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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책 파는 소녀

 

 

겁쟁이가 곽범을 데리고 간 곳은 작고 낡은 책방이었다.

쌓여 있는 책들도 헤어지고 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주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책을 보다가 일어섰다.

"책 사게요?”

목소리가 고왔다.

곽범은 갑자기 가슴이 떨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열여섯, 일곱쯤으로 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복숭아 같은 분홍빛 뺨에는 보드라운 솜털이 있었다.

곽범은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에는 헌 책 밖에 없어요. 대신 요새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어요.”

소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찾는 책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찾아 줄게요.”

곽범은 그 순간 새소리들이 정말 싫어졌다.

새소리는 아무리 사람 비슷하게 해도 긁히는 소리나 카랑카랑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그에 비해 소녀의 음성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봄바람 같기도 했다.

올이 아주 가는 그물에라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와 눈이 부딪혔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부자 되는 책을 사려고...”

"책을 사서 부자가 되려고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부끄러워져서 땀이 났다.

왜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다.

소녀가 가까이 와서 좋은 냄새까지 났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69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권에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고 쓰여 있다고...”

말을 하긴 해도 두서가 없다.

“아! 태사공서(太史公書)!”

소녀는 용케 알아들었다.

"사기(史記)라고도 불리는 태사공서의 마지막 편 화식전 말미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 책 있어요?”

살았다 싶어진 곽범이 급히 물었다.

“저희 책방에도 있긴 하지만 전권은 아니에요. 여러 권이 빠졌어요.”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사기를 읽는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을 텐데... ”

소녀의 고개가 귀엽게 갸웃거렸다.

"부자 되는 책 아닌가요?”

곽범은 어리둥절해졌다.

“부는 복에 달린 거예요.”

소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치농고아 가호부, 지혜총명 각수빈, 열자(列子)라는 분이 지은 책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리석고 귀가 먹고 병들거나 말을 못하는 사람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고,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도 가난할 수 있다는 뜻이죠.”

곽범이 되물었다.

"사기라는 책에 이런 말도 있다고 들었어요.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그러면 사기와 열자의 주장은 반대되는군요.”

소녀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태사공과 열자는 모두 훌륭한 분들이신데 주장이 반대일 리 있겠어요? 그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랐겠지요.”

곽범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상과 상황이 다르다고 말이 달라지다니...

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책을 읽는다고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은 쉽든 어렵든 제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살아요. 그리곤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소녀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는 곽범에게 물었다.

"손님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해요?”

곽범은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책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많아요?”

소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곽범은 말없이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학문은 하나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소녀가 인내하는 기색을 하며 말했다.

"하나를 알려고 공부하면 두 개, 세 개를 모른다는 것만 알게 되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거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대부분이고.”

"그럼 왜 책을 읽고 배우죠?”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고 생각에 깊이를 만들어줘요. 똑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말하더라도 깊이가 더 해져서 가치가 생겨요.”

"아!”

곽범은 감탄했다.

명쾌한 설명이다.

소녀의 말에는 깊이와 더불어 설득력이 있다.

소녀를 존경의 시선으로 보았다.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모르지요. 혹시 손님은 사기를 읽어야 부자가 될 사람인지도요. 복은 엉뚱한데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곽범은 속으로 정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인가요?”

소녀가 웃었다.

"식당 아니고는 어린 여자를 점원으로 안 써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점원이 되고 싶어요.”

소녀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곽범은 조금 벌린 소녀의 얇고 여린 입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서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빠르게 말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소녀는 곽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채용은 안 되겠어요. 손님은 무슨 일을 칠 것 같아 보여요. 책값 없으면 가주세요.”

 

곽범은 쫓겨났다.

낙담해서 객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겁쟁이가 말했다.

"그래도 사기꾼은 아니다. 그 애.”

 

***

 

객점에 도착하자 입맛 돌게 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의 책방에 들르기 전이었다면 별 생각없이 사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소녀의 얼굴만 눈앞에 그려졌다.

소녀와 뺨을 부비고 싶어졌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도 입을 맞추고 싶다.

 

***

 

밤이 되자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들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겁쟁이가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침상에 멍하니 누운 곽범은 새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전에 몰랐던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을 해왔다.

지금은 달랐다.

두 가지 생각이 뒤섞이고 끊이지 않는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녀에 대한 생각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소녀의 책방으로 달려갔다.

 

***

 

책방 문을 열던 소녀는 곽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왜 왔어요?”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곽범은 소녀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밤새 소저만 생각했어요.”

소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곽범은 소녀에게 다가섰다.

소녀가 경계하며 물러섰다.

"물러나요. 소리치겠어요.”

곽범이 말했다.

"책 하나 줘요. 아주 오래되고 값이 싼 걸로.”

소녀가 안도하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애써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무 책이나 사는 건 의미 없어요. 읽고 배울 책을 사야해요.”

곽범은 한쪽에 있는 붓과 벼루, 연적이며 종이 따위를 가리켰다.

"저것들도 살게요.”

"책만 읽을 게 아닌가 봐요.”

소녀는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곽범의 뚱한 말에 소녀는 멈칫했다.

차가운 말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서늘해졌다.

"값이 싼 건 시집밖에 없어요. 글자가 적고 얇으니까요. 골라보세요.”

몇 권의 낡은 시집을 꺼낸 소녀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곽범은 눈에 띄는 책 하나를 손에 들었다.

소녀가 물었다.

"보고 고르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나중에 다 사서 읽을 거니까. 지금은 싼 것부터 읽는 거고.”

곽범의 말에 소녀가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언제 돈 벌어요?”

"소저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곽범은 돈을 꺼내며 대꾸했다.

소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만 애처럼 하는가 했더니 행동도 애 같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곽범도 자기 말이 예닐곱 살 어린애 말과 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이후로 사람들과는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범은 산 붓과 벼루 등을 챙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아요. 난 지금도 짝짓기 할 수 있어요.”

소녀가 충격을 받고 물러섰다.

곽범은 마치 이겼다는 듯이 소녀를 한 번 보고는 책방을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겁쟁이가 귀에 대고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짝짓기 할 수 있다고 한 거?”

"그거야 할 수 있겠지. 우린 두 살만 돼도 다 하는 건데. 내 말은 책하고 벼루로 어떻게 돈 벌거냐는 거야.”

"이걸로 금방 돈 못 벌어. 사람들이 책에 뭘 써놓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 인간들이 공들이는 건 뭐든지 좋은 거잖아.”

곽범도 집이 불타기 전에 글을 배웠고 몇 권의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모두 아이를 바르게 훈육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그나마 기억조차 희미했다.

책다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돈 벌어야지. 그래야 새장도 새로 만들 수 있으니까. 어젯밤에도 열여섯 놈이 더 왔단 말이야.”

겁쟁이가 말했다.

"돈 벌 수 있어.”

곽범은 장담했다.

하지만 겁쟁이는 영 못 미더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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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부자가 되는 법

 

 

깊은 밤이었다.

곽범은 침상의 포근함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들리는 새소리가 신경 쓰여 눈을 떴다.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소리였다.

"문 열어봐. 문 만 열면 아무 해코지도 안할게.”

"들어오기만 해봐라. 곽범이 잡아먹고 말 걸?”

겁쟁이가 창호를 사이에 두고 다른 새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말 좀 해줘. 난 원래 떠날 생각이 없었어. 그냥 좀 날고 싶었을 뿐이야.”

"왜? 내가 좋은 방에서 맛있는 거 먹으니까 부러운 거 아니고? 꺼져. 곽범은 내거야.”

새 한 마리가 돌아왔다.

겁쟁이가 못 들어오게 하는 중이었다.

"곽범이 그랬어. 나 외엔 다 귀찮다고. 성가시게 굴면 잡아먹어버린다고 했어.”

겁쟁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야야 목소리 좀 낮춰! 곽범 깨겠다.”

겁쟁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창호 밖의 새가 애원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곽범이 물었다.

겁쟁이가 놀라서 날개를 파닥거렸다.

창호 밖의 새는 달아날 준비를 하며 대답했다.

"냄새 맡고. 나는 냄새 잘 맡아.”

"냄새 못 맡는 새가 어디 있어.”

겁쟁이가 핀잔을 줬다.

곽범은 대부분의 새가 냄새를 잘 못 맡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탁양앵무가 특이한 거다.

"잘 데가 필요해. 먹을 건 내가 알아서 구할 게.”

창호 밖의 앵무가 애원했다.

"조롱이 필요하면 새장수한테 잡힐 거지 여기는 왜 와? 새장수는 먹이도 줄 거야.”

겁쟁이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통하는 무식한 놈하고 어떻게 살아.”

"그건 네 팔자지. 다들 그렇게 살아.”

“개자식!”

겁쟁이의 코웃음에 창호 밖의 앵무가 욕을 했다.

덜컹

곽범이 창을 열었다.

달아날 듯하던 새가 곽범의 표정을 보고는 방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창을 닫기 전에 두 마리가 더 날아왔다.

그놈들은 멀찍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둥지가 필요해. 알을 아무데나 낳을 수가 없잖아.”

그놈은 암놈이었다.

"우리 중에 반은 여자야. 이제 곧 알을 낳아야 한다고.”

"그전에는 알 안 낳았잖아?”

곽범이 물었다.

암놈 하나가 화를 냈다.

"빛도 없고 먹이도 물고기밖에 없는데서 어떻게 알을 낳아?”

그 암놈은 까칠했다.

감히 곽범한테 이렇게 소리친 경우는 그간 없었다.

곽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는 이런 말 없었잖아.”

"그때는.”

암놈이 말하다가 멈칫한 후에 다시 말했다.

"짝짓기 하기 전이었어.”

다른 암놈이 말했다.

"젠장... 막 하늘로 올라가니까 기분이 죽이더라고. 오랫만이잖아. 그렇게 날아본 게. 그래서 막...”

"막 뭐?”

"막 달려들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난리가 아니었어. 신나게 한 바탕했더니 알집이 무거워지더라고.”

곽범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 겁쟁이가 말했다.

"새잖아. 당연한 거야.”

암놈이 새침하게 받았다.

"봄이잖아.”

곽범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화하는 법이며 기르는 법이 적혀있다.

하지만 곽범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동굴에 있을 때는 무공보다 재미난 게 없었다.

"나도 새장수 해야 할까?”

곽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해. 너도 짝짓기 해야지.”

합류한 놈들 중 한 놈이 별 생각없이 말했다.

곽범은 그놈은 노려보았다.

그놈은 움찔해서 눈길을 피했다.

그리곤 겁쟁이한테 곽범이 왜 그러는지를 눈으로 물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이판하고 달라. 사람 같이 살고 싶은 가봐.”

"새 주제에 사람은 무슨.”

암놈 하나가 말하다가 부리를 닫았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 맞네. 같이 말하다 보면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려.”

기막힌 소리였지만 납득이 되었다.

제일 먼저 왔던 새가 곽범에게 애원했다.

"네가 우리 주인해라. 응. 말 잘들을 게. 원하면 알도 나눠줄 수 있어.”

겁쟁이가 생각을 바꿨는지 거들었다.

"품에 날아든 새는 쫓는 법이 아니라더라.”

새가 할 법한 소리도 아니었다.

"알아서 해.”

귀찮아진 곽범은 침대에 가서 누웠다.

허락받은 앵무새들이 깃털 날리지 않게 통통 뛰어와서 침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새들은 겁쟁이가 올라앉았던 장대에 나란히 앉았다.

잠이 깨버린 곽범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사람답게 사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별 거 없었다.

좋은 것으로 가득한 인간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는 것이었다.

예쁜 여자들도 많이 거느리고 싶었다.

 

***

 

아침이 밝은 후에 보니 방안은 새 노린내로 가득했다.

열었다가 대충 닫은 창문으로 십 여 마리가 더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놈 밑에는 새똥이 떨어져 있었다.

곽범이 노려보자 그놈이 변명했다.

"자다가 깜박했어. 새장인줄 알고...”

새들은 겁쟁이만 남고 나머지는 곽범이 방을 나설 때 창밖으로 날아갔다.

 

방을 나서기 전에 몸을 씻고 동경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어 띠로 묶었다.

이년이나 빛을 보지 않고 살아서 피부가 분칠한 듯 하얗다.

피부는 희지만 새들과 싸우면서 철포삼을 익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흰 피부가 올록볼록해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흰 돌이나 옥을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것같다.

아랫층에 내려가니 객점 주인이 보고 말했다.

"마마를 아주 곱게 앓았구만.”

곽범은 맛있는 냄새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주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다른 손님이 먹는 음식을 가리켰다.

"저거 주세요.”

"소고기 라면?”

"예.”

곽범은 빈자리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여러 가지 요리 냄새가 황홀했다.

행복했다.

소고기 라면이 나왔을 때도 냄새부터 실컷 마신 후에 먹었다.

곽범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어쩌면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어요?”

"다른 것도 다 맛있어? 이것도 먹어볼래?”

곽범에게 돈이 있는 줄 아는 주인은 거푸 권했다.

곽범은 주는 대로 먹었다.

겁쟁이도 식탁 위의 음식을 주워 먹었다.

 

***

 

아침을 먹는다는 게 점심 때가 될 때까지 먹어 버렸다.

곽범은 자기도 객점을 가져서 먹고 싶은 건 다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객점을 차릴 돈이 필요했다.

 

시장과 점포를 돌면서 어느 곳에 가든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 갖고 싶었다.

노리개들은 예뻤다.

붉고 푸른 비단 옷들은 매혹적이었다.

호통 치면서 일꾼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니 사람을 부리고 싶었다.

멋진 마차를 타고 가는 여인을 보니 마차 채로 다 가지고 싶었다.

"다 좋고 다 가지고 싶지?”

겁쟁이가 어깨에 올라 귀에 대고 조잘거렸다.

"촌놈인거 티 다나.”

"다 갖고 싶다.”

곽범은 솔직하게 말했다.

"도둑이나 강도는 싫다며? 그럼 부자가 되면 돼. 아니면 높은 벼슬아치가 되거나.”

겁쟁이가 말했다.

곽범은 머리를 저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곽범은 성 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들이 하는 일과 돈이 오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 중에서도 차림새가 좋고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살폈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한 두 명이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무리를 따라가니 음악소리 흘러나오는 기생집이나 요리집이 나왔다.

밖에서 듣기만 해도 흥겨웠다.

예쁘게 분단장한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애교부리는 콧소리가 가슴을 들끓게 했다.

겁쟁이는 곽범이 기생집에 들어갈까 봐 막았다.

거기 들어가고 나면 가진 돈 홀라당 다 털릴 거라며.

 

사람들은 따라 다녀 보니 그 중 반 이상의 행선지가 책방이었다.

그 바람에 책방 앞을 자꾸 어슬렁거린 꼴이 되었다.

곽범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람이 되려면 배워야 한다.

부자가 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배워야 한다.

책방 앞을 떠나지 않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간혹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들이 보따리를 갖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오는 그 사람들에게 보따리는 없었다.

(아. 가난해서 책을 팔러 나오는 사람이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책을 사서 부자 되는 법과 높은 사람 되는 법을 배우려 했다.

그랬는데 책으로 배웠음에도 가난해져서 책을 파는 사람이 있다.

뭔가 잘못 되었다.

자칫하면 돈만 날려먹을 것 같았다.

책을 읽기만 하면 부자가 되어 즐겁게 살 거라 생각했었다.

그 계획에 먹구름이 끼어버렸다.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곽범은 칼이 눈앞에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되지 못하고 돈만 날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쉽사리 책방 앞을 떠나지 못했다.

부자가 되려면 글을 읽고 배워야 한다.

더 좋은 방법은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책방으로 들어갔다.

"부자 되는 책 있어요?”

나이 지긋한 점원에게 대뜸 물었다.

점원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곽범의 얼굴을 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책은 없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말한 책은 있단다.”

점원의 말에 곽범의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점원은 책 한 권을 골라 펼치더니 한 구절을 읽었다.

"부를 일구는 데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도 달아난다.”

곽범은 매우 기뻤다.

옳은 말이라는 걸 듣자마자 알았다.

"그 책을 사고 싶어요.”

"이 책은 69권 중의 마지막 권이야. 전부 다 사야해. 이것만 봐서는 아무 소용없어.”

점원은 책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예요?”

곽범은 책값을 물었다.

"책은 비싸다. 얼마 있는지 말하면 그에 맞춰 책을 주마.”

점원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기네.”

곽범은 이마를 찌푸렸다.

점원이 의외라는 듯이 곽범을 다시 보았다.

곽범은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겁쟁이한테 들은 대로라면 이판은 겁탈과 사기, 방화를 밥 먹듯 하던 놈이었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 했다.

사부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기를 키웠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팔 년 넘게 가르친 제자를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생긴 건 촌놈인데 영 촌놈은 아닌 모양이네.”

점원이 웃었다.

"얼마 있어? 싸게 줄 테니 말해봐.”

곽범은 주머니에서 아침에 밥값으로 썼던 만큼의 돈을 꺼냈다.

"겨우? 이거면 한 권도 못줘.”

점원이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가 곽범의 귀에 대고 제제거렸다.

"그냥 가자. 허여멀건 놈들이 말은 더 번지르르해. 넌 저놈을 말로 못 이겨.”

곽범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돌아 나왔다.

점원 뒤에서 돈 더 가지고 오라고 소리쳤다.

겁쟁이가 말했다.

"여기 말고 다른데도 있어. 전에 지나가면서 한 번 본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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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사람이구나.

 

 

봄이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산비탈은 진달래와 철쭉이 뒤섞여서 울긋불긋했다.

숲을 벗어나 길로 들어섰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갈림길에는 인적이 없다.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새로 돋은 풀을 따라가며 뜯었다.

곽범은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눈길이 자꾸만 십지암쪽으로 향했다.

팔년을 산 곳이다.

정이 들었다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까?”

여전히 겁이 나서 새장으로 못 돌아가는 겁쟁이가 새소리로 물었다.

"도망 안가. 절대 안가.”

즉답이 없자 겁쟁이는 거듭 다짐했다.

곽범은 허락하고 길가의 바위에 앉았다.

산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사부를 따라 왔던 길이다.

그 길 아주 먼 어디에는 자신이 태어난 집도 있다.

물기 없는 바람과 온화한 햇살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본 적 없는 낮잠이 밀려왔다.

봄풀 냄새와 여린 나뭇잎이 뿜어내는 초목의 숨결이 폐부를 씻었다.

새들도 햇살을 즐겼다.

새장 안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햇볕을 쬐려 다투었다.

"나는 사람이구나.”

곽범은 짧아진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을 보며 생각했다.

새들과 달리 자신의 팔에는 깃털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경서의 내용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꾸지람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났다.

몸은 자라서 어른처럼 커졌는데, 그간의 날들은 하룻밤의 꿈인 듯 여겨졌다.

곽범은 바위에서 일어나 새장 문을 열었다.

"가라.”

"어디로?”

새 한 마리가 뚱하게 물었다.

"가고 싶은 대로.”

"집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다른 새가 물었다.

곽범은 공력을 돋우어 새장을 뜯어버렸다.

콰드득

철사를 꼬아 만든 새장이 짚이나 왕골인 듯 찢어졌다.

새들은 곽범이 새장을 우그러뜨려 땅에 묻는 동안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어떤 새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동동 뛰었다.

"새장이 얼마나 좋은데. 우리는 새장 없으면 잠도 못자.”

보통의 새들에게 새장은 가두는 도구다.

동시에 천적들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다.

그러나 범도 뜯어먹는 탁양앵무들에게는 천적이 없다.

새장 없으면 못 잔다는 건 침대 없으면 못 잔다는 투정과 같은 소리다.

"조마조마해서 잠이 안와.”

한데서 어떻게 잘 수가 있어?”

볼 매인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새가 불만인 건 아니었다.

"조금만 날고 올게.”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눈치 보던 놈들 여럿이 뒤따랐다.

그들의 신나는 비행이 다른 새들을 자극했다.

후두둑 쏴아

본능에 이끌린 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곽범은 겁쟁이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새장이 없으니 짐도 없다.

품에는 금왕경과 돈주머니만 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은 제법 거뭇하다.

커진 몸에 걸친 옷은 낡고 깡동하다.

영락없는 미친 사람 행색이다.

"다 어디 갔어?”

겁쟁이가 돌아와서 물었다.

"떠났다.”

"잡아먹은 건 아니지?”

겁쟁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밖에는 먹을 거 많아.”

"... 난 또.”

겁쟁이가 안도하며 정찰 보고를 했다.

거기엔 누가 살고 있었어. 빡빡머리 중이야.”

곽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부다.

사부가 돌아와 있다.

사부는 올 때마다 얼굴이 바뀌었었다.

진짜 중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십지암에 머물 때는 승복을 입은 중이었다.

사부에게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먹이고 입히고 무공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죽이려 했다.

사부와 제자로서의 인연은 그때 끝이 났다.

겁쟁이가 주위를 돌면서 물었다.

"나도 가야해?”

".”

"난 같이 가면 안 돼?”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쟁이는 한 번 새장을 나온 후 계속 밖에 머물렀다.

곽범의 비위를 맞추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들었다.

겁쟁이가 다시 물었다.

"따라가면 나 잡아먹을 거야?”

"금수도 정이 있나?”

곽범은 피식 웃었다.

마음이 한결 같기는 금수가 사람보다 나을 걸. 원앙이나 기러기는 평생 짝을 배신하지 않아.”

겁쟁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같이 가자. 넌 세상 물정도 모르잖아. 난 잘 알아.”

뻐기는 겁쟁이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곽범은 순순히 인정했다.

겁쟁이가 매우 좋아했다.

높이 날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앞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와서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수다도 떨었다.

곽범은 걷는 것이 좋았다.

오랫동안 걷지 못했다가 땅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더 좋았다.

 

***

 

큰 길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겁쟁이는 새소리로만 말했다.

곽범은 거지꼴이다.

사람들은 새 한 마리 데리고 있는 소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곽범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마다 살펴보았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곽범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뭉클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도 그들 중 한명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계속 걸어서 저녁 무렵에 하호성에 도착했다.

곽범은 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 묻혀서 성문을 지났다.

겁쟁이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옷부터 사서 입어. 거지들이 동무하자 들겠다.”

"어디로 가야하지?”

"저 앞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포목하고 옷 파는 상회들이 있어.”

겁쟁이는 하호성을 잘 알았다.

곽범은 겁쟁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옷 사시게?”

점원이 곽범의 행색을 못마땅해 하며 물었다.

".”

"돈은 있나?”

곽범은 돈이 든 주머니를 툭 쳐서 소리를 냈다.

점원은 곽범의 키에 맞춰서 잿빛 장포를 건네주었다.

"이거면 맞을 것 같은데.”

겁쟁이가 새소리로 말했다.

"얼만지 물어봐.”

 

***

 

곽범은 겁쟁이의 도움으로 바가지를 쓰지 않고 신발도 샀다.

입고 있던 작아진 옷은 팔아서 빗과 거울, 머리에 두를 건을 샀다.

그리고는 객점을 찾아갔다.

가로에 있는 주루와 객점에서 풍기는 음식내음이 곽범의 혼을 뺐다.

그러나 객점에 들어가서는 요리 이름을 몰라서 만두만 시켜 먹었다.

황홀해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객실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인간 세상에 온통 좋은 것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는 곽범이 탁자에 놓은 돈주머니를 펼쳐서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아껴 쓰면 세 달은 버티겠다. 다 떨어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해.”

"어떻게?”

묻고는 웃었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새한테 돈 버는 방법을 묻는 건 우스웠다.

겁쟁이가 돈주머니를 조이고 침대로 나아왔다.

"방법이야 많아. 예전에 이판이 했던 것처럼 새를 파는 게 제일 좋고.”

이판은 곽범에게 죽은 새장수의 이름이었다.

"수입이 괜찮아. 하루 한 두 마리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어. 우리처럼 예쁜 새는 비싸서 부자들만 사가거든.”

"이판이 너희들을 팔았어?”

"당연히 팔았지. 새장수인데.”

팔려갔었는데 어떻게 이판과 계속 함께 있었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팔려가서 좀 놀다가 죽은 척하면 묻거나 갖다버리거든. 그때 이판에게 다시 돌아가는 거야. 금방 돌아가야 할 때는 새장을 부수면 되고...”

곽범은 그림이 그려졌다.

시장에서 새를 팔면 그 새가 돌아오고,

다시 팔고 다시 돌아온다.

그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사기네.”

"그게 싫으면 내가 다른 새들 잡아오면 돼. 넌 그걸 팔고. 다른 새들은 밤눈이 어두워. 숲에 들어가서 움켜쥐고 오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해.”

곽범은 딱히 내키지 않았다.

새장수가 했던 짓을 따라하는 것 같아 꺼리낌이 있었다.

겁쟁이가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이가 있으면 새 점을 치는 것도 괜찮은데. 어려서 수입이 적을 거야.”

"그런 거 말고는?”

겁쟁이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기 부잣집들 몇 군데 알아. 밤에 몰래가서 패물 같은 거 슬쩍 가져오는 것도 괜찮아. 갔다 올까?”

"그건 도둑질!”

"새한테 도둑질이 어디 있어? 보이면 따먹고 아무거나 가져와서 둥지에 깔고 하는 거지.”

곽범은 침대에서 몇 번 뒹굴고 일어나서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평평한 마루다.

겁쟁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기억났다. 어릴 때 바닥이 시원해서 뒹굴다가 옷 더러워진다고 혼났다.”

"그래서?”

"이렇게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방에서 살고 깨끗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잘못하면 혼나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거야.”

"혼나야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그러면 나도 사람이다. 얼마나 혼이 많이 났는데.”

겁쟁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투였다.

"뭐할지 천천히 찾아보겠다는 말이야.”

곽범의 말에 겁쟁이는 한숨을 쉬는 시늉을 했다.

"넌 어느 쪽이야?”

"뭐가?”

"네가 좋아하는 건 음식이야 여자야 돈이야? 아니면 좋은 집이야?”

곽범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이판은 여자를 제일 좋아했어.”

겁쟁이가 말했다.

"금왕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새장수였다더라. 새는 돈 많고 예쁜 여자들이 주로 사가거든. 여자들은 예쁜 새하고 놀면 더 예뻐 보인다는 걸 알아.”

"그렇구나! 예쁜 여자들을 매일 보겠다.”

곽범의 음성이 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길이 좁아졌다.

겁쟁이는 곽범의 얼굴을 가까이 와서 보며 말했다.

"이판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오면 한 쌍 중에서 꼭 한 마리만 팔았다더라. 그런 후에 밤에 남은 한 마리만 들고 나가는 거야. 짝을 부르면서 그 새가 울면 팔려간 새가 듣고 같이 울어.”

"! 그러면 그 새를 몰래 찾아오는구나.”

"... 바보야. 그럴 거면 예쁜 여자한테만 한 마리를 팔 이유가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여자가 이판의 짝짓기 상대가 되는 거야.”

겁쟁이가 말을 이었다.

"이판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가 있는 방에서 먼 곳에 불을 질러. 사람들이 불 끄려 몰려갈 때 이판은 그 여자를 붙잡아서 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짝짓기를 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데, 이판은 그때 여자가 제일 예뻐 보인다더라.”

