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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산중에도 비가 그쳤다. 구름이 흩어지며 저녁별도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졌다.

활활 타는 낡은 절.

불타는 절 안에는 혈정 만천태와 유모의 시체가 놓여있다.

불에 타는 대웅전의 기둥들이 지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절을 등지고 떠나는 공자무와 구령

구령; [오라버니의 넷째 아들은 성정이 저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군요.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

공자무; [어쩌다 우리 공씨집안에 그런 놈이 났는지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 한숨

구령; [다음에 만나면 제가 혼을 좀 내줘야겠어요.] [저 같은 성미라면, 매를 대지 않고는 바르게 키울 방법이 없을 거예요.]

공자무; [마음대로 하려무나.] 웃고

구령; [혹시 이번에 우리가 살아난다면…] 망설이고

구령; [그 아이를 제게 주실 수 없을까요?] 용기를 내어 공자무를 보고

공자무가 걸음을 멈춘다. 놀란 표정으로 구령을 돌아보고

구령; [저도 어느덧 마흔살을 넘겼답니다. 이미 아이를 갖기에는 늦은 나이지요.] 한숨

구령; [하지만 저를 위해 제상에 술 한 잔 올려줄 아들은 하나쯤 있었으면 해요.]

공자무; [네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공자무; [하지만 나 혼자 결정하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구령; [그렇겠지요? 낳아준 어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우울

공자무; [너무 낙담하지 마라. 집사람에게는 내가 알아듣게 얘기를 넣어보마!] 구령의 어깨를 감싸안고

구령; [어쩔 수 없이 제가 그 얄미운 여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겠군요.]

공자무; [그래서 잘 자란 자식은 어미의 울타리고 아비의 보루라고 하지 않느냐?]

억지로 웃는 구령

그런 구령의 어깨를 안고 걸음을 옮기는 공자무

구령; (오라버니에게 자식을, 그것도 아들을 넷이나 낳아준 것만으로도 나는 영영 진군소, 그 말같은 년을 이기지는 못하겠구나!)

<운명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고 야속한 것인지...!> 어두워지는 길로 멀어지는 두 사람

 

#109>

밤. 금릉에도 비가 그쳤다. 날씨가 맑아졌고 금릉의 밤거리에는 여기저기 수많은 등불이 걸려 불야성을 이룬다

불이 거의 켜져 있지 않은 황금전장을 떠나는 공대벽. 모자를 쓰고 멋진 도포를 입어서 풍류한량 같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공대벽의 뒤를 귀가 따른다.

귀; [소주! 어디로 가실 계획이신지요?]

공대벽; [발 닿는 대로 가봅시다.] 웃고

공대벽; [저마다 짝이 있는 거라면 제 짝도 어디서든 만나게 되겠지요.]

귀;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우선 산 좋고 물 좋은 곳부터 둘러보셔야만 합니다.]

공대벽; [미녀도 풍수(風水)로 찾습니까?] 웃고

귀; [그렇습니다.] [산이 아름다워야 여자도 아름답고 물이 맑고 풍성한 곳이라야만 마음속에 포부를 품은 여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귀;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도 아름다운 여자가 큰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공대벽; [하하하! 온전히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려면 세상 모든 여자들을 만나봐야겠군!]

귀; [그럴 각오를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귀; [그러나 인연은 기필코 이어지게 되는 법이니 의외로 쉽게 만날 수도 있습니다.]

고개 끄덕이는 공대벽

이어 용설약을 떠올린다.

공대벽; (어쩌면... 이미 그 인연을 만났었는지도 모르지!)

공대벽; (진정한 인연이라면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될 테고...!) 멀어진다

 

어둑한 황금전장.

집무실에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진군소.

진군소; [예정된 일이긴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빠르구나.] 편지를 다 쓰고

진군소; [둘째부터 시작해서 네 아이가 차례로 내 곁을 떠나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 편지를 접는다.

진군소; [이 지경이 되었건만 그래도 당신은 나 혼자만 이 커다란 집에 덩그러니 남겨놓고 구령 그년과 돌아다닐 수 있을까?] 편지를 봉투에 넣는다.

진군소; [이제 눈치를 봐야 할 자식들도 없어.] 편지 봉투 입구에 풀을 바르고

진군소; [그러니까 그 독사 같은 년과 함께라도 집으로 돌아오기만 해줘. 이 밥통 같은 양반아.] 봉투 입구를 눌러 붙인다.

진군소; [신!]

