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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홉 마리 용()을 삼키다.

 

 

 

온고당에 손님이 끊겼다.

귀엽고 발랄한 분이가 호객을 안하는 탓이다.

해하촌에 놀러온 외지인들은 어둑하고 침침한 가게 안을 기웃거리다가 지나간다.

가게 안쪽 응접실에서는 천불투가 탁자 앞에 앉아서 원숭이 조각들을 닦고 있다.

천불투의 손에 들려진 천은 원숭이 조각의 같은 곳만 닦고 있다.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구나. 뭔가 사달이 날 것같은 예감을 떨칠 수 없고...)

천불투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없이 불안감이 밀려온다.

이런 기분은 십오 년 전의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철두 녀석이 부운이를 데려간 것과 관련 있겠구나.)

천불투가 심란해진 원인을 생각할 때였다.

... 용이 나타났어!”

모두 아홉 마리야!”

가게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

천불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났다.

가게 밖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설마!)

천불투는 급히 온고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

안채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온유향도 놀라 밖을 내다보았다.

... 진짜 용이야!”

검은 용이 나타났어! 그것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천불투가 온고당을 뛰쳐나와 보니 오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물론 폐가가 있는 언덕 쪽이었다.

! 퍼펑!

시커먼 용들이 폐가의 지붕을 뚫고 나와 꿈틀거리고 있다.

어느덧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은 몇 아름 굵기에 지붕 밖으로 빠져나온 부분만 삼, 사장이 될 정도로 거대해져 있다.

(저건 세상에 나타나면 안되는 존재다!)

천불투는 단박에 검은 용들의 위험성을 알아보았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임은 오랜 경험으로 느낄 수 있다.

또 검은 용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현장에 외손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직감했다.

(제발 할애비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거라!)

화악!

천불투는 쏘아진 폭죽처럼 치솟아 언덕 위를 향해 날아갔다.

... 온고당의 조영감이...”

... 하늘을 날았어! 조영감은 무림인이었던 거야!”

사람들이 기겁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신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는 것보다 외손자의 안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크와아앙! 카아!

검은 용들은 폐가의 천장과 지붕을 뚫고 드나들며 난동을 부렸다.

그 바람에 부서진 크고 작은 나무 조각들이 폐가 안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퍼퍽! !

나무 조각들이 웅크리고 있는 분이와 철두, 정칠의 몸을 때렸다.

아이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무릎을 꿇은 채 웅크리고 있는 부운의 몸도 천장과 지붕에서 쏟아지는 파편들에 강타당하고 있었다.

부운은 고통을 참으며 아홉 마리 용들이 자신의 몸으로 파고 들어와 난동을 부리던 경로를 확인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용들이 몸속을 누비고 다니던 경로가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

그때 정칠이 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상당히 큰 석가래 파편이 정칠의 한쪽 다리에 걸쳐져 있다.

수백 근은 나갈 그 파편에 맞아 정칠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던 정칠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번쩍! 번쩍!

검은 용들이 일제히 정칠을 돌아보았다.

크와앙! 카아!

그리고는 해일처럼 정칠과 아이들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더는 시간이 없다.

위치가 들킨 이상 아이들은 검은 용에 의해 소멸당하고 말 것이다.

여기다!”

부운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정칠과 아이들을 노리고 내리꽂히던 검은 용들이 홱 방향을 틀었다.

(안돼 오빠!)

(부운이 저 새끼가 설마 자신을 희생하려고...)

분이와 아이들이 기겁하며 돌아볼 때였다.

오라! 내가 여기 있다!”

빠지지직!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부운의 몸이 벼락에 휘감겼다. 몸속으로 파고 든 용들이 난동을 부리던 경로대로 내공을 운용하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카아! 카앙!

아홉 마리의 검은 용들이 부운에게 돌진해왔다.

크아!”

부운도 입을 딱 벌리며 고함을 질렀다.

쿠오오오!

한껏 벌린 부운의 입 안에서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 투쾅!

직후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이 부운의 얼굴을 강타했다.

