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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神秘한 一族

 

 

 

햇살이 소음곡 전체를 내리쬐는 시간은 불과 두시진 반 정도,

지금은 소음곡이 가장 밝고 아름다울 때다.

정오가 아직 되지 않은 시간,

콰아아아!

장원의 뒤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맑은 물은 장원 전체에 거미줄 처럼 퍼져있는 수로(水路)를 맴돌아서 앞쪽의 수문으로 나온다.

수로가 지나는 곳의 주변에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장원의 밖으로 나온 물은 곡구(谷口)쪽에 있는 연못으로 흘러들어간다.

물은 끝없이 연못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연못의 물은 조금도 더 불지 않는다.

이곳에 어디론지 통하는 물길이 있으리라.

이 소음곡,

정말 신비한 곳이다.

계곡을 가까스로 들어서면 바로 연못이 펼쳐져 있고 그 뒤에 이만 여 평의 분지에 온갖 동물들이 뛰어 놀고 있는 것이다.

장원의 한 내실,

창으로는 찬란한 금빛 햇살이 스며들어 온다.

화려한 내실을 장식하고 있는 아담한 자단목 가구들이 보이고,

비단 휘장이 쳐진 벽면에는 갖가지 병장기들이 걸려있다.

검(劒)……도(刀)……창(槍)……편(鞭)……봉(捧)……비도(飛刀)……산(傘)……유성추(流星鎚)……선(扇)……철척(鐵尺)……

무려 사십여 개의 병기들이 걸려 있지만 그 중에 갖은 종류는 하나도 없었다.

방의 중앙,

자단목의 탁자에 마주 앉은 한 쌍의 중년 부부가 보인다.

한데,

사십이 넘어 보이는 중년인,

청수한 용모임에도 위맹한 기상마저 함께 보이고 있다.

짧게 자라있는 수염이 그의 강직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 하고,

넓은 얼굴은 중후한 인상의 큰 배포를 미리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사람,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인 황창설(黃蒼雪)인 것이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부인은 바로 그의 처 주혜린이고……

주혜린은 끊임없이 남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듯 한데,

황창설은 손에든 한 자루의 청옥소(靑玉簫)를 매만지며 경탄을 터뜨리고 있다.

[보면 볼 수록…… 진품이라는 걸 느끼게 해……과연……]

그의 손에 들린 청옥소는 은은한 하늘 같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엇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청옥소의 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그 심미안(尋美眼)을 눈뜨게 해주는 듯하다.

황창설은 청옥소를 입에 가져갔다.

순간,

부우󰠏󰠏󰠏󰠏󰠏󰠏!

맑은 소성(簫聲)이 멀리까지 울러펴졌다.

소음곡 전체에 끝없이 들려오는 소음(簫音)과 어우러져,

청옥소의 소리는 마치 천상의 선음(仙音)처럼 들렸다.

[한데 왜 어딘지 모자라는 것같은 느낌이 자꾸드는 걸까‥‥‥?]

그가 다시 청옥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주혜린이 톡 쏘듯이 말했다.

[당신도 똑같아요.]

하지만 황창설은 여전히 청옥소를 쥐고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이나 군성이는 내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아요. 지금도 당신은 딴청만 피고 있어요.]

주혜린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미간이 잔뜩 모아져 있었다.

그러자 황창설이 이상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문제라고 나까지 신경써야 된단 말이오?]

주혜린은 아예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어머머머……세상에……]

[…………]

[당신은 우리 아들들이 모두 이상한 생각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걱정도 되지 않아요? 그러고도 부모노릇 다했다고 그럴거예요?]

황창설은 피식 웃었다.

[무공 익히기 싫은 놈 억지로 가르칠 게 뭐있소? 책읽기 싫다면 그것도 할 수 없지. 약골이 되도 제 녀석이 되는 거고 무식한 놈이 되도 제 녀석이 되는 거지 내가 되는 건 아니니까.]

주혜린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당신이 얘들에게 무심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까지일 줄은……]

[내버려 둬요. 살기 싫으면 죽든가 죽기 싫으면 할 만한 뭔가를 찾아보든가 하겠지.]

