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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짙은 안개 속에 떠있는 원수함. 너무 거대하여 마치 항공모함 같다. 돛은 펼치지 않았다

갑판에는 여전히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들이 석상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사방을 감시하고 있고. 배의 뒤쪽이 약간 높다.

긴 복도. 등불만 걸려있고 사람은 안보이는데

 

필마행장석(匹馬行將夕) - 필마로 가는 길 저물어 가건만

정도거전난(征途去轉難) - 길은 갈수록 험하기만 하구나

 

어디선가 누군가 호탕하게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고

어느 방에서 권일해가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모습

 

부지변지별(不知邊地別) - 변방이라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기아객의단(祇訝客衣單) - 다만 홑옷을 입은 것이 우습도다

계냉천성고(溪冷川聲苦) - 흐르는 시냇물은 차갑기만 한데

산공목엽건(山空木葉乾) - 나뭇잎 떨어진 산은 텅 비어있구나

막언관색극(莫言關塞極) - 관샛길 다 왔다고 말을 말아라

우설상만만(雨雪尙漫漫) - 눈 속에 묻힌 길 아직 까마득하도다

-고적(高適)의 사청이군입거용(使淸夷君入居庸)

 

손가락으로 허리에 찬 긴 칼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권일해. 탁자 위에는 빈 술병들이 뒹굴고 있고. 탁자 옆에는 권일해의 제자 한검호가 안절부절 못하며 시립해 있다.

노래를 마치고 다시 술병을 들어 병나발을 부는 권일해

한검호; [사... 사부님! 밤이 이미 늦었습니다.] 바깥의 눈치를 보고

한검호; [그만 취침하셔야 내일 아침 회의에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권일해; [다만 홑옷을 입은 것이 우습고 눈 속에 묻힌 길은 까마득하기만 하구나.] 신경쓰니 않고 다시 노랫 귀절을 중얼거리는 권일해

한검호; [다른 세가의 가주들이 사부님을 곱지 않게 보십니다.] [지금 이러시면 내일은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애원

권일해; [으하하하하하]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선실이 터져나갈 듯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고. 한검호가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한다.

권일해; [밖을 막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엿듣는 도적은 안쪽의 벽마다 다 붙어있는 것을! 으하하하하하!]

한검호; [사부님!] 애원하고

권일해 웃음을 뚝 그치더니

권일해; [주방에 가서 술이나 더 가져오너라. 오늘은 취해서 세상을 잊어버리고 싶다.]

한검호; [이미 술이 과하셨는데...!]

권일해; [어서!] 다시 병나발을 불고

한검호; [예...!] 거역하지 못하고 한숨

문쪽으로 가는 한검호

권일해; [황보 그놈은 겁쟁이야! 복성세가에서 인물이라면 사마 밖에 없지.] [그렇고 말고...!] 문을 여는 한검호 뒤쪽에서 술 마시며 혼자 말 하는 권일해

한검호; (사부님!) 한숨 쉬며 복도로 나선다. 선실 밖의 복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고

한검호; (여기는 전쟁터다! 가장 살벌하고 흉험한 전쟁터!) 문을 닫고

한검호; (부드러운 말속에 담겨진 촌철살인(寸鐵殺人)들...) (스치는 눈길 하나에도 번갯불이 번득이고 탁자를 건드리는 작은 소리도 벽력이 될 수 있다.) 아홉 가주들이 원수인 서문숙 앞에 앉아서 치열하게 설전을 벌이던 장면을 떠올린다

<찻잔을 한 치 밀어놓고 한 치 당기는 것으로 기세가 달라졌었다. 가벼운 침묵 속에서도 피가 흘렀고 내장이 불탔었다.> 아홉 가주들이 눈이 백열된 채 서로를 말로 공박하는 장면

한검호; (십 년 전 대사형이 사부님을 수행했다 돌아온 후, 두 달 동안이나 피를 토하며 운신을 하지 못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숨 쉬며 복도를 걸어가고

한검호; (십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모이는 제가회의(諸家會議)는 지켜보는 사람조차 내상을 입힐 정도로 흉험하다.)

한검호; (하물며 직접 회의에 참석하여 다른 가주들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신 사부는 과연 어떤 상태일지 짐작할 수도 없구나!)