 

***

 

빠각!

멀쩡하던 접시가 둘로 쪼개졌다.

...”

온유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혀가 잘려서 말은 못해도 비명이나 신음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나온다.

저녁 준비를 하던 중에 갑자기 접시가 쪼개졌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부운이에게...?)

쪼개진 접시를 든 온유향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용들이 사라지고 있어!”

전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어.”

저게 무슨 조화지?”

온고당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이 주전자 속의 물이 끓듯 한다.

(언덕 위 폐가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고... 의부(義父)님이 그것 때문에 나가신 것 같은데...)

온유향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온고당 입구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예민해진 귀로 천불투가 폐가를 향해 날아간 걸 알고 있었다.

오대신투 중 한명인 천불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운이를 지켜줄 것이다.

그걸 믿으면서도 온유향의 마음은 불 속에 던져진 마른 검불 같았다.

속은 타들어가지만 앞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박복한 계집의 아들을 보우하여주시옵소서!)

쪼개진 접시를 내려놓은 온유향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했다.

 

****

 

분이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른 부운을 향해 검은 용들이 쇄도했다.

검은 용들에 부딪히면 부운의 몸뚱이는 쥐들이나 폐가 안의 기물들처럼 연기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그랬는데 딱 벌린 부운의 입 앞쪽에서 맹렬한 소용돌이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콰콰콰! 고고고!

검은 용들은 그 소용돌이 같은 것에 닿는 순간 확 줄어들고 뒤틀리며 부운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아름이 넘는 굵기의 용들이 손가락 보다 가늘게 압축되고 꼬이며 부운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 ...”

정칠과 철두도 찢어져라 눈을 치뜬 채 입을 뻥끗거리기만 했다.

콰드드! 고오오!

삽시에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은 압축되어 부운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운이 어떻게 거대하고 치명적인 용을 아홉 마리나 삼킬 수 있었는지 아이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츠츠츠! 스스스!

여전히 하나로 뭉쳐져 있던 검은 용들의 꼬리 부분까지 부운에게 삼켜졌다.

!

검은 용들이 완전히 빠져 냐간 빈 향로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와 함께 소용돌이에 가려져 있던 부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까뒤집은 모습인데. 입 안쪽에서는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연기도 뿜어진다.

... 부운오빠!”

분이가 안도하며 환호하며 발딱 일어났다.

(닿는 건 무엇이든 소멸시키는 검은 용들을 어떻게 삼켜버린 건가?)

다리가 부러진 정칠도 끔찍한 통증조차 잊은 채 부운을 보았다.

그때였다.

스륵!

눈을 까뒤집고 있던 부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

분이가 비명을 지르며 부운에게 달려갔다.

!

부운은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채로 나뒹굴었다.

(부운 저 새끼, 죽은 건가?)

(그 무서운 검은 용들을 삼키고도 무사할 리 없지.)

정칠과 철두도 놀라서 부운에게 기어가려 했다..

오빠! 정신 차려!”

부운에게 달려간 분이가 울부짖으며 부운을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

옆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손이 분이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쿠오오!

돌풍을 일으키며 나타난 그 인물은 천불투였다. 변고를 알아차리고 날아온 그가 도착한 것이다.

할아버지!”

천불투를 알아본 분이가 안도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부운의 외조부 조영감!)

(저 영감탱이도 무공을 감춘 고수였구나.)

부러진 다리 때문에 주저앉아있는 정칠과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철두도 놀랐다.

해하촌 사람들은 천불투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부운이 무공을 지닌 걸 알고 있던 정칠과 철두도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내막인지 말해봐라.”

천불투는 분이의 손을 놓으며 부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게... 그게...”

분이는 우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칠! 분이 대신 네가 상황 설명을 해봐라.”

천불투는 깡마른 손을 펼쳐서 부운의 얼굴을 겨누며 정칠에게 말했다.

... 오늘 아침에 성내에서 정영감을 도와 과일 좌판을 하고 있었는데...”

요점만 간단하게!”

지잉!

