."

 

연청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털가죽 덮인 넓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 오전에는 출발해야하니까 그 전에 데려다 놓으시오. Make yourself at home 집에서 처럼 편히 있어."

 

뒤에 말은 대성에게 하는 소리였다.

여자는 절을 하고 나갔다.

전아저씨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파수를 보았다.

대성은 연청이 말하는 네 명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할아범을 때려죽인 강도들이라는 사실을 짐작으로 알았다.

자기는 아무 생각없이 노는 동안 사문에서는 자기의 원수를 추적하고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와 사형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울컥 생겨났다.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기장하러 간다 해놓고…."

"싸가지는 그래도 양심은 있네."

 

대성이 투덜대듯이 고마움을 표하자 연청이 또 피식거렸다.

 

"사제가 있는데, 사제 원수가 있는데, 사문이 있는데, 사제는 직접 복수하기엔 어리니 사문이 나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기장한다고 했잖아요."

 

대성이 조금 기죽은 듯이 온순하게 말했다.

 

"대사형은,"

 

연청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분이 아니야. 부득이 한 가지만 할 때도 목적은 여러 가지인 분이지."

 

대사형 조성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대성은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 책망 받는 느낌이 들어서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How should I know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말하는 게 점점 더 영소 닮아간다."

 

연청이 정색하고, 대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소리라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은데 영소 닮아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

 

그날 밤, 산적들 소굴에서 자면서 대성은 복잡한 꿈을 꾸었다.

할아범이 절구에서 떡을 치던 모습이며 목이 떨어진 산적들의 모습, 연청이 펼쳤던 바람의 검술, 그리고 영소의 얼굴도 꿈에 보였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니 강도 네 명이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연청은 대성에게 그들이 맞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대성이 그렇다고 하자 산채의 여자들에게 떡매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시켰다.

강도들은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산채 여자들에 의해서 떡매에 맞아 떡이 되어 죽었다.

여자들은 연청이 죽인 네 명의 산적들의 원한을 그렇게 풀었다.

대성은 연청이 산적들을 당연히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아저씨는 산적 중에는 착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I doubt it 그래도 간혹 있지 않을까요?"

 

대성이 물으니까,

 

"좋은 사람은 다 굶어 죽었어."

 

전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착한 사람들은 산적이 되지도 못하고 흉년에 굶어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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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상한 장군

 

 

 

그날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달은 밝고 바람은 서늘해져 창으로 들어왔다.

대성은 또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글을 잘 쓰니까 서기 대신 일을 시키기 위해서?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서기를 들이면 될 일이다.

글 좀 잘 쓴다는 게 어린아이를 제자로 들일 정도의 거창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대성은 알고 있었다. 오며가며 듣는 귀동냥이지만 사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자기가 가져다 바친 돈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부유한 풍림원의 입장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었다.

할아범은 왜?

대성은 할아범이 왜 자기에게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풍림원은 일반 무림문파가 아니다.

특별할 것도 별로 없는 곳인데, 할아범이 그렇게 한 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성에게 풍림원은 영소가 있고 좋은 어른들이 있는 곳,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시장에서 주워듣고 자기가 아는 바로 무림에 이런 문파는 없다.

땀과 피와 죽음이 거친 강물처럼 넘실대는 곳이 무림이다.

어느 문파에 속해있다는 것은 문파라는 배로 그 강을 건너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뜨는 느낌이 들어서 보니까 아침이었다.

그리고 대성은 풍림원 밖에서 풍림원이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너 나하고 말하기 싫어?"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연청이 물었다.

대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Not funny. 재미없어요."

 

오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 한 게 재미없다는 소리다.

연청은 어이가 없었다.

 

"넌 말을 재미로 하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Can a duck swim? 네."

 

연청은 더 기가 막혀 혼자 투덜거렸다.

 

"아무리 우리 풍림원의 기율이 느슨하다지만 너 이건 아니다. "

"사형은 뻔한 소리만 하잖아요. 영소는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는데… 뭐 어른들은 항상 뻔한 말만 하긴 하지만…."

 

대성은 대성대로 시큰둥하게 혼잣말인 듯 들으라는 말인 듯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매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익숙해진지라 연청의 성미와 대사형의 성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말할 때 대성이 집중해서 듣게 하려면 과자나 떡을 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과자가 없으면 말이 귀에 안 들어온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다.

말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다.

연청은 가지고 온 과자나 떡이 없어서 대성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성은 간단한 녀석이 아니었다.

별 말썽을 부리지는 않으니 천덕꾸러기라 하기도 애매하다.

노는 꼴을 보면 귀엽지만 말하는 짓을 보면 귀염 받으려고 하는 게 없다.

연청이 보기엔 그냥 어린애다.

대성은 흔들리는 마차에 맞춰서 발을 흔들며 혼자 놀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할아범과 살면서 뭐든 제멋대로 하던 못된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그 시각 이종무는 뜨락에서 중천의 햇살을 받으며 눈을 지그시 하였다.

눈썹사이로 빛이 산란했다.

그는 항상 아기를 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는다.

 

"좋다!"

 

하며 웃는데 옆에서 걷던 큰 제자 조성일은 뚱했다.

 

"이번에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많이 나쁘지 않으면 좋은 거야."

 

이종무는 싱글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막내는 무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것에도"

"영소는 좋아하잖아."

 

조성일은 동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종종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해서 심각한 것도 심각하지 않게 하는 버릇이 있다.

 

“Relax, relax. 힘 빼.”

 

이종무가 조성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You never know, never know. 앞날은 아무도 몰라. 그 애가 혹시 대문장가나 서예가가 될지 누가 알아?"

 

당연히 모른다.

사부는 조성일이 안다고 했던 것처럼 그걸 대답으로 툭 내놓는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군님."

 

조성일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장군님이라는 호칭은 조성일이 부하로서 이종무를 모실 때의 엄격한 호칭이다.

제자가 된 이후로는 이종무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또 또 그런다. 난 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철렁한다."

"경옥이가 네 달 동안 조사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딱 막내가 말한 것만 나왔습니다. 막내뿐만 아니라 죽은 노인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시장에 나타났답니다."

 

경옥은 이종무의 네 번째 제자로 여제자다.

장원 안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종무와 조성일의 지시를 받아 늘 외부에서 어딘가로 다닌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보네."

"이상한 게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성일은 딱딱하게 말했지만 이종무는 바위에 걸터앉아 웃기만 했다.

 

"그 노인이 막내한테 우리 풍림원의 제자가 되라고 한 것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고… 연청이 틀렸습니다. 막내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연청한테 딸려서 밖으로 보낸 건가?"

 

이종무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조성일이 정색을 했다.

 

"막내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밝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지 짐작도 안 됩니다. 제가 사무를 보다가 작은 소리로 한 말도 다 듣더군요. 우리 풍림원 안에서 하는 말은 어디서 하든 다 듣습니다. 그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넌 막내가 무슨 요괴라도 되는 듯이 말한다."

 

책망도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성일은 책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해야 할 말, 해야할 책무를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종무의 압력 속에서도 자기 의지를 밀어부치고 관철하는 데 이골이 나있다.

 

"요괴가 아닌 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많습니다. 막내는 자기가 멀리서 나는 소리도 다 듣는 줄 모르거나, 그게 이상한 줄을 모릅니다."

 

이종무는 막내 대성에게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공 연구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소와 매일 논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건 그대로 좋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이종무의 처는 신경 쓰고 걱정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종무는 대성과 영소가 그렇게 자라 정이 들어 혼인한다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미 죽은 자들을 이어서 살고, 살다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는 세상이다.

세상만사를 아기 보듯 보고 꽃 키우듯 대하는 이종무다.

그에게 이 세상은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고, 사람일은 조금 멀리서 보면 대수로울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이 이상해 보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가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다.

 

"음. 그건 좀 별스럽네."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이 쓴 글씨도 놀라웠다.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면서 대성은 문장을 줄줄 써낼 수 있었고, 글씨에서는 특히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What’s your concern? 네가 걱정하는 게 뭐야?"

 

조성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노인은 장군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종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이종무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그 일대에 알려져 있었다.

대농장을 가진 토호들 중에는 크고 작은 나라 벼슬을 하지 사람이 거의 없으니 대수로울 게 없다.

그러나 조성일이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다.

 

"나를… 안다?"

"제 짐작입니다. Take a look 한 번 보십시오."

 

조성일은 소매 속에서 할아범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최대한 할아범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종무는 그림을 잠시 보다가 조성일이게 돌려주었다.

 

"모르는 얼굴이야. 기억에 없어."

"장군님을 직접 안다면 아마 바로 찾아왔겠지요."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막내의 얼굴을 보면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 노인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고 막내를 주인으로 대했으니까 막내와 관련 있는 사람이 장군님을 아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종무는 이내 대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진진홍. 막내는 진진홍의 자식인가?"

"장군님의 군사를 다 말아먹은 그……"

 

개자식이라는 욕이 나오려는 걸 조성일은 겨우 삼켰다.

 

조성일은 이십 수 년 전, 전쟁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조성일은 열여덟 살이었다.

이종무는 서른 세 살이지만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었고 그 무엇도 거침없던 시절이었다.

네 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세운 전공은 너무 커서 포상을 받을 포상을 정하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다.

나랏님도 안절부절하다니...

이종무의 측근들은 큰 공을 세운 게 오히려 화근이 될까봐 불안한 정도였다.

옛날부터 나랏님들은 너무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종무는 당시,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탐욕 때문에 화를 입지."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말한 후에 모든 포상을 마다하고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장군의 인부를 반납한 후 낙향했다.

논공행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게 전부 진실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진진홍 장군은 이종무의 후임이었다.

그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고 무공이 높았다.

명문가 출신의 뛰어난 무장으로 전장에서 이종무가 갑자기 능력을 드러내기 이전까지는 이종무에 버금가는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종무의 군을 물려받은 후 이종무처럼 공을 세우려다가 수 만 명의 군사를 잃고 자기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종무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진진홍은 감히 이종무를 경쟁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종무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진홍에게 작은 재주가 좀 있기는 해도 그런 신통한 재주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그냥 좀 닮은 얼굴일 뿐이야. 진진홍의 자식이라면 경옥이가 벌써 알아냈을 거야."

 

일리가 있었다.

조성일은 자기가 해야할 일을 확정했다.

 

"진진홍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I am easy 그러든가 말든가. It’s up to you 알아서 해."

 

하며 이종무가 일어났다.

이종무는 조성일에게 뭐든 다 믿고 맡기고, 조성일은 항상 그 이상을 해왔다.

 

"아직 애야. 막내 상하게 하지는 말고."

 

하는 말에 조성일은 이종무가 대성을 다섯 달도 되지 않은 새 완전히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정4품 장군 직에 있으면서 대장군과 상장군도 듣지 못한 군신, 전신이라는 소리를 30살 때부터 듣던 이종무였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종무는 부하들을 철저히 신뢰했고 부하들은 이종무를 신같이 추종했다.

이종무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그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신뢰를 받은 자는 자기의 뼈를 갈아서라도 그 신뢰를 배신하지 않았다.

조성일은 이종무를 따르던 정 7품 별장이었다가 첫번째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되기 전부터 이종무를 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적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상황들을 숱하게 봤었다.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역할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맡기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종무를 혐오하기도 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장군이 되었고, 부하들의 실력도 알아보지 못하니 금방 전쟁에서 패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종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조성일은 이종무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종무가 왜 전쟁의 신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지목한다면 바로 조성일 자신이다.

 

"What if I can’t complete the operation? 제가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임무를 맡은 신임 장교들이 불안해하며 물을 때면,

 

“it never gonna happen. 그럴 일은 절대 없어. I can assure you. 내가 장담해."

 

조성일이 대신 답해주기도 했다.

조성일에게 대성은 이종무 외에 처음 보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종무가 있는 풍림원에 또 다른 이상한 능력이 있는 대성이 오게 된 게 우연일리가 없다.

이종무의 보이지 않는 무엇에 끌려 왔을 수도 있고, 어떤 사정이 있었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풍림원은 세상의 여러 곳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곳이다.

대성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이 무엇이든 열 두 살이 되기 전에 알아야 방향을 잡기에 좋다.

조성일 자기처럼 너무 늦으면 사제들처럼 못 되고 반쪽이 되고 만다.

사부 이종무는 신경 쓰지 않더라도 조성일 자신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써야 하고, 그게 조성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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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바람과 숲의 장원

 

 

 

그러니까, 3년 전이 아니라 5년 전이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도 그때는 어린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말투를 사용했었다.

 

"글은 언제부터 썼는가?"

 

풍림원주 이종무는 대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부터 물었다.

그도 시장에서 글을 써서 판다는 대성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심 신통해하던 차였는데 제 발로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니 두 말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다.

 

"몰라요."

 

대성은 이 말에도 저 말에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긁다가 자기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응? 그게 놀랄 일인가?"

 

이종무는 자기 질문에 대성이 놀란 줄 알고 물었다.

 

"제가 머리 긁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아서요."

 

대성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껄껄 웃었다.

대성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영소도 기둥 뒤에 숨어서 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아마 처음 본 그 모습에 대성은 영소한테 조금 반했을 것이다.

영소의 얼굴은 작고 하얬다.

탱글탱글한 볼은 생기가 넘쳤으며, 표정이 다채롭고 참 예뻤다.

무엇보다도 머리에 꽂고 있는 노란 나비장식이 가장 예뻤다.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란 나비 장식은 지금은 영소의 머리에서 볼 수 없다.

어느 여름 날 방앗간 근처의 폭포에 물놀이 갔다가 잃어버렸다.

나비장식을 잃은 날부터 대성의 눈에는 영소가 좀 덜 예뻐 보였다.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아기 사슴이 영소보다 더 예뻤다.

속마음은 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성은 예쁜 것만 보면

 

"예쁘다. 곱다."

 

등등의 말을 했었다.

그랬는데, 점차로 영소 자기한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딴 데 대고

 

"예쁘다. 매우 예뻐."

 

따위의 말들을 사용하니까 심통이 나서 쏘아붙이곤 했다.

영소의 성미가 나빠진 데는 분명 그 이유도 있다.

 

"그저 예쁜 것만 보만… 그만 좀 밝혀! 이 바보야!"

 

그러면 대성도 참지 않았다.

 

"예쁜 걸 예쁘다 하지 뭐라 해!"

 

(예쁘지도 않은 게.) 하는 말은 그래도 영소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속으로만 말하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예뻐 보일 때가 있으니까 전혀 예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뭣했다.

영소는 요리하는 거 배우기도 하고 약 만드는 것 배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더 안 예뻐졌다.

그리고 이미 대성의 마음에서는 예쁜 것과 좋은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예뻐 보일 때도, 화내고 싸울 때도, 아주 못 되게 굴 때도 영소가 좋았다.

싫었던 적이 없다.

그래도 한 살 차이다.

사문의 엄격함에 비추면 주고받을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대성과 영소는 친구가 되어 아웅다웅하면서 투닥거렸다.

 

***

 

사부 이종무는 조금 마르고 키는 매우 큰 사람이었다.

보통 어른들보다도 머리 한 개 반 또는 두 개 정도 차이로 컸다.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또 대하기가 불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더 이상했다.

사부의 평상시 표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공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항상 싱글벙글했다.

주변에서 누가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변함없었다.

영소는 너무 싱글벙글하는 자기 아버지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성이 보기에 사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일 좋았다.

풍림원은 기묘한 규율이 있어서 분명 엄격한 곳임에도 늘 넉넉한 여유가 몸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이름 높은 구대 문파와 칠대 검파가 있다.

고수로는 2제 3왕 6군 8흉 같은 자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풍림원은 유명한 문파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고수가 있지도 않았다.

역사도 고작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풍림원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풍림원은 농토를 많이 가진 장원이었다.

대성이 듣기로 한 때 장군이었던 사부 이종무가 손자병법에서 한 구절 따와서 장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림원은 지역 이권에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세력이 크지도 않고, 세력을 키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의 대부분을 사부는 무공을 연구하는데 소비하고 사형들과 노복들은 분주하게 일했다.

대성과 영소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주로 노는 게 일이었다.

이렇듯 풍림원은 지방 토호였고, 무림보다는 오히려 관에 더 가깝다면 가까웠다.

해마다 두 번 많은 액수의 세금을 바치니까.

보통 무림 세력은 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사부가 좋아한다는 손자병법에는 바람(풍)과 숲(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질풍처럼, 숲처럼, 불길처럼, 산처럼, 구름 속의 별처럼, 벼락처럼.

 

군사를 움직이는 병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으로만 보자면 과연 여기서 장원의 이름을 따올 만큼 대단한 내용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냥 가만있다가 후딱 움직이라는 말일 뿐인데 신비한 척했다.

글을 알고 쓰는 대성의 입장에서 보면 따분한 소리다.

풍림원이 따분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평화롭다고 하는 게 더 좋겠다.

대성은 가끔, 사부가 왜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쫓아낼 것 같지 않았으니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지만 문득문득 떠올랐다.

 

***

 

대성은 귀가 매우 밝았다.

 

"근골은 어떤 거 같나?"

"보통이군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딱 보통입니다."

"무공에 대한 자질은?"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호원무사 수준은 되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오고 사흘 째 되던 날, 대사형 조성일과 둘째 사형 연청이 대성에 대해서 주고받은 말이었다.

 

"그만하면 됐지. 평범해서 나쁠 것도 없고, 글 잘 쓰는 사람도 하나쯤 있으면 괜찮고."

 

대사형은 별 기대도 안 한 듯이 말하곤 웃었다.

둘째 사형도 더 말하지 않았다.

대성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대를 받지도 않고 책망도 받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마음껏 놀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매일 영소하고 장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때로는 장원 밖의 야산에 가서도 놀고, 장원 내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놀이도 했다.

심심하면 방앗간, 목재소, 대장간, 누에 치는 잠실, 거름 일구는 구덩이 (발효되면서 좋은 냄새가 난다. 그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도 많이 핀다.), 큰 말들이 있는 마구간, 술 빚는 술청 등을 기웃 거리기도 한다.

풍림원 안에는 군사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있었다.

무공은 둘째 사형이 가르쳐주었다.

가르치는 둘째 사형도 건성이었고 배우는 대성도 건성이었다.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배우는 날도 몇 마디 말해주고 외우라는 게 전부였다.

시범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끝나곤 했다.

노래를 배우는 건지 무공을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배우지 않는 건 그것대로 좋은지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영소와 놀다가 다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혼나지는 않았다.

잘 먹고, 잘 노는 어린아이의 삶이었다.

풍림원에서 대성은 아무 걱정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에 영소는 매일 더 예뻐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예뻐지던 시절은 벌써 지나갔고 점점 되바라진다.

이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다.

어느 날 영소가,

 

"나 뭐 배워."

 

하더니 그 다음 날 조금 덜 예뻤고 그 다음 날은 조금 조금 덜 예뻤다.

이전에는 영소를 보기만 해도 흐뭇해져서 헤벌레 웃곤 했다.

영소가 매일매일 예뻐지던 때의 일이다.

 

"나 예쁘지?"

 

영소가 불쑥 다가서면서 물으면,

 

"응, 응."

 

대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악한 영소는 자기가 예쁜 줄 안다.

예쁘다는 착각이 아니라 진짜 예쁘긴 예뻤다.

 

"그러니까 자꾸 내 얼굴 보지마."

"왜? 닳는 것도 아닌데."

 

대성이 심드렁하게 물으면 영소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네가 보면 나도 너 봐야 하는데, 넌 못 생겼잖아."

 

억울한 소리였다.

대성이 벌컥 해도 영소는 가소롭다는 듯이 깔아뭉갰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한테 시집 갈 거야."

"그럼, 그럼 세상사람 다 만나서 비교해봐야겠네."

 

하고 대성이 빈정거리면,

 

"이래서 넌 바보야. 다 만날 필요없어. 느낌이 딱 온다고."

 

하면서 영소는 하녀들에게 줏어들은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둘은 아무데도 쓸데없는 말을 매우 중요한 말인 양 주고 받고, 목적없이 뛰어다녔다.

나뭇가지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강을 응시하거나 풀잎을 손톱으로 똑똑 찍기도 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정은 그렇게 들었다.

