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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새벽의 방문자

 

 

 

-옥문관(玉門關)!

 

중원의 끝자락에 자리한 야만(野蠻)과 풍요(豊饒)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

잘 알려진 대로 옥문관은 중원에서 서역(西域)으로 드나드는 관문이다. 옥문관을 넘어서면 인간은 문명의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자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만 한다.

전한(前漢)시대 월지(月氏)를 찾아나섰던 장건(張騫) 이래 야심과 청운의 꿈을 품고 옥문관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불귀고혼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다 알겠는가?

때는 여명(黎明) 무렵이다.

쉬이잉! 쐐애앵!

비단폭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를 머금은 삭풍(朔風)이다. 옥문관 너머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황야에서 불어오는 이 삭풍에는 다량의 모래까지 섞여 있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삭풍의 기세등등함 때문인지 옥문관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량한 분지 중앙에 사암(砂岩)을 쌓아 구축한 성벽 안쪽에는 천여 채의 가옥들이 넓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시사철 서역에서 불어오는 드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옥문관 일대의 가옥들은 모두 지붕이 낮은 토담집들이었다.

두두두......

문득 여명의 적막을 깨고 남쪽으로부터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필의 건마(建馬)가 옥문관의 남쪽 대로로 쫓기듯 달려들어 왔다.

푸르르!

건마는 먼길을 달려온 듯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고 있는데 전신에서는 피같이 검붉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것은 땀이 아니었다.

피(血)!

건마의 전신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후두둑......

건마가 지나는 땅에는 검붉은 피와 땀이 뒤섞여 뿌려진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인물이 말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일신에 빛바랜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그 역시 타고 있는 말과 같이 전신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원래 회색이던 그 사람의 장포는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말갈기에 파묻고 있어 용모와 나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회포인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두두두......

일인일마(一人一馬)는 기승을 부리는 삭풍을 뚫고 옥문관의 대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헌데, 대로의 북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히히힝-!

돌연 건마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너무 지치고 탈진하여 마침내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쿠-웅!

선혈을 지면으로 흩뿌리며 건마의 몸뚱이는 거칠게 길 중간으로 나뒹굴었다.

“크-윽!”

그와함께 말 등에 타고 있던 회포인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길바닦에 나뒹굴었다.

후두둑!

회포인이 나뒹군 주위는 삽시에 그의 몸에서 뿌려진 선혈로 검붉게 물들었다.

“미...... 미련한 축생(畜生)! 너마저 노부를 죽이려느냐?”

회포인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며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제서야 드러난 회포인의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포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설령 유의하여 뇌리에 새겨두었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푸르르.....!

회포인을 태우고 온 말이 간신히 비칠거리며 일어서더니 주인에게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미물! 그래도 노부가 주인인 것을 잊지 않았느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말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히힝-!

두두두......!

그러자 말은 주인이 정말 자기를 때리는 것으로 알고 깜짝 놀라 울부짖으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본 회포노인은 안색이 홱 변했다.

“아...... 안돼, 돌아와라!”

회포노인은 다급히 부르짖으며 일어났다.

두두두!

하지만 놀란 말은 길길이 날뛰는 모래바람을 뚫고 삽시에 노인의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으...... 천불동(天佛洞)이 지척인데...... 여기서 이 지경이 되다니......!”

말이 달아나자 회포노인은 낙심하여 신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크-윽!”

콰당탕!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해 회포노인은 다시 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기력이 쇄진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헌데 노인은 정신을 잃고서도 예의 무명천으로 싼 길쭉한 물체를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쉬-이잉! 고오오!

다시 칼날 같은 모래바람이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스으...... 스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포노인의 몸은 점점 휘날리는 모래 속으로 파묻혀 갔다. 오랜 시간 지속된 출혈과 삭풍에 실려온 한기로 인해 노인은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 어느 집에서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설사 깨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날같이 매서운 모래바람이 두려워 밖에 나올 엄두도 못낼 것이므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문득 대로의 우측에 있는 나지막한 토담집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조금 열려진 나무문 틈으로 불쑥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여우털로 만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칠팔세 가량 되었을까? 서북 변방의 아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에 섬세한 윤곽을 지닌 소년이었다. 짙은 검미와 곧은 콧날, 유난히 붉고 선명한 입술이 흰 피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소년의 두 눈은 더없이 맑고 초롱초롱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게 반짝이며 지혜로 가득 찬 소년의 두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끌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 사람이잖아!”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던 소년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며 동그랗게 떠졌다.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회포노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소년은 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휘이잉!