한검호;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는 격전.... 그저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한검호;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원수함을 빠져나가 세가로 돌아고 싶을 뿐이다.) 삼거리인 복도 끝으로 가고. 헌데

[!] 갑자기 오싹 소름이 돋는 한검호

한검호; (뭐... 뭐지? 이 오싹한 한기는?) 몸을 움츠리며 멈춰선다. 직후

쿵! 막다른 곳인 복도에 거대한 호랑이 앞 부분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어마어마하게 커서 마치 집채만한 호랑이의 형상. 그림자가 천장에까지 이른다

한검호; (호... 호랑이?) 경악하며 급히 허리에 찬 칼에 손을 대고

한검호; (원수함 속에 어떻게 맹수가 돌아다닌단 말인가?) 뒷걸음질 치는데

슥! 모퉁이를 빠져나오는 호랑이의 앞발. 헌데

[!] 그 직후 눈 부릅 한검호

슥!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건 큼직한 고양이다. 대충 진돗개만한, 고양이 치고는 상당히 큰 고양이인데 온몸에 호랑이 같은 얼룩무늬가 새겨져 있다. 호랑이를 축소시켜놓은 듯한 모습의 고양이다

한검호; [뭐야? 고양이였잖아?] 안도하며 칼에서 손을 떼고

한검호; [휴우! 십년감수했군!] 이마의 땀을 닦고

소리없이 다가오는 고양이

한검호; [깜짝 놀랐잖냐 야옹아!] 한 무릎 꿇고

한검호; [소리 좀 내고 다녀라. 불빛에 비친 그림자 때문에 호랑이로 착각했다!] 쓰다듬으려 하지만

슥! 한검호의 손을 자연스럽게 피해서 지나치는 고양이.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는다. 머쓱해지는 한검호

한검호; [거 참 붙임성 없는 녀석이로구만!] 쓴웃음 지으며 일어서고

한검호; (서문원수께서 기르시는 고양이인가?) 생각하며 다시 걸음 옮기려 하고

[!] 오싹! 직후 온몸에 소름이 돋는 한검호. 등 뒤로 거대한 야수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홱 돌아보는 한검호

돌아보며 걸어가고 있는 고양이

비틀 물러서면서 자기도 모르게 칼에 다시 손을 가져가는 한검호. 하지만

다시 앞을 보며 소리없이 걸어가는 고양이

비틀하며 벽에 기대는 한검호.

그 사이에 맞은편의 골목으로 사라지는 고양이

한검호; (뭐... 뭐지 저 고양이는?)

한검호; (사나운 호랑이가 등 뒤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71>

강물 위에 깔린 짙은 안개.

찰박! 찰박! 그 속을 걸어오는 청풍. 한쪽 어깨에는 술통을 짊어졌고

술통 속에는 권완이 잠들어 있다.

청풍; [젠장! 길을 잃었잖아!] 물 위를 평지처럼 걸으며 궁시렁. 비온 후 아스팔트 위를 걷듯이 청풍의 발이 지나가는 곳에는 발자욱이 생기고 물살이 튄다.

청풍; [안개가 너무 짙어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 [이래서는 배로 돌아가는 건 고사하고 강변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겠어!] 청풍의 주위로는 안개가 물살처럼 갈라진다.

징! 징! 손가락에 낀 반지들 중 벽수환이 빛을 발하고

청풍; (벽수환이 물기를 밀어내주는 덕분에 안개도 접근을 못하기는 하는데...!) 자기 주위로 가는 실처럼 흘러가는 물 기운들을 보고

청풍; (방향을 바꾸다가는 밤새 한 곳만 뺑뺑 돌 수도 있다.) (지금은 일직선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고

 

#72>

다시 원수함.

부도신궁; [원수님께 아룁니다.] [예상했던 대로 권씨세가는 힘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갑옷을 입은 부도신궁 양홍경이 한쪽 무릎을 꿇고 진짜 장군처럼 예를 갖추며 보고한다. 투구는 벗어서 옆구리에 끼었고. 한 팔을 가슴에 댄 자세.

이곳은 서문숙의 집무실. 책장과 책이 많아서 서재같은 분위기. 서문숙은 앉은뱅이 책상 앞에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펼쳐진 빈 공책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차주전자와 찻잔도 있고. 서문숙 뒤쪽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있고

부도신궁; [권가주와 이야기를 했던 다른 가주들도 모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개를 들고 팔은 내린다

서문숙; [숨기고 있는 힘이라...!] 붓을 멈추고 천장을 본다

서문숙; [권씨세가에 그만한 여력이 있었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부도신궁; [황금전장에서 거금을 빌려 썼다는 보고입니다만....] 서문숙의 안색을 살피며

서문숙; [황금이 만들 수 있는 힘은 한계가 있다. 힘이 만들 수 있는 황금도 한계가 있고....!] 붓을 들지 않은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서문숙; [헌데... 권일해의 무공은 확실히 발전했더군! 이제는 노부와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을 정도야.]

부도신궁; [그가 비록 강해졌다 해도 아직 원수님과 견줄 정도는 아닙니다.]

서문숙; [이십 년 전만 해도 권일해는 우직하고 힘만 센 젊은이었다,]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무공이 크게 발전할만한 인재는 못 됐어.] 다시 붓을 먹물에 묻히고

서문숙; [당시의 능력에서 이 할 또는 삼 할이 발전의 한계라고 생각했거늘....] [십 년 전에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더군. 괄목할 만했지.] 빈 책에 글을 또 쓰기 시작한다

서문숙; [노부는 권일해가 뼈를 깎는 노력을 했구나 싶었지만 그게 다였다.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였단 말이네.]