황창설은 마치 남의 집 감떨어진 얘기를 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만한 때 생의 의욕만으로 넘친다면 머리 나쁜 놈이란 얘기 밖에는 안돼, 당연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설마……당신도 그랬단 말예요?]

황창설은 청옥소를 눈에 갖다대고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물론 그랬지. 나도 머리나쁜 놈은 아니었으니까. 당신을 만나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지?]

주혜린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돼요. 당신과 결혼한 것이 올해로 꼭 스물하고도 두 해 째인데, 어머님외에는 전부 나하고 달라요.]

[이상할 게 없어. 이곳에 소음곡에서 태어났느냐 아니면 바깥세상에서 태어났느냐 그차이 뿐이니까.]

황창설은 청옥소를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팔짱을 꼈다.

[이봐요, 혜명공주(慧明公主)마님!]

주혜린이 흥,하고 콧웃음을 쳤다.

[또 무슨 곤란한 말씀을 하시려고……]

혜명공주(慧明公主)……

주혜린이 혜명공주였단 말인가?

당금 황제(皇帝)의 사촌아우로 황족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영왕(永王),

늘 황제의 측근에서 중요한 사항에 대한 자문을 해주고 있는 이 시대의 실력자,

그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 바로 혜명공주였던 것이다.

황창설은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말했다.

[이곳 소음곡은 태산의 정기가 어려있는 곳이라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자리잡은 이후 세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명을 누리며 살아온 것이오.]

혜명공주가 삐죽하면서 말했다.

[오래 사시기는 오래 사시더군요. 그 덕에 지금도 세수(歲數) 삼백이 넘으신 오대조부모님까지 모시는 며느리니까요.]

이 장원,

놀랍게도 십여채의 전각들 중에 하인이라고는 한사람도 없다.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른 명 정도,

그들은 모두 황창설의 오대조부모에서 부터 숙부들에 이르기까지 한 가족들인 것이다.

지금은 황창설이 집안일을 맞은 장주가 되어 있으나,

그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기는커녕 밑에서 맴돌고 있는 처지였다.

단지 윗 어른들이 일체 장원이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 명색이나마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주혜린이 시집오면서 여덟명의 시녀들을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손수 물일까지 해야하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창설이 재력이 부족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버젓이 외부에 몇 개의 기업(企業)을 가지고 있었다.

북경에만 해도 가장 큰 고서화점(古書畵店)인 천품서화방(天品書畵房)이 바로 그의 것이다.

또한 무창(武昌)에도 골동품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안(西安)과 중경(重慶), 항주(杭州), 개봉(開封)에도 각각 기업이 있다.

그래서 그는 한해에 한번 씩은 꼭꼭 천하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사업체들을 찾아 운영 상황을 점검해오고 있다.

그가 주혜린에게 말했다.

[태산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은 우리 황가에 범상(凡常)한 자란 없소. 그래서 나이가 들면 대부분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는 거요. 세존께서 그랬듯이……하지만 결국엔 모두 그 회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삶을 찾게 되는 거라오. 만약,]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제 갈 길은 따로 찾아 가거나 죽어야겠지. 극복하지 못하면 당연히……]

황창설의 표정은 아주 근엄하게 변해버렸다.

자식이 그렇게 돼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다지 개의치 않을 태도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기도 그래왔고, 그의 아버지도 그래왔듯이, 자기의 아들들도 능히 극복해내리라는 철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주혜린은 어머니로서의 불안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자단목 탁자위에 놓여진 청옥소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하늘같은 푸른 빛을 띠고 있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황창설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주! 걱정은 그게 아니라오. 당신은 상상도 못할 다른 곳에 군성이의 걱정이 있다오……)

 

× × ×

 

무장각(武藏閣),

이 장원이 문성무존(文聖武尊)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대리석 건물은 만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서있을 듯 견고하게만 보인다.

문성무존의 곳곳에 놓여진 작은 다리들 아래로 흐르는 수로는 이곳 무장각도 돌아흐로고,

아름다운 꽃들이 풍기는 향내에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문득, 무장각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장대한 체구, 딱 벌어진 어깨,

늘어진 흑발……

어깨에 비스듬히 걸려있는 사척 장검……

바로 황군성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서 무장각안으로 들어갔다.

외인이 없는 곳이기에 무장각은 중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개방되어 있다.

그그긍!