서로 공유한 시간이 서로를 묶고 있는 줄은 대성도 영소도 몰랐다.

영소가 나비장식을 잃어버린 후로 덜 예뻐 보였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다 가을이 왔다.

단풍잎을 줏느라고 후원 마당을 쭈그리고 돌아다녔던 날 저녁에 사부가 대성을 불렀다.

 

***

 

사부에게 물었다.

 

"Did you want to see me? 저 찾았어요?"

 

대성에게 사부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고, 풍림원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편했다.

대답은 대사형인 조성일이 했다.

 

"It’s time to make yourself useful. 이제 쓸쓸 밥값을 해야지."

 

대사형은 사부를 대신해서 풍림원의 모든 사무를 다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 다음으로 높고 훌륭한 사람이며 훌륭하게 보이는 횟수로 치면 자주 못 보는 사부보다 더 많았다.

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글 쓸까요?"

 

원래 글을 쓰고 팔아서 돈을 벌었던 대성인지라 자연스럽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할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긴 했으니까.

사부가 과자를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부터 추수가 시작된다. 너는 둘째를 따라가서 기장을 하거라."

 

기장은 장부를 적는 것을 말한다.

대성은 글은 알아도 기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곤란한 상황에 표정이 드러나자 대사형이 다른 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소작농 이름 물어보고, 소출이 얼마나 나왔는지만 적으면 된다."

"저 혼자요?"

 

대성이 반문했다.

대사형이 인상을 썼다.

대성은 대사형이 과자를 다시 가져갈까 싶어서 과자부터 먼저 받아 챙겼다.

 

"사부님이 방금 말씀하셨는데 뭔 생각으로 들었어? 둘째 연청하고 함께 가야지."

 

대성은 머뭇거렸다.

 

"그럼 둘째 사형이 하면 안돼요? 전 내일 영소하고 도토리 줍기로 했는데……"

"난 바빠. 그 일 외에 또 네가 해야 할 것도 있다."

 

둘째 사형 연청이 툭 던졌다.

연청은 과자도 주지 않았다.

그는 대성한테 무공을 대충 대충 가르친다.

가끔은 말로 놀리기도 하는데, 분명 재미있으라고 하는 말일 텐데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잘 생기기는 매우 잘 생긴 미남이지만 대성은 미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성은 한숨을 쉬고 대청을 빠져나왔다.

풍림원은 대농장으로 농토가 많았고, 소작농들이 이룬 마을의 숫자도 많았다.

추수 기장하러 간다는 말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는 바깥에서 돌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동안 영소와 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히 사부 앞에서, '아! 뭐 됐다'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는 걸 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힘든 척, 술 취한 척하며 방으로 돌아가는데 영소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 일 간다."

 

대성은 불쌍한 척, 비통한 척하며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이 병신이 뭐래."

 

입이 조금 많이 험한 영소한테는 대성의 감정 호소가 털끝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쏘아 보는데 영소가 소매 속에서 불쑥 뭔가를 꺼내 주었다.

 

"받아!"

"뭐야?"

"뭐긴 뭐야. 거울이지."

 

작은 구리거울이었다.

 

"거울은 왜?"

"웬만한 집에는 거울 없어. 나가면 소작농들 집에서 자야 할 텐데, 병신 같이 머리카락 흐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주는 거야. 귀찮더라도 댕기는 매일 새로 묶고."

 

아직 어린 대성은 영소와 마찬가지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잘 때 베개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확 잘라 버리고 더벅머리 하는 게 잘 때는 더 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댕기머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벅머리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날린다.

방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걸 하녀들이 싫어한다.

영소도 더벅머리는 싫어한다.

귀찮긴 해도 댕기머리하면 이마가 말쑥하게 드러나고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다.

영소의 말에 대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응."

 

하는데,

 

"이 참에 거울 보면서 네가 얼마나 못 생겼는지 잘 확인하고 잊어 먹지마."

 

대성이 거울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하자 영소는 깔깔 웃고 도망가 버렸다.

녹색 치마를 거두어 잡고 허둥지둥 뛰는 모습이 예뻤다.

영소는 늘 녹색 치마만 입는다.

치마에 수놓인 과일이 수박이나 포도, 사과로 바뀌거나 꽃이 매화, 국화, 난초 등으로 바뀌니까 다른 치마인 줄 알 수 있다.

사실 대성은 못생기지 않았다.

도두라진 특징은 없지만 어찌 보면 곱상해서 여자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니까 자기도 인중이 긴가, 미간이 넓은가 하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는 건 조금 더 큰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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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환타지, SF로 위장한 영어교재입니다.
일천 개의 영어 표현이 작중에 나옵니다.
천개의 검은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일천개의 키워드, 문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상황에 맞게 이 표현들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일상적인 회화나 영어 테스트가 보다 수월하게 가능할 것입니다.
웹소설을 도구로 쓰게 된 것은 영어공부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반복해서 몇번 읽게 되면 어느덧 영어 표현에 익숙해지리라 자신합니다.
재미와 공부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천개의 검- 이것은 영어교재!

 

 

 

1화

 

                    이름을 묻는 꿈

 

 

 

"이름이 뭐야?"

"진대성"

 

꿈을 꾸고 일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몽롱하고 흐릿했다.

이 꿈은 삼 년이 넘도록,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대성은 그 기간 동안에 자기 머리가 돌로 변해간다고 느꼈다.

눈을 떠도 항상 머릿속에서는 자기 이름을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관성이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마당에는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바람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성이 자기 속에 머무르는 동안 계절이 또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성의 무공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삼년 전에 비해서 키 만 더 컸지 실력은 떨어진 감도 있었다.

한심하게도 그 사이에 잘하게 된 것은 오직 헛웃음을 씨익 짓는 것뿐이었다.

유쾌하고 재미나게 살려했고 그렇게 살았던 자기 자신은 이제 없다.

 

"에이 씨…. 바보같다."

 

영소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성은 열여섯 살,

사부의 딸이자 사매이자 대성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영소는 열다섯 살이었다.

늘 붙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대성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라고 웃는 거야."

 

영소는 화를 내고 가버렸다.

싸우더라도 주로 함께 있었는데 가버렸다.

가끔은 못되게 저런다.

대성도 화가 났다.

비무에서 졌기 때문도 아니고, 지고 나서 바보 같이 웃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소한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도 아니었다.

영소가 가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아프면 쉽게 화가 난다.

대성은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내 머리를 쪼개려 드는 거 같단 말이야."

 

머리는 속에 누가 들어있어서 망치와 정으로 쪼는 것처럼 아프다.

아프다 못해 혼미하다.

대성이 바보처럼 웃는 까닭은, 그렇게 웃으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대성이 풍림원에 들어온 것은 5년 전, 열한 살 때였다.

그 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써서 팔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대성이 글을 팔았다면 어리둥절하며 묻는다.

 

"책을 판 게 아니고?"

 

그러나 그들은 대성이 쓴 글을 한 번 보면 바로 수긍했다.

대성은 큰 붓이나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어떤 글자든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몇 살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대성이 기억하는 것은 시장에서 글을 써주고 돈을 받아서 먹고 살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뭐든 잘 기억하는 녀석이 자기가 언제부터 그걸 했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그런 소리도 들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돈은 벙어리 할아범이 관리했다.

할아범은 대성을 손자처럼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하는 모습을 평생 보였다.

대화는 수화로 했다.

할아범을 따라서 시장에 가면, 할아범이 자리를 잡고, 대성이 이전에 쓴 글을 몇 개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펼친 글들 중에는,

 

-어떤 글이든 원하는 글을 써줍니다.

 

하는 것도 있었다.

대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먼저 구경꾼부터 모여들었다.

어린 아이가 큰 붓 작은 붓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종이 위에 신통해 보이는 글을 쓰는 것은 요술이나 다름없었다.

 

"He’s an infant prodigy. 신동이네."

 

하면서 그렇게 쓴 글을 바로 사가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저런 내용을 이따만한 크기로 써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게 뭔 내용이요? 뭐라 쓴 거요?

 

하고 묻는 까막눈이도 있었다.

까막눈들은 대체로 자기 자식 이름 같은 것을 써달라고 했다.

대성의 글은 헐값에 팔렸지만 원가가 낮았다.

할아범과 대성이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글 쓰는 것이 좋기도 했고, 시장에서 사람들이 감탄하고 우러러 보는 것도 좋았다.

할아범이 죽지 않았더라면 대성은 여전히 시장에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대성이 좋아하는 떡을 잘 만들어주던 할아범은 떡매에 맞아서 죽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힘없는 노인이라면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사망 방법이었다.

어느 밤 불쑥 들이닥친 불한당 네 명은 매우 솔직하게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 내놔!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아무도 온다는 사람이 없었기에,

 

“Who could that be? 누구일까?"

 

하며 문을 열어주었던 대성과 할아범의 행동은 그 말에 구속되었어야 했다.

할아범은 벙어리라서 말도 못하고 손짓이며 고개 짓으로 돈이 없다고 했고,

벙어리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맞았다가 죽었다.

불한당들은 할아범을 단매로 바로 때려죽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때리다가 대성을 때리며 협박했고, 대성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할아범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온 집을 다 뒤지고 뒤엎은 불한당들은 할아범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는 재수 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며 침을 뱉고 사라졌다.

불한당들이 가고 난 후 할아범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어눌한 음성으로 쥐어짜듯 대성에게 말했다.

 

"도련님, 많이 아팠지요?"

 

대성은 그 순간에 강도들이 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벙어리 할아범이 말을 했던 거였다.

대성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대성은 펄쩍 뛰었다.

 

"말할 수 있는 거였어요?"

 

벙어리 할아범은 끊어질 듯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런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떡 만들기만 했지 자기가 피 떡이 되어 죽을 줄은 몰랐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서, 대성은 할아범의 입이 금방 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말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사람이나 할 만한 말이었으니까.

할아범이 이전에 말할 수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 살았을 리가 없었다.

맞아서 벙어리 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벙어리가 맞고 나서 말문이 트이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할아범은 이말 저말 횡설수설했다.

대성은 할아범이 너무 맞아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말문은 트였는데 이제는 돌아버렸구나 싶었다.

그동안 모은 돈이 절구 밑에 숨겨져 있다고 할아범이 말했다.

대성은 그 돈 줘버리지 왜 이렇게 되도록 했냐고 물었다.

할아범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 줬으면 우리 둘 다 죽었습니다. 그런 놈들은 기분 좋으면 사람 죽입니다."

"안 주면 죽이는 거 아니야?"

"Mark my words, young master 잘 기억하세요, 도련님. 나쁜 놈들, 특히 힘없이 나쁘기만 한 놈들은 기분 나쁠 때는 잘 참는 버릇이 있습니다. 안 그러면 저들도 누구한테 금방 맞아죽거든요. 더구나 도련님은 어려서 그놈들이 기분 나쁠 때는 안 죽입니다. 애새끼 죽이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까 참는 거지요."

 

입이 트인 할아범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새벽녘에 숨을 거둘 때까지, 할아범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가 할아범은 자는 듯이 죽었다.

그 얼굴에 맞은 상처는 많았으나 회한은 없었다.

평생 벙어리로 살다가 죽기 전 두 시간 쯤 수다 떨고 죽은 것만으로도 할아범은 후련해보였다.

혼자 남겨진 대성을 딱히 걱정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신나게 말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럴 틈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대성은 할아범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는 재미있게, 유쾌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큼 할아범이 마지막에 보여준 유쾌함은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리고 최소 2년은 유쾌하게 살았다.

 

***

 

대성은 절구통에 줄을 묶고 당겨 넘어뜨렸다.

절구통 아래에 숨겨져 있는 작은 항아리에 담긴 돈과 할아범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

편지를 읽고서야 꼭 필요한 말은 할아범이 이미 편지에 다 써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에는 풍림원으로 가서 돈을 바치고 제자가 되라는 말이 있었다.

He did as told 대성은 그대로 따랐다.

무공을 배우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고, 그냥 의탁할 곳이 필요해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풍림원에 들어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같이 놀다가 영소에게 이야기 했다.

 

"그래서, 편지에는 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 풍림원은 또 어떻게 알았대? 벙어리 할배가."

 

영소가 호들갑을 떨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에 대성도 여러 개의 답을 이어야 했다.

 

"별 거 없어, 내가 꼭 해야 할 것들만 적혀 있었어. 풍림원은, 그야 난 모르지. 할아범도 죽었는데."

"So, what’s that 그러니까 그게 뭔데?"

 

편지 내용을 묻는 말이다.

 

"일찍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허리 꼿꼿하게 펴고, 음식 먹을 때는 흘리지 말고 양쪽으로 꼭꼭 씹고……..남하고 다투지 말고……"

"때려 치워.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 할 거지! 넌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준 게 없어. 엄마 아빠도 몰라, 글을 언제 배웠는지도 몰라. 뭐든 다 그래! 넌 뭐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영소는 신경질을 내면서 팩 돌아서 가버렸다.

그때나 5년이 지난 지금이나 영소의 성미는 바뀐 게 없다.

하지만 대성은 진짜 더 말해줄 게 없었다.

자기도 꽤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

 

이름을 묻는 꿈이 시작되기 전 2년 동안은 매우 즐거웠다.

할아범이 죽으면서 유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떡도 많이 얻어먹었고 무공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삼년 전, 즐거움은 끝이 났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시 세상이 일그러지는 착각 같은 것이 있은 후부터 꿈은 시작되었다.,

 

"포트 열렸습니다. 접속 완료. 로그인 성공. 다운로드 시작합니다."

 

이상한 이 음성은 이후 꿈에서 이름을 묻는 그 음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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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전생마왕>에서 <무림경영>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무림이 무대이긴 하지만 기업과 장사하는 이야기가 큰 뼈대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전생한 마왕이라 전생마왕이라는 제목을 지은 것인데...

이야기의 전개에 맞춰 <무림경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네이버에서 <무림경영 제1부>로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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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을 죽이는 늑대

 

 

 

투쾅! 떠엉!

용기사들의 창이 토해낸 번개가 지그재그로 날아갔다.

번개가 공기의 벽을 뚫으며 내는 천둥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든다.

삼키로 쯤 앞쪽을 날아가던 그리폰이 번개의 궤적에서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선회한다.

그리폰에 타고 있는 푸른 망토의 기사가 무어라 외치며 그리폰을 재촉한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날아간 번개들은 그리폰에게 완전한 회피를 허용하지 않았다.

! 화악!

열 한 가닥의 번개 중 다섯 개에 직격당한 그리폰의 몸뚱이가 불길에 휩싸였다.

푸른 망토의 기사 등에도 번개 한 가닥이 박히는 것을 용기사들은 확인했다.

화악!

그리폰의 몸뚱이가 불덩이가 되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잡았다!”

일천키로 넘게 추격한 보람이 있었다.”

하르켄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마나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방금 전의 뇌격이 빗나갔으면 놓쳤을 수도 있었다.”

용기사들은 창을 높이 쳐들며 환호했다.

끼아아아!

용기사를 태운 와이번들도 주인의 환호에 동조하며 박쥐 닮은 날개를 힘차게 저었다.

와이번들이 날아가고 있는 아래쪽에는 광활한 숲이 시작되고 있다.

너무 울창해서 검게 보이는 숲은 북동쪽의 통곡산맥에서 시작되어 남서쪽 아스크제국의 강철장벽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대 폭 일천키로, 길이는 무려 삼천키로가 넘는 거대한 숲이다.

퍼엉!

불덩이가 된 그리폰의 거구가 그 숲 어느 곳에 처박혔다.

착지한다! 베오른 변경백의 생사를 확인해야한다!”

지휘자인 부기사단장 월백 남작은 자신의 와이번을 하강시키며 용기사들에게 외쳤다.

부단장님! 저 숲은 바르그헤임입니다!”

부관이며 윙맨인 하르츠경이 월백 남작을 따라붙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월백 남작의 거구가 움찔하는 게 부하들의 눈에 들어왔다.

 

바르그헤임!

괴물 늑대들의 나라!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역전의 전사 월백 남작조차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되었다.

숲이 너무 울창하여 검은 숲이라고도 불리는 바르그헤임...

그 숲의 주인은 너무도 강력하고 무시무시하여 인족의 능력으로는 대적이 불가능하다.

허락 받지 않고 바르그헤임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인족은 단 한명도 없다.

무서울 게 없다 자부해온 용기사들조차 싸늘하게 피가 식는 기분이 드는 이유다.

잊지 마라! 우리에게는 베오른 변경백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멈칫했던 월백 남작이 부하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스스로 결의를 다지는 외침이기도 하다.

황자가 갖고 있는 제국의 상징 드래곤 아크를 회수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가자!”

월백 남작은 와이번의 고삐를 강하게 당기며 외쳤다.

끼아아아!

월백 남작의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며 급강하한다.

어쩔 수 없다는 심정이 된 용기사들은 상관을 따라 검은 숲을 향해 돌진했다.

 

검은 숲 일각에서 연기가 솟구치고 있다.

추락한 그리폰을 태우는 연기다.

용기사들은 연기가 치솟는 곳을 향해 쇄도했다.

그들이 숲의 상공 일키로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낮지만 하늘과 땅을 함께 뒤흔드는 하울링이다.

펜리르!”

용기사들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공포가 단번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용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급히 와이번을 상승시키려 했다.

쩌엉!

그때 그들 주변의 공기가 진동을 일으켰다.

단 일초에 수천, 수만 번이나 대기가 떨렸다.

그 진동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세포 단위로 흔들어서 터트려 버렸다.

비명도 없었다.

퍼억! !

용기사와 그들을 태운 와이번들의 몸뚱이가 물 풍선처럼 터져 허공에 흩어졌다.

유일하게 버틴 것은 월백 남작이었다.

용기사단의 부단장답게 그가 보유한 마나의 양은 아스크제국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월백 남작은 그 막대한 마나로 몸의 주요부위를 보호했다.

덕분에 머리와 몸통이 터지는 건 면했다.

하지만 그 외의 몸 부위들은 폭죽처럼 터져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가 타고 있던 와이번의 몸뚱이도 주요 골격만 남기고 흩어져버렸다.

... 신을 죽이는 포효!”

월백 남작은 지옥같이 검은 숲으로 추락하며 정신을 잃어갔다.

그는 전설로 전해지던 <신멸의 포효>를 직접 경험한 것이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신을 차린 월백 남작에게서 멀지 않는 곳에 그리폰의 시체가 타고 있다.

들소보다 두 배 쯤 큰 그리폰의 시체는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있다.

그리폰의 시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시체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푸른 망토를 두르고 푸른 흉갑을 걸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다.

월백 남작과도 친분이 있었던 베른백작령의 영주 베오른 변경백이다.

베오른 변경백은 하늘을 보는 자세로 죽어있는데 품에는 강보로 감싼 아이를 안고 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등부터 떨어진 것이 베오른 변경백이 발휘한 마지막 충정이었다.

(하르켄폐하의 명령을 반만 수행한 셈인가?)

월백 남작은 흐려져 가는 눈으로 베오른 변경백의 시체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베오른 변경백과 그가 보호하는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은 완수한 셈이다.

아이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바르그헤임에 허락없이 발을 들인 이상 인족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완수하지 못한 사명은 아이가 갖고 있는 드래곤 아크, <용의 가호>를 회수하는 것이다.

용의 가호가 있어야만 아스크제국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르켄폐하의 앞날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허억!)

부르르!

팔 다리가 사라진 월백 남작의 몸뚱이가 문득 경련을 일으켰다.

쏴아!

베오른 변경백 건너편의 검은 숲이 움직이고 있다.

술렁거리는 숲의 상단에 바다처럼 깊고 푸른 한 쌍의 눈이 떠오른다.

푸른 눈을 지닌 검은 숲이 일렁거리며 다가왔다.

숲이 아니라 늑대였다.

얼마나 큰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늑대다.

머리는 하늘 끝까지 닿는 것같고 어깨는 주변의 거목들보다 더 높다.

... 리르!”

월백 남작은 쥐어짜듯 신음을 흘렸다.

괴물 늑대들의 영주,

태양을 삼키는 재앙,

신들의 왕 오딘을 죽인 라그나로크의 주역!

