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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노부는 스물네 살 때 이 신행목(神杏木)을 발견했다. 그 무렵의 나는 술법을 부리기 위한 법기(法器)를 닦을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신행목을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서문숙이 뒷짐을 짚고 서서 거대한 은행나무를 올려다 보고 있다. 절세미남이고 허리에는 긴 검을 차고 있고.

<술법에는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그냥 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매개체가 있어야하거나 있으면 훨씬 편리한 술법들도 있다. 크고 강력한 술법이나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술법의 경우 법기의 힘을 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각가지 이상한 물건들. 그릇, 책, 북, 비파, 팔찌 등등

<술법자(術法者)들은 일반적으로 스승에게서 법기를 물려받아 사용한다. 그러나 제자의 술법이 스승을 넘어서게 된다면, 스승의 법기에 그 능력을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법기만 망치게 될 뿐이다. 결국 그때는 법기를 새로 만들어 닦아야 한다.> 노인으로부터 거문고를 받는 청년.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받는다.

<천하제일가인 서문세가(西門世家)의 소가주였던 나는 선친으로부터 술법을 배웠다. 그리고 황송하게도 젊은 나이에 술법으로는 선친을 능가해버렸다. 즉 본가의 가주에게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법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西門世家라는 현판이 걸린 웅장한 대문 앞에서 포권하며 작별을 고하는 젊은 시절의 서문숙, 문앞에는 노인과 노부인이 서있다. 노부인은 눈물을 닦고 있고. 두 부부 뒤로는 많은 하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가전의 법기를 포기하고 나만의 법기를 닦기 위해 세가를 나서게 되었다. 명산대천을 배회하며 술법을 연마하고 법기를 닦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엔 이미 주인이 있었고, 주인이 없는 곳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꼭 나타났기 때문이다.> 산수화같은 바위 산 산봉우리에 서서 산을 보고 있는 서문숙.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위에 어떤 도사같은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폭포 아래에서 명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을 지나다가 은은한 흰색 옷을 입은 한 처녀를 보게 되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통을 걸어가다가 흠칫하는 서문숙. 앞쪽에서 공손대낭이 다가온다. 절세미녀인데 서문숙과 비슷할 정도로 훤칠한 키에 선녀 옷처럼 하늘거리는 옷을 입었고 양 옆구리에는 짧은 검을 두 자루 차고 있다. 한쪽 팔에는 꽃이 가득 든 바구니를 걸고 두리번거리며 서문숙 쪽으로 다가온다

<그 처녀는 광주리에 여러 가지 꽃을 담아 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꽃보다 아름다웠으며, 키는 보통사람보다 더 컸고 허리가 곧고 발라 오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문숙을 보고 흠칫하는 공손대낭.

<처녀도 나를 보았다. 순간 그녀는 움찔 놀라며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인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행(道行)이 깊으신 분이군요. 제 꽃을 하나 사주시겠어요?]> 배시시 웃으며 서문숙에서 귀엣말을 하는 공손대낭

<나는 처녀가 하는 수작이 가소로웠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그냥 꽃 한 송이를 사주었다.> 동전을 주고 꽃 한송이를 공손대낭에게서 받는 서문숙. 이하 회상에서 대화체로

공손대낭; [당신은 백만 번째로 제 꽃을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해와 달에게 맹세했답니다.] [백만 번째로 제 꽃을 사시는 분이 남자라면 그분에게 저를 의탁하겠다고.] 서문숙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교태롭게 웃는 공손대낭

서문숙; [너는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준엄하게

공손대낭; [사람은 아니라도 좋은 스승들께 배워 인간의 도리를 깊이 깨우쳤는데, 사람보다 못할 게 있겠는지요?] 서문숙의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고

공손대낭; [멀지 않은 곳에 저의 거처가 있으니 함께 가주세요!] 서문숙의 팔짱을 낀 채 끌고 간다. 못 이기는 척 끌려가는 서문숙

서문숙; (선녀나 관음보살은 아닐 테고.... 햇빛에 이지러지지도 않고 대낮에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게 뭘까?)

서문숙; (그러고 보면...!) 주위를 둘러본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서문숙;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 여자의 모습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서문숙;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공손대낭; [남들은 소녀를 공손대낭(公孫大娘)이라 부른답니다.]

 

#89>

청풍; [엥!] [공손대낭?] 눈이 띠용. 권완도 흠칫. 다시 현실

권완; [검무(劍舞)를 잘 추기로 유명해서 두보(杜甫)가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幷序)>라는 시까지 지었다는 그 공손대낭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서문숙; [그렇다. 바로 그 공손대낭이다.]

