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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七 章

 

         忠誠水

 

 

 

파양호 물밑에 있는 어떤 섬,

위에는 잎이 상해버린 무수한 수목이 귀신처럼 흐물거리고 숲 안쪽에는 회색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석조건물이 있다.

수초들이 그 거대한 석조건물을 뒤덮고 있고,

물고기떼가 숲사이를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석조건물의 안에서도 헤엄치고 있었다.

누가 물밑에 이런 건물을 세워놓았나?

마치 고대의 유적지를 보는 듯한 이곳,

불과 몇 년 전까진 파양호위에 유유히 떠있던 섬이었다.

바로,

수백 년의 세월을 최강의 문파로 이어온 백인장의 고토,

사람은 보이지 않고 처량하게 물밑에 가라앉아 수초를 몸에 감고 있는 거대한 석조건물,

어이해 이곳에 가라앉아 버렸나?

한때 소선풍이 회복하기 위해서 몸을 눕혔던 곳도 이제는 물고기떼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렸는데……

가라앉은 부주(浮舟)의 석조건물 밑에는 또다른 공간이 있다.

거대한 광장이 있고 무수한 방들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사라진 백인장의 모든 가족들, 그리고 청옥검궁의 핵심요인들이었다.

어느 화려한 방안,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장주! 이제 우리의 힘은 예전에 못지않게 회복되었소. 하늘을 향해 도(刀)를 높이 치켜들고 소장주와 먼저간 원로들의 복수를 할 때가 왔소이다.]

소리 높여 말하는 이 사람,

절정의 도객답지 않게 지혜로 충만하여 고요로운 눈빛을 가졌던 제일원로 동평선생(東平先生)이다.

동료들의 죽음으로 성격마저 변해버렸는가?

그의 음성에는 조급함이 배어있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무림에 나가 삼수(三手)의 흔적마저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주용의 검에 찔려 죽을 뻔 했던 수혼도객 역시 이대봉공의 자격으로 재청하고 나온다.

그러나,

상석에 앉아 묵묵히 듣기만하고 있는 도왕 소선풍은 이 번에 그의 작은 부인인 조예진을 바라본다.

조예진은 다시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이주용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제 의견은 간단해요.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해도 원수는 갚아야 한다고요. 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급하지 않아요. 모든 결정을 당신과 언니, 그리고 여러 원로들에게 맡기고 단지 따르기만 하겠어요.]

이주용이 소선풍의 눈을 바로 보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제히 나가도록 해요. 우리 태봉(소일초의 어릴때 이름)이 원수를 갚아야죠.]

표정을 굳히고 원로들을 쭉 돌아본다.

[원로들께서도 저와 생각을 같이 하시겠지요?]

그녀의 말은 강요에 가깝다.

백인장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전에는 소일초였고 지금은 화해하고 돌아와 있는 이주용이다.

이 모자(母子)는 사람괴롭히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인 것이다.

백인장에서 큰 마님인 이주용에게 잘못보이면 편한 세월은 다간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잔소리 쟁이 원로들도 그녀 앞에서는 항상 찔끔한다.

무슨 수단으로 자기들을 괴롭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원로들 역시 대부분이 밖으로 나가자는 데 찬성이지만 이주용의 눈길을 받고 의견을 낼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당연히 그렇소이다.]

제일원로인 동평선생은 그들을 보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밤낮 눈총만 받으면 아첨부터 하고보는 못난 녀석들……)

그는 먼저 의견을 냈기 때문에 눈총받지 않아서 그럴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때, 소선풍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은 강요지 어떻게 의견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소? 그만 두시오.]

[그럼 대체 당신 생각은 어떻단 말이에요? 삼수에게 한 번 당하고 나니까 겁이라도 생겼어요?]

그녀는 발끈하는 성미를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소선풍에게 달려든다.

원로들은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하고……

동평선생은 다시 중얼거린다.

