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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왕 치우

 

 

 

자면제왕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등룡풍은 서둘러 나무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웃기는 늙은이군! 살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는 냉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츠츠츠!

몸을 돌려 세우는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용의 흔적이 급격히 엷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룡쇄심인은 본래 자면제왕이 자랑하는 독문살수였다. 그것에 격중되면 대뇌에 직접 타격이 가해져 죽고 만다. 그 무서움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무서운 자룡쇄심인이 소년 등룡풍의 살갗도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종(藥宗)의 후예를 건드린 빚은 꼭 기억해 두겠다 자면제왕 독고황!”

등룡풍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급히 부엌 옆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검박하게 정돈된 방 한쪽에는 튼튼해보이는 나무 침대가 놓여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등룡풍은 급히 나무침상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긍......!

그러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침대가 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등룡풍은 뛰듯이 지하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중앙에는 약을 달이는 커다란 청동단로(靑銅丹爐)가 놓여있고 사방 벽에는 수많은 약병과 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석실 한편에는 쇠로 만든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철제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인물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물론 자면제왕에게 천면신마라 불린 회포노인이었다.

“너무 지체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다!”

등룡풍은 급히 침상의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막 회포노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팍!

돌연 회포노인의 손이 강철수갑같이 등룡풍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악!”

등룡풍은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절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번쩍!

“......!”

회포노인의 눈이 벼락치듯 떠지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노려보았다.

“깨...... 깨어나셨군요!”

등룡풍은 고통 속에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너는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와 어떤 관계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등 아래에서 한 권의 고경(古經)을 꺼냈다.

그것은 다 낡은 양피지의 책자였다.

 

<약종천황경(藥宗天皇經)!>

 

고서(古書)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의성(醫聖) 편작(騙鵲)이 지은 세 권의 의경(醫經)중 한 권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편작은 약종경(藥宗經), 기의경(奇醫經), 천독경(千毒經) 등 삼 편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약종천황경은 바로 그 중 약종경(藥宗經)이었다.

약종경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의 구분, 이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약을 채취하러 천하의 험산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그에 쓰이는 한 가지 절정 경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탄신폭등비(彈身暴騰飛)라는 그 경신절기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고래로 약종경(藥宗經)을 연마한 편작의 후예를 약종일맥(藥宗一脈)이라고 일컫는다.

약종일맥의 의생들은 약을 쓰고 해독하는데 있어 단연 환우제일이었다.

 

흠칫 놀라던 등룡풍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천외약종이란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저의 아버님 함자가 사(獅)자 추(追)자 되십니다.”

그 말에 회포노인의 눈에 한 가닥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천외약종 등사추는 올해 이미 백 살이 넘었는데...... 게다가 그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거늘......!)

그는 내심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였다.

당대 약종일맥의 종사인 그는, 그러나 이십 년 전 한 가지 일로 중원무림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인들의 질책에 밀려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변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면 이미 백 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십 오륙세 정도된 어린 소년 등룡풍이 천외약종의 아들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회포노인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부가 결례했다면 용서하게, 소형제!”

회포노인은 등룡풍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이어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면......”

등룡풍은 급히 말리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포노인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은 탓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네, 소형제! 노부는...... 곧 한줌 독수(毒水)로 녹아들 것이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장께서 천년시독(千年屍毒)에 중독된 것은 알지만 제가 능히......”

등룡풍은 회포노인을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독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네! 천년시독의 해독정도야 약종일맥의 후예인 소형제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겠지. 하지만 사실 노부는 그외에도 한 가지 지독한 불문신공에 맞아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상태라네!”

“아!”

등룡풍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는 회포노인이 중독된 것 외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회포노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를 다치게 한 자는...... 방금 나타났던 야수혈마(野獸血魔)라는 자이네. 그 자는...... 수미천강인(須彌天罡刃)이라는 불문항마절기를 지녔는데...... 그것이 노부의 내부를 산산이 바스러 뜨려놓았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회포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검푸르게 변해갔다. 그것은 천년시독이 대뇌까지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개의치 않고 힘겨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본래 중(僧)이었네. 법호는...... 추망(醜亡)...... 하지만 무림인들에게는...... 천면신마(千面神魔)라고 불리웠지!”

“천면신마!”

등룡풍은 긴장된 음성으로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천면신마라 자처한 회포노인,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면신마의 고통은 극에 이른 듯했다. 그는 안면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네. 이...... 물건을...... 천불동(千佛洞) 반야암(般若庵)의...... 반야신니(般若神尼)에게...... 전해 주게!”

그는 침상 옆에 놓인 길쭉한 물건을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말에서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소중하게 안고 있던 물건이었다. 둘둘 만 무명천의 끝으로 삐죽하게 녹슨 칼자루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등룡풍은 엄숙한 안색으로 이어지는 천면신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면신마의 음성은 끊어질 듯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반야...... 신니에게 그것을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해 주게. 천황(天皇)의 종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그놈들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

“......!”

등룡풍은 긴장된 표정으로 천면신마를 주시했다.

아! 이미 천면신마의 손 끝은 검푸른 독수로 녹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면신마는 사력을 다해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주게나. 노부...... 추망(醜亡)은...... 한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그것이 천면신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쿵!

마침내 그는 모로 쓰러졌다.

그러자,

츠으......

