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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검신보의 검신 2

 

 

 

처마의 끝이 날아갈 듯 높은 전각들,

딱딱한 분위기,

퉁명스런 표정들……

이곳은 틀림없이 정주의 순무가 있는 곳이다.

관(官)이 아니고서야 어디 이런 고식(姑息)적인 분위기가 흐르겠는가?

이곳의 가장 화려한 대청,

붉은 관복을 입은 노인의 음성이 밖까지 들려나왔다.

[공자께서 진정 영왕전하(永王殿下)의 외손자이시라면, 무슨 증거를 보여 주셔야 할게 아니오.]

고압적인 음성이었다.

소리치고 있는 그의 앞에는 두 남녀가 포박당한 채 앉아있었다.

칠척의 거한과 옷속에 빠져버린 한떨기 꽃같은 미녀,

바로 황군성과 임단심이었다.

황군성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순무 늙은이가 도무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주혜린이고, 주혜린의 아버지가 영왕이니,

그는 자연히 영왕의 외손자가 아닌가?

하나,

지금 그는 그의 말로 인해서 오히려 황족을 사칭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 쓰게 되었다.

임단심은 도무지 융통성이라고 보이지 않는 황군성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했던 말만 하고 또하고, 순무도 했던 말만 하고 또하고……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당대의 실권자의 영왕과 조금의 국물이라도 튄 사이라면 그의 모든 것이 곤두박질 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것에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황군성으로서는 포박당한다는 것도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노릇이었으나,

포박하지 않고는 만나 줄 수 없다는 순무의 강경한 태도에 삼보 양보한 것이었는데,

벌써 한시진이 넘도록 순무와 입다툼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지쳤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그를 몇 번 더 살핀 순무가 대뜸 명령을 내렸다.

[이 두 죄인을 뇌옥에 갖다 넣어라.]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돌부처같은 황군성을 보면서 임단심은 체념하고 말았다.

 

× × ×

 

덜컹!

철문을 닫고 옥리(獄吏)는 가버렸다.

[그래도 순무가 조금 켕기는 데는 있는 모양이군요. 우릴 같은 곳에 넣어주다니……]

임단심이 배시시 웃으며 황군성에게 말했다.

황군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한곳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순무와의 억지와 억지의 짜증나기 이를 데 없는 말다툼을 했음에도,

지금은 오히려 속이 후련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속에서 뭔가가 점점 뚜렷하게 형성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산다는 것일까?)

소음곡에서 그는 한번도 누구와 다퉈보거나 싸워보지 않았다.

대가족인 가정에서 보통 그렇듯이 웃사람에 대한 철저한 공경으로 그 가정의 기초는 다져지는 때문이다.

그는 웃어른들에게는 무조건 복종했었고, 동생들은 또한 그의 말에 그렇게 했었다.

도무지 충돌이란 있을 수 없다.

꾸지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싸움, 피를 뿌리는 싸움이든 피곤하기 그지 없는 말다툼이든, 그 속에 이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어떤 즐거움 같은 것을 맛보고 있었다.

소음곡에서 그는,

인생이란 원래 치열한 것이고,

치열하지 못하다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치열했다.

영왕의 외손자임을 입증하려는 자기의 절박한 마음과 혹시 공무를 잘못 집행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무의 마음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일순,

황군성의 마음으로 어떤 번갯불같은 섬광이 지나갔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뇌전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듯이 소리쳤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이제 빈손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이루겠다.]

그의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임단심은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 분은 엄청난 고수였어……)

뇌옥 안에 그의 음성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황군성의 눈은 신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떤 강렬한 의지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를 지배하고 있던 허무와 고독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얼굴은 환하게 밝아져 빛이 나는 듯 했다.

그렇다.

이제,

황군성은 비로소 관문을 넘은 것이다.

문성무존의 모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했던 그 관문을……

이것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득,

놀람과 약간의 두려움을 담은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임단심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를 껴안아 올렸다.

그녀의 키가 너무 작기에, 아니 그가 너무 크기에 얼굴을 마주 보자면 그녀를 들어 올리는 것이 편한 때문이다.

그녀의 두발이 공중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황군성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자신의 두터운 입술로 덮었다.

임단심은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안아주자 두근거림과 함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황군성의 혀가 그녀의 입 깊숙히 파고들어왔다.

서로의 타액이 교환되고,

영혼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달콤한 입맞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황군성의 한손이 그녀의 둔부 전체를 감싸고 쥐어짰다.

