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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의 비밀

 

 

 

조백하(潮白河)는 북경의 동북방을 휘감고 흐르는 상당히 넓은 강이다.

조백하 북안(北岸)에는 무려 수천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그 폐허는 오십이 년 전까지만 해도 원나라의 황궁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던 장원의 흔적이다.

 

-천독친왕부(千毒親王府)!

 

폐허가 된 장원의 이름이다.

이 장원의 주인은 천독친왕(千毒親王) 갈태독(葛太毒)이란 인물이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말기 최고의 권세가였던 그는 원래 무림인이었다.

일개 낙척한 서생이었던 갈태독은 강남을 여행하던 도중 우연히 한 권의 독경(毒經)을 얻어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이 되었다.

사실 갈태독의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독을 자유자재로 쓰고 치명적인 독공(毒功)을 구사하는 갈태독과 싸울 경우 세상 어떤 고수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갈태독의 이같은 능력은 원나라 황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 황실은 고질적인 내분과 부패, 군벌들의 득세등으로 인해 중원에 대한 통제 능력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에 편승하여 백련교(白蓮敎), 즉 홍건적(紅巾賊)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 몽고족에 의한 중원의 지배를 종식으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위기상황에서도 몽고족 군벌들은 황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또 황제 직속의 군대는 그 질이 형편없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원나라 황실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갈태독을 회유하여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하면서...

탐욕스러운 성격이었던 갈태독은 한족(漢族)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몽고족의 정권인 원나라 황실의 앞잡이가 되어 가공할 혈겁을 일으켰다.

원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던 숱한 한족 출신의 반군들과 이에 동조한 무림의 명숙들이 갈태독이 쓰는 치명적인 독과 끔찍한 독공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갈태독의 활약에 만족한 원나라 황실은 일개 무부(武夫)였던 그에게 천독친왕(千毒親王)이라는 왕작(王爵)을 내렸으며 약속했던 것 이상의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갈태독은 원 황실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인 반군들과 무림인들의 재산까지 가로채 주머니를 채웠다.

그 결과 갈태독은 오래지 않아 천하제일의 거부(巨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재물을 모은 갈태독은 이곳 조백하 북쪽 강변 위에 자신만의 성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천독친왕부다.

그러나 영원할 것같았던 갈태독의 좋은 시절은 너무도 빨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강남에서 몸을 일으킨 풍운아 주원장(朱元璋)이 파죽지세로 중원을 장악한 후 원 제국의 심장부인 북경으로 육박해온 것이다.

갈태독은 원나라 황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주원장의 군세를 저지하려고 했다.

원 황실이 무너지면 갈태독 자신의 부귀영화도 끝이 나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으로 쇄도해온 주원장 군세의 수장은 명장 서달(徐達)이었다.

주원장의 고향 친구이기도 한 서달만 죽이면 주원장의 군세도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에 갈태독은 단기필마로 서달의 군막(軍幕)으로 잠입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서달은 중원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고 전략가다.

그에 비견되는 인물이라면 백기(白起), 한신(韓信)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달의 일신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다.

신변에 접근할 수만 있으면 갈태독의 능력으로 서달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헌데 갈태독은 서달의 군막에 돌입한 직후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서달 옆에는 한명의 젊은 검객이 있었다.

약관을 갓 넘긴 그 젊은 검객에게는 갈태독의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젊은 검객의 몸을 뒤덮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의 장막은 갈태독이 구사한 지독한 독과 끔찍한 독공을 너무도 간단히 분쇄해버렸던 것이다.

반면 젊은 검객이 휘두른 검에서 내뻗힌 삼엄한 검기는 여지없이 갈태독의 몸을 갈라버렸다.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은 필사적으로 서달의 군영을 탈출했다.

젊은 검객을 제외한 그 누구도 갈태독이 뿌리는 독을 견디지 못하는 덕분에 갈태독은 사지를 탈출할 수 있었다.

중상을 입은 갈태독은 자신의 거처인 천독친왕부로 숨어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북경을 함락시킨 주원장의 군세가 천독친왕부에도 들이닥쳤다.

그러나 주원장의 막강한 군세도 천독친왕부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갈태독이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막대한 양의 극독을 천독친왕부 일대에 뿌려버린 때문이다.

갈태독이 뿌린 지독한 독은 주원장의 군세를 막아낸 대신 천독친왕부에 거주하던 그의 수하와 일족, 측근들까지 남김없이 몰살시켜버렸다.

또한 천독친왕부의 어디론가 숨어들어간 갈태독 역시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후 오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독친왕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귀역(鬼域)이 되었다.

처음에는 갈태독이 숨겨둔 막대한 재물을 노리고 수많은 인간들이 천독친왕부로 들어가 수색을 하였다.

하지만 갈태독이 뿌려놓은 지독한 극독으로 인해 천독친왕부에 들어갔던 자는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했다.

자연히 천독친왕부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결코 살아서 돌아 나오지 못하는 사지(死地)로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인적이 완전하게 끊겨버렸다.

 

***

 

(여긴 천독친왕 갈태독의 저주가 서려있다는 귀역 천독친왕부인데...)

요문천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휘익!

그는 지금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승상부를 빠져나온 철접은 촌각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천독친왕부로 달려왔다.

철접의 왼팔에 허리가 안긴 채 허공을 날면서 요문천은 수시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철접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하얘지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하얘서 금방 내린 눈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 되어 있다.

홍옥같이 붉던 입술도 탈색이 되어 옅은 청색을 띠고 있다.

그것은 다량의 피를 흘린 것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철접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창백해져가는 안색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밝고 선명해진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익히는 술법 중에 생명을 태워서 힘을 내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요문천은 곁눈질로 철접의 안색을 살피며 침을 삼켰다.

여자는 한 끼를 굶으면 배로 예뻐지고 병이 깊을수록 미녀가 되어간다는 말이 있다.

생기가 소멸되며 창백해지는 철접의 얼굴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헌데 이 여자는 왜 이 죽음의 귀역으로 달려온 것일까?)

요문천은 주체할 수 없게 철접에게 끌려가는 마음을 다 잡으려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으 스으...

천독친왕부는 전체가 검푸른 안개같은 것에 덮여있다.

그것은 갈태독이 주원장 군세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뿌려놓은 지독한 독들과 그 독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썩으며 만들어낸 독장(毒瘴)이다.

독장이 처음 천독친왕부를 뒤덮었을 무렵에는 한 모금만 마셔도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십이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독장은 많이 옅어지고 독성도 약해졌다.

지금은 지나치게 오랜 시간만 아니라면 천독친왕부 내에 머물러도 죽지는 않는다.

그래도 숱한 사람들이 독장을 마시고 죽어간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천독친왕부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서 기분이 안좋아진다.)

요문천은 철접이 눈치 채지 못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철접의 팔에 안겨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마신 독장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요문천이 억지로 구역질을 참으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휘익!

마침내 철접이 질주를 멈추며 바닥에 내려섰다.

콰당탕! 퍼억!

그러나 바닥에 발을 댄 직후 철접은 무너지듯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요문천도 바닥에 팽개쳐졌다.

어구구...”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요문천은 죽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런 그의 눈에 철접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기력을 모두 소모했구나.)

요문천은 철접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고 서둘러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철접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쉬지 않고 삼십여 리를 달려왔다.

그 바람에 몸속의 모든 기운을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괜잖으십니까?”

요문천은 걱정스럽게 말하며 철접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다.

“...”

하지만 철접은 말없이 요문천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일어섰다.

얼굴은 백짓장같이 하얗고 일어선 두 다리를 금방이라도 다시 무너질 듯이 후들거리고 있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이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철접은 요문천과 마주 서며 오른손을 품속에 넣었다.

요문천의 키는 또래들 보다 작은 편이다.

반면 철접은 육척에서 두 치 남짓만 빠지는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다.

그 때문에 마주 선 철접은 요문천을 내려다보게 된다.

이걸 먹고... 힘들겠지만 너 혼자 힘으로 승상부에 돌아가라.”

철접은 품속에 넣었던 오른손을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기름종이로 싼 환약이 하나 들려져 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환약이다.

이건 혹시...”

요문천은 두 손으로 환약을 받으며 눈을 치떴다.

내가 당주로 있는 이가류의 비전 해독약이다. 그걸 복용하면 천독친왕부를 덮고 있는 이 독장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돌아섰다.

(역시 독장의 해독약이었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기름종이를 벗기고 환약을 입에 넣었다.

동영의 인자들은 독을 쓰는 재주도 탁월하다.

도검을 쓰는 것보다 독을 써서 표적을 죽이는 편이 위험부담은 낮고 성공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독을 잘 쓴다는 것은 해독약도 잘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문천은 환약을 씹어 삼키자마자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맑아지자 비로소 주변 상황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온 곳은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 자리한 정원이었다.

무너지고 불탄 건물 잔해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상당히 넓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제멋대로 자란 정원수들과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다.

요문천이 환약을 먹고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철접은 무게가 없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가는 앞쪽에는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다.