"그거 겁탈이다.”

곽범은 사부를 만나 따라가기 전에 거리를 떠돌았다.

그때 거지들한테 여자가 겁탈 당하는 것도 봤다.

겁쟁이가 말했다.

"이판은 새라니까. 새한테 겁탈이 어디 있어. 마음에 들면 달려들어서 붙잡아 끝장 보는 거지. 놓치면 병신이고.”

여자, 겁탈, 예쁜 미녀.

곽범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저었다.

"난 사람이야. ... 짝짓기에는 그 이상 뭔가 있을 것 같아.”

"있지. 암컷이 알 낳고 새끼 까는 거. 결국 새끼 까는 거면서 인간처럼 별스럽게 구는 것도 없어. 그냥 한 번 하고 알 낳으면 되는 건데.”

"난 별스러워야겠다.”

곽범이 단언했다.

"짝짓기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야. 아까 길에서도 예쁜 애들한테 달려들어서 막 만지고 짝짓기 하고 싶었어.”

"내숭이다.”

겁쟁이는 포르르 날아올라 옷을 거는 장대에 내려앉았다.

평평한 땅은 움켜잡을 것이 없어서 불편했다.

곽범은 겁쟁이와 자기의 차이를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겁쟁이는 금수이고 곽범 자신은 사람이다.

남녀의 차이와 이성에 대해서도 배운 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안다.

옳고 그름을 모두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다.

저절로 아는 게 당연했다.

시비를 가리는 것도 이성에 대한 것처럼 본능이었다.

행동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이 할 짓과 아닌 것이 구분되었다.

더불어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 세상으로 돌아오니 기억났다.

"다듬어야 옥도 그릇이 되고 배워야 사람은 도리를 알게 된다.”

곽범은 자기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숲을 배웠다.

이제는 인간들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한다.

인간들의 세상을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모래나 바위 위에 누워 자도 불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평한 바위가 편했어도 침상의 부드러운 이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동물들의 고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오늘 먹은 만두 한조각보다 못했다.

길에서 본 여자들은 산 중의 어떤 꽃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인간 세상은 무한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곽범은 이 좋은 것을 왜 안 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몸속에 공력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끓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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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신공을 완성하다.

 

 

곽범은 열여섯 살이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도적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혼자 살아남았다.

외갓집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2년 동안 거지로 살았다.

그러다가 사부를 만나 산으로 왔다.

글은 일찍 배워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 세상의 이치 같은 건 몰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되었기 때문이다.

곽범에게 인의도덕이며 군자 같은 말들은 동화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세상과 연결되는 점이 없었다.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것도 밥 먹기 전에 손 씻어야 한다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는 건 부모가 죽었으니 뜬 구름 잡는 소리였다.

곽범이 겪은 2년의 세상살이와 8년의 산중 생활은 똑 같았다.

사람도 짐승이고 짐승도 짐승이다.

도리를 가져다 따질 대상이 아니다.

그냥 서로가 할 일을 하는 존재들이다.

사냥을 하거나 당하거나,

부리거나 부림을 당하거나.

곽범에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도리였다.

무공은 그런 도리들 중에서도 높은 도리다.

말보다 느끼고 깨닫는 게 더 많다.

오히려 말하려면 더 어렵고 힘들다.

 

새장 아래에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금왕경(禽王經)이라는 책이 나왔다.

금왕(禽王) 오신,

날짐승들의 왕이라 불리던 자가 남긴 책이다.

금왕경에는 새를 부리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새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법이 적혀 있는 게 아니다.

새들에게 외공(外功)을 가르치는 법까지 있었다.

특별히 조제한 약을 먹이고 훈련시킨다.

그러면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놀랍도록 단단해진다.

탁양앵무라는 새들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 이유다.

새의 말을 알아듣는 법도 있었다.

새들에게 사람 말을 가르칠 수도 있다.

금왕경의 내용은 읽을수록 신기했다.

또 이상하기도 했다.

곽범이 보기에 금왕 오신의 무공은 형편없었다.

금왕경에는 철포삼(鐵袍衫)의 수련비결이 적혀 있었다.

철포삼은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의 일종이다.

외공들 중에서도 손을 꼽는 절기다.

철포삼 수련비결 뒤에는 금왕 오신의 주석이 달려있다.

그 주석에 오류가 상당했다.

곽범은 머리가 명료해진 덕분에 오류들을 알아차렸다.

주석의 수준으로 보아 금왕 오신의 철포삼 성취는 6성 정도에 그쳤다.

곽범은 철포삼의 구결과 미흡한 주석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런 후에 6성에 그친 금왕의 이해를 확장시켰다.

칠주야에 거쳐 노력한 끝에 철포삼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었다.

 

***

 

"우린 물새가 아니야.”

새장에서 물고기를 쪼던 새 한마리가 들으라는 듯이 제제 거렸다.

"물고기만 먹고는 못 산다고.”

곽범이 말했다.

"나도 그래.”

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새 고기가 맛있었어.”

곽범은 입맛을 다셨다.

새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새장 밖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곽범과 새들에게 제공해온 겁쟁이는 더 겁을 냈다.

곽범이 새장 열기 귀찮아서 자기부터 먹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곽범은 겁쟁이에게 도망가면 새장 속에 있는 두 마리를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겁쟁이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추적당하다가 죽을 게 뻔했다.

"난 물고기 좋아해.”

새장 속의 어떤 놈이 큰 소리로 말하며 부리로 생선의 머리를 쪼았다.

새들은 여섯 살 때의 곽범 같았다.

천방지축이고 아는 것 같으면서 물어보면 바보다.

그러면서도 입은 주워들은 소리를 지껄이느라 조잘거렸다.

그리고 흉악했다.

세상에 못 먹는 것이 없었다.

풀과 열매는 물론이고 벌레와 고기를 먹었다.

심지어 소화를 돕기 위해서 돌도 쪼아 먹었다.

탁양앵무는 이름 그대로 양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금왕이 번식시키고 훈련시켜서 천적이 없는 포식자가 되었다.

곽범은 철포삼을 정리하느라 묻지 못했던 걸 물었다.

"내가 죽인 그놈이 금왕이야?”

"금왕은 무슨.”

"금왕이 살았으면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자식은 어쩌다가 금왕한테 걸려서 제자가 된 놈이야.”

"철포삼을 익힌 것 같지 않던데.”

"크하하하하. 그놈이 철포삼을 익혀?”

“이판은 인내심이 없었어. 십 년을 단련해도 부족한 철포삼을 무슨 재주로 익혀.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들이 의기양양해서 재잘거렸다.

새장수의 이름은 이판이었다.

"그래도 이판은 새소리를 잘 알아들었어. 아마 스무 가지도 넘게 알았을 걸? 그 때문에 금왕의 제자가 됐지만.”

"너희들 철포삼 별거 아니잖아. 입에 넣고 씹으니 툭 터지던데.”

곽범이 새들을 자극했다.

한 마리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대답했다.

"사람 턱 힘이 얼마나 센데. 양쪽 어깨 힘보다 더 셀 때도 있어.”

"나한테 씹히고도 터지지 않을 놈 누가 있어?”

새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 시험하는 거 아니야.”

곽범은 새장 문을 열었다.

새들은 의아해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들의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동굴 천장에 나있는 구멍으로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새들은 지난 칠 일동안 곽범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았다.

곽범은 하루 두 시간 정도 동굴 벽을 옆으로도 거꾸로도 달렸다.

날래기가 자신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섣불리 달아나려 했다가는 잡힐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곽범 뱃속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곽범은 새를 먹을 줄 아는 놈이었다.

새를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새를 깃털 채 불에 그슬려 먹는다.

그슬린 새의 깃털은 양념이 되어 새고기에 맛을 더한다.

정말 좋아하는 인간들 중에는 털 채로 새를 씹어 먹고 찌꺼기만 뱉어버린다.

곽범은 그것도 하지 않고 다 삼키는 놈이다.

새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겁쟁이는 곽범의 겨드랑이 근처로 숨었다.

"뭐하자는 거야?”

마침내 새 한 마리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시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 했잖아.”

곽범은 옷을 벗어서 바위 위에 올렸다.

"나를 쪼아봐.”

"헹. 그래놓고는 쪼았다고 잡아먹으려고.”

“안 속아. 안속는다구.”

"쓸모없네. 다 잡아먹을까?”

곽범이 중얼거렸다.

순간 한 마리가 뛰쳐 나오며 외쳤다.

"내가 할게.”

새떼가 와르르 쏟아져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새의 부리와 발톱을 느껴지면 공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쪼면 받아서 튕겼다.

백 여 마리나 되는 새들이 전신에 달라붙고 튕겨나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부분은 살이 뚫리고 피가 쏟았다.

새들은 한동안 고기를 못 먹었었다.

피 맛과 생살에 흥분한 새들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고통으로 숨이 멎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곽범은 버텼다.

대처가 늦어서 상처를 입은 부분에는 더 많은 공력을 보내 치료했다.

곽범의 철포삼은 공력을 바탕으로 한 철포삼이었다.

철포삼은 겉을 단련하여 구리로 된 내장과 쇠로 된 뼈를 가진다는 외공이다.

그 철포삼을 뒤집어서 공력을 겉으로 보냈다.

피부를 강화하며 공력의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했다.

시간이 지나며 곽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새부리가 닿기 전에 먼저 느끼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면 곽범의 공력은 피부가 부리에 찍히지 않게 단단해졌다.

단단해지자마자 새의 부리를 튕겨냈다.

다만 피는 많이 흘렸고 공력은 소모가 심했다.

"그만.”

곽범이 선언했다.

대부분의 새들이 멈추고 물러났다.

두 마리만은 비어있는 곽범의 가슴과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 맛에 눈이 까뒤집힌 것이다.

곽범은 양손으로 한 마리씩 잡아서 차례로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도독. 팍팍.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새들은 바닥에 내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공포에 떨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새들은 조용히 새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좌정하여 자기 몸을 관조하는 곽범은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철포삼을 외공 아닌 내공으로 펼치다 거두었다.

전신이 거문고의 현처럼 통통 튕겨지고 있었다.

몸 곳곳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도 같았다.

몸속의 공력은 이제 길을 아는 것처럼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치유와 반탄과 수발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달려들어 쫀 곳을 또 쪼고 할퀴는 흉악한 새들에 공력이 반응한 것이다.

새들의 공격은 그쳤지만 공력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몸속의 새떼라도 된 것처럼 날 뛰었다.

심법을 운용하여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곽범은 자기의 몸이 더 작아지고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굴 벽을 달려보니 공력을 더 적게 쓰면서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내공과 외공이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

 

새들을 이용한 수련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곽범이 새들에게 지시하는 말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새들은 그 말을 절대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곽범이 놀 때는 무슨 말을 하든 괜찮았다.

곽범은 권각법도 새들을 이용해서 연습했다.

그가 배운 것은 다리 힘을 기르고 팔 힘을 기르는 매우 기본적인 훈련 방법뿐이었다.

공방은 없었다.

곽범은 새들이 공격하는 것을 손발로 막는 훈련을 했다.

아무 격식도 없었으나 하는 중에 점차 길이 생겼다.

동작에 따라서 공력이 이동한다.

공력에 따라 동작에 힘이 가해진다.

그것을 느낀 후에는 저절로 공방의 길이 만들어졌다.

금왕경을 읽으면서 새소리를 알아듣는 법도 배웠다.

곽범은 자기가 이전에도 새소리는 좀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2년 동안 동굴을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간 세상이나 숲이나 동굴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새들은 두 번 털갈이를 하면서 울긋불긋하던 색깔이 하얀 물새처럼 되었다.

어떤 놈은 물고기만 먹으니 물새가 되어버렸다고 투덜거리며 물새처럼 끼룩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동굴이 좁고 갑갑했다.

2년 전 봉우리 근처 샘물에서 보았던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숲을 달리며 곰의 노랑내와 딸기의 새콤한 맛이 그리워졌다.

고운 꽃도 보고 싶고, 보드라운 것도 만지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맡고 싶었다.

곽범은 새장을 지고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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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피와 살을 먹는 새

 

 

곽범은 누운 채 도끼를 들었다.

힘을 다해 새장수의 가슴을 찍었다.

퍼석! 퍽!

도끼는 급히 날아든 새들과 부딪혀 빗나갔다.

새들의 몸뚱이가 쇳덩이 같다.

믿기 힘든 단단함이다.

"뼈도 남기지 말고 쪼아 먹어.”

새장수가 중얼거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곽범을 뒤덮었다.

곽범은 손으로 눈과 귀를 가렸다.

새들의 부리는 송곳같이 날카로웠다.

쪼는 대로 살이 파이고 피가 튀었다.

그때마다 까무라칠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나마 부상은 대부분 치유된 상태다.

새장수의 공력을 끌어들여 신공을 운용한 덕분이다.

주로 다친 곳에 공력을 보냈었다.

곽범의 공력이 가는 곳을 새장수의 고강한 공력이 따라왔었다.

새장수의 공력은 곽범의 공력을 흉내 내며 상처를 치유했다.

곽범의 몸에는 일시적이지만 새장수의 거의 전 공력이 들어와 있다.

그 공력들은 곽범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곽범은 그 힘을 빌어 껑충 뛰어 올랐다.

도망 가야한다.

이 일대의 길은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새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곽범은 팔다리가 둘씩 밖에 없다.

새들은 어찌 보면 새장수보다 더 똑똑했다.

곽범의 온몸에 달라붙어 쪼고, 내동댕이치고, 바닥에 굴렸다.

곽범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몸은 삽시에 피를 내뿜고 있었다.

"눈알을 빼버려. 눈알을. 고 새까맣고 교활한 눈알부터.”

새장수가 소리치고 또 피를 토했다.

곽범은 공력을 피부로 돌려서 새들의 부리를 견디려했다.

무리였다.

이제 겨우 다친 곳으로 공력을 보내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공력은 피부를 단단하게 하기 보다는 상처를 치유하는 쪽으로 저절로 쓰였다.

새들이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상처에 부리를 박고 피를 마시는 놈도 있다.

곽범은 고통보다도 미물들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더 견딜 수 없었다.

목을 쪼으려 파고드는 새를 턱으로 튕겨내었다.

튕겨나가던 새의 날개죽지가 입에 닿았다.

곽범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새를 물어버렸다.

새의 몸뚱이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턱에 힘을 주니 입안에서 퍼석 터져버렸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날카로운 발톱이 입천장과 목을 긁었다.

개의치 않았다.

비어있던 위장이 든든해졌다.

곽범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한손으로 어깨에 붙어 살을 뜯는 새를 잡아챘다.

그놈을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은 후 삼켜 버렸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막히지는 않았다.

네 마리를 연거푸 잡아먹었다.

새는 사람을 먹고 사람은 새를 먹는 혈전이 반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마침내 곽범이 이겼다.

열일곱 마리의 새를 문자 그대로 털도 뽑지 않고 씹어 삼켰을 때였다.

곽범은 도끼날을 새장수의 목에 걸치는데 성공했다.

새들의 몸뚱이와 뼈는 정말 단단하다.

도끼에 찍혀도 다치지 않는다.

그 새들을 곽범은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걸 본 새장수의 마음은 탐욕으로 들끓었다.

곽범의 무지막지한 힘이 방금 경험했던 신공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 힘이 자기의 공력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새장으로.”

곽범은 피가 흐르는 손으로 열여덟 마리째 새를 잡으며 말했다.

"새장으로.”

피를 뒤집어 쓴 곽범의 모습에 질린 새장수가 급히 말했다.

파다닥 쏴아

새들은 새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새들의 몸은 곽범의 피에 젖어 붉었다.

날개 짓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곽범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새장을 걸어 잠궜다.

새장에는 백 마리 정도의 새가 들어있다.

새들은 곽범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날개짓을 했다.

"비급 있지요?”

새장을 등지고 새장수에게 물었다.

"무슨 비급? 나는 무공이 약해. 비급 갈은 거 없어.”

"이 새들을 훈련시킨 비급!”

"비급 없다. 거짓말인 거 같으면 내 몸을 뒤져봐.”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가만있으면 너도 출혈이 심해서 죽어. 나한테 약이 있다.”

곽범은 새장수에게 걸어갔다.

걸음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새장수가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이 약이 부리에 쪼인 상처를...”

곽범은 도끼로 새장수의 목을 찍었다.

텅텅

잘린 머리가 몇 번 튀었다가 멈췄다.

머리를 튕겨낸 피가 여전히 뛰는 심장의 힘으로 추욱, 추욱 뿜어졌다.

"필요 없어요.”

곽범은 새장수의 손에 들린 파란 약병을 옆에 두고 품을 뒤졌다.

약병은 두 개가 더 나왔다.

하나는 노란 약병이고 하는 붉었다.

옆구리에는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호패와 함께 걸려 있었다.

새들은 새장에서 날뛰며 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곽범이 새장 문을 새들이 열수 없도록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먹지 못할 큰 짐승을 잡았다.

곽범은 곰도 잡고 표범도 잡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지금처럼 큰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화가 몹시 났다.

사부에 대한 원한이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새장수를 보내 시체를 처리하게 한 걸 보면 사부는 다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하늘에 빠질 뻔 한 후로 명징해진 곽범의 사고가 말해주고 있었다.

 

곽범은 주방에 있는 물로 몸의 피를 씻어냈다.

새가 쪼았던 상처에서는 새살이 차오르고 있다.

올록볼록 작은 밥풀떼기꽃이 새겨진 것 같았다.

새가 쫄 때마다 공력을 보내서 치료했었다.

그러다보니 경맥들이 몰라보게 넓어졌다.

내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근육과 피부가 회복되었다.

(사부는 이렇게 쉬운 것도 내가 빨리 못 깨달아서 화난 것일까?)

곽범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산과 숲은 곽범 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가 찾아오지 못할 곳이 있다면 바로 이 산속뿐이다.

또 무공에 대한 이해가 터져 나와 정리하고 다듬을 장소도 필요했다.

곽범은 새장수의 새장과 그의 봇짐을 지고 이전에 발견했던 숲속 동굴로 갔다.

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는 곳이었다.

 

***

 

곽범은 숲속에 있는 모든 동굴은 알고 있다.

그 중 가장 은밀한 동굴을 찾아갔다.

그 동굴은 숲속을 흐르는 계곡물이 크게 휘도는 곳에 있었다.

입구가 그늘져서 물 건너편에서 보면 작은 바위처럼 보였다.

동굴 안은 제법 넓고 깊다.

계곡물 한 가닥이 동굴을 통과한다.

모래톱과 마른 땅도 있다.

빛은 오전에만 천장의 좁은 바위틈 새로 잠시 들어왔다.

곽범은 바위를 가져와 동굴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지난 8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른다.

단지 사부가 와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가 좋았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혼자서 절벽을 타고 숲을 뛰어 다녔다.

수련이었지만 즐거운 놀이기도 하였다.

짐승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돌을 쌓아서 작은 성벽도 만들면서 노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맑은 물에 비치던 햇빛이 마지막 바위에 의해서 막혔다.

동굴 속은 손바닥만한 구멍으로 들어온 빛만 남았다.

전에 동굴 천장 위쪽에 가보았었다.

매우 가팔라서 날쌘 곽범도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쌓여 있었다.

바위들 틈새가 조금 열려 있어서 빛을 들여보낸다.

아늑했다.

곽범은 모래톱에 앉아서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운기행공을 한 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햇빛이 들던 곳으로 달빛이 들었다.

새들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있었다.

곽범은 심법을 운용해서 운기조식을 했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새장수한테 뺏은 공력의 양은 줄어들었다.

대신 앙금처럼 정순한 공력은 기해혈에 쌓였다.

그 양이 상당했다.

지난 8년 간 혼자 쌓은 것보다 배 이상 많은 것 같다.

양만 많은 게 아니다.

곽범은 자신의 공력이 더 정순해지는 걸 느꼈다.

어둠이 마냥 어둡지 않았다.

눈으로 기운을 돌리면 시력이 좋아진다.

달빛이 닿지 않은 곳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새들은 조용히 있었다.

밤새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반짝이는 눈을 보면 여타 새들처럼 밤눈이 어두운 것 같지도 않았다.

곽범은 새장 앞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누가 말할 줄 알아?”

새들 중 한마리가 흠칫한다.

곽범은 어둠 속에서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새장의 문을 걸어잠근 걸쇠를 손으로 폈다.

문을 열고 냉큼 손을 넣어 그놈을 잡아 꺼냈다.

예상과는 달리 새들은 곽범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잡힌 새도 얌전했다.

곽범은 새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 말할 줄 알아.”

새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꾸엑!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잡힌 새가 비명처럼 외쳤다.

"난 아니야. 내가 한 말 아니야.”

새장이 조용해졌다.

"새를 꾈 때 새소리로 속이는데 사람 소리에 속는 새도 있네.”

곽범은 손에 든 새를 노려보았다.

새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외면했다.

다 말할 줄 안다고 외친 건 곽범이었다.

"저 바보.”

새장 속에서 어떤 놈이 외쳤다.

"너희들 무슨 새야?”

곽범이 물었다.

잡혀 있는 새가 즉시 대답했다.

"탁양앵무.”

양을 쪼는 앵무새라는 뜻이다.

"양 아니라 범도 잡아먹겠던 걸.”

"우린 범도 잡아먹어. 외공을 익혔거든.”

새장에서 어떤 새가 말했다.

"쓸모도 많아. 아주 많아.”

곽범은 코웃음을 쳤다.

"맛도 괜찮더라.”

앵무새들이 조용히 부리를 다물었다.

스무 마리에 가까운 새들이 털도 뽑히지 않은 상태로 곽범에게 잡아먹혔다.

"살려줘.”

새장에 있던 한 마리가 말했다.

"뭐든지 다 할게.”

"대장이 누구야?”

"네가 먹었어. 제일 먼저.”

"그것 잘 됐네.”

곽범은 새들을 훑어보았다.

"배고프면 그 바보 먹어도 돼.”

새장에서 누가 말했다.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비명을 질렀다.

"절대 안돼.”

"왜?”

"난 한입 거리밖에 안 돼. 먹으려면 저 자식도 같이 먹어.”

서로를 비난하는 새소리가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왔다.

곽범이 물었다.

"비급은 어디 있어?”

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새가 일제히 새장 바닥을 날개로 가리켰다.

“하하하!”

곽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들 중 한마리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금수가 하는 게 다 이렇지 뭐.”

곽범의 손에 있던 새가 급하게 말했다.

"조심해. 재들 발톱에 독 묻히고 기다리는 중이야.”

"배신자!”

새소리가 다시 귀를 찢을 듯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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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성공한 사냥

 

 

“도철영감한테 배운 무공이 뭔지 말해봐.”

새장수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럼 안 아프게 죽여줄게. 아니면 새들이 살아있는 채로 네 살점을 뜯어먹을 거야.”

오싹한 협박이 이어졌다.

곽범은 오래전 사부로부터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아무에게도 이 무공을 말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라.

-무공을 줬으면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라.

-죽더라도 내 말을 어겨선 안 된다.

 

곽범은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무공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사부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돼. 난 고문을 길게 할 인내심이 없어.”

새장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철영감 무공이 탐나긴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인내심이 늘어나지는 않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말해봐.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더 안 물으마.”

새장수가 애원했다.

곽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에 대한 의리나 두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는 자신을 죽이려고 손을 썼다.

사부의 은혜는 죽음과 상쇄되었다.

그러나 곽범은 입을 다물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은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기 싫었다.

아픈 것보다 죽는 건 비교할 수도 없이 괴로울 것이다.

"그 눈깔. 새까만 그건 없어도 되겠네.”

새장수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파다닥!

두 마리 새가 벼락같이 곽범의 눈으로 달려들었다.

“안돼!”

곽범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타탁! 푹!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새장수의 발이 곽범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새들은 부리로 새장수의 발등을 쪼았다가 날아올랐다.

"것봐. 너도 눈 빠지는 건 싫어하잖아.”

새 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눈두덩에 문질렀다.

"말할게요.”

곽범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어.”

새장수가 발을 치우며 씨익 웃었다.

"뻔한 걸 가지고 뭘 어렵게 가? 그냥 너는 말하고, 나는 듣고, 그런 후에 볼일 보면 되는 거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말할 힘도 없어요.”

곽범이 힘없이 말했다.

"그걸 생각 못했네.”

새장수가 자기 이마를 툭 쳤다.

"내가 널 위해 밥을 지을 순 없고, 술과 새 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걸 먹을래?”

곽범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술!”

"이놈 남자네.”

새장수가 껄껄 웃었다.

"나라서 주는 거지 아무나 못 주는 술이야. 그러니 알고 마셔.”

 

곽범은 새장수가 건네준 술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비웠다.

날짐승 냄새가 밴 술이 입안을 태우며 뱃속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몸에 열기가 돌았다.

통증은 가시고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그냥 자면 안 되지. 잠은 조금 있다가 푹 자고, 먹은 만큼 토해내야지. 자 말해봐.”

새장수가 곽범의 뺨을 찰싹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곽범은 귀찮은 듯이 그의 손을 밀쳤다.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해요. 길게 들이쉬기, 길게 내쉬기.”

새장수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래. 내공심법이구나. 이름은 뭐냐?”

"곽범.”

"이 바보 자식, 네 이름 말고 심법 이름.”

"이름 없어요. 아는 게 그것뿐인데 이름 지어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곽범은 술기운이 오른 입으로 중얼거렸다.

"도철영감이 무공 이름은 숨긴 모양이군. 그러고도 남을 영감이지. 계속 말해.”

"오래 참아요. 숨이 막혀 죽을 만큼 참았다가 쉬는 걸 계속하면 가슴에서 구멍이 뻥 뚫려요. 진짜 구멍은 아닌데, 그 구멍으로 숨을 쉬면 숨을 쉬는 듯 마는듯해요.”

"바로 그거구나!”

새장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구멍이 없으면 허사예요. 구멍을 뚫을 때는 밀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죽을 듯 말 듯한 상황을 넘나들어야 해요. 그래도 안 죽어요. 정신은 죽음으로 넘어가면 몸이 생으로 돌아오거든요.”

곽범의 졸음 묻은 말이 이어졌다.

“많이 해야 돼요. 자꾸 하면 구멍이 뚫려요. 그 구멍을 뚫고 나서 숨을 쉬면 기운이 기해혈에 쌓이기 시작해요. 아. 그때까지는 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 물하고 생콩만 먹어야 해요. 아니면 죽는대요. 단계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 따로 있는데...”

말소리가 줄어들다가 끊어졌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새장수는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새장수는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곽범을 죽이지 못했다.

도철은 무림에서 가장 흉악한 자들인 사흉신(四凶神) 중 한명이다.

도철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도철과 손을 섞는 자는 공력을 모두 빼앗기고 죽는다.

신화 속의 탐욕스러운 악귀 도철이나 마찬가지다.

도철의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세상을 횡행할 수 있다.

곽범을 살려둔 이유다.

그렇다고 죽이지 않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곽범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도 살아있었다.

