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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금릉. 저녁 무렵. 이곳엔 아직 비가 오고 있다.

황금전장

공자무의 집무실의 열린 창가에 뒷짐을 짚고 서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는 공대벽

공대벽; (얼마 전 마음속에 큰 울림이 있었다.)

공대벽; (많은 사람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던 어떤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노을이 비치는 하늘을 보고

공대벽; (애도(哀悼)의 념(念)은 일지만 통절(痛切)하지까지는 않은 걸 보면 내가 아는 인물은 아닌 듯 한데....!) 찡그리고

공대벽; (그보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결재를 하던 중에 깜박깜박 졸았을 때처럼 정신이 나가곤 했다.) 찡그리고

공대벽; (몸이 너무 좁다고... 정신이 몸 밖으로 뛰쳐나가 땅과 하늘과 어울리다 돌아오곤 했다.)

공대벽; (이래서야 마치 바깥 세계를 동경하는 사춘기적 소년 같지 않은가?)

<귀(鬼)입니다 소주!> 어디선가 귀의 음성이 들리고

<마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공대벽; [알았소!] 창문을 닫고

문으로 가서 문을 여는 공대벽

진군소가 지붕이 얹혀진 복도를 따라 오고 있다

공대벽; [어서 오십시오 어머니!] 문을 열고 고개 숙이고

진군소; [울적해 보이는구나!] 문을 들어서며 말하고

공대벽; [빗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 것뿐입니다.] 말하며 손으로는 탁자 앞의 자리를 권하고

진군소;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란다.] 공대벽이 권하는 자리에 앉고

공대벽;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소자를 부르실 일이지 우중(雨中)에 여기까지 몸소 오셨습니까?] 진군소 옆에 서서 차를 따르며.

진군소; [너도 앉거라.]

진군소; [우거지상이 되기 직전의 얼굴이다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자꾸나.]

공대벽; [예!] 맞은 편 자리에 막 앉는데,

진군소; [거기 있는 건 누구냐?] 벽을 향해서

<귀입니다 마님!>

진군소; [이 방에서 소리가 나가지 못하게 막으세요.] [엿보거나 엿듣는 자가 있다면 신분을 묻지 말고 죽이세요.]

공대벽; [어머니!] 흠칫 놀라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귀의 대답

귀의 대답을 들은 진군소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안락의자에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를 앞뒤로 조금씩 흔든다.

공대벽; (귀가 술법을 펼쳐서 주변을 차단하는 걸 기다리고 계시는군!) 직후

스으! 문득 방이 어두워지더니

두 모자가 마주 앉은 탁자가 있는 곳만 다시 밝아진다. 마치 조명을 비친 듯이

공대벽; (결계(結界)가 쳐졌군!) 눈 반짝

진군소; [솜씨가 줄지 않았군요 귀!] 눈을 뜨고

<소주 앞에서 술법을 펼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진군소; [이대비역(二大秘域)중 하나인 귀무곡(鬼霧谷)의 곡주께서 너무 겸손해졌군요.] 웃고

<....!> 대답이 없는 귀

진군소; [큰 애야!]

공대벽; [말씀하십시오 어머니.] 고개 숙이고

진군소; [네 아버지가 떠나면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어느덧 집안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더구나.]

공대벽; [소자 아직 부족합니다.] 고개 숙이고 대답하는데

진군소; [오늘 밤에 떠나거라.]

공대벽; [!] 깜짝 놀라 눈 부릅.

진군소; [나는 아직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한숨

진군소; [지체하지 말고 떠나도록 해라.]

공대벽; [어머니! 소자에게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당황

진군소; [나는 네 아버지가 남긴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때가 네 아버지의 예상보다 더 빨리 온 것뿐......]

공대벽; [소자는 집안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공대벽; [게다가 어머니만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 진군소; [너는 내가 몇 살 때 공가로 시집왔는지 아느냐?] 공대벽의 말을 막고

공대벽; [소자 모릅니다.]

진군소; [내 나이 스물 두 살때였다.]

진군소; [이듬해에 너를 낳았는데, 난 죽지도 않았고 병들지도 않았으며.....]

진군소; [무엇보다도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지도 않았다.] [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난 것보다 그 사실에 더 기뻐하셨다.]