길쭉한 석재들을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우물인데 한쪽 변이 일장 가까이나 되는 상당히 큰 규모의 우물이다.

아마도 천독친왕부가 번성했을 당시에 식수를 해결한 우물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물에는 왜...)

요문천이 의아해할 때 철접은 비틀거리며 우물가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발을 들어 우물의 턱으로 올라섰다.

(설마...)

요문천이 섬뜩한 느낌에 눈을 치뜰 때였다.

스윽!

우물의 턱으로 올라선 철접의 몸이 우물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위험합니다.”

요문천은 기겁하며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철접은 우물 안쪽으로 사라진 후였다.

(투신을 할 줄이야!)

요문천은 사색이 되어 우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철접이 우물 안쪽으로 떨어졌음에도 물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른 우물인가?)

요문천은 덜덜 떨며 우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비록 반달이 떠있다고는 해도 한밤중인데다가 우물이 상당히 깊어서 아래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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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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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처(自處)한 인질(人質)

 

 

 

설마...!”

섭대낭의 눈이 찢어질 듯 치떠지며 그녀의 거구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런...)

곽산해도 얼굴이 와락 굳어지며 섭대낭을 따라서 일어났다.

그 직후였다.

보고! 소부주님께서 자객의 인질이 되셨습니다.”

!

대청의 뒷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날아든 호장무사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돼!”

파앗!

거의 동시에 섭대낭은 사납게 울부짖으면서 호장무사와 엇갈려 대청 뒷문으로 날아나갔다.

콰창!

한줄기 섬전처럼 대청 후면으로 쇄도하는 그녀의 어깨에 부딛혀서 대청의 후문과 문틀이 함께 박살나버렸다.

 

***

 

(금검존의 검갑이 비어있다!)

요문천은 순간적으로 금검존이 빈 검갑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는 건...)

이어 요문천은 곁눈질로 자기 뒤쪽에 붙어서있는 철접의 몸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철접의 가슴에는 전체가 황금빛인 보검이 꿰뚫고 들어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이 여자의 몸을 꿰뚫은 보검은 금검존의 애검 낙일금검(落日金劒)이었구나. 금검존은 어검술(馭劍術)을 써서 이 여자를 격중시켰을 테고...)

"포기하라 계집! 천지개벽해도 네년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철접과 요문천의 앞에 내려선 금검존이 온몸에서 폭풍같은 기세를 흘리며 눈을 부릅뜬다.

"함부로 장담하지 마라 금검존! 만일 내가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한다면 필히 저승으로 동행을 데려갈 것이다!"

스윽!

철접도 서늘한 시선으로 금검존을 마주 보며 비수의 날을 요문천의 목젖에 더욱 바짝 밀착시켰다.

"... 살려 주십시오 뇌영반!"

철접이 차갑게 내뱉는 것에 맞춰서 요문천도 다급히 외쳤다.

"... 장가도 못 가고 죽기는 싫습니다! 제발 이 여자 손에서 날 좀 구해주세요"

요문천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금검존에게 애원했다.

(!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는 옛말도 틀릴 때가 있군! 어쩌다 황사같은 대인(大人)에게서 저런 약골이 나왔단 말인가?)

금검존은 입맛이 썼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무 걱정 말게! 그 계집이 소부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네!"

"... 제발 그래주십시오 뇌영반!"

금검존의 말에도 요문천은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비천한 오랑캐 계집과 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탐탁치 않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도리가 없군. 네년이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금검존은 벼락이 뿜어지는 것같은 눈으로 철접을 노려보며 말했다.

철접이 비록 대역의 죄인이긴 하나 황사인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 요문천의 안위를 도외시 할 수는 없다.

"나는..."

철접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금검존이 오른손을 그녀의 들어 막았기 때문이다.

"미리 경고하겠는데... 무리한 주문은 삼가하라! 우리에게는 소부주의 목숨보다는 대역죄인인 네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니...!"

(여차하면 내 목숨은 돌보지 않고 척살해 버리겠다는 뜻이군!)

금검존의 말에 요문천은 내심 쓴 입맛을 삼켰다.

"걱정마라!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루의 시간뿐이다!"

"단 하루의 시간을 원한다? 무슨 뜻이냐?"

금검존이 찡그리며 되물었다.

"하루가... 지나면 이 글 벌레를 돌려보내겠다! 이가류 당주의 명예와... 우리 대화일족(大和一族)의 시조이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다!"

"섬나라 난쟁이들의 시조 나부랑이에는 관심 없다! 다만 네년도 본좌와 같은 무사이기에 믿어줄 뿐이다!"

금검존은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옆으로 저었다.

! 스슥!

그러자 건물을 에워싼 포위망 중 한쪽이 썰물처럼 갈라져서 길을 낸다

"하고 싶지는 않으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철접은 요문천을 끌고 포위망 밖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고맙다!"

"!"

철접의 말에 금검존은 같잖다는 듯이 냉소할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문천은 그 순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금검존이 아니라 나한테 한 거로군!)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을 끌고 사람들이 터준 길을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소부주님!"

"속하들의 무능을 용서하여주십시오 도련님!"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서 철접을 포위망 밖으로 내보냈다.

헌데 철접이 막 포위망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잠깐!"

금검존이 다시 철접을 불러 세웠다.

철접은 혹시 금검존이 생각을 바꾼 게 아닌가 하여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금검존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 더 있느냐?"

"본좌의 검은 놓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금검존은 냉소하며 철접의 몸을 가슴에서 등 쪽으로 관통하고 있는 황금색의 보검 낙일금검을 턱으로 가리켰다.

철접은 금검존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러나 일체 표정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낙일금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스윽!

이어 그녀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낙일금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낙일금검은 철접의 몸통을 관통한 궤적 그대로 빠져나오는데 특이하게도 피는 함께 흘러나오지 않았다.

(독한 계집! 생살이 갈라지는 데도 신음소리 한 마디도 안 내다니...!)

(과연 동영의 인자들은 다르구나!)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보는 가운데 이윽고 철접은 낙일금검을 완전히 몸에서 뽑아내었다.

(뭔가 특별한 조치를 한 모양이로구나. 낙일금검에 관통당한 상처에서는 피가 전혀 흘러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요문천은 낙일금검의 끝이 마침내 철접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곁눈질로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 진 빚은 기억해 두겠다 금검존!"

철접은 서늘하게 말하며 가슴에서 뽑아낸 낙일금검을 금검존에게 던졌다.

쐐액!

그녀의 손을 떠난 낙일금검은 마치 활로 쏘아진 것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금검존에게 날아갔다.

"!"

금검존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낙일금검을 보며 냉소와 함께 턱을 오만하게 위로 젖혔다.

!

그러자 금검존의 가슴으로 날아들던 낙일금검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슈욱! 철컹!

뒤이어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방향을 튼 낙일금검은 금검존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검갑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어검술이다!)

(과연 황실제일검이시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낙일금검이 저절로 검갑을 찾아들어가는 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루만 기다려라. 내일 안으로 이자는 확실히 돌려보낼 테니...!!"

몸통에서 낙일금검이 제거된 철접은 왼팔로 요문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돌아섰다.

휘익!

이어 철접은 요문천을 한 팔로 끌어안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방금 전까지 심장 부분이 검이 관통 당한 상태였던 것이 믿어지지 않는 날렵한 경신술이었다.

"도련님! 존체보중하십시오!"

"약속은 지켜라 계집!"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분노에 찬 외침을 배경으로 철접은 이내 승상부 밖으로 날아나갔다.

"육시를 해도 시원잖을 오랑캐 계집년...!"

금검존은 철접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영반?"

금의위 위사들중 좀 나이가 지긋한 인물이 금검존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건넸다.

"만에 하나...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대역죄인을 놓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대역죄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상각하의 일점혈육의 안위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금검존은 차갑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괜한 걱정은 하지 마라!"

불안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는 나이든 위사의 말을 금검존은 확신에 찬 어조로 끊었다.

"바뀌는 것은 단 한 가지! 저 왜국의 계집년 목이 하루 늦게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

금검존의 말에 나이 든 위사는 미진한 표정으로 수긍하며 물러섰다.

"천라지망을 더욱 넓게 펼쳐라! 저 계집을 포함하여 단 한명의 대역죄인도 놓쳐서는 안된다!"

파앗!

금검존은 허공으로 새처럼 날아오르며 금의위 위사들에게 지시했다

"존명!"

"봉명하겠습니다 영반각하!"

금의위 위사들은 철접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가는 금검존을 향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 휘휙!

이어 그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정원에는 승상부의 호장무사들만이 남아 분루를 삼키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 도련님이 인질이 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화악!

천둥치는 듯한 고함 소리와 함께 거구의 여자가 거센 회오리를 몰고 장내에 내려섰다.

물론 그 여인은 뒤늦게 변고를 알아차리고 대청에서 요문천의 거처로 한 달음에 날아온 섭대낭이었다.

뒤이어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와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 석호륜도 황망(慌忙)한 표정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 마님... 그것이...”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호장무사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 무사 진영(陳永)이란 인물이 전후의 경과를 서둘러 보고했다.

