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92>

낮. 산 속의 장원. 아담하다. 사람들이 기척이 없고

[호호호호!] 장원의 뒤쪽 잘 가꿔진 정원의 울창한 꽃나무 그늘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서 온 몸을 흔들면서 요란하게 웃고 있는 여자. 만마천의 천주인 마서시 구령이다. 마도무림의 하늘인 만마천은 육천마라는 여섯 명의 늙은 마두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천주인 구령은 명목상의 천주다. 3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마흔살을 넘겼다. 여전히 젊고 절세미녀. 하지만 아주 차가운 인상이고 몸도 병약해 보인다. 잘 벼린 칼날같은 인상. 공자무를 짝사랑했다.

[호호호호!]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보며 미친년처럼 웃고 있는 구령. 주변에는 십칠팔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 시녀 두 명. 검을 차고 있다. 한 명은 늘씬하고 한 명은 통통하다.

[콜록! 콜록!] 웃다가 지쳐 몸을 숙이고 거칠게 기침을 하는 구령

[마님!] 놀라서 구령을 부축하는 늘씬한 체격의 시녀1.

구령; [독한 사람! 냉정한 사람!] [꽃 같은 시절을 홀로 보내게 해놓고 이제야 찾아온다니....] 이를 바득 바득 갈고

구령; [시들고 병든 날 찾아와서 뭘 하려고?] [진군소 그년과 알콩달콩 살아온 날을 자랑하려고?] 콜록 콜록! 거칠게 기침을 하고

시녀1; [마님! 제발 그만 안으로 드세요, 네?] 구령을 부축하면서 안타깝게.

시녀1; [바깥 공기는 마님께 좋지 않다고 의원도 말하지 않았는지요?]

구령; [의원들 따위가 뭘 안다고! 그것들 말 믿을 것 없어!]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구령; [거울!] 손 내밀고

시녀2; [예 마님!] 통통한 시녀가 작은 손거울을 내민다.

시녀1은 화장품이 들어있는 작은 합을 두 개 꺼내 들고.

구령; [너무 하얘! 이런 얼굴을 그 사람에게 보이면 안돼!]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고

구령; [내가 속병을 알았다는 걸 진군소 그년이 알게 할 수는 없어!] 시녀1이 내민 화장품 합 중에서 손가락에 끼는 볼 터치 패드를 집어들고

구령; [진가년이 좋아죽는 꼴은 절대 못 봐!] 볼에 패드를 톡톡 쳐서 윤기가 돌게 만들고

구령; [아무렴. 그렇고 말고!] 입술 연지도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술에 바르고. 그때

정원을 장원의 다른 곳과 구분 짓는 높은 담장에 뚫린 월동문으로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은 사십대처럼 젊게 보이는 노파가 걸어온다. 좀 후덕한 몸을 지녔지만 표정은 차갑고 살벌하다. 이 노파는 구령의 유모이면서 무서운 고수다.

유모; [아가씨! 그만 쉬셔야 해요. 무리하지 마세요!] 한숨

구령; [유모! 나 아직 이뻐?] 여전히 화장하며

유모; [그럼요. 아가씨는 아름다워요.]

구령; [정말?] 환하게 웃으며 유모를 보고

유모; [마서시(魔西施)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괜히 붙었겠어요? 아가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답니다.] 말하며 구령의 손에서 거울을 뺐고

구령; [들었어 유모? 그 사람이 오고 있대.] 거울을 빼앗기면서도 발그레 웃고

구령; [내가 여전히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걸 거야. 그렇지?] 유모를 올려다보며 말하지만

유모는 한숨만 쉬며 거울을 시녀2에게 준다. 그러자.

