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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저녁 무렵. 해가 서쪽 하늘에 한 뼘쯤 남아있다.

은행나무 아래의 밀실. 청풍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침대에 누워있고.

서문숙은 여전히 책을 쓰고 있다.

한쪽 옆에서 싱크로 수영을 하듯이 나란히 서서 검무를 추는 공손대낭과 권완. 권완은 곁눈질로 공손대낭의 동작을 보고 있다.

공손대낭; [검을 쓸 때는 눈빛마저도 그 법에 맞아야 한답니다.]

공손대낭; [그렇게 되어야만 검이 눈을 뜨고 검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설명하며 검무를 추는데

퍼덕! 청풍의 몸이 세차게 요동을 치고

츄학! 푸학! 온몸에서 피가 뿜어진다

권완; [공자!] 놀라 돌아보고. 공손대낭도 흠칫 멈추고

청풍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벌벌 떨고 있다.

권완; [출... 출혈이 너무 심해요! 이러다 잘못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청풍을 만지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공손대낭; [고정하세요 아가씨!] 어깨를 다독이며 달래고

공손대낭; [공공자는 꿈속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제 정(精)의 일부를 풀인 줄 알고 뜯어먹었어요!]

공손대낭; [제가 정을 나누어주어 혼백을 보호하고 있으니 심각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거예요.]

권완; [고마워요 대낭!] 눈시울을 닦고

공손대낭; [이제 저의 검법은 다 배우셨으니 몸이 익숙해지도록 연습만 하시면 되어요!] 말하며 옆의 벽을 향해 손을 쓸고

스스스! 벽의 일부가 커다란 거울로 변한다

공손대낭; [거울을 보면서 반복 연습을 하세요.] [서두르지 말고 동작 하나 하나를 주시해서 파탄이 일어나는 곳이 없는지 확인하세요!]

권완; [예!] 말하며 거울 속의 자기를 보고

이어 천천히 검을 휘둘러 검무를 추기 시작한다

곧 몰아지경에 들어가 검무를 추는 권완

공손대낭; (몰입이 정말 쉽고 빠른 아가씨야!) 그걸 보며 끄덕이고

공손대낭; (저런 자질이 천재들의 특성이기도 하겠지!) 돌아서고

서문숙에게로 간다

심력을 다해 글을 쓰고 있는 서문숙. 얼굴이 시체같다.

공손대낭; (막바지에 이르셨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문숙이 앉은 좌대 앞에 서서 내려다 보고

공손대낭; (진보의 법기인 저 황금권(黃金券)이 완성되면 인간으로서의 진보의 여정도 끝이 나겠지!)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그때

<위대하신 제왕의 미욱한 신 서문숙은 오늘로 사람의 삶을 다하고 법기(法器)를 후인에게 물려 제왕의 뜻이 만세를 이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비록 신은 가나 신의 충성은 후인을 통하여 남을 것이며.......

-중략-

신 서문숙 이에 엎드려 제왕께 하직을 고하나이다.> 손가락을 휘저어 허공에 글을 쓰는 배경으로

스스스! 허공에 생겨난 한자들이 빈 책장에 내려앉고

두 손으로 책을 받쳐 드는 서문숙. 그러자

스스스! 책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더니 그 속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책 밖으로 튀어나와 dna의 나선 구조처럼 꽈배기를 틀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넘어간 책장들은 글자를 쏟아내고 나서는 한 장씩 한 장씩 사라져버린다.

긴장하며 보는 공손대낭

마지막 장까지 책이 넘겨지면서 글자들이 날아오르고 책장이 사라지며 이제 두툼한 책의 양쪽 표지만 남는다

탁! 책 표지를 두 손으로 합쳐 덮는 서문숙.

이어 책을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자

쏴아아아! 허공에 떠서 돌아가던 수많은 글자들이 황금색 빛을 뿌리는 가루로 변하더니 천천히 책의 표지로 내려와 스며든다.

잠시 후 모든 글자가 가루로 변해 책 표지에 스며들고. 오직 앞뒤의 두터운 표지만 남게 되었고, 표지들은 황금색으로 변했다.

긴 한숨을 쉬며 합장하는 서문숙.

공손대낭; [진보! 마침내 법기가 그대의 정(精)을 온전히 담아 완성되었군요.]

서문숙; [그렇소! 이제야...... 후인에게 전할 만한 법기가 된 듯하구려.] 억지로 웃고

공손대낭; [진보! 전 영원히 그 법기가 완성되지 않기를 바랐답니다.] 주르르 눈물

서문숙; [그대에게 이 늙고 상처 입은 몸을 주게 되었구려.] [그대는 내가 저 아이에게 술법을 전하는 대로 나의 신에 편승하여 승천하도록 하시오.]