... 이 무능한 밥버러지들...”

!

진영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곤두선 섭대낭이 이를 갈며 오른 발로 세차게 바닥을 굴렀다.

그녀가 구른 오른 발 아래에서 정원 바닥이 직경 삼장, 깊이 세자 정도로 움푹 들어갔다.

드드드!

그와 함께 정원 전체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뒤흔들리면서 요문천의 거처인 은천각도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요동을 쳤다..

(방금의 진각(振脚)에는 신비각 사대영반에 못지않은 공력이 실려 있었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함께 비틀거리며 곽산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알기로 섭대낭은 결코 그 정도의 공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대낭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진짜 공력보다 두 세배 더 강력한 힘을 몸 밖으로 내뿜었다.

그것은 그녀가 타고난 살기, 천살지기를 몸 안에 품고 있어서 분노가 극에 달하면 순간적으로 몇 배 더 강력한 힘을 토해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도련님의 신상에 불미한 일이 생긴다면...!”

드드드!

진흙 바닥처럼 뒤흔들리고 출렁이는 지면을 딛고 선 채 섭대낭은 이를 갈며 호장무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안광에 호장무사들은 숨통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네놈들을 모두 내 손으로 때려죽이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섭대낭이 사납게 토해내는 살기는 승상부 내의 모든 숨 쉬는 존재들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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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만나다!

 

 

 

(끝났다.)

사방에서 호장무사들과 번견들이 몰려들며 내는 소란을 들으며 철접은 체념했다.

(조원(組員)들이 몰살당할 때 함께 죽지 않은 건 중상을 입은 지로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시바타 일행이 지로를 피신시킨 곳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졌다.)

!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철접은 비수를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임무에 실패한 자객이 사로잡힐 경우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가엾은 어머니가 무로마치막부의 관병들에게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고문과 강간을 당하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철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다.

탈출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선택은 단 한가지뿐이다.

어머니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기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

(미안하구나 지로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철접은 겁 많은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수로 자신의 목을 그으려 했다.

그때였다.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

요문천이 기겁하며 달려들어 철접의 비수를 든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으려고 애쓰며 애원했다.

눈앞의 여자는 잔인무도한 자객이며 감히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대역죄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제 따위는 요문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 온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녀가 자살을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해도 무공에는 문외한인 요문천이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철접은 동영의 양대 인자파벌중 하나인 이가류의 당주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방해하지 마라."

철접은 왼손으로 요문천의 가슴을 쳐서 밀쳐내었고,

!”

콰당탕!

그 바람에 요문천은 옷장 밖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요문천을 밀쳐낸 철접은 다시 오른손에 든 비수로 자기의 목을 그으려고 했다.

헌데 그때였다.

"... 사람 살려!"

침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요문천이 갑자기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

비수로 목을 그어 자살하려던 철접은 갑작스러운 요문천의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였다.

"자객이다! 자객이 날 죽이려 한다!"

그 사이에도 요문천은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입에 대고 다급하게 외치고 있다.

(내가 자살하려던 것을 말리려던 자가 왜 갑자기...)

의아해하며 요문천을 보던 철접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 치떠졌다.

그녀는 비로소 본 것이다.

요문천이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두눈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구나!)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여자답게 철접은 순간적으로 요문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 요문천은 자신을 인질로 잡으라고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리 닥쳐라!"

요문천의 의도를 깨달은 철접도 짐짓 앙칼지게 고함을 지르며 옷장 밖으로 나섰다.

중상을 입고 시바타등에게 호송되어 간 동생의 안위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이용해야만 한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요문천은 더욱 크게 고함을 지르며 철접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일어섰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허튼 짓을 하면 목을 따버리겠다!"

철접도 더욱 크게 목청을 높이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요문천의 울대에 비수를 대었다.

그 직후였다.

"여기다!"

"도망 친 자객이 소부주님의 거처에 숨어있다!"

콰창! 퍼펑!

사방의 창문과 벽이 박살나며 십여명의 무사들이 요문천의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내로 돌입한 무사들의 절반쯤은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이었지만 나머지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다.

단단하게 묶은 포승줄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그 비단 옷의 관인들이 바로 금의위의 위사(衛士)들이다.

개개인이 무림의 일류고수 수준의 무공을 지닌 금의위 위사들은 그 집요함과 냉혹한 행사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이런...”

... 소부주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실내로 뛰어든 직후 승상부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급히 멈춰 섰다.

가슴을 황금색 보검에 관통당한 철접이 왼손으로는 요문천의 어깨를 잡은 채 오른손에 든 비수를 요문천의 울대에 대고 있다.

요문천의 목에는 이미 베어진 상처가 생겨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다.

누가 봐도 요문천이 철접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 이런! 소부주께서 인질로 잡혔다!"

"조심하라! 소부주께서 다치면 안된다!"

방안으로 뛰어들었던 호장무사와 금의위 위사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이 누구인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황사 요광효의 외아들이 아닌가?

요문천은 영락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요광효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 요문천의 몸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호장무사들은 물론이고 금의위 위사들 역시 목을 내놔야하는 상황이다.

"소부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하들이 구해드리겠습니다!"

"계집! 그분께 위해를 가하면 사지를 찢어죽이겠다!"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뒷걸음질을 쳤다.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댄 철접이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 그들 앞으로 나온 때문이다.

(이자가 영락제의 황사이며 명나라 조정의 사실상 승상인 요광효의 외아들 요문천이었구나.)

철접도 비로소 요문천의 신분을 알고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문천이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승상부의 소부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 소부주님께서 죄인에게 인질로 잡히셨다!”

그 사이에 요문천의 거처 주변으로 몰려들던 수십명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입에서도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창문과 벽을 통해서 철접이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대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때문이다.

빨리... 빨리 마님께 상황을 보고하라!”

입조(入朝)하신 승상께도 파발을 띄워라!”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의 다급한 외침 속에 몇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현장을 떠난다.

섭대낭과 요광효에게 변고를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 살려주세요! ... 이 여자는 흉악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벌써 제 목에 상처를 내었다구요."

요문천은 철접에게 떠밀려 부서진 벽쪽으로 다가가며 짐짓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하여간 귀한 집 도련님들이란...!)

(명색이 사내면서 험한 일 좀 당한다고 벌벌 떠는 꼴이라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요문천의 모습에 금의위 위사들은 내심 혀를 찼다.

"길을 열어라!"

그 사이에 철접은 요문천의 몸을 방패삼아서 부서진 벽쪽으로 접근하며 차갑게 외쳤다.

그에 따라 철접 앞쪽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건물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밀려나갔다.

"이 샌님을 살리고 싶다면 날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철접은 요문천의 목에 비수를 바짝 들이댄 채 건물 밖으로 나섰다.

"빌어먹을!"

"별 수 없다. 승상각하의 유일한 핏줄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은 좌우로 물러서며 이를 갈았다.

(됐다!)

앞쪽을 가로 막고 있던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무사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며 철접은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잘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녀는 요문천을 앞세운 채 호장무사들과 금의위 위사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대담한 계집이로군! 감히 대명제국의 심장부에서 이런 분탕질을 벌이다니...>

 

누군가의 장중한 음성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를 천둥처럼 뒤흔들었다.

(그자다!)

순간 철접의 가늘고 긴 눈이 차가운 살의를 뿜어냈다.

만일 살아남는다면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쿠오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에 허공으로부터 한 명의 노인이 마치 산 하나가 통 채로 하강하듯 장중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뒷짐을 짚은 자세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노인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관운장(關雲長;관우)을 연상케 한다.

노인의 두 눈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려한 금포(錦袍)를 걸친 노인의 등에는 비어있는 검갑(劍匣)이 짊어져 있다.

화악!

이윽고 금포노인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건물 앞의 정원 일대가 강렬한 돌풍을 휩싸인다.

"영반(領班)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뇌()영반님!"

금포노인이 내려서자 금의위 위사들이 아연긴장한 모습으로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인다.

(신비각 사대영반의 서열사위 금검존(金劒尊) 뇌극형(雷極形)!)

바르르!

요문천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철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비각이 무섭긴 무섭구나. 냉혹 비정하기로 소문난 동영의 인자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다니...!)

그 떨림을 느낀 요문천은 새삼 신비각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요문천은 지금 자신들 앞에 내려선 금포노인을 잘 알고 있다.

신비각의 사대영반은 정기적으로 승상부를 방문하여 요광효에게 업무보고를 해왔다.

요문천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안면을 텄었다.

금검존 뇌극형은 칠십을 넘긴 나이지만 신비각 사대영반 중에서는 가장 젊다.

비록 나이 때문에 사대영반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긴 해도 금검존이 검법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 세상의 평판이다.

바로 그 금검존 뇌극형이 나타난 것이다.

 

***

 

내 허락도 없이 당신네 금의위 위사들을 이미 승상부 내에 진입시켰다고?”

섭대낭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통령! 당신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가요?”

대청 안에는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을 비롯하여 십여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숨조차 크게 못 쉬고 있었다.

키가 육척이 넘어 보통 사내들을 압도하는 체격을 지닌 섭대낭의 몸에서 폭풍같은 살기가 터져 나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때문이다.

