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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저녁 무렵. 절영도

원숭이들이 과일을 따 나르는 동굴. 원숭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과일은 들고 있지 않고 대신 손에 손에 조롱박을 반으로 갈라 만든 바가지를 들고 있다.

이군악; [소란피우지 말고 얌전하게들 기다려라. 곧 기막힌 걸 맛보게 해줄 테니...] 딸각! 딸각!동굴 내부. 이군악이 대나무로 촘촘하게 짠 길쭉한 바구니를 하나 들고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말한다. 대나무 바구니는 한 아름 정도 굵기에 길이는 1.5미터 정도인데 바로 막걸리나 과실주들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다. 허리춤에는 말린 조롱박을 반으로 갈라 만든 바가지와 조롱박을 가르지 않고 속만 파내서 만든 술 호로가 몇 개 묶여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낸다.

끼이! 끼! 이군악의 뒤쪽에는 원숭이들이 바글거린다. 하지만 이군악을 무서워해서 질서를 지킨다. 원숭이들은 주로 동굴 입구쪽에 빼곡히 몰려있다. 원숭이들의 키는 대부분 이군악의 허리쯤 오는 정도로 작다.

이군악; [이게 가장 먼저 담근 거니까 개봉도 가장 먼저 해야겠지?] 이윽고 동굴 가장 안쪽에 있는 구덩이 앞에 멈춰 서서 바닥을 내려다본다. 구덩이는 바나나 잎사귀등으로 두텁게 덮여있다

슈우! 슈! 두껍게 덮어놓은 대나무 잎사귀 사이로 흘러나오는 냄새

이군악; [냄새 죽이네.] 코를 벌름 거리며 음미한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그런 이군악의 코로 냄새가 흘러들어가고

이군악; [잡내 없이 과일 향만 상큼하게 나는 걸 보니 제대로 술이 된 것같다.] 몸을 숙여서 바나나 잎사귀들을 걷어내기 시작하고

털썩! 원숭이들이 보는 가운데 구덩이 옆에 쌓이는 대나무 잎사귀들

이군악; (날씨가 더웠던 탓인지 불과 며칠만에 과일들이 확실하게 삭았다.) 마지막 잎사귀를 들어내면서 구덩이를 들여다보고

드러나는 구덩이. 과일들이 흐물흐물해졌고 물이 표면에까지 걸죽하다. 과일들이 삭아서 술이 된 모습이고

끼끼! 끼! 원숭이들도 코를 벌름거리며 구덩이 주변으로 몰려들고

이군악; [기다려!] 원숭이들을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고. 그러자

끼이! 끼! 원숭이들이 이군악의 눈치를 보며 멈춰선다. 구덩이에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이군악; [회가 동해도 조금만 더 참아라. 이대로는 마실 수 없으니까.] 용수의 끝을 걸죽하게 삭은 구덩이 속의 과일 들 위로 대고

이군악; [사부가 구해다주신 책에도 담근 술을 마시려면 먼저 용수(대나무나 싸릿대로 만든 술 거르는 도구)로 걸러야한다고 적혀있었다.] 슈욱! 길쭉한 용수를 구덩이에 힘주어 내리누르고. 용수는 삭은 과일들 속으로 쑤욱 끼워진다. 그러자

콸콸! 끼워진 용수의 촘촘한 틈새로 맑은 술들이 흘러들어 안쪽에 가득 고이고.

이군악; [이게 책으로만 읽었던 술이란 말이지?] 술이 용수 안에 고이는 걸 보며 허리에 차고 있던 바가지를 하나 빼들고

이군악;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하군.] 철벅! 그 바가지로 용수 안에 고인 술을 뜨는 이군악

모든 원숭이들이 입맛 다시며 보고

꿀꺽! 꿀꺽! 술을 마시는 이군악. 원숭이들도 고개를 들면서 침을 삼키고

바가지를 입에서 떼는 이군악

원숭이들이 기대에 차서 보는데

이군악; [카아!] 왼손으로 자기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깜짝 놀라는 원숭이들