(저 못된 성미……그저 성질대로라면……저러니까 쫓겨나고 법썩을 떨었지……그저 작은 주모 반 만돼라……)

소선풍이 이주용을 진정시키면서 무심군자에게 말한다.

[좌봉공, 우리가 계획했던 것이 몇 년 이었소?]

[오 년 입니다.]

[지금은 몇 년이 되었소?]

[불과 삼 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무심군자는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는 듯 차분하게 말해준다.

[좌봉공이 생각하기에 우리의 힘이 얼마나 강해졌다고 생각하시오?]

[먼저 장주께서 일어나셨으니 천하에 우리가 이기지 못할 세력은 없을 것이며 원로들께서 몇 분 남지 않으셨지만 원체 고강하신 분들이니 말할 것 없으며……]

무심군자의 차분한 말에 원로들이 미소를 지었다.

[주력인 백인도객 중에서도 절정에 도달한 인물들이 다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백 십여 명에 불과 하지만 천군만마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주용이 다시 소리쳤다.

[그것 봐요. 지금도 얼마든지 된다잖아요.]

소선풍이 벌떡 일어섰다.

[그 정도의 힘은 언제든지 있어왔다.]

그의 큰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우리 백인장이 어떻게 해서 소수의 사람들로도 수 백년을 무림의 최강세력으로 존재해 올 수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다.]

[…………!]

이주용은 입을 다물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그와 같은 일은 있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백인장은 신화를 이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백인장의 장주로서 수백 명의 식구들을 이끌어가는 가장(家長)이다. 백인장의 식구 어느 누구고 나에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수백년을 함께 내려온 형제요 피붙이나 다름없다.]

[…………!]

[한데도 나는 삼 년 전,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저 사람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치정에 따른 결정을 하고야 말았다.]

조예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원로십팔도객이 아무도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눈물로서 그들을 보냈다. 그때 생명을 잃은 그들은 나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죽은 것이다.]

일곱명의 원로도객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장주, 당치않은 말씀이외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소선풍은 머리를 저었다.

[다행히 열 한 분의 살신성인으로 인하여 나머지 분들이나마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음에 대해 나는 하늘에 감사했소이다.]

소선풍은 이주용을 바로 응시했다.

[당신에게 우리 백인장의 힘이 수백년 동안 조금도 위축되는 법이 없이 보전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해 주겠소.]

[…………!]

[백인장주는 절대로 백인장의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소. 그들을 죽을 장소로 보내는 일은 없었소. 장주는 오히려 그들을 위험으로 부터 보호해 왔소.]

원로들과 봉공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주는 자기를 위하여 그들을 부리지 않았소. 그것이 우리 백인장이 수 백 년을 최강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요. 희생시키지 않기에 힘은 강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오. 강요하지 않기에 그들은 따르는 것이오.]

[…………!]

소선풍은 고개를 숙였다.

[한데……삼 년 전 그때 나는 수 백 년을 내려온 장주의 율법을 어기게 되었소.]

[장주……]

원로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로 인해서 백인장의 세력은 크게 줄게 되었으며 나는 이렇듯 잠적을 감행하게 된 것이오.]

소선풍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의 나는, 장담하건데 삼수(三手)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그들을 다 감당할 수 있소. 하나,]

[…………]

[그들의 세력으로 인해서 우리 백인장의 식구들 중에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오. 그들의 수하들은 삼 년 전에도 수 만을 헤아렸소. 우리 백 여 사람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오.]

[…………]

[나에게는 장주로서 그들을 죽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가족이라도 더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소.]

그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머리에 관을 쓴 금포노인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나라도 내보내 주게.]

그는 소선풍의 장인이자 청옥검궁의 궁주인 검왕 이극송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그를 맞았다.

[갑갑해서 더는 이 안에서 못 살겠네, 나는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까 지금 나가서 죽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소선풍도 선뜻 결정을 못내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조예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우리가 직접 삼수와 부딪치지는 않더라도 강호로 나가서 활동해야 할 필요는 있지 않겠어요?]

그 말에 이극송이 껄껄웃었다.