붉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수초처럼 일어나 흩날리고 벽안(碧眼)에서는 푸른 벼락이 치달린다.

(과연 한 때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벽혈마희(碧血魔姬)답구나.)

섭대낭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금의위 부통령 곽산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금의위 부통령답게 곽산해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무공 역시 신비각 사대영반을 제외하면 황실 내에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회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산해는 섭대낭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 거녀는 성정(性情)이 불같아서 일단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천살지기(天殺之氣)를 타고 태어난 이런 류의 인간과는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싸움이 붙게 되면 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는 기필코 피를 보는 격렬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땅히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했사오나... 역적의 흔적이 승상부 담장 안으로 이어진지라...”

곽산해는 곁눈질로 섭대낭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닥쳐요! 아무렴 나와 본부의 식솔들이 숨어든 쥐새끼 한 마리 처리 못할 것같았나요?”

곽산해의 변명은 이어진 섭대낭의 분노서린 일갈에 파묻혀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급한 마음에 이 암표범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같구나.)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섭대낭의 분노와 살기를 느끼며 곽산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만에 하나 당신들이 오판을 하여 본부에 난입한 것으로 밝혀지면...”

이를 갈며 곽산해를 노려보던 섭대낭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곽산해의 얼굴도 얼어붙듯이 굳어졌다.

 

<소부주... 자객... 인질...>

 

백여장 쯤 떨어진 곳에서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고함소리들이 섭대낭과 곽산해의 귀로 파고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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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옷장 속의 미녀

 

 

 

(도련님과 오랜만의 동침이라 어색하겠구나.)

섭대낭도 주책맞게 가슴이 뛰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 훼방꾼이 끼어들었다.

"마님! 죄송합니다."

문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섭대낭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 맞은 표정으로 문쪽을 돌아보았다.

"금의위에서 승상부도 수색을 해야 하니 위사들의 진입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자객들 중 달아난 자의 흔적이 승상부 근처에서 사라졌다면서..."

문밖의 인물이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인물은 승상부의 경비를 책임지는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의 수령인 석호륜(石虎倫)이었다.

"금의위 따위가 감히..."

석호륜의 보고를 받은 섭대낭이 불끈 화를 낸다.

그러자 섭대낭의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한다.

요문천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유모이지만 일단 화를 내면 나찰이나 야차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 속하들도 안된다고 했지만 금의위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서..."

문 밖의 석호륜이 아연긴장한 채 더듬거린다.

 

승상부의 주인인 요광효에게는 처()도 첩()도 없다.

비록 영락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환속을 하긴 했지만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는 않은 것이다.

요광효가 환속을 하고도 여전히 승려처럼 사는 걸 보다 못한 영락제는 종종 궁녀들 중 미녀를 골라 하사하곤 했다.

하지만 요광효는 영락제가 보낸 여자들을 일단 받았다가 다른 사내들과 짝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래서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이 승상부의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모라면 하녀나 다름없는 천한 신분이다.

헌데 어쩐 일인지 요광효는 아들의 유모인 섭대낭을 매우 존중한다.

자연스럽게 승상부의 사람들도 섭대낭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승상부에서 섭대낭에게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요광효와 요문천 부자뿐인 것이다.

 

"금의위에서는 어떤 인간이 책임자로 왔는가요?"

섭대낭이 문쪽을 노려보며 물었다.

"금의위의 부통령(副統領) 곽산해(郭山海)가 마님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석호륜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대답했다.

승상부 호장무사들의 수령인 석호륜은 한 때 강북 일대를 주름잡던 호걸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부터 섭대낭의 준엄한 기세에 압도당한 석호륜은 섭대낭의 목소리만 들어도 한없이 위축되곤 한다.

"알았어요. 곧 갈 테니 그자를 대청으로 들이세요."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석호륜이 멀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대청에 다녀올 동안 도련님 혼자 계셔야겠어요."

요문천을 돌아보며 말하는 섭대낭의 얼굴은 언제 살기등등했는가 싶게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요문천은 대답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호장무사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밖으로 나가지는 마세요."

섭대낭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요문천의 서재를 떠났다.

(역시 유모밖에 없어.)

닫히는 문을 보며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 종일 동대로에서 본 여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대낭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말고 오늘 읽을 계획이었던 책들이나 마저 읽자.)

요문천은 탁자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털썩!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요문천의 귀에 들렸다.

요문천이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은 서재와 연결된 침실쪽이다.

침실 문은 닫혀있는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창문을 닫아놔서 바람이 들이칠 리는 없는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침실 문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이 문을 열고 들어간 침실은 어둑하다.

아직 잠자리에 들 때가 안되어서 불을 켜놓지 않은 때문이다.

침실은 승상부 소부주의 잠자리답게 넓고 화려하다.

침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침대는 기둥과 지붕이 달려있다.

매우 넓어서 대여섯명이 함께 자도 될 크기의 침대다.

벽에는 여러 개의 옷장이 세워져 있으며 한쪽에는 욕실로 통하는 문이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침실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둑한 침실에 전에는 맡아본 적이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다.)

요문천은 그 냄새가 누군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비린내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창문들은 모두 닫혀있다.

하지만 누군가 다친 몸으로 침실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호장무사들을 불러야할까?)

두려움으로 머리끝이 쭈뼛거린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호기심에 요문천은 찬찬히 침실 바닥을 살폈다.

곧 요문천은 침실 바닥에 옅은 얼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히 지우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다.

핏자국은 창문으로부터 여러 개의 옷장들 중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옷장 속에 누군가 숨어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핏자국의 흔적이 이어진 옷장으로 다가갔다.

(아마 영락폐하를 습격했다가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일 것이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의 손은 이미 옷장의 문을 열고 있다.

번쩍!

옷장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섬광이 요문천의 목으로 날아든다.

하지만 눈을 치뜬 요문천은 자신의 목을 그어오는 새파란 칼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옷이 가득 걸린 어둑한 옷장 안쪽에 한명의 여인이 숨어 있다가 짧은 칼을 휘두르고 있다.

옷장 속이 어둑하다.

게다가 몸에 걸친 옷도 피로 물들어 있어 여인의 새하얀 얼굴만이 또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출혈이 심한 탓에 한층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다.

분칠을 한 것같은 그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어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 여자다!)

눈을 치뜬 요문천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진다.

지난밤 한번 본 후로 하루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여인!

그녀의 얼굴이 믿어지지 않게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

 

크르르르!

갑자기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버둥거린다.

"이놈들이 왜 이래?"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인 진준(陳俊)과 여구(呂九)는 갑자기 날뛰는 번견(番犬;경비견)들의 목줄을 잡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번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순찰을 돌던 곳은 다른 저택과 맞닿은 담장 근처였는데

그곳의 관상수와 꽃잎에 핏방울이 점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던 자객이 승상부에 들어왔다!)

진준과 여구의 안색이 와락 굳어졌다.

그와 함께 그들은 반사적으로 호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

 

"절색(絶色)이다!"

 

지난밤에 들었던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철접의 귀를 울렸다.

철접은 금의위 위사들이 집요한 추적을 피해 어느 화려한 저택으로 숨어들었었다.

헌데 그 저택의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 내부의 옷장에 몸을 숨긴 직후 누군가 다가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자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 침묵시켜야만 한다.

철접은 옷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병(小柄;일본식 비수)으로 그자의 목을 빠르게 찔러갔다.

바로 그 순간 지난밤에 들었던 <절색(絶色)이다!> 라는 외침이 해빙기에 갈라지는 얼음처럼 쨍하게 철접의 머리 속을 울렸다.

양손으로 옷장의 문을 활짝 연 해맑은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얼굴을 언제 어디서 봤는지가 순간적으로 철접의 뇌리에 떠올랐다.

지난밤 동생 용차랑을 들여보냈던 기루 앞에서 본 젊은 서생이다.

(안돼!)

철접은 찔러가던 소병을 필사적으로 틀었다.

!

간발의 차이로 철접이 내지른 소병의 끝이 서생의 목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비수 끝에 스친 목옆의 살갗이 쩍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생의 얼굴에 피어오른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양손으로 옷장을 연 요문천과 그에게 비수를 내지른 자세인 철접의 몸이 함께 굳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상황이 사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이 여자를 다시 만났다.)

요문천은 목이 베인 상처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갔던 여인이 기적처럼 바로 눈앞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자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철접 역시 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훑으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 보았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사내..

그를 넓디넓은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전율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마치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숨 몇 번 들이키고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삐익! !

돌연 들려온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두 사람을 몽환경(夢幻境)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쪽이다!"

"자객의 흔적이 소부주님의 거처 은천각(恩天閣)쪽으로 이어진다."

"빨리 마님께 알려라!"

컹컹! !

호각소리에 이어 여러 명이 다급히 지르는 고함 소리와 사나운 개의 짖음이 들려왔다.

