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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십오년후(十五年後)> 강변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도시의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다. 때는 저녁 무렵이고

<-금릉(金陵)> 아주 번화한 거리. 폭이 20미터쯤 되는 넓은 길인데 좌우로 가게들이 즐비하고. 사람들도 북적인다

사람들 틈에 산적이나 땅꾼 분위기인 중년의 사내 둘이 걸어오면서 오가는 여자들을 힐끔 거린다. 쌍둥이라 얼굴은 똑같은데 차이점은 한 놈은 둥그스름한 윗부분을 천으로 감싼 지팡이를 들었고 다른 놈은 시커먼 쇠퉁소를 하나 들고 있다. 둘 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깔이 흰자위가 없이 새카맣다. 허리춤에는 각기 휘어진 칼 한 자루씩과 큼직한 호로병 하나, 몇 개의 주머니를 달고 있다. 야만인같이 흉악한 인상인 이자들의 이름은 망산쌍독. 독을 잘 쓰는 자들이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조연들로 이름은 구괴와 구적. 나중에 한번 더 출연할 예정인 자들

구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明)나라의 황도(皇都)였던 금릉에 오면 발에 차이는 게 미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세 걸음에 한번 이상씩 눈 돌아가게 만드는 년들이 눈에 띠니 말이야.] 지팡이를 든 놈이 눈이 벌개져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두놈을 힐끔거리고

구적; [정신 차려 임마!] 쇠퉁소로 구괴의 어깨를 툭 치며 웃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망산쌍독(邙山雙毒) 중 구적(具笛)>

구적;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촌구석에서 처음 대처(大處)에 나온 티가 너무 나잖아.] 옆쪽을 고개 짓 하고. 지나가던 여자들이 키득거리며 둘을 보고 있고

구괴; [쪽 좀 팔리면 어떠냐 적(笛)아? 대신 눈이 호강하는데...] 상관하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여자 구경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망산쌍독중 구괴(具拐)>

구적; [하여간 밝히긴...] 피식 웃고

구괴; [오늘 밤이 기대가 되는구만. 듣자하니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가 손님 대접 하나는 화끈하다고 하니...] 입맛 다시며

구적; [그렇긴 하다만...] 찡그리고

구적; [한왕의 초청에 응한 게 과연 잘한 짓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숨 쉬며 말하고

구괴; [왜?] 돌아보고

구괴; [뭔가 찜찜한 기분이라도 드는 거냐?] 두리번거리며 건성으로 묻고

구적; [무림사를 통틀어 봐도 황실과 엮였던 무림인 치고 끝이 좋았던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구적; [대우와 제안이 파격적이어서 한왕의 초청에 응하긴 했다만...] [반드시 뒷탈이 생길 것같은 생각이 든다.]

구적; [게다가 한왕은 형인 황태자 주고치(朱高熾)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 구괴; [걱정도 팔자다.] 다시 주변의 여자들 구경하며 피식 웃고

구괴; [적당히 챙길 거 챙기고 아니다 싶으면 튀면 되지 벌써부터 걱정을 사서하냐?]

구적; [나도 괴(拐), 너처럼 근심 없고 생각 없으면 좋겠다.] 한숨

구적; [하물며 우린 지금 악독하기로는 천하제일인 서(西) 늙은이에게 쫓기고 있는 중인데...] 말할 때. + [거기 서지 못해 이놈들아?]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내 사과 내놔라 이놈들아!] 이십여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노점상을 하던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 지팡이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달려오고. 그 앞에서 두명의 소년이 품에 여러 개의 사과를 끌어안은 채 희희덕 거리며 달려온다. 덩치가 어른만한 건장한 소년과 얍삽한 인상의 소년. <건곤일척 자료집 4페이지>에 철두와 정칠의 어린 시절. 이때 두놈의 나이는 17세. 하지만 철두는 이미 체격이 어른만하다. 반면 정칠은 평균보다 좀 작아서 중학생 정도의 체격이고

[비켜요!] [지나갑시다!] 히히덕거리며 사람들 헤집고 달려오는 철두와 정칠. 사람들 눈 흘기면서도 급히 피하고

구괴; [금릉 뒷골목의 악동들인 모양이로군.] 웃으며 보고. 철두와 정칠은 구괴와 구적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다.