묵묵히 듣는 부도신궁

서문숙;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달라졌어. 다듬어졌고 자유자재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더구먼.]

서문숙; [바다처럼 넓어졌지. 잔잔하지만 그 속에 강대한 힘을 숨기고 있어.]

말없이 듣고 있는 부도신궁

서문숙; [권씨세가.... 권일해...!] 붓으로 몇 자를 더 쓰더니

서문숙; [닻을 올리게! 이동해야 할 시간이다.] 붓을 놓고

급히 고개 숙이는 부도신궁.

이어 일어나서 한쪽으로 간다. 그곳에 나팔같이 생긴 전음통이 있다. 배에서 음성 신호를 다른 곳으로 전하는 전음통.

전음통의 뚜껑을 열어젖히고 소매에서 뿔로 된 한 뼘 가량의 호각을 꺼내는 부도신궁

삐이! 호각을 물고 전음통에다 세차게 부는 부도신궁

 

뿌우! 부도신궁이 분 호각 소리가 배 안에 퍼져나간다.

배의 기관실에서 긴장하는 승무원들.

갑판의 무사들도 눈 빛내고

기관실에서 이런 저런 기관장치들을 가동하는 승무원들

끄릭! 끄릭!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리기 시작한다.

끽! 끽! 옆으로 누워있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무사들.

그그긍!원수함 선수 좌우에 내려져있던 거대한 쇠사슬이 기관에 의해 끌어올려지고.

촤아! 물속에서 끌어올려지는 집채만한 무쇠 닻.

철컹! 철컹! 이어 원수함의 아래쪽에서 수많은 창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긴 노가 빠져나온다. 한 쪽에 백여개. 그 때문에 마치 지네발처럼 보이고

배안에 나란히 앉아서 노를 젓는 무사들. 석가래같은 노 하나를 다섯명이 경사진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함께 젓는다.

촤아! 촥! 거대한 노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거대한 배는 안개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서문숙의 집무실

서문숙; [괄목상대...] [십 년 후에는 권일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짐작하기 어렵군.]

서문숙; [그의 소원대로 권씨세가가 천하제일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글을 쓰며 혼잣말로 중얼

부도신궁; [하오나... 권가주는 제왕의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전음통 옆에 두 손을 앞으로 모르고 시립한 채

서문숙; [잘 되었지 않은가?] 웃고

서문숙; [그런 그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우뚝 선다면 다른 자들이 선뜻 움직이지 못할 게야. 십대세가의 저력을 달리 보게 될 테니까.]

부도신궁; [다른 자들이라 하오시면......] 눈 번쩍

서문숙; [물론 사왕(四王)들이지.]

부도신궁; <사왕!> 긴장하여 얼굴이 굳어지고

서문숙; [사왕의 야심은 너무 커!] [그들을 자제시키기 위해서라도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어!] 책을 덮는다

帝王世紀라는 큰 글이 보이고 그 아래로 第二十二代 元帥 西門叔 書라는 작은 글

서문숙; [권일해가 대단해진 이유가 있을 게야. 그 이유를 찾아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서문숙; [그리고... 권일해가 모르게 도와주도록 해.] 침대로 비틀 비틀 걸어간다. 전형적인 늙은이다

서문숙; [힘도 능력도 없는 것들이 딴지를 거는 꼴은 보기가 싫으니....] 침대에 눕는다.

부도신궁;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원수님!] 포권하고

서문숙; [딸이 아무리 재녀라 해도 아비를 대단하게 만들지는 못하지. 대단하게 보일 수는 있어도...!] 혼자 말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덮는다. 눈을 감고

고개 숙여 보이는 부도신궁

문 쪽으로 돌아서는 부도신궁

부도신궁; (원수께서도 많이 늙으셨다!) 소리없이 한숨 쉬며 문을 열고 나간다. 문 밖에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부도신궁; (어느덧 다음 대 원수를 생각하실 때가 된 것인가?) 문을 닫는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무사들

부도신궁; [바다로 간다! 전 승무원에게 알려라!]

[존명!] 대답하는 무사들

[바다로 간다!] [반복한다! 바다로 간다!] 전음통을 열고 외치는 무사 한 명.

<바다로 간다! 바다로 간다!> 멀리서 복창하는 소리가 서문숙에게도 들리고. 어둑한 방안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서문숙

서문숙; (거룩하신 제왕의 미천한 종 서문숙...) (영원히 눈을 감기 전에 제왕의 존안을 뵈올 수 있을 런지...!) 한숨 쉬는 서문숙의 눈 가로 눈물이 흐른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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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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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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