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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七 章

 

           농가의 북소리

 

 

[뭐라고? 사신각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돼?]

뾰족한 소리가 가로막고 있는 휘장을 뚫고 나왔다.

이곳은 언젠가 본 적있는 기루의 오층이다.

휘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여인이 부복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무창에서 갑자기 무너졌다는 선인루가 그들의 총단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신이 죽지 않았는데 사신각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휘장뒤의 여인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수하들에게 알려라. 혈룡도왕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여인의 손을 휙 내저었다.

[당장!]

사라락!

그녀의 긴소매가 휘장을 스쳤다.

[존명!]

두 여인은 천정을 통해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고,

휘장 뒤의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마른 손을 비비며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사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가 없는데……하는 수 없지. 다음 상대로는 취옥성(翠玉城)이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영활한 두뇌를 굴리고 있었다.

 

× × ×

 

땅에는 짙은 으스름이 내려 앉았는데,

총총이는 별들은 오직 하늘만을 밝히고 있다.

[당신은 이곳에서 자면 되어요.]

소녀는 누덕누덕 기운 홑이불을 가지고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황군성은 완전한 그녀의 포로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가 저녁을 먹고난 후에 가겠다고 했을 때,

소녀의 화난 목소리가 그의 오금에서 힘을 뽑아버렸다.

[손님을 밤에 쫓아낼 박정한 사람같아요?]

 

탕!

문은 닫히고, 하는 수 없이 벌렁 드러누운 황군성은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하고,

그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소녀의 곁을 어쩌면 그도 떠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간댔자 뚜렷한 행선지가 있는 것도 아님에야……

한편,

소녀는 부엌에서 이불을 감은 채 웅크리고 새록새록 잠이들어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검은 고양이가 몸을 말고 꼬리를 흔든다.

 

뿌연 새벽안개가 마을을 뒤덮고 있는데,

덜컹!

황군성은 와락 방문을 밀어 젖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빨리 일어나요. 그러다간 밥 굶기 딱 알맞아요.]

소녀가 마치 동생을 꾸짖는 듯한 어조로 황군성을 깨웠다.

[아침은 밭에 갔다 와서 먹도록 하고 당장 밭으로 가요.]

쫑알대며 황군성의 팔을 끌어 마당으로 나온 소녀는 이미 준비된 수레에 황군성을 밀어 올렸다.

한 지붕아래서 하룻밤을 지내서 그런지 소녀는 꽤나 친근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녀의 말을 따르기 위한 어떤 핑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덜커덕! 덜커덕!

소녀와 함께 수레를 타고 가면서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소녀의 말에 따르는 것으로 자꾸만 마음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에 황군성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옆에서는 소녀의 풋풋한 향이 그의 코를 자극하고,

돌처럼 딱딱한 그의 심장을 아래위로 흔들어놓고 있었다.

소녀가 그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황군성은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이 놀랐다.

속마음을 들킨 것같았기 때문이다.

소녀는 마음대로 하는 철부지처럼 행동하며 어느새 황군성의 마음을 사로잡아놓고 있었다.

황군성의 마음에서 임단심은 마치 꿈속의 여인인양 아득히 멀어진 기분이었다.

햇살이 안개를 완전히 녹여냈을 때,

그들은 황량하고 거친 밭에 도착했다.

[이 밭을 갈아야 해요. 요즘은 가물어서 큰일이죠. 하지만 오늘쯤은 비가 올 텐데 물이 잘 스며들도록 미리 준비해야죠.]

안개가 걷혀진 하늘에는 구름한 점 없다.

황군성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머슴처럼 쟁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중국에서는 소가 농사일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쟁기를 끄는 경우가 많았다.

농가마다 소를 보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경제사정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군성은 열 마리 소보다 나았다.

소녀가 쟁기를 조종하고 그가 끌었는데 메마르고 돌이 많은 거친 밭임에도 마치 모래를 가는 듯이 쉽게 끝내버렸다.

[당신 정말 힘이 세군요. 당신만 있으면 농사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소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칭찬했다.

황군성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도 소저의 수레나 끌고 쟁기나 끌면서 살았으면 좋겠소.]

순간,

그토록 뻔뻔스러워 보이던 소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버렸다.