승상부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덕분에 늘 조용하던 요문천의 거처 일대는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여자가 내 거처로 숨어들어온 흔적이 호장무사들에게 발견되었구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장무사들이 자신의 거처로 몰려들며 지르는 고함을 통해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영락제를 습격했던 동영의 인자들 중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요문천의 눈에 비로소 여인의 몸 상태가 들어왔다.

철접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마 북경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위장한 채 기다리다가 자금성으로 귀성하던 영락제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철접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탓에 원래는 희던 옷이 피로 물들어 혈의(血衣)로 변해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옷장의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을 정도였다.

가장 심각한 상처는 왼쪽 가슴에 나있다.

한 자루 금빛으로 번쩍이는 검이 철접의 가슴에 박혀 그 끝이 등쪽으로 삐져나와있다.

가슴이, 그것도 심장이 자리하고 있는 왼쪽 가슴이 검에 관통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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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지러운 밤

 

 

 

영락제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 몽고족에 대한 친정(親征)을 감행했었다.

이를 삼리오출(三犁五出)이라 한다.

삼리는 몽고족의 근거지를 세 번 쳐부순 것을 의미하고 오출은 다섯 번 고비사막을 넘은 것을 뜻한다.

다섯 번의 원정은 매번 대상이 바뀌긴 했다.

그래도 몽고족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대한 오이라트(瓦喇, 또는 衛拉)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달단(韃靼)과 함께 몽고족의 양대 세력인 오이라트에는 몇 년 전 토곤(妥爟)이라는 젊은 영걸이 나와서 대원(大元)제국의 재건을 공공연히 주창하고 있다.

이에 영락제는 세 번째 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오십만 대군을 북경 북쪽 팔달령(八達嶺) 근처에 소집하여 열병식을 갖었었다.

열병식은 정오 무렵에 진행되었었다.

그후 자금성으로 돌아오던 영락제의 귀성(歸城) 행렬을 자객들이 습격했을 것이다.

 

(딱히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신비각(神秘閣)의 경호를 받으시는 상태에서는 세상 어떤 자객도 영락폐하의 존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을 테니...)

승상부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요문천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숱한 적이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벼온 영락제다.

그 때문에 신변 경호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수많은 위사들이 영락제 주변에 포진해있다.

특히 암중에서 황제를 지키는 비밀조직 신비각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신비각의 경호를 받는 영락제가 위험해지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신비각은 주원장을 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후 원() 황실이 수집한 숱한 무공비급과 영약들을 신비각에 하사했었다.

덕분에 신비각에 가입한 무림인들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신비각의 실력자들이 몇 명만 세상으로 나가도 단번에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판이다.

(어쩌면 당대의 신비각 각주는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요문천은 신비각과 함께 아버지 요광효를 떠올렸다.

<정난의 변>에서 신비각은 중립을 지켰다.

문관을 우대하고 군부를 홀대한 건문제의 정책이 원래가 무사들인 신비각 구성원들의 반감을 산 때문이다.

신비각이 침묵해준 덕분에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신비각을 전보다 더 중시하였으며 자신의 황사 요광효에게 신비각의 관리를 맡겼었다.

관례에 따라 신비각의 각주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공표되지 않는다.

다만 사대영반(四大領班)이라는 네 명의 기인이 숫자 미상의 신비위사(神秘衛士)들을 직접 지휘한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래도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며 공신인 요광효가 신비각의 각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다.

요문천이 북경의 밤거리를 들썩이게 만드는 소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셨지요 도련님?"

드륵!

요문천의 뒤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키가 육척이 넘는 그 여인이 들어서자 그리 좁지 않은 서재가 꽉 차는 느낌이 든다.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임에도 균형 잡힌 몸매와 이목구비가 깊고 뚜렷하여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요문천의 유모 섭대낭이다.

"놀라긴 뭘..."

요문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유모를 돌아보았다.

섭대낭은 몇 달 전 마흔 살을 넘긴 중년의 나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정심한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內家高手)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색목인의 혈통인 섭대낭은 젊은 시절 강호를 뒤흔들어놓았던 여걸(女傑)이었다.

헌데 어떤 일을 계기로 무림에서 은퇴하고 요문천의 유모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전적으로 기르고 보살펴온 것이 섭대낭이다.

유모라는 이름 그대로 섭대낭은 요문천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서 길렀다.

요문천을 만나기 얼마 전에 섭대낭도 출산을 했었지만 곧 아기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퉁퉁 불어 오른 젖을 요문천에게 물리며 섭대낭은 아기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섭대낭에게 요문천은 단순한 젖아들이 아니다.

낳자마자 잃은 아기의 대신이었다.

자연히 그녀는 요문천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요문천에게 있어서도 섭대낭은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사실상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병약하게 태어난 요문천이다,

섭대낭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던 모양이지?"

요문천은 다시 창밖을 돌아보며 유모에게 물었다.

"저도 아직은 자세한 경과를 듣지는 못했는데... 열병식을 마치고 귀성하시던 영락폐하의 행렬을 일단의 자객들이 습격했다는군요."

다가온 섭대낭은 자연스럽게 요문천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물론 어림없는 시도였겠지?"

요문천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섭대낭의 큼직한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거구에 어울리게 크지만 길고 갸름하여 아름답기도 한 손이다.

"영락폐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으셨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네요. 승상께서도 급히 입궐(入闕)하셨구요."

섭대낭은 사랑스러운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뭘 직접 나서시나? 자객들의 추포(追捕)는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에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

요문천은 혀를 찼다.

도연, 즉 요광효의 나이는 올해 여든 다섯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신도 어려울 노령(老齡)이지만 여전히 정정해서 조정의 중요한 사안에는 대부분 관여해오고 있다.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의 자객이 동원된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일 거예요."

"대규모? 자객이 몇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섭대낭의 이어진 말에 요문천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최소한 오십 명 이상이었다고 해요. 백 명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도 하구요."

"오십 명이 넘는 자객이 북경에 잠입하다니...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요문천도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인 만큼 치안이 아주 엄중하다.

그런 북경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자객이 동시에 잠입한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객들 중 태반은 현장에서 위사들에게 척살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자객들은 생포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자결을 했다네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요문천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걸 보면 아직 잡히지 않은 자객들이 있는 것같고...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오늘 밤 못 돌아오시겠네!"

섭대낭의 품에 안긴 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정하다고는 해도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 부친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 규모의 자객들을 동원할 자라면...!"

"금의위와 동창에서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요문천의 말을 섭대낭이 이어 받았다.

"토곤! 토곤 타이시(太師)...!"

요문천은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시, 즉 태사(太師)는 몽고족의 군 사령관의 칭호다.

"징기스칸의 정통 후계자인 푼야스리(木雅失里)를 암살한 후 대칸(大汗)을 자칭하고 있는 그 효웅이 또 사단을 벌렸겠군!"

요문천은 부친으로부터 들은 토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본래 몽고족의 지도자인 대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핏줄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

이를 <징기스칸의 법>이라고 하는 바,

몽고족 내에서 아무리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자라도 황금씨족이 아니면 타이시가 되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헌데 토곤은 징기스칸, 정확히는 쿠빌라이의 마지막 후손인 푼야스리를 살해한 후 스스로 대칸을 자처하고 있다.

물론 오이라트 외의 다른 몽고 부족들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몽고족 내에서는 격심한 내분이 일어난 상태다.

 

"토곤의 짓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번에 그자가 동원한 자객들은 좀 특이하다고 해요."

섭대낭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을 이었다.

"특이하다니 어떤 면이...?"

요문천은 고개를 조금 돌리며 물었다.

"자객들이 몽고족 출신이 아니라 동영(東瀛)의 인자들이었다는 거예요."

섭대낭은 자신의 가슴에 코를 문지르는 젖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인자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동쪽 섬나라의 마귀들이잖아."

섭대낭의 향긋한 살 냄새를 맡던 요문천이 흠칫 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본다.

"맞아요. 잡혀 죽었거나 도망칠 수 없자 망설이지 않고 자살을 한 자객들은 모두 왜국(倭國)의 인간들이었대요."

섭대낭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아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젖아들의 작은 몸짓, 목소리 한마디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섭대낭이었다.

"동영의 인자들을 고용하다니... 토곤이 제법 머리를 굴렸군!"

섭대낭의 부드러운 입술을 이마에 느끼면서도 요문천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 명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토곤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세력이다.

당연히 오이라트의 도발에 대한 대비는 치밀하다.

그래서 몽고족 출신 자객들이 들키지 않고 대규모로 북경에 잠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몽고족이 아닌 다른 종족의 북경 출입은 비교적 자유스럽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방(異邦)에서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곤은 그것을 노리고 몽고족이 아닌 동영의 인자들을 동원하여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 오늘밤은 저와 함께 주무시도록 해요."

섭대낭이 요문천의 머리를 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 그럴까?"

섭대낭의 말에 요문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 요문천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섭대낭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

섭대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요문천을 맡아 기르면서 한시도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기를 낳은 직후 잃어버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문천도 그런 섭대낭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라왔다.

진짜 어머니라면 적당한 시기에 아들을 분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헌신만 할 줄 하는 유모인지라 섭대낭은 요문천이 다 큰 후에도 자신의 품에서 밀쳐내지 않았다.