구적; [한창 좋을 때지. 먹고 노는 것 외에는 근심 걱정도 없을 테니...] 역시 웃는데

철두; [야 빨리 와!] 정칠을 뒤돌아보면서 달려오고. 바로 앞에 구적이 있다.

철두; [어이쿠!] 퍽! 어깨로 구적과 부딪히며 비명 지르고, 물론 구적은 꿈쩍도 않는데

슥! 철두의 손이 아주 빠르게 구적의 품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정칠; [비... 비켜요!] 쾅! 정칠도 구괴와 부딪힌다. 역시 구괴도 꿈쩍도 앉고

[아이쿠!] [으헥!] 구적과 구괴와 부딪혀서 바닥에 나자빠지는 철두와 정칠. 안고 있던 사과는 바닥에 흩어지고. 주변 사람들 기겁하며 물러서고

[그 못된 놈들 좀 잡아주쇼! 오늘 제대로 매타작을 해야겠소!] 노점상 노인이 고래 고래 고함 지르며 사람들 사이에서 달려오고

철두; [튀... 튀자!] 재빨리 기어서 일어나려 하고 + 정칠; [히익!] 역시 엉금 엉금 기며 달아나려 하고. 하지만 그 직후

콱! 철두의 멱살을 한손으로 쥐어 쳐드는 구적. 구적과 철두는 키가 거의 비슷하지만 답싹 쳐들려진다

콰득! 정칠의 목을 움켜잡는 구괴

철두; [젠... 젠장! 이거 놓지 못해?] 구적에게 멱살이 잡혀 쳐들린 채 버둥 대고. + 정칠; [끄윽! 왜... 왜. 이래요?] 목이 잡혀 눈이 돌아가고

구적; [갈 때 가더라도 어르신들 물건은 돌려줘야하지 않겠냐?] 웃으면서 왼손으로 철두의 품속을 뒤지고. 사색이 되는 철두

다시 빼낸 구적의 손에는 돈주머니가 들려있다. 구괴도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낀 채 정칠의 품을 뒤지고 있고

구적; [어라! 내 전낭(錢囊;돈주머니)이 어째서 네놈 품에서 나오는 걸까?] 돈주머니 쳐들어 보이며 웃고.

구괴; [신기하네. 내 전낭도 이놈 품으로 옮겨갔구만.] 역시 정칠의 품에서 돈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웃고

[뭐야 저놈들?] [이제 보니 소매치기들이었잖아.] [허튼 짓 하다가 딱 걸렸구만.] 주변 사람들 상황 알아차리고 눈 흘기며 철두와 정칠을 보고. 그때

[잘... 잘 하셨소 어르신들!] 헐떡이며 현장에 도착하는 노인

노인; [그놈들은 이 근방에서 아주 악명 높은 말썽장이들이오.] 바닥에 흩어진 사과를 줍고

노인; [도둑질에 소매치기에...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놈들이니 눈물을 쏙 빼주시구려.] + [어이구 내 사과... 다 곯아터졌어.] 옷자락에 사과를 주어 담으며 철두들에게 눈을 흘기고

구적; [그건 걱정 마시오 노인장.] 웃고

구적; [이놈들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도둑질을 못하게 만들어놓을 테니...] 철두의 멱살을 잡은 채 옆의 골목 쪽으로 걸어간다. 사람들 길 비켜주고

구괴; [흐흐흐! 오랜만에 좋은 일을 하게 되었군.] 역시 웃으며 정칠의 목을 쥔 채 구적을 따라간다.

[쌤통이다.] [철두(鐵頭)하고 정칠(鄭七)이 놈, 시장통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며 말썽을 부리더니 임자 제대로 만났군.] [저놈들은 좀 혼이 나야 돼!] 망산쌍독에게 멱살과 목이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들어가는 철두와 정칠을 보며 사람들 고소해하고. 헌데

사람들 틈에 섞여서 울상 짓고 있는 소녀. 분이다. <마면기정> <건곤일척> <아랑힐월>에 모두 출연한 분이 캐릭터를 사용. 분이의 이때 나이는 철두와 정칠, 청풍보다 한 살 어린 15세, 즉 중학교 2-3학년 정도. 분위기도 여중생 분위기. 젖가슴도 약간 나와 있다.