곽범을 협박해서 독문무공을 뽑아냈다는 사실을 도철이 알면 매우 난감해진다.

 

새장수는 곽범의 맥문을 잡아서 기운이 흐르는 것을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이놈은 기운 움직이는 게 달라. 도철영감이 고강한 이유가 이거였어.”

곽범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읽은 새장수는 흥분했다.

곽범의 공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자석같은 흡입력이 느껴졌다.

새장수가 주입하는 공력을 끌고 간다.

(공력이 흐르는 길을 읽으면 흉내 낼 수도 있다.)

새장수의 가슴 속에서 탐욕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남의 공력 운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란 평생에 한 번 오기 어렵다.

게다가 그 남이라는 게 사흉신 중 한명인 도철이다.

도철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강해지면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

빼앗고, 즐기고, 존귀해질 수 있다.

도철의 무공을 반드시 익혀야한다.

곽범이 말했던 것처럼 호흡을 느리게 하여 죽을 듯 말듯한 경계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곽범의 기운을 새장수의 공력이 천천히 따라갔다.

곽범의 공력은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흘러갔다.

따라가기가 쉬웠다.

그러나 길이 몹시 난해했다.

조금만 속도가 빠르면 따라가다가 길을 잃을 판이었다.

새장수는 그 심오함에 놀랐다.

동시에 도철의 신공을 자기도 익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온 정신을 다해서 공력이 흐르는 길을 외우고 거치는 혈도를 마음에 새겼다.

(절묘하다. 절묘해. 이렇게 복잡하고 오묘한 신공이라니.)

속으로 연신 감탄을 반복했다.

내공 운용의 오묘함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곽범의 공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새장수는 놓칠 새라 급하게 뒤쫓았다.

중대한 고비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만 잘 관찰한다면 신공이 자기의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가슴에 이어 어깨까지 시큰했다.

(아차! 공력이 부족해졌구나. 언제 이만큼 공력을 뽑았단 말인가?)

진퇴양난이었다.

물러서자니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쫓아가자니 공력이 고갈되어버릴 것 같았다.

(내공만 심후하다면 내가 도철영감보다 못할 리 없다. 평생 갈망했던 신공을 이제야 만났는데 물러서야하나?)

새장수는 짧은 순간에 깊은 갈등을 했다.

(이놈은 술에 취해서 순진하게 내력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들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입으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갈등은 곧 결론에 이르렀다.

(내공이 고갈되더라도 버틸 만큼 버티다 회수하면 된다. 이 어린놈은 몸이 만신창인데다 술까지 먹었으니 아무 위험도 없다. 더구나 나한테는 새들이 있다.)

새장수는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렸다.

진원지기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진원지기가 말라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절대 허물면 안되는 마지막 보루같은 것이다.

욕심에 눈이 먼 새장수는 그 진원지기까지 동원했다.

모자라는 내력을 진원지기로 보충하며 곽범의 공력을 따라갔다.

그러나 금방 끝날 듯 치달리던 곽범의 공력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새장수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곽범의 몸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공력을 다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속으로는 빨리 끝내라고 끝없이 외쳤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있었다.

마침내 곽범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갔다.

새장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빠르게 달릴 때의 경로는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끝이 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공력을 자기 몸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어...)

소리를 내고 싶은데 입술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공력이 기해혈로 돌아가는 곽범의 공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식은땀을 더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곽범이 눈을 번쩍 떴다.

눈빛이 어둠 속의 숯불 같다.

(잘못되었다!)

새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기의 수소양삼초경을 끊었다.

진원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왁!”

그 대가로 한 웅큼의 피를 토하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곽범의 사냥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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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버림받은 천재

 

 

사부는 5일이 지난 후에 왔다.

그동안 암자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성질을 연구하느라 모든 걸 망각했다.

밥도 짓지 않았다.

사부를 위해 차를 다릴 물도 없었다.

곽범은 미친 놈 행색으로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부는 보자마자 혹독한 매질을 했다.

곽범은 고통 속에서 혼절하고 고통으로 깨어나길 반복했다.

사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8년 지은 농사였는데... 네놈이 스스로 망가졌구나!”

매질을 하며 사부가 악다구니를 썼다.

곽범은 자신이 뭔가 잘못 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놈!”

환청처럼 울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부는 떠났다.

 

곽범은 사흘 동안 암벽 앞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가을비 추적거리는 밤에 기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싯돌을 어찌 어찌 쳐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 앞에 웅크려 몸을 데웠다.

솥에 들어있던 물도 데워졌다.

데워진 물을 겨우 겨우 마셨다.

텅 빈 속에 며칠 만에 들어가는 게 물이다.

그럼에도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스스로 깨우친 심법의 효험을 봤다.

곽범은 전보다 몇 배 빠르게 공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복잡한 혈도와 경맥을 지나는 데도 그렇다.

빨라진 공력이 몸을 보호해주었다.

맞는 부위로 즉시 공력이 달려가곤 했다.

덕분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팔 다리에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엉금엉금 기어 방으로 들어갔다.

두 권의 무공비급은 사라졌다.

사부가 사왔다가 던져 놓은 옷 보따리만 뒹굴고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구나.)

곽범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금 세상에서 곽범이 아는 사람은 사부뿐이다.

정은 없지만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부였다.

버림받는 고통은 외로움보다 더 깊다.

곽범은 눈을 감았다.

그 무엇도 보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자신의 몸 상태가 관조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 훤히 보였다.

혈도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간 기운이 상처에 이르며 치유하는 과정을 느꼈다.

혈도들은 얕게는 피부에, 깊게는 오장육부와 사지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곽범은 혈도의 모양과 성질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았다.

혈도마다 숲의 짐승들처럼 관장하는 영역이 있었다.

영역의 기능과 모양을 따라 혈도도 달랐다.

사부의 장력에 손상되었던 오장육부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혈도에 쌓여있는 공력을 근처의 상처로 이끌어 집중시켰다.

다치지 않은 곳보다 다친 곳들로 점점 더 많은 공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새벽이 왔을 때였다.

곽범은 굳어진 핏덩어리를 토했다.

오장육부는 어느덧 활기를 되찾았다.

속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한 뼈와 근육, 피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이면 근육은 대부분 나아있겠구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시간문제일 뿐 다친 몸은 결국 회복될 것이다.

잠이 밀려왔다.

회복에 집중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컸다.

곽범의 눈이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감길 때였다.

꾸욱 꾹!

어디선가 일찍 먹이를 찾아 나온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곽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지암 주변에는 나무나 풀이 거의 없다.

벌레도 없다.

숲에 사는 새가 이곳까지 올라와서 울 까닭이 없다.

높은 곳에 사는 새는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뿐이다.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곰이나 범, 늑대 같은 짐승을 만나기 전에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달려야 한다!

아직 다리로는 일어설 수 없었다.

네발로 기어 방을 나왔다.

벽에 기대두었던 도끼를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섰다.

모든 기운을 다리의 뼈와 근육을 치유하는 데로 모았다.

곽범은 부들부들 떨면서 걸었다.

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도끼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큰 짐승과 싸워야 한다면 도끼가 있어야한다.

 

곽범은 있는 힘을 다해서 30 미터 정도 움직였다.

돌아보니 어슴푸레하게 십지암이 보였다.

더 움직일 힘이 없다.

뱃속은 텅 비었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꾸욱 꾹! 꾹!

요란한 새소리가 가까워졌다.

도망치기는 늦었다.

바위 뒤에 몸을 우겨넣어 숨었다.

저벅 저벅

새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새벽의 맑은 공기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게 한다.

미약한 냄새도 선명하게 느껴지게 한다.

곽범은 바람 속에 흐르는 피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뿐만이 아니다.

어렸을 때 맡았던 닭똥 냄새 같은 것도 느껴졌다.

“도철(饕餮) 영감도 참 지독해. 죽일 거면 직접 죽일 것이지. 죽을 만큼 때린 후에 남 시켜 시체 치우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지 않아?”

투덜거림과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는 수많은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지고 있었다.

쌀가마니 두세 개쯤 되는 크기의 새장이다.

비어있는 작은 새장들이 큰 새장에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 시장에서 본 적이 있다.

새장수다.

꾹 꾸욱! 꾸룩!

새장 속의 새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람은 새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너희들 먹일 시체가 필요해도 그렇지. 젠장, 나도 무림에서 제법 신분이 있는데 말이야. 도철 영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시체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꾸룩 꾹! 꾹!

새장 속의 새들이 맞장구를 친다.

요란한 새소리는 그 자체로 섬뜩했다.

“기왕이면 다 자란 계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살이 야들야들하면서 양도 넉넉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

새장수의 중얼거림이 가까워졌다.

곽범은 숨을 죽인 채 그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새장수는 바위 근처에 멈추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사내새끼야. 계집도 어른도 아니라고.”

곽범은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

“게다가 죽어있어야 하는데.... 살아있네.”

새장수가 바위 뒤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곽범은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더 빨리 튀어! 그래서야 어디 살겠어?”

새장수가 곽범의 등을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십지암은 벼랑 끝에 서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지어졌다.

십지암으로 오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에 새장수가 있다.

십지암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새장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낫지 않은 다리뼈가 땅을 딛을 때마다 통증이 골을 울린다.

새장수는 십지암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에게는 곽범이 독 안으로 뛰어드는 생쥐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곽범은 법당을 목표로 달려갔다.

법당의 문은 두껍고 튼튼하다.

도금한 불상을 도적질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그 문을 걸어 잠그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다친 다리라 속도는 나지 않았다.

뒤에서는 새장수가 휘파람을 불면서 느긋하게 걸어온다.

법당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아이쿠. 저길 더럽히면 도철영감이 가만 안 있을 건데 깜박했다.”

새장수는 걸음을 멈췄다.

“잡자!”

파다다닥! 파닥!

새장수가 소리치는 순간 새들이 새장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막혀있던 굴뚝에서 그을음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곽범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꾸욱 꾹! 파다다닥!

주변이 요란한 새소리에 파묻혔다.

새떼가 달려들어 발톱과 부리로 옷을 잡고 물어 당겼다.

새들은 그리 크지 않다.

비둘기나 까치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힘이 아주 좋았다.

독수리에 못지않을 것 같다.

큰 독수리는 양을 채 가기도 한다.

게다가 새들은 숫자까지 많았다.

곽범의 몸뚱이는 간단히 들려졌다.

털썩

한길 쯤 들려졌던 몸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땅에 떨어질 때까지 새들이 옷을 붙잡아서 낙법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콱 막혔다.

뼈와 근육이 지르는 비명으로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쳤다.

새장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더 굴려 더.”

새들은 새장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곽범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들렸다가 던져지기를 반복했다.

옷은 돌부리에 걸려 찢어졌다.

피멍이 들었던 곳에서는 피와 고름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만, 이제 야들야들해져서 먹기 좋아졌을 거다.”

새장수의 명령에 새들이 곽범을 놔주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살아있었을 줄이야. 흐흐흐.”

새장수는 곽범을 내려다보며 희희낙락했다.

곽범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덮여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얘기 좀 하자.”

새장수가 곽범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눈 주변의 피와 흙이 술에 씻겨 내려갔다.

“너 도철영감 제자 맞지?”

새장수가 곽범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곽범은 울컥하고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네 사부가 시체를 없애라 해서 왔다. 그런데 살았으니 이걸 어쩐다? 도철영감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새장수는 발바닥을 곽범의 얼굴에 비비며 실실 웃었다.

술이 묻은 얼굴에 흙이 그림을 만들었다.

곽범은 따가운 통증에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사부가 도철이라 불린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다만 곽범은 도철의 뜻은 몰랐다.

무공비급 외의 책을 읽을 기회도,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철은 신화 속에 나오는 네 마리의 흉악한 괴물, 사흉(四凶) 중 하나다.

탐욕과 교만, 교활과 포악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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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외로운 천재

 

 

암자의 이름은 십지암(十智庵)이다.

십지암은 봉우리 정상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있다.

몇 구비 절벽을 따라 돌면 두 개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틈에 채 열 평도 안되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법당 한 칸, 방 한 칸, 부엌이 전부인 작은 암자다.

곽범은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매일 물을 긷고 밥을 지었다.

곽범의 사부는 스님이다.

곽범이 사는 곳도 암자다.

하지만 곽범은 중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규율을 배운 적도 없다.

오로지 사부의 지시대로 살아왔다.

사부는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온다.

가을 무렵이다.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으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이 된다 해도 사부가 언제 올지는 모른다.

항상 사부를 위한 찻물을 준비해놓아야 했다.

찾아온 사부는 곽범의 몸을 꼼꼼히 살펴본다.

그런 후 연마하는 무공에 대해 조언해주고 떠났다.

오래 머물러야 보름 정도다.

그래서 곽범은 늘 혼자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일꾼과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

말할 기회가 적으니 말하는 게 투박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암자에 있는 책이라고는 두 권의 무공비급이 전부다.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제목은 없다.

한권에는 내공을 기르는 심법이 적혀있다.

다른 한권에 적혀있는 건 경신법이다.

사부는 다른 책은 일절 주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는 게 심심함과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밤이면 두 권의 비급을 반복해서 읽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을 읽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밤만 되면 다시 읽었다.

오전에는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했다.

오후에는 봉우리를 달려 내려갔다.

골짜기에서 원숭이를 쫓으며 경신법을 익혔다.

산에는 원숭이 외에 늑대도 있고 곰도 있으며 표범도 있다.

그놈들 덕분에 곽범은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곽범은 사부로부터 검을 받지 못했다.

숲에서 단련할 때는 늘 도끼를 메고 다녔다.

도끼만 있으면 곰도 범도 무섭지 않았다.

곽범은 곰을 여러 마리 잡았다.

정면 대결해서 잡은 건 아니다.

곰이 쫓아오면 나무 위로 도망간다.

대부분의 곰은 따라 올라온다.

그러면 옆의 나무로 건너뛰든가 휘어지는 가지에 매달려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 다음 도끼로 나무를 찍었다.

곰은 곽범처럼 나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곽범이 나무를 찍기 시작하면 포효는 해도 움직이지 못했다.

떨어질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매달려 있다가 나무가 쓰러지면 함께 떨어진다.

곰은 육중한 몸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거나 죽는다.

표범을 만날 때도 방법은 비슷했다.

나무에 올라가면 표범은 이것 봐라 하며 따라 올라온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나무의 거의 끝까지 올라간다.

그쯤 되면 표범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표범은 영악하다.

하지만 일단 나무 위로 유인당하면 도망치지 못한다.

동작은 제한되고 민첩성은 없어져 버린다.

그저 매달려 있기도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그때를 기다려 반격한다.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표범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친다.

저항도 제대로 못한 표범은 머리가 깨져 땅으로 떨어진다.

곰이나 표범을 죽이면 고기를 구워먹었다.

원래 날쌨던 곽범은 고기를 먹으면서 더 민첩하고 빠르고 강해졌다.

 

심법에 따라 기운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인다.

매일 열 번 이상 심법을 수련했다.

그러나 공력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쌓였다가도 이 빠진 바구니에서 물이 빠지듯 흩어졌다.

공력 중에서 특히 정순한 것들만 앙금처럼 기해혈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공력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강한 흡착력을 지녀 다른 힘을 끌어들인다.

다만 쌓이는 양은 매우 미미하다.

작년에 비해서도 거의 늘지 않았다.

곽범은 사부가 왔을 때 벌을 줄까 무서웠다.

사부는 게으름을 피웠다고 할 게 분명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사부님이 가르치신 대로 수련하는데 공력은 왜 늘지 않는 걸까?)

밥을 지으며 곽범은 생각했다.

전에는 품지 않았던 의문이 일어났다.

하늘에 빠질 뻔한 경험으로 머리가 트인 덕분이다.

지금까지는 늘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했었다.

명료해진 머리로 고민다운 고민을 처음 했다.

(사부님이 일부러 틀리게 가르치실 리는 없고... 혹시 심법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사부님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부를 의심할 수는 없다.

하려면 익히고 있는 심법을 의심해야한다.

결함이 있는지는 몰라도 심법을 운용하면 공력이 쌓이기는 한다.

그 양이 아주 적다는 게 문제다.

(쌓이는 양이 적다면 쌓는 횟수를 늘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법을 더 많이 운용하면 쌓이는 공력도 늘어날 것이다.

심법의 운용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기운을 정해진 경맥과 혈도로 신중하게 이끌어야하기 때문이다.

심법을 더 빨리 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운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어볼까?)

고민하던 곽범은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았다.

 

곽범은 몸을 산으로 간주해보았다.

심법을 운용하는 건 경신법을 펼쳐 달리는 것에 비유했다.

여름과 가을에 숲을 달리면 짐승도 있지만 열매들도 보인다.

나무 열매도 따고 넝쿨 열매도 따서 먹으며 달리곤 했었다.

공력을 쌓는 과정은 절벽과 숲을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심법을 한번 운용할 때마다 공력은 깨알만큼 늘어난다.

숲에서 작은 열매를 따먹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다.

숲에는 달리기 좋은 길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길이 없는 곳도 있다.

있어도 힘이 부족해서 가지 못할 길도 있다.

열매는 곳곳에 있다.

큰 짐승들은 자기 구역이 있어 그 근처에서만 볼 수 있다.

처음 숲에 갔을 때는 가장 쉬운 길로 갔다.

그런데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막힌 곳에서 길을 찾아냈다.

끊어진 곳에서는 노력을 거듭하여 건너뛰었다.

큰 짐승은 도끼로 맞섰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열매가 많은 곳으로 길을 만들고 달릴 수 있었다.

두려움은 어느덧 즐거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력이 지나가는 길을 바꾸려면 혈도를 잘 알아야 한다.

심법을 아주 느리게 운용해보았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듯이 운용했다.

그동안 다닌 길을 꼼꼼히 살폈다.

열매뿐 아니라 토끼 같은 작은 짐승도 찾아보았다.

아주 가끔씩 열매는 만났다.

하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토끼는커녕 벌레도 없다.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공력이 전신을 한 바퀴 돌아서 기해혈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집중력이 떨어져 간과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운용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익힌 심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자주 다니는 길에서는 열매를 찾기 힘들다. 해가 바뀌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딸 수 있다.)

아궁이 속에서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불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열매를 계속 얻으려면 길을 바꾸는 게 답이었어. 지금까지 이 생각을 왜 못했지?)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한다.

밥 타는 냄새에 관조를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솥에서 퍼낸 밥을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숲에서 먹을 주먹밥을 만들면서도 생각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확신했다.

그동안 익혀온 심법은 너무 단조롭다.

사람 몸에는 12정경과 기경8맥이 존재한다.

그 중 극히 일부만 심법 수련에 사용해왔다.

더 많은 혈도에 기운을 소통시키면 더 많은 공력이 쌓일 것이다.

그 과정은 숲에서의 열매 찾기와 완벽하게 같다.

더 많은 길을 달려야 더 많은 열매와 만난다.

혈도는 달리면서 건너뛰는 나무나 바위와 갈다.

나무나 바위마다 크기와 모양, 성질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혈도는 성질이 다르다.

붙잡아 놓거나 밀고 당기거나 튕기고 쏘는 혈도도 있다.

어떤 혈도를 지날 때는 기운이 느려진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더 써야한다.

저절로 빨라지게 하거나 튕겨버리는 혈도도 있다.

그런 곳에서는 노력 없이도 공력이 다음 혈도로 움직여준다.

혈도의 성질을 알고 심법을 행하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걸렸던 일주천을 같은 시간에 세 번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혈도와 경맥에 기운을 소통시키는 데도 그렇다.

반복할수록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곽범은 방으로 들어갔다.

혈도의 위치와 성질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른다.

어딘가에 그려놓고 보면서 더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십지암을 양쪽에서 가두고 있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서 돌로 긁어 보았다.

선이 그어졌다.

곽범은 기해혈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기해혈은 쌓인 공력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곳이다.

그래서 꿀이 담긴 그릇처럼 끈적거린다.

공력이 쌓이는 곳이면서 뽑아내기가 가장 어려운 혈도가 기해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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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생마왕(轉生魔王)

 

 

 

 

0화

 

                      하늘에 빠질 뻔하다.

 

 

수백 길, 수천 길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간쯤 바위틈에는 작은 암자가 끼어있다.

암자에서 나온 계단이 구름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봉우리 정상 근처에 샘이 있다.

샘물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샘을 들여다보던 곽범(郭汎)은 움찔 물러섰다.

하늘에 빠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물에 빠지듯 하늘에도 빠질 수 있겠구나!)

현기증과 함께 황홀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수백, 수천 번 샘을 들여다보았었다.

오늘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쩡하며 깨졌다.

“때가 된 것일까?”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 보던 아침 풍경이다.

그럼에도 전혀 달라보였다.

모든 게 단청을 새로 덧칠한 것처럼 찬란했고 선명했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화려한 색을 입고 있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흐르는 운무는 황금빛이다.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다시 태어난 것 같기도 했다.

나른해진 몸을 바위에 기댔다.

남아있는 밤의 냉기가 등으로 스며들었다.

얼굴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랗다.

영락없는 바다다.

본 적이 없음에도 바다임을 알 수 있다.

바다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내려다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등이 바위에서 떨어져 바다로 추락할 것 같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바다로, 하늘로 뛰어들 수 있다.

하늘 너머에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다.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 같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바위가 자석처럼 등을 잡아당겼다.

아니, 이 세상인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바다는 다시 하늘이 되어 있었다.

곽범은 자신의 몸이 땅의 권세에 속박되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 폭풍처럼 몸을 쓸고 지나갔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니, 떨어지는 거였을까?)

방금 전의 감각을 또 느끼고 싶었다.

애쓰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아쉬움을 달래며 항아리에 샘물을 담았다.

사부가 좋아하는 차를 다릴 물이다.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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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 전에 써놓은 작품입니다.
대략 5-6권 정도 진행이 되었는데...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흥행>이 될만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ㅠ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읽어보시면 아실 테고...
철저히 자기 만족을 위한 작품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기대하지 말아주시길...


원래는 이세계, SF로 구상한 작품입니다.
빅뱅 이후 현재에 이르는 우주와 문명에 관한 상상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윤회하고 전생하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남녀 주인공...
여자 주인공은 성녀이지만 
남자 주인공은 시바로도 치환될 수 있는 마왕입니다.
이번 작품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전생한 마왕입니다.
제목이 <전생마왕>인 것은 시류에 편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정말?)


문피아에서 <이온레인>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반응은 거의 없지요.
요즘 세태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쉽게 읽혀지지 않을 텐데...  
그냥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는 정도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문피아 연재 게시판의 작품설명입니다.


    ****


마왕과 성녀는 소꿉친구였고 연인 사이였으나...
마성이 폭주한 마왕을 성녀는 다른 시간 대로 유배한다.
마왕이 던져진 세계는 시대적으로는 중세, 공간적으로는 동양,
미천한 존재로 세상을 떠돌던 마왕은 점차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장르는 무협이며 환타지의 탈을 쓴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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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비구니의 신세한탄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위치한 천불곡은 마치 딴 세상같이 조용했다. 기승스런 모랫바람도 천불곡 안으로는 불어들어 오지 않았다.

한데 모랫바람 대신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등룡풍의 코를 찔러왔다.

좁은 천불곡 안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여기저기에 수많은 여승들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에 회색승포를 걸친 여승들, 그녀들은 모두 지극히 고통의 표정으로 죽어 있었는데 불문의 제자들답지 않게 손에 손에 병장기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등룡풍은 눈 앞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참경을 둘러보며 무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나 말고 또 이 반야암을 찾아온 자들이 있었군!”

그는 급히 나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그는 세심한 눈으로 여승들의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승들의 사인(死因)은 가슴에 맞은 내가장력이었다. 그녀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 혈장인이 여승들의 젖무덤을 무참하게 으스러뜨리고 심장까지 바스러뜨린 것이다.

등룡풍의 초롱한 눈빛이 지혜롭게 빛났다.

(손바닥 자국으로 보아 침입자는 모두 여덟 명이다!)

그는 십여 구의 시체를 모두 살펴본 후 몸을 일으켰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나귀의 등에서 녹슨 칼 도왕 치우를 내려 품에 안고 천불곡 안으로 들어섰다.

골짜기 한 굽이를 돌자 반야암이 저 만큼 보였다.

반야암은 절벽의 중간쯤에 세워져 있었다. 절벽을 반쯤 파서 세운 동굴 암자인 반야암까지는 백여 개의 계단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데 그 계단 주위에도 수십 명의 여승들이 죽어 있었다.

 

등룡풍은 총총히 걸음을 옮겨 반야암으로 올라갔다.

“......!”

헌데 반야암의 본전(本殿)으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멈칫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반야암 안에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룡풍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암자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전면에는 바로 깎아 만든 거대한 불상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 사 장이 넘는 거대한 좌불상(座佛像)은 손바닥 하나가 어른보다 더 컸다.

불상 앞에는 불단이 놓여 있었다.

불단 위에는 높이가 두 자 가량 되는 향로가 있었고 지금 그 향로 안에서는 미약한 향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본전으로 들어선 등룡풍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아미타불...... 소시주는 누구를 찾아 오셨지요?”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미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 불단 앞에 한 명의 여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애로운 인상의 중년여승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는지 아직도 그 여승의 용모에는 옛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단아하고 차분한 몸가짐, 그 속에 배어 흐르는 은은한 기품......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왔다.

중년여승은 일신에 회색승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지금 그 회색가사는 온통 검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합장하고 앉은 주위에는 팔 인(八人)의 괴인이 반원형으로 중년여승을 포위한 채 쓰러져 있었다.

흡사 흉신악살을 연상케 하는 혈의인들이었는데 괴이하게도 그 자들의 전신에는 붉은 털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것은 등룡풍의 집을 찾아왔던 야수혈마과 흡사한 형상이었다.

그자들은 고통으로 이지러진 표정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헌데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다만, 오공에서 피와 뇌수를 흘린 채 죽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무서운 내가강기에 대뇌와 내장이 박살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등룡풍은 중년여승을 향해 급히 합장하며 말했다.

“소생은 등룡풍이라 합니다. 추망(醜亡)이란 분의 부탁을 받고...... 반야신니란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츠읏!

순간 중년여승의 눈가로 언뜻 한 줄기 이채가 흘렀다.

“빈니가...... 반야라고 해요. 추망이 무슨 일로 소시주를 보내셨지요?”

그녀는 나직이 탄식하며 물었다. 그 말에 등룡풍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 대사께서 반야신니이십니까?”

그는 해연히 놀란 눈빛으로 중년여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신니(神尼)라 불리어 반야신니가 아주 늙은 노비구니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승은 이제 많이 되었어야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을 뿐이었다.

반야신니-!

실상 그녀는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다만 한 가지 지고한 불문신공을 연마하여 나이를 먹는 것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등룡풍의 놀라운 표정에 반야신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니가...... 너무 젊어 의심이 가시나요?”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 앞으로 다가가 치우신도를 반야신니에게 바치며 말했다.

“추망이란 분은 이 칼을 신니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부르르......