[내 생각이 바로 그걸세, 자네는 잘 생각해야 하네,]

[…………]

[내 성미도 자네 큰 마누라처럼 급하고 못된 데가 있다네. 만약 나가지 못하게 하면 이 부주를 깨뜨려 버릴 지도 몰라.]

그의 말에는 소선풍이 입이 막혀버렸다.

이렇게 하여,

백인장의 숨어있던 고수들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주력은 여전히 숨어있지만 일부나마 활동하게 된 것이다.

삼수의 흔적을 쫓아다니며……

 

× × ×

 

분주히 돌아다니며 공작을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파양호에서 수 천리 떨어진 서천목산에 있었다.

바로 한천이기이다.

지금 그들은 한 명의 흑의노인과 한 명의 흑의청년을 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지금 묘한 자세로 앉아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단검의 끝을 서로 맞대고는 다른 손은 뒤로 돌려 버린 다음에 한 손으로 단검을 밀고 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조금이라도 상대방 단검의 끝에서 자기의 단검이 벗어날 경우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 밀고 있는 것이기에 검은 그대로 서로의 가슴을 꿰뚫어 버릴 것이다.

원천기가 그들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양팔을 벌려 두 사람의 뇌호혈에 올려놓았다.

[등천마세의 주인은 누구인가?]

[…………!]

[말하지 않으면……]

원천기는 두 사람의 몸을 흔들었다.

노인과 청년은 급히 검을 흔들리지 않게 조정하면서 땀을 흘렸다.

[등천마세의 주인은? 답하지 않으면 다시 흔들겠다.]

그가 다시 흔들려고 하자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대교주인데 무슨 소리야!]

화가 나서 말을 내뱉는 순간 기가 흩어지면서 그의 단검이 뒤로 밀렸다.

원천기는 이 번에는 청년의 몸을 흔들면서 다시 물었다.

청년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듯 했다.

[바로 당신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그의 검이 뒤로 밀리고,

원천기는 자기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노인의 몸을 흔들면서 다시 물었다.

다급해진 노인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그래 원천기다 원천기]

청년은 원천기가 자기의 몸을 흔들기도 전에 말했다.

[원천기, 원천기!]

원천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 인정했으니 내가 어떻게 하든 내 말을 듣겠지? 그럼 당신들은 충성수(忠誠水)를 마시도록.]

그는 말을 하면서 그들의 뇌호혈에서 손을 떼고 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순간,

청년과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쉭----!

쇄액---!

서로를 겨누고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옆에서 옥병을 꺼내는 원천기의 목과 가슴을 노리고 찔러들어갔다.

근접한 거리, 빠른 공격, 예상키 어려운 상황, 기습이었다.

그러나……

원천기의 왼손이 환상처럼 움직이며 두 개의 단검을 소매로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의 발이 그들의 명치를 제각기 가격하자 그들의 입이 순간적으로 벌어지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원천기가 우수에 들었던 옥병의 충성수를 부어넣었다.

[헉!]

[윽!]

놀라는 사이에 이미 비명과 함께 충성수는 그들의 목으로 넘어가 버렸다.

짝짝……

원천기는 손을 털었다.

충성수가 목으로 넘어간 이상 일은 다 끝난 것이다.

두 사람은 무조건 그의 명령에 따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세 달 후에는 전신이 살점이 떨어져 내려 뼈만 남은 모습으로 죽게 될 것이다.

물론 해약을 먹으면 괜찮겠지만……

원천기는 그들에게 무적검에게 복종할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등천마세에서 서열 이십위 내에 드는 고수들이었지만 원천기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충성수……

이는 칠십이기재들이 만든 일종의 독약이다.

보통 물과 똑같이 보이고 맛도 같지만 삼 개월에 한 번씩 해약을 먹지 않으면 전신의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이다.

원천기와 한천녀는 이미 무수한 등천마교의 고수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충성수를 마시게 했다.

그 만큼, 소일초의 밑으로 모여드는 사람의 수는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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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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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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