이군악; [죽인다 죽여! 상큼한 데다가 향기가 기가 막혀.] 다시 바가지로 술을 퍼서

이군악; [그동안 수고했다. 모두 한잔씩 해라!] 바가지의 술을 허공에 휙 던지고. 이군악의 바가지를 떠난 술은 흩어지지 않고 덩어리채 날아가서

철벅! 가까이에 있는 원숭이가 내민 조롱박 바가지에 고인다

끼끼! 신나서 술 마시는 원숭이

끼끼! 끼끼! 다른 놈들도 아우성치며 바가지를 내밀고

이군악; [이놈들아! 안달하지 마라. 술은 충분하게 있으니까.] 촤촤촤! 연달아 술을 퍼서 날리고, 역시 덩어리진 채 날아가는 술들

원숭이들이 내민 바가지에 정확히 떨어져 고인다

다함께 술을 마시면서 신나하는 원숭이들. 연신 술을 퍼서 원숭이들이 내밀 술잔을 채워주는 이군악. 그러다가

동굴 밖을 보는 이군악

원숭이들의 두독 원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이군악; (저놈이 사부의 지시로 날 감시하러 왔군.) + [원왕도 들어와서 한잔해!] 술을 채운 술잔을 들어 보이지만

실룩거리며 고개 젓는 원왕

이군악; [사양할 거 없어. 내가 처음 술을 만든 날인데 원왕도 동참해서 축하해줘야잖아.] 슉! 술이 가득 든 바가지를 원왕에게 날리고. 바가지채로 날린 것임을 주의

끼이! 고개 저으며 물러서는 원왕. 하지만

출렁! 원왕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추며 술이 출렁거리는 바가지

술에서 나는 냄새가 원왕의 코로 스며들고

꿀꺽! 침 삼키며 술이 든 바가지를 보는 원왕

젊은 원숭이들 술 마시면서 그런 원왕을 곁눈질하고

이군악; [참을 거 없어. 향기와 맛도 기막히지만 마시면 기분도 정말 좋아져.] 다른 바가지로 술을 푸면서 웃고

꿀꺽! 침이 원왕의 목으로 넘어가고

턱! 별수 없이 두손으로 바가지를 잡는 원왕

꿀꺽! 꿀꺽! 마시고

끼끼! 까아! 좋아하는 다른 원숭이들. 그 배경으로 술을 마시는 원왕

이군악; (됐어!) 다른 바가지로 술을 푸면서 웃고. 원왕은 술을 거의 다 마셨고

이군악; (마시지 않았으면 몰라도 일단 마신 이상 한잔으로 끝날 수가 없을 걸?) + [한잔 더 받아.] 촤아! 술을 뭉쳐서 다시 원왕에게 던지고

빈 바가지를 내밀어서 받는 원왕.

이군악; [너희들도 받아라!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 함께 취해보자.] 철퍽! 철퍽! 연신 술을 퍼서 다른 원숭이들에게도 던져주고. 이군악이 던져주는 뭉친 술을 바가지로 받으며 좋아하는 원숭이들.

<귀찮은 고자질쟁이 원왕의 입만 막으면 내 계획은 절반 이상 성공한 셈이 되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원왕과 원숭이들 배경으로 역시 술을 마시며 웃는 이군악

 

#9>

밤. 절영도. 하늘에는 보름달

이군악이 술을 담근 동굴. 동굴 주변에 원숭이들이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잠이 들어 있다.

동굴 내부에도 원숭이들이 술에 취해 잠이 들어있는데 원왕과 이군악만 마주 앉아 대작을 하고 있다. 과일이 그득 든 구덩이 옆에서. 이군악의 몸에서는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내공으로 술 기운을 날려 보내고 있는 것. 이하의 장면에서 이군악의 몸에서는 계속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이군악; (이 늙은 원숭이는 제법 나이 값을 하는군. 젊은 놈들은 모두 나가떨어졌는데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술 마시면서 자기 앞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원왕을 보고

이군악; (끝내 쓰러지지 않으면 혈도라도 찍어야겠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결판을 내야하니...) 생각할 때

툭! 바가지를 떨구는 원왕.

이군악이 흠칫! 할 때

음냐! 눈이 풀리며 옆으로 쓰러지는 원왕

털썩! 바닥에 널부러지는 원왕. 이어

드르렁! 푸우! 사람처럼 코를 골며 잠에 빠지는 원왕

이군악; (그럼 그렇지.) 조롱박으로 만든 술잔을 입에서 떼고

이군악; (나야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써서 술기운을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무공을 모르는 원숭이들은 취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다.) 휙! 바가지를 옆으로 던지고

빠각! 바닥에 떨어지는 바가지

이군악; (훼방꾼도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절영도에서의 탈출 준비를 해볼까?) 구덩이 쪽으로 돌아앉아서

이군악; (소림칠십이절기중의 관음세맥심법(觀音洗脈心法)은 몸속의 노폐물을 씻어내어 환골탈태(換骨奪胎)에 이르게 해주는 비결이다.) 첨벙! 한손을 구덩이에 끼워져 있는 용수 안의 술에 집어넣는다.

