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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八 章

 

           술독 앞에서 낳지도 않은 아기로 협박하는 請託

 

 

 

유월(六月)……

때는 하늘에서는 찌는 듯한 태양이 천지를 가득채우고,

들판에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바람이 이따금 분다.

산하(山河)는 짙푸른 색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동선장(童仙莊),

 

북경성 외곽에 얼마전 부터 자리잡고 있는 한 채의 아담한 장원이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동선장은 북경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공되고 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고관대작의 자식들로 부터 빈민의 아이들 까지,

이곳에 오면 언제나 식사를 제공받고 단정한 옷을 입을 수 있다.

부모가 없는 고아들은 아예 그곳에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글을 가르치는 글 선생도 있고,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아이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일약,

동선장은 북경성의 명물로 자리 잡았고,

관민이 치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도둑도 동선장에는 들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동선장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다.

하나,

그런 동선장의 주이니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나이가 얼마나 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동선장을 창설하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철저한 신비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비를 애써 밝히려 하는 인물도 없었다.

이 삭막한 현실에 동선장 같은 인정의 샘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인물들이 위안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깔깔깔……!]

[핫하하……!]

[히히히……!]

동선장을 울리는 이 천진무구한 웃음소리,

이 웃음소리 하나만으로 얼마나 평화스러운 곳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십여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청년이 어우러져 뛰어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온묘롭게 부서져 내리는 넓다란 녹지(綠地)는 더위도 잊은 그들이 뱉어내는 환호성과 웃음소리에 뒤덮여 있었고……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한 화목(花木)에 비스듬이 기대어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소녀……

그들은 어딘지 부조화스러우 보이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가?

약관의 청년과 소녀……

그들의 모습은 기이했다.

용모는 기가 막히게 준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웬지 사이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지는 까닳은 무엇일까?

또한 그들의 머리카락을 보면 더욱 기이한 느낌을 전해받는다.

백발(白髮)……

오오……

그들의 머리카락은 눈처럼 흰 백발이 아닌가?

그것은 보통의 백발이 아니라 죽음의 향기를 진하게 뿌리는 백발인 것이다.

문득, 소녀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이런 무료한 생활은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허무적인 중얼거림……

[육십 년의 세월을 한과 저주의 일념으로 살아온 우리 한천이기 아닌가? 한데 무엇이지? 이 땅에 잔혹한 저주를 뿌려야 할 우리들이 그 자들의 농간에 놀아나 천지파멸의 뜻을 점차 잃어 가고 있으니……]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말도 안된다. 이건 완전히 계획적이다……그 자는 우리의 가공할 저주를 이런 식으로 스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저 아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한천이기의 잔인과 저주의 심성을 없애고 있으며 우리를 자신의 완전한 수족으로 부리려 하는 것이다……무서운 사람……]

한천이기……!

그렇다.

이들 백발청년과 소녀가 바로 마장탑의 칠십이기재들 중 두 명인 한천이기인 것이다.

이들이 마장탑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진 후 반 년 만에 북경에 나타난 것이다.

[원천기……저자는 철저하게 한으로 점철된 인간이 아닌 저주의 화신이 아닌가? 한데……불과 반 년만에 저렇듯 타락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다분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원천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단 일푼도 지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원천기……

그가 충격적이리만큼 변해 버린 것이다.

[원천기 만을 탓할 수 없다. 나 역시 칠십이기재의 한과 야망 망각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그녀의 회색 동공에 천진한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렇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우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다는 것은……죽음을 의미하는 것……더이상 이런 식의 삶을 지속할 수는 없다.]

돌연, 한천녀의 얼굴에 어떤 결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직 죽음이라는 말 외에는 할 줄 모르던 그녀의 얼굴에……

[때가 된 것이다. 등마제가 벌어지려고 하는 지금……예정대로 우리 한천이기는 정통마교주를 이끌고 무림에 우리의 복수와 한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결단(決斷)을 누구에겐가 전하고자 화원을 가로질러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백발이 허허롭게 날리우고……

문득,

아이들과 노닐고 있던 원천기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린다.

[때가 되었는가? 이 땅에 나의 저주를 뿌릴 때가……]

이 말은 너무 나직하여 그의 몸에 매달려 있는 어린아이들도 듣지 못한다.

[정통마교주……그는 이 원천기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런 식의 장난으로 이 원천기를 지옥에서 끌어내리려 했다면 어리석은 짓이지……]

원천기는 아이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웃었다.

[까르르……아저씨는 바보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혼자 웃는다.]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

원천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바보다.…그러나 세상에서 바보는 살아남아도 똑똑한 척 정의로운 척 하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어둡게 그의 몸에서 부서진다.

아이들이 목소리를 맞추어서 물었다.

[왜?]

[내 뜻 이거든……]

 

-----까르르

 

다시 터지는 귀여운 웃음들……

원천기……칠십이기재 중 가장 무서운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남을 철저하게 감추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칠십이기재 중 살아남을 수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잃어 버린 것처럼 행동하며……

은밀한 가운데 자신의 뜻을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

멀리서……

원천기를 주시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눈부시게 흰 백의(白衣)를 걸치고……

그 옷자락이 표표히 날리는 가운데 만상에 자욱이 내면의 신비로운 기운을 풍겨내고 있는 인물……

문사건을 단아하게 두른 그 용모는 탈속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명하도록 맑은 동공에 가득 머금고 있는 어두운 그늘……

그는 다름 아닌 소일초였다.