공대벽; (무슨 말씀이신지....) 당혹

진군소; [스물두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노산(盧山)에 있었는데, 네 아버지가 맞으러 왔었다.] 아련한 표정으로 추억에 잠기는 진군소

<나는 즉시 검을 던져버리고 네 아버지를 따랐다. 그날로 백명이 넘는 색마와 음적을 척살한 악명높은 여살성 백화검(百花劒) 진군소(晉君笑)는 무림에서 사라졌다.> 젊은 시절의 진군소가 바지를 입은 채 검을 폭포에 던지고 있다. 얼굴이 발그레. 그 뒤에서는 역시 젊은 시절의 공자무가 뒷짐 짚고 보고 있다.

진군소; [네 아버지는 그때 내게 물었단다.] [자기를 위해 아들을 낳아 줄 수 있느냐고! 딸은 절대 안 되고 오직 아들을 낳아 줄 수 있겠느냐고!]

진군소; [나는 부끄러웠지만 큰소리로 대답했다. 할 수 없다고 하면 네 아버진 나와 혼인하지 않았을 테니까.]

<燕趙悲歌士 연나라 조나라의 강개한 협객들이

相逢劇孟家 극맹의 집에서 함께 만났네.

寸心言不盡 포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前路日將斜 길은 멀고 해는 서산을 비끼네.>

허공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 진군소

공대벽; (전중문(全中文)의 봉협자(逢俠者)로구나!)

<손으로 한 번 가리키면 협객들이 들고 일어나 한 나라와도 싸울 수 있을 정도였다는 최고의 협객 무제(武帝) 극맹(劇孟)!> 이 작품의 맨 앞에 나왔던 극맹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극맹이 단상에서 포권하자 그 앞에 수많은 협객들이 마주 포권하며 고개 숙이는 모습

공대벽;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는 극맹을 노래한 저 시에서 여장부로서의 어머니의 포부가 생생히 느껴진다.)

진군소; [요즘 얼마나 세상을 알았느냐?]

공대벽; [소자는 단지 저 책상에 앉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책상을 보고

진군소; [천지가 네 품안에 있는 듯 하지 않느냐?] 의미심장하게 묻도

[!] 공대벽 놀라서 가슴이 덜컥

진군소; [일어서면 천하가 굽어보이고 앉아도 하늘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공대벽; [어 어머니......!] 당황

진군소; [이 말은 네 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그날 밤에 고백했던 말이다.]

공대벽; (아... 아버지도 나와 같은 경험을....!) 땀을 닦고

진군소; [나는 그 한마디에 내가 평생을 받들어야 할 남자를 만났음을 알았다.]

진군소; [그때부터 나는 네 아버지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할 수 있었다.]

진군소; [나 이전에도 네 아버지 옆에 다른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군소; [하지만 네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던 네 아버지는 나를 택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

진군소; [모든 빼어난 자들을 굽어보는 네 아버지가 나를 택했는데 내가 무엇인들 버리지 못했겠느냐? 검이든, 포부든.....!] 미소짓고

공대벽; [아버님께서는 무림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진군소; [삼 년!]

진군소; [오직 삼 년뿐이었다. 그 삼년 동안 무림에 나와 여자들만 찾아다녔지.]

공대벽; [아버님께서 여자들을요?] 놀라고

진군소; [그래, 네 아버지께서!] [그리고 이젠 네가 그렇게 할 차례다.]

공대벽; [어머니! 전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진군소;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준엄하게

공대벽 입을 다물고.

진군소; [나를 공씨 가문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끊어버린 죄많은 어미로 만들 셈이냐?] 준엄하게 말하고

공대벽;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진군소; [네 나이 이미 스물 다섯!] [헌헌장부가 되는 동안 네 혼사를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네 마음이 하늘까지 닿도록 자라길 기다린 때문이다.]

공대벽; (확실히 난 혼기를 놓쳤다.) (내 나이또래의 다른 상인들은 대부분 자식을 여럿 두었고 첩도 서넛은 보통일 정도다.)

<물론 내게도 강호의 여러 명문 거파들과 상계의 거부들로부터의 혼담이 끊이질 않았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일체 그들의 혼담에 응하지 않으셨다.> 중매장이 할머니가 예물을 늘어놓고 뭐라 말하지만 그 앞에 진군소와 함께 나란히 앉은 공자무가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젓고 있다

공대벽; (이제 보니 부모님들은 내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진군소; [천하가 굽어보이고 하늘이 높아 보이지 않을 때에야 우리 공가의 자손은 짝을 찾아 혼인할 자격을 가지게 된단다.] 끄덕이고

진군소; [그리고 이제 너에게 그 때가 왔다.]