이군악; (혈관과 경맥 속에 쌓이는 불필요한 성분만 골라서 배출할 수 있게 해주는 건데...) 지잉! 술 속에 들어간 이군악의 손이 팔뚝까지 빛을 발하고

이군악; (이걸 역으로 운용하면 술 속에서 특정한 성분만 뽑아낼 수도 있다.) 지지징! 술 속에 집어넣은 이군악의 손이 진동하며 더 강한 빛을 발하고

스스스! 그와 함께 이군악의 손이 들어가 있는 용수의 색이 맑아진다. 술이 맑아지면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군악의 손이 보이는데. 웅크려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형태를 하고 있는 이군악의 손이 빛을 발한다.

이군악; (됐다!) 촤아! 눈 번뜩이며 술 속에서 손을 뽑아내고

쿵! 이군악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호두알만한 투명한 구슬이다. 진짜 구슬이 아니고 액체가 이군악의 공력에 의해 뭉쳐진 것

이군악; (주정(酒精)!) 손을 동굴의 천장을 향해 펼쳐서 들여다보며 흥분. 구슬같은 액체가 손바닥 위에서 이슬처럼 출렁이며 움직인다.

이군악; (이것이 순수한 술 성분인 주정이인데 엄청난 양의 술에서 뽑아낸 게 겨우 요 정도다.) 왼손으로 옆구리에 찬 호로병을 하나 끌러서

이군악; (보통사람이라면 이 주정 한 방울만 마셔도 몇날 며칠을 곯아떨어지겠지만...) 쪼르르! 웅크린 손바닥을 기울여서 주정을 왼손에 든 호로에 조심스럽게 흘려넣고

이군악; (상대는 천하제일인인 사부다. 사부가 정신을 놓게 만들려면 주정을 최대한 확보해야만 한다.) 호로를 들고 일어나고.

옆의 구덩이로 가는 이군악.

슥! 한 무릎 꿇은 채 손을 바나나 잎사귀로 덮인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지징! 팔뚝까지 달아오르고

다시 꺼낸 이군악의 손에 또 호두알만한 구슬이 들려져 있다.

이군악; (주정을 모으기 위해 술을 담근 것이긴 한데...) 쪼르르! 주정을 호로에 흘려넣고

이군악; (과연 이 주정이 날 추적하는 사부의 발을 얼마나 묶어놓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호로에 주정을 흘려 넣으면서도 긴장하는 이군악.

 

#10>

여전히 밤. 혈나한의 거처인 참회동. 달빛이 비스듬히 흘러들어 그리 어둡지는 않고.

동굴 끝에는 혈나한이 달마도를 보는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 명상 중이고

혈나한; (십년은 더 무공 수련에 매진해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군악이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눈을 감은 채 생각하며 이마를 좀 모으고

혈나한; (하긴 심란하기도 하겠지.) (한창 피가 끓을 나이에 이 절해고도에서 십년을 더 보내야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한숨

혈나한; (하지만 군악이를 지금 강호에 내보내면 거의 확실하게 다섯 짐승들 손에 죽고 만다.)

혈나한; (그놈에게는 안됐지만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 곁에 붙잡아둬야만 한다.) (그때까지는 노납도 피안으로 돌아가는 걸 늦춰야만 하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혈나한; [그놈 참....] 혀를 차고

혈나한; [불제자인 사부의 거처에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오다니...] 스윽! 회전의자에 앉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돌아앉는 혈나한

이군악; [야심한 중에 죄송합니다 사부님.] 참회동 입구에 이군악이 서서 고개를 숙이는데 양손에는 끈으로 묶은 여러 개의 술 호로가 들려있다. 모두 12개다. 두 개씩 끈으로 묶어서 한손에 각기 여섯 개씩 들고 있다.