구령; [유모! 사실은 내가 이제는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울상을 짓고

유모; [아니에요! 아가씨가 천하제일미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구령의 머리 쓰다듬고

구령; [아니야! 나도 알아! 난... 난 더 이상 예쁘지 않아!] 어린애처럼 울고

구령; [마흔살도 넘은 년을 누가 예쁘게 봐주겠어?] [난.... 난 이제 너무 늙었어! 누가 봐도 전혀 예쁘지 않을 거야!] 얼굴을 손으로 갈며 펑펑 울고

유모; [진정하세요! 이제 그만 약을 드시고 쉬어야만 해요.] 구령을 두 팔로 안아들고. 키가 크지만 가녀린 구령의 몸이 가쁜하게 들린다

유모; [한숨 푹 자고 나서 그를 만나세요. 자고나면 훨씬 아름다워져 있을 거예요.] 구령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여전히 질질 짜고 있는 구령

유모; [아가씨가 쉬시는 동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시녀들에게 말하고

[예 파파!] 대답하는 시녀들

훌쩍이는 구령을 안고 건물로 가는 유모

시녀들은 뒤돌아보며 월동문 쪽으로 가고

건물로 들어서는 유모

구령; [유모....] 울음 그치며 입을 열고

유모; [말씀 하세요 아가씨.] 침실로 들어서고

구령; [그가... 그가 또 날 때리지는 않을까? 전에도 툭하면 때렸는데......] 겁먹은 얼굴

유모; [그는 무례한 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히 아가씨께 그런 짓을 못할 겁니다.] 침대로 가고

유모; [마도무림의 하늘 만마천(萬魔天)의 천주이신 아가씨에게 누가 감히 손찌검을 할 수 있겠어요?] 침대에 구령을 내려놓고

구령; [그렇지?] 반색하고

구령; [호호호! 그 사람도 이젠 날 때리지 않을 거야.] 좋아하며 웃는다.

구령; [나같이 예쁜 여자를 누가 때릴 수 있겠어?] 말하면서 눈을 감고

이내 잠이 든다

한숨 쉬며 침대에 걸터앉아 그런 구령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모

유모; [공자무! 박정하고도 박정한 인간!] 이를 바득 갈고

유모; [이십오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찾아와서 뭘 어쩌자는 거냐?]

유모; [꿈 많던 소녀의 가슴에 못을 박아 기억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놓은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상하려고!]

유모; [아가씨는 널 용서하실지 모르나 나 마고(魔姑)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를 바득 갈 때

시녀2; [파파! 큰일 났어요!] 헐레벌떡이며 달려들어온다

유모; <조용히 해라! 아가씨께서 막 잠이 드셨다!> 노려보며 전음으로 말하고

시녀2; [그... 그게....] 겁에 질려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시녀2; <공..... 공대인께서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셨어요.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 소녀들로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입을 막은 채 역시 전음으로 말하고

유모; <그 작자가 감히!>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고

시녀2; <빨리 마님을 다른 곳으로 모셔야하지 않을런지요?> 잠이 든 구령을 곁눈질

유모; <그럴 것 없다! 내 손으로 처리하겠다!>

유모; <공자무! 네가 기어코 죽으려고 용을 쓰는구나.> 이를 갈며 문으로 가고. 그때

[더 이상은 안돼요!] [멈춰요!] 밖에서 소란이 일고. 이어

[구령(瞿玲)! 어디 있느냐? 나 공자무가 왔다.]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순간

번쩍! 잠이 들었던 구령의 눈이 치떠지고

아차 하며 돌아보는 유모와 시녀2

구령; [공오라버니!] 벌떡 일어나고

구령; [오라버니가 오셨군요!] 반색하며 침대에서 내려선다

유모; [아가씨!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그자를 처리하겠습니다!] 급히 막으려 하지만

구령; [비켜!]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밖으로 나간다. 어쩔 수 없이 비켜서는 유모

건물 밖으로 나서는 구령. 그때

[멈춰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어요!] 검을 빼든 시녀1과 몇 명의 시녀들이 뒷걸음질치며 월동문으로 들어오고. 시녀들을 양 몰 듯이 몰며 성큼 성큼 걸어들어오는 공자무.

공자무; [구령!] 건물을 나서는 구령을 발견하며 손을 젓고. 그러자

[아!] [흑!] 보이지 않는 힘에 좌우로 흩어지는 시녀들

공자무; [역시 여기 있었구나 구령!] 성큼 성큼 걸어오고. 건물 앞에 서서 그런 공자무를 노려보는 구령

구령의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들. 아직 십대 소녀일 때 이십대중반이던 공자무와 즐겁게 산책하던 장면. 공자무가 두 팔로 자신을 안고 빙글 빙글 돌던 장면. 공자무가 자신의 뺨에 뽀뽀를 해주던 장면 등등

구령의 주먹 바르르. 입술 깨물고

뭐라 말하며 앞으로 다가오는 공자무.