부운의 얼굴을 겨눈 손바닥을 진동시키며 천불투가 짧게 말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외손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부운이가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정칠이 급히 말했다.

독천존? 무림칠절 중의 독절인 그 독천존을 털었다?”

천불투가 놀라서 정칠을 돌아보았다.

...”

정칠이 천불투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쯧쯧! 그렇게 무모한 짓을...”

천불투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독천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는 무림인은 없다.

무림맹 맹주 사자천존이나 천마련 련주 철면마존에게는 죄를 지어도 독천존에게는 절대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 무림들 사이에 통하는 묵계(默契)였다.

한데 부운은 그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것이다.

천불투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외손자가 왜 독천존을 노렸는지 이해가 갔다. 도척제전에서 우승하기 위해 독천존의 신물을 손에 넣으려 했을 것이다.

... 제 잘못이에요. 부운오빠는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그만 향로를 열어 버렸어요.”

부운 옆에 주저앉은 분이가 울며 말했다.

향로?”

천불투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빈 향로를 돌아보았다.

저 향로의 뚜껑을 열자 안에서 시커먼 용들이 튀어나와서 우릴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자 부운오빠가 우릴 살리려고 그 검은 용들을 들이마신 거예요.”

분이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천불투는 부운이 정신을 잃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부운은 삼키지 말아야할 것을 삼켜버린 상태였다.

독천존의 물건은 일절 남기지 말고 챙겨라. 부운이를 구할 수 있는 단서가 그중에 있을지 모르니...”

천불투는 부운의 상태를 살피는 데 집중하며 말했다.

...”

분이는 엉금 엉금 기어가 빈 향로와 뚜껑을 챙겼다.

철두도 서둘러 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살천독낭에 쓸어담았다.

(부운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죽지는 않았는데 몸속에서 이질적이며 무시무시한 힘이 요동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공을 써서 부운의 상태를 점검하던 천불투의 늙은 얼굴이 당혹과 의혹으로 물들었다.

향로에 봉인되어 있었다는 아홉 마리 용을 삼킨 게 부운이 정신을 잃은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검은 용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천불투로서도 짐작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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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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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풀려난 공포(恐怖)

 

 

 

꽈당!

부운은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뒤로 넘어졌다. 두 손으로 향로를 움켜잡은 채...

오빠! 왜 그래 오빠!”

분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끄윽... !”

온몸이 마비 된 부운은 학질에라도 걸린 듯 벌벌 떨고 있었다.

눈은 뒤집어져 흰자위만 드러내고 있고 숨을 제대로 못 쉬어 꺽꺽거리기만 한다.

부운아!”

무슨 일이냐?”

탁자 건너편에 있던 정칠과 철두도 달려왔다.

몰라! 부운 오빠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고 있어!”

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부운의 팔을 주물렀다.

젠장! 대체 뭔 지랄을 하는 거냐?”

다리는 내가 주무르겠다.”

정칠과 철두도 달려들어 부운의 팔 다리를 주물러 대었다.

!

분이와 정칠에게 팔이 주물리키며 그때까지 부운이 움켜잡고 있던 향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향로가 손에서 떨어진 때문일까?

흰자위를 드러냈던 부운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꺼억...”

그와 함께 꽉 막혀있던 숨통도 트였다.

오빠! 정신이 들어?”

분이가 뺨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부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걱정마라. ... 난 괜잖다.”

부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이를 안심시켰다.

숨통은 트였지만 경련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다. 온몸의 근육이 제 멋대로 펄떡거려서 움직일 수가 없다.

짜식! 사람 식겁하게 만들기나 하고... 대체 왜 그런 거냐?”

정칠이 안도하며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향로... 향로 어디 있냐?”

정신이 돌아온 부운은 억지로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다.”

철두가 자기 무릎 근처에 뒹굴고 있는 향로를 집어들었다.

그 향로... 위험한 물건이다. 조심해서... 탁자에 올려놔라.”

부운이 긴장하여 말했지만 철두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작은 향로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려고...”