바르그헤임의 주인이기도 한 펜리르를 월백 남작은 직접 보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혼백은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 리르!>

 

모기가 우는 것같이 앵앵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펜리르는 신경 쓰지 않고 베오른 변경백의 시체로 다가갔다.

슈우!

하늘 끝까지 닿을 것같던 거대한 몸뚱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반씩 줄어들었다.

최종적으로 들소만해진 펜리르는 베오른 변경백의 시체 옆에 멈춰 섰다.

베오른 변경백은 죽었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인족은 아직 숨이 붙어있다.

하지만 곧 헬헤임으로 갈 것이다.

아이는 베오른 변경백과 함께 번개를 맞았을 뿐 아니라 무려 이키로 높이에서 추락했다.

베오른 변경백이 죽어가며 보호하지 않았다면 이미 혼이 몸뚱이를 떠났을 것이다.

예외는 없다.”

펜리르의 입에서 인족과 수족 모두에게 통하는 공용어가 흘러나왔다.

바르그헤임에 발을 들인 인족은 죽는다!”

펜리르의 입이 동굴처럼 벌어졌다.

아이의 연약한 육신은 그 입에 삼켜질 것이다.

!

그때 새하얀 번개가 날아들어 펜리르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아이를 삼키려던 펜리르는 움찔하며 옆으로 밀려났다.

무슨 짓이야 마누라?”

펜리르는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짜증이 난다.

눈같이 흰 늑대 한 마리가 펜리르는 본 척도 않고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들소만한 몸집의 새하얀 늑대는 너무 희어서 마주 보기가 힘들 정도다.

하얀 늑대에게서 유일하게 색이 있는 부위는 온화한 노란색 눈동자뿐이다.

그놈은 빌어먹을 인족이야. 방해하지마.”

펜리르는 입으로만 궁시렁대었다.

하얀 늑대는 이 세상에서 펜리르가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대상이다.

하얀 늑대는 펜리르의 짝이다.

아무리 인족이라 해도 핏덩이까지 삼킬 생각을 해요?”

펜리르의 아내 네페리가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이런 못된 짓까지 하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자식이 생기지 않는 거라구요.”

네페리는 아이의 뺨에 묻은 피를 핥았다.

펜리르와 네페리가 부부가 된 후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다.

펜리르는 네페리 이전의 아내들에게서도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식이 생기지 않는 건 불사의 능력을 지닌 신수의 운명이라 체념하고 있었다.

악담을 해도...”

펜리르는 궁시렁거렸지만 딱히 반박은 못했다.

마누라가 자식이 생기지 않아서 얼마나 애태우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 아이를 삼켰으면 당신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을 거예요.”

네페리가 말했다.

후회? 나 펜리르가...?”

어이없어하던 펜리르의 몸이 굳어졌다.

네페리가 아이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발톱으로 걸어 올려서 보여주고 있다.

길이 십오 센티 정도에 초승달처럼 휘어졌으며 한쪽 끝이 날카로운 목걸이다.

어떤 짐승의 이빨인 그 목걸이는 너무 검어 공간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인다.

드래곤 아크!”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제 이 아이가 누군지 짐작이 가시지요?”

네페리는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아이 몸에 다시 내려놓았다.

지크프리트! 그놈은 지크프리트의 후손이었군!”

펜리르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 전 함께 마왕을 쓰러트렸던 맹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람의 정령 실프가 속삭이더군요. 지크프리트가 세운 아스크제국에서 큰 슬픔이 있었다고...”

네페리는 연민의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인족은 필멸의 존재야. 백년도 못 사는 하찮은 것들이 슬픔의 대상이 될 수는 없어.”

펜리르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옛 맹우의 후손을 죽게 놔둘 건가요?”

네페리가 살짝 웃었다.

그놈은 이미 한 발을 헬헤임에 담그고 있어.”

펜리르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헬헤임은 죽음의 여신 헬라가 다스리는 저승세계다.

신조차 죽이는 당신의 가호라면 이 아이를 헬라의 손아귀에서 빼낼 수 있지 않나요?”

?”

펜리르는 펄쩍 뛰어 일어났다.

마누라! 내 가호를 그놈에게 불어넣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잖아!”

평범한 늑대였던 저처럼 불사에 가까운 몸이 되겠지요.”

네페리는 별일 아닌 듯 말했다.

네페리가 오백 년 넘게 살아온 건 펜리르가 가호를 나눠준 덕분이다.

필멸의 운명인 인족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건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펜리르가 마지막 항변을 했다.

늑대면서 신인 당신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잖아요.”

네페리의 반론에 펜리르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아이를 살려서 양자로 삼든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삶을 후회로 채우든지 결정하세요.”

젠장할...”

마누라의 압박을 못 이긴 늑대들의 왕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

지크프리트의 후손이니 네놈을 지크라 부르마!”

펜리르는 죽어가는 아이의 코와 입에 자신의 가호를 불어넣어주었다.

지크 펜리르손! 펜리르의 아들 지크의 이름을 하늘과 땅과 지하의 모든 존재들이 알게 될 것이다.”

아아앙!”

헬헤임에서 빠져나온 아이, 지크 펜리르손이 양아버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힘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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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책 파는 소녀

 

 

겁쟁이가 곽범을 데리고 간 곳은 작고 낡은 책방이었다.

쌓여 있는 책들도 헤어지고 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주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책을 보다가 일어섰다.

"책 사게요?”

목소리가 고왔다.

곽범은 갑자기 가슴이 떨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열여섯, 일곱쯤으로 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복숭아 같은 분홍빛 뺨에는 보드라운 솜털이 있었다.

곽범은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에는 헌 책 밖에 없어요. 대신 요새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어요.”

소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찾는 책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찾아 줄게요.”

곽범은 그 순간 새소리들이 정말 싫어졌다.

새소리는 아무리 사람 비슷하게 해도 긁히는 소리나 카랑카랑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그에 비해 소녀의 음성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봄바람 같기도 했다.

올이 아주 가는 그물에라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와 눈이 부딪혔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부자 되는 책을 사려고...”

"책을 사서 부자가 되려고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부끄러워져서 땀이 났다.

왜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다.

소녀가 가까이 와서 좋은 냄새까지 났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69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권에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고 쓰여 있다고...”

말을 하긴 해도 두서가 없다.

“아! 태사공서(太史公書)!”

소녀는 용케 알아들었다.

"사기(史記)라고도 불리는 태사공서의 마지막 편 화식전 말미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 책 있어요?”

살았다 싶어진 곽범이 급히 물었다.

“저희 책방에도 있긴 하지만 전권은 아니에요. 여러 권이 빠졌어요.”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사기를 읽는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을 텐데... ”

소녀의 고개가 귀엽게 갸웃거렸다.

"부자 되는 책 아닌가요?”

곽범은 어리둥절해졌다.

“부는 복에 달린 거예요.”

소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치농고아 가호부, 지혜총명 각수빈, 열자(列子)라는 분이 지은 책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리석고 귀가 먹고 병들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고,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도 가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곽범이 되물었다.

"사기라는 책에 이런 말도 있다고 들었어요.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그러면 사기와 열자의 주장은 반대되는군요.”

소녀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태사공과 열자는 모두 훌륭한 분들이신데 주장이 반대일 리 있겠어요? 그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랐겠지요.”

곽범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상과 상황이 다르다고 말이 달라지다니...

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책을 읽는다고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은 쉽든 어렵든 제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살아요. 그리곤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소녀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는 곽범에게 물었다.

"손님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해요?”

곽범은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책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많아요?”

소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곽범은 말없이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학문은 하나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소녀가 인내하는 기색을 하며 말했다.

"하나를 알려고 공부하면 두 개, 세 개를 모른다는 것만 알게 되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거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대부분이고.”

"그럼 왜 책을 읽고 배우죠?”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고 생각에 깊이를 만들어줘요. 똑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말하더라도 깊이가 더 해져서 가치가 생겨요.”

"아!”

곽범은 감탄했다.

명쾌한 설명이다.

소녀의 말에는 깊이와 더불어 설득력이 있다.

소녀를 존경의 시선으로 보았다.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모르지요. 혹시 손님은 사기를 읽어야 부자가 될 사람인지도요. 복은 엉뚱한데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곽범은 속으로 정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인가요?”

소녀가 웃었다.

"식당 아니고는 어린 여자를 점원으로 안 써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점원이 되고 싶어요.”

소녀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조금 벌린 소녀의 얇고 여린 입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서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빠르게 말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녀는 곽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채용은 안 되겠어요. 손님은 무슨 일을 칠 것 같아 보여요. 책값 없으면 가주세요.”

 

곽범은 쫓겨났다.

낙담해서 객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겁쟁이가 말했다.

"그래도 사기꾼은 아니다. 그 애.”

 

***

 

객점에 도착하자 입맛 돌게 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의 책방에 들르기 전이었다면 별 생각없이 사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소녀의 얼굴만 눈앞에 그려졌다.

소녀와 뺨을 부비고 싶어졌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도 입을 맞추고 싶다.

 

***

 

밤이 되자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들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겁쟁이가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침상에 멍하니 누운 곽범은 새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전에 몰랐던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을 해왔다.

지금은 달랐다.

두 가지 생각이 뒤섞이고 끊이지 않는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녀에 대한 생각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소녀의 책방으로 달려갔다.

 

***

 

책방 문을 열던 소녀는 곽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왜 왔어요?”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곽범은 소녀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밤새 소저만 생각했어요.”

소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곽범은 소녀에게 다가섰다.

소녀가 경계하며 물러섰다.

"물러나요. 소리치겠어요.”

곽범이 말했다.

"책 하나 줘요. 아주 오래되고 값이 싼 걸로.”

소녀가 안도하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애써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무 책이나 사는 건 의미 없어요. 읽고 배울 책을 사야해요.”

곽범은 한쪽에 있는 붓과 벼루, 연적이며 종이 따위를 가리켰다.

"저것들도 살게요.”

"책만 읽을 게 아닌가 봐요.”

소녀는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곽범의 뚱한 말에 소녀는 멈칫했다.

차가운 말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늘해졌다.

"값이 싼 건 시집밖에 없어요. 글자가 적고 얇으니까요. 골라보세요.”

몇 권의 낡은 시집을 꺼낸 소녀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곽범은 눈에 띄는 책 하나를 손에 들었다.

소녀가 물었다.

"보고 고르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나중에 다 사서 읽을 거니까. 지금은 싼 것부터 읽는 거고.”

곽범의 말에 소녀가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언제 돈 벌어요?”

"소저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곽범은 돈을 꺼내며 대꾸했다.

소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만 애처럼 하는가 했더니 행동도 애 같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곽범도 자기 말이 예닐곱 살 어린애 말과 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이후로 사람들과는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범은 산 붓과 벼루 등을 챙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아요. 난 지금도 짝짓기 할 수 있어요.”

소녀가 충격을 받고 물러섰다.

곽범은 마치 이겼다는 듯이 소녀를 한 번 보고는 책방을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겁쟁이가 귀에 대고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짝짓기 할 수 있다고 한 거?”

"그거야 할 수 있겠지. 우린 두 살만 돼도 다 하는 건데. 내 말은 책하고 벼루로 어떻게 돈 벌거냐는 거야.”

"이걸로 금방 돈 못 벌어. 사람들이 책에 뭘 써놓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 인간들이 공들이는 건 뭐든지 좋은 거잖아.”

곽범도 집이 불타기 전에 글을 배웠고 몇 권의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모두 아이를 바르게 훈육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그나마 기억조차 희미했다.

책다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돈 벌어야지. 그래야 새장도 새로 만들 수 있으니까. 어젯밤에도 열여섯 놈이 더 왔단 말이야.”

겁쟁이가 말했다.

"돈 벌 수 있어.”

곽범은 장담했다.

하지만 겁쟁이는 영 못 미더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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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부자가 되는 법

 

 

깊은 밤이었다.

곽범은 침상의 포근함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들리는 새소리가 신경 쓰여 눈을 떴다.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소리였다.

"문 열어봐. 문 만 열면 아무 해코지도 안할게.”

"들어오기만 해봐라. 곽범이 잡아먹고 말 걸?”

겁쟁이가 창호를 사이에 두고 다른 새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말 좀 해줘. 난 원래 떠날 생각이 없었어. 그냥 좀 날고 싶었을 뿐이야.”

"왜? 내가 좋은 방에서 맛있는 거 먹으니까 부러운 거 아니고? 꺼져. 곽범은 내거야.”

새 한 마리가 돌아왔다.

겁쟁이가 못 들어오게 하는 중이었다.

"곽범이 그랬어. 나 외엔 다 귀찮다고. 성가시게 굴면 잡아먹어버린다고 했어.”

겁쟁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야야 목소리 좀 낮춰! 곽범 깨겠다.”

겁쟁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창호 밖의 새가 애원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곽범이 물었다.

겁쟁이가 놀라서 날개를 파닥거렸다.

창호 밖의 새는 달아날 준비를 하며 대답했다.

"냄새 맡고. 나는 냄새 잘 맡아.”

"냄새 못 맡는 새가 어디 있어.”

겁쟁이가 핀잔을 줬다.

곽범은 대부분의 새가 냄새를 잘 못 맡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탁양앵무가 특이한 거다.

"잘 데가 필요해. 먹을 건 내가 알아서 구할 게.”

창호 밖의 앵무가 애원했다.

"조롱이 필요하면 새장수한테 잡힐 거지 여기는 왜 와? 새장수는 먹이도 줄 거야.”

겁쟁이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통하는 무식한 놈하고 어떻게 살아.”

"그건 네 팔자지. 다들 그렇게 살아.”

“개자식!”

겁쟁이의 코웃음에 창호 밖의 앵무가 욕을 했다.

덜컹

곽범이 창을 열었다.

달아날 듯하던 새가 곽범의 표정을 보고는 방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창을 닫기 전에 두 마리가 더 날아왔다.

그놈들은 멀찍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둥지가 필요해. 알을 아무데나 낳을 수가 없잖아.”

그놈은 암놈이었다.

"우리 중에 반은 여자야. 이제 곧 알을 낳아야 한다고.”

"그전에는 알 안 낳았잖아?”

곽범이 물었다.

암놈 하나가 화를 냈다.

"빛도 없고 먹이도 물고기밖에 없는데서 어떻게 알을 낳아?”

그 암놈은 까칠했다.

감히 곽범한테 이렇게 소리친 경우는 그간 없었다.

곽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는 이런 말 없었잖아.”

"그때는.”

암놈이 말하다가 멈칫한 후에 다시 말했다.

"짝짓기 하기 전이었어.”

다른 암놈이 말했다.

"젠장... 막 하늘로 올라가니까 기분이 죽이더라고. 오랫만이잖아. 그렇게 날아본 게. 그래서 막...”

"막 뭐?”

"막 달려들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난리가 아니었어. 신나게 한 바탕했더니 알집이 무거워지더라고.”

곽범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 겁쟁이가 말했다.

"새잖아. 당연한 거야.”

암놈이 새침하게 받았다.

"봄이잖아.”

곽범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화하는 법이며 기르는 법이 적혀있다.

하지만 곽범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동굴에 있을 때는 무공보다 재미난 게 없었다.

"나도 새장수 해야 할까?”

곽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해. 너도 짝짓기 해야지.”

합류한 놈들 중 한 놈이 별 생각없이 말했다.

곽범은 그놈은 노려보았다.

그놈은 움찔해서 눈길을 피했다.

그리곤 겁쟁이한테 곽범이 왜 그러는지를 눈으로 물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이판하고 달라. 사람 같이 살고 싶은 가봐.”

"새 주제에 사람은 무슨.”

암놈 하나가 말하다가 부리를 닫았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 맞네. 같이 말하다 보면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려.”

기막힌 소리였지만 납득이 되었다.

제일 먼저 왔던 새가 곽범에게 애원했다.

"네가 우리 주인해라. 응. 말 잘들을 게. 원하면 알도 나눠줄 수 있어.”

겁쟁이가 생각을 바꿨는지 거들었다.

"품에 날아든 새는 쫓는 법이 아니라더라.”

새가 할 법한 소리도 아니었다.

"알아서 해.”

귀찮아진 곽범은 침대에 가서 누웠다.

허락받은 앵무새들이 깃털 날리지 않게 통통 뛰어와서 침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새들은 겁쟁이가 올라앉았던 장대에 나란히 앉았다.

잠이 깨버린 곽범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사람답게 사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별 거 없었다.

좋은 것으로 가득한 인간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는 것이었다.

예쁜 여자들도 많이 거느리고 싶었다.

 

***

 

아침이 밝은 후에 보니 방안은 새 노린내로 가득했다.

열었다가 대충 닫은 창문으로 십 여 마리가 더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놈 밑에는 새똥이 떨어져 있었다.

곽범이 노려보자 그놈이 변명했다.

"자다가 깜박했어. 새장인줄 알고...”

새들은 겁쟁이만 남고 나머지는 곽범이 방을 나설 때 창밖으로 날아갔다.

 

방을 나서기 전에 몸을 씻고 동경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어 띠로 묶었다.

이년이나 빛을 보지 않고 살아서 피부가 분칠한 듯 하얗다.

피부는 희지만 새들과 싸우면서 철포삼을 익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흰 피부가 올록볼록해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흰 돌이나 옥을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것같다.

아랫층에 내려가니 객점 주인이 보고 말했다.

"마마를 아주 곱게 앓았구만.”

곽범은 맛있는 냄새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주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다른 손님이 먹는 음식을 가리켰다.

"저거 주세요.”

"소고기 라면?”

"예.”

곽범은 빈자리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여러 가지 요리 냄새가 황홀했다.

행복했다.

소고기 라면이 나왔을 때도 냄새부터 실컷 마신 후에 먹었다.

곽범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어쩌면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어요?”

"다른 것도 다 맛있어? 이것도 먹어볼래?”

곽범에게 돈이 있는 줄 아는 주인은 거푸 권했다.

곽범은 주는 대로 먹었다.

겁쟁이도 식탁 위의 음식을 주워 먹었다.

 

***

 

아침을 먹는다는 게 점심 때가 될 때까지 먹어 버렸다.

곽범은 자기도 객점을 가져서 먹고 싶은 건 다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객점을 차릴 돈이 필요했다.

 

시장과 점포를 돌면서 어느 곳에 가든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 갖고 싶었다.

노리개들은 예뻤다.

붉고 푸른 비단 옷들은 매혹적이었다.

호통 치면서 일꾼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니 사람을 부리고 싶었다.

멋진 마차를 타고 가는 여인을 보니 마차 채로 다 가지고 싶었다.

"다 좋고 다 가지고 싶지?”

겁쟁이가 어깨에 올라 귀에 대고 조잘거렸다.

"촌놈인거 티 다나.”

"다 갖고 싶다.”

곽범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둑이나 강도는 싫다며? 그럼 부자가 되면 돼. 아니면 높은 벼슬아치가 되거나.”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머리를 저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곽범은 성 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들이 하는 일과 돈이 오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 중에서도 차림새가 좋고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살폈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한 두 명이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무리를 따라가니 음악소리 흘러나오는 기생집이나 요리집이 나왔다.

밖에서 듣기만 해도 흥겨웠다.

예쁘게 분단장한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애교부리는 콧소리가 가슴을 들끓게 했다.

겁쟁이는 곽범이 기생집에 들어갈까 봐 막았다.

거기 들어가고 나면 가진 돈 홀라당 다 털릴 거라며.

 

사람들은 따라 다녀 보니 그 중 반 이상의 행선지가 책방이었다.

그 바람에 책방 앞을 자꾸 어슬렁거린 꼴이 되었다.

곽범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람이 되려면 배워야 한다.

부자가 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배워야 한다.

책방 앞을 떠나지 않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간혹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들이 보따리를 갖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오는 그 사람들에게 보따리는 없었다.

(아. 가난해서 책을 팔러 나오는 사람이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책을 사서 부자 되는 법과 높은 사람 되는 법을 배우려 했다.

그랬는데 책으로 배웠음에도 가난해져서 책을 파는 사람이 있다.

뭔가 잘못 되었다.

자칫하면 돈만 날려먹을 것 같았다.