이군악; [하지만 처음 담근 술을 저와 원숭이들만 마신 게 마음에 걸리지 뭡니까?] 양손에 들고 있는 조롱박으로 만든 술 호로들을 들어 보인다. 술 호로들의 입구는 나뭇가지 자른 것으로 막혀있고

혈나한; [불제자인 사부로 하여금 술을 마셔서 파계를 하게 만들 작정이냐?] 눈 부라리고

이군악; (주정으로 취하게 만들려는 계획은 실패인가?) +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삭 죽어서 고개 숙이고

이군악; [사부님이 술과 육식을 금해야하는 불제자시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이 술은 바다에 쏟아버리겠습니다.] 돌아서려 하고

혈나한; [그럴 것 없다.] 손짓을 하고. 그러자

휙! 투툭! 이군악의 양손에 들린 술병들이 이군악의 손을 떠나 혈나한에게 날아간다. 돌아보는 이군악

혈나한; [힘들여 만든 술을 바다에 쏟아버리면 되겠느냐?] 턱! 날아든 술병을 하나 잡고. 투툭! 툭! 다른 술병들은 혈나한 앞에 볼링 핀처럼 죽 늘어서고. 묶었던 끈들은 저절로 끊어지고

이군악; (살았다.) + [사부님은 명색이 불제자이신 데 술을 드셔도 되는 건지요?] 눈치 보면서 묻고

혈나한; [못 마실 건 또 뭐냐?] 뽁! 혈나한의 손에 들려있는 술 호로 입구를 막고 있던 나뭇가지가 저절로 뽑힌다

혈나한; [수만명을 죽여서 금살계(禁殺戒)를 범한 처지에 술 정도 못 마시겠느냐?] 술 호로 입구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이군악; (하긴....)

혈나한; [게다가 다른 문중은 몰라도 소림사는 술을 금하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하면 육식을 해도 된다는 황제의 특사를 받기까지 했었다.]

이군악; [소림사가 황실을 대신하여 도적이나 반군들을 토벌해온 전통때문이겠군요.]

혈나한; [그렇다.] [들어와라. 사부와 함께 한잔 하도록 하자.]

이군악; [예...] 안으로 들어가고

꿀꺽! 꿀꺽! 술을 마시는 혈나한. 눈치를 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앉는 이군악

혈나한; [카아! 좋구나.] 호로를 입에서 떼고

혈나한; [십오년만에 마셔보는 술이라 그런지 꿀맛이 따로 없구나.]

이군악; [사부님 입맛에 맞으신다니 술을 담근 보람이 있습니다.] 아부

혈나한; [너도 한 잔 해라.] 술병을 향해 고개 짓하며 다시 술을 마시고

이군악; [제자는 저녁 무렵부터 원왕 일행과 많이 마셨습니다. 이번에 가져온 술은 사부님이 모두 드십시오.] 고개 젓고

혈나한; [오냐 오냐!] 꼴꼴! 술을 마시며 좋아하고

혈나한; [효성이 깊은 제자를 둔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입 호강을 하는구나.] 술병을 입에서 떼며 껄껄 웃고

그걸 보며 야릇하게 웃는 이군악.

 

#11>

아주 깊은 밤. 절영도

이군악; [다섯 사형의 자질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지금쯤은 거의 천하무적이 되어 있겠습니다.] 눈치 살피며 말하고. 마주 앉은 혈나한은 거나하게 술이 오른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이제 열 두 개의 술병은 거의 다 비었고. 두 개만 남았다. 빈 술병들은 이리저리 뒹굴고 있지만 마개가 막혀있는 두 개의 술병은 볼링핀처럼 서있다.

혈나한; [천하무적은 무슨...] 툭! 코웃음 치며 빈 술병을 옆으로 던지고.

혈나한; [그놈들이 특출 나긴 해도 천하무적 소리 들을 일은 영원히 없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술병중 하나를 집어들고

이군악; [하긴 사부님이 건재하신 데 천하무적은 가당치도 않겠지요.] 아부

혈나한; [비단 사부뿐만이 아니다.]

혈나한; [세상에는 다섯 짐승들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최소한 네명 이상 있다.] 뽁! 집어든 술병의 입구를 막은 나뭇가지 토막이 저절로 튀어 올라 빠지고

이군악; [네명씩이나!] 놀라고. 딸그락! 술병 입구를 막고 있던 나뭇가지가 바닥에 구르고

이군악; (우연인지 주정이 담긴 호로가 마지막까지 남는군.) + [어떤 인물들인데 사부님의 진전을 이어받은 다섯 사형을 이길 수 있는지요?] 곁눈질로 마지막 남은 술병을 보며

혈나한; [첫번째 인간은 사마외도에서 마교와 쌍벽을 이루는 배교(拜敎)의 태상교주 사존(邪尊) 패극천(貝克天)이다.] 꼴꼴! 술을 마시면서

이군악; [배교의 태상교주...] 눈 반짝이고

이군악; [세상 모든 사파(邪派)의 종가인 배교의 태상교주라면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겠습니다.] 끄덕이고

혈나한; [대단하지! 암! 대단하고 말고.] 술병을 입에서 떼고

혈나한; [사존 패극천은 이 사부에게 대들었다가 살아난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다.] 소매로 입가의 술을 닦으며

이군악; [사존 패극천과 싸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놀라고

혈나한; [사부의 목표가 세상에서 사마외도를 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더냐?] [당연히 마교와 함께 배교도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했었다.]