황군성은 석문을 밀어젓히고 들어갔다.

순간,

무장각 안은 무수한 야명주들로 인하여 대낮같이 밝아졌다.

물론 밖이야 대낮이지만.

무장각 안,

삼장 높이의 천정아래 이장 높이의 수십개의 서가(書架)가 서있다.

아니,

그것은 서가가 아니다.

서가처럼 보일 뿐 사실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벽들이다.

그리고,

그곳에 문성무존의 모든 무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리석 벽들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야명주들이 새겨진 글자들을 밝혀준다.

황군성은 즐비한 벽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랫만에 들어와 보는 군, 정확하게 일천삼백오십이일 만이군!]

그는 왼손을 펴보았다.

그의 손에는 동한객 궁월로 부터 받은 번천도환이 쥐어져 있었다.

[십일……십일이면……번천도를 삼성까진 익힐 수 있겠지……]

 

× × ×

 

저녁무렵,

문성무존을 맴돌아 흐르는 수로위에 누군가서 서있었다.

아니,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을 밟고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황창설,

바로 그였다.

물은 이상하게도 폭포가 있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황창설이 타고 있는 수로는 한바퀴 맴돌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창설은 폭포 바로 앞에 있는 한채의 전각 앞에 이르러 표홀히 몸을 날렸다.

마치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나르는 기러기처럼 날아서 전각의 문앞에 내려섰다.

황창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면서 허리를 굽히고 나직하게 말했다.

[소손 창설입니다.]

그러자 전각안에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황창설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각 안,

기다란 회의탁이 놓여져 있고,

그기에는 십여 명의 노인들이 앉아있었다.

그 중 제일 상석에 앉아있는 노인,

계피학발에 눈썹마저 배꼽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다.

다른 노인들도 모두 긴 수염을 늘어뜨린 미염공(美髥公)들로 진정 신선(神仙)같은 풍모들이었다.

이들은 바로 황창설의 사대조를 비롯한 그의 웃어른들인 것이다.

황창설은 가장 말석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상석에 앉아있는 황창설의 고조부 황필민(黃筆旻)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일은 절대로 처에게도 말해선 않된다. 행여 연로하신 아버님이 들으시면 어떤 사고가 일어날 지 모른다.]

좌중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 집안의 가장 어른인 황창설의 오대조는 이러한 회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없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황필민은 눈썹속에 파묻힌 눈을 빛내며 황창설에게 물었다.

[그곳은 가보았느냐?]

[예, 소손이 직접 갔다 왔습니다.]

황창설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상세히 말해보도록 해라.]

[소손이 가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정 괴이한 곳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그의 입만을 쳐다 보았다.

[그곳에는 한층의 검은 구름같은 것이 걸려있어서 밑에는 빛이라고 한 점 없었습니다. 소손의 안력으로도 살피지 못할 정도의 어둠이었습니다.]

좌측에 앉은 한노인이 불쑥 물었다.

[삼갑자(三甲子)에 이른 네 공력으로도 말이냐?]

[그렇습니다.]

황창설은 계속 설명하고 모든 사람들의 안색은 침중했다.

[그자들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공한 인물들일지도 모릅니다.]

황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감히 우리 문성무존의 장손(長孫)에게 손을 뻗친데 대한 댓가는 주어져야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 수염이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군성이 그 아이가 배운 무공 중에는 틀림없이 엄청난 마공(魔功)도 있다.]

황필민의 눈이 엄청난 신광을 뿜어냈다.

[자준(慈俊), 자걸(慈傑), 자웅(慈雄)! 이 일은 너희들에게 맡긴다.]

그러자,

회의탁 우측에 나란히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셋이 벌떡 일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 분부하십시오.]

놀랍게도,

이들은 황창설의 증조부들이었다.

황필민은 느릿하게 말했다.

[우리 문성무존은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천년이 가깝다. 한데, 누군가가 우리를 그 피비린내 나는 곳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장손(長孫)에게 접근한 그자들, 너희들은 무조건 그자들을 죽여라.]

황필민은 전각의 문을 밀었다.

[단, 결코 그 아이가 모르도록 처리해라.]

황필민이 나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읍했다.

명령을 받은 세 노인은 자리에 앉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너희들은 그만 가보도록 해라. 우리는 좀더 논의할 일이 있다.]