분이; (큰... 큰일이야.)

<한눈에 봐도 저 작자들은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림인들이야.> 히죽거리며 철두와 정칠을 끌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는 망산쌍독을 배경으로 분이의 생각

분이; (서둘러야해!) 홱 돌아서고

분이; (자칫하다가는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죽거나 다치는 수가 있어.) 사람들 헤집고 달려가는 분이. 눈 흘기며 비켜주는 사람들

 

#13>

<-금릉 외곽 해하촌(蟹蝦村)> 달동네 분위기의 마을. 동쪽으로 금릉을 에워싼 높은 성벽이 보이고. 성벽 밖의 마을이다. 빈민들이 사는 곳이라 앞 씬의 금릉선 내부의 넓은 거리와 달리 길도 좁고 게 딱지 같은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좁은 골목에서는 낡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고.

빈민가의 중앙에 자리한 조금 넓은 길 좌우로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술집, 옷 가게, 식료품 점, 푸줏간, 대장간등등이 늘어선 시장통이다. 손님들이 가게 주인과 물건 값을 흥정하고. 제법 활기차고 왁자지껄하다.

시장통 한구석의 골동품 가게. 골목의 가게들 중 제법 큰 규모인데 각가지 골동품들이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다. 낡은 간판에는 <溫故堂>이라는 글이 고풍스러운 서체로 적혀있다. 간판 자체는 낡았다. 손님들이 골동품 구경하고 만지기도 하지만 응대하는 점원은 없다.

온갖 골동품과 잡동사니가 가득한 가게의 맨 안쪽. 청풍과 천불투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다. 탁자 위에는 다섯 개의 똑같은 모양의 사발이 한 줄로 엎어져 있고 천불투가 양손으로 사발을 만지는 중이다. 천불투는 이제 70대 후반, 아주 늙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그 앞 의자에 앉아있는 청풍의 나이는 열 여섯 살. 대충 입었지만 멋이 있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서려있다. 키도 천불투만하다. 너무 어리게 묘사하면 안됨

천불투; [투도(偸盜도둑질)의 기본은 눈이다.] 슥! 슥! 양손으로 천천히 사발들의 위치를 바꾸고 있다. 야바위꾼들의 야바위 놀이를 하는 중인데 사발이 세 개가 아니고 다섯 개라는 게 차이가 난다. 천불투 뒤로는 문이 하나 있다.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그 문 안쪽에는 작은 정원과 살림집이 있다

천불투; [눈이 좋아야 표적을 정확히 볼 수 있고 눈으로 보는 게 빨라야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윽! 슥! 사발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말하고

천불투; [비단 투도뿐만이 아니다.]

천불투; [남보다 눈이 좋고 보는 게 빠르면 싸움에서도 유리하다.]

천불투; [즉, 무공에서도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이 시력의 단련인 것이다.] 손을 떼고

천불투; [골라봐라.] 손으로 사발을 권하고

청풍; [이걸로 할게요.] 오른손으로 다섯 개의 사발 중 하나를 가리키고.

천불투; [잘 골랐다.] 딸칵! 사발을 쥐어 열어 보이고.

천불투; [그다지 빠르게 섞지 않았으니 어지간한 관찰력만 있어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젖혀지는 사발 안에는 작은 주사위가 하나 들어있고.

천불투;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겨뤄보자.] 다시 사발로 주사위를 덮고.

천불투; [할애비의 손을 눈으로 따라잡을 수 있으면 따라잡아봐라.] 샤샤샤샥! 엄청난 속도로 사발의 위치를 바꾸며 뒤섞는 천불투

천불투; (다른 건 몰라도 손 빠르기로는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노부다.) 샤샤샤샥!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사발들의 자리를 바꾸는 천불투. 손을 흐릿하게 묘사.

천불투; (청풍(淸風) 네 녀석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눈썰미가 좋은 건 알지만 내 손 기술을 따라잡지는 못...) + [!] 생각하다가 흠칫! 하고

청풍이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다.