공손대낭; [진보. 저는 천육백 년을 살았습니다.] [나무로서 사백 년을 살았고 정(精)이 되어 일천이백 년을 살았지요.] 울면서 죄대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대낭; [하지만 사람이 되어 그대와 단 하루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대를 만난 후부터 바라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승천을 하더라도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다면, 그곳이 바로 저에겐 지옥입니다.] 좌대에 얼굴을 묻고 울고

서문숙; [나도 그대를 만난 후 내 자신이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되지 못함을 한탄했소.] 그런 공손대낭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문숙; [사월이면 그대가 꽃을 피우고 다른 은행나무의 가루를 받을 때면 내게는 오직 슬픔이 있었을 뿐이오!] [그대와 마주선 은행나무가 되지 못함에 하늘을 원망하며 슬퍼했소.]

공손대낭; [저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랍니다.] [봄이 되면 꽃을 피우지 않을 수 없고, 가루를 받으면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나무랍니다.]

공손대낭; [하지만 하늘이 허락하여 행여 사람으로 다시 날 수 있다면, 반드시 여자가 되어 오직 그대만을 따르다가 죽겠습니다.]

서문숙; [그대는 요정이지만 요정의 뒤를 알지 못하고 있구려.] 탄식

서문숙; [그대는 사람과 달라서 승천하지 못하면, 정은 천지간에 흩어지고 필생에 쌓았던 공덕도 그와 함께 흩어지게 되오.]

서문숙; [그대가 흩어지고 나면 우리가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소?] [우리가 우리의 약조대로 한다면, 몇 백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다시 볼 수 있을 거요.]

공손대낭; [진보!]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오열.

서문숙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주시하면서 손으로는 공손대낭의 머리를 쓸며 탄식하고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에 둘이 서로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원컨대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고져

天長地久有時盡 긴 하늘 오랜 땅도 다할 날이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내 슬픈 한은 끊일 때가 없으리...>

검무를 추는 권완과 그 옆에서 울고 있는 공손대낭과 서문숙의 모습 배경으로

 

#100>

구령의 집. 역시 저녁. 서쪽으로 해가 진다. 아직은 해가 서산에 걸린 건 아니고

구령과 함께 건물에서 나오는 공자무. 공자무는 상의 속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치료를 받은 모습이고. 구령은 허리에 가늘고 긴 검, 천궁을 차고 있다.

구령; [유모!] 정원으로 나서며 부르고

스슥! 검은 그림자가 번득하더니 유모가 나타난다.

유모; [아가씨! 불러계시옵니까?] 허리 숙이고

구령; [아이들 전부 모이라고 해!]

유모; [예!] 허리 숙이고

삐익!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날카롭게 불고

휙! 휙!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시녀들. 모두 무장을 했다. 모두 십여명

구령; [유모는 저애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유모; [만마천으로 돌려보내실 작정이 아니신지요?] 안색 살피지만

구령; [모두 들어라!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것이다.]

시녀들 긴장하고

구령; [하지만 너희들을 데려가지 못한다.]

시녀들의 안색이 홱 변한다.

구령; [너희들도 이미 짐작했을 테지만... 나는 암흑철수를 잃었다.] [그로 인해 마도무림 전체와 적이 되어 버렸다.]

사색이 되는 시녀들. 구령을 보거나 서로의 얼굴을 본다. 겁에 질린 표정

구령; [마도에 속한 자들은 누구나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천주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만마천도 예외는 아니다.]

시녀1; [마... 마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요?] 울먹이며 묻고

구령; [이곳엔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들은 너희들을 죽이고 또 죽지 않은 사람은 사로잡아 겁탈하고 고문할 것이다.]

찡그리는 공자무.

사색이 되는 시녀들. 달달 떨고

구령;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단호하게 말하고

공자무; [구령! 그 아이들을 위해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 말하는데. 그 직후

[마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마신(魔神)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시녀들이 일제히 검이나 비수를 뽑아서

목을 찌르거나 가슴을 찔러 자결한다. 칼로 목을 돌리는 여자도 있고

공자무; [너희들....!] 다급히 외치지만

푸학! 털썩!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시녀들. 단번에 시녀들 전멸

공자무; [이.... 이런 무참한 일이...!] 안색이 굳어진다. 그때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구령. 그리고

슈우! 시녀들의 시체에서 검은 기운 같은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더니

슈하아악! 그 기운들이 구령의 몸으로 스며들어간다

구령의 옷과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몸이 칙칙한 빛을 발한다

공자무; (피와 죽음의 기운을 흡수하여 강해지는 혈사극마대법(血死極魔大法)!) 찡그리고

슈우! 그 사이에 아지랑이같은 기운들이 모두 구령의 몸으로 스며들어간다

구령; [잘 가라! 너희들의 육신은 죽었지만 혼백은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눈을 뜨며 팔을 내리고

구령; [이젠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공자무를 돌아보고

공자무; [옳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몸에 쌓이면 업보도 함께 쌓인다는 것을 모르느냐?]