요문천 역시 무슨 요구든 들어주는 섭대낭이 마냥 좋아서 그녀의 치마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문천은 잘 때도 반드시 섭대낭의 품에 안겨야만 잠이 들곤 했다.

장가를 가도 충분할 나이인 요문천이 여전히 유모인 섭대낭과 동침하는 것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들이 떠돌았다.

명문가의 또래들은 이미 다 장가를 갔다.

반면 요문천이 여전히 혼자 몸인 것도 섭대낭의 봉사 덕분에 딱히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하지만 섭대낭과 요문천은 어디까지나 유모와 젖아들의 관계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혹과 달리 요문천과 섭대낭은 늘 동침을 해도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문천과 섭대낭의 순수한 동침도 일 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섭대낭이 거부해서가 아니라 요문천쪽에서 자진하여 혼자 자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성숙한 남자라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핏덩이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섭대낭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문천은 자진해서 섭대낭과 떨어져 자게 되었다.

물론 그 이유를 섭대낭도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기특하기도 해서 그날부터 섭대낭은 요문천을 따로 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방을 쓴 지 일 년여만에 섭대낭과 다시 동침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선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요문천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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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승상부 소부주

 

 

 

처음에는 살의(殺意)가 불끈 치밀었다.

누군가 자신의 순결한 몸을 색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는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절색이다!> 라고 외친 한마디에 온전히 감탄만이 깃들어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철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낸 인물을 보았다.

이장(二丈;6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젊은 서생이 눈을 치뜬 채 그녀를 보고 있다.

나이는 약관이 채 안되어 보인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원래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

추호의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은 서생이 유복한 가정에서 근심없이 자랐음을 보여준다.

(지로가 잘 자라면 저자처럼 되겠구나.)

그것이 젊은 서생을 보는 순간 느낀 철접의 감상이다.

호기심과 경탄으로 가득한 젊은 서생의 눈이 웃고 있다.

진지하면서도 순수하여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이다.

젊은 서생 뒤에는 벽처럼 보이는 존재가 서있다.

처음에는 남자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여자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육척(六八;180센티)을 훨씬 넘는다.

젊은 서생의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다.

체격 역시 당당해서 철접으로 하여금 남자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이가 마흔 살 언저리,

사내를 압도하는 체격을 지녔지만 거녀(巨女)의 얼굴은 추하지 않다.

추하기는커녕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는 윤곽이 깊고 뚜렷하며 눈동자에는 푸른색이 감돈다.

거녀의 몸에는 아마도 색목인(色目人)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녀의 머리카락도 완전히 검지 않고 붉은 색을 띄고 있다.

(고수로구나.)

철접은 푸른색을 띤 거녀의 눈으로 언뜻 번갯불같은 섬광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미련하게 보이는 거녀의 몸에 측량불가의 심후한 공력이 깃들어있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죽일 수 있을까?)

인자의 본능으로 철접은 자연스럽게 거녀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으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간단히 압살(壓殺) 당할 것이라는 게 철접이 내린 판단이었다.

(중원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고수도 많구나. 일개 호위가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철접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자신들이 척살을 시도할 황제의 주변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소생이 초면에 결례를 했습니다."

젊은 서생이 포권을 하며 말을 건네 철접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불쾌하셨다면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진지한 사과다.

서생이 사과하는 말을 들은 철접은 마음에서 불쾌한 감정을 씻어낸다.

"딱히 결례를 하신 것도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철접은 건조한 어조로 말하다가 시선을 기루쪽으로 돌렸다.

기루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기루로 들어가던 한량들과 그들을 맞이하던 기녀들이 무엇때문인지 놀라고 당황하며 허둥거린다.

이어 그들을 헤집고 한명의 소년이 달려 나온다.

벗겨졌던 상의를 다시 입으며 기루에서 뛰쳐나오는 그 소년은 철접 자신의 동생 용차랑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다.

용차랑의 행색과 표정을 본 철접은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마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녀들이 다짜고짜 용차랑의 옷을 벗기려 들었을 테고,

기겁한 용차랑이 기방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울먹이며 기루에서 달려 나오는 용차랑의 뒤로 늙은 인자 시바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따라 나오고 있다.

"누나!"

기루를 뛰쳐나온 용차랑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철접을 발견하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달려온 용차랑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래. 싫으면 억지로 할 거 없다."

철접은 키가 작아 머리가 자기 어깨쯤에 닿는 어린 동생을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오늘밤에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도록 하자꾸나."

철접은 계집아이처럼 훌쩍이는 동생을 한 팔로 끌어안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며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칫 지금이 소동이 발단이 되어서 내일 있을 거사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가급적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한다.

용차랑을 안고 걸음을 옮기면서 철접은 한 쌍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은 거구의 여인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는 젊은 서생이었다.

 

***

 

요문천(姚聞天)은 승상부(丞相府)의 소부주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 승상(丞相)이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초기에는 송()나라의 관제를 본 따서 정무를 관장하는 승상이 있었고 승상부 역시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홍무제 주원장이 친정(親政)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승상 제도는 폐지되어 버렸었다.

관직에 승상이 없으므로 승상부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승상부가 분명 존재한다.

그리 된 이유는 승상부의 주인이 영락제의 치세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사(皇師) 도연(道衍)!

 

그가 바로 승상부의 주인이다.

도연은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안배가 없었다면 영락제는 여러 번왕(藩王)중 한명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영락제는 도연에게 어떤 공신에게 내린 것보다도 더 큰 상을 내리려고 했다.

문제는 도연이 무소유(無所有)를 본분으로 삼는 승려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속인이 아닌 도연에게 아무리 큰 상을 내려도 의미가 없다.

이에 영락제는 도연에게 속인의 신분으로 은상(恩賞)을 받으라 명하였다.

천자의 명인지라 도연도 어쩔 수 없이 환속하여 요광효(姚廣孝)라는 원래 이름을 쓰게 되었다.

승려의 신분을 버린 도연, 즉 요광효에게 영락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은상을 내렸다.

그중에는 북경 내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가 요광효에게 하사한 그 저택은 처음에는 요부(姚府)로 불렸었다.

하지만 요부라는 이름은 발음상 아름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광효는 실질적인 승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요부는 승상부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승상이라는 관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치하에서 승상부가 존재하게 된 연유였다.

그 승상부의 소부주가 요문천이다.

요문천은 요광효가 환속하기 전에 관계한 어떤 여인의 소생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열여덟 번째 생일을 치룬 요문천의 신분은 여러 왕가의 왕자들을 능가하여 영락제 슬하의 황자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요문천과 그의 아버지 요광효는 겸손한 성품이라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영락제의 치하에서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존귀한 신분이 요씨부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요문천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하늘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어젯밤, 요문천은 유모(乳母) 섭대낭(葉大娘)과 함께 환락가로 유명한 동대로를 구경하러 갔었다.

섭대낭은 요문천이 글 읽는 것만 좋아할 뿐 여자나 세상 물정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장소인 동대로에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깊은 밤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동대로는 순진한 책벌레 요문천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루들과 짙은 화장 때문에 그림에서 빠져나온 선녀처럼 보이는 기녀들의 고혹한 자태는 소년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요문천은 동대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그 여인의 자태는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호객을 하는 기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문천은 이내 그 여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기녀라면 결코 지닐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자태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었다.

 

"절색(絶色)이다!"

 

그 때문에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입 밖으로 내놓게 되었다.

탄성을 들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돌아보었다.

순간 요문천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직감했다.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방금 전 물에 씻긴 백옥인 듯 깨끗한 얼굴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진다.

특히 가늘고 긴 여인의 두눈은 서늘한 빛을 흘려내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었다.

자신이 여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여인도 대답을 했던 것같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요문천이다.

여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재회를 기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요문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 직후 근처 기루에서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허둥대며 뛰쳐나오더니 여인의 품에 와락 안겼기 때문이다.

여인은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을 안고 달래며 현장을 떠났다.

그 모습에서 요문천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누이가 어린 동생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여인은 요문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여인의 모습은 요문천의 뇌리에서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병에 걸린 것같구나. 상사(相思)라는 불치의 병에...)

요문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눈에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그 신비한 여인의 자태만이 온통 뇌리에 떠돌 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 읽는 것조차 잊었으며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상태로 그 여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 차려라 요문천.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여인에게 홀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요문천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호르륵!

갑자기 멀리서 요란한 호각과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어두워지는 북경의 거리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불빛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불과 횃불을 든 사람들이 떼 지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뭐지?)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쓰던 요문천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창밖을 보았다.

"벽돌 하나, 기와 한 장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단 한 놈의 자객도 놓쳐서는 안된다!"

"대역무도한 역적들을 놓치면 모두 칼을 물고 자결할 각오를 해라."

호르륵! 호륵! 삐익!

승상부 근처의 골목에서도 거친 고함과 호령들이 호각소리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온다.

(영락폐하께서 열병식(閱兵式)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행로에 사단이 생겼구나.)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던 요문천은 이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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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절색(絶色)이다!

 

 

밤이 깊었다.