황군성은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으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틈도 없이 갈곳으로 가버리고 마음속에 남아 버린 것이다.

[흥!]

소녀가 다만 코웃음을 치고 수레에 쟁기를 번쩍 들어다 얹었다.

멋쩍어진 황군성은 그녀의 뒤를 따라 수레에 올라앉았다.

나귀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란히 앉은 한 쌍의 남녀사이에 생긴 묘한 침묵은 그들이 마을에 당도할 때까지 계속됐다.

동구(洞口)에는 일 나가는 사람들이 괭이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아이구! 진(晉)아가씨가 또 튼실한 일군을 구했군 그래. 참 재주도 좋지.]

중 늙은이의 아침 인사를 웃음으로 받으며 소녀가 말했다.

[양(楊)할아버지 안녕하셔요? 하지만, 이분은 일군이 아니예요.]

양이라 불린 중 늙은이가 황군성을 유심히 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진아가씨 부군(夫君)되실 분인가?]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꼭 그렇지도 않아요. 손님이니까요.]

황군성은 소녀의 말을 속으로 뇌까리며 중얼거렸다.

(꼭 그렇지도 않다? 그럼 꼭 그렇지 않지도 않다는 말이잖은가?)

나귀는 주인이 누구와 이야기하던 세우지 않는 한 걸음을 옮기고,

양노인을 뒤로 하고 수레는 올라갔다.

쿠르르릉……!

그들이 탄 수레가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멀리서 은은한 뇌성(雷聲)이 들려왔다.

휘이이이……

스산한 바람이 일면서 황군성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하늘을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짱했는데 검은 구름이 치달으면서 사위를 어둡게 하고 있었다.

황군성은 소녀를 힐끗보았다.

오늘 비가 올거라는 소녀의 말이 틀림없이 적중할 것같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 조짐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있을 시간 없어요. 빨리 나귀를 몰아넣어야죠.]

소녀가 폴짝 뛰어내리며 말했다.

투둑! 투둑!

벌써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황군성의 뺨을 타고 목을 거쳐 가슴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쏴아아아!

우르르렁! 쿠쾅!

소녀가 나귀를 몰아넣고 났을 때 급기야 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흠뻑 비에 젖은 소녀는 후다닥 방으로 달려갔고,

황군성이 그 뒤를 따랐다.

비에 젖은 옷이 마르면서 몸에서는 후끈후끈 김이 나고 있었다.

얇은 옷이 젖으면서 몸에 착 달라붙어버린 소녀의 몸 굴곡이 뚜렷하게 내비쳤다.

황군성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딴 곳에 두었다.

소녀도 자신의 몸이 나체나 다름없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젖은 옷위에 그대로 이불을 감았다.

[아침은 부엌에 준비되어 있어요.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비에 젖은 때문인지 소녀의 목소리는 약간 울려나왔다.

부엌에는 남아있는 화기(火氣)로 말미암아 여전히 따뜻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있었다.

[킥!]

음식을 챙겨서 들어오는 황군성을 보면서 소녀가 말괄량이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번쩍!

우르르……꽝!

쏟아지는 빗속에 뇌선벽력의 간주가 그들의 식사에 포함되어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발끝으로 그것들을 한쪽으로 쭉 밀쳐버렸다.

황군성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녀와 그는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서로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도 없다.

멀뚱멀뚱 생각에 잠기는 황군성을 소녀는 크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물었다.

[당신은 장한가도 알고 있으니 음률(音律)도 알겠군요?]

[잘 알지 못하오. 하지만 듣기는 좋아하는 편이요.]

그녀의 물음이 황군성의 우중충한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대화도 하지 않고 젊은 남녀가 좁은 방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밖에선 하늘 북이 울리니 그 장단에 마주 쳐볼까요?]

그녀는 침상 한쪽에서 괴상한 생김새의 북을 꺼냈다.

그 북은 지름이 한자 정도이고 두께는 불과 두치 정도였다.

그리고 한손으로 드는 것인 듯 손잡이가 달려있다.

아주 오래된 물건인듯 북 전체에서 반들반들 윤이나고 있었다.

둥!

소녀가 북채로 가볍게 두들기자 북소리는 쏟아지는 비 소리와 뇌성을 몰아내며 울려퍼졌다.