 

잠시 후,

전각 안은 그들 세 노인만 남았다.

황창설의 증조부인 황자준이 두 아우에게 말했다.

[군성이의 뒤를 밟아서 그자들을 죽이면 간단하겠지.]

[하지만 형님,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자웅이 말했다.

[군성이는 우리 집안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입니다. 녀석도 문성무존 최고의 비학인 철인검(哲人劒)을 제외한 모든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런 녀석을 가르칠 수 있는 자라면 그자들의 무공은 진정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황자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어떤 무공이 우리 문성무존의 철인검을 당할 수 있겠느냐?]

황자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철인검,

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이들이 이렇게 자신하는 것인가?

더구나,

이들의 말로 미루어 보아 황군성의 모든 행적을 알고 있는 듯 한데……

그렇다면 이들이 죽이려하는 인물은 그의 사부들,

바로 한천사방객들이라는 결론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소음곡에서 살아온 문성무존 황가(黃家)일족,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은 과연 무엇때문에 무림에 나서기를 꺼리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 ×

 

황필민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노인의 수염은 땅에 닿을 만큼 길었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형한 눈으로 황필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황필민의 조심스런 말.

그 노인은 바로 황필민의 아버지인 이 집안 최고의 어른이었다.

노인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칠칠치 못한 놈, 나잇살이 삼백이 가깝도록 내 몰래 뭘 하려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황필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증손자 현손자 오대손까지 거느린 그도 아버지 앞에서는 미욱한 자식에 불과한 것이다.

노인, 황필민의 아버지 황숭환(黃崇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여전히 젊은 녀석들 마냥 뭐든지 힘부터 쓰려고 하니……]

황숭환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뒤로 황필민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오늘같은 날이 오리라는 것을 대강은 알았지……]

황숭환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황필민의 얼굴에 은은한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어.]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숭환은 들릴락 말락한 음성으로 말했다.

[군성이 그놈……어깨가 너무 넓었어. 다 그 때문이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남의 한을 대신 지게 된 거지. 나도 반갑진 않지만 숙명이라면 거역할 수 없겠지. 그놈들을 죽이든 말든……]

황숭환은 꽃들 사이로 걸어서 가버렸다.

[네녀석도 밤잠없으면 책이나 볼거지 돌아다니지 마라.]

황필민은 흠칫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셨구나.)

기실,

황군성이 때때로 소음곡을 빠져나가 모종의 장소로 간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황필민이었던 것이다.

황필민은 중얼거렸다.

[문성무존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적이 생긴다. 적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가 강하면 그만큼 따라 강해지는 것, 세상 밖의 혼란에 궂이 빠질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라고 할 이곳 소음곡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뿐……]

그의 말은 바로 문성무존이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했다.

적이 있으면 기필코는 멸망하고 만다.

무가(武家)의 자손으로 강호(江湖)를 횡행하노라면 필연적으로 원수를 맺고, 그러다 보면 후손들까지도 영락없이 원한의 굴레에 빠져들기 쉽상이다. 그것은 끔찍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깊은 곳에서 은인자중, 유유자적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고금의 책들을 읽고, 무공을 익히고 연구하며……

 

× × ×

 

조각난 달이 하늘 한 자락에 걸려있다.

단혼애(斷魂崖),

깍아지른 절벽의 밑으로는 구름들이 떠다니고,

밤새들이 이따금씩 절벽 아래로 날아간다.

이 단혼애의 중간,

세인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을 이곳에는 한 개의 석동(石洞)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이 십일 째인데 그 아인 오지 않을 모양이오.]

[아마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이것만 전해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탄식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신비하기 짝이 없소. 이 근처에 사는 듯 한데 도무지 사는 곳을 알 수가 없소. 냉형! 우리가 너무 큰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뭘 말이오?]

[우리는 그 아이의 이름 외에는 알고 있는 것이 없질 않소. 무공만 해도 그렇소. 그는 우리가 가르치기 전부터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소.]

[그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한을 풀면 되는 것이고, 그 아이는 우리의 무공을 익히면 되는 것 아니요.]

그때 문득 그들의 귀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들은 그 한을 풀지 못할 것이다.]