<마님! 분부하시지요.> 벽 속에서 대답하고

진군소; [넌 주인을 찾을 수 있겠지?]

<......> 대답이 없고

진군소; [가타부타 대답 못해?] 바락 성을 내고

<찾... 찾을 수는 있습니다.> 급히 대답하고

진군소; [그럼 찾아가서 이 편지를 전해.] 편지를 뒤로 던진다

슥! 벽 속에서 손이 빠져나와 그 편지를 받고

진군소; [편지를 받아본 다음 그 양반이 돌아오겠다면 다행이고... 오지 않겠다면 혼자라도 즉시 돌아와!]

진군소; [대신 이 말을 분명히 그에게 전하도록 해!]

진군소; [끝내 안돌아오면 내가 먼저 가겠다고!] [저승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이를 바득 갈고

<마님!> 스윽! 벽에서 스며나오는 신

신; [참람하여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씀입니다. 거두어주십시오!] 포권하지만

진군소; [신!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진군소; [명분으로야 주종지간(主從之間)이지만 핏줄로는 내게 사촌동생인 네가 아니더냐?] 호통을 치고

신은 주눅이 들어 머리를 숙인다.

진군소; [나는 젊었을 때는 선하곡(仙霞谷)의 사나운 검이었으며 지금은 제왕공가(帝王孔家)의 안주인이다.] 강렬한 기운을 흘려내고

진군소; [내가 시정의 어리석은 계집들처럼 허튼 말이나 지어내 남편을 협박하는 여자일 것 같으냐?] 무시무시한 기세

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진노를 거두십시오 마님!] 깊이 포권하고

스스스! 이어 사라지는 신

진군소; [박정한 사람! 무심한 사람!] 공자무를 떠올리며 이를 바득 갈고

진군소; [구령 그년이 그렇게 안쓰러웠으면 일찌감치 데려다 측실로 들어앉히지!] [긴긴 세월 가슴에 묻어두고 내 앞에선 늘 일편단심인 척 해?]

진군소; [늙어서 힘 빠진 후에 내 구박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진군소; [그래도 제발 살아서 돌아오기나 해!] [구령 그년뿐만이 아니라 정을 뿌리고 다닌 년들 다 끌고 와도 받아줄 테니까!] 운다

 

#110>

아침. 해가 막 떠올랐다.

반쯤 부러진 은행나무. 은행나무 가지에 청풍의 옷이 빨아서 널려있다. 은행나무는 상단부가 반으로 쪼개져 마치 누가 일부러 새총을 만들려고 벌려 놓은 것 같다.

그 은행나무 아래의 밀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청풍. 헌데 옷이 모두 벗겨졌고 아랫도리만 작은 천으로 덮여있다.

누워 잠들었다가 귀를 쫑긋하는 청풍.

[벽력진군(霹靂眞君)의 칼을 제대로 맞았으면 저는 물론이고 목신(木神)이 된 진보의 정(精)도 물방울처럼 흩어졌을 거예요!] 옆에서 들리는 음성

청풍; (뭐야? 버릇없는 나무 요정이잖아!)

청풍; (서문노야의 신(神)을 빌어 승천하니 뭐니 하더니만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네!) 곁눈질한다

좌대에 놓여있던 서문숙의 시신은 없어졌다. 대신 좌대에 권완과 공손대낭이 나란히 앉아있고. 우는 공손대낭을 권완이 등을 다독이며 달래고 있다.

공손대낭; [벽력진군의 칼질을 피할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어요.]

권완; [벼락을 맞기 전에 스스로 자해해서 가지를 찢어버렸군요.]

공손대낭; [다행히 벽력진군은 제 몸이 자기의 칼질에 맞아 쪼개진 것으로 알고 돌아갔답니다.]

공손대낭; [하지만 천신(天神)들에게 미움을 입은 바 되었으니 제가 승천할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혀버렸어요.]

공손대낭;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하늘에서도 내침을 당했으니...!] 두 손으로 얼굴 가리고 울고

권완; [좋게 생각하세요.] [세상에 남아 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어요?]

공손대낭; [그러고 싶지만.... 사람들은 저같은 요정들을 너무 무시해요.]

공손대낭; [알고 보면 요정들의 신세는 참으로 불쌍하답니다.]

공손대낭;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아가씨도 보셨잖아요,] [한 사람의 강퍅한 마음에도 대적하지 못하는 것을요!]