분이와의 일도 있고 해서 이래저래 반발심이 생긴 철두는 향로의 뚜껑을 열어보려 했다.

... 열지마라!”

부운은 기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철두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

한데 향로 뚜껑을 열려던 철두가 당황하여 헛바람을 내쉬었다. 용머리 형상인 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데... 뚜껑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인다.”

철두는 향로 뚜껑을 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쓰느라 얼굴이 벌개졌다.

그럼에도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강력한 자석이 뚜껑을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향로에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술법(術法)이 걸려있었지.)

부운은 더 이상 철두를 말리지 않았다.

향로를 통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무엇 하나 확실하게 파악한 게 없다.

그래도 향로에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언지는 몰라도 향로에는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끔찍한 재앙이 들어있다.

그것이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만독조종(萬毒祖宗)은 밀교(密敎)에서 유래한 술법으로 금제를...

(만독조종...!)

향로를 깃들어 있던 내력을 더듬던 부운은 어떤 인물의 별호를 떠올렸다.

처음에 자신을 움켜잡고 있던, 머리가 하늘 끝에 닿앗던 거인의 이름이 만독조종이었다.

참 덩치 값도 못한다. 이리 줘봐.”

철두가 끙끙대는 걸 보고 있다가 답답해진 정칠이 향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정칠이 용을 썼으나 향로 뚜껑은 옴쭉달쭉도 하지 않았다.

거 참 뚜껑이 향로와 일체가 아닌 건 분명한데...”

머쓱해진 정칠이 향로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궁시렁거릴 때였다.

부운 오빠가 위험한 물건이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분이가 정칠 손에서 향로를 낚아챘다.

원래는 부운의 말 대로 향로를 탁자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향로가 손에 들어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예뻐!)

분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향로에 매료되어버렸다.

(온고당에서 수많은 골동품을 봤지만 이 향로만큼 정교하고 예쁜 물건은 본 기억이 없어!)

분이는 홀린 듯이 향로를 살펴보았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아홉 마리 용은 너무도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뚜껑이 안 열린다고 했는데...)

분이는 용머리 형상의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살짝 들었다.

달칵!

그러자 뚜껑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향로와 분리되어 버렸다..

어라!”

분이는 당황했다.

철두와 정칠이 용을 써도 꿈쩍하지 않던 향로 뚜껑이 너무도 간단히 열려버렸다.

뚜껑이 열린 향로 안에는 칠흑처럼 시커먼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츠으! 번쩍!

점성이 느껴지는 검은 액체 속에는 아홉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향로가 열렸잖아!”

정칠이 놀라고 철두와 부운이 분이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향로를 열어버렸어!”

분이가 억지로 웃을 때였다.

닫아라! 빨리!”

부운이 비명처럼 외쳤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외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미안해 오빠!”

깜짝 놀란 분이가 급히 향로의 뚜껑을 닫으려 할 때였다.

!

향로 안에 고여 있던 점성을 지닌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엄마야!”

콰당탕!

분이는 향로는 떨구며 뒤로 발랑 넘어졌다.

! 푸하아악!

향로는 바닥에 떨어지고 그것에서 치솟은 검은 액체는 폭발적으로 증식되었다.

단번에 한 아름이 넘는 굵기가 된 그것은 폐가의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

뭐야 저거...”

철두와 정칠도 기겁하며 물러앉을 때였다.

화악! 쩌저적!

분수처럼 치솟은 검은 액체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갈라지며 퍼졌다.

모두 아홉 갈래로 갈라진 검은 액체들은 영락없는 용의 형상이 되었다. 머리에는 사슴의 그것을 닮은 뿔이 돋아났으며 몸통에서는 세 개의 손톱이 달린 다리 두 쌍이 생겨났다.

다만 아랫부분은 여전히 서로 합쳐진 채 향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 숨을 멈춰라!”

부운은 일어나려 애쓰며 외쳤다.

향로에서 읽은 검은 용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놈은 살아있는 존재의 숨결에 반응한다.

!”

!”