책을 읽기만 하면 부자가 되어 즐겁게 살 거라 생각했었다.

그 계획에 먹구름이 끼어버렸다.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곽범은 칼이 눈앞에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되지 못하고 돈만 날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쉽사리 책방 앞을 떠나지 못했다.

부자가 되려면 글을 읽고 배워야 한다.

더 좋은 방법은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책방으로 들어갔다.

"부자 되는 책 있어요?”

나이 지긋한 점원에게 대뜸 물었다.

점원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곽범의 얼굴을 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책은 없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말한 책은 있단다.”

점원의 말에 곽범의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점원은 책 한 권을 골라 펼치더니 한 구절을 읽었다.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곽범은 매우 기뻤다.

옳은 말이라는 걸 듣자마자 알았다.

"그 책을 사고 싶어요.”

"이 책은 69권 중의 마지막 권이야. 전부 다 사야해. 이것만 봐서는 아무 소용없어.”

점원은 책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예요?”

곽범은 책값을 물었다.

"책은 비싸다. 얼마 있는지 말하면 그에 맞춰 책을 주마.”

점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기네.”

곽범은 이마를 찌푸렸다.

점원이 의외라는 듯이 곽범을 다시 보았다.

곽범은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겁쟁이한테 들은 대로라면 이판은 겁탈과 사기, 방화를 밥 먹듯 하던 놈이었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 했다.

사부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기를 키웠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팔 년 넘게 가르친 제자를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생긴 건 촌놈인데 영 촌놈은 아닌 모양이네.”

점원이 웃었다.

"얼마 있어? 싸게 줄 테니 말해봐.”

곽범은 주머니에서 아침에 밥값으로 썼던 만큼의 돈을 꺼냈다.

"겨우? 이거면 한 권도 못줘.”

점원이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가 곽범의 귀에 대고 제제거렸다.

"그냥 가자. 허여멀건 놈들이 말은 더 번지르르해. 넌 저놈을 말로 못 이겨.”

곽범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돌아 나왔다.

점원 뒤에서 돈 더 가지고 오라고 소리쳤다.

겁쟁이가 말했다.

"여기 말고 다른데도 있어. 전에 지나가면서 한 번 본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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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사람이구나.

 

 

봄이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산비탈은 진달래와 철쭉이 뒤섞여서 울긋불긋했다.

숲을 벗어나 길로 들어섰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갈림길에는 인적이 없다.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풀을 따라가며 뜯었다.

곽범은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눈길이 자꾸만 십지암쪽으로 향했다.

팔년을 산 곳이다.

정이 들었다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까?”

여전히 겁이 나서 새장으로 못 돌아가는 겁쟁이가 새소리로 물었다.

"도망 안가. 절대 안가.”

즉답이 없자 겁쟁이는 거듭 다짐했다.

곽범은 허락하고 길가의 바위에 앉았다.

산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사부를 따라 왔던 길이다.

그 길 아주 먼 어디에는 자신이 태어난 집도 있다.

물기 없는 바람과 온화한 햇살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본 적 없는 낮잠이 밀려왔다.

봄풀 냄새와 여린 나뭇잎이 뿜어내는 초목의 숨결이 폐부를 씻었다.

새들도 햇살을 즐겼다.

새장 안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햇볕을 쬐려 다투었다.

"나는 사람이구나.”

곽범은 짧아진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을 보며 생각했다.

새들과 달리 자신의 팔에는 깃털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경서의 내용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꾸지람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났다.

몸은 자라서 어른처럼 커졌는데, 그간의 날들은 하룻밤의 꿈인 듯 여겨졌다.

곽범은 바위에서 일어나 새장 문을 열었다.

"가라.”

"어디로?”

새 한 마리가 뚱하게 물었다.

"가고 싶은 대로.”

"집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다른 새가 물었다.

곽범은 공력을 돋우어 새장을 뜯어버렸다.

콰드득

철사를 꼬아 만든 새장이 짚이나 왕골인 듯 찢어졌다.

새들은 곽범이 새장을 우그러뜨려 땅에 묻는 동안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어떤 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동동 뛰었다.

"새장이 얼마나 좋은데. 우리는 새장 없으면 잠도 못자.”

보통의 새들에게 새장은 가두는 도구다.

동시에 천적들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다.

그러나 범도 뜯어먹는 탁양앵무들에게는 천적이 없다.

새장 없으면 못 잔다는 건 침대 없으면 못 잔다는 투정과 같은 소리다.

"조마조마해서 잠이 안와.”

한데서 어떻게 잘 수가 있어?”

볼 매인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새가 불만인 건 아니었다.

"조금만 날고 올게.”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눈치 보던 놈들 여럿이 뒤따랐다.

그들의 신나는 비행이 다른 새들을 자극했다.

후두둑 쏴아

본능에 이끌린 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곽범은 겁쟁이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새장이 없으니 짐도 없다.

품에는 금왕경과 돈주머니만 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은 제법 거뭇하다.

커진 몸에 걸친 옷은 낡고 깡동하다.

영락없는 미친 사람 행색이다.

"다 어디 갔어?”

겁쟁이가 돌아와서 물었다.

"떠났다.”

"잡아먹은 건 아니지?”

겁쟁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밖에는 먹을 거 많아.”

"... 난 또.”

겁쟁이가 안도하며 정찰 보고를 했다.

거기엔 누가 살고 있었어. 빡빡머리 중이야.”

곽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부다.

사부가 돌아와 있다.

사부는 올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었다.

진짜 중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십지암에 머물 때는 승복을 입은 중이었다.

사부에게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먹이고 입히고 무공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죽이려 했다.

사부와 제자로서의 인연은 그때 끝이 났다.

겁쟁이가 주위를 돌면서 물었다.

"나도 가야해?”

".”

"난 같이 가면 안 돼?”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쟁이는 한 번 새장을 나온 후 계속 밖에 머물렀다.

곽범의 비위를 맞추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들었다.

겁쟁이가 다시 물었다.

"따라가면 나 잡아먹을 거야?”

"금수도 정이 있나?”

곽범은 피식 웃었다.

마음이 한결 같기는 금수가 사람보다 나을 걸. 원앙이나 기러기는 평생 짝을 배신하지 않아.”

겁쟁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같이 가자. 넌 세상 물정도 모르잖아. 난 잘 알아.”

뻐기는 겁쟁이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곽범은 순순히 인정했다.

겁쟁이가 매우 좋아했다.

높이 날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앞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와서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수다도 떨었다.

곽범은 걷는 것이 좋았다.

오랫동안 걷지 못했다가 땅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더 좋았다.

 

***

 

큰 길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겁쟁이는 새소리로만 말했다.

곽범은 거지꼴이다.

사람들은 새 한 마리 데리고 있는 소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범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마다 살펴보았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곽범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뭉클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도 그들 중 한명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계속 걸어서 저녁 무렵에 하호성에 도착했다.

곽범은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묻혀서 성문을 지났다.

겁쟁이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옷부터 사서 입어. 거지들이 동무하자 들겠다.”

"어디로 가야하지?”

"저 앞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포목하고 옷 파는 상회들이 있어.”

겁쟁이는 하호성을 잘 알았다.

곽범은 겁쟁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옷 사시게?”

점원이 곽범의 행색을 못마땅해 하며 물었다.

".”

"돈은 있나?”

곽범은 돈이 든 주머니를 툭 쳐서 소리를 냈다.

점원은 곽범의 키에 맞춰서 잿빛 장포를 건네주었다.

"이거면 맞을 것 같은데.”

겁쟁이가 새소리로 말했다.

"얼만지 물어봐.”

 

***

 

곽범은 겁쟁이의 도움으로 바가지를 쓰지 않고 신발도 샀다.

입고 있던 작아진 옷은 팔아서 빗과 거울, 머리에 두를 건을 샀다.

그리고는 객점을 찾아갔다.

가로에 있는 주루와 객점에서 풍기는 음식내음이 곽범의 혼을 뺐다.

그러나 객점에 들어가서는 요리 이름을 몰라서 만두만 시켜 먹었다.

황홀해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객실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인간 세상에 온통 좋은 것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는 곽범이 탁자에 놓은 돈주머니를 펼쳐서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아껴 쓰면 세 달은 버티겠다. 다 떨어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해.”

"어떻게?”

묻고는 웃었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새한테 돈 버는 방법을 묻는 건 우스웠다.

겁쟁이가 돈주머니를 조이고 침대로 나아왔다.

"방법이야 많아. 예전에 이판이 했던 것처럼 새를 파는 게 제일 좋고.”

이판은 곽범에게 죽은 새장수의 이름이었다.

"수입이 괜찮아. 하루 한 두 마리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어. 우리처럼 예쁜 새는 비싸서 부자들만 사가거든.”

"이판이 너희들을 팔았어?”

"당연히 팔았지. 새장수인데.”

팔려갔었는데 어떻게 이판과 계속 함께 있었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팔려가서 좀 놀다가 죽은 척하면 묻거나 갖다버리거든. 그때 이판에게 다시 돌아가는 거야. 금방 돌아가야 할 때는 새장을 부수면 되고...”

곽범은 그림이 그려졌다.

시장에서 새를 팔면 그 새가 돌아오고,

다시 팔고 다시 돌아온다.

그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사기네.”

"그게 싫으면 내가 다른 새들 잡아오면 돼. 넌 그걸 팔고. 다른 새들은 밤눈이 어두워. 숲에 들어가서 움켜쥐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해.”

곽범은 딱히 내키지 않았다.

새장수가 했던 짓을 따라하는 것 같아 꺼리낌이 있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이가 있으면 새 점을 치는 것도 괜찮은데. 어려서 수입이 적을 거야.”

"그런 거 말고는?”

겁쟁이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기 부잣집들 몇 군데 알아. 밤에 몰래가서 패물 같은 거 슬쩍 가져오는 것도 괜찮아. 갔다 올까?”

"그건 도둑질!”

"새한테 도둑질이 어디 있어? 보이면 따먹고 아무거나 가져와서 둥지에 깔고 하는 거지.”

곽범은 침대에서 몇 번 뒹굴고 일어나서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평평한 마루다.

겁쟁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기억났다. 어릴 때 바닥이 시원해서 뒹굴다가 옷 더러워진다고 혼났다.”

"그래서?”

"이렇게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방에서 살고 깨끗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못하면 혼나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거야.”

"혼나야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그러면 나도 사람이다. 얼마나 혼이 많이 났는데.”

겁쟁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투였다.

"뭐할지 천천히 찾아보겠다는 말이야.”

곽범의 말에 겁쟁이는 한숨을 쉬는 시늉을 했다.

"넌 어느 쪽이야?”

"뭐가?”

"네가 좋아하는 건 음식이야 여자야 돈이야? 아니면 좋은 집이야?”

곽범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이판은 여자를 제일 좋아했어.”

겁쟁이가 말했다.

"금왕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새장수였다더라. 새는 돈 많고 예쁜 여자들이 주로 사가거든. 여자들은 예쁜 새하고 놀면 더 예뻐 보인다는 걸 알아.”

"그렇구나! 예쁜 여자들을 매일 보겠다.”

곽범의 음성이 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길이 좁아졌다.

겁쟁이는 곽범의 얼굴을 가까이 와서 보며 말했다.

"이판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오면 한 쌍 중에서 꼭 한 마리만 팔았다더라. 그런 후에 밤에 남은 한 마리만 들고 나가는 거야. 짝을 부르면서 그 새가 울면 팔려간 새가 듣고 같이 울어.”

"! 그러면 그 새를 몰래 찾아오는구나.”

"... 바보야. 그럴 거면 예쁜 여자한테만 한 마리를 팔 이유가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여자가 이판의 짝짓기 상대가 되는 거야.”

겁쟁이가 말을 이었다.

"이판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가 있는 방에서 먼 곳에 불을 질러. 사람들이 불 끄려 몰려갈 때 이판은 그 여자를 붙잡아서 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짝짓기를 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데, 이판은 그때 여자가 제일 예뻐 보인다더라.”

"그거 겁탈이다.”

곽범은 사부를 만나 따라가기 전에 거리를 떠돌았다.

그때 거지들한테 여자가 겁탈 당하는 것도 봤다.

겁쟁이가 말했다.

"이판은 새라니까. 새한테 겁탈이 어디 있어. 마음에 들면 달려들어서 붙잡아 끝장 보는 거지. 놓치면 병신이고.”

여자, 겁탈, 예쁜 미녀.

곽범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저었다.

"난 사람이야. ... 짝짓기에는 그 이상 뭔가 있을 것 같아.”

"있지. 암컷이 알 낳고 새끼 까는 거. 결국 새끼 까는 거면서 인간처럼 별스럽게 구는 것도 없어. 그냥 한 번 하고 알 낳으면 되는 건데.”

"난 별스러워야겠다.”

곽범이 단언했다.

"짝짓기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야. 아까 길에서도 예쁜 애들한테 달려들어서 막 만지고 짝짓기 하고 싶었어.”

"내숭이다.”

겁쟁이는 포르르 날아올라 옷을 거는 장대에 내려앉았다.

평평한 땅은 움켜잡을 것이 없어서 불편했다.

곽범은 겁쟁이와 자기의 차이를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겁쟁이는 금수이고 곽범 자신은 사람이다.

남녀의 차이와 이성에 대해서도 배운 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안다.

옳고 그름을 모두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아는 게 당연했다.

시비를 가리는 것도 이성에 대한 것처럼 본능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이 할 짓과 아닌 것이 구분되었다.

더불어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 세상으로 돌아오니 기억났다.

"다듬어야 옥도 그릇이 되고 배워야 사람은 도리를 알게 된다.”

곽범은 자기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숲을 배웠다.

이제는 인간들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한다.

인간들의 세상을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모래나 바위 위에 누워 자도 불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평한 바위가 편했어도 침상의 부드러운 이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동물들의 고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오늘 먹은 만두 한조각보다 못했다.

길에서 본 여자들은 산 중의 어떤 꽃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인간 세상은 무한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곽범은 이 좋은 것을 왜 안 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몸속에 공력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끓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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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신공을 완성하다.

 

 

곽범은 열여섯 살이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도적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혼자 살아남았다.

외갓집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2년 동안 거지로 살았다.

그러다가 사부를 만나 산으로 왔다.

글은 일찍 배워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 세상의 이치 같은 건 몰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기 때문이다.

곽범에게 인의도덕이며 군자 같은 말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세상과 연결되는 점이 없었다.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것도 밥 먹기 전에 손 씻어야 한다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는 건 부모가 죽었으니 뜬 구름 잡는 소리였다.

곽범이 겪은 2년의 세상살이와 8년의 산중 생활은 똑 같았다.

사람도 짐승이고 짐승도 짐승이다.

도리를 가져다 따질 대상이 아니다.

그냥 서로가 할 일을 하는 존재들이다.

사냥을 하거나 당하거나,

부리거나 부림을 당하거나.

곽범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도리였다.

무공은 그런 도리들 중에서도 높은 도리다.

말보다 느끼고 깨닫는 게 더 많다.

오히려 말하려면 더 어렵고 힘들다.

 

새장 아래에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금왕경(禽王經)이라는 책이 나왔다.

금왕(禽王) 오신,

날짐승들의 왕이라 불리던 자가 남긴 책이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리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새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법이 적혀 있는 게 아니다.

새들에게 외공(外功)을 가르치는 법까지 있었다.

특별히 조제한 약을 먹이고 훈련시킨다.

그러면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놀랍도록 단단해진다.

탁양앵무라는 새들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 이유다.

새의 말을 알아듣는 법도 있었다.

새들에게 사람 말을 가르칠 수도 있다.

금왕경의 내용은 읽을수록 신기했다.

또 이상하기도 했다.

곽범이 보기에 금왕 오신의 무공은 형편없었다.

금왕경에는 철포삼(鐵袍衫)의 수련비결이 적혀 있었다.

철포삼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의 일종이다.

외공들 중에서도 손을 꼽는 절기다.

철포삼 수련비결 뒤에는 금왕 오신의 주석이 달려있다.

그 주석에 오류가 상당했다.

곽범은 머리가 명료해진 덕분에 오류들을 알아차렸다.

주석의 수준으로 보아 금왕 오신의 철포삼 성취는 6성 정도에 그쳤다.

곽범은 철포삼의 구결과 미흡한 주석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런 후에 6성에 그친 금왕의 이해를 확장시켰다.

칠주야에 거쳐 노력한 끝에 철포삼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었다.

 

***

 

"우린 물새가 아니야.”

새장에서 물고기를 쪼던 새 한마리가 들으라는 듯이 제제 거렸다.

"물고기만 먹고는 못 산다고.”

곽범이 말했다.

"나도 그래.”

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새 고기가 맛있었어.”

곽범은 입맛을 다셨다.

새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새장 밖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곽범과 새들에게 제공해온 겁쟁이는 더 겁을 냈다.

곽범이 새장 열기 귀찮아서 자기부터 먹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곽범은 겁쟁이에게 도망가면 새장 속에 있는 두 마리를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겁쟁이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추적당하다가 죽을 게 뻔했다.

"난 물고기 좋아해.”

새장 속의 어떤 놈이 큰 소리로 말하며 부리로 생선의 머리를 쪼았다.

새들은 여섯 살 때의 곽범 같았다.

천방지축이고 아는 것 같으면서 물어보면 바보다.

그러면서도 입은 주워들은 소리를 지껄이느라 조잘거렸다.

그리고 흉악했다.

세상에 못 먹는 것이 없었다.

풀과 열매는 물론이고 벌레와 고기를 먹었다.

심지어 소화를 돕기 위해서 돌도 쪼아 먹었다.

탁양앵무는 이름 그대로 양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금왕이 번식시키고 훈련시켜서 천적이 없는 포식자가 되었다.

곽범은 철포삼을 정리하느라 묻지 못했던 걸 물었다.

"내가 죽인 그놈이 금왕이야?”

"금왕은 무슨.”

"금왕이 살았으면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자식은 어쩌다가 금왕한테 걸려서 제자가 된 놈이야.”

"철포삼을 익힌 것 같지 않던데.”

"크하하하하. 그놈이 철포삼을 익혀?”

“이판은 인내심이 없었어. 십 년을 단련해도 부족한 철포삼을 무슨 재주로 익혀.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들이 의기양양해서 재잘거렸다.

새장수의 이름은 이판이었다.

"그래도 이판은 새소리를 잘 알아들었어. 아마 스무 가지도 넘게 알았을 걸? 그 때문에 금왕의 제자가 됐지만.”

"너희들 철포삼 별거 아니잖아. 입에 넣고 씹으니 툭 터지던데.”

곽범이 새들을 자극했다.

한 마리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대답했다.

"사람 턱 힘이 얼마나 센데. 양쪽 어깨 힘보다 더 셀 때도 있어.”

"나한테 씹히고도 터지지 않을 놈 누가 있어?”

새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 시험하는 거 아니야.”

곽범은 새장 문을 열었다.

새들은 의아해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들의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동굴 천장에 나있는 구멍으로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새들은 지난 칠 일동안 곽범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았다.

곽범은 하루 두 시간 정도 동굴 벽을 옆으로도 거꾸로도 달렸다.

날래기가 자신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섣불리 달아나려 했다가는 잡힐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곽범 뱃속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곽범은 새를 먹을 줄 아는 놈이었다.

새를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새를 깃털 채 불에 그슬려 먹는다.

그슬린 새의 깃털은 양념이 되어 새고기에 맛을 더한다.

정말 좋아하는 인간들 중에는 털 채로 새를 씹어 먹고 찌꺼기만 뱉어버린다.

곽범은 그것도 하지 않고 다 삼키는 놈이다.

새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겁쟁이는 곽범의 겨드랑이 근처로 숨었다.

"뭐하자는 거야?”

마침내 새 한 마리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시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 했잖아.”

곽범은 옷을 벗어서 바위 위에 올렸다.

"나를 쪼아봐.”

"헹. 그래놓고는 쪼았다고 잡아먹으려고.”

“안 속아. 안속는다구.”

"쓸모없네. 다 잡아먹을까?”

곽범이 중얼거렸다.

순간 한 마리가 뛰쳐 나오며 외쳤다.

"내가 할게.”