하지만 북경 외성(外城)의 동쪽에는 불야성이 형성되어 있다.

독특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저마다 내건 형형색색의 등불들이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북경 최대의 환락가다.

동대로(東大路)라 불리는 거리는 금릉(金陵)의 진회하(秦淮河)에 못지않은 규모와 빼어난 미기(美妓)들로 유명하다.

이십일 년 전에 시작되어 십팔 년 전에 끝났던 <정난(靖難)의 변()>의 결과로 북경은 천하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帝位)에 오른 영락제는 일단 금릉을 도읍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꾸준히 천도(遷都) 준비를 했으며,

마침내 영락십육년(永樂十六年)에 자신의 권력 근거지인 북경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 이전까지 북경은 연경(燕京), 북평(北平)등으로 불렸었다.

명나라의 수도가 된 덕분에 북경 일대 환락가들 중에서도 최대규모인 동대로는 유래 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늦은 밤임에도 동대로의 넓은 거리는 하룻밤의 쾌락을 찾는 한량, 부호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분칠한 여인들로 가득하다.

이 거리의 여인들은 단 한 종류뿐이다.

좋게 말하면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이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먹고사는 창기(娼妓)들만이 동대로에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사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어느 기루에서 호객(呼客)을 위해 내보낸 기녀일 것이라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조각상인 듯 서있는 아름다운 여인,

하지만 수작을 붙여볼 생각으로 그 여인에게 다가간 순간 사내들은 몸속의 피가 일거에 얼어붙는 듯한 오한(惡寒)을 느껴야만 했다.

훤칠한 몸에 수수한 옷을 걸친 여인의 눈빛은 너무도 깊고 투명하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서늘한 눈빛에 접하는 순간 사내들은 자신의 머릿속이 얼음송곳으로 후벼 파이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어떤 위협적인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서 멀어졌다.

덕분에 번잡한 동대로에서도 여인이 서있는 나무 그늘 근처는 한산했다.

여인은 철접이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의 그늘에 동화되듯이 서있는 철접은 길 건너편 건물을 보고 있었다.

철접이 보고 있는 건물은 동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루다.

현란한 등이 내 걸린 기루 입구는 하룻밤 인연을 찾는 사내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기녀들로 북적인다.

(시바타는 누구보다 노회(老獪)하니 내 뜻을 알아차리고 잘 처리하는 중일 것이다.)

철접은 웃음소리 낭자한 기루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늙은 인자 시바타와 용차랑을 기루로 들여보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철접이 동대로를 찾아온 이유는 내일의 거사를 앞두고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 경험을 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용차랑에게도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철접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난생 처음 기녀들과 어울려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분방하게 즐기다보면 용차랑은 곯아떨어져서 내일 있을 거사에는 끼지 못할 것이다.

철접의 뜻을 알아차렸을 늙은 인자 시바타는 기녀들을 사주하고 있을 게 확실하다.

술과 여자로 용차랑을 쉴 새없이 공략하여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리라고...

(지로(次郞)에게는 못할 짓을 한 기분이다. 누구보다 순진하고 겁이 많은 그 녀석이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철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시바타의 손에 이끌려 기루로 들어가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송아지같은 표정으로 돌아보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자들은 철이 완전히 들기 전부터 이성을 경험한다.

()에 일찍 눈을 떠야만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도 있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차랑 또래의 소년 인자들이라면 대부분 여자와 동침해본 경험이 있다.

소년 인자들은 첫 경험을 위해 유곽(遊廓)이나 사창가(私娼街)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인자 마을의 나이 든 여자들이 첫 경험을 하게 해준다.

아무래도 매춘부들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다.

소년들로서는 딱히 배울 게 없다.

그에 반해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며 소년들이 자라는 것을 봐온 여자들은 성심성의껏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려주게 된다.

여자의 몸이 남자와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기교를 써야 완전하게 정복할 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치는 것이다.

소년들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여자가 상대라면 겁을 먹거나 긴장하지 않고 첫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집안의 나이 든 여자들이 소년들에게 여자에 대해 알게 해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삼 년 전에 죽은 철접의 첫째 동생 용태랑이 그렇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용태랑은 집안의 어떤 여자를 통해 첫 경험을 한 것같았다.

용태랑은 두 살 위의 누이인 철접을 닮아 결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깔끔하기가 여자들보다 더 한 데다가 더럽거나 추한 것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용태랑이 유곽에 가서 창녀를 사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가류 내의 여자들과 관계를 갖기도 쉽지가 않다.

만에 하나 상대 여자가 용태랑의 아이를 배기라도 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이가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용태랑의 나이는 어느덧 약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장차 이가류를 이어야할 후계자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자를 모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심지어 용태랑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색가(男色家)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이가류 내에 퍼지고 있었다.

이가류의 당주가 될 사내가 남색가라 소문나면 심각한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다.

다른 인자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주인 용사무가 결단을 내렸다.

집안의 여자들 중 한 사람이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되어주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집안 여자라면 용태랑도 결벽증이나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관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대가족인 용씨 집안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오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 여자들 중 사내 경험이 없는 처녀들은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에서 제외 되었다.

남녀관계에 대해 뭘 알아야 용태랑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나이가 많은 여자 역시 배제되었다.

서른 명 남짓 남은 여자들 중 제비뽑기로 결정된 누군가가 용태랑의 첫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 여자가 누군지는 끝내 비밀로 붙여졌다.

용태랑은 집에서 그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동안 철접과 어린 아이들은 잠시 친척 집에 가있었다.

다음 날 철접이 귀가했을 때 용태랑은 더 이상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변함이 없지만 어쩐지 어른의 분위기가 났었다.

집안의 어른들 중 누구도 용태랑의 첫 경험 상대가 누구였는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철접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인자 마을의 어른들도 대부분 용태랑의 상대를 눈치 채고 있는 것 같 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여자가 누군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인자들의 삶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인자들에게 인륜도덕은 그리 대단한게 아니다.

이런 분위기인지라 인자 마을의 소년들은 대개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철접이 알기로 용차랑은 여전히 여자를 모른다.

형인 용태랑은 지나치게 결벽한 성격이라 첫 경험이 늦었었다.

반면 용차랑은 이가류 종가의 자손답지 않게 겁이 많고 순진하여 여자들을 무서워했다.

이가류 내의 여자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종가의 막내아들인 용차랑을 유혹하려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도발을 할 기미만 보여도 용차랑은 기겁하며 도망치곤 했다.

계집아이보다도 여린 성품의 소유자인 용차랑에게 여자들은 기승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로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용차랑이 무서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 한명의 여자가 철접이다.

철접 역시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나 나는 용차랑을 동생이 아니라 조카나 아들인 듯이 대해왔다.

 

(내가 직접 지로에게 경험을 시켜주었어야 했을까?)

철접은 조금 아쉽고 후회가 되는 기분이었다.

인자들의 세계에서는 남매가 부부가 되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이다 보니 바깥세상의 인간들과 인연을 맺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낯을 많이 가리고 겁도 많은 용차랑은 어쩌면 철접에게 은밀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가류의 나이 많은 여자들의 유혹과 호의를 뿌리쳐 왔을 테고...

하지만 철접은 어린 동생 용차랑과 도저히 마지막 일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철접은 이가류 내의 일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용차랑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도맡아 키워왔었다.

열두 살이나 어린 동생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전적으로 용씨일족의 장녀인 철접의 몫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과 민망한 짓을 할 용기가 철접에게는 없었다.

(지금까지야 그랬지만 어차피 내일 이맘때면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을 몸뚱이... 지로의 소원을 들어 줄 걸 그랬나?)

철접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조카나 아들같이 키워온 어린 동생이 창녀를 상대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후회의 감정이 밀려든다.

(결국 나는 처녀 귀신이 될 운명이었다.)

철접의 차가운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이가류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철접은 아직 처녀의 몸이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여자로서의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체가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몸뚱이를 아무 사내에게 내맡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접은 서른 살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사내를 모르는 처녀의 몸이다.

물론 처녀로 죽는 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다.

다만 내일이면 죽어서 썩어질 몸뚱이임에도 사랑하는 동생의 소원을 들어줄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바로 그때였다.

"절색(絶色)이다!"

누군가의 탄성이 심란해하는 철접의 귓전을 천둥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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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정전야(出征前夜)

 

 

 

"내일, 우리 모두는 확실하게 죽는다."

너무도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인물은 아직 젊은 여인이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흰 반면 가느다란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목구비는 추호의 불균형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조각이 살아서 말을 하는 듯하다.

한 쌍의 눈은 가늘고 길다.

그런가 하면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고요하며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어둑한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여인의 눈빛에 동요가 떠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여인의 별호는 테츠노초우, 즉 철접(鐵蝶)이다.

오랜 세월 동영(東瀛;일본)의 밤을 지배해온 인자(忍者)들의 양대 파벌 중 이가류(伊賀)의 당대 당주(堂主)가 그녀다.