집을 나서는 순간 드센 모래바람이 소년의 크지 않은 체구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뛰듯이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지독하게 다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겠는 걸!”

소년은 회포노인의 온몸이 무수한 상처로 뒤덮인 것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차!”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회포노인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넣어 질질 끌고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회포노인의 몸은 의외로 무거워 소년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년은 회포노인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간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주위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닦고 급히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쉬-이잉!

다시 거센 모래바람이 대로를 스치며 회포노인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채 일다경(一茶更)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화라락!

거친 모래바람을 타고 하나의 인영이 회포노인이 쓰러졌던 곳에 날아내렸다.

“......!”

길에 내려서자마자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는 이 인물은 구척의 당당한 체구에 검붉은 자색(紫色)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이 노인은 얼굴에도 은은한 자색(紫色)이 떠돌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배에까지 닿아있는 긴 수염 역시 짙은 자색을 띠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자면인(紫面人)의 눈은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가 강인하면서도 사나운 인상을 풍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삼엄하고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화드득-!

거센 삭풍이 자면인의 옷깃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하지만 자면인은 미동도 않고 우뚝 선 채 매섭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번쩍!

그러던 어느 순간 여우털 모자를 쓴 소년이 들어간 집쪽을 주시하던 자면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일어났다.

자면인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년의 집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검붉은 자색의 광채가 번져나오는 자면인의 눈에 소년의 집 문설주에 한줄기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들어왔다.

“흥! 천면신마(千面神魔)! 그렇게도 구차하게 살고 싶었는가! 쥐새끼같이 이런 오두막집에 기어들어가다니......!”

자면인은 얄팍한 입술 끝을 올리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쾅!

다음 순간 자면인은 발로 거칠게 나무문을 걷어찼다.

쉬-이잉!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친 모랫바람이 집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

자면인은 매서운 눈길로 빠르게 집 안을 살펴보았다.

열려진 나무 문 안쪽은 넓지 않은 거실인데 천정에는 수많은 약봉지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거실 저 편으로 부엌과 방으로 통하는 문 두 개가 보였다.

한데 맨 흙이 드러나 있는 거실 바닥에는 금방 흘린 듯한 선혈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자면인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천면신마! 언제까지 쥐새끼같이 숨어 있을 작정인가?”

그러면서 집 안쪽에 대고 우렁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세요? 저희 약포(藥鋪)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요!”

약간 짜증이 섞인 소년의 음성이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끼-익!

이어 부엌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걸어나왔다. 물론 회포노인을 구한 그 소년이었다.

“......”

한데, 소년을 보는 순간 자면인은 그만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소년은 몸 여기저기에 온통 시뻘건 피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오른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왼손은 목이 잘린 닭을 움켜쥐고 있다. 그 닭은 방금 전에 목이 잘린 듯 다리와 날개를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자면인의 얼굴이 일순 낭패로 물들었다.

(닭피였는가?)

순간 그는 질풍같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집안을 둘러보았다.

“......”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큼직한 두 눈에는 은은한 조소의 빛이 떠돌았다. 자면인이 그것을 보았다면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으음......”

한 차례 집안을 둘러번 자면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건 뭐냐?”

자면인은 자색의 광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의 손에 들린 닭을 주시했다.

자면인의 살기어린 시선을 접한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이...... 이거요? 보시다시피 제 아침거리인데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바람에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어요.”

그는 모가지 잘린 닭을 들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면인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의 태도에서 조금도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지만 자면인은 의심을 다 풀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소년은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용풍(龍風). 등룡풍(登龍風)이라고 해요.”

“등룡풍......”

자면인은 소년의 이름을 입 안으로 되뇌이며 다시 한 번 대청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천정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약봉지에 이르렀다. 아마도 소년 등룡풍의 집은 약포를 하는 듯했다.