긴장하는 공대벽

진군소; [마침내 때가 오면 우리 집안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설사 나와 네 아버지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네 배필을 찾는 일보다는 중요치 않다.]

공대벽; (가문의 전통이, 긴 세월을 내려온 핏줄이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주먹 꾸욱

진군소; [잘 듣거라. 강호에 나가거든 무림의 협객이니, 강호의 은원이니 하는 것에는 휩쓸리지 말거라.]

진군소; [혹시 관여된다고 하더라도 좌우되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해라. 누구도 너를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공대벽 묵묵히 듣고.

진군소; [지난 밤 네가 돌려보낸 여자를 나도 보았다.]

용설약을 떠올리는 공대벽

진군소; [고수더구나. 오히려 당년의 나보다 더 강해보였단다.]

진군소; [그 정도 여자마저 굴복시킬 수 있다면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여자는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단다.]

진군소; [다니고, 만나보고, 찾아보다보면, 네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 여자를 만나면 가까이에서 지켜봐야만 한다.]

진군소; [그리고 가까이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네가 가까이 갔을 때 오지 못하게 하는 여자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진군소; [황실의 공주라도 네가 다가가는 걸 막지는 못할 것이다.]

공대벽; [예!] 고개 끄덕이고

공대벽;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의 난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군소; [적당한 여자를 찾은 후에는 앞을 보고 뒤도 보고, 손도 만져보고 발도 만져 보거라.] [잠자는 것도 지켜보고 먹는 것도 지켜봐야 한다.]

진군소; [그래서 네 마음에 <이 여자다!>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게 되면, 그때 그 여자를 데리고 오너라.]

공대벽; [그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공대벽; [하온데 넷째는 이미 권씨세가의 권완소저와 정혼을.....!]

진군소; [막내 놈이 권가주로 변장을 한 채 제멋대로 꾸민 짓이다. 세가가 그것을 용납할 리 없다.]

진군소; [그런데도 그쪽에서 끝내 혼사를 주장하고 나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넷째는 아직 혼인할 때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군소; [사실 공씨의 사람이 되는 것은 기쁜 일이긴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진군소; [나는 운이 좋아 너를 낳고도 네 동생들을 셋이나 더 낳았다만....] [네 조모님과 증조모님, 그리고 그 윗대의 분들 모두 자식을 둘 이상 낳으신 분이 없다.]

공대벽; [어찌하여 그리 되었습니까?]

진군소; [우리 집안의 내력(來歷)이다.]

진군소; [천지를 굽어볼만한 사람을 낳았는데 몸이 성하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느냐?]

공대벽; (하긴...!) 끄덕

진군소; [대대로 공씨집안의 여자는 온몸의 정기를 다 소모하여야만 한 아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진군소; [범상한 몸이라면 해산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조금 당찬 사람이이라면 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거나 일생을 질고(疾苦)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진군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공씨집안의 여자치고 기쁘게 그 일을 감당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

진군소; [천지를 굽어볼만한 인물을 낳는 것이 공가에 들어온 여자로서 해야만 하는 의무기 때문이다.]

진군소; [이것이 우리 공가가 오랜 세월 친척도 없이 오직 일맥(一脈)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란다.]

공대벽; (아버지가 공처가란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어머니를 떠받드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공대벽; (어머니는 하나도 낳기 힘들다는 공가의 자식을 자그마치 넷이나 낳으셨으니...!)

진군소; [너희들이 모두 혼인하여 자식을 여러 명씩 낳는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구나.]

공대벽;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진군소; [이제 세상으로 나가거라. 큰애야!] [나가서 네 자식을 낳아줄 수 있는 여자를 찾아오너라.]

진군소; [아주 튼튼하고 복이 많은 여자를 골라야 한다.]

진군소; [여자는 자식으로 인해 그 집안의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남자는 자식을 낳음으로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대벽;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진군소; (구령! 사갈같은 년!) 이를 바득 갈며 구령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의 모습

진군소; (네가 아무리 어쩐다 해도 소용없다.) (이미 마흔이 넘은 네가 지금 와서 그이의 아이를 가질 수는 없을 터!)

진군소; (그이가 너한테 간 건 오직 네 목숨이 위험하니 구해주러 간 것뿐이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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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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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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