구령; [죽음이라면 혈목재(血穆齊)에서 충분히 보았고 겪었어요!] [일곱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혈목재에 들어가 두 달후 처음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앞장 서서 건물 뒷족으로 걸어간다

구령;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 그 순간부터 제 영혼에는 지워지지 않는 업보가 새겨졌어요!] [기왕의 업보에 몇 개의 죽음이 더해진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앞쪽에 우물이 있다.

공자무; [혈목재가 네 삶을 망쳤구나!] 탄식

구령; [맞아요! 하지만 전 혈목재를 원망하지 않아요!] 우물을 에워싼 1미터 높이의 돌벽 위로 올라서고

구령; [그곳에서 일찍 죽음을 경험했고.... 죽음이 쌓여가는 만큼 저도 강해졌으니까요!] 돌벽 위에 서서 공자무를 돌아보며 웃고

휘익! 이어 우물 안으로 뛰어 든다

공자무도 한숨 쉬며 우물 안으로 뛰어든다

유모가 뒤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뛰어들고

아래로 떨어지면서 손을 위로 뻗어 무엇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는 유모

우두두둑! 그러자 우물 상단의 벽이 우물 안쪽으로 끌어당겨지듯이 무너지고

콰드드! 이어 우물 주변의 흙들도 끌어당겨져서 우물이 있던 자리를 덮어버린다.

완전히 평지처럼 변해버리는 우물이 있던 자리

 

어둑하고 습기가 많은 지하도. 그 지하도롤 걸어가는 구령과 공자무와 유모

구령; [오라버니! 저와 함께 이만 리를 갈 수 있으시겠어요?]

구령; [우리가 이만 리를 죽지 않고 갈 수 있다면 죽는 것은 추적하는 자들입니다.]

공자무; [누구의 피든 피는 모두 붉다.] 한숨

구령; [맞아요! 하지만 내가 흘리지 않는 한 그 붉은 피는 내 피가 아니랍니다.]

구령; [살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죽여야하는 게 강호의 삶이 아니겠어요?]

공자무; [너는...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구나!]

구령; [덕분에 저는 스무살도 안되어서 혈목재 서열일위가 될 수 있었답니다.]

찡그리는 공자무

구령; [아시겠지만 혈목재는 마도무림이 정파무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연맹체에요!]

구령; [혈목재에서는 문파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놓고 경쟁하게 만들어요.]

구령; [아이들 중에는 저처럼 만마천 출신도 있지만 마교(魔敎)나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집마천(集魔天), 여러 군소문파 출신들이 다 섞여 있었어요.]

구령; [문파나 부모가 마도무림 출신이면 누구든지 차별 받지 않고 혈목재에서 마공을 배울 수 있었죠.]

구령; [하지만 혈목재에서는 운이 나빠도 죽고 실력이 나빠도 죽어요.] [다행히 저는 혈목재의 생리에 누구보다도 빨리 적응했어요.]

구령; [그와 함께 저의 운이 살인과 함께 강해진다는 것도 깨달았죠.] [우리같은 마인(魔人)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강해진다는 사실도....!]

구령;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서 마인들의 힘은 자신이 죽인 죽음에 비례해 강해져요.]

구령; [<죽음이 너희를 강하게 하리라!> 이것이 제가 혈목재에 들어가서 처음 들은 말이에요!]

공자무; [마도에서 혈목재의 서열이 무엇보다 중요시 되는 이유가 있었구나.]

구령; [힘께 생사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는 핏줄 보다 더 강한 유대가 생기니까요.]

구령; [물론 이제는 제가 혈목재 서열일위였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자조의 미소

구령; [오히려 저를 죽이면 혈목재 서열 일위가 될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요.]

공자무;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한다.] 따라가서 구령의 어깨를 감싸안고

공자무; [내 복연을 다 포기해서라도 너를 지켜줄 것이다!] 구령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공자무의 가슴에 얼굴을 대는 구령

우울하게 한숨 쉬며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유모

<네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잊지 마라 마고!> 철와선이 협박하던 장면 떠올린다

유모; (아가씨!)

유모; (죄송해요 아가씨! 쇤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답니다!) 울고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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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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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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