천불투; (욘석이 대놓고 지루한 티를 내?) 팟! 눈 부라리며 손을 멈추고

천불투; [자! 이번에는 어느 사발에 주사위가 들어있는지 맞춰봐라.] 눈 흘기며 권하고

청풍; [이거요!] 오른손으로 대충 한 개의 사발을 가리키고

천불투; [틀렸다 욘석아!] 턱! 다른 사발을 잡고. 청풍도 동시에 탁자에 오른손을 얹어놓고. 동시에

툭! 발로 탁자의 다리를 건드리는 청풍

사발을 조금 젖히던 천불투의 귀가 쫑긋! 해지고

눈이 살짝 옆으로 움직여서 청풍의 발이 건드린 탁자 다리 쪽으로 움직이는 천불투

약간 웃는 청풍의 입 꼬리

천불투; [주사위는 이 사발에 들어있...] + [엇!] 사발을 젖히며 집어 들다가 눈 치뜨고

쿵! 사발 안에 아무것도 없다

천불투; [이럴 리가 없는데...] 어리둥절할 때

청풍; [이번에도 제가 이겼네요.] 슥! 말하며 자기가 가리킨 사발을 한 손으로 덮어서 집어든다

스륵! 사발을 집어 드는 동작에 따라 청풍의 소매 속에서 작은 주사위가 굴러 내려서

딸칵! 완전히 젖혀지는 사발 아래쪽에 떨어지는 주사위

청풍; [어때요?] 의기양양하게 사발을 완전히 들고

쿵! 사발이 들려진 곳에는 주사위가 놓여있고

천불투; [허어!] 놀라 눈 치뜨고

청풍; [제가 주사위 들어있는 사발을 제대로 골랐지요?] 왼손으로 주사위를 집어들고

천불투; [분명 이 사발에 들어있었는데...] 사발을 든 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갸웃하고.

청풍; [사발이 다섯 개나 되니 자리를 바꾸는 도중에 착각하셨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딸그랑! 주사위를 오른손에 든 사발에 넣으며 웃고

천불투; [그런가?] 갸웃하고. 그때

[청풍오빠!] 외치는 소리에 돌아보는 청풍과 천불투

분이; [큰일... 큰일 났어 청풍오빠!] 타탁!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분이. 시장통 사람들이 뭔 일인가 하며 들여다 보고 있고

청풍; [분(芬)이야!] 사발 내려놓으며 돌아보고

천풍;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냐?] 자신에게 달려드는 분이를 보며 묻고

분이; [가면서... 가면서 얘기할게! 빨리 나하고 같이 가!] 청풍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헐떡이고. 그러다가

분이;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뒤늦게 천불투에게 인사하고.

천불투; [참 빨리도 아는 척 한다.] 웃고

천불투; [네 녀석 눈에는 청풍이만 보이지?] 눈 흘기고

분이;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얼굴 발그레

분이; [급한 일이 생겼어요. 청풍오빠 좀 빌려갈게요.] 청풍을 끌고 입구로 가며 천불투에게 말하고

천불투; [오냐! 잘 쓰고 돌려주려무나.] 웃고

청풍; [내가 물건이냐? 빌려가게?] 웃으며 분이에게 끌려 가게 입구쪽으로 가고.

청풍; [그런데 큰일 났다는 게 무슨 소리냐?] 분이와 함께 입구로 가면서

분이;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험상궂은 사람들에게 끌려갔어.] 울상

청풍; [그래?] 눈 번뜩! 이고

가게 안에서 사발을 정리하던 천불투도 힐끔 돌아보고

분이; [구하러 가는 게 늦으면 철두오빠와 정칠 오빠가 죽을 지도 몰라.] 울먹이며 발 동동 구르고

청풍; [다녀오겠습니다.] 입구에 멈춰서며 천불투에게 말하면서 골동품 사이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하나 집어들고

천불투; [오냐!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겠다만 조심하거라.] 대답하며 사발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청풍; [어머니에게는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온다고 전해주세요.] 주머니를 들고 앞장 서서 달려가며 말하고. 분이가 울먹이며 뒤 따라 달려가고. 시장통 사람들이 뭔 일인가 하며 보고

천불투; [골목대장 노릇도 쉽지가 않구먼. 똘마니들의 말썽이 끊이질 않으니...] 고개 조금 젓고. 그러다가

천불투; [그나저나 노부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건가? 손을 쓰면서 실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찡그리고. 그러다가

멈칫! 하는 천불투

청풍이 발로 탁자 다리를 슬쩍 건드리고. 자신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옆으로 돌아갔던 장면이 머리에 떠오르는 천불투

천불투; [허허허! 그렇게 된 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고

천불투; [내가 주사위가 든 사발을 들기를 기다렸다가 탁자의 다리를 건드렸구먼.]