발라당 나뒹군 분이와 뒤로 주저앉았던 철두, 정칠은 다급히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번쩍! 번쩍!

아홉 마리의 검은 용들이 눈을 번뜩이며 부운을 돌아보았다.

(위험...)

부운도 급히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늦어버렸다.

검은 용들은 부운의 숨결을 감지한 후였다.

화악! 크왕!

검은 용들이 부운에게 날아들었다.

부운은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삼보면천의 응용이었다.

삼보면천을 쓰면 기척도 소리도 완전히 죽인 채 움직일 수 있다.

화악! 부악!

검은 용들은 간발의 차이로 부운의 몸통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부운의 기척이 사라지면서 탐지에 실패한 것이다.

푸스스!

그래도 검은 용들과 닿을 뻔했던 부운의 가슴 부분 옷들이 순간적으로 증발되었다.

퍼억! 화악!

부운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용들이 닿은 탁자와 의자들도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맙소사!)

(저 검은 용이 닿은 건 뭐든지 재가 되고 있어!)

그걸 본 분이와 정칠등은 공포에 휩싸였다.

(독이다! 향로에는 지독한 독기가 갇혀 있다가 뚜껑이 열리자 뛰쳐나왔다.)

부운은 바닥에 누운 채 눈을 부릅떴다.

용의 형상을 한 칠흑같이 검은 독기는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영성(靈性)을 지녀서 스스로 판단하여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화악! 쿠오오!

아홉 마리 검은 용은 폐가 내부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닿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시켰다.

탁자와 벽체등이 검은 용들과 접촉하는 즉시 사라졌다.

검은 용들이 품고 있는 독기는 너무도 강력해서 태우는 걸 건너뛰고 연기로 만들어버린다.

! 찌직!

소란에 놀라 여기저기서 쥐들이 기어 나왔다.

검은 용들은 쥐들이 토해내는 숨결을 감지하고 벼락 치듯 달려들었다.

퍼억! 푸스스!

검은 용들에게 덮쳐진 쥐들은 영문도 모르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검은 용들은 시시각각으로 커져서 어느덧 한 아름이 넘는 굵기에 길이는 몇 길이나 되었다.

퍼억! 푸스스!

폐가의 벽체뿐만 아니라 지붕과 석가래들도 거대해진 검은 용에 닿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라! 절대 숨을 쉬면 안된다!>

부운은 억지로 일어나 앉으며 분이와 두 아이에게 전음입밀을 보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서둘러 입구쪽으로 기어갔다.

번쩍! 번쩍!

그때 천장 근처를 휘돌던 검은 용들의 눈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었다.

그놈들은 입구쪽으로 기어가는 분이등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놈들, 호흡뿐 아니라 움직임에도 반응한다.)

부운은 아차 했다. 검은 용들이 움직이는 건 무엇이든 공격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분이 등은 검은 용들에게 공격당한 쥐들처럼 단번에 소멸되고 만다.

움직이지 마라!”

부운은 사력을 다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엄마야!)

(!)

분이등은 기겁하면서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화악! 크와앙!

세 아이를 덮쳐가려던 검은 용들이 방향을 홱 틀어서 부운에게 날아들었다.

(삼보면천!)

부운은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삼보면천을 구사했다.

부운의 몸은 기척도 소리도 없이 한 바퀴 돈 후 바닥에 깃털처럼 쓰러졌다.

슈악! 화악!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검은 용들은 부운의 몸 위로 지나쳤다.

크와앙! 카아!

또 다시 부운을 죽이는데 실패한 검은 용들은 분노하여 몸부림쳤다.

(생각 했던 대로다. 저놈들은 맹목(盲目)이다!)

급격하게 커져서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용들을 올려다보며 부운은 조심스럽게 숨을 흘려내었다.

독으로 이루어진 아홉 마리의 용은 영성을 지니긴 했어도 직접 대상을 보지는 못한다.

대신 생명 반응에 반응을 하는데 호흡에 가장 민감하고 움직임도 감지한다.

콰드득! 퍼석!