동굴안,

돌로된 석탁에는 기괴한 모습의 두사람이 앉아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진정 기이했다.

왼쪽에 앉은 붉은 머리칼, 붉은 옷에 붉은 얼굴……온통 붉은 노인,

그의 눈동자마저 혈광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앉은 노인,

두 팔이 보이지 않는다.

헐렁이는 소매만 있을 뿐,

하지만 그 소매는 기이하게도 찻잔을 감아쥐고 있다.

안색이 백짓장보다 더욱 희다. 마치 얼음조각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한데,

그들의 앞으로 세사람의 노인이 나타났다.

신선같은 풍모의 노인들……

바로 황자준 등이었다.

황자준은 그 두사람을 보고 의외인듯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군가? 백년 전에 이름을 날렸던 남한객 단극린과 북한객 냉천삭아닌가?]

그랬다.

동굴 속의 두 사람은 황군성의 네 사부 중 두명인 단극린과 냉천삭이었다.

두 사람은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나타난 상대방이 뜻밖에도 단번에 자기들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단극린 등은 맹세코 한번도 황자준 등을 본 적이 없었다.

황자준도 그들을 본 적은 없었으나 강호행을 다녀온 손자를 통해 전해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극린의 혈포가 빧빧하게 부풀어올랐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단극린, 너는 감히 물을 자격이 없다. 노부의 아들만 해도 네 아비뻘은 될 것이다.]

황자준의 말에 단극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황자준 등은 이백칠십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수염등을 제외하면 여전히 좋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자걸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은 너무 주제넘은 짓을 했어. 듣기로는 너희들의 무공도 쓸만하다고 하더라만, 오늘 이곳에 뼈를 묻어야겠다.]

냉천삭이 한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노선배, 우리가 무슨 주제넘은 짓을 했단 말이오?]

그는 황자준 등이 자신들 보다 훨씬 연상인 것을 알고 노선배라고 부른 것이다.

황자웅이 말했다.

[죄라면 오직하나, 제자를 잘못 삼았다는 거지.]

단극린이 흠칫하며 물었다.

[우리 제자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단 말이오?]

황자준이 콧웃음을 쳤다.

[잘못은 너희가 했지 그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다.]

단극린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황자준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들은 그 아이를 감히 강호의 혈풍속으로 끌어들이려 했어.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던 점들이 너희 한천사방객을 보니 한꺼번에 풀려버렸어. 그 아인 너희들의 한을 푸는 도구따윈 되지않아.]

냉천삭이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선배들은 우리 제자와 어떻게 되는 사이요?]

황자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진작 그렇게 물었어야지. 우린 그녀석의 고조부들이지. 이게 바로 너희들이 죽어줘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

냉천삭이 차갑게 말했다.

[우리를 선배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으시오?]

[물론 너희들은 강하겠지. 하지만, 감히 우리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황자걸은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황자준을 비롯한 황자걸과 황자웅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병기를 들어라!]

황자준의 준엄한 말이 떨어졌다.

단극린과 냉천삭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갑자에 가까운 공력이다……)

그들은 강호에서 한번도 황자준 같은 고수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단극린과 냉천삭의 눈이 마주쳤다.

(우린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죽게되겠구려……)

싸우기 전에 이미 승부는 난 것 같았다.

제자의 고조부들이라는 세 노인,

그들은 너무도 강해보인다.

자신들이 백년전 무림을 떨쳐울린 한천사방객이란 것을 알고도 마치 어린애 대하는 듯하다.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천사방객이다.

백년전 천하에 적수가 없었던 고수들……

그들은 자신들의 최고 절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순,

단극린의 몸에서 붉은 구름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그의 몸은 완전히 붉은 구름속에 싸여버렸다.

황자준은 얼굴에 은은한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한천사방객이군……듣던것 보다 두배는 강하다.)

한편,

냉천삭의 몸에서도 얼음보다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팔없는 두 소매는 거대하고 굵은 봉(捧)마냥 팽팽하게 부풀어 있고,

두발은 땅에서 두치쯤 허공에 떠있었다.

그의 발은 적족(赤足)이었다.

냉천삭이 발산하는 한기가 황자준등에게까지 몰려왔다.

황자걸이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놀랍군, 놀라워, 그만큼 무공을 쌓자면 수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했겠지?]