새떼가 와르르 쏟아져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새의 부리와 발톱을 느껴지면 공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쪼면 받아서 튕겼다.

백 여 마리나 되는 새들이 전신에 달라붙고 튕겨나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부분은 살이 뚫리고 피가 쏟았다.

새들은 한동안 고기를 못 먹었었다.

피 맛과 생살에 흥분한 새들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고통으로 숨이 멎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곽범은 버텼다.

대처가 늦어서 상처를 입은 부분에는 더 많은 공력을 보내 치료했다.

곽범의 철포삼은 공력을 바탕으로 한 철포삼이었다.

철포삼은 겉을 단련하여 구리로 된 내장과 쇠로 된 뼈를 가진다는 외공이다.

그 철포삼을 뒤집어서 공력을 겉으로 보냈다.

피부를 강화하며 공력의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했다.

시간이 지나며 곽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부리가 닿기 전에 먼저 느끼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면 곽범의 공력은 피부가 부리에 찍히지 않게 단단해졌다.

단단해지자마자 새의 부리를 튕겨냈다.

다만 피는 많이 흘렸고 공력은 소모가 심했다.

"그만.”

곽범이 선언했다.

대부분의 새들이 멈추고 물러났다.

두 마리만은 비어있는 곽범의 가슴과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 맛에 눈이 까뒤집힌 것이다.

곽범은 양손으로 한 마리씩 잡아서 차례로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도독. 팍팍.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새들은 바닥에 내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공포에 떨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새들은 조용히 새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좌정하여 자기 몸을 관조하는 곽범은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철포삼을 외공 아닌 내공으로 펼치다 거두었다.

전신이 거문고의 현처럼 통통 튕겨지고 있었다.

몸 곳곳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같았다.

몸속의 공력은 이제 길을 아는 것처럼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치유와 반탄과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달려들어 쫀 곳을 또 쪼고 할퀴는 흉악한 새들에 공력이 반응한 것이다.

새들의 공격은 그쳤지만 공력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몸속의 새떼라도 된 것처럼 날 뛰었다.

심법을 운용하여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곽범은 자기의 몸이 더 작아지고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굴 벽을 달려보니 공력을 더 적게 쓰면서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내공과 외공이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

 

새들을 이용한 수련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곽범이 새들에게 지시하는 말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새들은 그 말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곽범이 놀 때는 무슨 말을 하든 괜찮았다.

곽범은 권각법도 새들을 이용해서 연습했다.

그가 배운 것은 다리 힘을 기르고 팔 힘을 기르는 매우 기본적인 훈련 방법뿐이었다.

공방은 없었다.

곽범은 새들이 공격하는 것을 손발로 막는 훈련을 했다.

아무 격식도 없었으나 하는 중에 점차 길이 생겼다.

동작에 따라서 공력이 이동한다.

공력에 따라 동작에 힘이 가해진다.

그것을 느낀 후에는 저절로 공방의 길이 만들어졌다.

금왕경을 읽으면서 새소리를 알아듣는 법도 배웠다.

곽범은 자기가 이전에도 새소리는 좀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2년 동안 동굴을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간 세상이나 숲이나 동굴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새들은 두 번 털갈이를 하면서 울긋불긋하던 색깔이 하얀 물새처럼 되었다.

어떤 놈은 물고기만 먹으니 물새가 되어버렸다고 투덜거리며 물새처럼 끼룩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동굴이 좁고 갑갑했다.

2년 전 봉우리 근처 샘물에서 보았던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숲을 달리며 곰의 노랑내와 딸기의 새콤한 맛이 그리워졌다.

고운 꽃도 보고 싶고, 보드라운 것도 만지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맡고 싶었다.

곽범은 새장을 지고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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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피와 살을 먹는 새

 

 

곽범은 누운 채 도끼를 들었다.

힘을 다해 새장수의 가슴을 찍었다.

퍼석! 퍽!

도끼는 급히 날아든 새들과 부딪혀 빗나갔다.

새들의 몸뚱이가 쇳덩이 같다.

믿기 힘든 단단함이다.

"뼈도 남기지 말고 쪼아 먹어.”

새장수가 중얼거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손으로 눈과 귀를 가렸다.

새들의 부리는 송곳같이 날카로웠다.

쪼는 대로 살이 파이고 피가 튀었다.

그때마다 까무라칠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나마 부상은 대부분 치유된 상태다.

새장수의 공력을 끌어들여 신공을 운용한 덕분이다.

주로 다친 곳에 공력을 보냈었다.

곽범의 공력이 가는 곳을 새장수의 고강한 공력이 따라왔었다.

새장수의 공력은 곽범의 공력을 흉내 내며 상처를 치유했다.

곽범의 몸에는 일시적이지만 새장수의 거의 전 공력이 들어와 있다.

그 공력들은 곽범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곽범은 그 힘을 빌어 껑충 뛰어 올랐다.

도망 가야한다.

이 일대의 길은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새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곽범은 팔다리가 둘씩 밖에 없다.

새들은 어찌 보면 새장수보다 더 똑똑했다.

곽범의 온몸에 달라붙어 쪼고, 내동댕이치고, 바닥에 굴렸다.

곽범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몸은 삽시에 피를 내뿜고 있었다.

"눈알을 빼버려. 눈알을. 고 새까맣고 교활한 눈알부터.”

새장수가 소리치고 또 피를 토했다.

곽범은 공력을 피부로 돌려서 새들의 부리를 견디려했다.

무리였다.

이제 겨우 다친 곳으로 공력을 보내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공력은 피부를 단단하게 하기 보다는 상처를 치유하는 쪽으로 저절로 쓰였다.

새들이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상처에 부리를 박고 피를 마시는 놈도 있다.

곽범은 고통보다도 미물들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더 견딜 수 없었다.

목을 쪼으려 파고드는 새를 턱으로 튕겨내었다.

튕겨나가던 새의 날개죽지가 입에 닿았다.

곽범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새를 물어버렸다.

새의 몸뚱이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턱에 힘을 주니 입안에서 퍼석 터져버렸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날카로운 발톱이 입천장과 목을 긁었다.

개의치 않았다.

비어있던 위장이 든든해졌다.

곽범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한손으로 어깨에 붙어 살을 뜯는 새를 잡아챘다.

그놈을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은 후 삼켜 버렸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막히지는 않았다.

네 마리를 연거푸 잡아먹었다.

새는 사람을 먹고 사람은 새를 먹는 혈전이 반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마침내 곽범이 이겼다.

열일곱 마리의 새를 문자 그대로 털도 뽑지 않고 씹어 삼켰을 때였다.

곽범은 도끼날을 새장수의 목에 걸치는데 성공했다.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정말 단단하다.

도끼에 찍혀도 다치지 않는다.

그 새들을 곽범은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걸 본 새장수의 마음은 탐욕으로 들끓었다.

곽범의 무지막지한 힘이 방금 경험했던 신공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 힘이 자기의 공력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새장으로.”

곽범은 피가 흐르는 손으로 열여덟 마리째 새를 잡으며 말했다.

"새장으로.”

피를 뒤집어 쓴 곽범의 모습에 질린 새장수가 급히 말했다.

파다닥 쏴아

새들은 새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새들의 몸은 곽범의 피에 젖어 붉었다.

날개 짓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곽범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새장을 걸어 잠궜다.

새장에는 백 마리 정도의 새가 들어있다.

새들은 곽범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날개짓을 했다.

"비급 있지요?”

새장을 등지고 새장수에게 물었다.

"무슨 비급? 나는 무공이 약해. 비급 갈은 거 없어.”

"이 새들을 훈련시킨 비급!”

"비급 없다. 거짓말인 거 같으면 내 몸을 뒤져봐.”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가만있으면 너도 출혈이 심해서 죽어. 나한테 약이 있다.”

곽범은 새장수에게 걸어갔다.

걸음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새장수가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이 약이 부리에 쪼인 상처를...”

곽범은 도끼로 새장수의 목을 찍었다.

텅텅

잘린 머리가 몇 번 튀었다가 멈췄다.

머리를 튕겨낸 피가 여전히 뛰는 심장의 힘으로 추욱, 추욱 뿜어졌다.

"필요 없어요.”

곽범은 새장수의 손에 들린 파란 약병을 옆에 두고 품을 뒤졌다.

약병은 두 개가 더 나왔다.

하나는 노란 약병이고 하는 붉었다.

옆구리에는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호패와 함께 걸려 있었다.

새들은 새장에서 날뛰며 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곽범이 새장 문을 새들이 열수 없도록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먹지 못할 큰 짐승을 잡았다.

곽범은 곰도 잡고 표범도 잡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지금처럼 큰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화가 몹시 났다.

사부에 대한 원한이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새장수를 보내 시체를 처리하게 한 걸 보면 사부는 다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하늘에 빠질 뻔 한 후로 명징해진 곽범의 사고가 말해주고 있었다.

 

곽범은 주방에 있는 물로 몸의 피를 씻어냈다.

새가 쪼았던 상처에서는 새살이 차오르고 있다.

올록볼록 작은 밥풀떼기꽃이 새겨진 것 같았다.

새가 쫄 때마다 공력을 보내서 치료했었다.

그러다보니 경맥들이 몰라보게 넓어졌다.

내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근육과 피부가 회복되었다.

(사부는 이렇게 쉬운 것도 내가 빨리 못 깨달아서 화난 것일까?)

곽범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산과 숲은 곽범 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가 찾아오지 못할 곳이 있다면 바로 이 산속뿐이다.

또 무공에 대한 이해가 터져 나와 정리하고 다듬을 장소도 필요했다.

곽범은 새장수의 새장과 그의 봇짐을 지고 이전에 발견했던 숲속 동굴로 갔다.

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는 곳이었다.

 

***

 

곽범은 숲속에 있는 모든 동굴은 알고 있다.

그 중 가장 은밀한 동굴을 찾아갔다.

그 동굴은 숲속을 흐르는 계곡물이 크게 휘도는 곳에 있었다.

입구가 그늘져서 물 건너편에서 보면 작은 바위처럼 보였다.

동굴 안은 제법 넓고 깊다.

계곡물 한 가닥이 동굴을 통과한다.

모래톱과 마른 땅도 있다.

빛은 오전에만 천장의 좁은 바위틈 새로 잠시 들어왔다.

곽범은 바위를 가져와 동굴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지난 8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른다.

단지 사부가 와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가 좋았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혼자서 절벽을 타고 숲을 뛰어 다녔다.

수련이었지만 즐거운 놀이기도 하였다.

짐승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돌을 쌓아서 작은 성벽도 만들면서 노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맑은 물에 비치던 햇빛이 마지막 바위에 의해서 막혔다.

동굴 속은 손바닥만한 구멍으로 들어온 빛만 남았다.

전에 동굴 천장 위쪽에 가보았었다.

매우 가팔라서 날쌘 곽범도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쌓여 있었다.

바위들 틈새가 조금 열려 있어서 빛을 들여보낸다.

아늑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서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운기행공을 한 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햇빛이 들던 곳으로 달빛이 들었다.

새들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있었다.

곽범은 심법을 운용해서 운기조식을 했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새장수한테 뺏은 공력의 양은 줄어들었다.

대신 앙금처럼 정순한 공력은 기해혈에 쌓였다.

그 양이 상당했다.

지난 8년 간 혼자 쌓은 것보다 배 이상 많은 것 같다.

양만 많은 게 아니다.

곽범은 자신의 공력이 더 정순해지는 걸 느꼈다.

어둠이 마냥 어둡지 않았다.

눈으로 기운을 돌리면 시력이 좋아진다.

달빛이 닿지 않은 곳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새들은 조용히 있었다.

밤새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반짝이는 눈을 보면 여타 새들처럼 밤눈이 어두운 것 같지도 않았다.

곽범은 새장 앞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누가 말할 줄 알아?”

새들 중 한마리가 흠칫한다.

곽범은 어둠 속에서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새장의 문을 걸어잠근 걸쇠를 손으로 폈다.

문을 열고 냉큼 손을 넣어 그놈을 잡아 꺼냈다.

예상과는 달리 새들은 곽범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잡힌 새도 얌전했다.

곽범은 새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 말할 줄 알아.”

새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꾸엑!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잡힌 새가 비명처럼 외쳤다.

"난 아니야. 내가 한 말 아니야.”

새장이 조용해졌다.

"새를 꾈 때 새소리로 속이는데 사람 소리에 속는 새도 있네.”

곽범은 손에 든 새를 노려보았다.

새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외면했다.

다 말할 줄 안다고 외친 건 곽범이었다.

"저 바보.”

새장 속에서 어떤 놈이 외쳤다.

"너희들 무슨 새야?”

곽범이 물었다.

잡혀 있는 새가 즉시 대답했다.

"탁양앵무.”

양을 쪼는 앵무새라는 뜻이다.

"양 아니라 범도 잡아먹겠던 걸.”

"우린 범도 잡아먹어. 외공을 익혔거든.”

새장에서 어떤 새가 말했다.

"쓸모도 많아. 아주 많아.”

곽범은 코웃음을 쳤다.

"맛도 괜찮더라.”

앵무새들이 조용히 부리를 다물었다.

스무 마리에 가까운 새들이 털도 뽑히지 않은 상태로 곽범에게 잡아먹혔다.

"살려줘.”

새장에 있던 한 마리가 말했다.

"뭐든지 다 할게.”

"대장이 누구야?”

"네가 먹었어. 제일 먼저.”

"그것 잘 됐네.”

곽범은 새들을 훑어보았다.

"배고프면 그 바보 먹어도 돼.”

새장에서 누가 말했다.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비명을 질렀다.

"절대 안돼.”

"왜?”

"난 한입 거리밖에 안 돼. 먹으려면 저 자식도 같이 먹어.”

서로를 비난하는 새소리가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왔다.

곽범이 물었다.

"비급은 어디 있어?”

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새가 일제히 새장 바닥을 날개로 가리켰다.

“하하하!”

곽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들 중 한마리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금수가 하는 게 다 이렇지 뭐.”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급하게 말했다.

"조심해. 재들 발톱에 독 묻히고 기다리는 중이야.”

"배신자!”

새소리가 다시 귀를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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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성공한 사냥

 

 

“도철영감한테 배운 무공이 뭔지 말해봐.”

새장수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럼 안 아프게 죽여줄게. 아니면 새들이 살아있는 채로 네 살점을 뜯어먹을 거야.”

오싹한 협박이 이어졌다.

곽범은 오래전 사부로부터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아무에게도 이 무공을 말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라.

-무공을 줬으면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라.

-죽더라도 내 말을 어겨선 안 된다.

 

곽범은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무공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사부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돼. 난 고문을 길게 할 인내심이 없어.”

새장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철영감 무공이 탐나긴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인내심이 늘어나지는 않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말해봐.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더 안 물으마.”

새장수가 애원했다.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에 대한 의리나 두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고 손을 썼다.

사부의 은혜는 죽음과 상쇄되었다.

그러나 곽범은 입을 다물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은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기 싫었다.

아픈 것보다 죽는 건 비교할 수도 없이 괴로울 것이다.

"그 눈깔. 새까만 그건 없어도 되겠네.”

새장수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파다닥!

두 마리 새가 벼락같이 곽범의 눈으로 달려들었다.

“안돼!”

곽범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타탁! 푹!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새장수의 발이 곽범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새들은 부리로 새장수의 발등을 쪼았다가 날아올랐다.

"것봐. 너도 눈 빠지는 건 싫어하잖아.”

새 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눈두덩에 문질렀다.

"말할게요.”

곽범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어.”

새장수가 발을 치우며 씨익 웃었다.

"뻔한 걸 가지고 뭘 어렵게 가? 그냥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그런 후에 볼일 보면 되는 거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말할 힘도 없어요.”

곽범이 힘없이 말했다.

"그걸 생각 못했네.”

새장수가 자기 이마를 툭 쳤다.

"내가 널 위해 밥을 지을 순 없고, 술과 새 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걸 먹을래?”

곽범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술!”

"이놈 남자네.”

새장수가 껄껄 웃었다.

"나라서 주는 거지 아무나 못 주는 술이야. 그러니 알고 마셔.”

 

곽범은 새장수가 건네준 술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날짐승 냄새가 밴 술이 입안을 태우며 뱃속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몸에 열기가 돌았다.

통증은 가시고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그냥 자면 안 되지. 잠은 조금 있다가 푹 자고, 먹은 만큼 토해내야지. 자 말해봐.”

새장수가 곽범의 뺨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곽범은 귀찮은 듯이 그의 손을 밀쳤다.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해요. 길게 들이쉬기, 길게 내쉬기.”

새장수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래. 내공심법이구나. 이름은 뭐냐?”

"곽범.”

"이 바보 자식, 네 이름 말고 심법 이름.”

"이름 없어요. 아는 게 그것뿐인데 이름 지어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곽범은 술기운이 오른 입으로 중얼거렸다.

"도철영감이 무공 이름은 숨긴 모양이군. 그러고도 남을 영감이지. 계속 말해.”

"오래 참아요. 숨이 막혀 죽을 만큼 참았다가 쉬는 걸 계속하면 가슴에서 구멍이 뻥 뚫려요. 진짜 구멍은 아닌데, 그 구멍으로 숨을 쉬면 숨을 쉬는 듯 마는듯해요.”

"바로 그거구나!”

새장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구멍이 없으면 허사예요. 구멍을 뚫을 때는 밀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죽을 듯 말 듯한 상황을 넘나들어야 해요. 그래도 안 죽어요. 정신은 죽음으로 넘어가면 몸이 생으로 돌아오거든요.”

곽범의 졸음 묻은 말이 이어졌다.

“많이 해야 돼요. 자꾸 하면 구멍이 뚫려요. 그 구멍을 뚫고 나서 숨을 쉬면 기운이 기해혈에 쌓이기 시작해요. 아. 그때까지는 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 물하고 생콩만 먹어야 해요. 아니면 죽는대요. 단계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 따로 있는데...”

말소리가 줄어들다가 끊어졌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새장수는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새장수는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곽범을 죽이지 못했다.

도철은 무림에서 가장 흉악한 자들인 사흉신(四凶神) 중 한명이다.

도철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도철과 손을 섞는 자는 공력을 모두 빼앗기고 죽는다.

신화 속의 탐욕스러운 악귀 도철이나 마찬가지다.

도철의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세상을 횡행할 수 있다.

곽범을 살려둔 이유다.

그렇다고 죽이지 않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곽범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도 살아있었다.

곽범을 협박해서 독문무공을 뽑아냈다는 사실을 도철이 알면 매우 난감해진다.

 

새장수는 곽범의 맥문을 잡아서 기운이 흐르는 것을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이놈은 기운 움직이는 게 달라. 도철영감이 고강한 이유가 이거였어.”

곽범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읽은 새장수는 흥분했다.

곽범의 공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자석같은 흡입력이 느껴졌다.

새장수가 주입하는 공력을 끌고 간다.

(공력이 흐르는 길을 읽으면 흉내 낼 수도 있다.)

새장수의 가슴 속에서 탐욕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남의 공력 운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란 평생에 한 번 오기 어렵다.

게다가 그 남이라는 게 사흉신 중 한명인 도철이다.

도철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강해지면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

빼앗고, 즐기고, 존귀해질 수 있다.

도철의 무공을 반드시 익혀야한다.

곽범이 말했던 것처럼 호흡을 느리게 하여 죽을 듯 말듯한 경계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곽범의 기운을 새장수의 공력이 천천히 따라갔다.

곽범의 공력은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흘러갔다.

따라가기가 쉬웠다.

그러나 길이 몹시 난해했다.

조금만 속도가 빠르면 따라가다가 길을 잃을 판이었다.

새장수는 그 심오함에 놀랐다.

동시에 도철의 신공을 자기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온 정신을 다해서 공력이 흐르는 길을 외우고 거치는 혈도를 마음에 새겼다.

(절묘하다. 절묘해. 이렇게 복잡하고 오묘한 신공이라니.)

속으로 연신 감탄을 반복했다.

내공 운용의 오묘함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곽범의 공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새장수는 놓칠 새라 급하게 뒤쫓았다.

중대한 고비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만 잘 관찰한다면 신공이 자기의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가슴에 이어 어깨까지 시큰했다.