청풍; [하하하! 꽃 팔던 처녀가 공손대낭이면 노야는 신선 이팔백(李八百)이군요.]

청풍; [공손대낭은 당나라 사람인데 노야가 만났으면 무려 팔백 년이나 살아오셨을 테니까!] 깐죽대며 웃고 + 서문숙; [맹랑한 녀석같으니!] 눈 부라리고

서문숙; [언제 노부가 팔백 살이나 되었다고 했느냐? 공손대낭을 만났다고만 했지.]

청풍; [그럼 공손대낭이 팔백년을 살았단 말입니까?] 띠용

서문숙; [어디 팔백년뿐이겠느냐?]

서문숙; [공손대낭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일천육백번 이상의 해를 넘겼다고 했다!]

[!] [!] 놀라는 청풍과 권완.

권완; [혹시... 공손대낭은 여자신선이었는지요?]

서문숙; [너는 은행나무를 부르는 다른 이름을 아느냐?] 청풍에게

청풍; (이 영감탱이가 날 무시하는구만!) + [잎이 오리발 같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 열매가 어린 살구같다고 해서 행자목(杏子木),]

청풍; [심으면 손자 대에나 열매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 뚱하게 대답

서문숙; [공손대낭은 바로 공손수의 정(精)이다.]

권완; [아!] 놀라고

서문숙; [은행나무의 정령이기에 성을 공손씨로 했고.... 바로 이 신목이 공손대낭이다.]

청풍; [그러니까 나무의 요괴 아니 요정이 있단 말이지요?] [어, 어디 있어요?] 침 꼴깍 삼키며 둘러보고

서문숙;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너희들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술법을 익히고 난 후 정과 혼을 부릴 수 있게 되었을 때야 보게 될 것이다.]

권완; [대원수님께선 공손대낭과 혼인하셨나요?]

서문숙; [그녀는 나무의 정이고 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혼인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었지.] 빙그레 웃고. 다시 회상

 

#90>

<노부 역시 공손대낭이 처음 이름을 밝혔을 때는 너희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공손대낭은 놀라고 당황하는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키는 낮지만 아주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 서서 올려다보는 서문숙과 공손대낭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한 번 웃고는 나무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렸다. 그때서야 나는 공손대낭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서 햇살이 따가운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나무의 정(精)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놀라는 서문숙을 돌아보는 자세로 반쯤 몸이 거대한 은행나무로 스며들어가는 공손대낭

<나무속에서 공손대낭이 하는 말을 따라서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벽에는 검무를 추는 공손대낭의 모습이 그려진 족자가 걸려있었다. 바로 그 족자에서 공손대낭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벽에 걸린 족자에서 걸어 나오는 공손대낭의 모습. 지금 청풍과 권완이 있는 그곳이지만 여자의 방처럼 꾸며져 있다. 침재와 화장대도 있고

서문숙; [만나 뵙게 되어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팔백 년 전에 이미 아름다운 이름을 사해에 떨치셨던 공손대낭께서 여전히 하계(下界)에 계실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포권하고

공손대낭; [이곳은 제 몸속이자 제 정(精)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귀인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교태롭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마주 인사하고

<공손대낭이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경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唐)의 현종(玄宗) 앞에서 검무를 추어 천하제일검기무(天下第一劒器舞)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수많은 제자를 두었던 바도 있었으니 다른 요괴나 요정처럼 대할 수 없었다.> 공손대낭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서문숙

서문숙; [시장에서 소생을 피하려했던 것도 두려워서가 아니었겠습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검기를 지니신 대낭께서 아직 배움이 일천한 소생을 두려워할 리 없겠지요.] [소생의 교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두 손으로 술잔을 들고

공손대낭; [소녀가 익힌 검기는 보통 사람을 놀래킬 정도이지 귀인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역시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답례하며

공손대낭; [일찍이 소녀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 나가 한바탕 노닐었지요.] [그때 한 분께 은혜를 입어 검술을 배웠답니다..]

서문숙; [대낭께서도 고인으로부터 검을 받으셨군요. 아마 보통 분은 아니었겠습니다.]

공손대낭; [확실히 보통 분은 아니셨습니다. 배민(裴旻)이라는 분인데 아실런지요?]

서문숙; [배민?] [이백(李白), 장욱(張旭)과 함께 당삼절(唐三絶)로 불리시던 천검(天劒) 배민 장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놀라고

공손대낭; [바로 그 분이랍니다.] 고개 끄덕.

서문숙; [배장군께서는 당조(唐朝) 삼백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검객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검술은 끊어져 전해지지 않는 줄 알았더니 바로 대낭께서 이으셨군요.]

공손대낭; [그분을 배장군이라 부르시는 걸 보니 귀인께서도 그분처럼 <왕들의 왕>을 섬기시는군요.]