도왕 치우를 보자 반야신니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치우(蚩尤)...... 도왕(刀王) 치우......”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치우신도를 받아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옥으로 빚은 듯 해맑고 아름답다. 관세음보살의 관음옥수를 연상케 하는 섬섬옥수.

등룡풍은 격동을 금치 못하는 반야신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녹슨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피울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추망...... 은 달리 말이 없었나요?”

반야신니가 녹슨 치우신도를 쓰다듬으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있었습니다!”

등룡풍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우에 천황(天皇)의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요!”

“......!”

반야신니는 멍하니 등룡풍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등룡풍이 전하는 말은 지극히 중요한 것일 텐데도 그녀는 듣지 못한 듯 멍하니 반야암 밖의 거친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분은...... 다른 말은 하시지 않았나요?”

문득 반야신니는 망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한시도 신니를......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부르르......

순간 반야신니의 전신이 뇌전을 맞은 듯 격렬하게 떨렸다.

주르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문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그 분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등룡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반야신니의 옥용이 문득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도왕 치우를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합장했다.

그런 그녀의 옥용으로 햇살같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애롭고 아름다워 흡사 관음보살이 현신한 듯했다.

“추망!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반야신니는 기쁨의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눈을 들어 등룡풍에게 고소를 지어 보였다.

“추태를 보였어요. 용서하세요.”

“아...... 아닙니다 신니!”

등룡풍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치우신도를 다시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다시 시주가 맡아 주셔야겠어요. 왜냐하면...... 빈니는 곧 입적(入寂)해야만 하기 때문이예요.”

그 말에 등룡풍은 대경하여 물었다.

“다...... 다치셨습니까?”

반야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혈왕천(血王天)의 야수팔흉(野獸八兇)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요. 빈니는 그들을 반야신강(般若神罡)으로 격살했지만...... 빈니 역시 그들의 혈영강살에 내부가 흔들려 오래 버티지 못해요!”

그녀는 주위에 쓰러져 있는 팔 인의 흉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수팔흉(野獸八兇).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등룡풍은 그들이 반야암의 여승들을 죽인 장본인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눈앞의 이 연약해 보이는 여승 반야신니에게 내부가 박살당해 절명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흉악무비해 보이는 거한들!

그들 팔 인이 일개 여승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등룡풍을 놀라게 만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빈니의 신상 얘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문득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등룡풍은 단정히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반야신니는 나직이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벌써 사십 년 전이군요. 곤륜(崑崙)에는 한 분의 고승(高僧) 밑에 곤륜삼정(崑崙三鼎)이라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는 낮고 조용한 음성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곤륜파(崑崙派)!>

 

그들은 백 년 전까지 무림구대문파에 드는 당당한 명문정파였다.

하지만 백 년 전, 서역 성숙해(星宿海)에서 일어난 하나의 마파(魔派)와의 충돌로 인해 전정영이 괴멸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적룡마교(赤龍魔敎).>

 

그것이 그 문파의 이름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그 옛날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마교(魔敎)의 후예였다고도 한다.

천 년 전, 마교는 구중천과 충돌하여 양패구상하고 지상에서 쓰러졌다. 한데, 그 위대한 천년마교의 후예를 자처한 인물이 성숙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적룡마존(赤龍魔尊)!

 

이것이 그 대마왕(大魔王)의 이름이었다.

적룡마존은 서역마도를 통합하여 적룡마교라는 조직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구중천(九重天)을 무너뜨리고 중원무림을 장악하여 마교의 천하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중원으로 물밀듯 들이닥쳤다.

그들 적룡마교와 최초로 무딪친 것이 바로 곤륜파였다. 곤륜은 밀종(密宗)의 불문신공과 도가(道家)의 현문신공(玄門神功)을 함께 지닌 명문대파였다.

그러나 곤륜파의 천년저력으로도 노도 같은 적룡마교를 막지 못했다.

결국, 곤륜파는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 무너진 곤륜의 문호를 일으켜 세울만한 뛰어난 삼 인(三人)의 제자가 곤륜파에 나타났다.

 

-호연굉(胡燕宏).

-추망(追亡).

-반화련(潘火蓮).

 

이름하여 곤륜삼정(崑崙三鼎)!

바로 이들 삼 인이었다.

세 사형매는 곤륜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 사람은 곤륜산의 어느 빙곡(氷谷)에서 세 권의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미항마결(須彌降魔訣).

-축골천형경(縮骨千形經).

-반야진결(般若眞訣).

 

이 비급들은 오백 년 전 천축제일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일세 고승 수미천존(須彌天尊)의 유물이었다.

하나하나가 인세에 다시없는 초절기들을 얻은 세 사형매는 뛸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세권의 비급을 각기 한권씩 수습하며 나누어가졌다.

대사형 호연굉이 수미항마결을, 둘째인 추망(追亡)이 축골천형경을, 그리고 막내인 반화련(潘火蓮)이 반야진결을 연마하기로 했다.

세 가지 불문신공을 얻은 세 사형매 곤륜삼정은 곧 폐관과 함께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그들은 이내 무서운 고수로 화해갔다.

한데, 세 사형매가 함께 생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즉, 대사형 호연굉이 막내사매 반화련을 짝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화련에게는 이미 은근히 사모하는 정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추망(追亡)이었다.

추망은 태어날 때부터 추괴한 용모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마음이 충후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함께 생활하면서 추망의 군자다움을 발견한 반화련은 은근히 추망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추망 또한 사매 반화련에게 연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추괴한 용모 때문에 섣불리 마음을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엇갈린 연정(戀情), 그것이 모든 화근의 발단이었다.

어느날 호연굉은 마침내 반화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당연히 반화련은 그런 호연굉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히고 더불어 자신이 추망을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고백했다.

그녀의 말에 호연굉은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내 무서운 질투로 변했다. 호연굉은 그 자리에서 득달같이 반화련을 덮쳐 겁탈하려 했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벌어진 일인지라 반화련은 호연굉에게 능욕당할 위기에 처했다. 호연굉은 반화련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거칠게 그녀의 처녀를 깨뜨리려 했다.

위기의 순간, 마침 외출했던 추망이 돌아왔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호연굉에게 능욕당하는 것을 본 추망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호연굉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두 사형제 간에 일장혈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과는 기습당한 호연굉의 패배였다.

 

“두고 봐라! 곤륜파는 내 손으로 뿌리까지 멸망시킬 것이다!”

 

패배한 호연굉은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달아났다.

그리고, 추망 역시 반화련이 이미 호연굉에게 능욕당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곤륜을 떠나갔다.

그 후 호연굉의 종적은 무림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추망은 천면신마(千面神魔)란 이름으로 천하를 떠돌며 호연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사형 호연굉에게 강간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충격을 받은 반화련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녀가 바로 반야신니였으며 사십 년 그 이전에 일어난 비극의 전말이었다.

 

* * *

 

등룡풍은 반야신니의 탄식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영민한 머리를 굴렸다.

(천면신마는 자신이 야수혈마의 수미천강에 격중되어 내부가 모두 으스러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혈왕천의 제이인자 야수혈마가 바로 호연굉일까?)

그때 반야신니가 그의 상념을 깨며 우울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삼 년 전에 이사형은 빈니에게 마지막 서찰을 보냈어요.”

“......!”

“그 서찰에 의하면...... 사형은 한 가지 상고신병(上古神兵)의 종적을 쫓다가 우연히 호연굉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고 했어요!”

등룡풍은 그 말에 흠칫하며 도왕 치우를 기리켰다.

“그 상고신병이란 것이 이 녹슨 칼(刀) 입니까?”

반야신니는 그 물음에 문득 고소를 지었다.

“그것은 저 고금제일인 육합성황(六合聖皇)이 남긴 여섯 자루 신병 중의 하나예요. 치우신도(蚩尤神刀)를 보고 녹슨 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주밖에 없을 거예요.”

“......!”

등룡풍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반야신니는 낮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사형의 서찰에 의하면 호연굉은 구중천에 가입하였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만 적었을 뿐 구중천의 어느 문파인지는 적어놓지 않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바로 야수혈마......!)

등룡풍은 자칫 큰소리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천불곡 밖에서 무서운 내공이 실린 장소성이 들려왔다. 마치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장소성이었다.

그 소리는 곧장 모래바람을 뚫고 날아와 반야암을 온통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

“......!”

순간 등룡풍과 반야신니의 안색이 동시에 홱 변했다.

“야수팔흉의 괴수가 오고 있어요!”

반야신니는 다급히 품 속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한 권의 얇은 양피비급과 하나의 영웅건(英雄巾)이 그것이었다.

 

<반야진결(般若眞訣).>

 

빛바랜 양피비급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축의 고승 수미천존이 남긴 세 가지 불문절기 중 하나였다.

호연굉이 가져간 수미항마결이 공격전용임에 비해 반야진결은 수비전용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반야진결로 일어나는 반야강기는 최강의 호신기공이었다. 잘못 반야신강을 가격하면 적은 그 몇배의 반탄강기에 휘말려 내부가 모조리 으스러지고 만다.

야수팔흉이 죽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멋모르고 반야신니를 혈영강살로 내쳤다가 반진당해 내부가 으스러져 절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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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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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왕 치우

 

 

 

자면제왕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등룡풍은 서둘러 나무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웃기는 늙은이군! 살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는 냉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츠츠츠!

몸을 돌려 세우는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용의 흔적이 급격히 엷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룡쇄심인은 본래 자면제왕이 자랑하는 독문살수였다. 그것에 격중되면 대뇌에 직접 타격이 가해져 죽고 만다. 그 무서움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무서운 자룡쇄심인이 소년 등룡풍의 살갗도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종(藥宗)의 후예를 건드린 빚은 꼭 기억해 두겠다 자면제왕 독고황!”

등룡풍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급히 부엌 옆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검박하게 정돈된 방 한쪽에는 튼튼해보이는 나무 침대가 놓여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등룡풍은 급히 나무침상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긍......!

그러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침대가 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등룡풍은 뛰듯이 지하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중앙에는 약을 달이는 커다란 청동단로(靑銅丹爐)가 놓여있고 사방 벽에는 수많은 약병과 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석실 한편에는 쇠로 만든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철제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인물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물론 자면제왕에게 천면신마라 불린 회포노인이었다.

“너무 지체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다!”

등룡풍은 급히 침상의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막 회포노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팍!

돌연 회포노인의 손이 강철수갑같이 등룡풍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악!”

등룡풍은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절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번쩍!

“......!”

회포노인의 눈이 벼락치듯 떠지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노려보았다.

“깨...... 깨어나셨군요!”

등룡풍은 고통 속에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너는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와 어떤 관계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등 아래에서 한 권의 고경(古經)을 꺼냈다.

그것은 다 낡은 양피지의 책자였다.

 

<약종천황경(藥宗天皇經)!>

 

고서(古書)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의성(醫聖) 편작(騙鵲)이 지은 세 권의 의경(醫經)중 한 권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편작은 약종경(藥宗經), 기의경(奇醫經), 천독경(千毒經) 등 삼 편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약종천황경은 바로 그 중 약종경(藥宗經)이었다.

약종경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의 구분, 이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약을 채취하러 천하의 험산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그에 쓰이는 한 가지 절정 경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탄신폭등비(彈身暴騰飛)라는 그 경신절기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고래로 약종경(藥宗經)을 연마한 편작의 후예를 약종일맥(藥宗一脈)이라고 일컫는다.

약종일맥의 의생들은 약을 쓰고 해독하는데 있어 단연 환우제일이었다.

 

흠칫 놀라던 등룡풍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천외약종이란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저의 아버님 함자가 사(獅)자 추(追)자 되십니다.”

그 말에 회포노인의 눈에 한 가닥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천외약종 등사추는 올해 이미 백 살이 넘었는데...... 게다가 그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거늘......!)

그는 내심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였다.

당대 약종일맥의 종사인 그는, 그러나 이십 년 전 한 가지 일로 중원무림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인들의 질책에 밀려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변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면 이미 백 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십 오륙세 정도된 어린 소년 등룡풍이 천외약종의 아들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회포노인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부가 결례했다면 용서하게, 소형제!”

회포노인은 등룡풍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이어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면......”

등룡풍은 급히 말리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포노인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은 탓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네, 소형제! 노부는...... 곧 한줌 독수(毒水)로 녹아들 것이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장께서 천년시독(千年屍毒)에 중독된 것은 알지만 제가 능히......”

등룡풍은 회포노인을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독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네! 천년시독의 해독정도야 약종일맥의 후예인 소형제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겠지. 하지만 사실 노부는 그외에도 한 가지 지독한 불문신공에 맞아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상태라네!”

“아!”

등룡풍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는 회포노인이 중독된 것 외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회포노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를 다치게 한 자는...... 방금 나타났던 야수혈마(野獸血魔)라는 자이네. 그 자는...... 수미천강인(須彌天罡刃)이라는 불문항마절기를 지녔는데...... 그것이 노부의 내부를 산산이 바스러 뜨려놓았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회포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검푸르게 변해갔다. 그것은 천년시독이 대뇌까지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개의치 않고 힘겨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본래 중(僧)이었네. 법호는...... 추망(醜亡)...... 하지만 무림인들에게는...... 천면신마(千面神魔)라고 불리웠지!”

“천면신마!”

등룡풍은 긴장된 음성으로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천면신마라 자처한 회포노인,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면신마의 고통은 극에 이른 듯했다. 그는 안면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네. 이...... 물건을...... 천불동(千佛洞) 반야암(般若庵)의...... 반야신니(般若神尼)에게...... 전해 주게!”

그는 침상 옆에 놓인 길쭉한 물건을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말에서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소중하게 안고 있던 물건이었다. 둘둘 만 무명천의 끝으로 삐죽하게 녹슨 칼자루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등룡풍은 엄숙한 안색으로 이어지는 천면신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면신마의 음성은 끊어질 듯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반야...... 신니에게 그것을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해 주게. 천황(天皇)의 종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그놈들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

“......!”

등룡풍은 긴장된 표정으로 천면신마를 주시했다.

아! 이미 천면신마의 손 끝은 검푸른 독수로 녹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면신마는 사력을 다해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주게나. 노부...... 추망(醜亡)은...... 한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그것이 천면신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쿵!

마침내 그는 모로 쓰러졌다.

그러자,

츠으......

기다렸다는 듯 이내 그의 신체는 급격히 검푸른 독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면신마,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

등룡풍은 멍하니 독수로 변한 천면신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천년시독! 정말 지독하구나!”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편히 잠드시기를.....! 노인장의 유언은 잊지 않겠어요.”

그는 경건하게 합장하며 천면신마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려 보았다.

“반야암(般若庵)...... 반야신니(般若神尼)......!”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등룡풍은 침중한 안색으로 천면신마의 시체를 거두었다. 시체라고 하나 시퍼런 독수와 몇 줌의 녹지 않은 모발이 전부였지만......

툭......!

헌데 등룡풍이 천면신마의 회색장포를 집어들자 무엇인가 발 끝으로 떨어졌다.

“......!”

그것은 검은색의 가죽주머니였다.

등룡풍은 허리를 굽혀 가죽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한 권의 비급과 여러가지 변장도구가 들어 있었다.

등룡풍은 먼저 비급을 꺼내 펼쳐보았다.

 

<천면경(千面經).>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천면......경?”

등룡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비급을 한 장 넘겨보았다. 그러자 깨알같이 빽빽한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

등룡풍은 호기심을 느끼며 비급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추망(醜亡)은 우연히 천축(天竺) 유가문(兪家門)의 비급 반부를 얻게 되었다. 그것에는 골격과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축골역형신공(縮骨易形神功)의 구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래 추괴한 용모를 지녔던 노납은 뛸 듯이 기뻐했으며 축골역형신공을 연구하여 천 개의 얼굴(千面)을 지니게 되니...... 뭇 중생들이 노납을 일컬어 천면신마(千面魔宗)이라고 했다...... 중략...... 노납의 공부가 모자라 축골역형신공의 마지막 단계인 전능환영결(全能幻影訣)을 연마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노부 필생의 한 가지 원한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대충 그러했다.

천면경은 천면신마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천면신마는 오래 전에 멸망한 천축 유가문의 비급 반부를 얻었었다. 그의 천면절기는 바로 그 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 비급의 절기로 천 개의 얼굴을 지녀 천하를 우롱할 수 있었다.

등룡풍은 모르고 있었으나 천면신마란 이름은 무림최고의 신비로 통했다.

등룡풍은 천면경을 덮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후인을 만나면 전해 주어야지!”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천면신마가 건네준 길쭉한 물체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인데 이 노인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 했을까?”

그것은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무명천을 통해 싸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등룡풍은 조심스럽게 무명천을 풀어보았다.

순간,

“칼(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무명천 속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칼(刀)이었다.

하지만 등룡풍이 놀란 이유는 그 칼이 너무도 볼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길이는 석 자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칼 전체에는 녹이 덕지덕지 앉아 있어 도저히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녹슨 칼의 손잡이에는 흐릿한 전자체(篆字體)로 도명(刀名)이 새겨져있었다.

 

-도왕(刀王) 치우(蚩尤).

 

그것을 본 등룡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왕? 이 녹슨 쇠붙이가 칼(刀)의 제왕(帝王)이라고?”

그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무명천으로 다시 도왕 치우를 둘둘 말아 쌌다.

“어쨌든 부탁을 받았으니 반야암이란 곳에 전해 주기는 전해 주어야지!”

등룡풍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치우신도를 조심스럽게 싸들고 석실을 나섰다.

 

* * *

 

쉬-이잉!

거친 모래바람이 뿌옇게 옥문관 일대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황량한 바람 속으로 흐릿한 태양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朝),

마침내 하루가 열리는 아침인 것이다.

태양이 떠올라 추위는 다소 덜해진 듯했다. 하나, 거칠고 사나운 모랫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불동(千佛洞).

 

옥문관 너머 서역쪽 삼십여 리 부근에는 가파른 절벽이 하나 서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석벽을 파고 그곳에 수많은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하여 천불동, 또는 막고굴(莫古窟)이라 불리웠다.

당대(唐代)에 천축(天竺)을 다녀온 신라국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往吾天竺國傳)을 남긴 동굴의 암자도 바로 이곳 천불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문득 모랫바람 속으로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세찬 바람을 뚫고 옥문관 쪽에선 일인(一人) 일기(一騎)가 나타났다. 아니, 그중 일기는 말(馬)이 아니라 한 필의 늙은 당나귀(驢)였다.

당나귀의 등 위에는 전신을 온통 두터운 천으로 감싼 한 명의 소년이 타고 있었다. 소년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눈에 들어갈까 봐 당나귀의 갈기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었다.

따각...... 따각......

늙은 당나귀는 소년을 태우고 천천히 천불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힘은 없으나 그 대신 노련한 그 당나귀는 기승스런 사풍 속에서도 제대로 천불동을 찾아온 것이었다.

“반야암(般若庵)은 저쪽이었지!”

소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전면을 주시했다.

등룡풍! 소년은 바로 등룡풍이었다.

뿌연 모랫바람 속으로 두 개의 절벽이 맞닿은 아늑한 골짜기가 바라다 보였다. 그 골짜기는 천불곡(千佛谷)이라 불렸으며 그 끝에 한 채의 암자가 절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반야암(般若庵).>

 

그 암자가 바로 반야암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반야암에는 여승들, 즉 비구니들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곡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등룡풍도 몇 번 천불동에는 왔었으나 반야암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등룡풍은 힘들어 하는 늙은 당나귀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푸르르.....!

당나귀는 한 차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 느린 걸음을 옮겨 천불곡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헌데 천불곡의 입구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연 무엇을 발견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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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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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새벽의 방문자

 

 

 

-옥문관(玉門關)!

 

중원의 끝자락에 자리한 야만(野蠻)과 풍요(豊饒)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

잘 알려진 대로 옥문관은 중원에서 서역(西域)으로 드나드는 관문이다. 옥문관을 넘어서면 인간은 문명의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자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만 한다.

전한(前漢)시대 월지(月氏)를 찾아나섰던 장건(張騫) 이래 야심과 청운의 꿈을 품고 옥문관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불귀고혼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다 알겠는가?

때는 여명(黎明) 무렵이다.

쉬이잉! 쐐애앵!

비단폭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를 머금은 삭풍(朔風)이다. 옥문관 너머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황야에서 불어오는 이 삭풍에는 다량의 모래까지 섞여 있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삭풍의 기세등등함 때문인지 옥문관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량한 분지 중앙에 사암(砂岩)을 쌓아 구축한 성벽 안쪽에는 천여 채의 가옥들이 넓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시사철 서역에서 불어오는 드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옥문관 일대의 가옥들은 모두 지붕이 낮은 토담집들이었다.

두두두......

문득 여명의 적막을 깨고 남쪽으로부터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필의 건마(建馬)가 옥문관의 남쪽 대로로 쫓기듯 달려들어 왔다.

푸르르!

건마는 먼길을 달려온 듯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고 있는데 전신에서는 피같이 검붉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것은 땀이 아니었다.

피(血)!

건마의 전신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후두둑......

건마가 지나는 땅에는 검붉은 피와 땀이 뒤섞여 뿌려진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인물이 말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일신에 빛바랜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그 역시 타고 있는 말과 같이 전신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원래 회색이던 그 사람의 장포는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말갈기에 파묻고 있어 용모와 나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회포인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두두두......

일인일마(一人一馬)는 기승을 부리는 삭풍을 뚫고 옥문관의 대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헌데, 대로의 북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히히힝-!

돌연 건마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너무 지치고 탈진하여 마침내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쿠-웅!

선혈을 지면으로 흩뿌리며 건마의 몸뚱이는 거칠게 길 중간으로 나뒹굴었다.

“크-윽!”

그와함께 말 등에 타고 있던 회포인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길바닦에 나뒹굴었다.

후두둑!

회포인이 나뒹군 주위는 삽시에 그의 몸에서 뿌려진 선혈로 검붉게 물들었다.

“미...... 미련한 축생(畜生)! 너마저 노부를 죽이려느냐?”

회포인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며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제서야 드러난 회포인의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포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설령 유의하여 뇌리에 새겨두었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푸르르.....!

회포인을 태우고 온 말이 간신히 비칠거리며 일어서더니 주인에게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미물! 그래도 노부가 주인인 것을 잊지 않았느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말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히힝-!

두두두......!

그러자 말은 주인이 정말 자기를 때리는 것으로 알고 깜짝 놀라 울부짖으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본 회포노인은 안색이 홱 변했다.

“아...... 안돼, 돌아와라!”

회포노인은 다급히 부르짖으며 일어났다.

두두두!

하지만 놀란 말은 길길이 날뛰는 모래바람을 뚫고 삽시에 노인의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으...... 천불동(天佛洞)이 지척인데...... 여기서 이 지경이 되다니......!”

말이 달아나자 회포노인은 낙심하여 신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크-윽!”

콰당탕!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해 회포노인은 다시 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기력이 쇄진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헌데 노인은 정신을 잃고서도 예의 무명천으로 싼 길쭉한 물체를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쉬-이잉! 고오오!

다시 칼날 같은 모래바람이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스으...... 스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포노인의 몸은 점점 휘날리는 모래 속으로 파묻혀 갔다. 오랜 시간 지속된 출혈과 삭풍에 실려온 한기로 인해 노인은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 어느 집에서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설사 깨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날같이 매서운 모래바람이 두려워 밖에 나올 엄두도 못낼 것이므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문득 대로의 우측에 있는 나지막한 토담집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조금 열려진 나무문 틈으로 불쑥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여우털로 만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칠팔세 가량 되었을까? 서북 변방의 아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에 섬세한 윤곽을 지닌 소년이었다. 짙은 검미와 곧은 콧날, 유난히 붉고 선명한 입술이 흰 피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소년의 두 눈은 더없이 맑고 초롱초롱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게 반짝이며 지혜로 가득 찬 소년의 두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끌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 사람이잖아!”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던 소년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며 동그랗게 떠졌다.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회포노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소년은 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휘이잉!

집을 나서는 순간 드센 모래바람이 소년의 크지 않은 체구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뛰듯이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지독하게 다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겠는 걸!”

소년은 회포노인의 온몸이 무수한 상처로 뒤덮인 것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차!”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회포노인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넣어 질질 끌고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회포노인의 몸은 의외로 무거워 소년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년은 회포노인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간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주위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닦고 급히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쉬-이잉!

다시 거센 모래바람이 대로를 스치며 회포노인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채 일다경(一茶更)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화라락!

거친 모래바람을 타고 하나의 인영이 회포노인이 쓰러졌던 곳에 날아내렸다.

“......!”

길에 내려서자마자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는 이 인물은 구척의 당당한 체구에 검붉은 자색(紫色)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이 노인은 얼굴에도 은은한 자색(紫色)이 떠돌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배에까지 닿아있는 긴 수염 역시 짙은 자색을 띠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자면인(紫面人)의 눈은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가 강인하면서도 사나운 인상을 풍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삼엄하고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화드득-!

거센 삭풍이 자면인의 옷깃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하지만 자면인은 미동도 않고 우뚝 선 채 매섭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번쩍!

그러던 어느 순간 여우털 모자를 쓴 소년이 들어간 집쪽을 주시하던 자면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일어났다.

자면인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년의 집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검붉은 자색의 광채가 번져나오는 자면인의 눈에 소년의 집 문설주에 한줄기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들어왔다.

“흥! 천면신마(千面神魔)! 그렇게도 구차하게 살고 싶었는가! 쥐새끼같이 이런 오두막집에 기어들어가다니......!”

자면인은 얄팍한 입술 끝을 올리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쾅!

다음 순간 자면인은 발로 거칠게 나무문을 걷어찼다.

쉬-이잉!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친 모랫바람이 집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

자면인은 매서운 눈길로 빠르게 집 안을 살펴보았다.

열려진 나무 문 안쪽은 넓지 않은 거실인데 천정에는 수많은 약봉지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거실 저 편으로 부엌과 방으로 통하는 문 두 개가 보였다.

한데 맨 흙이 드러나 있는 거실 바닥에는 금방 흘린 듯한 선혈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자면인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천면신마! 언제까지 쥐새끼같이 숨어 있을 작정인가?”

그러면서 집 안쪽에 대고 우렁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세요? 저희 약포(藥鋪)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요!”

약간 짜증이 섞인 소년의 음성이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끼-익!

이어 부엌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걸어나왔다. 물론 회포노인을 구한 그 소년이었다.

“......”

한데, 소년을 보는 순간 자면인은 그만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소년은 몸 여기저기에 온통 시뻘건 피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오른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왼손은 목이 잘린 닭을 움켜쥐고 있다. 그 닭은 방금 전에 목이 잘린 듯 다리와 날개를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자면인의 얼굴이 일순 낭패로 물들었다.

(닭피였는가?)

순간 그는 질풍같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집안을 둘러보았다.

“......”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큼직한 두 눈에는 은은한 조소의 빛이 떠돌았다. 자면인이 그것을 보았다면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으음......”

한 차례 집안을 둘러번 자면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건 뭐냐?”

자면인은 자색의 광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의 손에 들린 닭을 주시했다.

자면인의 살기어린 시선을 접한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이...... 이거요? 보시다시피 제 아침거리인데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바람에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어요.”