검은 용들은 더 거대해져서 이제 지붕을 뚫고 나가기도 했다.

퍼퍽! 터텅!

부서진 천장과 대들보의 파편들이 분이 등 세 아이 주위로 떨어졌다.

크고 작은 파편에 얻어맞았지만 아이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나 혼자라면 삼보면천을 써서 여길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지만...)

부운은 바닥에 누운 채 탁자의 다리 사이로 세 아이를 보았다.

입을 틀어막은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저 아이들이 검은 용들에게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이 건물을 빠져나간다 해도 검은 용들에게 따라잡힐 테고...)

부운은 다급해졌다.

끄윽! !”

입을 틀어먹은 아이들의 얼굴이 시뻘개 지고 있다. 숨을 참는 게 한계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없다! 빨리 타개책을 찾아내야하는데...)

달군 가마솥에 빠진 개미처럼 초조해하던 부운의 머릿솟으로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향로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아홉 마리의 용... 그놈들은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 난동을 부렸었다.

(이제 보니... 그건 단순한 난동이 아니라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부운은 검은 용들이 자신의 몸속을 누비고 다니던 경로를 떠올렸다.

(검은 용들이 치달렸던 경로대로 내공을 운용하면 그놈들을 제어하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부운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위험천만한 시도일 수도 있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면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운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크왕! 콰득! 퍼펑!

그새 더 거대해진 검은 용들은 폐가의 지붕을 여기 저기 뚫고 올라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퍼퍽! !

그 바람에 폐가 지붕의 파편들이 더 많이 떨어져 아이들을 때리고 있다.

아이들은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부운에게는 한 가지 선택 밖에는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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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비한 향로(香爐)

 

 

 

해하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폐가 앞에 세 명의 아이들이 서있었다.

분이와 정칠과 철두다.

세 아이는 초조한 표정으로 해하촌에서 폐가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분이는 달궈진 번철(燔鐵;솥뚜껑 모양의 조리도구) 위의 콩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부운오빠가 돌아오는 게 너무 늦어! 우리 보고 먼저 여기 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설마 잘못 되어서 독천존에게 붙잡힌 건 아니겠지?)

분이는 마주 잡은 두 손을 연신 조물락거리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조것이 아주 애가 타들어가는구만.”

대여섯 걸음 뒤쪽에서 보고 있던 정칠이 혀를 찼다.

하긴 짝사랑하는 낭군께서 무림 칠대고수 중 한명을 털겠다고 나섰는데 태연할 수는 없겠지.”

정칠의 이죽거림을 들은 철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부운이 놈은 좋겠다. 자길 하늘처럼 떠받들어 주는 예쁜이도 있고...”

분이를 놀리던 정칠은 싸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철두가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부운이가 분이에게 낭군까진 아니지. 그래도 걸음마 할 때부터 함께 자란 동네 오빠인데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정칠은 억지로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

철두는 코웃음 치며 분이쪽을 돌아보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꽁하긴...)

정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재주가 그닥 없는 철두는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온다.

정칠도 철두의 뜬금없는 주먹질에 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철두야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발버둥 쳐봤자 넌 부운이의 상대가 못되니까. 용모, 배경, 능력, 그 모든 걸 따져 봐도 네놈이 부운이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철두를 보며 정칠은 코웃음을 쳤다.

분이는 해하촌의 아이답지 않게 귀티 나고 예쁘다.

그런 분이를 철두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만한 아이들은 다 안다.

다만 성격이 무뚝뚝한 탓에 철두는 분이에게 직접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칠은 계집 장사하는 아비를 둔 덕분에 여자들이 남자의 어떤 면에 끌리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찌감치 분이에 대한 헛된 생각을 포기할 수 있었다.

(부운이 놈은 애초부터 철두 네놈이나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정칠이 친구를 위해 근심해줄 때였다.

오빠!”

갑자기 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 뛰었다.

정칠과 철두의 시선이 동시에 해하촌에서 올라오는 길로 향했다.

부운오빠! 무사한 거야?”