(아차! 공력이 부족해졌구나. 언제 이만큼 공력을 뽑았단 말인가?)

진퇴양난이었다.

물러서자니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쫓아가자니 공력이 고갈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공만 심후하다면 내가 도철영감보다 못할 리 없다. 평생 갈망했던 신공을 이제야 만났는데 물러서야하나?)

새장수는 짧은 순간에 깊은 갈등을 했다.

(이놈은 술에 취해서 순진하게 내력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들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입으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갈등은 곧 결론에 이르렀다.

(내공이 고갈되더라도 버틸 만큼 버티다 회수하면 된다. 이 어린놈은 몸이 만신창인데다 술까지 먹었으니 아무 위험도 없다. 더구나 나한테는 새들이 있다.)

새장수는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렸다.

진원지기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진원지기가 말라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절대 허물면 안되는 마지막 보루같은 것이다.

욕심에 눈이 먼 새장수는 그 진원지기까지 동원했다.

모자라는 내력을 진원지기로 보충하며 곽범의 공력을 따라갔다.

그러나 금방 끝날 듯 치달리던 곽범의 공력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새장수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곽범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공력을 다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속으로는 빨리 끝내라고 끝없이 외쳤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있었다.

마침내 곽범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갔다.

새장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빠르게 달릴 때의 경로는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끝이 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공력을 자기 몸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어...)

소리를 내고 싶은데 입술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가는 곽범의 공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식은땀을 더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곽범이 눈을 번쩍 떴다.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 같다.

(잘못되었다!)

새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기의 수소양삼초경을 끊었다.

진원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왁!”

그 대가로 한 웅큼의 피를 토하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곽범의 사냥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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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버림받은 천재

 

 

사부는 5일이 지난 후에 왔다.

그동안 암자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성질을 연구하느라 모든 걸 망각했다.

밥도 짓지 않았다.

사부를 위해 차를 다릴 물도 없었다.

곽범은 미친 놈 행색으로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부는 보자마자 혹독한 매질을 했다.

곽범은 고통 속에서 혼절하고 고통으로 깨어나길 반복했다.

사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8년 지은 농사였는데... 네놈이 스스로 망가졌구나!”

매질을 하며 사부가 악다구니를 썼다.

곽범은 자신이 뭔가 잘못 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놈!”

환청처럼 울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부는 떠났다.

 

곽범은 사흘 동안 암벽 앞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가을비 추적거리는 밤에 기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싯돌을 어찌 어찌 쳐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 앞에 웅크려 몸을 데웠다.

솥에 들어있던 물도 데워졌다.

데워진 물을 겨우 겨우 마셨다.

텅 빈 속에 며칠 만에 들어가는 게 물이다.

그럼에도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스스로 깨우친 심법의 효험을 봤다.

곽범은 전보다 몇 배 빠르게 공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복잡한 혈도와 경맥을 지나는 데도 그렇다.

빨라진 공력이 몸을 보호해주었다.

맞는 부위로 즉시 공력이 달려가곤 했다.

덕분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팔 다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엉금엉금 기어 방으로 들어갔다.

두 권의 무공비급은 사라졌다.

사부가 사왔다가 던져 놓은 옷 보따리만 뒹굴고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구나.)

곽범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금 세상에서 곽범이 아는 사람은 사부뿐이다.

정은 없지만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부였다.

버림받는 고통은 외로움보다 더 깊다.

곽범은 눈을 감았다.

그 무엇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자신의 몸 상태가 관조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 훤히 보였다.

혈도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간 기운이 상처에 이르며 치유하는 과정을 느꼈다.

혈도들은 얕게는 피부에, 깊게는 오장육부와 사지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모양과 성질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았다.

혈도마다 숲의 짐승들처럼 관장하는 영역이 있었다.

영역의 기능과 모양을 따라 혈도도 달랐다.

사부의 장력에 손상되었던 오장육부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혈도에 쌓여있는 공력을 근처의 상처로 이끌어 집중시켰다.

다치지 않은 곳보다 다친 곳들로 점점 더 많은 공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새벽이 왔을 때였다.

곽범은 굳어진 핏덩어리를 토했다.

오장육부는 어느덧 활기를 되찾았다.

속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한 뼈와 근육, 피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이면 근육은 대부분 나아있겠구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시간문제일 뿐 다친 몸은 결국 회복될 것이다.

잠이 밀려왔다.

회복에 집중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컸다.

곽범의 눈이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감길 때였다.

꾸욱 꾹!

어디선가 일찍 먹이를 찾아 나온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곽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지암 주변에는 나무나 풀이 거의 없다.

벌레도 없다.

숲에 사는 새가 이곳까지 올라와서 울 까닭이 없다.

높은 곳에 사는 새는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뿐이다.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곰이나 범, 늑대 같은 짐승을 만나기 전에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달려야 한다!

아직 다리로는 일어설 수 없었다.

네발로 기어 방을 나왔다.

벽에 기대두었던 도끼를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섰다.

모든 기운을 다리의 뼈와 근육을 치유하는 데로 모았다.

곽범은 부들부들 떨면서 걸었다.

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도끼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큰 짐승과 싸워야 한다면 도끼가 있어야한다.

 

곽범은 있는 힘을 다해서 30 미터 정도 움직였다.

돌아보니 어슴푸레하게 십지암이 보였다.

더 움직일 힘이 없다.

뱃속은 텅 비었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꾸욱 꾹! 꾹!

요란한 새소리가 가까워졌다.

도망치기는 늦었다.

바위 뒤에 몸을 우겨넣어 숨었다.

저벅 저벅

새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새벽의 맑은 공기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게 한다.

미약한 냄새도 선명하게 느껴지게 한다.

곽범은 바람 속에 흐르는 피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뿐만이 아니다.

어렸을 때 맡았던 닭똥 냄새 같은 것도 느껴졌다.

“도철(饕餮) 영감도 참 지독해. 죽일 거면 직접 죽일 것이지. 죽을 만큼 때린 후에 남 시켜 시체 치우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지 않아?”

투덜거림과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는 수많은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지고 있었다.

쌀가마니 두세 개쯤 되는 크기의 새장이다.

비어있는 작은 새장들이 큰 새장에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 시장에서 본 적이 있다.

새장수다.

꾹 꾸욱! 꾸룩!

새장 속의 새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람은 새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너희들 먹일 시체가 필요해도 그렇지. 젠장, 나도 무림에서 제법 신분이 있는데 말이야. 도철 영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시체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꾸룩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맞장구를 친다.

요란한 새소리는 그 자체로 섬뜩했다.

“기왕이면 다 자란 계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살이 야들야들하면서 양도 넉넉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

새장수의 중얼거림이 가까워졌다.

곽범은 숨을 죽인 채 그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새장수는 바위 근처에 멈추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사내새끼야. 계집도 어른도 아니라고.”

곽범은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

“게다가 죽어있어야 하는데.... 살아있네.”

새장수가 바위 뒤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곽범은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더 빨리 튀어! 그래서야 어디 살겠어?”

새장수가 곽범의 등을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십지암은 벼랑 끝에 서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지어졌다.

십지암으로 오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에 새장수가 있다.

십지암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새장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낫지 않은 다리뼈가 땅을 딛을 때마다 통증이 골을 울린다.

새장수는 십지암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에게는 곽범이 독 안으로 뛰어드는 생쥐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곽범은 법당을 목표로 달려갔다.

법당의 문은 두껍고 튼튼하다.

도금한 불상을 도적질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그 문을 걸어 잠그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다친 다리라 속도는 나지 않았다.

뒤에서는 새장수가 휘파람을 불면서 느긋하게 걸어온다.

법당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아이쿠. 저길 더럽히면 도철영감이 가만 안 있을 건데 깜박했다.”

새장수는 걸음을 멈췄다.

“잡자!”

파다다닥! 파닥!

새장수가 소리치는 순간 새들이 새장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막혀있던 굴뚝에서 그을음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곽범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주변이 요란한 새소리에 파묻혔다.

새떼가 달려들어 발톱과 부리로 옷을 잡고 물어 당겼다.

새들은 그리 크지 않다.

비둘기나 까치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힘이 아주 좋았다.

독수리에 못지않을 것 같다.

큰 독수리는 양을 채 가기도 한다.

게다가 새들은 숫자까지 많았다.

곽범의 몸뚱이는 간단히 들려졌다.

털썩

한길 쯤 들려졌던 몸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땅에 떨어질 때까지 새들이 옷을 붙잡아서 낙법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콱 막혔다.

뼈와 근육이 지르는 비명으로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쳤다.

새장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더 굴려 더.”

새들은 새장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곽범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들렸다가 던져지기를 반복했다.

옷은 돌부리에 걸려 찢어졌다.

피멍이 들었던 곳에서는 피와 고름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만, 이제 야들야들해져서 먹기 좋아졌을 거다.”

새장수의 명령에 새들이 곽범을 놔주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살아있었을 줄이야. 흐흐흐.”

새장수는 곽범을 내려다보며 희희낙락했다.

곽범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덮여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얘기 좀 하자.”

새장수가 곽범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눈 주변의 피와 흙이 술에 씻겨 내려갔다.

“너 도철영감 제자 맞지?”

새장수가 곽범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곽범은 울컥하고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네 사부가 시체를 없애라 해서 왔다. 그런데 살았으니 이걸 어쩐다? 도철영감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새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얼굴에 비비며 실실 웃었다.

술이 묻은 얼굴에 흙이 그림을 만들었다.

곽범은 따가운 통증에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사부가 도철이라 불린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다만 곽범은 도철의 뜻은 몰랐다.

무공비급 외의 책을 읽을 기회도,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철은 신화 속에 나오는 네 마리의 흉악한 괴물, 사흉(四凶) 중 하나다.

탐욕과 교만, 교활과 포악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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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외로운 천재

 

 

암자의 이름은 십지암(十智庵)이다.

십지암은 봉우리 정상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있다.

몇 구비 절벽을 따라 돌면 두 개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틈에 채 열 평도 안되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법당 한 칸, 방 한 칸, 부엌이 전부인 작은 암자다.

곽범은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매일 물을 긷고 밥을 지었다.

곽범의 사부는 스님이다.

곽범이 사는 곳도 암자다.

하지만 곽범은 중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규율을 배운 적도 없다.

오로지 사부의 지시대로 살아왔다.

사부는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온다.

가을 무렵이다.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으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이 된다 해도 사부가 언제 올지는 모른다.

항상 사부를 위한 찻물을 준비해놓아야 했다.

찾아온 사부는 곽범의 몸을 꼼꼼히 살펴본다.

그런 후 연마하는 무공에 대해 조언해주고 떠났다.

오래 머물러야 보름 정도다.

그래서 곽범은 늘 혼자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일꾼과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

말할 기회가 적으니 말하는 게 투박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암자에 있는 책이라고는 두 권의 무공비급이 전부다.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제목은 없다.

한권에는 내공을 기르는 심법이 적혀있다.

다른 한권에 적혀있는 건 경신법이다.

사부는 다른 책은 일절 주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는 게 심심함과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밤이면 두 권의 비급을 반복해서 읽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읽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밤만 되면 다시 읽었다.

오전에는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했다.

오후에는 봉우리를 달려 내려갔다.

골짜기에서 원숭이를 쫓으며 경신법을 익혔다.

산에는 원숭이 외에 늑대도 있고 곰도 있으며 표범도 있다.

그놈들 덕분에 곽범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곽범은 사부로부터 검을 받지 못했다.

숲에서 단련할 때는 늘 도끼를 메고 다녔다.

도끼만 있으면 곰도 범도 무섭지 않았다.

곽범은 곰을 여러 마리 잡았다.

정면 대결해서 잡은 건 아니다.

곰이 쫓아오면 나무 위로 도망간다.

대부분의 곰은 따라 올라온다.

그러면 옆의 나무로 건너뛰든가 휘어지는 가지에 매달려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 다음 도끼로 나무를 찍었다.

곰은 곽범처럼 나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곽범이 나무를 찍기 시작하면 포효는 해도 움직이지 못했다.

떨어질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매달려 있다가 나무가 쓰러지면 함께 떨어진다.

곰은 육중한 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거나 죽는다.

표범을 만날 때도 방법은 비슷했다.

나무에 올라가면 표범은 이것 봐라 하며 따라 올라온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나무의 거의 끝까지 올라간다.

그쯤 되면 표범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표범은 영악하다.

하지만 일단 나무 위로 유인당하면 도망치지 못한다.

동작은 제한되고 민첩성은 없어져 버린다.

그저 매달려 있기도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그때를 기다려 반격한다.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표범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다.

저항도 제대로 못한 표범은 머리가 깨져 땅으로 떨어진다.

곰이나 표범을 죽이면 고기를 구워먹었다.

원래 날쌨던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더 민첩하고 빠르고 강해졌다.

 

심법에 따라 기운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인다.

매일 열 번 이상 심법을 수련했다.

그러나 공력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쌓였다가도 이 빠진 바구니에서 물이 빠지듯 흩어졌다.

공력 중에서 특히 정순한 것들만 앙금처럼 기해혈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공력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강한 흡착력을 지녀 다른 힘을 끌어들인다.

다만 쌓이는 양은 매우 미미하다.

작년에 비해서도 거의 늘지 않았다.

곽범은 사부가 왔을 때 벌을 줄까 무서웠다.

사부는 게으름을 피웠다고 할 게 분명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사부님이 가르치신 대로 수련하는데 공력은 왜 늘지 않는 걸까?)

밥을 지으며 곽범은 생각했다.

전에는 품지 않았던 의문이 일어났다.

하늘에 빠질 뻔한 경험으로 머리가 트인 덕분이다.

지금까지는 늘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했었다.

명료해진 머리로 고민다운 고민을 처음 했다.

(사부님이 일부러 틀리게 가르치실 리는 없고... 혹시 심법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사부님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부를 의심할 수는 없다.

하려면 익히고 있는 심법을 의심해야한다.

결함이 있는지는 몰라도 심법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이기는 한다.

그 양이 아주 적다는 게 문제다.

(쌓이는 양이 적다면 쌓는 횟수를 늘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법을 더 많이 운용하면 쌓이는 공력도 늘어날 것이다.

심법의 운용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기운을 정해진 경맥과 혈도로 신중하게 이끌어야하기 때문이다.

심법을 더 빨리 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운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어볼까?)

고민하던 곽범은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았다.

 

곽범은 몸을 산으로 간주해보았다.

심법을 운용하는 건 경신법을 펼쳐 달리는 것에 비유했다.

여름과 가을에 숲을 달리면 짐승도 있지만 열매들도 보인다.

나무 열매도 따고 넝쿨 열매도 따서 먹으며 달리곤 했었다.

공력을 쌓는 과정은 절벽과 숲을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심법을 한번 운용할 때마다 공력은 깨알만큼 늘어난다.

숲에서 작은 열매를 따먹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다.

숲에는 달리기 좋은 길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길이 없는 곳도 있다.

있어도 힘이 부족해서 가지 못할 길도 있다.

열매는 곳곳에 있다.

큰 짐승들은 자기 구역이 있어 그 근처에서만 볼 수 있다.

처음 숲에 갔을 때는 가장 쉬운 길로 갔다.

그런데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막힌 곳에서 길을 찾아냈다.

끊어진 곳에서는 노력을 거듭하여 건너뛰었다.

큰 짐승은 도끼로 맞섰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열매가 많은 곳으로 길을 만들고 달릴 수 있었다.

두려움은 어느덧 즐거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력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려면 혈도를 잘 알아야 한다.

심법을 아주 느리게 운용해보았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듯이 운용했다.

그동안 다닌 길을 꼼꼼히 살폈다.

열매뿐 아니라 토끼 같은 작은 짐승도 찾아보았다.

아주 가끔씩 열매는 만났다.

하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토끼는커녕 벌레도 없다.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공력이 전신을 한 바퀴 돌아서 기해혈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집중력이 떨어져 간과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운용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익힌 심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자주 다니는 길에서는 열매를 찾기 힘들다. 해가 바뀌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딸 수 있다.)

아궁이 속에서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불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열매를 계속 얻으려면 길을 바꾸는 게 답이었어. 지금까지 이 생각을 왜 못했지?)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한다.

밥 타는 냄새에 관조를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솥에서 퍼낸 밥을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숲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들면서도 생각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확신했다.

그동안 익혀온 심법은 너무 단조롭다.

사람 몸에는 12정경과 기경8맥이 존재한다.

그 중 극히 일부만 심법 수련에 사용해왔다.

더 많은 혈도에 기운을 소통시키면 더 많은 공력이 쌓일 것이다.

그 과정은 숲에서의 열매 찾기와 완벽하게 같다.

더 많은 길을 달려야 더 많은 열매와 만난다.

혈도는 달리면서 건너뛰는 나무나 바위와 갈다.

나무나 바위마다 크기와 모양, 성질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혈도는 성질이 다르다.

붙잡아 놓거나 밀고 당기거나 튕기고 쏘는 혈도도 있다.

어떤 혈도를 지날 때는 기운이 느려진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더 써야한다.

저절로 빨라지게 하거나 튕겨버리는 혈도도 있다.

그런 곳에서는 노력 없이도 공력이 다음 혈도로 움직여준다.

혈도의 성질을 알고 심법을 행하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걸렸던 일주천을 같은 시간에 세 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혈도와 경맥에 기운을 소통시키는 데도 그렇다.

반복할수록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곽범은 방으로 들어갔다.

혈도의 위치와 성질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른다.

어딘가에 그려놓고 보면서 더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십지암을 양쪽에서 가두고 있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돌로 긁어 보았다.

선이 그어졌다.

곽범은 기해혈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기해혈은 쌓인 공력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곳이다.

그래서 꿀이 담긴 그릇처럼 끈적거린다.

공력이 쌓이는 곳이면서 뽑아내기가 가장 어려운 혈도가 기해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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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생마왕(轉生魔王)

 

 

 

 

0화

 

                      하늘에 빠질 뻔하다.

 

 

수백 길, 수천 길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간쯤 바위틈에는 작은 암자가 끼어있다.

암자에서 나온 계단이 구름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봉우리 정상 근처에 샘이 있다.

샘물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샘을 들여다보던 곽범(郭汎)은 움찔 물러섰다.

하늘에 빠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물에 빠지듯 하늘에도 빠질 수 있겠구나!)

현기증과 함께 황홀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수백, 수천 번 샘을 들여다보았었다.

오늘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쩡하며 깨졌다.

“때가 된 것일까?”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 보던 아침 풍경이다.

그럼에도 전혀 달라보였다.

모든 게 단청을 새로 덧칠한 것처럼 찬란했고 선명했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화려한 색을 입고 있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흐르는 운무는 황금빛이다.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다시 태어난 것 같기도 했다.

나른해진 몸을 바위에 기댔다.

남아있는 밤의 냉기가 등으로 스며들었다.

얼굴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랗다.

영락없는 바다다.

본 적이 없음에도 바다임을 알 수 있다.

바다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내려다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등이 바위에서 떨어져 바다로 추락할 것 같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바다로, 하늘로 뛰어들 수 있다.

하늘 너머에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다.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 같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바위가 자석처럼 등을 잡아당겼다.

아니, 이 세상인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바다는 다시 하늘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자신의 몸이 땅의 권세에 속박되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 폭풍처럼 몸을 쓸고 지나갔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니, 떨어지는 거였을까?)

방금 전의 감각을 또 느끼고 싶었다.

애쓰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아쉬움을 달래며 항아리에 샘물을 담았다.

사부가 좋아하는 차를 다릴 물이다.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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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 전에 써놓은 작품입니다.
대략 5-6권 정도 진행이 되었는데...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흥행>이 될만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ㅠ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읽어보시면 아실 테고...
철저히 자기 만족을 위한 작품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기대하지 말아주시길...


원래는 이세계, SF로 구상한 작품입니다.
빅뱅 이후 현재에 이르는 우주와 문명에 관한 상상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윤회하고 전생하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남녀 주인공...
여자 주인공은 성녀이지만 
남자 주인공은 시바로도 치환될 수 있는 마왕입니다.
이번 작품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전생한 마왕입니다.
제목이 <전생마왕>인 것은 시류에 편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정말?)