그는 모가지 잘린 닭을 들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면인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의 태도에서 조금도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지만 자면인은 의심을 다 풀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소년은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용풍(龍風). 등룡풍(登龍風)이라고 해요.”

“등룡풍......”

자면인은 소년의 이름을 입 안으로 되뇌이며 다시 한 번 대청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천정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약봉지에 이르렀다. 아마도 소년 등룡풍의 집은 약포를 하는 듯했다.

자면인은 다시 등룡풍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안에 어른들은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등룡풍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버님과 저 단둘인데...... 아버님은 장성 너머로 채약하러 가셨어요.”

“그래?”

번-쩍!

무심코 중얼거리던 자면인의 눈이 돌연 급격한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검미를 곤두세우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의 아래 위를 살폈다.

(대단한 골격이다!)

꽉 움켜쥔 자면인의 손으로 문득 땀이 배어흘렀다. 그제서야 그는 소년 등룡풍의 골격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알아본 것이다.

소년의 체격은 일견하여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실로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면인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으나 눈앞의 소년 등룡풍같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골격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이...... 것은 어쩌면 전설 중의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마로 문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

달리 제왕지상(帝王之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골격 중 가장 완벽한 품상을 일컫는 말이다.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임독이맥(任督二脈),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되어 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차 천지현관이 닫히고 임독이맥이 굳어져 버린다. 그래서 지혜가 아둔해 지며 무공을 연마하는 자는 내공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용골호형지체는 달랐다. 그 골격을 지닌 인물은 나이가 들어도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천지현관은 언제나 활짝 열려져 있으며 임독이맥은 영원히 굳어지지 않는다.

내공을 연마하면 막힘없이 증가하여 범인이 백 년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용골호형지체의 인간은 단 일 년이면 얻을 수 있게 된다.

천지현관이 막혀 있지 않아 그의 지혜는 막힘이 없으며 무공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용골호형지체를 지닌 인간이 일견하여 연약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몸이 어머니의 태내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왕품골(帝王品骨)-!

인간 중 가장 완벽한 용골호형지체의 골격을 지닌 소년, 바로 그 소년 등룡풍이 지금 자면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놈이 무공을 연마하면 십 년이 못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적수가 없게 된다!)

자면인은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짝 마름을 느꼈다.

그는 등룡풍을 주시하며 내심 침중하게 생각을 굴렸다.

(이놈은...... 후일 구중천자(九重天子)가 되려는 본좌의 최대최강의 적수가 될 놈이다. 게다가 만일 구중천(九重天)의 다른 놈들 손에 이놈이 들어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면인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자광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열 배 강해졌다.

츠-읏!

순간 등룡풍은 작렬하는 듯한 자면인의 눈빛에 들고 있던 닭을 놓치며 휘청 물러섰다.

(눈이...... 타는 듯하다!)

자면인의 두 눈은 뚫어질 듯 등룡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죽이든지 아니면 본좌의 제자로 삼든지 해야만 한다!)

그의 눈이 문득 살기로 붉게 물들었다.

쩌정!

다음 순간 그의 손 끝에서 벼락치는 듯한 자색의 벼락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등룡풍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 사람......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비칠비칠 물러섰다.

자면인은 그런 등룡풍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쩌저정-!

자색벼락이 흐르는 그의 오늘손이 점점 치켜 들려졌다. 그의 손이 내려쳐지면 등룡풍은 채 싹도 피워보기 전에 한줌 피모래로 화할 판국이었다.

등룡풍은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그로서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헌데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흐흐흐흐! 놀라운데? 당당한 제왕천(帝王天)의 천주(天主) 자면제왕(紫面帝王)께서 무공도 모르는 소년을 헤치려 하다니......!”

돌연 문 밖에서 한 줄기 싸늘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자면인, 자면제왕(紫面帝王)의 입에서 벼락치는 듯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꽈르릉!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홱 뒤집히며 집 밖으로 한 줄기 자색벼락을 후려쳐냈다.

빠카카캉!

직후 철벽(鐵壁)을 두드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썩 집안을 뒤흔들었다. 그와함께 마치 폭풍이 불어닦친 것같은 엄청난 돌풍이 문밖의 대로를 휩쓸어 자욱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

그러나 직후 자면인은 강력한 반탄력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집밖의 누군가가 마주 쳐낸 강력한 장력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던 것이다. 자면제왕은 자칫 그 반진에 밀려 한 걸음 밀려날뻔 했던 것이다.

자면제왕이 어깨를 들썩일 때였다,

“크읏! 자전신강(紫電神罡)! 역시 명불허전인데......!”

쿵쿵!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집밖에서 누군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휘청휘청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거푸 다섯걸음을 물러나서야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저놈은...!)

몸을 세운 그 인물을 바라본 자면제왕의 날카로운 눈에서 번뜩 이채가 흘러나왔다.

나타난 인물은 일신에 피칠을 한 듯 붉은 혈포를 걸친 거한(巨漢)이었다. 구척이 넘는 당당한 거구를 지닌 인물인데 기이하게도 그자의 몸 전체에는 핏빛의 털(血毛)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털이 나지 않은 곳은 얼굴의 앞부분 외에는 없었다. 흡사 거대한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괴인(怪人)이었다.

혈모괴인(血毛怪人)의 두 눈에는 핏빛 안광이 벼락치듯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자면인에 못지 않은 패도적인 눈빛이었다.

“혈왕천(血王天)의 제이인자...... 야수혈마(野獸血魔)!”

혈모괴인을 본 자면인의 입에서 앓는 듯한 한 소리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큿! 역시 무섭소. 자칫 천주(天主)의 손에 극락구경을 할 뻔했구료.”

야수혈왕이라 불린 괴인은 음침한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오싹한 느낌을 준다.

자면제왕은 집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왕천까지 이번 일에 흥미를 느꼈다니 놀랍군.”

“크큿! 별 말씀을...... 육합천병(六合天兵)에 흥미를 지닌 것은 비단 당신의 제왕천이나 우리 혈왕천 뿐만이 아니외다.”

야수혈마는 음침하게 말을 받으며 흘깃 자면제왕의 뒤에 서있는 소년 등룡풍을 주시했다.

직후 그의 눈에서도 은은한 경악의 빛이 흘렀다. 아수혈마 역시 등룡풍의 뛰어난 골격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자면제왕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몸을 약간 움직여 등룡풍의 모습을 가렸다. 이어, 그는 야수혈마의 흥미를 등룡풍에게서 옮기려는 의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혈왕천의 여제(女帝) 혈모(血母)께서도 천면신마를 쫓아 이곳까지 오셨소?”

“혈모께서는......”

야수혈마는 두 눈을 야릇하게 번뜩이며 무엇이라 말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삐이익-!

돌연 한 소리 날카로운 호각성이 서북방에서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회포노인이 타고온 말이 달아난 곳이었다.

“......”

“......”

자면제왕과 야수혈마는 동시에 흠칫했다.

“천면신마의 종적이 발견된 듯하구료. 노부는 이만 실례하오.”

피-잉!

다음 순간 야수혈마는 히죽 웃으며 유령같이 모랫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도 아니고 야수고 아닌 기분 나쁜 놈!”

자면제왕은 야수혈마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언젠가 네놈의 보기 싫은 껍질을 노부의 손으로 벗겨 버린다!”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흘렀다.

이어 그는 다시 등룡풍에게로 돌아섰다.

“......!”

등룡풍을 바라보는 자면제왕의 눈빛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변했다.

등룡풍은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생사가 몇 차례나 뒤바뀌고 있음을 알고 내심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자면제왕은 결심을 한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으면 너를 본좌의 제자로 삼겠지만...... 치우신도(蚩尤神刀)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팟!

그는 말과 함께 등룡풍의 미간을 향해 섬전같이 일지(一指)를 찔렀다.

“악!”

쿵쿵!

순간 등룡풍은 미간을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비칠 물러섰다. 그런 그의 미간에 어느 틈엔가 은은한 자색의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진 용무늬를 본 자면제왕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흐흣! 너는 노부의 자룡쇄심인(紫龍碎心印)에 제압당했다! 일 년 내로 노부가 그것을 풀어 주지 않으면 너는 대뇌가 녹아 들어가 죽고 만다. 살고 싶다면...... 청해(靑海)의 제왕보(帝王堡)로 노부 자면제왕 독고황(獨孤皇)을 찾아와랏!”

자면제왕은 등룡풍에게 음산하게 웃어보이고는 유령같이 몸을 날렸다.

스으......

이내 자면제왕의 모습은 등룡풍의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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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구중천 -九重天

 

                       제1권

 

 

 

서장(1)

 

               九重天, 아홉의 神話

 

 

 

구중천(九重天)!

아홉 겹(九重)의 하늘(天)-!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가 신비(神秘) 속에 싸여 있다고 하여 구중천(九重天)이라는 아홉 겹의 하늘이 세상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자 또한 없었다.

신비(神秘)와 공포(恐怖)의 아홉 하늘!

그 아홉 개의 하늘(九重天)이 열리는 순간 강호.....무림에 종말이 도래한다는 전설(傳說)은 이미 낡디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뇌왕의 하늘(雷王天)!

-빙하의 하늘(氷河天)!

-혈왕의 하늘(血王天)!

-화왕의 하늘(花王天)!

-유령의 하늘(幽靈天)

-독마의 하늘(毒魔天)!

-제왕의 하늘(帝王天)!

-번뇌의 하늘(煩惱天)!

-신비의 하늘(神秘天)!

 

이것이 구중천(九重天)이라고 했다.

세상사람들이 아는 것은 다만 그 아홉 하늘의 이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구중천에 대한 세인들의 그같은 무지(無知)와 경외감(敬畏感)은 그 아홉 하늘에 신비와 공포를 한층 더하게 만들었다.

아홉의 하늘 중 단 하나의 하늘만 열려도 구주팔황(九州八荒)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변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아홉 겹의 하늘(九重天)!

아홉의 야망(野望)-!

길고도 파란만장한 천년풍운(千年風雲)은 바로 그곳 구중천에서 시작된다.

 

* * *

 

<구중천(九重天)!>

 

그들의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천여 년 전이었다.

당시 구주팔황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변황(邊荒)에서 일어난 무서운 악마(惡魔)의 추종자들인 천년마교(千年魔敎)였다.

천마노조(天魔老祖)라는 전설 속의 대마종(大魔宗)이 천년마교를 세운 후, 그들은 천여 년 간 무적(無敵)을 구가했다.

아무도 마교(魔敎)의 아성을 깨뜨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고금이래 지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가장 강한 상고무림의 여섯 개의 조직-영겁육패(永劫六覇) 중에서도 최강으로 통했다.

더욱이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 앞에 천년(千年)의 수식을 붙여 천년마교(千年魔敎)라고 자칭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교의 무리는 막강하고 위대했었다.

한데 천년 전 어느날이었다.

그 위대한 마교가 단 일백 일 만에 하나의 신흥세력(新興勢力)과의 싸움에서 패망하여 지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중원의 아홉 곳에서 돌연 일어난 아홉 개의 무서운 신흥세력들!

그들이 바로 구중천(九重天)이었으며,

그것이 향후 천여 년 간 무림을 공포로 떨게 만든 아홉 겹의 하늘-구중천의 전설의 시작이었다.

흡사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나 저 위대한 마교 천하무적의 신화를 깨뜨린 구중천-

한데,

마교를 깨뜨린 직후 구중천은 일제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왜 구중천의 아홉 하늘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구중천 내부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후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구중천은 단 한번도 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의 현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천년무림사가 바로 저 구중천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점철되었음을....!

또한 구중천이 언젠가 무림의 막후 지배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전율스러운 막강한 힘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구중천 사이의 전면적인 대쟁패(大爭覇)의 날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그것을 아는 자는 아마도 지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다. 구중천의 무리가 아닌 이상은......

 

아홉의 하늘(天)-!

아홉의 야망(野望)-!

 

그것이 바로 구중천(九重天)이며, 그들의 진정한 신화(神話)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직은....!

 

 

 

서장(2)

 

                                六合天兵, 여섯의 傳說

 

 

 

구중천(九重天)이 아직 그 싹(芽)도 보이지 않았을 아득한 옛날,

그곳에 한 명 광인(狂人)이 있었다.

그는 허황되게도 인간의 몸으로 신(神)이 되기를 원했던, 미쳐도 단단히 미친 광인(狂人)이었다.

 

-육합성황(六合聖皇)!

 

후세에 그 광인은 그같은 이름으로 불리웠다.

광인이기는 하였으되 그의 무공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기에 성황(聖皇)이라는 최고 최대의 찬사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고금최강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었다.

육합성황(六合聖皇)!

그는 평생을 무공 한 가지에 미쳐 살았었다. 오죽했으면 그는 신혼 첫날밤에 다시 무림으로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그는 수많은 강자(强者)들과 싸우고 명인(名人)들에게 도전하며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승부(勝負)는 바로 그의 유일한 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숱한 싸움을 겪었고...... 그러면서 그는 막강해져 갔다.

그렇게 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그 무공에 미친 광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더 이상 자신을 능가하는 자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이 세상이 생긴 이래 그 광인 육합성황을 능가하는 강자는 결코 없었다. 저 전설의 천마노조(天魔老祖)라고 해도 결코 그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만족해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룻밤을 함께 지낸 그의 아름답던 아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외간 남자와 사통(私通)했으며 그나마 이미 죽어 한 줌 흙이 된 후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굶어 죽었다고 했다.

고향을 떠날 때는 검던 육합성황의 머리는 이미 새하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정녕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있다면 다만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는 허망한 명성 뿐....!

그렇게 한 명의 광인(狂人)은 쓸쓸하게 죽어갔다.

죽어가면서 육합성황은 자신의 마지막 능력을 짜모아 여섯 자루 병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여섯 자루의 병기,

그것은 각기 한 자루 씩의 검(劍), 도(刀), 편(鞭), 자(尺), 도끼(斧), 장(杖)이라고 했다.

 

-사일천황검(射日天皇劍)!

-도왕(刀王) 치우(蚩尤)!

-만독신마편(萬毒神魔鞭)!

-번뇌철척(煩惱鐵尺)!

-파천혈부(破天血斧)!

-지존묵장(至尊墨杖)!

 

이것이 육합성황이 죽어가며 만든 여섯 자루의 병기였다.

육합성황은 그 여섯 자루 병기에다가 자신의 필생 절학을 새겨넣었다고 전한다.

 

<육합천병(六合天兵).>

 

평생을 무공에 미쳐 살았던 한 명 광인이 남긴 그 여섯 자루의 병기는 그렇게 불렸다.

육합천병은 그 후 천하각지로 흩어졌다.

그것은 그 후 무림패왕의 상징이 되었다. 왜냐하면 육합천병을 얻는 자는 곧 천하무적이 되기 때문이다.

육합천병은 하나하나가 가히 하늘을 깨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육합천병 위에 새겨진 육합성황의 절학이었다.

고금제일인이었던 육합성황-!

그의 절기를 한 가지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곧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 미친 광인이 남긴 여섯 자루의 신병(神兵)-!

그것이 다시 세상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수없는 혈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났건만 육합천병은 여전히 무림인들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채 천하에 떠돌고 있었다.

미친 세상에 던져진 여섯 자루의 미친 마물(魔物)-!

그것이 바로 육합천병이었다.

광기(狂氣)와 허무(虛無)로 주조(鑄造)된 마물 육합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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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기다려온 여인

 

 

 

섭대낭은 벽혈마희(碧血魔姬)라 불리며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력이 있다.

다시 무림에 나가면 구대문파 장문인들일지라도 그녀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헌데 겨우 반 년 수련한 요문천의 무공이 섭대낭에 필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터무니없는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광효는 섭대낭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요문천은 영특할 뿐 아니라 놀라운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불과 십여 년 공부한 것만으로 천하의 재사(才士)들이 모여 있는 한림원(翰林院)의 어떤 학사(學士)에게도 뒤지 않는 학문을 쌓았었다.

그런 요문천이 식음과 수면까지 전폐하고 무공 수련에 매진해왔다.

반년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히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무공에 대한 이해야 워낙 영특한 분이니 막힘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천녀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도련님의 심후한 공력이옵니다.”

섭대낭이 아미를 모으며 말했다.

“석 달 전쯤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문천이의 내공이 일갑자(一甲子)를 상회하는 것같긴 했다.”

요광효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광효도 정심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현재 도련님의 내공은 삼갑자(三甲子)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추측되옵니다.”

섭대낭이 조금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삼갑자!”

요광효도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말이 쉬워 삼갑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팔십 년의 세월동안을 쉬지 않고 수련해야 쌓을 수 있는 공력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인간이 백팔십 년을 살 수는 없다.

아무리 내공이 심후한 무림고수라도 백오십 년 정도 사는 것이 한계다.

당연히 삼갑자 수준의 내공을 지니려면 수련하는 것 외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직접 수련하지 않아도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데에는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흡정대법(吸精大法)으로 타인의 공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다만 흡정대법을 쓰면 대개는 끝이 좋지 않다.

이질적인 내공이 몸속에서 뒤섞인 채 존재하게 되는 탓이다.

사마외도의 인간들이 다양한 흡정대법을 구사하면서도 절세고수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타인에게서 공력을 물려받는 개정대법(開頂大法)이 있다.

흡정대법과 달리 개정대법은 동일한 내공심법을 수련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시전이 가능하다.

같은 성질의 무공을 익혔으므로 흡정대법처럼 주화입마에 빠지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다만 개정대법은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십 년 수위의 공력을 전수받으면 일이 년 수위 정도의 내공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개정대법의 이같은 비효율이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대파들이라고 해서 늘 절세고수가 나오지는 못하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내공 증진에 효과가 있는 약초나 그것들로 만든 영약을 복용하면 단 시일 내에 내공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대표적인 약초가 성형하수오(成形何首烏)나 삼왕(蔘王)등이며,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영약으로는 소림사의 대환단(大丸丹)이 있다.

대환단은 내상의 치료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삼십 년 동안 면벽 수련한 것에 필적하는 내공을 단번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영약에도 한계는 있다.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영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 영약의 약효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유다.

 

“본부의 연공관에도 다양하고 효능이 탁월한 영약들이 준비되어 있긴 하다만... 불과 반 년만에 삼갑자의 내공을 쌓은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요광효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인물은 불과 열 명 남짓일 것이다.

“천녀의 생각으로는 철접... 동영의 그 야차같은 년에게 납치되셨을 때 어떤 기연을 만나셨던 것같사옵니다.”

섭대낭도 약간 상기 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요문천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파사의 내단을 얻었겠군.”

요광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예?”

갑작스러운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아니다. 문천이의 내공이 심후해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요광효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내일 있을 폐하의 개선식(凱旋式) 준비 때문에 올해의 기제사(忌祭祀)에는 참석할 수 없다. 그러니 네가 문천이를 데리고 영은사(永恩寺)에 다녀와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름과 출신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요광효의 처, 즉 요문천의 생모의 기일(忌日)이다.

마씨(馬氏)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은 십팔 년 전 바로 오늘 죽었다.

그래서 오늘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무렵에 제사를 지내야한다.

요씨 집안에는 따로 사당이 없다.

대신 북경 외곽의 영은사라는 절에 조상들의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요광효가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불문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문이다.

“영은사의 주지 무진사태(無塵師太)에게는 기별을 넣어놓았으니 문천이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예...”

요광효의 말에 섭대낭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제사를 지내러 외출한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요문천과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낭아.”

속마음을 들킬까봐 서둘러 방을 나가려는 섭대낭을 요광효가 불러 세웠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섭대낭은 문고리를 잡다가 요광효를 돌아보았다.

“문천이도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다. 응석을 전부 받아주지는 말거라.”

요문천이 그런 섭대낭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명... 명심하겠사옵니다.”

섭대낭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요광효의 방을 나서면서 섭대낭은 가슴 한 구석에 전에 없는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요광효의 마지막 당부에 복잡한 심사가 서려있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

 

퍼억! 푸스스!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청강석(靑剛石) 기둥이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럭저럭 지옥장강(地獄掌罡)도 쓸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요문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청강석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뒀다.

그가 손바닥을 대고 있던 청강석은 옥(玉)의 일종으로 단단하기가 강철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지옥장강이 흘러들어간 결과다.

지옥장강이 주입된 대상은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하지만 내부는 강한 진동으로 인해 완전히 으스러져버린다.

만일 인간의 몸에 지옥장강이 닿으면 뼈가 가루가 되고 살과 내장은 곱게 갈은 곤죽처럼 변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하며 죽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옥장강은 직접 대상에 닿아야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지옥장강의 내력에 대해 아는 적이라면 직접적인 접촉을 피함으로써 지옥장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저주마경에 적힌 바로는 지옥장강은 십성(十成)에 이르면 벽공장(闢空掌)처럼 거리를 두고도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는 지옥장강에 직접 닿지 않는다 해도 내부가 으스러져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실로 지난(至難)하다.

요문천도 팔성(八成)까지는 석달만에 이르렀지만 그후로는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지옥장강을 벽공장처럼 구사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니 조급해할 건 없다.)

요문천은 모래가 되어 흩어진 청강석 기둥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이곳은 승상부의 연공관이다.

승상부에는 아주 넓고 무공 수련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연공관이 존재한다.

직접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 외에도 수천 권의 무공비급으로 채워진 서고(書庫)와 온갖 종류의 무기가 마련되어 있는 무고(武庫)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서고와 무고뿐 아니라 승상부의 연공관에는 무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영약들을 모아놓은 약고(藥庫)도 있다.

열의와 결심만 충분하다면 이 연공관에 들어오는 사람은 절세고수가 되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요문천은 연공관 내의 무공비급과 영약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무공은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면 충분하다.

또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상태라 공력을 증진시켜주는 영약은 먹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문천이 연공관에서 가끔 드나드는 곳은 무기들이 마련되어 있는 무고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저주마경과 함께 독왕보궁에 남겨두고 왔다.

지옥교가 워낙 특이하게 생긴 탓에 남의 눈에 띄일 것을 우려해서였다.

지옥교가 없으니 마검팔식(魔劍八式)을 수련하는 데는 다른 검을 쓸 수밖에 없다.

요문천이 무고에서 고른 검은 검날이 얇으면서도 날카로워 금석을 무 베듯 한다.

날카로움으로는 지옥교에 비교해도 그리 뒤지지 않는 그 검은 전설속의 명검인 청평(淸平)이다.

 

(근접전에서는 지옥장강이 절대적이고 거리를 둔 싸움에는 마검팔식이 무적의 위력을 발휘한다.)

요문천은 청평검을 집어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검법의 초식들은 공격과 방어를 겸하게 되어 있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산 후에 적을 죽인다는 위기(圍碁;바둑)의 격언이 여지없이 통하는 것이 무공이다.

설령 내가 적을 베더라도 나 역시 적에게 베어지면 소용이 없다.

그 때문에 공격보다는 방어에 보다 비중을 두는 일반적인 무공이고 검법이다.

하지만 마검팔식은 오직 적을 베고 죽이는 데만 집중한다.

자신의 안전은 도외시하고 적의 약점과 실수를 맹렬하게 파고 들어가 공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검팔식을 상대하는 적은 기필코 피를 보게 된다.

이 검법에 마검(魔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마검팔식이 이토록 무모하게 적을 쓰러트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저주마벽 덕분이다.

저주마벽은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탁월한 호신공부다.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최대 세배의 힘으로 타격을 돌려보낸다.

저주마벽의 이같은 막강한 힘에 보호되는 덕분에 오직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지옥검조가 애첩 혈미인을 죽여서 그녀의 살가죽에 지옥성의 무공을 적을 때 저주마벽과 지옥장강과 마검팔식을 우선적으로 적은 이유가 있다.

지옥성의 열 가지 무공 지옥십결(地獄十訣)중 그 세 가지가 다른 일곱 가지보다 특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무공만으로도 지옥성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만 수련해왔다.

연공관의 다른 무공비급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요문천은 저주마경 상의 세 가지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멀지 않았다. 이제 곧 여길 나갈 수 있다.)

쩌억! 슈욱!

청펑검으로 빗발같은 검기를 그어내며 요문천은 눈을 번뜩였다.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마검팔식을 펼치면서 요문천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초겨울에 내리는 서리를 연상케하는 서늘한 분위기를 지닌 절세미녀...

순진하던 자신을 어른의 세계로 이끌어준 여인...

그녀를 요문천은 지난 반 년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그 여인은 철접 용천파다.

 

***

 

“요문천이 무공 수련에 미쳐있다?”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물었다.

삼단 같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삭도(削刀;머리 깎는 칼)에 의해 깎여 나가고 있는 중이다.

“어떤 계기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요문천은 반 년 전부터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데... 비록 섭대낭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로 확인한 것뿐이지만 요문천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고이옵니다.”

여인의 앞쪽에 무릎을 꿇은 젊은 비구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문천... 그 아이도 몇 달 후면 열아홉 살... 써먹을 수 있는 정도로 자라긴 했겠지.”

여인은 바닥에 흩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나이 든 비구니가 삭도로 머리를 밀어주고 있다.

“산동성으로 몰려든 주체(朱棣;영락제의 이름)의 졸개들이 제법 유능한 탓에 교착되어버린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북경에 잠입한 것인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로구나.”

어느덧 머리카락이 모두 밀려져서 비구니의 모습이 된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비로소 불모(佛母)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연재 종료 공지>

 

무림일기의 연재는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현재 유료로 연재중이라 형평상 더 이상 게시할 수는 없군요. 대부분의 싸이트에서는 1권 가량은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서 1권의 일부를 연재했었습니다.

이해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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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잠룡의 세월

 

 

 

흐윽!”

섭대낭은 요문천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오열을 터트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녀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요문천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정오 무렵에 돌아온 요문천으로 인해 승상부는 발칵 뒤집혔다.

섭대낭은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왔다.

요광효도 어제 있었던 영락제의 피습 사건 수습으로 분주하던 중에 승상부의 입구까지 나왔다.

몰려든 시녀들도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반면 승상부의 호장무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만일 요문천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면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미안해 유모. 걱정 끼쳐서...”

요문천은 자신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오열하는 섭대낭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그런 요문천의 눈에 요광효가 곱게 늙은 노파와 함께 승상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머리카락은 백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는 서늘한 인상의 그 노파는 신비각 사대영반의 첫째인 고독모모(孤獨母母).

고독모모는 출신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인이다.

혹자는 그녀가 고려(高麗)의 전설적인 문파 치우령(蚩尤嶺)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고독모모는 갈태독이나 사해무존에 필적하는 고수였구나.)

요문천은 섭대낭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고독모모를 살펴보았다.

그전에는 몰랐었다.

하지만 파사의 내단을 복용한 덕분인지 요문천의 눈에는 고독모모의 몸 주위로 무형의 역장(力場)이 감돌고 있는 게 들어온다.

다친 곳은 없느냐?”

다가온 요광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요문천의 몸을 살피며 묻는다.

...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요문천은 요광효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되었다. 대낭이는 문천이를 데리고 가서 쉬게 해주거라.”

요광효는 요문천의 뒤에 붙어서서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섭대낭에게 말했다.