자면인은 다시 등룡풍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안에 어른들은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등룡풍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버님과 저 단둘인데...... 아버님은 장성 너머로 채약하러 가셨어요.”

“그래?”

번-쩍!

무심코 중얼거리던 자면인의 눈이 돌연 급격한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검미를 곤두세우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의 아래 위를 살폈다.

(대단한 골격이다!)

꽉 움켜쥔 자면인의 손으로 문득 땀이 배어흘렀다. 그제서야 그는 소년 등룡풍의 골격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알아본 것이다.

소년의 체격은 일견하여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실로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면인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으나 눈앞의 소년 등룡풍같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골격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이...... 것은 어쩌면 전설 중의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마로 문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

달리 제왕지상(帝王之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골격 중 가장 완벽한 품상을 일컫는 말이다.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임독이맥(任督二脈),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되어 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차 천지현관이 닫히고 임독이맥이 굳어져 버린다. 그래서 지혜가 아둔해 지며 무공을 연마하는 자는 내공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용골호형지체는 달랐다. 그 골격을 지닌 인물은 나이가 들어도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천지현관은 언제나 활짝 열려져 있으며 임독이맥은 영원히 굳어지지 않는다.

내공을 연마하면 막힘없이 증가하여 범인이 백 년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용골호형지체의 인간은 단 일 년이면 얻을 수 있게 된다.

천지현관이 막혀 있지 않아 그의 지혜는 막힘이 없으며 무공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용골호형지체를 지닌 인간이 일견하여 연약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몸이 어머니의 태내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왕품골(帝王品骨)-!

인간 중 가장 완벽한 용골호형지체의 골격을 지닌 소년, 바로 그 소년 등룡풍이 지금 자면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놈이 무공을 연마하면 십 년이 못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적수가 없게 된다!)

자면인은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짝 마름을 느꼈다.

그는 등룡풍을 주시하며 내심 침중하게 생각을 굴렸다.

(이놈은...... 후일 구중천자(九重天子)가 되려는 본좌의 최대최강의 적수가 될 놈이다. 게다가 만일 구중천(九重天)의 다른 놈들 손에 이놈이 들어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면인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자광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열 배 강해졌다.

츠-읏!

순간 등룡풍은 작렬하는 듯한 자면인의 눈빛에 들고 있던 닭을 놓치며 휘청 물러섰다.

(눈이...... 타는 듯하다!)

자면인의 두 눈은 뚫어질 듯 등룡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죽이든지 아니면 본좌의 제자로 삼든지 해야만 한다!)

그의 눈이 문득 살기로 붉게 물들었다.

쩌정!

다음 순간 그의 손 끝에서 벼락치는 듯한 자색의 벼락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등룡풍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 사람......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비칠비칠 물러섰다.

자면인은 그런 등룡풍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쩌저정-!

자색벼락이 흐르는 그의 오늘손이 점점 치켜 들려졌다. 그의 손이 내려쳐지면 등룡풍은 채 싹도 피워보기 전에 한줌 피모래로 화할 판국이었다.

등룡풍은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그로서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헌데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흐흐흐흐! 놀라운데? 당당한 제왕천(帝王天)의 천주(天主) 자면제왕(紫面帝王)께서 무공도 모르는 소년을 헤치려 하다니......!”

돌연 문 밖에서 한 줄기 싸늘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자면인, 자면제왕(紫面帝王)의 입에서 벼락치는 듯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꽈르릉!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홱 뒤집히며 집 밖으로 한 줄기 자색벼락을 후려쳐냈다.

빠카카캉!

직후 철벽(鐵壁)을 두드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썩 집안을 뒤흔들었다. 그와함께 마치 폭풍이 불어닦친 것같은 엄청난 돌풍이 문밖의 대로를 휩쓸어 자욱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

그러나 직후 자면인은 강력한 반탄력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집밖의 누군가가 마주 쳐낸 강력한 장력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던 것이다. 자면제왕은 자칫 그 반진에 밀려 한 걸음 밀려날뻔 했던 것이다.

자면제왕이 어깨를 들썩일 때였다,

“크읏! 자전신강(紫電神罡)! 역시 명불허전인데......!”