기다렸다는 듯 이내 그의 신체는 급격히 검푸른 독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면신마,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

등룡풍은 멍하니 독수로 변한 천면신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천년시독! 정말 지독하구나!”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편히 잠드시기를.....! 노인장의 유언은 잊지 않겠어요.”

그는 경건하게 합장하며 천면신마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려 보았다.

“반야암(般若庵)...... 반야신니(般若神尼)......!”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등룡풍은 침중한 안색으로 천면신마의 시체를 거두었다. 시체라고 하나 시퍼런 독수와 몇 줌의 녹지 않은 모발이 전부였지만......

툭......!

헌데 등룡풍이 천면신마의 회색장포를 집어들자 무엇인가 발 끝으로 떨어졌다.

“......!”

그것은 검은색의 가죽주머니였다.

등룡풍은 허리를 굽혀 가죽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한 권의 비급과 여러가지 변장도구가 들어 있었다.

등룡풍은 먼저 비급을 꺼내 펼쳐보았다.

 

<천면경(千面經).>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천면......경?”

등룡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비급을 한 장 넘겨보았다. 그러자 깨알같이 빽빽한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

등룡풍은 호기심을 느끼며 비급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추망(醜亡)은 우연히 천축(天竺) 유가문(兪家門)의 비급 반부를 얻게 되었다. 그것에는 골격과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축골역형신공(縮骨易形神功)의 구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래 추괴한 용모를 지녔던 노납은 뛸 듯이 기뻐했으며 축골역형신공을 연구하여 천 개의 얼굴(千面)을 지니게 되니...... 뭇 중생들이 노납을 일컬어 천면신마(千面魔宗)이라고 했다...... 중략...... 노납의 공부가 모자라 축골역형신공의 마지막 단계인 전능환영결(全能幻影訣)을 연마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노부 필생의 한 가지 원한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대충 그러했다.

천면경은 천면신마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천면신마는 오래 전에 멸망한 천축 유가문의 비급 반부를 얻었었다. 그의 천면절기는 바로 그 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 비급의 절기로 천 개의 얼굴을 지녀 천하를 우롱할 수 있었다.

등룡풍은 모르고 있었으나 천면신마란 이름은 무림최고의 신비로 통했다.

등룡풍은 천면경을 덮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후인을 만나면 전해 주어야지!”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천면신마가 건네준 길쭉한 물체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인데 이 노인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 했을까?”

그것은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무명천을 통해 싸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등룡풍은 조심스럽게 무명천을 풀어보았다.

순간,

“칼(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무명천 속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칼(刀)이었다.

하지만 등룡풍이 놀란 이유는 그 칼이 너무도 볼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길이는 석 자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칼 전체에는 녹이 덕지덕지 앉아 있어 도저히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녹슨 칼의 손잡이에는 흐릿한 전자체(篆字體)로 도명(刀名)이 새겨져있었다.

 

-도왕(刀王) 치우(蚩尤).

 

그것을 본 등룡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왕? 이 녹슨 쇠붙이가 칼(刀)의 제왕(帝王)이라고?”

그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무명천으로 다시 도왕 치우를 둘둘 말아 쌌다.

“어쨌든 부탁을 받았으니 반야암이란 곳에 전해 주기는 전해 주어야지!”

등룡풍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치우신도를 조심스럽게 싸들고 석실을 나섰다.

 

* * *

 

쉬-이잉!

거친 모래바람이 뿌옇게 옥문관 일대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황량한 바람 속으로 흐릿한 태양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朝),

마침내 하루가 열리는 아침인 것이다.

태양이 떠올라 추위는 다소 덜해진 듯했다. 하나, 거칠고 사나운 모랫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불동(千佛洞).

 

옥문관 너머 서역쪽 삼십여 리 부근에는 가파른 절벽이 하나 서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석벽을 파고 그곳에 수많은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하여 천불동, 또는 막고굴(莫古窟)이라 불리웠다.

당대(唐代)에 천축(天竺)을 다녀온 신라국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往吾天竺國傳)을 남긴 동굴의 암자도 바로 이곳 천불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문득 모랫바람 속으로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세찬 바람을 뚫고 옥문관 쪽에선 일인(一人) 일기(一騎)가 나타났다. 아니, 그중 일기는 말(馬)이 아니라 한 필의 늙은 당나귀(驢)였다.

당나귀의 등 위에는 전신을 온통 두터운 천으로 감싼 한 명의 소년이 타고 있었다. 소년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눈에 들어갈까 봐 당나귀의 갈기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었다.

따각...... 따각......

늙은 당나귀는 소년을 태우고 천천히 천불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힘은 없으나 그 대신 노련한 그 당나귀는 기승스런 사풍 속에서도 제대로 천불동을 찾아온 것이었다.

“반야암(般若庵)은 저쪽이었지!”

소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전면을 주시했다.

등룡풍! 소년은 바로 등룡풍이었다.

뿌연 모랫바람 속으로 두 개의 절벽이 맞닿은 아늑한 골짜기가 바라다 보였다. 그 골짜기는 천불곡(千佛谷)이라 불렸으며 그 끝에 한 채의 암자가 절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반야암(般若庵).>

 

그 암자가 바로 반야암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반야암에는 여승들, 즉 비구니들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곡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등룡풍도 몇 번 천불동에는 왔었으나 반야암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등룡풍은 힘들어 하는 늙은 당나귀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푸르르.....!

당나귀는 한 차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 느린 걸음을 옮겨 천불곡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헌데 천불곡의 입구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연 무엇을 발견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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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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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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