예 부주님.”

섭대낭은 대답한 후 요문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곧 전후 경과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할 때 얘기 하거라.”

요문천의 말에 요광효는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요문천은 섭대낭에게 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들어갔고 모여들었던 하인들과 무사들도 흩어졌다.

“...”

고독모모는 섭대낭에게 이끌려 승상부 안쪽으로 가는 요문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모모의 눈에도 저 녀석이 전과 다르게 보이시는 것같소이다.”

요광효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지만 고독모모는 요광효보다 십여살 연상으로 백세(百歲)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영식이 복연(福緣)이 많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던 바인데... 이번의 소동을 겪으면서 오래되고 신령스러운 힘이 몸에 깃들었군요.”

고독모모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뜬 채 요문천을 보며 말했다.

기쁜 일이긴 하지만... 자식이 평온한 삶을 바라는 아비의 입장으로는 근심이기도 하지요.”

요광효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한 저 녀석 어미와의 약속은 지키기 힘들지 모르겠구나.)

요광효의 늙은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리고 있었다.

 

***

 

(도련님의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섭대낭은 본능적으로 그같이 느꼈다.

그녀는 요문천을 목욕시켜주고 있는 중이었다.

욕조에 들어앉은 요문천을 씻겨주면서 섭대낭을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단 하룻밤 못 본 것뿐인데 어쩐지 요문천이 낯설게 느껴진 때문이다.

외양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헌데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요문천에게서 어른의 느낌이 난다.

의젓해졌고 진중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눈빛에 깊은 우수가 어려 있다.

그 눈빛이 먼 곳의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 느껴져서 섭대낭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대체... 섬나라의 야차(夜叉)같은 계집에게 끌려가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요문천의 몸을 닦아주는 섭대낭의 손끝이 떨린다.

그녀는 머잖아 요문천이 자신의 품을 떠날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깃털이 돋아나고 날개에 힘이 생긴 아기 새는 필연적으로 둥지를 떠나 이소(離巢)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뻐해야할 일이다. 도련님이 어른스러워지는 것은 마땅히 기뻐해야만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억지로 웃는 섭대낭의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

 

반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봄이었던 계절은 어느덧 초가을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세상은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영락제의 제삼차(第三次) 몽고 친정(親征)이 진행되었다.

오십만 명의 군사를 동원한 대규모의 정벌은 황실 재정의 고갈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부작용을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산동(山東)에서는 불모(佛母)를 자처하는 백련교(白蓮敎) 출신의 여걸 당새아(唐塞兒)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새아는 임삼(林三)이라는 농부의 아내라고 알려진 여인이다.

일찍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그녀는 기연을 만나 천서(天書)와 보검(寶劍)을 얻었다고 한다.

천서와 보검은 백련교에 전해지는 세 가지 보물 광명삼보(光明三寶)에 속한다.

광명삼보는 백련교의 마지막 교주 한림아(韓林兒)가 주원장에게 암살당할 때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혹자는 광명삼보가 한림아를 암살한 주원장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팔 년 전 금릉이 연왕의 군세에 함락당할 때 황실보고에 수장되어 있던 광명삼보의 행방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 광명삼보 중 천서와 보검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육십여 년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천서와 보검을 얻은 덕분에 당새아는 백련교의 새로운 교주로 추대되었다.

당새아도 스스로를 불모로 자처하고 있는데 천서와 보검의 힘을 빌어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자유자재로 하며 재물과 의식(衣食)을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전해진다.

이에 북원(北元), 즉 몽고 정벌을 위한 영락제의 혹독한 징발과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이 당새아 주변으로 몰려들어 삽시에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웠으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세상에서 사라졌던 백련교가 육십여 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당새아가 주도한 백련교의 반란은 초반의 기세가 많이 위축된 상태다.

관군의 지속적인 투입 덕분에 산동성 밖으로는 세력을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당새아의 난으로 인해 민심은 급격히 흉흉해지고 있었다.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안정되어가던 천하의 정세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승상부는 이같은 어지러운 풍파에서 온전히 비켜나 조용했다.

반 년 전, 오이라트의 족장 토곤 타이시의 사주를 받은 동영의 인자들이 영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는 변고가 있었다.

그때 살아남은 동영의 인자들중 한명이 승상부에 난입했던 일이 있었지만 철저하게 기밀에 붙어져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외면상 평온해 보이는 승상부는 그러나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승상부의 다음 대 주인이 될 요문천의 변화 때문이었다.

 

***

 

문천이는 요즘 어찌 지내느냐?”

요광효는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섭대낭에게 물었다.

늘 밝고 활기차던 섭대낭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사이 부쩍 표정이 어두워져 요광효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 두 번,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鍊功關)에서 나오지 않고 있사옵니다.”

섭대낭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만 읽던 녀석이 무공에 관심을 갖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구나.”

요광효도 한숨을 쉬었다.

 

반 년 전 철접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요문천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승상부에는 다양한 무공비급과 영약, 무기등이 갖춰진 연공관이 있다.

요문천은 자신의 안락한 거처 대신 그 연공관에 들어가 생활해오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두 번, 밥을 먹고 목욕을 하기 위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연공관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승상부에는 고수들이 많다.

호장무사들 외에도 요광효를 존경하여 모여든 식객(食客)들 중에 강호의 기인이사들이 다수 섞여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문천의 유모인 섭대낭조차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충분히 드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요문천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청하지 않고 혼자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다.

요광효는 이와같은 요문천의 변화를 대견해했다.

하지만 유모인 섭대낭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무리하다가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혼자 무공을 수련하다 잘못되어 주화입마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노심초사해오고 있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 문천이의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인 것같으냐?”

요광효는 초췌해진 섭대낭을 측은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영락제가 몽고에 친정을 나가 있는 동안 사실상 정무(政務)는 요광효가 보고 있는 중이다.

영락제의 장남인 황태자 주고치(朱高熾)는 제법 성군(聖君)의 자질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주고치는 병약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데에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요광효가 주고치를 대신해서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요광효는 자금성에서 살다시피 해야만 했고,

지난 반년동안 요문천을 본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련님의 무공은 불과 반 년만에 천녀를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사옵니다.”

섭대낭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비록 걱정을 끼치긴 했지만 요문천이 지난 반 년동안 보인 놀라운 성취가 그녀를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그 정도냐?”

요광효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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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귀역(鬼域)에서의 초야(初夜)

 

 

 

하실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의아해진 요문천이 물었다.

철접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나란 계집,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밉거나 흉하게 보이지는 않느냐?"

철접은 그 창백한 얼굴에 살짝 홍조를 떠올리며 물었다.

"밉다니요? 소저는 제가 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답습니다."

요문천은 철접에 말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십팔 년의 세월동안 제법 많은 명문가의 미녀들을 보아온 요문천이다.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이 여()인자에 비견될만한 여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파팟!

철접이 갑자기 요문천의 가슴에 자리한 마혈(痲穴)을 찍었다.

"!"

요문천은 찌릿한 충격과 함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철접은 마혈이 찍혀 쓰러지는 요문천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서 품에 안았다.

"...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문천은 철접의 품에 안기며 당황하여 물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말은 할 수가 있는 상태였다.

"해치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거라!"

철접은 요문천을 두 팔로 안아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철접의 키가 훨씬 큰 탓에 그녀의 품에 안긴 요문천이 마치 아기처럼 보인다.

철접은 요문천을 품에 안은 채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첫번째 지하 광장으로 나섰다.

(이 여자 설마...!)

철접의 품에 안겨 보물의 산쪽으로 옮겨지며 요문천은 어떤 기대로 인해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파사의 내단까지 주저 없이 먹여준 철접이 새삼 자신을 해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저항하지 못하게 혈도를 찍었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어쩌면 이 여자는 특별한 방법으로 은혜를 갚을 생각인 것 같다.)

요문천은 기대와 흥분으로 헐떡이며 철접을 훔쳐보았다.

비록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철접의 창백하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다.

철접은 성벽처럼 쌓여있는 금괴의 벽을 지나 보물의 산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예상한 대로구나.”

보물의 산 중심부에 도착한 철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접이 요문천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마치 방처럼 꾸며져 있다.

탁자와 의자, 온갖 종류의 집기들과 함께 아주 넓은 침대도 하나 놓여있다.

언듯 보면 누군가의 침실같은 분위기다.

차이점은 침실을 구성하고 있는 집기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보물들이라는 점이다.

금괴를 천장까지 쌓아올려 벽을 만들었다.

바닥에도 금괴와 은괴를 벽돌 대신 깔아놓았다.

금괴의 벽으로 구획되어진 넓은 공간 안에 집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고 온갖 보석들로 치장이 된 물건들이다.

커다란 황금 탁자 위에는 수많은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가장 작은 접시 하나만 내다 팔아도 한 사람의 팔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침실 한쪽에 놓여있는 침대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기둥과 틀은 황금이며 그 위에 깔려있는 것은 이무기의 껍질이다.

이무기의 가죽으로 만든 그 침대는 하룻밤만 자도 어떤 질병이든 낳게 해준다는 보물이다.

갈태독은 어느 군벌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진상했던 그 교피만복침(蛟皮萬福寢)을 거의 강탈하듯 받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삼았었다.

(여기는 갈태독이 자신의 보물들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장소겠구나.)

침대로 다가가는 철접의 품에 안겨 요문천도 주변을 곁눈질로 돌아보며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갈태독은 탐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가장 큰 도락(道樂)은 자신이 모은 보물들을 혼자 감상하는 것이었다.

철접이 요문천을 데리고 들어온 이 공간은 바로 그럴 목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 이 공간에 있는 보물들이야말로 갈태독이 모은 보물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헤어지면 우린 아마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네게 진 빚을 마저 갚을 작정이다. 은혜와 원한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리 온미쯔(隱密宗;인자)의 전통이므로...!"

침대에 이른 철접은 요문천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그리고는 요문천의 몸에 걸쳐진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이러실 필요는...”

철접의 손길에 의해 옷이 벗겨지며 요문천은 헐떡거렸다.

하지만 말과 달리 요문천의 몸은 이미 기대와 흥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다.”

요문천의 옷을 벗기며 철접의 얼굴 역시 어쩔 수 없이 달아오른다.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에 처녀라니.,.. 하물며 인자라는 험한 직업을 가졌으면서...)

요문천이 놀랄 때였다.

철접이 요문천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쥐고 끌어내렸다.

요문천은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번 본 것만으로 마음을 빼앗겨버린 미녀의 눈에 알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로...)

요문천을 발가벗긴 철접은 가슴이 미어졌다.

요문천에게서 비명에 간 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반면 요문천은 이 상황이 그저 황홀할 뿐이다.

(미안해 지로야!)

철접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들인 듯 조카인 듯 키워온 어린 동생...

그 가엾은 동생은 불귀의 객이 되어 멀지 않은 곳에 누워있다.

동생이 여자도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철접이었다.

지난 밤 그녀는 지로, 즉 용차랑으로 하여금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기루에 들여보냈었다.

하지만 기녀들이 너무 대담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용차랑은 기겁을 하며 도망쳐 나왔었다.

그후 철접은 용차랑에게 맛난 음식을 사 먹인 후 천독친왕부로 돌아와 함께 잤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 용차랑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철접은 동생이 무얼 원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접은 애써 용차랑의 눈길을 피했었다.

결국 철접과 용차랑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보냈으며...

용차랑은 허무하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그토록 원하던 걸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철접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주르르!

마침내 철접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아이가 지로 대신이다. 지로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것을 이 아이에게 해주자.)

어느덧 철접에게 요문천은 용차랑의 환생인 듯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린 어린 동생을 위해 해주지 못할 일이 없다.

철접은 정성을 다해 요문천을 귀여워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문천은 현실의 일이 아닌 듯한 황홀경의 극치를 맛보게 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요문천을 귀여워해주며 철접 역시 몽롱해졌다.

그녀는 비로소 여자 인자들이 그토록 이성과의 관계에 집착하는지 깨달았다.

이 순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온전히 황홀경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지로! 지로야!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두 손으로는 요문천의 얼굴을 보듬어 쥐고 울었다.

요문천의 입에서도 자지러지는 비명이 연신 터져 나왔다.

오늘 밤 요문천은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곤히 잠들었던 요문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철접은 사라진 후였다.

(갔구나.)

비어있는 옆 자리를 돌아보며 요문천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을 받았다.

침대 옆의 황금 탁자에는 지옥교와 저주마경은 놓여있다.

하지만 갈태독이 남긴 구독진경 상편과 묵린천독편은 보이지 않았다.

철접이 떠나면서 가져간 것이다.

(그 여자는 날 동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철접과의 일을 떠올리며 요문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로... 미안해 지로. 나만... 누나만 살아서...!”

관계하는 내내 철접은 비탄이 서린 오열을 토해냈었다.

(가엾은 여자였다.)

요문천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철접이 느끼는 비탄이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그래서 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요문천과 철접은 밤이 새도록 특별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지칠 줄을 몰랐다.

복용한 파사의 내단과 천독시균 덕분이었다.

철접의 상처도 이미 대부분 완치되었을 정도다.

그래도 어느 순간 요문천은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몸에는 옷이 걸쳐져 있었다.

요문천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동안 누워있었다.

파사의 내단 덕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겠고 몸에는 힘이 넘친다.

한번 도약하며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아서 요문천은 쉽사리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이윽고 요문천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펴보니 지옥교와 저주마경이 놓여있는 탁자에는 글이 새겨진 금판(金板)이 한 장 놓여있었다.

금판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날 찾지 말거라. 네가 날 필요로 할 때면 내가 찾아갈 테니.. 날 위해 지로를 대신해준 배려는 잊지 않으마.>

 

금판에 적힌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길지 않은 그 글에 철접의 모든 심사가 깃들어 있는 것을 요문천은 느꼈다.

(철접 용천파...!)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든 채 철접을 떠올렸다.

요문천은 동침하는 도중에 나눈 단편적인 대화들을 통해서 철접이 누구며 본명이 용천파라는 사실도 알아낸 상태였다.

(내가 어찌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 요문천을 비로소 어른으로 만들어준 당신을...)

요문천은 철접의 글이 적힌 금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찾아내서... 두 번 다시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나 자신도 강해져야만 한다.)

요문천은 금판을 손에 쥔 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귀역(鬼域)으로 소문난 천독친왕부의 깊은 곳에서 바야흐로 장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뜻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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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체에서 자란 버섯

 

 

 

"갈태독은 파사가 품고 있는 보물을 빼앗아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아마 파사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갈태독에게서 달아났을 것이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내밀어 자신의 앞쪽을 가로막는 독충들을 물러나게 하며 파사의 골격 중간쯤으로 갔다.

"결국 갈태독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얼마 후 중상을 입은 파사도 이곳으로 돌아와 최후를 맞았겠습니다."

"다 왔다!"

철접은 대답대신 걸음을 멈추며 말아 쥔 묵린천독편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파사의 골격 중간쯤인 그곳에는 쌀가마 하나 정도 크기인 큼직한 물체가 놓여있다.

츠츠츠! 끼기기!

바위같이 단단해 보이는 그 물체에는 수많은 독충들이 뒤덮고 있다.

헌데 독충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철접이 묵린천독편을 내밀어도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독충들도 물러서지 않는다! 저 바위같은 게 대체 뭔데 독충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드는 것일까?)

요문천이 의아해할 때였다.

"비켜라!"

촤악!

철접이 묵린천독편을 바닥에 대고 내리쳤다.

화악!

그러자 바닥을 때린 묵린천독편에서 검은색의 안개같은 것이 확 뿜어져 나와 바위 근처의 독충들을 휩쓸어버렸다.

푸스스! 화악!

묵린천독편에서 뿜어진 검은 안개에 휩쓸리는 순간 바위를 뒤덮고 있던 독충들이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끼끼! 츠츠츠!

살아남은 독충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가공하구나! 독충들을 녹이는 게 아니라 아예 증발 시켜버렸다.)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묵린천독편에 농축되어 있는 멸절독강은 내공을 주입해야만 발출된다. 그래서 평소에는 맨손으로 만져도 안전한 것이다."

철접은 휘둘렀던 묵린천독편을 다시 감아쥐며 말했다.

"그건 참 편리하군요."

"이게 무얼 것 같으냐?"

철접은 둘둘 말아 쥔 채찍으로 앞쪽에 놓인 바위같은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독충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걸 보면 귀중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겠습니다!"

"이건 파사의 쓸개다."

철접은 가마솥만한 크기인 바위같은 것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쓸개라니... 파사란 놈은 덩치에 어울리게 쓸개도 정말 엄청난 크기로군요!"

요문천은 놀라 눈을 치뜨며 바위같은 물체, 파사의 쓸개를 새삼 바라보았다.

"이 석화(石化)된 쓸개 속에 파사가 품고 있던 진짜 보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

철접은 말하면서 다시 채찍을 펼쳐서 파사의 거대한 쓸개를 후려쳤다.

그러자 묵린천독편에서 다시 검은 안개같은 것이 터져 나와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던 파사의 쓸개를 덮어씌웠다.

퍼석!

검은 안개같은 휩쓸리는 순간 파사의 거대한 쓸개도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반짝!

그리고 흩어지는 파사의 쓸개의 속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물체가 드러났다.

계란만한 크기의 구슬인데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있다.

(저 구슬은 혹시!)

파사의 쓸개가 흩어지며 드러나는 구슬을 본 요문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이게 바로 파사의 내단(內丹)이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허리띠에 끼우고는 몸을 숙여서 구슬을 집어들었다.

(역시!)

요문천은 철접이 고운 모래같은 파사의 쓸개 잔해 속에서 진어든 구슬을 바라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들의 왕인 파사는 몸속에 내단을 만들어 왔다.

파사가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흡수한 천지간의 정기가 그 작은 구슬 안에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걸 복용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모든 상처와 고질이 고쳐진다. 사해무존에게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으로서는 파사를 죽여서 내단을 꺼내먹는 것 외에는 달리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철접은 구슬에 묻어있던 쓸개의 잔해를 자신의 옷에 닦으며 말했다.

갈태독은 정말 무정(無情)한 인간이었군요. 아무리 목숨이 소중해도 수천리 밖에서 찾아온 이 영물을 죽일 생각을 했으니...”

요문천은 갈태독의 시신 쪽을 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정하고 무의(無義)한 인간이 어찌 갈태독 뿐이겠느냐? 그보다 입을 벌려봐라!"

철접은 파사의 내단을 자신의 옷자락에 깨끗하게 닦으며 요문천에게 말했다.

"?"

요문천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입을 벌렸다.

!

순간 철접은 파사의 내단을 요문천의 벌린 입에 그대로 넣어버렸다.

"무슨...!"

파사의 내단이 입속으로 들어오자 요문천은 기겁하며 뱉어내려고 했다.

!

하지만 철접의 손이 물 흐르듯이 요문천의 턱을 움켜쥐어 다물게 했다.

(파사의 내단이 침에 닿자 그대로 녹아버린다!)

요문천은 강제로 입을 다물린 채 눈을 부릅떴다.

입안에 들어온 파사의 내단이 마치 얼음인 듯이 그대로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꿀꺽!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요문천은 녹아서 액체가 된 파사의 내단을 그대로 삼키고 말았다.

"되었다!"

요문천이 파사의 내단을 모두 삼킨 것을 확인한 철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까지 쥐고 있던 요문천의 턱을 놓아주었다.

"... 이게 무슨 짓입니까?"

턱이 자유로워진 요문천은 목을 쥐고 콜록거렸다.

파사의 내단이 녹아서 흘러 들어간 뱃속이 독한 술을 마신 듯 화끈거리긴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수선 떨지 마라! 파사의 내단은 무궁무진한 효능을 지닌 절세의 보물이다."

철접은 파사의 골격 밖을 향해 돌아서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이후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독에도 해를 입지 않게 될 것이고 내공심법을 연마하면 어렵지 않게 오갑자(五甲子) 수위의 공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소저께서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요문천은 철접을 따라가며 물었다.

뱃속에서 시작한 화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서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내게는 따로 먹을 것이 있다!"

철접은 골격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따로 먹을 게 있다고?)

요문천은 어리둥절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파사의 골격 밖으로 나왔다.

온몸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열기 탓에 어느덧 요문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파사의 골격에서 나온 철접은 다시 갈태독 시체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왜 다시 갈태독의 시체 쪽으로 온 건가? 설마 갈태독의 시체라도 먹겠다는 건가?)

요문천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갈태독은 생시에 수천 가지 극독을 복용하여 피와 살이 모두 독에 물든 독인(毒人)이 되었었다!"

철접이 갈태독의 해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자연스럽게 저고리가 위로 들려지며 탐스러운 엉덩이가 일부 드러난다.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저고리 아래쪽으로 드러나는 철접의 뽀얀 둔부를 곁눈질하며 요문천은 침을 삼켰다.

파사의 내단을 복용하여 몸이 뜨거워진 때문일까?

철접의 둔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요문천은 온몸이 확 달아올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독인이었던 자가 죽으면 생시에 복용한 극독들의 정수가 한 곳으로 모여 특이한 형태를 갖추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갈태독의 웃옷을 벌렸다.

철접이 몸을 앞으로 숙이자 저고리가 끌려올라가며 뽀얀 둔부가 더 많이 드러나 요문천의 눈을 부릅뜨게 만든다.

역시 있었구나.”

철접이 갈태독의 상의를 벌린 채 무언가를 보며 말한다.

그녀의 허연 둔부를 노려보던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갈태독의 시신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접에 손길에 의해 드러난 갈태독의 아랫배, 단전 부근에 영지(靈芝)의 모습을 한 버섯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시신에서 버섯이 자라다니...! 혹시 시균(屍菌)입니까?"

요문천은 철접 뒤에서 고개를 숙여 버섯을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다더니 아는 게 많구나."

철접은 갈태독의 시신 단전 부근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았다.

"그렇다! 이것은 동물의 시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동충하초(冬蟲夏草), 즉 시균이다!"

!

그녀는 신중하게 버섯을 갈태독의 아랫배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 시균은 보통의 동충하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갈태독이 살아생전 복용한 모든 독의 정수가 모여 있는... 굳이 이름붙이자면 천독시균(千毒屍菌)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접은 떼어낸 버섯을 두 손으로 쳐들어 살펴보며 말했다.

영지초를 닮은 그 버섯은 반투명한 껍질 안쪽에 액체가 가득 고여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천독시균?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보통의 시균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천독시균을 먹으면 갈태독이 평생 수련했던 독공(毒功)과 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 , 이걸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제이(第二)의 갈태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저의 말씀대로라면 천독시균이라는 그것은 정말 대단한 보물이로군요."

철접의 설명을 들은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이것도 네가 먹겠느냐?"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돌아보며 천독시균을 내밀었다.

"... 싫습니다!"

철접의 말에 요문천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뱀의 내단이야 엉겁결에 먹었지만 시체에서 돋아난 버섯이라니...! 갈태독이 아니라 갈태독 할애비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못 먹겠습니다!"

요문천은 혐오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쉽구나! 천독시균을 먹겠다고 했으면 네게 진 두 번의 신세를 전부 갚는 셈이 되었는데...!"

철접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철접이 몸을 움직이자 여기저기 갈라진 저고리 속에서 육중한 가슴이 물결치듯 출렁인다.

"파사의 내단을 먹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보답은 충분히 하셨습니다."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철접의 가슴을 훔쳐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내 마음은 편치가 않구나."

철접은 천독시균을 손에 든 채 한숨을 쉬었다.

"정 부담이 되신다면 이리 주십시오.“

!

요문천은 그런 철접에게 다가가 천독시균을 낚아챘다.

잘 생각했다.”

요문천이 천독시균을 낚아채자 철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의 내단에다가 천독시균까지 복용하면 너는 어렵지 않게 천하무적이 될 수가...”

말하던 철접의 눈이 부릅떠졌다.

요문천이 손에 들고 있던 천독시균을 말하느라 벌어진 철접의 입에 재빨리 집어넣은 때문이다.

철접이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천독시균은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온 후였다.

철접은 입을 다무는 과정에서 천독시균의 얇은 껍질을 이빨로 깨물게 되었다.

그 즉시 천독시균 안에 들어있던 점액질의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입을 벌리게 되면 천독시균의 정수가 밖으로 쏟아지게 된다.

철접은 어쩔 수 없이 천독시균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서로 비긴 게 되었지요?”

이마를 살짝 찡그린 철접이 우물거리며 천독시균을 먹는 것을 보며 요문천은 싱긋 웃었다.

(정은 많고 욕심은 없는 아이다.)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보며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냉혹비정한 성격의 인자로 키워진 철접이다.

그녀가 사내를 대상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었는데...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구나.)

철접은 무언가를 결심하며 천독시균을 껍질까지 모두 씹어서 삼켰다.

어떻습니까? 천독시균의 약효가 느껴지시는지요?”

요문천이 철접의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파사의 내단도 그렇고... 천독시균 역시 약효를 온전히 흡수하려면 제대로 내공심법을 운용해야만 한다.”

철접이 소매로 입가를 조금 닦으며 말했다.

그럼 어서 운기조식 하셔서 천독시균의 약효를 흡수하십시오. 몸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게 급선무이니...”

그래야겠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철접은 재촉하는 요문천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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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독왕(毒王)이 남긴 보물

 

 

 

종유석의 뒤쪽에는 또 다른 지하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앞쪽의 지하 광장에 비하면 작은 규모다.

또 빛을 뿜어낼만한 보물들이 없어서 어둑하다.

그 어둠 속에 거대한 뱀의 골격이 누워있다.

형태를 보면 분명 뱀의 것이다.

한데 죽 늘어선 갈비뼈 안쪽으로 사람이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스스스! 지지지!

몸길이가 끝이 안 보일 지경으로 긴 그 괴수의 시체에는 수많은 독충들이 달라붙어 있다.

(무슨 뱀의 골격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요문천이 어둑한 광장 안쪽을 기웃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저놈은 아마도 파사(巴蛇)일 것이다."

"파사!"

요문천은 놀라 철접을 돌아보았다.

"전설 속의 영웅 예(羿)가 죽였다는 그 거대한 뱀 말입니까? 코끼리도 한 입에 삼켰다는...?"

"그 옛날 후예(后羿)가 동정호(洞庭湖)에서 잡아 죽인 파사는 얼마나 컸는지 그 뼈를 모아놓은 것이 언덕이 되어 파릉(巴陵)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진짜 파사에 비하면 저놈은 아주 작은 축에 속할 것이다."

철접이 어둑한 지하 광장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파사는 용이 되다만 영물로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의 왕이었다고 한다.

크기가 코끼리를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또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신통력과 한번 뿜어내면 수십 리 안쪽의 모든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 끔찍한 독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파사는 용이 되지 못한 분풀이를 세상에 해대었다.

그 때문에 동정호 일대는 수시로 물난리가 났고 파사가 내뿜는 독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천신(天神) 중 한명인 후예로 하여금 파사를 죽이게 했다 것이 전설의 내막이다.

후예의 아내가 달에 홀로 산다는 항아(姮娥).

 

키키키! 키키! 샤샤샥! 스르르!