말을 하는 중에도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하지만 냉천삭은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싸움이 결코 좋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붉은 안개에 휩싸인 단극린이 짧게 내뱉었다.

[먼저 공격하겠소.]

[얼마든지……]

황자준은 느긋하게 말하며 쌍장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냉천삭의 몸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부우웅!

그의 두소매가 마치 거대한 봉처럼 황자걸과 황자웅을 쳐갔다.

뼈마져 얼려버릴 듯한 한기에 동굴안은 새하얀 서리가 깔렸다.

그리고 그의 발은 수백개의 발그림자를 만들며 황자준을 공격했다.

황자준 등은 한기가 보통 것이 아님을 알고 놀랐다.

[빙백지기(氷白之氣)!]

황자걸이 소리쳤다.

빙백지기,

이것은 조금이라도 몸에 스치스며들게 되면 그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는 얼음조각이 되어버리는 무서운 무공이다.

일순간,

황자준의 쌍장이 동굴안을 가득 매울 만큼의 손그림자를 만들었다.

손그림자들은 마치 비누방울처럼 각각이 냉천삭과 단극린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단극린의 귀로 파고드는 빠른 전음이 있었다.

[물러나면서 왼쪽벽에 일장을 가하시오.]

바로 냉천삭의 음성이었다.

냉천삭의 발그림자와 황자준의 손 그림자가 충돌하려는 순간,

허공에서 냉천삭의 몸은 팽이처럼 돌았다.

그의 소매가 만들어낸 거대한 봉은 여지없이 동굴의 천정과 바닥, 벽을 파고들었다.

쿠쿠쿠궁!

그러자 동굴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자준의 손그림자는 여지없이 냉천삭의 발그림자와 부딪혔고,

냉천삭의 몸은 동굴의 안쪽으로 날아갔다.

냉천삭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순간,

꽝!

소리가 나면서 동굴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더욱 급속하게 무너져 내렸다.

단극린이 혈왕신공으로 동굴벽을 친 것이다.

그때,

황자걸이 큰소리로 내질렀다.

[감히 도망칠 수작을 하다니!]

허리에 걸려있던 장검이 백색광망을 뿜었다.

번쩍!

그러자,

놀랍게도 백색광망은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바위들을 가르면서 그대로 단극린과 냉천삭을 베어가는 것이 아닌가?

단극린이 경악하며 외쳤다.

[검강(劒罡)이다!]

그는 전력을 다해 혈왕신공을 끌어올렸다.

혈왕신공의 붉은 안개와 백색검강이 충돌을 일으켰다.

꽈과광!

그순간 동굴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뿌옇게 돌먼지가 나르는 가운데 황자준 등은 동굴밖으로 날아나왔다.

그리고 단혼애를 날아올라갔다.

단혼애에 우뚝 멈추어서서 황자걸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놈들의 무공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군요.]

[하지만 형님 검강에 격중당했으니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황자웅의 말에 황자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철인검을 사용해야했다. 그들은 중상은 입었어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비밀통로로 도망치고 있겠지.]

황자걸이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정말 대단한 자들입니다. 가공할 빙백지기……그리고 검강을 막아내는 신공……아마 그자의 내공이 저와 같았다면 당한 것은 저일 겁니다.]

황자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자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들은 한천사방객 중에서도 세번째와 네번째 인물, 첫째인 동한객 궁월과 둘째인 서한객 초사륭 역시 죽여야 한다. 군성이에게 쓸데 없이 한을 심어주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황자준의 말에 따라 그들은 단극린과 냉천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 × ×

 

황군성은 동굴앞에 다다라보고 의아해져 버리고 말았다.

응당 있어야 할 동굴이 완전히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어떤 거대한 힘에의해 동굴이 붕괴된 것이었다.

[사부들이 이곳을 떠났단 말인가? 그래도 동굴을 붕괴시킬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는 다시 단천애 위로 올라왔다.

칠척의 헌앙한 신체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달이 기울고 있음이다.

할 일을 잃어버린 황군성은 천천히 걸어서 소음곡을 향했다.

그가 사라진 단혼애에 문득 한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그의 아버지 황창설이었다.

그는 황군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이렇게 끝나야 하는 거다.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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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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