 

본래 이가류의 당주는 용사무(龍司戊)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가류는 삼 년 전에 벌어진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내분에 휘말려 멸문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용사무는 장남 용태랑(龍太郞)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가류 인자들은 용사무의 장녀이며 <강철(鋼鐵)의 나비()>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용천파(龍千波)를 자신들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게 되었었다.

 

"황제가 표적인 이상 척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역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철접 용천파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빛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가류 내에서도 엄선한 인자들답게 두려움 따위는 목숨에 대한 미련과 함께 온전히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곳은 동영이 아니라 이역만리 중원이다. 초목개병(草木皆兵)!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철접 용천파의 말에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인 그녀의 말 대로 이곳은 자신들의 고향 동영, 즉 일본(日本)이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주인을 죽이려는 처지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희망일 뿐이다.

"우리가 내일 죽는 대신 우리의 피붙이들은 막북(漠北)의 새로운 터전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고 맡겨진 바의 소임을 완수하기 바란다."

당주인 철접의 훈시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철접이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한다.

사람들도 철접을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을 한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이며 내일 치를 거사에 대한 결의의 표현이다.

절을 하는 여()인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지만 우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철접이 일어나 밀실을 나갔다.

당주가 자리를 뜬 밀실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밀실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접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사내들의 짐승같은 신음이 천둥치듯 들려온다.

시노마츠리... <죽음()의 축제()>.

철접 자신은 혐오한다.

하지만 다른 인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는 광란의 축제가 밀실에서 밤새 이어질 것이다.

 

전란(戰亂)이 끊일 날 없는 동영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여자를 품게 해주는 전통이 있다.

여자를 품지 못하고 죽으면 그 미련 때문에 혼백이 성불(成佛)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인자들이 임무에 나서는 것도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인자들 역시 출정전야(出征前夜)에는 원하는 대로 여자를 품을 수 있다.

물론 여자 인자들의 경우는 남자를 구해 안기는 것이 전통이다.

극한의 쾌락에 몸을 맡기고 나면 목숨은 하찮게 느껴지게 되고 그 결과 두려움을 잊은 채 온전히 임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욕정을 해소할 대상을 밖에서 구하여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역만리 중원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상대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자칫 자신들이 내일 치를 막중한 거사가 들통 날 위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가류의 남녀 인자들은 자신들끼리 뒤엉켜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남녀 인자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쾌락에 빠져들고 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목숨들이다.

인륜도 도덕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본능을 채워줄 대상뿐이다.

 

(하늘 아래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다지만 우리네 인자들만큼 비참한 삶이 또 있을까?)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소음을 들으며 철접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자들의 도구가 되어 개처럼 부려지다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이 인자들의 숙명이다.

자신의 아버지 용사무와 오빠 용태랑 역시 권력에 눈이 먼 한 인간의 욕망에 휘둘렸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았었다.

그리고 가엾은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가 당한 처절한 최후를 떠올리면 지금도 슬픔과 분노가 전율이 되어 온몸을 훑고 지나는 철접이었다.

 

삼 년 전, 그녀는 중상을 입은 채 어머니와 함께 막부의 관군들에게 쫓겼었다.

이윽고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어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철접을 숨겨두고 관군들을 유인해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군들에게 사로잡힌 어머니는 철접이 숨어있는 근처로 끌려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혔으며 마침내 손가락과 발가락이 차례로 잘려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내 딸이 숨어있는 곳은 발설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악에 바친 관군들은 어머니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었다.

어머니는 이미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리고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유린당하며 어머니는 도살장에 끌려와 도축당하는 짐승같이 울부짖었었다.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때마다 부러진 뼈들이 장기를 찌르고 생살을 찢어댄 때문이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하는 어머니와 숨어있는 철접의 시선이 몇 번인가 교차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린당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너무도 다정하여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자 관군들의 만행도 끝이 났다.

하지만 관군들이 떠난 후에도 철접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흔적을 남겼다가는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때의 형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처참한 몸뚱이를 남겨두고 철접은 피눈물을 흘리며 현장을 떠나야만 했었다.

 

다른 인간의 도구가 되어 결국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하는 것이 인자의 삶이고 숙명인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다른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내 의지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어머니의 처절한 죽음을 떠올린 철접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며 밀실의 문 앞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여자 인자들의 흐느낌과 남자 인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진다.

 

***

 

"...!"

철접의 고요하던 눈동자에 오늘 밤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곳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은신하고 있는, 오십여 년 전에 버려진 황폐한 장원의 입구였다.

"... 미안해 누나."

철접의 평정심을 깨트린 것은 이제 십오륙 세쯤 된 소년이다.

얼굴이 계집아이같이 해맑고 눈이 유달리 커서 겁먹은 사슴을 연상케 하는 그 소년은 바로 철접의 하나뿐인 핏줄 용차랑(龍次郞)이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용차랑의 몸과 의복은 먼지에 덮여있고 땟국물로 얼룩져 있다.

용차랑의 뒤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수천 리 밖 막북(漠北)에 있어야할 어린 동생...

용차랑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을 본 철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절망감을 느꼈다.

유일한 핏줄인 이 아이가 예기치 않게 나타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이가류 종가(宗家)의 후손으로 안전한 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어. 나도 영락제(永樂帝)를 척살하는 살행(殺行)에 참가할 기회를 줬으면 해."

용차랑은 열두 살 위인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철접의 시선은 용차랑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당주님."

여든 살을 바라보는 늙은 인자 시바타(紫田)가 철접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연다.

"도련님께서 혼자라도 북경(北京)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타는 당장 할복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철접은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용차랑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한번 세운 뜻과 고집은 꺽은 적이 없는 아이다.

다시 막북으로 돌아가라거나 내일 있을 거사에서 빠지라고 해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거나 따돌리려고 시도했다가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내일의 거사를 무산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따라와라. 같이 갈 곳이 있다."

철접은 한숨을 쉬며 폐허가 된 장원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용차랑과 늙은 인자 시바타가 눈치를 보며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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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전 공지>

무림일기는 원스토어, 미스터블루, 리디북스, 판무림등에 연재중인 신작입니다.

연재가 진행중인 작품이라 블로그에 많이는 올리지 못합니다.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이라 블로그에 올리는 데 제약이 있기도 하고...

맛보기 삼아 앞 부분을 일부 올릴 예정입니다.

물론 전체 연령이 열람가능하도록 내용은 수정이 될 것입니다.

연재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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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무림일기 -武林日記

 

 

 

 

서장(序章)

 

 

종말(終末)과 시작(始作)

 

 

 

시뻘건 불길이 뱀의 혓바닥처럼 사방에서 넘실거린다.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던 실내는 이미 불길에 삼켜져 용광로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보좌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 엄정(嚴正)한 자태를 추호도 흩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화려한 궁장과 구름같이 틀어 올린 첩지머리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으나 여인은 마치 남의 일인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연왕(燕王)의 왕사(王師) 도연(道衍)!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원한다면 본후(本后)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스물네 살에 불과한 젊은 나이지만 여인의 말에는 추상같은 위엄과 태산의 그것같은 무게가 서려 있다.

"만일 거부하거나 사소한 토라도 달 경우 홍무(洪武)폐하로부터 전해진 명조(明朝)의 국새(國璽)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길과 함께 실내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연기 속에서 여인의 눈이 청옥(靑玉)처럼 서늘한 빛을 발한다.

"아미타불! 천한 중이 어찌 감히 존귀하신 황후(皇后)마마의 성지를 거스를 수 있겠소이까?"

도연은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나이 이미 예순 일곱이지만 눈앞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손녀뻘의 어린 여자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진다.

단지 그녀의 신분이 황후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 가냘픈 육신 안에 품고 있는 단호한 결기(決氣)는 도연의 육십칠 년 삶을 되돌아봐도 비견될 대상이 없는 정도였다.

"이 아이를... 세상이 아직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 핏덩이를 지켜주겠다고 신불(神佛)에 대고 맹세하라. 그리하면 본후도 전국의 옥새를 내놓겠다."

여인은 자기 발치에 놓인 상자를 지나가는 눈길로 가리키며 말했다.

뚜껑이 열려있는 상자 안에는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가 뉘어져 있다. 태어난 지 하루 이틀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듯 핏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핏덩이다.

"신불에 기댈 것도 없이 빈승 도연의 명예를 걸고 황자(皇子) 아기씨를 험한 인심(人心)으로부터 지켜드리겠소이다."

"과연 그대가 약속을 지키는지는 혼령(魂靈)이 되어 지켜보겠다."

도연의 다짐을 들은 여인은 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근에 출산을 한 몸인데다가 옷과 머리에 이미 불이 옮겨 붙은 상태임에도 그녀의 운신(運身)에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 막내아들을 서달(徐達)의 막내 딸 서묘금(徐妙錦)에게 보여주면 국새를 내줄 것이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건문제(建文帝)의 황후 마은혜(馬恩慧)는 넘실거리는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마치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듯이...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마황후의 몸은 잠깐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내 도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난(靖難;나라의 위난을 평정함)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연왕 주체(朱棣)의 군세에 금릉(金陵)이 함락 당하던 날 자금성(紫金城)의 깊은 곳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오직 두 명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거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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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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