공손대낭; [지상에서도 죽을 뻔하고 하늘로 올랐다가도 사람의 탁한 악기(惡氣)에 쏘였다고 다시 떨어진 불쌍한 저를요.]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청풍; (저것이 은근히 내 욕을 하는구나.) 이를 부득 갈고

청풍; (하찮은 미물이 사람 행세를 하는 것도 꼴사나운데 감히 사람인 나를 욕해?)

청풍; (내가 저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나를 욕했으니 혼을 좀 내줘야겠군. 빌어먹을 요정 같으니!) 이를 부득 부득 갈고

권완; [쉽지 않겠지만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도록 노력하세요.]

권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진창 속에 뒹굴어도 이 땅이 좋다고 해요.] [아마 하늘나라에도 이 땅에서의 삶보다 좋은 건 없을 거예요.]

청풍; (퍽이나 좋겠다!) 코웃음을 치고. 순간

권완; [그대는 나쁜 버릇이 있군요.] 고개 돌려 청풍을 째려보고

움찔하는 청풍

권완; [잠자리에서 정신이 들었으면 바로 일어나야 합니다.] [게으른 자 치고 큰일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어요!] 준엄하게 말하고

청풍; (젠장할! 어째 아버지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 [여! 잘 들 있었어?] 너스레

청풍; [죽지 않고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 넉살 좋게 손은 쳐들고

공손대낭은 겁에 질려 권완의 뒤로 숨고 권완은 얼굴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청풍;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한 달? 두 달?] 침대에서 내려서려는데. 펄럭! 아랫도리를 가린 천이 흘러내리지만 청풍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기겁하며 얼굴 새빨개져서 고개 숙이는 권완

청풍; [뭘 새삼스럽게 내외(內外)를 하고 그래? 어쨌거나 우린 정혼한 사이잖아!] 침대에 걸터앉은 채 뚱하게 말하고

권완; [하... 하루 밖에 안 지났어요.] 여전히 고개 숙인 채 부끄러워 하고

청풍; [정말?] 못 믿겠다는 표정

청풍; [이상한 곳에서 괴물딱지같은 놈하고 수천번을 싸웠는데 겨우 하루가 지났다고?]

권완; [극기마환신단때문에 시간이 많이 흐른 걸로 느끼시는 거예요.] [그보다 앞이나 좀 가려요.] 곁눈질로 흘겨보고

청풍; [가리긴 뭘 가려?] 말하며 아래를 보고

띠용! 비로소 자신이 벌거벗어서 고추도 털렁 내놓고 있는 걸 알게 되는 청풍

청풍; [으악!] 앞을 가리며 펄쩍 뛰어 오르고

청풍; [에구구구!] 후다닥! 앞을 가리고 발발 뛰어서 열려진 문 밖으로 도망간다

후다닥! 문 밖에 등을 기대며 죽상이 되는 청풍

입 가리고 웃는 권완과 공손대낭

청풍; [이... 이게 뭐야? 내가 왜 발가벗고 있는 건데?] 밀실 안에 대고 죽상으로 외치고

권완; [옷이 너무 많이 피에 젖어서 빨았어요.] [지금쯤 거의 다 말랐을 테니까 나가서 입고 오세요.]

청풍; [옷... 옷을 빨았다고? 그럼 내 옷을 벗긴 것도...!]

권완; [대낭은 당신 곁에 가지도 못하니까 제가 벗길 수밖에 없었어요!] 얼굴 붉히고

청풍; (그... 그 말인즉슨 처녀 주제에 내 고추까지 다 봤다는...!) 죽상

권완; [걱정 마세요.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벗겼으니까요.]

청풍; (으으으! 십칠년간 고이 간직해온 내 순결이 이렇게 날아갔구낭!) 울상. 그때

꼬르르! 배에서 소리가 나고

권완; [나간 김에 근처 마을로 가셔서 요기도 하고 오세요.] [벌써 사흘 넘게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

청풍; (그러고 보니 뱃가죽이 등에 붙었군!) + [자기도 뭘 좀 구해다줄까?]

권완; [대낭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저도 화식(火食)은 하지 않아요.] [닷새 정도는 안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제 걱정은 마세요.]

청풍; [알... 알았어! 그럼 다녀올께!] 눈치를 보며 입구 쪽으로 간다.

스스스! 청풍이 다가가자 문을 가리고 있던 나무뿌리가 저절로 젖혀지고

문도 저절로 열린다

청풍; (못된 요정같으니!] [나간다니까 옳거니 하면서 길을 터주는군!) 뒤를 흘겨보며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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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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