철접이 연기를 뿜어내는 등을 들고 다가가자 파사의 뼈에 달라붙어 있던 독충들이 썰물처럼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독충들이 달아나면서 광장 바닥에 손바닥보다 큰 비늘들이 수없이 널려있는 게 드러난다.

금속인 듯 번쩍이는 그것들은 파사의 몸을 덮고 있었던 비늘이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그 비늘 덕분에 인간의 힘으로는 파사를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었다.

이놈이 진짜 파사의 후손이라면 멀리 남쪽 동정호 근처에 살았을 텐데... 어떻게 멀고 추운 이곳 북경 근처까지 와서 죽은 것일까요?”

요문천은 철접의 뒤를 따라 두 번째 광장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갈태독이 이놈을 동정호에서 이곳으로 불러왔을 것이다. 시시각각 북경으로 육박해오는 주원장의 군세를 상대할 무기로 쓰기 위해서... 독왕보궁 일대에 서식하는 독충들은 갈태독이 기르던 것들일 테고...”

철접이 파사의 골격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요문천의 뇌리에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나라 말엽에 조백하에 용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나라는 망하지 않을 거라고들 했지만 채 한 달이 못 되어 대장군 서달의 군세가 북경을 점령했지요.”

만일 이놈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사람들이 보았다면 용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철접은 등을 쳐들어서 무언가를 찾는 표정으로 파사의 골격 옆을 지나갔다.

(오래 살아 영통했을 터인 파사는 동정호에 살던 중 갈태독의 부름을 받고 장강(長江)을 따라 동해(東海)로 나갔다가 북상하여 북경 근처를 흐르는 조백하로 거슬러 올라왔을 것이다. 이 지하광장은 조백하와 연결되어 있을 게 분명하고...)

요문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파사의 거대한 뼈 옆을 지나갔다.

"독왕보궁 근처에 사는 독충들이 유별나게 컸던 것은 파사의 시체를 뜯어먹은 때문일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한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의 독충들이 비정상적으로 큰 건 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군요."

요문천도 철접의 말에 동의했다.

(헌데 누가 이 엄청난 괴물을 죽인 것일까? 유력한 후보라면 사해무존 초패강이지만 그가 이무기나 대사(大蛇)를 죽였다는 얘기는 없는데...)

요문천이 파사의 사인(死因)에 대해 생각하며 갸웃거릴 때였다.

"네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파사의 골격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철접이 어떤 종유석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 시체로군요!"

멈춰선 철접 옆으로 다가간 요문천은 다시 한 번 놀라 침을 꼴깍 삼켰다.

철접이 보고 있는 종유석 아래쪽에는 한 구의 시신이 기대앉아 있다.

시신은 살이 독충들에게 뜯어 먹힌 듯 모두 사라져 뼈만 남은 상태였다.

헌데 기이하게도 남아있는 뼈가 온통 수북한 털로 뒤덮여있다.

골격으로 보아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인물일 것이다.

그 시체 옆에는 낡은 책 한권과 수없이 많은 마디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채찍이 한 자루 놓여있다.

(사람의 뼈에서 털이 자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시신의 뼈가 털로 덮여있는 것을 본 요문천이 놀랄 때였다.

"이 시신의 주인이 누구일 것 같으냐?"

등을 바닥에 내려놓은 철접이 시신 옆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가지 물건을 집어들며 물었다.

순간 요문천의 뇌리를 벼락같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천독친왕 갈태독? 사해무존에게 패해 중상을 입고 달아난 후 두 번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자의 유골입니까?"

"네가 직접 확인해봐라!"

철접은 흥분하여 묻는 요문천에게 바닥에서 집어든 두 가지 물건 중 낡은 책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미는 검은색의 책 표지에는 <九毒眞經 上篇>이라는 글이 적혀있는 게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구독진경(九毒眞經) 상편(上篇)!)

요문천은 눈을 치뜨며 책을 받아들어 표지를 넘겨보았다.

표지 안쪽의 첫번째 장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필체의 글이 아래위로 적혀있다.

 

<구독신왕(九毒神王) 갈극(葛極)이 독문(毒門)의 영광을 위해 구독진경 상, 하편을 짓는다.>

 

이것이 상단에 적혀있는 글이다.

저주마경처럼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듯 서체가 전자체(篆字體).

(구독신왕 갈극? 이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인데...!)

요문천은 갸웃하며 아래쪽의 글을 읽었다.

 

<못난 후손 갈태독이 조사님의 보우하심 덕분에 구독진경 상, 하편 중 상편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사님의 뜻을 받들어 우내사천과 다른 천외오패(天外五覇)를 세상에서 없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두 번째 글은 해서체(楷書體)로 적혀있는데 먹의 색이 선명하여 쓰여진 것이 아주 오래 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갈태독! 역시 저 해골은 천독친왕 갈태독의 것이었군요!"

두 번째 글을 읽은 요문천은 털로 뒤덮인 해골을 돌아보며 흥분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해골은 오른쪽 팔이 팔꿈치 위에서 잘렸으며 가슴의 늑골들도 여러 개 잘려져 있다.

무언가 예리한 것이 해골의 팔과 가슴을 동시에 베어버린 형상이다.

해골의 주인은 바로 천독친왕 갈태독이었던 것이다.

(각기 한 시대를 호령했던, 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인 사이인 사해무존 초패강과 천독친왕 갈태독이 지척에서 최후를 맞이했구나.)

해골이 된 시신이 갈태독의 것임을 확인한 요문천은 복잡한 심사가 되었다.

사해무존과 갈태독이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해무존에게 패해 치명상을 입은 갈태독은 이곳 독왕보궁에 숨어서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을 것이다."

철접이 구독진경과 함께 집어든 검은색의 채찍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럼 그 채찍이 바로...!"

요문천은 놀라 눈을 치뜨며 철접의 손에 들린 채찍을 바라보았다.

"갈태독의 애병인 묵린천독편(墨鱗千毒鞭)이다. 듣기로는 한번 휘둘러지면 어떤 호신강기라도 촛농처럼 녹여버렸다는구나."

철접은 말하며 검은색의 채찍, 묵린천독편을 요문천에게 내밀었다.

 

묵린천독편은 이무기의 비늘을 천 가지 독()에 담가 만든 채찍디.

내공을 주입시키면 멸절독강(滅絶毒罡)이라는 무시무시한 독기가 뿜어져 나간다.

묵린천독편에서 뿜어지는 멸절독강의 위력은 실로 가공하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철벽을 녹여 버릴 정도라고 한다.

오십이 년 전, 사해무존 초패강이 지옥교를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상 그 어떤 신병이기도 묵린천독편에 맞설 수 없었다.

사실 묵린천독편과 지옥교는 모두 고금십병(古今十兵)에 드는 무서운 병기들이었다.

경륜이 일천한 요문천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독왕보궁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찾은 건 너다.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다.”

철접은 묵린천독편을 요문천에게 내밀며 말했다.

"묵린천독편은 필요 없습니다. 전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문천은 허리에 차고 있는 지옥교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묵린천독편은 내가 잠시 보관하도록 하마!"

요문천이 사양하자 철접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따라 오너라!"

그녀는 묵린천독편을 둘둘 말아 쥐며 파사의 골격쪽으로 걸어갔다.

요문천도 구독진경 상편을 품속에 넣으며 철접을 따라서 파사의 뼈 안으로 들어갔다.

 

파사의 골격은 워낙 커서 철접과 요문천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골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찌찌찌! 스스스!

철접이 둘둘 말아 쥔 묵린천독편을 앞으로 내민 채 다가가자 파사의 골격에 달라붙어 있던 독충들이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묵린천독편에 농축되어있는 독기가 워낙 강해서 독물들도 두려워하는구나!)

요문천이 그것을 보며 생각하며 따라갈 때였다.

"여길 봐라!"

이윽고 파사의 목 부분에 이른 철접이 묵린천독편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요문천이 올려다보니 그 부분의 뼈가 마치 촛농처럼 녹아있다.

"파사의 목 부분 뼈가 녹아있군요! 저 상처는 혹시...!"

"묵린천독편에 당했을 것이다!"

요문천의 말에 철접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를 죽인 게 다른 사람도 아닌 갈태독이었군요. 헌데 갈태독은 어째서 수천 리 밖에서 자신을 찾아온 이 영물을 죽인 걸까요?"

"파사는 몸 속에 한 가지 보물을 품고 있었다. 그걸 빼앗아 복용하면 사해무존의 검기에 심장이 갈라지는 중상을 입었던 갈태독도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철접은 요문천의 물음에 대답하며 다시 돌아섰다.

"갈태독이 독왕보궁으로 숨어들어온 이유가 단지 몸을 숨기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철접을 따라가며 요문천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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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둠 속에서의 설렘

 

 

 

(이런...)

박속같이 하얀 철접의 둔부를 본 요문천은 숨이 턱 막혔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허리를 숙인 채 표창을 회수하고 있다.

너무도 자극적인 그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

갑자기 철접이 왼쪽 발로 바닥을 세차게 밟아서 요문천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콰직! 끼이익!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터진다.

!”

요문천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가죽신을 신은 철접의 왼쪽 발에 손바닥만한 전갈이 으스러진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 전갈은 몰래 다가와 철접의 발목에 독침을 쏘려다가 밟혀 죽은 것이다.

우지직!

밟았다가 옆으로 문지르는 철접의 가죽신 아래쪽에서 전갈의 몸통이 완전히 으스러진다.

(과연 인자로구나. 여자면서도 독충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요문천은 무심히 전갈을 밟아 으스러트리는 철접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함께 철접이 신고 있는 가죽신의 바닥에 강철같이 단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이곳에 출몰하는 독충들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 그렇다는 건 아주 오래 산 놈들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요문천은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하며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사이에 철접은 표창들을 모두 회수했다.

"내 뒤를 바싹 따라 오너라! 세 걸음 이상 뒤처지면 안된다."

표창에 묻은 독충들이 체액을 옷깃에 닦으며 철접은 걸음을 옮겼다.

...!”

요문천은 대답하며 급히 철접을 따라붙었다.

한 걸음이 채 안되게 다가서자 향긋한 내음이 요문천의 코를 간지럽힌다.

"어쩌면 오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목매며 찾던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표창을 챙긴 철접은 다른 것을 꺼냈다.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요문천이 약을 찾기 위해 그녀의 품속에서 찾았던 큰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주머니들 중 하나다.

(사람들이 목매며 찾던 것? 설마 갈태독의 보물창고가 이 앞쪽에 있단 말인가?)

요문천이 흠칫할 때였다.

물론 그 전에 귀찮은 놈들을 쫓아버려야겠지.”

작은 주머니를 꺼내든 철접이 고개 짓으로 앞쪽을 가리켯다.

!”

고개를 옆으로 빼서 철접의 앞쪽을 보던 요문천은 기겁했다.

츠으! 츠으!

철접 앞 쪽 어둠 속에 수많은 불빛이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반딧불이가 떠있는 것같은 광경이다.

그때 철접이 왼손에 들고 있는 등을 높이 쳐들었다.

화악!

그와 함께 철접이 쳐든 등의 불빛이 갑자기 몇 배로 밝아진다.

그 등에는 요문천이 알지 못했던, 불빛을 조절하는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몇 배로 밝아진 등의 불빛으로 인해 통로 앞쪽의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 맙소사!)

순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부릅떴다.

한낮의 태양인 듯 밝아진 등의 불빛에 의해 드러난 앞쪽의 통로를 수많은 벌레가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갈, 지네, 거미, 갑충, 그리고 이름 모를 기괴한 벌레들...

통로의 좌우 벽과 천장, 바닥이 온갖 종류의 벌레들로 뒤덮여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적인 독을 머금고 있는 독충들이다.

등의 불빛이 밝아지기 전에 요문천이 보았던 수많은 반딧불같은 것들은 그 독충들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여긴 완전히 독충들의 소굴이로구나. 아까 들었던 모래가 흐르는 듯한 소리는 저놈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것이었고...!)

요문천은 진저리를 치며 허리띠에 꽂고 있는 지옥교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여차하면 뽑을 생각이었다.

철접은 품속에서 꺼낸 작은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이빨로 끊어서 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고운 가루를 왼손으로 들고 있는 등의 위쪽에 나있는 구멍으로 솔솔 부어넣었다.

화악!

순간 등에서 대량의 연기가 일어나 주변을 뒤덮었다.

콜록!”

갑자기 퍼지는 연기를 들이마신 요문천은 세차게 기침을 했다.

사람에게는 그리 해롭지 않은 연기이니 마셔도 된다.”

철접은 연기를 연막처럼 뿜어내는 등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미리 경고를 좀 해주지 않고...)

요문천은 콜록거리며 철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끼익! ! 사사삭! 츠츠츠!

연기가 퍼지자 통로의 사방 벽을 뒤덮고 있던 독충들이 질겁하며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에서 뿜어지는 이 연기에 독충들을 쫓는 효과가 있구나!)

요문천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철접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슈욱! !

그러는 사이에도 등에서는 연기가 확확 뿜어져 나왔다.

그 연기는 독충들을 앞쪽으로 달아나게 만들고 있다.

(온갖 악조건 하에서 임무를 수행해하는 인자답게 독충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독충들이 지키고 있는 이 통로를 살아서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문천은 새삼 감탄하며 철접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철접의 뒷모습을 보며 걸어갔을까?

갑자기 앞서 가던 철접이 걸음을 멈췄다.

요문천은 철접이 멈출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또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요문천은 얼굴을 철접의 등에 처박고 말았다.

"어이쿠!"

철접의 키가 요문천보다 반 뼘 쯤 더 큰 탓에 얼굴이 그녀의 등에 부딪힌 것이다.

요문천은 허우적거리다가 본능적으로 철접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철접을 뒤에서 끌어안은 요문천의 양손에 부드럽고 탄력이 넘치는 살덩이들이 와락 움켜쥐어진다.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철접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쥔 자세가 된 것이다.

요문천의 양손이 자신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쥐었으나 철접은 한 차례 움찔 했을 뿐 가만히 서있었다.

(이크!)

요문천은 기겁하면서도 즉시 손을 철접의 가슴에서 떼지는 못했다.

크기는 유모 섭대낭의 것보다 작지만 탄력은 비교할 수도 없이 좋은 살덩이들이다.

그 황홀한 감촉에 요문천은 자신이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망각했다.

심지어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서 철접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감촉,

양지유(羊脂油)를 굳힌 듯 매끄러운 그것들은 요문천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라도 만지고 싶게 만든다.

(이렇게... 이렇게 감촉이 좋다니...)

요문천은 황홀경에 빠져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잠시 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사실은 숨 몇 번 쉰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목적지에 온 것같다.”

철접이 나직하게 말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요문천의 두 손은 철접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 죄송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요문천은 얼굴이 벌개져서 철접에게 사과했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새삼스럽긴... 금창약을 발라주느라 내 몸을 구석구석 만지지 않았느냐?"

걸음을 옮기는 철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등을 높이 쳐들었다.

요문천은 철접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 그렇긴 하지만... !"

그래도 사과를 하려던 요문천은 흠칫 하며 앞쪽을 보았다.

철접이 높이 쳐드는 등의 불빛에 의해 앞쪽 삼, 사장 쯤에 육중한 철문이 서있는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철문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빛을 내며 번들거린다.

지하 밀로에 가득 찬 습기에 전혀 훼손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철문의 재질이 부식에 강한 합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쪽으로 이루어진 철문은 약간 열려있다.

쏴아아!

그 열린 틈으로 지하 통로를 메우고 있던 수많은 독충들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있다.

츠츠츠!

그와 함께 조금 열려진 철문 틈으로 오색(五色)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주 강한 빛은 아니지만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빛이다.

(저 빛은 보광(寶光)이다!)

요문천의 눈이 흥분으로 치떠졌다.

조금 열려져 있는 철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그긍!

그 사이에 철접은 철문 중 한쪽을 오른손으로 밀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악!

철접의 손에 의해 철문이 활짝 열리면서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이 더 강렬해졌다.

(틀림없다! 저 철문 안쪽이 지난 오십여 년동안 누구도 찾지 못했다는 천독친왕 갈태독의 보물창고다.)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서둘러 철접의 뒤를 따라 철문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

그리고 철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철접이 밀고 들어간 철문의 안쪽은 건너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지하 광장이다.

지하 광장의 도처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들이 늘어서서 높은 천장을 떠받히고 있다.

지하광장은 원래 천연의 동굴이었던 것이다.

족히 수천 평은 됨직한 그 넓은 지하광장에 산더미같은 보물들이 쌓여있다.

벽돌크기만한 금괴와 은괴가 마치 성벽이나 건물처럼 여기저기 쌓여있다.

금괴와 은괴들이 쌓여있는 사이의 공간을 보석과 골동품, 진귀한 그림, 명장이 만든 공예품등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광장 중앙에는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사람 키만한 금제 항아리들 수십 개에 담겨진 채 영롱한 빛을 뿜어내기도 한다.

요문천이 철문 밖에서 본 보광은 그 보석들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탓에 재물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믿어왔던 요문천이다.

"이건... 이건...!"

그런 그였건만 입을 쩍 벌린 채 헐떡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요문천의 눈앞에 있는 보물의 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인 것이다.

"천독친왕 갈태독의 보물에 대해서는 바다 건너에서 살던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아마 갈태독이 비밀리에 세웠다는 독왕보궁(毒王寶宮)일 것이다."

철접은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 전설은 사실이었구나! 갈태독이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긁어모은 재보가 수억만 냥에 이르러 천하의 절반을 사고도 남는다는...)

철접을 따라가며 요문천은 넋이 나가 주변에 쌓여있는 보물의 산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당금의 명 황실 재산도 이곳에 쌓여있는 재보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리 와 봐라!"

그때 앞 서 간 철접이 돌아보며 요문천을 불렀다.

그녀는 보물들의 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굵은 종유석 옆에 서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저?"

요문천은 서둘러 철접에게 다가갔다.

철접은 요문천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말없이 종유석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맙소사!"

철접이 가리킨 곳을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요문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그곳에는 또 어떤 놀라운 게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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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궁(迷宮)의 비밀

 

 

 

<노부는 누구보다도 옥사후, 그놈을 잘 안다.

옥사후는 절대 혼자만의 판단으로 노부에 대한 독살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배포가 큰 놈이 못 된다.

무엇보다도 옥사후에게 강력한 무공을 지닌 조력자가 있었다는 게 그놈이 다른 인간에게 사주를 받은 확실한 증거다.

무존성을 떠난 직후 정체불명의 인간들이 노부를 공격해왔던 것이다.

비록 노부의 손에 모두 죽기는 했지만 그자들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위력적이었다.

당금 무림에 존재하는 무공다운 무공은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노부건만 놈들의 무공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 데 놈들은 우내사천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해무존의 죽음에도 우내사천이 관련되어 있단 말인가?”

긁을 읽던 요문천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득한 옛날 옥문관 밖 서역에 자리한 지옥성이라는 문파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우내사천이라는 인물들이었다.

헌데 지옥성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사해무존 초패강을 공격한 자들 역시 우내사천의 후손일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무존성이 자리한 황산에서 이곳 북경까지 오는 동안 노부는 정체불명의 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노부는 놈들이 옥사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습격한 자들의 대부분은 노부의 손에 죽었지만 그 대가로 노부 역시 회생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력을 쓰는 바람에 만성독약의 독성이 급격히 온몸으로 퍼져간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천독친왕부의 폐허에 도착한 노부는 오십여 년 전에 파악해두었던 비밀통로를 통해 갈태독의 보물창고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사이에 독은 골수(骨髓)에까지 퍼져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만일 누군가 이글을 본다면... 무존성에서 노부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딸에게 흉수가 옥사후라는 사실을...>

 

글은 그렇게 끝이 나있었다.

사해무존 초패강은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독기가 골수에 미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이분은 옥면환룡의 배후에 우내사천의 후손들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죽었다.)

저주마경에 적힌 글을 모두 읽은 요문천은 고개를 들어 사해무존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결국 얘기는 돌고 돌아서 우내사천으로 돌아가는구나. 지옥성이란 문파를 멸망시킨 것도 우내사천이고, 그 지옥성의 절기를 얻어 천하제일인이 된 사해무존 초패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후도 우내사천의 후손들인 듯하니...!)

어느덧 요문천의 마음속에도 우내사천이라는 존재가 거대한 바위처럼 들어차게 되었다.

(어쩌면 강호무림을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도 우내사천의 후손들일지 모르겠구나!)

요문천이 저주마경을 덮으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

갑자기 요문천의 왼쪽 다리 옆의 바닥에 뾰족한 날이 네 개 달린 얇은 표창이 날아와 박혔다

!”

깜짝 놀라 돌아보는 요문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끼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시커먼 전갈이 뒤쪽에서 날아든 표창에 등이 찍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갈은 요문천의 다리 바로 옆에까지 다가왔다가 표창에 꽂혔다.

하마터면 요문천을 독침으로 찌를 뻔했던 상황이었다.

(전갈!)

요문천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날 때였다.

"조심해야한다. 이렇게 덥고 습기 찬 곳은 전갈 같은 독충(毒蟲)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니...!"

요문천이 지나온 쪽의 어둑한 통로로 어떤 여자가 말하며 다가왔다.

스윽!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는 물론 철접이었다.

(...)

헌데 그녀의 복장이 요문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철접은 하의는 입지 않고 상체에 저고리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허리띠를 매고 있는 저고리의 하단이 엉덩이와 사타구니까지는 가리고는 있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튼실하면서도 미끈한 다리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발에는 버선과 가죽신을 신고 있고...

요문천은 철접이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저고리의 아랫단이 조금이라도 들쳐지면 은밀한 부분이 무방비로 드러나는 차림인 것이다.

그와 함께 요문천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세 가지 절세무공의 비결을 집중하여 읽느라 거의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 몸은 좀 어떠십니까?”

요문천은 저고리의 아래쪽으로 드러나 보이는 철접의 희고도 미끈한 다리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졌다. 네게 또 한 번 신세를 졌구나!"

철접은 한숨을 쉬며 요문천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출혈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요문천이 발라준 금창약에 아주 빠르게 지혈이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 것이다.

물론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지만...

"거듭 입은 은혜는 꼭 갚도록 하마!"

철접이 애잔한 표정으로 요문천을 보며 말했다.

인자답게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던 철접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표정이 떠오르자 요문천은 가슴이 찌릿한 자극을 받았다.

인형같이 느껴지던 그녀가 비로소 피가 흐르는 여자로 느껴진 때문이다.

"... 마땅히 도와드렸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요문천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두 손을 마주 쥐어 포권을 했다.

"늦었지만 동생 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요문천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로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을 어찌하겠느냐?"

철접도 우울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여서 답례를 했다.

그와 함께 내려 까는 철접의 눈가로 눈물이 맺히는 것이 언듯 요문천의 시야에 들어왔다.

(애처롭다.)

철접의 눈물을 본 요문천은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작은 표정, 감정의 변화등이 어째서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요문천이었다.

(그나저나 뭐가 급해서 하체는 벌거벗은 차림으로 온 것일까? 치마가 찢어지고 피로 물들긴 했어도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문천은 치마를 입지 않아서 그대로 드러난 철접의 미끈한 다리를 곁눈질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인지요?"

그러면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글쎄다!"

요문천의 물음에 철접은 힘없이 웃었다.

"청부받은 일을 실패했으니 막북의 토곤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이젠 내게 없구나!"

철접은 천장을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아무리 비정하고 냉혹한 인자로 길러져온 나라고 해도 일단 첫 시도에서 실패한 자살을 다시 하기는 쉽지 않단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철접의 눈가로 눈물이 비치는 게 요문천의 눈에 들어온다.

"자살이란 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요문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철접의 말에 동조했다.

"세상은 넓고 넓지만 내가 돌아가고 속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지!"

철접은 눈 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면서 처연하게 웃었다.

(너무도 가엾다.)

철접의 모습의 요문천은 가슴 깊은 곳이 다시 한 번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의 외로움과 비애가 내 일처럼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런 감정은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인데...!)

그런 요문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접은 우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서 전갈을 찔러 죽인 표창을 회수했다.

철접이 몸을 숙이자 저고리 사이로 묵직한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이 들여다보여 요문천의 입속을 마르게 한다.

"내가 아는 바가 정확하다면... 난 너보다 열 살 연상이다."

철접은 표창에 묻은 전갈의 흔적을 옷깃에 닦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이 여자 벌써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구나!)

요문천은 철접의 나이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한 두 살 차이도 아니니 앞으로도 계속 말을 놔도 되겠지?"

철접은 그런 요문천을 지긋이 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요문천은 얼굴이 좀 붉어지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우선은 여길 더 살펴볼...!"

말하던 철접이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 모습에 요문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도 귀를 기울여 봐라!"

철접이 손가락으로 어둑한 통로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요문천은 저주마경을 들지 않은 왼손을 귀에 대고 철접이 가리키는 쪽으로 청각을 집중했다

사락! 사락! 사각!

그러자 무언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이건...!"

요문천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모래가 흘러가는 듯한 소리로 들립니다만... 썩 기분이 좋은 소리는 아니군요."

"같이 가보자!"

요문천의 말에 철접이 그때까지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려있던 등을 떼어 들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

요문천은 대답하며 급히 저주마경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사해무존의 시신이 두르고 있는 허리띠에서 빈 칼집을 뽑아내었다.

칼집은 전체가 금속으로 이루어진 듯 상당히 묵직하다.

요문천은 그때까지 바닥에 꽂아놓았던 지옥교를 뽑아서 그 칼집에 꽂았다.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지옥교는 칼집 속으로 정확하게 채워지며 들어갔다.

(역시 이게 지옥교 전용의 칼집이었구나!)

요문천은 칼집에 넣은 지옥교를 자신의 허리띠에 끼웠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초노사의 사인은 무존성에 분명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어 그는 사해무존 초패강의 시신에 대고 정중하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철접이 앞서 간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요문천의 앞쪽에 철접이 등을 왼손으로 쳐들어서 앞쪽을 비추며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철접이 상체에 걸치고 있는 저고리는 대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어 어두운 색조를 띄고 있다.

또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려 뽀얗던 목덜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철접의 상체는 어둠에 동화되어 그 형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옷을 걸치지 않은 하체는 흐릿한 등불에 비쳐져서 뚜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마치 아랫도리만 있는 여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같다.)

요문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종종 걸음으로 철접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앞서가던 철접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요문천이 철접 바로 뒤에 멈춰서며 물을 때였다.

피핑!

철접은 대답하지 않고 앞쪽의 어둠 속을 향해 오른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틈엔지 네 개의 뿔이 달린 얇은 표창이 몇 개 쥐어져 있다가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 끼익! 빠카캉! !

어둠 속에서 불똥이 튀면서 무언가 비명을 지른다

(또 전갈인가?)

요문천이 흠칫 놀랄 때 멈춰서있던 철접이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삼장 정도 앞쪽의 통로 여기저기에 표창들이 박혀있다.

전갈과 커다란 지네, 거미등이 그 표창에 꽂혀 벌벌 떨고 있다.

독충들은 모두 비정상적으로 커서 손바닥만하다.