그는 한천이기의 가공할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소일초다.

까짓 놈들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리면 그만 인 것이다.

 

***

 

<정통마교주이시여……

칠십이기재의 이름으로 이제 당신에게 첫번째 임무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임무는 바로 등마제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첫번째 저주를 내리는 것입니다.

지난 반 년의 세월을 당신들의 뜻대로 따랐으니, 이제 우리 한천이기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주소아는 서탁에 놓인 한 장의 밀지를 읽은 후 조용히 시선을 황촉불에 두었다.

서실(書室)의 창 밖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황촉불만이 은은히 서실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주소아의 아름다운 얼굴은 타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때가 되었는가? 일초는 어떻게 하길 원할까?)

그녀는 밀지를 들어 황촉불에 태운다.

(등마제와 함께 시작되는 칠십이기재의 첫번째 안배라……)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하나 그녀의 마음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 반 년의 세월……

그녀가 이 동선장에서 보내며 한 일은,

소일초와의 어른스런 장난도 있지만,

환상처럼 사라진 백인장의 종적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그동안에 알아 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소아와 소일초가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백인장은 사라진지 이 년이 지난 때였다.

짐작이 가는 곳은 다 뒤졌다.

백인장의 파양호 고장(古莊)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파양호를 이 잡듯이 뒤졌건만 부주(浮舟)마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천이기의 협력을 얻어 그들은 북경에 동선장을 세웠다.

사라진 세력들을 찾기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무사들을 고용할 작정을 소일초가 했으나,

주소아가 고집을 부렸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 만들자고……

그녀의 의견인 즉,

백인장이 사라진 것은 스스로의 뜻에 따른 것 같으니 궂이 힘들게 찾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소일초를 못살게 굴며 떼를 썼다.

침상에서도 한잠도 자지 못하게 괴롭히고,

울고 불고 하였기에 마침내 소일초가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쌍한 아이들을 꼭 도와주어야겠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에 가까웠던 것이다.

 

황촉불은 그녀의 마음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문제는 등천마세와 정천보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이 신비롭다. 백인장과 삼성무림청, 그리고 청옥검궁이 사라지고 그 두 세력이 출현한 것이 어찌 우연일 리가 있겠는가?)

이때,

문이 열리면서 소일초가 들어왔다.

[그들이 움직였지?]

주소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한번 미친 척 하고 시키는 대로 해줘보지……]

[그래도 될까?]

[그러다 수틀리면!]

소일초가 자신의 목을 손으로 치는 흉내를 낸다.

[등마제에 참석하라고 했어.]

[우리한테 딱 맞는 역할인데 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착한 사람은 아니야.]

갑자기 주소아가 소일초에게 바싹 다가앉는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우리 술이나 마실까?]

[또 갑자기 왜 이럴까? 불안하게……전 번에 시달린 이후로 난 너한테 학을 뗐어.]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마시자. 응? 내가 가지고 올께, 잠깐만 기다려……]

소일초와 주소아는 침상 한가운데 술독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들의 몸이 작지 않아서 침상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술이 몇 순 배 돌고 나자 주소아가 침울한 표정으로 소일초에게 말했다.

[나……이젠 예쁜 아기를 낳겠다는 꿈은 포기해야 할까봐……]

[……?]

[네가 전에 이야기 했잖아, 고모가 말했다면서……]

[아……! 그거……]

[그래, 실은 내가 그 말을 들은 후에 불안해서 내공을 세 군데 분산시켜 놓았거든……]

[…………!]

[그러니까……내가 전력을 하려고하면 그걸 다시 단전으로 되돌려야 할 거란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너는 내가 아기를 못갖는 걸 택하겠니? 아니며 혼자서 등마제에 참석하는 걸 택하겠니?]

은근하게 물어오는 주소아의 말을 들으며 소일초의 안색이 홱 변했다.

[결국 그 소리였구나. 나 혼자 등마제에 가라고? 싫어. 절대 혼자는 안가.]

[이 바보야! 거기서 삼수 같은 고수를 만날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돼서 내가 아기를 못 낳게 되는 게 그렇게 좋아?]

소일초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꼭 그렇다고 도 할 수 없잖아……]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주소아는 강경하게 나왔다.

이제 소일초는 주소아 없이는 어디에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주소아가 옆에 없으면 도무지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다 싸우면 되잖아……같이 가자, 응?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되게 해줄께…… ]

[흥, 난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단 말이야. 어쩌면 한 몸 지키기도 바쁠 텐데.]

갑자기 소일초가 술잔을 바닥에 팽개쳤다.

[좋아, 그럼 나도 등마제에 가지 않겠어. 까짓 년놈, 뭐라 하면 죽여 버리겠어.]

[그러지마……우리도 등마제에 가볼 필요는 있어. 그곳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단 말이야. 꼭 그들의 말이 아니라도 나도 생각 중이었어.]

주소아가 달랬다.

[그리고……거기 가면 무림의 여자악인들도 많이 올 거야. 너 여자 좋아하잖니?]

[그래도 너만큼 예쁜 여자는 없을 거야.]

소일초의 시무룩하게 하는 말에 주소아가 픽 웃었다.

[알긴 아는구나.]

[난, 못가겠어……어떻게 너도 없이 혼자가?]

[어린애 같은 소리말구, 네가 돌아 올 때까지 나는 아예 지하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책만 볼께……]

[좋아, 그럼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아예 얼굴에 면사를 가리고 있어, 아무도 못보게……]

겨우, 소일초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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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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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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