쿵쿵!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집밖에서 누군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휘청휘청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거푸 다섯걸음을 물러나서야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저놈은...!)

몸을 세운 그 인물을 바라본 자면제왕의 날카로운 눈에서 번뜩 이채가 흘러나왔다.

나타난 인물은 일신에 피칠을 한 듯 붉은 혈포를 걸친 거한(巨漢)이었다. 구척이 넘는 당당한 거구를 지닌 인물인데 기이하게도 그자의 몸 전체에는 핏빛의 털(血毛)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털이 나지 않은 곳은 얼굴의 앞부분 외에는 없었다. 흡사 거대한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괴인(怪人)이었다.

혈모괴인(血毛怪人)의 두 눈에는 핏빛 안광이 벼락치듯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자면인에 못지 않은 패도적인 눈빛이었다.

“혈왕천(血王天)의 제이인자...... 야수혈마(野獸血魔)!”

혈모괴인을 본 자면인의 입에서 앓는 듯한 한 소리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큿! 역시 무섭소. 자칫 천주(天主)의 손에 극락구경을 할 뻔했구료.”

야수혈왕이라 불린 괴인은 음침한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오싹한 느낌을 준다.

자면제왕은 집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왕천까지 이번 일에 흥미를 느꼈다니 놀랍군.”

“크큿! 별 말씀을...... 육합천병(六合天兵)에 흥미를 지닌 것은 비단 당신의 제왕천이나 우리 혈왕천 뿐만이 아니외다.”

야수혈마는 음침하게 말을 받으며 흘깃 자면제왕의 뒤에 서있는 소년 등룡풍을 주시했다.

직후 그의 눈에서도 은은한 경악의 빛이 흘렀다. 아수혈마 역시 등룡풍의 뛰어난 골격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자면제왕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몸을 약간 움직여 등룡풍의 모습을 가렸다. 이어, 그는 야수혈마의 흥미를 등룡풍에게서 옮기려는 의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혈왕천의 여제(女帝) 혈모(血母)께서도 천면신마를 쫓아 이곳까지 오셨소?”

“혈모께서는......”

야수혈마는 두 눈을 야릇하게 번뜩이며 무엇이라 말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삐이익-!

돌연 한 소리 날카로운 호각성이 서북방에서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회포노인이 타고온 말이 달아난 곳이었다.

“......”

“......”

자면제왕과 야수혈마는 동시에 흠칫했다.

“천면신마의 종적이 발견된 듯하구료. 노부는 이만 실례하오.”

피-잉!

다음 순간 야수혈마는 히죽 웃으며 유령같이 모랫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도 아니고 야수고 아닌 기분 나쁜 놈!”

자면제왕은 야수혈마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언젠가 네놈의 보기 싫은 껍질을 노부의 손으로 벗겨 버린다!”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흘렀다.

이어 그는 다시 등룡풍에게로 돌아섰다.

“......!”

등룡풍을 바라보는 자면제왕의 눈빛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변했다.

등룡풍은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생사가 몇 차례나 뒤바뀌고 있음을 알고 내심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자면제왕은 결심을 한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으면 너를 본좌의 제자로 삼겠지만...... 치우신도(蚩尤神刀)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팟!

그는 말과 함께 등룡풍의 미간을 향해 섬전같이 일지(一指)를 찔렀다.

“악!”

쿵쿵!

순간 등룡풍은 미간을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비칠 물러섰다. 그런 그의 미간에 어느 틈엔가 은은한 자색의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진 용무늬를 본 자면제왕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흐흣! 너는 노부의 자룡쇄심인(紫龍碎心印)에 제압당했다! 일 년 내로 노부가 그것을 풀어 주지 않으면 너는 대뇌가 녹아 들어가 죽고 만다. 살고 싶다면...... 청해(靑海)의 제왕보(帝王堡)로 노부 자면제왕 독고황(獨孤皇)을 찾아와랏!”

자면제왕은 등룡풍에게 음산하게 웃어보이고는 유령같이 몸을 날렸다.

스으......

이내 자면제왕의 모습은 등룡풍의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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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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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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