문피아에서 <이온레인>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반응은 거의 없지요.
요즘 세태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쉽게 읽혀지지 않을 텐데...  
그냥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는 정도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문피아 연재 게시판의 작품설명입니다.


    ****


마왕과 성녀는 소꿉친구였고 연인 사이였으나...
마성이 폭주한 마왕을 성녀는 다른 시간 대로 유배한다.
마왕이 던져진 세계는 시대적으로는 중세, 공간적으로는 동양,
미천한 존재로 세상을 떠돌던 마왕은 점차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장르는 무협이며 환타지의 탈을 쓴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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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비구니의 신세한탄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위치한 천불곡은 마치 딴 세상같이 조용했다. 기승스런 모랫바람도 천불곡 안으로는 불어들어 오지 않았다.

한데 모랫바람 대신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등룡풍의 코를 찔러왔다.

좁은 천불곡 안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여기저기에 수많은 여승들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에 회색승포를 걸친 여승들, 그녀들은 모두 지극히 고통의 표정으로 죽어 있었는데 불문의 제자들답지 않게 손에 손에 병장기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등룡풍은 눈 앞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참경을 둘러보며 무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나 말고 또 이 반야암을 찾아온 자들이 있었군!”

그는 급히 나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그는 세심한 눈으로 여승들의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승들의 사인(死因)은 가슴에 맞은 내가장력이었다. 그녀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 혈장인이 여승들의 젖무덤을 무참하게 으스러뜨리고 심장까지 바스러뜨린 것이다.

등룡풍의 초롱한 눈빛이 지혜롭게 빛났다.

(손바닥 자국으로 보아 침입자는 모두 여덟 명이다!)

그는 십여 구의 시체를 모두 살펴본 후 몸을 일으켰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나귀의 등에서 녹슨 칼 도왕 치우를 내려 품에 안고 천불곡 안으로 들어섰다.

골짜기 한 굽이를 돌자 반야암이 저 만큼 보였다.

반야암은 절벽의 중간쯤에 세워져 있었다. 절벽을 반쯤 파서 세운 동굴 암자인 반야암까지는 백여 개의 계단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데 그 계단 주위에도 수십 명의 여승들이 죽어 있었다.

 

등룡풍은 총총히 걸음을 옮겨 반야암으로 올라갔다.

“......!”

헌데 반야암의 본전(本殿)으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멈칫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반야암 안에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룡풍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암자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전면에는 바로 깎아 만든 거대한 불상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 사 장이 넘는 거대한 좌불상(座佛像)은 손바닥 하나가 어른보다 더 컸다.

불상 앞에는 불단이 놓여 있었다.

불단 위에는 높이가 두 자 가량 되는 향로가 있었고 지금 그 향로 안에서는 미약한 향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본전으로 들어선 등룡풍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아미타불...... 소시주는 누구를 찾아 오셨지요?”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미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 불단 앞에 한 명의 여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애로운 인상의 중년여승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는지 아직도 그 여승의 용모에는 옛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단아하고 차분한 몸가짐, 그 속에 배어 흐르는 은은한 기품......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왔다.

중년여승은 일신에 회색승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지금 그 회색가사는 온통 검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합장하고 앉은 주위에는 팔 인(八人)의 괴인이 반원형으로 중년여승을 포위한 채 쓰러져 있었다.

흡사 흉신악살을 연상케 하는 혈의인들이었는데 괴이하게도 그 자들의 전신에는 붉은 털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것은 등룡풍의 집을 찾아왔던 야수혈마과 흡사한 형상이었다.

그자들은 고통으로 이지러진 표정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헌데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다만, 오공에서 피와 뇌수를 흘린 채 죽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무서운 내가강기에 대뇌와 내장이 박살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등룡풍은 중년여승을 향해 급히 합장하며 말했다.

“소생은 등룡풍이라 합니다. 추망(醜亡)이란 분의 부탁을 받고...... 반야신니란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츠읏!

순간 중년여승의 눈가로 언뜻 한 줄기 이채가 흘렀다.

“빈니가...... 반야라고 해요. 추망이 무슨 일로 소시주를 보내셨지요?”

그녀는 나직이 탄식하며 물었다. 그 말에 등룡풍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 대사께서 반야신니이십니까?”

그는 해연히 놀란 눈빛으로 중년여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신니(神尼)라 불리어 반야신니가 아주 늙은 노비구니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승은 이제 많이 되었어야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을 뿐이었다.

반야신니-!

실상 그녀는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다만 한 가지 지고한 불문신공을 연마하여 나이를 먹는 것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등룡풍의 놀라운 표정에 반야신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니가...... 너무 젊어 의심이 가시나요?”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 앞으로 다가가 치우신도를 반야신니에게 바치며 말했다.

“추망이란 분은 이 칼을 신니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부르르......

도왕 치우를 보자 반야신니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치우(蚩尤)...... 도왕(刀王) 치우......”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치우신도를 받아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옥으로 빚은 듯 해맑고 아름답다. 관세음보살의 관음옥수를 연상케 하는 섬섬옥수.

등룡풍은 격동을 금치 못하는 반야신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녹슨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피울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추망...... 은 달리 말이 없었나요?”

반야신니가 녹슨 치우신도를 쓰다듬으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있었습니다!”

등룡풍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우에 천황(天皇)의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요!”

“......!”

반야신니는 멍하니 등룡풍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등룡풍이 전하는 말은 지극히 중요한 것일 텐데도 그녀는 듣지 못한 듯 멍하니 반야암 밖의 거친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분은...... 다른 말은 하시지 않았나요?”

문득 반야신니는 망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한시도 신니를......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부르르......

순간 반야신니의 전신이 뇌전을 맞은 듯 격렬하게 떨렸다.

주르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문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그 분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등룡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반야신니의 옥용이 문득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도왕 치우를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합장했다.

그런 그녀의 옥용으로 햇살같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애롭고 아름다워 흡사 관음보살이 현신한 듯했다.

“추망!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반야신니는 기쁨의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눈을 들어 등룡풍에게 고소를 지어 보였다.

“추태를 보였어요. 용서하세요.”

“아...... 아닙니다 신니!”

등룡풍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치우신도를 다시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다시 시주가 맡아 주셔야겠어요. 왜냐하면...... 빈니는 곧 입적(入寂)해야만 하기 때문이예요.”

그 말에 등룡풍은 대경하여 물었다.

“다...... 다치셨습니까?”

반야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혈왕천(血王天)의 야수팔흉(野獸八兇)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요. 빈니는 그들을 반야신강(般若神罡)으로 격살했지만...... 빈니 역시 그들의 혈영강살에 내부가 흔들려 오래 버티지 못해요!”

그녀는 주위에 쓰러져 있는 팔 인의 흉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수팔흉(野獸八兇).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등룡풍은 그들이 반야암의 여승들을 죽인 장본인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눈앞의 이 연약해 보이는 여승 반야신니에게 내부가 박살당해 절명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흉악무비해 보이는 거한들!

그들 팔 인이 일개 여승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등룡풍을 놀라게 만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빈니의 신상 얘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문득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등룡풍은 단정히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반야신니는 나직이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벌써 사십 년 전이군요. 곤륜(崑崙)에는 한 분의 고승(高僧) 밑에 곤륜삼정(崑崙三鼎)이라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는 낮고 조용한 음성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곤륜파(崑崙派)!>

 

그들은 백 년 전까지 무림구대문파에 드는 당당한 명문정파였다.

하지만 백 년 전, 서역 성숙해(星宿海)에서 일어난 하나의 마파(魔派)와의 충돌로 인해 전정영이 괴멸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적룡마교(赤龍魔敎).>

 

그것이 그 문파의 이름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그 옛날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마교(魔敎)의 후예였다고도 한다.

천 년 전, 마교는 구중천과 충돌하여 양패구상하고 지상에서 쓰러졌다. 한데, 그 위대한 천년마교의 후예를 자처한 인물이 성숙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적룡마존(赤龍魔尊)!

 

이것이 그 대마왕(大魔王)의 이름이었다.

적룡마존은 서역마도를 통합하여 적룡마교라는 조직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구중천(九重天)을 무너뜨리고 중원무림을 장악하여 마교의 천하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중원으로 물밀듯 들이닥쳤다.

그들 적룡마교와 최초로 무딪친 것이 바로 곤륜파였다. 곤륜은 밀종(密宗)의 불문신공과 도가(道家)의 현문신공(玄門神功)을 함께 지닌 명문대파였다.

그러나 곤륜파의 천년저력으로도 노도 같은 적룡마교를 막지 못했다.

결국, 곤륜파는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 무너진 곤륜의 문호를 일으켜 세울만한 뛰어난 삼 인(三人)의 제자가 곤륜파에 나타났다.

 

-호연굉(胡燕宏).

-추망(追亡).

-반화련(潘火蓮).

 

이름하여 곤륜삼정(崑崙三鼎)!

바로 이들 삼 인이었다.

세 사형매는 곤륜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 사람은 곤륜산의 어느 빙곡(氷谷)에서 세 권의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미항마결(須彌降魔訣).

-축골천형경(縮骨千形經).

-반야진결(般若眞訣).

 

이 비급들은 오백 년 전 천축제일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일세 고승 수미천존(須彌天尊)의 유물이었다.

하나하나가 인세에 다시없는 초절기들을 얻은 세 사형매는 뛸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세권의 비급을 각기 한권씩 수습하며 나누어가졌다.

대사형 호연굉이 수미항마결을, 둘째인 추망(追亡)이 축골천형경을, 그리고 막내인 반화련(潘火蓮)이 반야진결을 연마하기로 했다.

세 가지 불문신공을 얻은 세 사형매 곤륜삼정은 곧 폐관과 함께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그들은 이내 무서운 고수로 화해갔다.

한데, 세 사형매가 함께 생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즉, 대사형 호연굉이 막내사매 반화련을 짝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화련에게는 이미 은근히 사모하는 정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추망(追亡)이었다.

추망은 태어날 때부터 추괴한 용모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마음이 충후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함께 생활하면서 추망의 군자다움을 발견한 반화련은 은근히 추망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추망 또한 사매 반화련에게 연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추괴한 용모 때문에 섣불리 마음을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엇갈린 연정(戀情), 그것이 모든 화근의 발단이었다.

어느날 호연굉은 마침내 반화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당연히 반화련은 그런 호연굉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히고 더불어 자신이 추망을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고백했다.

그녀의 말에 호연굉은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내 무서운 질투로 변했다. 호연굉은 그 자리에서 득달같이 반화련을 덮쳐 겁탈하려 했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벌어진 일인지라 반화련은 호연굉에게 능욕당할 위기에 처했다. 호연굉은 반화련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거칠게 그녀의 처녀를 깨뜨리려 했다.

위기의 순간, 마침 외출했던 추망이 돌아왔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호연굉에게 능욕당하는 것을 본 추망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호연굉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두 사형제 간에 일장혈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과는 기습당한 호연굉의 패배였다.

 

“두고 봐라! 곤륜파는 내 손으로 뿌리까지 멸망시킬 것이다!”

 

패배한 호연굉은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달아났다.

그리고, 추망 역시 반화련이 이미 호연굉에게 능욕당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곤륜을 떠나갔다.

그 후 호연굉의 종적은 무림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추망은 천면신마(千面神魔)란 이름으로 천하를 떠돌며 호연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사형 호연굉에게 강간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충격을 받은 반화련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녀가 바로 반야신니였으며 사십 년 그 이전에 일어난 비극의 전말이었다.

 

* * *

 

등룡풍은 반야신니의 탄식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영민한 머리를 굴렸다.

(천면신마는 자신이 야수혈마의 수미천강에 격중되어 내부가 모두 으스러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혈왕천의 제이인자 야수혈마가 바로 호연굉일까?)

그때 반야신니가 그의 상념을 깨며 우울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삼 년 전에 이사형은 빈니에게 마지막 서찰을 보냈어요.”

“......!”

“그 서찰에 의하면...... 사형은 한 가지 상고신병(上古神兵)의 종적을 쫓다가 우연히 호연굉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고 했어요!”

등룡풍은 그 말에 흠칫하며 도왕 치우를 기리켰다.

“그 상고신병이란 것이 이 녹슨 칼(刀) 입니까?”

반야신니는 그 물음에 문득 고소를 지었다.

“그것은 저 고금제일인 육합성황(六合聖皇)이 남긴 여섯 자루 신병 중의 하나예요. 치우신도(蚩尤神刀)를 보고 녹슨 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주밖에 없을 거예요.”

“......!”

등룡풍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반야신니는 낮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사형의 서찰에 의하면 호연굉은 구중천에 가입하였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만 적었을 뿐 구중천의 어느 문파인지는 적어놓지 않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바로 야수혈마......!)

등룡풍은 자칫 큰소리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천불곡 밖에서 무서운 내공이 실린 장소성이 들려왔다. 마치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장소성이었다.

그 소리는 곧장 모래바람을 뚫고 날아와 반야암을 온통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

“......!”

순간 등룡풍과 반야신니의 안색이 동시에 홱 변했다.

“야수팔흉의 괴수가 오고 있어요!”

반야신니는 다급히 품 속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한 권의 얇은 양피비급과 하나의 영웅건(英雄巾)이 그것이었다.

 

<반야진결(般若眞訣).>

 

빛바랜 양피비급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축의 고승 수미천존이 남긴 세 가지 불문절기 중 하나였다.

호연굉이 가져간 수미항마결이 공격전용임에 비해 반야진결은 수비전용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반야진결로 일어나는 반야강기는 최강의 호신기공이었다. 잘못 반야신강을 가격하면 적은 그 몇배의 반탄강기에 휘말려 내부가 모조리 으스러지고 만다.

야수팔흉이 죽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멋모르고 반야신니를 혈영강살로 내쳤다가 반진당해 내부가 으스러져 절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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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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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왕 치우

 

 

 

자면제왕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등룡풍은 서둘러 나무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웃기는 늙은이군! 살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는 냉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츠츠츠!

몸을 돌려 세우는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용의 흔적이 급격히 엷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룡쇄심인은 본래 자면제왕이 자랑하는 독문살수였다. 그것에 격중되면 대뇌에 직접 타격이 가해져 죽고 만다. 그 무서움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무서운 자룡쇄심인이 소년 등룡풍의 살갗도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종(藥宗)의 후예를 건드린 빚은 꼭 기억해 두겠다 자면제왕 독고황!”

등룡풍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급히 부엌 옆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검박하게 정돈된 방 한쪽에는 튼튼해보이는 나무 침대가 놓여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등룡풍은 급히 나무침상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긍......!

그러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침대가 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등룡풍은 뛰듯이 지하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중앙에는 약을 달이는 커다란 청동단로(靑銅丹爐)가 놓여있고 사방 벽에는 수많은 약병과 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석실 한편에는 쇠로 만든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철제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인물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물론 자면제왕에게 천면신마라 불린 회포노인이었다.

“너무 지체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다!”

등룡풍은 급히 침상의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막 회포노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팍!

돌연 회포노인의 손이 강철수갑같이 등룡풍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악!”

등룡풍은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절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번쩍!

“......!”

회포노인의 눈이 벼락치듯 떠지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노려보았다.

“깨...... 깨어나셨군요!”

등룡풍은 고통 속에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너는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와 어떤 관계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등 아래에서 한 권의 고경(古經)을 꺼냈다.

그것은 다 낡은 양피지의 책자였다.

 

<약종천황경(藥宗天皇經)!>

 

고서(古書)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의성(醫聖) 편작(騙鵲)이 지은 세 권의 의경(醫經)중 한 권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편작은 약종경(藥宗經), 기의경(奇醫經), 천독경(千毒經) 등 삼 편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약종천황경은 바로 그 중 약종경(藥宗經)이었다.

약종경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의 구분, 이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약을 채취하러 천하의 험산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그에 쓰이는 한 가지 절정 경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탄신폭등비(彈身暴騰飛)라는 그 경신절기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고래로 약종경(藥宗經)을 연마한 편작의 후예를 약종일맥(藥宗一脈)이라고 일컫는다.

약종일맥의 의생들은 약을 쓰고 해독하는데 있어 단연 환우제일이었다.

 

흠칫 놀라던 등룡풍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천외약종이란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저의 아버님 함자가 사(獅)자 추(追)자 되십니다.”

그 말에 회포노인의 눈에 한 가닥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천외약종 등사추는 올해 이미 백 살이 넘었는데...... 게다가 그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거늘......!)

그는 내심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였다.

당대 약종일맥의 종사인 그는, 그러나 이십 년 전 한 가지 일로 중원무림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인들의 질책에 밀려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변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면 이미 백 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십 오륙세 정도된 어린 소년 등룡풍이 천외약종의 아들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회포노인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부가 결례했다면 용서하게, 소형제!”

회포노인은 등룡풍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이어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면......”

등룡풍은 급히 말리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포노인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은 탓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네, 소형제! 노부는...... 곧 한줌 독수(毒水)로 녹아들 것이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장께서 천년시독(千年屍毒)에 중독된 것은 알지만 제가 능히......”

등룡풍은 회포노인을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독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네! 천년시독의 해독정도야 약종일맥의 후예인 소형제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겠지. 하지만 사실 노부는 그외에도 한 가지 지독한 불문신공에 맞아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상태라네!”

“아!”

등룡풍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는 회포노인이 중독된 것 외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회포노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를 다치게 한 자는...... 방금 나타났던 야수혈마(野獸血魔)라는 자이네. 그 자는...... 수미천강인(須彌天罡刃)이라는 불문항마절기를 지녔는데...... 그것이 노부의 내부를 산산이 바스러 뜨려놓았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회포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검푸르게 변해갔다. 그것은 천년시독이 대뇌까지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개의치 않고 힘겨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본래 중(僧)이었네. 법호는...... 추망(醜亡)...... 하지만 무림인들에게는...... 천면신마(千面神魔)라고 불리웠지!”

“천면신마!”

등룡풍은 긴장된 음성으로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천면신마라 자처한 회포노인,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면신마의 고통은 극에 이른 듯했다. 그는 안면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네. 이...... 물건을...... 천불동(千佛洞) 반야암(般若庵)의...... 반야신니(般若神尼)에게...... 전해 주게!”

그는 침상 옆에 놓인 길쭉한 물건을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말에서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소중하게 안고 있던 물건이었다. 둘둘 만 무명천의 끝으로 삐죽하게 녹슨 칼자루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등룡풍은 엄숙한 안색으로 이어지는 천면신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면신마의 음성은 끊어질 듯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반야...... 신니에게 그것을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해 주게. 천황(天皇)의 종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그놈들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

“......!”

등룡풍은 긴장된 표정으로 천면신마를 주시했다.

아! 이미 천면신마의 손 끝은 검푸른 독수로 녹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면신마는 사력을 다해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주게나. 노부...... 추망(醜亡)은...... 한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그것이 천면신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쿵!

마침내 그는 모로 쓰러졌다.

그러자,

츠으......

기다렸다는 듯 이내 그의 신체는 급격히 검푸른 독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면신마,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

등룡풍은 멍하니 독수로 변한 천면신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천년시독! 정말 지독하구나!”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편히 잠드시기를.....! 노인장의 유언은 잊지 않겠어요.”

그는 경건하게 합장하며 천면신마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려 보았다.

“반야암(般若庵)...... 반야신니(般若神尼)......!”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등룡풍은 침중한 안색으로 천면신마의 시체를 거두었다. 시체라고 하나 시퍼런 독수와 몇 줌의 녹지 않은 모발이 전부였지만......

툭......!

헌데 등룡풍이 천면신마의 회색장포를 집어들자 무엇인가 발 끝으로 떨어졌다.

“......!”

그것은 검은색의 가죽주머니였다.

등룡풍은 허리를 굽혀 가죽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한 권의 비급과 여러가지 변장도구가 들어 있었다.

등룡풍은 먼저 비급을 꺼내 펼쳐보았다.

 

<천면경(千面經).>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천면......경?”