그런 공자무의 뒤로 젊은 시절의 진군소가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깔아보던 모습이 부각 되고. 순간

구령; [유모! 저 자를 죽여버려!] 손으로 공자무를 가리키며 바락 고함을 지른다.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터져나오고. 순간

유모; [존명!] 팟! 외치며 날아오르고

유모; [죽어라!] 부악! 허공에서 공자무를 덮쳐가며 강력한 장풍을 날린다. 하지만

눈 부릅뜨고 유모를 노려보는 공자무

[!] 허공에 뜬 채 장풍을 날린 자세로 충격 받는 유모. 직후

부악! 날아가던 장풍이 옆으로 휘어진다

펑! 옆쪽으로 휘어져 정원의 나무와 바위들을 박살내는 유모의 장풍

유모; (장력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다니....) 휘릭! 놀라며 몸을 허공에서 뒤집고

시녀들도 놀라고

유모; (호신공부 때문이 아니라 저자가 지닌 이력(異力)일 일으키는 현상이다!) 휘릭! 다시 구령 앞으로 내려서고

공자무; [구령. 안색이 안 좋구나.] 탄식하며 다가서고

구령; [유모! 뭘 하고 있어? 그를 죽이라니까!] 이를 악물며 외치고

유모; [예 아가씨!] 대답하며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낸다. 한 줄기의 시냇물이 그녀의 손에서 대리석 바닥까지 드리워진 것 같다. 물처럼 투명한 색깔의 아주 가는 실로 만들어진 그물이다.

유모; [공공자! 노신을 다시 보게 되면 반드시 죽일 거라고 했었소.] 그물을 들고 앞으로 나서고. 하지만 공자무는 그러거나 말거나 구령만 보며 다가온다

공자무; [어찌하여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냐? 무엇이 네게 이리도 깊은 상처를 준 것이냐?] 탄식하며 구령에게 다가오고

유모; [경고는 했소!] 촥! 외치며 그물을 휘두르고.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물방울같은 그물이 공자무를 덮어씌워온다. 노파가 던진 그물이다. 직경 10미터가 넘어 피할 수가 없다

<끝났어!> <물의 정으로 이루어진 은하살망(銀河撒網)은 무엇으로도 쳐내지 못해!> 시녀들 주먹 불끈 쥐고. 하지만

슈욱! 공자무의 몸이 얇은 종이처럼 변해서 유모의 옆을 지나간다. 몸이 길게 늘어나는 모습. 바로 생사일보다.

풀썩! 그물은 헛되이 바닥에 떨어지고. 물론 그물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 [!] 시녀와 유모가 놀라 눈 부릅

유모; (이런 신법이....!) 경악하며 급히 돌아본다

그때는 이미 공자무가 구령 앞에 서있다.

유모; [감히!] 이를 갈며 다시 그물을 던지려 하지만

구령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마주 선 공자무

구령은 필사적으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 반짝 쳐들고 공자무를 올려다보고

공자무; [꽃같이 곱던 얼굴이 어쩌다가...] 탄식하며 손으로 구령의 뺨을 만지고

구령; <몰라서 물어요? 당신! 당신의 박정함이 날 이렇게 병들고 시들게 만들었잖아요!> 이를 악물지만 말이 안 나온다. 억울해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모습이고

유모; [아가씨. 지금 그 자를 죽이지 않으면 영영 죽일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그물을 움켜쥔 채 외치고. 하지만

공자무; [유모! 그만둬!] 한숨 쉬며 조금 물러서서 공자무의 손이 뺨에서 떨어지게 하고

움찔 유모

권완; [어쨌건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이야. 모두들 나가 봐!] 시선은 여전히 공자무를 올려다 본다. 촉촉이 젖은 눈길

유모; [예....!] 내키지 않지만 고개 숙이고

이어 시녀들을 거느리고 정원을 가로질러가는 유모. 시녀들도 뒤를 돌아보며 따라가고.