짜릿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그녀는 두 팔로 황군성의 목을 꽉 껴안았다.

황군성은 그녀를 안은채 바닥에 몸을 뉘였다.

임단심의 턱은 어떤 기대감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르락! 사르락!

그녀의 하의가 벗겨지며 한쪽으로 젖혀지고,

황군성의 하의도 발가락에 밀려 한쪽에 쭈그러졌다.

아무것도 깔지 않은 바닥이지만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녀의 몸 위로 황군성의 몸이 포개지고,

일순간 불같은 기운이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머리꼭대기까지 뻗어 올라갔다.

그녀는 아득한 심연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황홀한 상태에서 그녀의 정신은 구름 속을 노닐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몇 번이나 최고의 희열을 맛보았다.

그리고,

황군성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힘찬 분출이 있었다.

 

× × ×

 

임단심은 황군성의 몸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에게는 가장 편안한 곳이다.

그녀가 황군성의 귀에 대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저는 무조건 당신만을 따를 뿐이에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아무 걱정마셔요.]

[하지만 이번 한 번 만은 아버님 신세를 져야만 하겠소.]

황군성의 눈은 은은한 정을 담고 있었다.

노룡하에서 자신을 구한 후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바쳐온 여인이다.

산사태에 몸을 맡겨 죽으려고 했음에도 단극린의 혈왕신공으로 말미암아 죽지도 못하고 되살아난 그,

허무와 고독 속에서 유일한 쾌락이 있었다면 임단심과의 정사(情事)뿐이었다.

그것도,

그를 구하기 위해 임단심이 순결을 바침으로써 알게 되었던 것이지만……

어쨌든,

지난 삼개월 동안 그는 모든 것을 임단심에게 의지해 왔었다.

임단심과 그는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고,

기이하게도 그 자신도 그녀와 떨어진 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스스로 죽음에 대한 유혹과 삶에 대한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였기에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임단심의 그 현신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입 한번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임단심은 단 한번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제,

황군성으로 부터 모든 것을 전해들은 임단심은 그의 말이 마치 꿈인 듯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과는 별세계 인것같은 소음곡 이야기가 그렇고,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삼백세가 넘의 그의 육대조 이야기가 그러하며,

당대의 실권자의 영왕이 그의 외조부라는 사실이 그러했다.

하나,

그녀는 황군성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었다.

 

황군성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볼 일 다 봤으니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이곳은 철옥인데 어떻게……]

그는 임단심의 염려에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커다란 왼손바닥을 펴자 오리알같은 흰 물건이 나타났다.

[…………?]

(설마 저 구슬로 뭘 하겠다는……)

그녀의 설마는 사실이었다.

황군성의 다시 손을 움켜쥐는 순간,

번쩍!

한줄기 섬광이 뻗어 나오며 소리없이 한자 두께의 철문을 베어버렸다.

임단심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황군성의 손에는 날이 넓은 한 자루의 백색 도가 쥐어져 있지 않은가?

번천도였다.

황군성은 번천도를 휘둘러 통로를 낸 후,

얼이 빠져있는 임단심을 품에 안고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많은 옥리들과 포리 및 관군들이 서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문성무존의 후계자이자 한천사방객의 모든 무공을 한 몸에 익힌 황군성을 그들이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완전히 밖에 나왔을 때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한데,

십여 명의 인물들이 나는 듯이 빠져나가는 황군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갈무리된 기도는,

각기 오색 수실이 휘날리는 검을 찬 이들이, 일파 종사의 경지를 뛰어넘는 무공의 소유자임을 말하고 있다.

[역시 우리 짐작이 맞았군, 모령산을 일초에 죽인 인물 따위가 관의 뇌옥에 갖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은 소리지.]

[조금 뒤따라가다가 한적한 곳에서 처치하지.]

그들은 황군성이 몸을 날린 곳을 향해 섬전같은 빠르기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섰던 곳에 환상처럼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었다.

신검문의 군사인 제갈공지였다.

[주군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군. 보통 고수가 아니야. 어쩌면 저들이 모두 죽을 지도 모르지……]

그의 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한데,

이것은 틀림없는 배교(拜敎)의 환무잠행술(幻霧潛行術)이다.

오백 년 전에 모습을 감춘 배교……

제갈공지는 어떻게 해서 배교의 비전술법(秘傳術法)인 환무잠행술을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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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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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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