등룡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비급을 한 장 넘겨보았다. 그러자 깨알같이 빽빽한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

등룡풍은 호기심을 느끼며 비급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추망(醜亡)은 우연히 천축(天竺) 유가문(兪家門)의 비급 반부를 얻게 되었다. 그것에는 골격과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축골역형신공(縮骨易形神功)의 구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래 추괴한 용모를 지녔던 노납은 뛸 듯이 기뻐했으며 축골역형신공을 연구하여 천 개의 얼굴(千面)을 지니게 되니...... 뭇 중생들이 노납을 일컬어 천면신마(千面魔宗)이라고 했다...... 중략...... 노납의 공부가 모자라 축골역형신공의 마지막 단계인 전능환영결(全能幻影訣)을 연마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노부 필생의 한 가지 원한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대충 그러했다.

천면경은 천면신마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천면신마는 오래 전에 멸망한 천축 유가문의 비급 반부를 얻었었다. 그의 천면절기는 바로 그 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 비급의 절기로 천 개의 얼굴을 지녀 천하를 우롱할 수 있었다.

등룡풍은 모르고 있었으나 천면신마란 이름은 무림최고의 신비로 통했다.

등룡풍은 천면경을 덮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후인을 만나면 전해 주어야지!”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천면신마가 건네준 길쭉한 물체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인데 이 노인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 했을까?”

그것은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무명천을 통해 싸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등룡풍은 조심스럽게 무명천을 풀어보았다.

순간,

“칼(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무명천 속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칼(刀)이었다.

하지만 등룡풍이 놀란 이유는 그 칼이 너무도 볼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길이는 석 자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칼 전체에는 녹이 덕지덕지 앉아 있어 도저히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녹슨 칼의 손잡이에는 흐릿한 전자체(篆字體)로 도명(刀名)이 새겨져있었다.

 

-도왕(刀王) 치우(蚩尤).

 

그것을 본 등룡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왕? 이 녹슨 쇠붙이가 칼(刀)의 제왕(帝王)이라고?”

그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무명천으로 다시 도왕 치우를 둘둘 말아 쌌다.

“어쨌든 부탁을 받았으니 반야암이란 곳에 전해 주기는 전해 주어야지!”

등룡풍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치우신도를 조심스럽게 싸들고 석실을 나섰다.

 

* * *

 

쉬-이잉!

거친 모래바람이 뿌옇게 옥문관 일대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황량한 바람 속으로 흐릿한 태양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朝),

마침내 하루가 열리는 아침인 것이다.

태양이 떠올라 추위는 다소 덜해진 듯했다. 하나, 거칠고 사나운 모랫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불동(千佛洞).

 

옥문관 너머 서역쪽 삼십여 리 부근에는 가파른 절벽이 하나 서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석벽을 파고 그곳에 수많은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하여 천불동, 또는 막고굴(莫古窟)이라 불리웠다.

당대(唐代)에 천축(天竺)을 다녀온 신라국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往吾天竺國傳)을 남긴 동굴의 암자도 바로 이곳 천불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문득 모랫바람 속으로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세찬 바람을 뚫고 옥문관 쪽에선 일인(一人) 일기(一騎)가 나타났다. 아니, 그중 일기는 말(馬)이 아니라 한 필의 늙은 당나귀(驢)였다.

당나귀의 등 위에는 전신을 온통 두터운 천으로 감싼 한 명의 소년이 타고 있었다. 소년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눈에 들어갈까 봐 당나귀의 갈기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었다.

따각...... 따각......

늙은 당나귀는 소년을 태우고 천천히 천불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힘은 없으나 그 대신 노련한 그 당나귀는 기승스런 사풍 속에서도 제대로 천불동을 찾아온 것이었다.

“반야암(般若庵)은 저쪽이었지!”

소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전면을 주시했다.

등룡풍! 소년은 바로 등룡풍이었다.

뿌연 모랫바람 속으로 두 개의 절벽이 맞닿은 아늑한 골짜기가 바라다 보였다. 그 골짜기는 천불곡(千佛谷)이라 불렸으며 그 끝에 한 채의 암자가 절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반야암(般若庵).>

 

그 암자가 바로 반야암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반야암에는 여승들, 즉 비구니들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곡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등룡풍도 몇 번 천불동에는 왔었으나 반야암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등룡풍은 힘들어 하는 늙은 당나귀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푸르르.....!

당나귀는 한 차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 느린 걸음을 옮겨 천불곡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헌데 천불곡의 입구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연 무엇을 발견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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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새벽의 방문자

 

 

 

-옥문관(玉門關)!

 

중원의 끝자락에 자리한 야만(野蠻)과 풍요(豊饒)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

잘 알려진 대로 옥문관은 중원에서 서역(西域)으로 드나드는 관문이다. 옥문관을 넘어서면 인간은 문명의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자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만 한다.

전한(前漢)시대 월지(月氏)를 찾아나섰던 장건(張騫) 이래 야심과 청운의 꿈을 품고 옥문관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불귀고혼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다 알겠는가?

때는 여명(黎明) 무렵이다.

쉬이잉! 쐐애앵!

비단폭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를 머금은 삭풍(朔風)이다. 옥문관 너머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황야에서 불어오는 이 삭풍에는 다량의 모래까지 섞여 있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삭풍의 기세등등함 때문인지 옥문관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량한 분지 중앙에 사암(砂岩)을 쌓아 구축한 성벽 안쪽에는 천여 채의 가옥들이 넓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시사철 서역에서 불어오는 드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옥문관 일대의 가옥들은 모두 지붕이 낮은 토담집들이었다.

두두두......

문득 여명의 적막을 깨고 남쪽으로부터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필의 건마(建馬)가 옥문관의 남쪽 대로로 쫓기듯 달려들어 왔다.

푸르르!

건마는 먼길을 달려온 듯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고 있는데 전신에서는 피같이 검붉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것은 땀이 아니었다.

피(血)!

건마의 전신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후두둑......

건마가 지나는 땅에는 검붉은 피와 땀이 뒤섞여 뿌려진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인물이 말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일신에 빛바랜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그 역시 타고 있는 말과 같이 전신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원래 회색이던 그 사람의 장포는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말갈기에 파묻고 있어 용모와 나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회포인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두두두......

일인일마(一人一馬)는 기승을 부리는 삭풍을 뚫고 옥문관의 대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헌데, 대로의 북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히히힝-!

돌연 건마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너무 지치고 탈진하여 마침내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쿠-웅!

선혈을 지면으로 흩뿌리며 건마의 몸뚱이는 거칠게 길 중간으로 나뒹굴었다.

“크-윽!”

그와함께 말 등에 타고 있던 회포인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길바닦에 나뒹굴었다.

후두둑!

회포인이 나뒹군 주위는 삽시에 그의 몸에서 뿌려진 선혈로 검붉게 물들었다.

“미...... 미련한 축생(畜生)! 너마저 노부를 죽이려느냐?”

회포인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며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제서야 드러난 회포인의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포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설령 유의하여 뇌리에 새겨두었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푸르르.....!

회포인을 태우고 온 말이 간신히 비칠거리며 일어서더니 주인에게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미물! 그래도 노부가 주인인 것을 잊지 않았느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말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히힝-!

두두두......!

그러자 말은 주인이 정말 자기를 때리는 것으로 알고 깜짝 놀라 울부짖으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본 회포노인은 안색이 홱 변했다.

“아...... 안돼, 돌아와라!”

회포노인은 다급히 부르짖으며 일어났다.

두두두!

하지만 놀란 말은 길길이 날뛰는 모래바람을 뚫고 삽시에 노인의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으...... 천불동(天佛洞)이 지척인데...... 여기서 이 지경이 되다니......!”

말이 달아나자 회포노인은 낙심하여 신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크-윽!”

콰당탕!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해 회포노인은 다시 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기력이 쇄진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헌데 노인은 정신을 잃고서도 예의 무명천으로 싼 길쭉한 물체를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쉬-이잉! 고오오!

다시 칼날 같은 모래바람이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스으...... 스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포노인의 몸은 점점 휘날리는 모래 속으로 파묻혀 갔다. 오랜 시간 지속된 출혈과 삭풍에 실려온 한기로 인해 노인은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 어느 집에서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설사 깨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날같이 매서운 모래바람이 두려워 밖에 나올 엄두도 못낼 것이므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문득 대로의 우측에 있는 나지막한 토담집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조금 열려진 나무문 틈으로 불쑥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여우털로 만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칠팔세 가량 되었을까? 서북 변방의 아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에 섬세한 윤곽을 지닌 소년이었다. 짙은 검미와 곧은 콧날, 유난히 붉고 선명한 입술이 흰 피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소년의 두 눈은 더없이 맑고 초롱초롱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게 반짝이며 지혜로 가득 찬 소년의 두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끌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 사람이잖아!”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던 소년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며 동그랗게 떠졌다.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회포노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소년은 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휘이잉!

집을 나서는 순간 드센 모래바람이 소년의 크지 않은 체구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뛰듯이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지독하게 다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겠는 걸!”

소년은 회포노인의 온몸이 무수한 상처로 뒤덮인 것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차!”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회포노인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넣어 질질 끌고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회포노인의 몸은 의외로 무거워 소년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년은 회포노인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간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주위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닦고 급히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쉬-이잉!

다시 거센 모래바람이 대로를 스치며 회포노인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채 일다경(一茶更)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화라락!

거친 모래바람을 타고 하나의 인영이 회포노인이 쓰러졌던 곳에 날아내렸다.

“......!”

길에 내려서자마자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는 이 인물은 구척의 당당한 체구에 검붉은 자색(紫色)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이 노인은 얼굴에도 은은한 자색(紫色)이 떠돌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배에까지 닿아있는 긴 수염 역시 짙은 자색을 띠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자면인(紫面人)의 눈은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가 강인하면서도 사나운 인상을 풍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삼엄하고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화드득-!

거센 삭풍이 자면인의 옷깃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하지만 자면인은 미동도 않고 우뚝 선 채 매섭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번쩍!

그러던 어느 순간 여우털 모자를 쓴 소년이 들어간 집쪽을 주시하던 자면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일어났다.

자면인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년의 집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검붉은 자색의 광채가 번져나오는 자면인의 눈에 소년의 집 문설주에 한줄기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들어왔다.

“흥! 천면신마(千面神魔)! 그렇게도 구차하게 살고 싶었는가! 쥐새끼같이 이런 오두막집에 기어들어가다니......!”

자면인은 얄팍한 입술 끝을 올리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쾅!

다음 순간 자면인은 발로 거칠게 나무문을 걷어찼다.

쉬-이잉!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친 모랫바람이 집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

자면인은 매서운 눈길로 빠르게 집 안을 살펴보았다.

열려진 나무 문 안쪽은 넓지 않은 거실인데 천정에는 수많은 약봉지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거실 저 편으로 부엌과 방으로 통하는 문 두 개가 보였다.

한데 맨 흙이 드러나 있는 거실 바닥에는 금방 흘린 듯한 선혈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자면인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천면신마! 언제까지 쥐새끼같이 숨어 있을 작정인가?”

그러면서 집 안쪽에 대고 우렁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세요? 저희 약포(藥鋪)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요!”

약간 짜증이 섞인 소년의 음성이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끼-익!

이어 부엌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걸어나왔다. 물론 회포노인을 구한 그 소년이었다.

“......”

한데, 소년을 보는 순간 자면인은 그만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소년은 몸 여기저기에 온통 시뻘건 피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오른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왼손은 목이 잘린 닭을 움켜쥐고 있다. 그 닭은 방금 전에 목이 잘린 듯 다리와 날개를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자면인의 얼굴이 일순 낭패로 물들었다.

(닭피였는가?)

순간 그는 질풍같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집안을 둘러보았다.

“......”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큼직한 두 눈에는 은은한 조소의 빛이 떠돌았다. 자면인이 그것을 보았다면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으음......”

한 차례 집안을 둘러번 자면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건 뭐냐?”

자면인은 자색의 광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의 손에 들린 닭을 주시했다.

자면인의 살기어린 시선을 접한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이...... 이거요? 보시다시피 제 아침거리인데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바람에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어요.”

그는 모가지 잘린 닭을 들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면인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의 태도에서 조금도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지만 자면인은 의심을 다 풀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소년은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용풍(龍風). 등룡풍(登龍風)이라고 해요.”

“등룡풍......”

자면인은 소년의 이름을 입 안으로 되뇌이며 다시 한 번 대청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천정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약봉지에 이르렀다. 아마도 소년 등룡풍의 집은 약포를 하는 듯했다.

자면인은 다시 등룡풍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안에 어른들은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등룡풍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버님과 저 단둘인데...... 아버님은 장성 너머로 채약하러 가셨어요.”

“그래?”

번-쩍!

무심코 중얼거리던 자면인의 눈이 돌연 급격한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검미를 곤두세우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의 아래 위를 살폈다.

(대단한 골격이다!)

꽉 움켜쥔 자면인의 손으로 문득 땀이 배어흘렀다. 그제서야 그는 소년 등룡풍의 골격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알아본 것이다.

소년의 체격은 일견하여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실로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면인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으나 눈앞의 소년 등룡풍같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골격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이...... 것은 어쩌면 전설 중의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마로 문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

달리 제왕지상(帝王之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골격 중 가장 완벽한 품상을 일컫는 말이다.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임독이맥(任督二脈),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되어 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차 천지현관이 닫히고 임독이맥이 굳어져 버린다. 그래서 지혜가 아둔해 지며 무공을 연마하는 자는 내공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용골호형지체는 달랐다. 그 골격을 지닌 인물은 나이가 들어도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천지현관은 언제나 활짝 열려져 있으며 임독이맥은 영원히 굳어지지 않는다.

내공을 연마하면 막힘없이 증가하여 범인이 백 년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용골호형지체의 인간은 단 일 년이면 얻을 수 있게 된다.

천지현관이 막혀 있지 않아 그의 지혜는 막힘이 없으며 무공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용골호형지체를 지닌 인간이 일견하여 연약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몸이 어머니의 태내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왕품골(帝王品骨)-!

인간 중 가장 완벽한 용골호형지체의 골격을 지닌 소년, 바로 그 소년 등룡풍이 지금 자면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놈이 무공을 연마하면 십 년이 못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적수가 없게 된다!)

자면인은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짝 마름을 느꼈다.

그는 등룡풍을 주시하며 내심 침중하게 생각을 굴렸다.

(이놈은...... 후일 구중천자(九重天子)가 되려는 본좌의 최대최강의 적수가 될 놈이다. 게다가 만일 구중천(九重天)의 다른 놈들 손에 이놈이 들어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면인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자광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열 배 강해졌다.

츠-읏!

순간 등룡풍은 작렬하는 듯한 자면인의 눈빛에 들고 있던 닭을 놓치며 휘청 물러섰다.

(눈이...... 타는 듯하다!)

자면인의 두 눈은 뚫어질 듯 등룡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죽이든지 아니면 본좌의 제자로 삼든지 해야만 한다!)

그의 눈이 문득 살기로 붉게 물들었다.

쩌정!

다음 순간 그의 손 끝에서 벼락치는 듯한 자색의 벼락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등룡풍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 사람......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비칠비칠 물러섰다.

자면인은 그런 등룡풍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쩌저정-!

자색벼락이 흐르는 그의 오늘손이 점점 치켜 들려졌다. 그의 손이 내려쳐지면 등룡풍은 채 싹도 피워보기 전에 한줌 피모래로 화할 판국이었다.

등룡풍은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그로서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헌데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흐흐흐흐! 놀라운데? 당당한 제왕천(帝王天)의 천주(天主) 자면제왕(紫面帝王)께서 무공도 모르는 소년을 헤치려 하다니......!”

돌연 문 밖에서 한 줄기 싸늘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자면인, 자면제왕(紫面帝王)의 입에서 벼락치는 듯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꽈르릉!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홱 뒤집히며 집 밖으로 한 줄기 자색벼락을 후려쳐냈다.

빠카카캉!

직후 철벽(鐵壁)을 두드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썩 집안을 뒤흔들었다. 그와함께 마치 폭풍이 불어닦친 것같은 엄청난 돌풍이 문밖의 대로를 휩쓸어 자욱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

그러나 직후 자면인은 강력한 반탄력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집밖의 누군가가 마주 쳐낸 강력한 장력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던 것이다. 자면제왕은 자칫 그 반진에 밀려 한 걸음 밀려날뻔 했던 것이다.

자면제왕이 어깨를 들썩일 때였다,

“크읏! 자전신강(紫電神罡)! 역시 명불허전인데......!”

쿵쿵!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집밖에서 누군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휘청휘청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거푸 다섯걸음을 물러나서야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저놈은...!)

몸을 세운 그 인물을 바라본 자면제왕의 날카로운 눈에서 번뜩 이채가 흘러나왔다.

나타난 인물은 일신에 피칠을 한 듯 붉은 혈포를 걸친 거한(巨漢)이었다. 구척이 넘는 당당한 거구를 지닌 인물인데 기이하게도 그자의 몸 전체에는 핏빛의 털(血毛)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털이 나지 않은 곳은 얼굴의 앞부분 외에는 없었다. 흡사 거대한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괴인(怪人)이었다.

혈모괴인(血毛怪人)의 두 눈에는 핏빛 안광이 벼락치듯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자면인에 못지 않은 패도적인 눈빛이었다.

“혈왕천(血王天)의 제이인자...... 야수혈마(野獸血魔)!”

혈모괴인을 본 자면인의 입에서 앓는 듯한 한 소리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큿! 역시 무섭소. 자칫 천주(天主)의 손에 극락구경을 할 뻔했구료.”

야수혈왕이라 불린 괴인은 음침한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오싹한 느낌을 준다.

자면제왕은 집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왕천까지 이번 일에 흥미를 느꼈다니 놀랍군.”

“크큿! 별 말씀을...... 육합천병(六合天兵)에 흥미를 지닌 것은 비단 당신의 제왕천이나 우리 혈왕천 뿐만이 아니외다.”

야수혈마는 음침하게 말을 받으며 흘깃 자면제왕의 뒤에 서있는 소년 등룡풍을 주시했다.

직후 그의 눈에서도 은은한 경악의 빛이 흘렀다. 아수혈마 역시 등룡풍의 뛰어난 골격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자면제왕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몸을 약간 움직여 등룡풍의 모습을 가렸다. 이어, 그는 야수혈마의 흥미를 등룡풍에게서 옮기려는 의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혈왕천의 여제(女帝) 혈모(血母)께서도 천면신마를 쫓아 이곳까지 오셨소?”

“혈모께서는......”

야수혈마는 두 눈을 야릇하게 번뜩이며 무엇이라 말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삐이익-!

돌연 한 소리 날카로운 호각성이 서북방에서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회포노인이 타고온 말이 달아난 곳이었다.

“......”

“......”

자면제왕과 야수혈마는 동시에 흠칫했다.

“천면신마의 종적이 발견된 듯하구료. 노부는 이만 실례하오.”

피-잉!

다음 순간 야수혈마는 히죽 웃으며 유령같이 모랫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도 아니고 야수고 아닌 기분 나쁜 놈!”

자면제왕은 야수혈마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언젠가 네놈의 보기 싫은 껍질을 노부의 손으로 벗겨 버린다!”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흘렀다.

이어 그는 다시 등룡풍에게로 돌아섰다.

“......!”

등룡풍을 바라보는 자면제왕의 눈빛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변했다.

등룡풍은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생사가 몇 차례나 뒤바뀌고 있음을 알고 내심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자면제왕은 결심을 한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으면 너를 본좌의 제자로 삼겠지만...... 치우신도(蚩尤神刀)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팟!

그는 말과 함께 등룡풍의 미간을 향해 섬전같이 일지(一指)를 찔렀다.

“악!”

쿵쿵!

순간 등룡풍은 미간을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비칠 물러섰다. 그런 그의 미간에 어느 틈엔가 은은한 자색의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진 용무늬를 본 자면제왕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흐흣! 너는 노부의 자룡쇄심인(紫龍碎心印)에 제압당했다! 일 년 내로 노부가 그것을 풀어 주지 않으면 너는 대뇌가 녹아 들어가 죽고 만다. 살고 싶다면...... 청해(靑海)의 제왕보(帝王堡)로 노부 자면제왕 독고황(獨孤皇)을 찾아와랏!”

자면제왕은 등룡풍에게 음산하게 웃어보이고는 유령같이 몸을 날렸다.

스으......

이내 자면제왕의 모습은 등룡풍의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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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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