유모; (정이란 게 뭔지....)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막상 다시 보니 순식간에 옛 정이 되살아나신 것인가?) 입술 깨물며 한숨

유모와 시녀들 모두 사라지고 장내에는 공자무와 구령만 남고

구령; [무슨 일로...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기대에 차서 올려다보지만

공자무;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대답을 피하고

공자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어린 소녀였었는데 어느덧 완숙한 숙녀가 되었고...!] 다시 구령의 뺨을 만지며 감회에 잠기고

구령; [벌써 이십오 년이 지났답니다. 그동안 오라버니도 많이 늙으셨네요.] 억지로 웃고

공자무; [늙었지. 살 수 있는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을 정도로...!] 끄덕

구령; [들어오세요.] 돌아서고

구령; [먼 길 오셨는데 잠시라도 쉬셔야죠.] 안으로 들어가고. 따라들어가는 공자무

 

잠시후. 탁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 구령이 공자무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있다. 손이 떨린다.

구령; [오라버니 눈엔 여전히 제가 어린아이로 보일 테죠?] 달달 떨며 차를 따르고

공자무;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구령; [하지만 저는 변했어요.] [옛날처럼 건강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아요!] 자조

구령; [오라버니와 헤어진 후 미친 듯이 무공에 매달려 혈목재(血穆齊) 서열 일위에 오르고 만마천의 천주라는 감투까지 썼지만 행복은 제게 먼 세상의 것이었어요!] 차를 따르는 것을 마치고

공자무; [너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깊구나.] 그런 구령을 유심히 보고

구령; [사랑이란 병이 마음에 들고나니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더군요.] [오라버니가 준 독한 병은 달콤한 꿀 같아서 거부할 수도 없었죠.] 차 주전자를 내려놓고

공자무; [사랑이라....] 우울

공자무; [너는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철 없던 시절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냐?]

공자무; [현실을 외면하고 그 망령에 너를 맡기고 그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구령; [오라버니는 총명한 대장부라서 세상의 바른 것만 기쁨으로 아시겠지요.]

구령; [하지만 저는 광포한 마도(魔道)에 속한 사람이라 오라버니가 모르는 기쁨도 알고 있답니다.] 싸늘하게 웃고

구령; [남을 속여서 그로 하여금 믿게 하는 큰 기쁨을 오라버니는 모르시겠지요.] [음모를 꾸며 상대방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하거나 죽어가게 할 때 느끼는 쾌감도 아마 모르실 거예요.] 광기에 젖어 말하고

구령; [더구나 상대방이 내가 그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는 더욱 짜릿해지지요.] [너무 짜릿해서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을 정도죠.]

공자무; [아무런 이문도 없는 장사를 좋아하는구나.] 한숨 쉬며 찻잔을 들고

구령; [하지만 이런 것들에 비할 수 없이 큰 기쁨이 있답니다.]

구령; [바로 자기 파괴의 기쁨이지요.] 배시시 웃고

[!] 차를 마시려다가 눈 부릅 굳어지는 공자무.

구령; [누군가를 원망하며 나를 파괴할 때, 이 극렬한 기쁨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답니다.] 호호호! 광기에 사로 잡혀서 웃고

구령; [그것은 잠든 오라버니 몰래 입을 맞췄던 그 떨림보다도, 오라버니를 상상하며 가졌던 은밀한 흥분보다도 더 강렬한 기쁨이랍니다.] 마녀처럼 웃는다

쨍그랑! 공자무는 손에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린다.

공자무; [구령! 너는...... 너는 그래선 안 된다.] 연민

구령; [남이 만류하면 할수록 이 기쁨은 더 커진답니다.] 자기 앞의 빈 찻잔을 집어들고

구령; [결국은 자기도 멈출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 찻잔을 다시 공자무 앞에 놓고

구령; [우사독상심(憂思獨傷心)!] [저는 오라버니가 떠난 후 이 한 구절을 되새기고 되새기다가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답니다.] 다시 차를 따라준다

구령; [시름으로 홀로 타는 마음! 그것이 주는 기쁨마저 없었다면 제가 무엇으로 살 수 있었겠어요.] 차 따르는 걸 멈추며 싸늘하게 웃고

공자무; [네가... 네가....!] 안색이 굳어져서 말을 잇지 못하고

구령; [오라버니는 제게 죽음에 이르는 병을 주고 갔지만, 저는 <우사독상심> 이 한 구절을 의지해 지금까지 살아왔답니다.] 차 주전자를 내려놓고