둥! 둥! 둥! 탁! 둥!둥!탁! 퉁타닥!

소녀의 북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두들기고 영혼을 불러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군성은 절묘한 북소리에 깊이 매료되고 있었다.

북소리가 그처럼 훌륭한 음률을 이룰줄은 꿈에도 몰랐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가빠졌다가 다시 느려지기도 하고,

강해졌다가 약해지기도 했다.

끊어질 것같기도 하다가 뇌성벽력을 방불케 할만큼 힘차게 울러퍼지기도 했다.

북소리는 황군성의 마음을 완전이 옭아매고 있었다.

(아! 음률도 무공과 전혀 다르지 않구나. 이것이 만약 무공이라면 천고에 드문 것일 것……)

갑자기,

두둥!

소리를 끝으로 북소리는 멈춰지고 말았다.

황군성은 의아한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휙!

소녀는 북을 한쪽으로 던져버리며 말했다.

[흥이 나지 않아요. 날씨 탓인가봐요. 자꾸 우울해져요.]

소녀는 무릎을 싸안으며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말해 봐요. 당신이 찾아다니는 그 여자는 누구죠?]

[내 미혼처요.]

황군성은 솔직하게 말했다.

소녀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미혼처? 그럼 아직 혼례를 올린 것은 아니군요.]

[하지만 진배없소.]

[그럼 그 여잔 어디에 있어요?]

황군성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잘못하여 떠나버리고 말았소. 지금은 아주 흉악한 악인의 손에 잡혀있는 모양이오.]

[그 악인이 누구예요?]

소녀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황군성에게로 다가들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신이라고 하는 마두인데 소저는 아마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오.]

[사신?!]

소녀가 소리치고는 그 소리가 너무 컸다 싶었는지 얼른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미……미안해요. 너무 놀라서……그럼 그녀는 죽었어요?]

[사신은 저승사자가 아니오. 단지 그를 아는 자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오. 그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지요. 그것도 아주 늙은 노마……]

소녀가 가슴을 눌러 진정시키는 시늉을 한 후에 물었다.

[한데 사신이 왜 그녀를 데려갔지요?]

황군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르겠소. 이제 생각해 보니 도저히 모르겠소. 어쩌면 그녀와 원한이 있었지 않았나 싶은 정도밖에는……]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한데……? 한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녀가 사신의 손에 잡혀있다는 것을 알았죠?]

[누군가 내게 서찰을 전해줬소. 서찰에는 그녀가 있는 곳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소녀가 단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서찰을 전해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죠?]

황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앞에서 그는 완전한 바보가 되어있었다.

[당신은 속았어요. 누군가가 당신을 이용해서 사신을 제거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지 당신은 덩치만 컸지 도무지 생각할 줄을 모르는 군요.]

황군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실제에 있어서는 총명하기 그지없는 그이지만,

임단심에 대해서는 그와같은 헛점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었고,

소녀가 일일이 지적하고서야 겨우 알게된 것이다.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분노가 그의 가슴을 가득채우고 올라오고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 자가 바로 그 여자인지도 몰라요.]

황군성은 흠칫하며 말했다.

[절대 그럴리 없소.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누구나 자신이 신뢰한 곳에서 신뢰를 찾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실망이란 종종 믿음을 두었던 곳에서 거두어지는 악과(惡果)이지요.]

 

× × ×

 

소녀의 이름은 진우란(晉于蘭)이라고 했다.

그녀의 총명은 황군성을 연거푸 놀라게 하고 있었다.

한갓 시골소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탁월한 견식과 지혜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힘이있었다.

진우란은 나귀를 이웃에 맞겨 버리고 돌아와서 간단한 짐을 꾸리고 황군성을 따라나섰다.

이런 사람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대단치 않았으나 보면 볼 수록 대단해 보이는 사람,

마치 흙 묻은 구슬처럼 처음에는 시시해 보이다가,

손으로 부비고 만지면 만질 수록 그 속에서 밝은 광채를 드러내는 사람.

진우란은 바로 그런 소녀였다.

진우란의 황군성의 마음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황군성은 그녀에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우란은 황군성을 따라 강호행에 나섰다.

이것이 그녀에게나 황군성에게나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황군성은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편안함과 아울러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단심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엉뚱한 소녀에게로 돌아서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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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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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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