서문숙; [그렇습니다.] 술잔을 내려놓고 엄숙한 표정

서문숙; [소생 서문숙 역시 위대하신 제왕의 미욱한 신(臣)입니다.] 일어나서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르고

공손대낭;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역시 엄숙한 표정. 술잔을 내려놓고

공손대낭; [천하의 기인이 되시는 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한 분만을 섬기는군요.] 한숨

서문숙; [배장군께선 <왕들의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분입니다.] 다시 자리에 앉고

공손대낭; [소녀에게는 부모 같은 분이기도 하지요.]

<저의 높은 가지를 잘라 벽력진군의 칼을 맞지 앉게 해준 분이시니까요.> 허공에 뜬 채 검을 휘둘러서 거대한 은행나무를 버섯 모양으로 다듬고 있는 신선같은 노인의 모습

 

#91>

권완; [공손대낭은 왜 꽃을 팔았고 또 백만 번째 꽃을 사는 남자에게 몸의 의탁하겠다고 맹세했는지요?]

서문숙; [공손대낭은 술법을 닦아 승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꽃을 팔면서 수행이 뛰어난 사람의 공덕을 얻어 모으고 있는 중이었지.]

서문숙; [백만 번째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려 한 것은 나무나 꽃의 정의 경우 움직이는 몸을 가진 존재에게 의탁해야만 승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문숙; [노부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했고 그녀는 노부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린 한 가지 약조를 하게 되었다.]

청풍; [어떤 약조요?] 멀뚱

서문숙; [그녀는 내가 이곳에서 법기를 닦는 것을 도와주고, 나는 죽을 때가 되면 이곳에 와서 그녀의 정(精)을 맡아주기로 한 것이다.]

권완; [정을 맡아준다는 건 무슨 뜻인지요?]

서문숙; [내 몸이 죽어 신(神)과 정(精)과 혼(魂)이 흩어질 때, 공손대낭의 정은 나의 신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대신 나의 정과 혼이 이곳에 남아 목신(木神)이 되는 거란다.]

청풍; [목신이 된다구요?]

서문숙; [쉽게 말해서 죽은 뒤 이 나무에 붙은 귀신이 된다는 말이다.] 웃고. 순간

청풍; [으하하하!] 갑자기 배를 잡고 웃고.

권완; [공자!] 서문숙의 눈치를 보며 말리고

서문숙도 불쾌한 미소를 짓는데.

청풍; [말도 안되는 소릴랑 그만 하십쇼! 천지간에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단호하게

서문숙; [뭐라고?] 화를 내려는데

청풍; [술법도 대충 뭔지 알겠고 요괴란 것도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서 나무귀신이 되니 뭐니 하는 건 말 같지도 않습니다.] 엄숙. 온몸에서 삼엄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이후로 청풍의 몸에서는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고함을 치면 그 기운이 화살처럼 사방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서문숙; (무슨 이런 놈이....!) 눈 부릅뜨며 놀라고

서문숙; (뜬금없이 혼백을 비수처럼 가르는 예기를 온몸에서 흘려내다니...!)

청풍; [한 인간이 죽으면 그 삶도 깨끗이 끝나는 법인데 무슨 귀신 나부랭이가 된다는 겁니까?] 코웃음 치는데

슈우!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실내를 감돌고

권완; (뭐... 뭐지? 갑자기 실내의 공기가 차가워졌어!) 놀랄 때

서문숙; <아차!> 아차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서문숙; (위험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단호한 확신과 부정은 대낭같은 요정들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청풍; [무엇이든 이상하게 보려면 자꾸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구름이나 바위들도 이것 닮았다 저것 닮았다 하고 보면 자꾸 그렇게 보입니다.]

청풍; [하지만 눈이 밝고 마음에 잣대가 정확하다면 세상에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이것저것 짓지 마세요.]

서문숙; [말... 말을 삼가지 못할까!] + (이놈처럼 명백하게 자신의 의지를 말로 구현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당황하여 청풍을 노려보지만

청풍; [은혜를 입긴 했으나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다 죽어가는 분이 무슨 할 짓이 없어 귀신 운운하시는 겁니까?] 코웃음치고.

서문숙; [네놈이 그래도...!] 다급히 외칠 때

갑자기 천장 쪽에서 쿵!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서문숙; [이런...!] 놀라며 올려다보고.

권완; [공손대낭인가요?]

서문숙; [잘못 되었구나! 잘못 되었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하고. 그때

<진보(塵甫;서문숙의 호)! 그대는.... 그대는 왜 저 사람을 데려와서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권완; (여자의 울음소리!) 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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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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