구령; [이제 오라버니의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제게 또 다른 기쁨과 위안이 되는군요.] 깔깔 웃고. 순간

공자무; [그만해라!] 손을 쓸어서 앞에 놓인 찻잔을 옆으로 날려버리고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는 찻잔

공자무; [너는 정말 소중한 게 아무것도 없더란 말이냐?] 구령을 노려보고. 순간

구령; [오라버니와 지냈던 그 짧은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게 제게 어디 있겠어요?] 갑자기 정색을 한다. 자세도 단정히 하고

공자무; [어리석은 것!] [내 마음엔들 왜 네가 없었겠느냐?] 준엄하게 호통을 치고

공자무; [네가 어린 것이 문제였다면 십 년 아니라 수십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공자무; [네가 마도(魔道)에 속한 것이 문제였다면 내 무공을 버리거나 마도를 버리게 하고서라도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공자무; [그럼에도 내가 너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내 마음에서는 너에 대한 애정이 싹틀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령;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진군소, 왈패 같은 년을 사랑했던 게 아닌가요?] 안색이 창백해져서 울려 하고

공자무;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네가 그렇게 부를 사람이 아니다!] 손을 칼날처럼 반들어 끊는 시늉하며 엄숙하게

구령; [오라버니!] 어깨가 떨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필사적으로 분을 참는 표정

공자무; [이십 여 성상(星霜) 동안 고락을 함께한 내 아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숙하게 말을 잇고

공자무; [정으로 말하면 바닷물이 마르기 전에는 다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의 존경으로 따지자면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변함없을 것이다.]

구령; [역시 그년을 사랑했군요. 나보다도 그년을 더 사랑했군요.] 이를 바득 바득 간다

구령; [난 그년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구령; [창피도 모르는 년이 우리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 + [악!] 짝! 공자무의 손이 뺨을 후려쳤다. 얼굴에 손 자욱이 생기며 고개가 홱 돌아가는 구령

구령; [오... 오라버니!] 억울하고 분한 표정으로 눈물 글썽이며 공자무를 본다. 손으로 뺨을 만지며

공자무;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너의 이런 점 때문이었다.] 노려보고

공자무; [너를 사랑하게 되면 내 자신마저 태워버릴까 두려워 나는 너를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하고 억울해서 달달 떨며 뺨을 손으로 만지는 구령. 눈물이 주르르

공자무; [애정은 젊은이들의 일이다.] [그리고 내 나이는 이미 쉰을 넘겼다.] 한숨

공자무; [사람이 그 나이에 맞는 일을 하지 않으면 추한 법이다.] 타이르지만

구령은 이를 바득 바득 갈며 울고

공자무; [마음을 가라앉혀라.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 한숨 쉬고

구령이 말없이 일어서더니 휘청이며 벽을 향해 걸어간다.

벽에는 서양의 펜싱 비슷한 검이 한 자루 걸려있다. 엄지 손가락 정도 넓이의 폭이 가늘고 긴 검이다.

그 검을 집어드는 구령

싸악! 칼집에서 흰 무지개가 피어오르는가 했는데 어느새 구령의 손에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가늘고 긴 장검이 들려 있었다. 검날이 낭창 낭청 댄다.

구령; [오라버니! 이십오년전 그날 당신을 죽였어야 했어요.] 검을 들고 다가서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구령; [날 버리신 그날 당신을 죽였더라면...... 난 미쳤겠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거예요.]

구령; [마존지검(魔尊之劒) 천궁(天弓;무지개)으로...... 오라버니의 심장을 쏘겠어요.] 검을 공자무의 심장에 댄다.

공자무; [천궁으론 부족하다.] [이제 내가 네게 맡겼던 그 물건을 꺼내야 할 때다.] 엄숙하게 말하고

[!] 구령이 충격을 받아 눈을 부릅뜨고

공자무; [암흑철수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 말을 하면서 윗옷을 쫙 찢는다.

쿵! 드러난 공자무의 오른쪽 가슴에는 세 개의 못이 삼각형을 이루며 박혀 있다

 

#93>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