분이가 다람쥐처럼 달려 내려가며 외쳤다.

부운이 저 놈, 독천존의 주머니를 터는데 성공한 것 같다. 진짜라면 도둑들의 세계가 발칵 뒤집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거야.”

정칠도 흥분해서 길 아래쪽을 보았다.

해하촌 쪽에서 부운이 올라오고 있다.

한 달음에 달려간 분이가 부운의 팔을 와락 끌어안는 게 보인다.

분이와 함께 올라오는 부운을 보며 철두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죽마고우인 부운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분이가 부운에게 달라붙어있는 걸 보면 부아가 치민다.

! 성공한 거냐?”

정칠이 마중 나가며 외쳤다.

부운은 씨익 웃으며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쳐들었다.

괴물같은 새끼, 정말로 무림 칠대고수 중 한명의 주머니를 털었구나.”

정칠은 자기의 위업인 양 흥분했다.

주변에 기웃거리는 것들 없었냐?”

언덕을 올라온 부운이 물었다.

정칠이 대답했다.

꼬맹이들 몇이 놀고 있길래 엉덩이 걷어차서 쫓아 보냈다.”

잘 했다.”

부운은 앞장서서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분이와 정칠이 따라 들어갔고 맨 나중에 들어간 철두가 문을 닫았다.

 

***

 

문이 닫혀 어둑한 폐가 가운데에는 길쭉한 탁자가 놓여있다. 흑건회 아이들이 훔치거나 얻어온 음식을 나눠먹는 데 주로 쓰이는 탁자다.

정말... 부운이 너 정말 독천존의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한 거냐?”

부운을 따라 탁자로 가며 정칠이 흥분해서 물었다.

이건 네가 살펴봐라.”

부운은 대답대신 두 개의 주머니 중 작은 걸 정칠에게 건네주었다.

전낭이로구나.”

작아도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받은 정칠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게 바로 우내칠절 중 한 명인 독천존의 돈주머니란 말이지?”

정칠은 신이 나서 전낭의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았다.

쨍그렁. 투둑!

전낭에서 동전과 은자, 전표등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지 않네.”

전낭의 내용물을 헤아려본 정칠은 적잖이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전낭에 들어있었던 건 백냥짜리 전표 세 장과 은자 이백냥 정도였다. 무게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동전은 세어볼 가치도 없다.

물론 오백냥도 결코 작은 돈은 아니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이, 삼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다.

단지 독문제일인이라는 주인의 명성에 비해 적을 뿐이다.

이 정도도 많이 갖고 다닌다고 봐야한다. 무림 칠대고수에 드는 인물인데 어디 간들 대접 못 받겠냐?”

철두가 전표의 액면가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하긴 독천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간이든 쓸개든 빼서 바칠 인간들이 줄을 서겠지.”

정칠도 은자와 동전을 정리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칠과 철두 건너편에서는 부운이 가죽 주머니에서 내용물들을 꺼내고 있었다.

그 주머니에 <하늘도 죽이는 독주머니(殺天毒囊)>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있다는 건 부운으로서도 알 리가 없다.

다만 독천존의 물건이라 위험한 게 들어있을 가능성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주머니에는 뭐가 들었냐?”

돈을 세던 정칠이 건너다보며 물었다.

부운은 대답하지 않고 살천독낭에서 꺼낸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늘어놓았다. 밀봉된 작은 주머니들과 도자기, 유리로 만들어진 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저 새끼가 또 내 말을 씹네.)

빈정 상한 정칠이 눈을 흘길 때였다.

독천존이 독을 쓰는 데 있어서 천하제일이라는 건 알 거다. 내가 꺼내놓은 병들과 주머니에는 위험한 게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건드리지 마라.”

부운이 물건들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

모두에게 한 말이지만 부운 옆에 붙어있던 분이가 냉큼 대답했다.

(내가 독천존을 털었다는 증거가 될만한 물건이 있어야할 텐데...)

부운은 살천독낭에 들어있던 물건이 줄어들어감에 따라 초조해졌다.