<그러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잠깐 흔들렸고 그 짧은 순간에 사발 안에서 주사위를 빼냈겠지.> 천불투가 약간 위로 젖힌 사발 속으로 청풍의 손이 아주 빠르게 들어왔다 나가는 장면을 배경으로 천불투의 생각.

천불투; [청풍이 녀석, 눈썰미 뿐 아니라 손을 쓰는 재주도 할애비를 뛰어넘었구먼. 내 눈을 속이고 주사위를 빼낼 정도가 되었으니...] 웃는 천불투.

천불투; (이래서 핏줄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무얼 배워도 그 방면에서는 최고가 되어버리는 걸 보면...) 생각할 때

<아버님!> 덜컹! 누군가 안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온다. 뒤 돌아보는 천불투

온유향; <선술집 과부의 딸 분이가 들렸었던 같던데... 또 청풍이를 데리고 나갔는가요?> 안채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온유향. 눈을 감은 채 쟁반을 들고 나온다. 쟁반에는 찻잔이 얹혀져 있고. 옷차림이 수수하다. 온유향은 말을 못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을 감고도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말은 전음으로 하고. 십오년전과 모습이 거의 변화가 없다. 열린 문을 통해 우물이 있는 작은 마당과 마당 건너편에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로 들어찬 서재가 보인다.

천불투; [어서 오너라 아가야.] 열린 문을 등지고 다가오는 온유향을 돌아보면서 일어나고

천불투; [청풍이는 철두와 정칠이 놈이 부린 말썽을 해결하러 갔다.] 청풍이 앉았던 자리로 옮겨 앉고

온유향; <푸줏간 집 아들 철두, 여자 장사하는 작자의 사생아 정칠...> <친구를 사귀어도 어떻게 그런 놈들만 사귀는 건지 원...> 한숨 쉬며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천불투; [미안하다.] [애비가 터를 잡고 살아온 동네가 빈민가다 보니 청풍이 또래는 하나같이 가난하고 못 배운 놈들뿐이구나.] 한숨

온유향; <죄송해요. 아버님을 언짢게 해드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의자에 앉으며 고개 숙이고

천불투; [괜잖다. 마음 상해서 한 소리는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고개 저으며 찻잔을 집어들고.

온유향; <예...> 한숨

천불투; [그나저나 오늘은 눈 상태가 좀 어떠냐?] 차를 마시면서 온유향의 얼굴 살피고

온유향;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한숨

온유향; <아버님이 수시로 눈에 좋은 약을 구해오시는 데도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는군요.> <애만 쓰시게 해서 면목이 없어요.>

천불투;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눈 자체에 손상이 생겨서 안 보이는 건 아니니 언제고 시력이 돌아올 수도 있을 게다.]

온유향; <그랬으면 좋겠지만...> 한숨 쉬며 고개 떨구고

천불투; (가엾은 것...) 그런 온유향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 쉬고

 

<십오년전 그때, 유향이는 혀를 물고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 이후로 눈이 안보이게 되었다.> 혀를 물어 잘라서 입으로 피를 흘리며 기절한 온유향을 안고 사당 입구로 나오던 자신의 모습 떠올리고

 

천불투; (혀가 잘렸어도 대화는 전음입밀(傳音入密;내공으로 하는 말)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이 안보이는 건 대체할 방법이 없는 치명적인 장애인데...) 한숨

천불투; (유향이의 눈이 안보이게 된 데는 두 가지가 가능성이 있다.) 온유향을 보며 생각

천불투; (혀가 잘리는 충격에 잠깐 숨이 멎으면서 뇌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았었고...) (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을 수도 있다.)

천불투; (다른 하나는 유향이가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시력을 포기했을 가능성이다) 한숨

천불투; (어느 쪽이든 유향이의 눈은 간단히 치료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모습 배경으로 천불투의 생각 나레이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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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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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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