이군악; [마교의 교주 혼세마존(混世魔尊)을 박살하고 마교를 멸해버리신 얘기는 전에 제자에게 해주셨었지요.]

혈나한; [사부는 그 직후 배교로 쳐들어가서 그놈들의 교주인 화의사신(華衣邪神)도 때려죽이려고 했다.]

혈나한; [바로 그때 전대의 배교 교주였으며 당시에는 은퇴해서 태상교주(太上敎主)가 되어있던 사존 패극천이 들이닥쳤다.]

혈나한; [그래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지만...] [사부도 끝내 그놈을 때려죽이지는 못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 쉬고

이군악; [사존 패극천이 사부님의 능력으로도 죽이지 못할 정도의 고수였습니까?]

혈나한; [죽이려고 했으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사실 패극천 그놈은 사부와...] [에잇! 그만 두자.] 고개 저으며 다시 술을 마시고

이군악; (사부님이 사존 패극천을 때려죽이지 못한 데는 무공 외적인 이유가 있었구나.) 혈나한이 술 마시는 거 보며 눈 반짝

혈나한; [나중에 듣자하니 패극천, 그놈은 내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번뇌인(煩惱刃)을 수련하고 있다더구나.] 술병을 입에서 떼며 비웃고

이군악; [번뇌인은 어떤 무공입니까?]

혈나한; [무공과 사술이 결합된 수작인데...] [제법 쓸만하긴 하지만 수련과정에 몇 번이고 주화입마에 빠지는 단점이 있다.]

이군악; [주화입마에 빠지는 게 필수적인 무공이라니... 가히 전대미문입니다.]

혈나한; [그 때문에 그동안 배교의 그 누구도 번뇌인을 수련할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 고개 끄덕이고

이군악; [헌데 사부님께 당한 수모에 치가 떨린 사존 패극천이 목숨을 걸고 수련하고 있군요.] 눈 반짝

혈나한; [벌써 이십년 넘게 지났으니 패극천의 번뇌인도 제법 성취가 있을 것이다.]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고

혈나한; [물론 수련 도중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꼴꼴! 좀 복잡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술병을 완전히 들어서 그 술병에 든 술을 모두 마신다

이군악; (번뇌인이라...) 술병을 완전히 비우는 혈나한을 보며 생각하고

이군악; (어떤 무공인지 나중에 한번 사존 패극천을 만나봐야겠구나.) 생각할 때

혈나한; [다섯 짐승과 싸워도 지지 않을 다른 두명은 야차서시(夜叉西施)와 삼비검조(三臂劍祖)라는 물건들이다.] 툭! 빈 술병을 역시 집어던지고

이군악; [야차서시와 삼비검조...] [두 사람 다 별호가 범상하지 않군요.] 혈나한이 마지막 술병을 집어드는 걸 보며 말하고

혈나한; [별호뿐 아니라 실력도 범상한 인간들이 아니다.] 뽁! 마지막 술병의 마개도 퉁겨지게 만들고.

이군악; (드디어...) 긴장하며 보고

혈나한; [야차서시는 별호 그대로 야차(夜叉)의 심보와 서시(西施)의 미모를 지닌 할망구다.] [팔십살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절세미녀일 것이다.] 주정이 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고

혈나한; [만일 무림에 나갔을 때 얼굴은 절세미녀인데 머리는 백발인 계집을 만나면 독사를 본 듯 멀찍이 피해야만 한다.] 멈칫! 말하다가 입으로 가져가던 술병을 멈춘다

이군악; (들킨 건가?) 긴장할 때

혈나한; [이 술...]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술의 냄새를 맡고

이군악; [약... 약으로 쓰려고 소주(燒酒)로 내려 봤습니다.] 억지로 웃으며 말하고

혈나한; [소주라...] 킁킁

혈나한; [확실히 지금까지 마신 술들보다는 독한 냄새가 나는군.] 찡그리며 술병을 보고

이군악; [입맛에 맞지 않으실 것같으면 드시지 마십시오.] 비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고