도척제전에서 우승하려면 독천존의 소유였다는 걸 모두가 인정할만한 물건이 필요하다.

부운이 살천독낭에서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부드러운 사슴 가죽으로 만든 제법 큰 주머니였다. 주머니에는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둥근 물건이 들어있다.

(들어있는 게 상당히 무겁다. 거의 열근(6kg) 가까이 된다.)

부운은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했다.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에 무게가 열근 가까이 된다면 쇳덩이만큼이나 무거운 게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 안에 결정적인 증거가 들어있을 것 같다.)

부운은 사슴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풀기 시작했다.

... 이상하네. 그 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려.”

보고 있던 분이의 얼굴에 열기가 발갛게 피어올랐다.

(분이가 왜 저러지?)

생각지도 않은 분이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부운은 사슴 가죽 주머니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분이는 얼굴이 발개진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주머니를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부운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향로(香爐)였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향로 표면에는 여러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뚜껑이 덮여있다.

일반적인 향로와 달리 연기가 빠져나오는 구멍이 나있지 않은 뚜껑의 중앙에는 용머리 형상인 손잡이가 달려있다.

향로네!”

분이는 눈을 반짝이며 향로를 들여다보았다.

이야! 그건 한 재산 되겠다! 딱 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니...”

건너편의 정칠과 철두의 눈도 휘둥그래졌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주먹 두 개 크기 정도의 향로라면 수천 냥은 족히 나갈 것이다. 빈민가 출신인 아이들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다.

온고당에서 골동품 향로들을 여러 개 봤지만 이렇게 예쁜 향로는 처음이야.”

부운이 사슴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향로를 살피는 걸 보며 분이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향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분이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정말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로를 갖을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분이는 문득 이상을 느꼈다.

부들! 부들!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살펴보던 부운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몸만 떨리는 게 아니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져 있으며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 왜 그래?”

더럭 겁이 난 분이가 부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부운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향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 부운 저 새끼 왜 저래?”

무슨 일이냐?”

탁자 건너편의 정칠과 철두도 변고를 알아차리고 건너다보았다.

정신 차려 오빠! 나 무서워!”

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인 듯이 들린다.

부운은 끔찍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향로를 보자마자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만지기만 하면 물건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써보았다.

천불투가 만천신안일 것이라 추측했던 부운의 능력은 향로에 얽혀있는 모든 내력을 일거에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먹물을 칠한 듯이 시커먼 곳으로 떨어졌다.

그 암흑에는 온몸을 녹이고 분해시키는 끔찍한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암흑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한 인간의 손아귀였다.

머리가 하늘 끝에 닿아있는 그 인물의 영력(靈力), 즉 영적인 힘은 부운이 상상도 못해본 것이었다.

부운은 거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육신과 혼백이 쥐어 짜이고 터지는 충격과 고통을 경험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거인이 지닌 영력의 압력(靈壓)에 압도당해 죽거나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부운이 그리 되지 않은 것은 그의 혼백 속에 들어있는 금강석 같이 단단한 핵심(核心) 덕분이었다.

그 핵심은 거인의 가공할 영압으로도 부술 수 없는 것이었다.

거인 외에도 수많은 인생이 부운의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만독(萬毒)이라는 두 글자로 얽힌 인생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세상을 뒤흔들었던 위인들도 많았지만 처음의 거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인생이 읽혔고 그 중에 어딘지 분이를 닮은 남녀도 본 것 같았다.

향로를 만졌거나 그것과 관련 있는 인생들이 폭풍처럼 지나간 후 돌연 용()이 나타났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아홉 마리였다.

(향로에 새겨져 있던 용들이다!)

부운은 향로에 새겨져 있던 용들이 향로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아홉 마리 용은 부운의 몸을 뚫고 들어왔다.

몸속으로 파고 든 용들은 오장 육부를 찢고 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거인의 가공할 영압에도 견디었지만 실제로 내장이 찢어지고 모든 뼈가 부러지는 것같은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끄아아악!>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부운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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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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