혈나한; [네 녀석이 사부를 어떻게 보고...] 이군악에게 눈을 부라리고

혈나한; [소주가 독하다 한 들 이 사부를 취하게 할 리가 없잖느냐?] 꼴꼴 마시고

이군악; (됐어!) 안도하고

혈나한; [커어!] 조금 마시고 술병에서 입을 떼고

혈나한; [확실히 이놈은 좀 독하구나.] 술병 보고

이군악; [아무래도 그전에 드셨던 과실주와는 다를 것입니다.] 굽신

혈나한; [독하긴 해도 맛이 순수하고 화끈해서 좋구나.] 꼴꼴 다시 마시고. 한꺼번에 많이 마시진 않는다.

이군악; (그렇지!) 안도

이군악; (가능한 많이 드십시오. 두 번 다시 드시지 못할 명주이니...) 웃고

혈나한; [야차서시는 무산(巫山) 신녀문(神女門) 출신으로 술법(術法)과 용독(用毒)의 귀신이다.] 술병을 입에서 떼고. 눈이 좀 풀렸다.

혈나한; [특히 그 할망구가 사용하는 독은 기상천외해서 방비하기 어렵다.] [그러니 가급적 야차서시와는 얽히지 않는 게 좋다.]

이군악; (눈이 좀 풀리신 것처럼 보이는군.) + [명심하겠습니다.] 혈나한의 상태를 살피고

혈나한; [세번째 인물인 삼비검조는 무당파의 태상장로다.] [어검술(馭劍術)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팔이 세 개(三臂)라는 별호를 얻었다.] 꼴꼴 말하면서 다시 술을 마시고

혈나한; [분명 대단한 고수고 또 검법으로는 천하제일이지만...] [패극천이나 야차서시보다는 좀 처지는 늙은이...다.] 말이 좀 꼬인다

이군악; (혀가 꼬이시는 걸 보니 슬슬 주정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같군.) + [다섯 사형들을 상대할 수 있는 마지막 네 번째 인물은 누구입니까?]

혈나한; [그건 바로...] 술병을 입에서 떼고. 눈이 풀렸다.

혈나한; [군악이... 너다.] 몸도 흔들리고

이군악; [제가 네 번째 인물이라니요?] 놀라고

혈나한; [지금까지의 네 성취는 다섯 짐승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혈나한;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게 불과 십년 밖에 안되었으면서 소림칠십이절기를 거의 다 연마해낸 건 소림사의 역사를 통틀어도 유래가 없는...] 툭! 말하다가 고개를 떨구고

이군악; [사부님!] 흠칫! 하며 부르지만

혈나한; [이상... 하군. 잠이 이렇게... 갑자기 쏟아진 경우는... 없는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리고. 잠이 들었다.

이군악; (잠이 들었다.) 침 꿀꺽! 눈 부릅. 흥분

이군악; [사부님! 사부님!] 손을 혈나한의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보지만

코를 골며 잠이 든 혈나한

이군악; (성공이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이군악; (드디어 사부의 마수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벌떡 일어나고

이군악; (일단 대량의 주정을 드신 탓에 잠이 들기는 하셨지만 언제 다시 깨어나실지 모른다.) 살금 살금 뒷걸음질. 흥분을 금치 못하면서

이군악; (정신을 차리시기 전에 가능한 멀리 도망쳐야만 한다.) 돌아서다가

눈 반짝! 하는 이군악.

잠이 든 혈나한의 뒤쪽 방석 위에 얹혀져 있는 금속제의 목탁

이군악; (파번뇌탁....) (태강으로 만들어진 저건 좀 쓸모가 있을 테니 가져가자.) 손을 흔들고

들썩이는 목탁

휘익! 이군악에게 날아오는 목탁.

턱! 목탁을 받아들고

이군악; (사부님! 제자를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오.) 동굴 입구에 서서 목탁을 든 채 포권하고

이군악; (피 끓는 나이인 제자로서는 앞으로 십년을 더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한숨 쉬고

이군악; (비록 몰래 떠나지만 길러주신 사부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개 깊이 숙이고.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이군악; (주책하고는...) 돌아서며 왼손으로 눈가의 눈물 닦고

이군악; (사부를 배신 때리고 도망치는 주제에 무슨 눈물이냐?) 동굴 밖으로 달려간다.

이군악; (두번 다시 사부 앞에 나타나주지 않는 게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내 상판을 안 보셔야 속을 덜 끓이실 테니...) 동굴을 등지고 달려가는 이군악.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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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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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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