전갈과 지네, 거미등이 그렇게 크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요문천이다.

(이 안의 독충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저렇게 큰 것일까?)

요문천이 놀라며 기웃거릴 때였다.

앞서가던 철접이 허리를 숙여서 독충들의 몸에 박힌 표창을 다시 회수하기 시작했다.

(으헉!)

순간 요문천은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눈을 부릅떴다.

철접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저고리가 위로 딸려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달덩이같은 둔부가 요문천의 시야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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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 가죽(人皮)으로 만든 비급(秘笈)

 

 

 

<본성의 형제들이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중과부적! 우내사천과 그놈들이 이끌고 온 중원 무림의 인간들에게 본성의 식솔들은 몰살당했으며 오직 노부와 노부의 애첩 혈미인(血美人)만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도 내상이 깊어 곧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지옥일맥(地獄一脈)의 멸망을 의미하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여 노부는 애첩 혈미인을 죽여 그녀의 살가죽에 본성의 비전절기들을 기록하게 되었다. 달리 절기들을 적어 놓을만한 재료가 없어서...>

 

"... 인피(人皮)!"

털썩!

요문천은 기겁하며 들고 있던 저주마경을 떨어트리면서 뒤로 주저앉았다.

그는 비로소 저주마경의 재질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촉감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으으으! ... 저 책이 사... 사람 가죽으로 지어진 것이었다니... 그것도 여자의 살가죽으로..."

요문천은 덜덜 떨면서 바닥에 떨어트린 비급을 곁눈질로 보았다.

설마 사람 가죽으로 지은 책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요문천이었다.

(자신의 애첩을 죽여 그 살가죽으로 책을 만들다니... 너무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요문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저주마경을 곁눈질했다.

(문파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비전의 절기를 남겨야하는데 기록할 수단은 없고...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된 애첩을 미리 죽여서 그 살가죽으로 책을 엮었구나. 먹물 대신 피를 뽑아내어 글을 썼을 테고...)

요문천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떨리는 손을 저주마경 쪽으로 뻗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물건이지만 버릴 수도 없다. 끝까지 한 번 읽어나 보자!)

그리고는 용기를 내서 집어든 저주마경을 다시 펼쳤다

 

<노부는 우내사천 중 만겁마종(萬劫魔宗)이 날린 단맥마장(斷脈魔掌)에 맞아 온몸의 경맥이 끊어진 상태라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본래 우리 지옥성에는 지옥십결(地獄十訣)이라는 열 가지 절기가 있지만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적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아무쪼록 저주마경을 얻은 그대가 우내사천의 후손들을 꺾어 우리 지옥일맥(地獄一脈)의 절기가 결코 우내사천의 잡기(雜技)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길 바란다!

지옥검조 하륜이 죽어가며 적는다.>

 

표지 안쪽 첫 번째 지면의 글을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다음 지면부터 아주 난해하고 기괴한 무공비결들이 적혀있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세 배의 힘으로 돌려보내는 호신무공 저주마벽(詛呪魔壁),

철벽도 모래처럼 으깨버리는 지옥장강(地獄掌罡),

마검 지옥교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검법 마검팔식(魔劍八式)...

하지만 저주마경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은 그 세 가지가 전부였다.

또한 저주마경 전체 지면중 절반 이상이 빈 상태로 남아있었다.

스스로 우려했던 대로 지옥검조 하륜은 지옥십결이라는 지옥성의 열 가지 절기 중 단 세 가지만을 기록한 후 절명했던 것이다.

(유감이로구나. 지옥십결이라는 무공들 중 일곱 가지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요문천은 아쉬운 마음에 비어있는 지면을 넘겨보았다.

저주마벽, 지옥장장, 마검팔식등의 무공비결을 읽는 동안 어느덧 저주마경이 사람의 가죽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진 상태였다.

(글이 또 있다!)

헌데 저주마경의 맨 뒤쪽 지면을 펼쳐보던 요문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곳에 또 다른 글이 어지러운 필체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맨 뒷장에 적힌 이 글은 지옥검조가 남긴 것이 아니다!)

요문천은 한눈에 그 글이 지옥검조의 필체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글은 전자체가 아닌 초서체(草書體)로 적혀있으며 급히 휘갈겨 쓴 듯 글씨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또 지옥검조처럼 먹물 대신 피로 글을 썼다.

지옥검조가 남긴 글이 아주 검은 것에 반해 맨 뒷장에 적힌 글은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 글들이 적힌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님을 뜻한다.

 

<노부의 이름은 초패강(楚覇强)이다. 홍무(洪武) 폐하로부터 사해무존(四海武尊)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하사받았던 어리석은 인간이 사람을 잘못 본 대가로 비참하게 죽어가며 이 글을 남긴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사해무존 초패강!"

그리고 그 글을 읽은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저 시신이 지난 오십여 년간 무림을 지배해온 무존성(武尊城)의 성주 사해무존의 것이었다니...!"

요문천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앞쪽 석벽에 기댄 자세로 죽어있는 시체를 돌아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

 

그는 바로 오십이 년 전 천독친왕 갈태독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젊은 검객이었다.

출신이 비밀에 쌓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주원장을 찾아와 몽고족을 중원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었다.

비록 약관을 갓 넘긴 애송이였으나 초패강은 이름에 걸맞게 경이적인 무공을 지녔다.

주원장의 휘하에 운집했던 그 어떤 무림 고수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만족한 주원장은 초패강을 최일선에서 원나라의 군세를 상대하고 있는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보냈다.

서달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원장 막하(幕下)의 최고 명장이다.

당연히 언제 자객이 그의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의 선견지명대로 원나라 측의 최고 고수인 천독친왕 갈태독이 서달을 암살하기 위해 그의 군막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의 경과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대로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막지 못했던 갈태독의 독공이건만 초패강이 일으킨 저주마벽은 뚫지 못했다.

오히려 초패강이 지옥교로 구사한 마검팔식에 갈태독은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갈태독의 기습에서 서달을 지켜준 이후로도 초패강은 수다한 전공을 세웠다.

서달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몽고족의 근거지로 쳐들어가서 원나라 황실이 동원한 무수한 고수들을 베어 넘긴 것이다.

만일 초패강의 활약이 없었다면 명나라 측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자명했다.

특히 서달은 몽고족이 동원한 자객들의 손에 결국 쓰러졌을 것이다.

서달은 고비사막의 깊은 곳까지 원나라 황실을 추격하여 분쇄함으로서 몽고족으로 하여금 다시는 중원 정복을 도모하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서달이 원나라 황실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초패강의 조력과 활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같은 혁혁한 전공에 보답하기 위해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사해무존이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다.

사해(四海), 즉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의 지존(至尊)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뿐만 아니라 주원장은 초패강에게 무림에 속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부여했다.

초패강의 애검인 지옥교가 어떤 인간을 죽이든 그 죄를 묻지 않겠다는 칙령(勅令)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초패강을 무림의 주인, 무림왕(武林王)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후 초패강은 주원장의 권유도 있고 해서 황산(黃山)에 무존성(武尊城)을 세우고 무림의 대소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던 탓에 무림인들은 초패강과 그가 세운 무존성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황실이 존엄한 존재인 것처럼 무림인들에게는 무존성이 자신들의 주인이며 지배자인 것이다.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강호 무림의 주인인 사해무존 초패강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시신이 되어있다니...”

요문천은 경악과 충격으로 전율하며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시체, 사해무존 초패강을 살펴보았다.

사해무존 초패강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의 주인이고 제왕이 아닌가?

자연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무림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문천이 알기로 사해무존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다.

(무존성에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강호 무림뿐만 아니라 황실까지도 뒤흔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음모가...!)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다시 저주마경의 마지막 장에 적혀있는 글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사해무존 초패강의 사문내력은 밝혀진 바가 전혀 없었는데... 그는 지옥성이라는 고대의 문파에서 유래한 지옥교와 저주마경을 얻어서 천하제일인이 되었구나!)

요문천은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불에 비춰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부를 죽게 만든 범인은 통탄스럽게도 둘째 제자인 옥면환룡(玉面幻龍) 옥사후(玉獅吼)란 놈이다. 그 놈이 오래전부터 만성독약(慢性毒藥)을 음식에 조금씩 넣어 노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놈은 아마도 무존성의 성주 자리를 노리고 이같은 패륜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이 둘째 제자라고?"

글을 읽어 내려가며 요문천은 경악과 함께 분노를 금치 못했다.

"세상 말세로구나. 제자가 스승을 독살하기까지 하다니...!"

그와 함께 요문천은 살이 썩으며 드러난 사해무존 초패강의 뼈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조금씩 사해무존의 몸에 축적된 만성독약 때문에 그의 뼈가 푸른 빛을 띠게 된 것이다.

요문천은 놀란 마음을 갈아 앉히려 애쓰면서 글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절명하기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던 듯 초패강이 남긴 글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만성독약에 중독된 사실을 알아차린 노부는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무존성을 떠나 이곳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노부가 중독된 만성독약의 독성은 아주 지독해서 천독친왕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갈태독의 독경(毒經)을 얻어야만 해독이 가능할 것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진 글에는 사해무존이 천독친왕부의 지하에서 죽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사해무존은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독약의 독기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에 사해무존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천독친왕부를 찾아왔다.

갈태독이 남긴 독경을 손에 넣으면 어떤 극독이라도 해독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해무존은 자신이 중독당한 사실과 천독친왕부로 갈태독의 독경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수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무림의 주인이며 천하제일인임을 자처해온 처지에 남의 독수에 어이없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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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체가 남긴 기연(奇緣)

 

 

 

어둠 속에 끝이 없을 듯 이어진 통로의 대부분은 두꺼운 이끼로 뒤덮여 있다.

바로 근처에 조백하가 흐르는 탓에 사시사철 습한 때문일 것이다.

(습할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도 하다. 지하라면 당연히 서늘해야하는데...)

요문천은 등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북경은 중원의 동북쪽 끝에 자리한 탓에 겨울이면 추위가 매섭다.

설령 계절이 여름이라 해도 깊은 지하는 서늘해야 정상이다.

헌데 요문천이 지금 걸어가는 지하의 통로는 습기로 가득 차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덥기까지 하다.

이끼가 무성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마 지하의 깊지 않은 곳으로 화맥(火脈)이 지나가는 때문일 것이다.)

바닥에도 두텁게 깔린 부드러운 이끼를 밟고 걸어가며 요문천은 나름대로 지하통로가 더운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화맥, 즉 땅 속의 화기가 흐르는 경로가 지상에 가까워지면 화산으로 분출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하의 물을 데워 온천을 만든다.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팔달령 일대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천독친왕부 아래로 화맥이 지나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반짝!

어둑한 동로 저편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앞쪽에 빛을 발하는 무언가 있다!)

요문천은 등을 쳐든 채 서둘러 그 반짝이는 물체로 다가갔다.

() 아닌가?”

이윽고 반짝이는 물체 앞에 이른 요문천은 눈을 치떴다.

통로가 직각으로 꺾어지는 곳인데 좌측의 벽에 한 자루의 검이 깊이 박혀있다.

특이하게도 검날이 유리처럼 투명한 검인데 검신의 중앙으로 붉은 선이 한 가닥 길게 그어져 있다.

검의 손잡이 끝에 귀신의 머리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징징!

유리같이 투명한 검날이 낮으막히 진동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검날에서 서늘한 빛이 뿜어진다.

요문천이 멀리서 본 빛은 바로 투명한 검날이 진동하면서 산란(散亂) 시킨 빛이었다.

(검날이 저절로 진동하고 있다. 절대 평범한 검은 아니다!)

요문천은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가 그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의 손잡이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귀신의 머리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로 <地獄橋>라는 글이 전자(篆字), 즉 오래 된 옛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지옥교(地獄橋)? 지옥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검명(劍名)을 확인한 요문천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이 검이 휘둘러지면 반드시 상대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뜻일 텐데...)

요문천은 등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런 후 오른손으로 지옥교라는 이름을 지닌 그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감촉은 비록 서늘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의 손잡이다.

요문천은 지옥교를 벽에서 조심스럽게 뽑았다.

검날이 돌로 이루어진 벽에 깊이 박혀있어서 뽑을 때 상당한 저항을 예상했다.

스윽!

하지만 지옥교는 석벽에서 너무도 쉽게 뽑혔다.

뽑히는 과정에서 검날에 닿는 순간 석벽이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으며 간단히 갈라진 때문이다.

(단단한 석벽을 마치 두부처럼 갈라버린다. 정말 날카로운 놈이다!)

요문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지옥교를 얼굴 앞에 수직으로 세워 검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옥교의 검날은 유리처럼 투명하여 맞은편이 비쳐 보인다.

그 투명한 검날 중앙으로 방금 전 사람의 몸에서 흐른 피처럼 선명한 붉은 선이 떠있다.

웅웅!

그와 함께 요문천의 손에 들려진 지옥교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진동한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걸 휘둘러서 무엇이든지 베어보고 싶다!)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는 요문천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갔다.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와 무엇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민 탓이다.

(설마 이검이 내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살의(殺意)와 파괴본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인가?)

지옥교의 투명한 검날을 들여다보던 요문천은 오싹한 느낌을 받고 급히 시선을 떼었다.

지잉!

요문천의 시선이 이탈하자 지옥교의 진동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내가 보지 않자 칭얼거림이 잦아든다. 검 주제에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고 이해한다는 건가?)

요문천은 아래로 내려트린 지옥교를 곁눈질로 보며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이놈이 신검(神劍) 아니면 마검(魔劒)이라는 건데... 살기가 강하니 신검이라기보다는 마검이겠구나.)

징징!

요문천이 곁눈질로 보자 지옥교는 다시 진동을 일으킨다.

(내가 자길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무섭다면 무섭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이 마검이 어쩌다가 이런 외진 곳에 버려진 것일까?)

요문천은 급히 지옥교에서 시선을 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요문천이 걸음을 옮기는 앞쪽에는 밀로가 거의 직각으로 꺾여있다.

!”

헌데 그 직각의 통로를 돌아나간 직후 요문천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리며 주춤거렸다.

모퉁이를 돌아간 그의 앞쪽에 한 구의 시신이 벽에 기댄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 시체...)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춤 주춤 시신쪽으로 다가갔다.

만일 밀로 밖의 석실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놀라 주저앉았을 것이다.

(혹시 천독친왕부의 지하로 숨어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던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가 아닐까?)

요문천은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시체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천독친왕 갈태독의 시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시체가 갈태독의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가 완전히 육탈(肉脫)이 되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체는 체격이 아주 좋아서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어 보인다..

그 장대한 몸에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있는 시체는 반쯤 썩어서 살이 여전히 뼈에 붙어있다.

오십여 년 전에 죽은 것이 거의 확실한 갈태독의 시체가 아직도 부패가 진행 중일 리는 없다.

결정적으로 시체의 허리춤에는 빈 칼집이 하나 걸려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갈태독은 채찍과 비수, 암기들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갈태독이 검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빈 칼집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곤룡포를 걸친 시체가 갈태독의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비어있는 칼집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옥교라는 이 마검의 주인이었던 모양인데... 어쩌다 천독친왕부의 지하에 들어와 죽은 것일까?)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요문천은 몸을 숙여서 시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체는 얼굴 부위가 심하게 부패되어 있어 살아있을 때의 용모는 추측할 수가 없다.

살이 썩으면서 드러난 뼈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

뼈의 색으로 이 인물이 극독에 중독되어 죽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살이 이 정도 썩은 상태라면 불과 몇 달 전에 죽었다는 건데...)

등을 든 왼쪽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시신의 상태를 살피던 요문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시신의 가슴 부분이 불룩한 것이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품속에 무언가 들어있다!)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시체가 걸치고 있는 곤룡포의 가슴부분을 들쳐보려고 했다.

비록 두렵지는 않지만 썩어가고 있는 중인 시체에 직접 손을 댈 정도로 대범하진 못한 때문이다.

서걱!

헌데 지옥교의 날이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곤룡포가 간단히 갈라진다.

그만큼 지옥교의 날은 날카로운 것이다.

그리고 갈라진 곤룡포 속에 책이 한 권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한권 품고 있다.)

!

요문천은 지옥교의 끝으로 곤룡포를 좀 더 길게 아래로 찢었다.

털썩!

그러자 한권의 책이 시체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 두껍지 않은 그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표지가 검붉게 퇴색되어 있다.

(혹시 무공비급 아닐까?)

요문천은 지옥교를 바닥에 꽂은 후 왼손에 들고 있던 등을 지옥교의 손잡이에 걸었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와 그 안쪽의 지면까지 다 합쳐도 이십 장 남짓인 그 얇은 책의 재질은 종이가 아니었다.

양피지와 같은 가죽의 일종인데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만지는 감촉이 야릇했다.

(어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부드러울까?)

요문천은 갸웃하며 지옥교 손잡이에 걸어놓은 등의 불빛에 의지하여 책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검붉은 책의 표지에는 <저주마경(詛呪魔經)>이라는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있다.

"저주마경? 지옥교라는 검명에 못지않게 섬뜩한 제목이다."

요문천은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침을 삼키며 책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전자체로 적혀있다는 것도 저주마경이라는 이 책이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것을 품고 있던 시체는 불과 몇 달 전에 죽은 듯 아직 시신이 완전히 썩지 않은 상태다.

, 저주마경은 원래부터 요문천의 눈앞에 있는 시신의 소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곤룡포를 입고 있는 시체의 주인도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저주마경을 얻어서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목도 그렇고...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는 책이다.)

요문천은 꺼림칙했지만 용기를 내어 책을 펼쳐보았다.

겉표지를 젖히자 첫 번째 지면에 역시 전자체로 쓰인 글이 가득 적혀있다.

 

<지옥성(地獄城) 제구대 성주인 지옥검조(地獄劍祖) 하륜(河崙)이 한을 품고 죽어가며 이 글을 적는다. 노부가 남긴 저주마경과 지옥교를 얻는 자가 곧 지옥성의 제십대 성주(城主).>

 

어두운 책의 재질보다 더 짙은 검은색으로 적힌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옥성? 무림에 그런 문파가 있었나?"

글의 앞부분을 읽어본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이 요문천 역시 강호 무림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게다가 요문천은 승상부의 소부주라는 신분 덕분에 현재의 강호 정세에 대한 내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문천의 기억에 지옥성이라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지옥성이 중원 무림에 속하지 않거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문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지옥성을 멸망시킨 것은 우내사천(宇內四天)이라 불리는 중원의 인간들이었다. 그놈들은 악마삼보(惡魔三寶)를 노리고 서역(西域) 하미(合密)에 자리한 본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우내사천? 악마삼보? 역시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이름들인데...)

요문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내사천이니 악마삼보니 하는 이름들도 요문천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옛날의 서체인 전자(篆字)로 쓰여진 것도 그렇고 저주마경에 적혀있는 사연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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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난감한 치료(治療)

 

 

 

요문천은 먼저 손가락 두 개 마디만한 길이의 은제 병을 집어 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로 그 은병(銀甁) 안에 물약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문천은 은병의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알싸한 속에 그윽한 약냄새가 느껴지는데 그 약냄새를 들이키자 속이 시원해진다.

(이건 속의 상처를 다스리는 내상약이겠구나.)

내용물이 내상약(內傷藥)임을 확신한 요문천은 철접의 얼굴로 몸을 숙였다.

철접은 창백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입부터 벌리게 해야겠구나.)

요문천은 왼손으로 마늘쪽같은 코를 잡아 눌렀다.

그러자 코로 숨을 쉴 수 없게 되면서 철접의 가늘지만 단정한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푸른빛을 띤 창백한 입술이 벌어지며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백옥을 연상시킨다.

쪼르르!

요문천은 오른손에 든 약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그녀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아무쪼록 내상약이 효과가 있어야할 텐데...)

은제 약병의 물약을 모두 철접에게 먹여준 요문천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잠시 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던 철접의 숨소리가 좀 더 커졌다.

또 움직임이 거의 없던 그녀의 불룩한 젖가슴이 조금씩 아래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덜미를 만져보니 얼음장같이 차갑던 철접의 몸에서 조금이나마 온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내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같고...)

요문천은 안도하며 철접의 몸을 살펴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철접의 몸에 걸쳐진 옷은 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옷이 찢어진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설령 내상이 나아진다 해도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위험해질 것이다.)

요문천은 철접의 품에서 나온 약통들을 살펴보았다.

몇 개의 약통들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크고 납작한 합 모양의 것을 열어보았다.

약통 안에는 투명한 고약이 가득 들어있다.

(양도 많고 특별히 자극적인 냄새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창상(創傷;날붙이에 베인 상처)을 치료하는 금창약(金瘡藥)일 것이다.)

요문천은 고약을 손가락에 조금 묻혀서 자신의 목에 난 상처에 발라보았다.

약간 쓰리지만 동시에 갈라진 상처가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도 난다.

(금창약인 건 틀림없는데...)

약통을 들고 요문천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망설였다.

지혈이 되도록 약을 발라주려면 철접의 옷을 모두 벗겨야하기 때문이다.

(목숨이 오고가는 상황이니 인륜도덕이나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다.)

한동안 망설이던 요문천은 이윽고 결심을 하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철접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고름이 풀린 저고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금방 내린 눈같이 희고 비단결같이 매끄러운 철접의 속살이 드러난다.

저고리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어서 저고리가 벌어지자 바로 속살이 드러난 것이다.

요문천이 약을 찾기 위해 한번 더듬어본 대로 철접의 가슴은 날씬한 몸매에 비해 상당히 크고 풍만하다.

철접 자신의 얼굴만한 두 개의 살덩이가 묵직하게 얹혀 있다.

그 살덩이들은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산처럼 붕긋하게 솟은 형상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또한 작은 움직임에도 이리저리 흔들거려서 금방 쑨 묵을 연상시킨다.

(이런.... 이런...)

철접의 가슴을 본 요문천은 넋이 나갔다.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하며 또 풍만한 철접의 가슴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주르르!

요문천이 넋을 잃고 보는 중에 철접의 왼쪽 가슴에 비스듬히 나있는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와 가슴 골로 흘러내린다.

새하얀 피부를 따라 흐르는 아리도록 붉은 핏줄기가 요문천으로 하여금 퍼뜩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체온이 올라가면서 낙일금검이 관통했던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요문천은 서둘러 금창약을 손가락으로 떠서 철접의 젖가슴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너무도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탄력 넘치는 감촉은 요문천을 아찔하게 만든다.

(딴 생각 말고 치료에 집중하자! 이 여자는 지금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느냐?)

철접의 가슴에 금창약을 발라준 요문천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왼팔로 철접의 상체를 끌어안고 저고리를 완전히 벗겼다.

등쪽에 난 상처에도 금창약을 발라준 요문천은 철접의 상체에 난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양쪽 팔과 옆구리, 복부 등에도 날붙이에 베인 상처가 여럿 있었지만 다행히 치명상들은 아니다.

요문천은 철접의 상체에 나있는 모든 상처에 꼼꼼히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상체의 치료를 마친 요문천은 또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철접의 하체에도 여러 곳 베인 상처가 있다.

그 상처들은 상체의 상처들보다 오히려 깊어서 출혈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겨우 두 번째 만난 여자인데...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다.)

잠시 망설이던 요문천은 다시 결심을 하고 철접의 치마에 손을 가져갔다.

요문천의 떨리는 손에 의해 치마가 아래로 벗겨지면서 철접의 하체가 드러난다.

잘룩한 허리에 비해 철접의 둔부는 아주 풍만하다.

키가 큰 만큼 철접은 다리도 보통의 여자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길다.

허벅지는 오랜 단련 덕분에 튼실하면서도 탄력이 넘친다.

(설마...)

헌데 겉치마와 속치마를 함께 골반 아래로 벗겨 내리던 요문천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겉치마와 속치마 속에 당연히 입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속곳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국의 인간들이...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속옷을 입지 않는 풍습이 있다더니...)

요문천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철접의 치마를 골반 아래로 벗겨 내렸다.

허억!”

직후 요문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려야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철접은 치마 속에 속곳을 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드러나는 철접의 비밀...

요문천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온몸의 피가 폭발적으로 끓어오르고 어지러워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보면... 보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철접의 중심부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정신을 차려라 요문천! 네가 겨우 이 정도의 인간 밖에 되지 않았느냐?)

요문천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서 필사적으로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는 의식적으로 철접의 중심부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애쓰며 상처를 살폈다.

철접의 양쪽 허벅지와 엉덩이, 다리등에 상당히 깊은 자상들이 여럿 나있다.

그런 다리로 지금까지 먼 길을 달려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요문천은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고약을 퍼서 철접의 상처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철접의 피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탄성이 느껴진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늘 단련을 해온 증거다.

요문천은 벌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철접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하지만 철접의 비밀은 화인(火印)처럼 요문천의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후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요문천의 기억은 흐릿했다.

어쨌든 요문천은 철접의 몸에 나있는 대부분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줄 수 있었다.

이윽고 치료를 마쳤을 때 요문천의 몸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치료를 끝내자마자 요문천은 서둘러 벗겨놓은 옷가지로 철접의 몸을 가려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철접의 알몸을 보고 있다가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겪은 최고 난이도의 고역이었다!)

철접의 몸을 옷가지로 가려준 요문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힘을 소진한 듯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내가 이 여자를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아쉽지만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요문천은 아쉬움을 달래며 석실을 나가려고 했다.

헌데 떠나기 전에 석실을 한 바퀴 더 둘러보던 요문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뭔가 이상하다.)

요문천은 눈을 치뜨며 용차랑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용차랑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긁어대었던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용차랑이 손톱이 빠질 지경으로 긁어댄 벽에는 피와 함께 이리저리 긁히고 깊이 패인 자국들이 나있다.

용차랑은 죽어가던 상태로 쓸 수 있는 공력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벽이 진짜 돌이라면 핏자국은 남을 지언정 긁히거나 깊이 패일 일은 없다.

하지만 벽에는 분명 긁히고 패인 흔적들이 여럿 나있다.

(석실의 다른 곳과 달리 이 부분의 벽은 돌이 아니다!)

요문천은 어떤 예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손으로 벽을 긁어보았다.

푸스스!

그러자 요문천의 손가락이 긁는 대로 벽면이 푸슬푸슬 흩어진다.

(석회(石灰)! 누군가 이 부분을 흙으로 채워 넣고 겉을 석회로 발라 돌인 것처럼 위장했다.)

벽면을 긁어보던 요문천은 눈을 반짝이며 벽에서 조금 물러섰다.

(혹시 이 부분이 갈태독이 천독칠왕부의 어딘가에 마련해놓았다는 보물창고의 입구가 아닐까?)

요문천은 염두를 굴리며 오른쪽 발을 높이 쳐들었다.

!

그리고는 힘껏 벽면을 찍듯이 내려찼다.

퍼억! 푸스스!

표면에 발라진 석회가 쩍쩍 갈라져 흩어지면서 그 안쪽의 흙벽이 나타난다.

(한 번 더!)

!

요문천은 다시 한 번 온힘을 모아 흙벽을 발로 찍어 찼다.

콰드득...!

다음 순간 흙으로 만들어진 벽이 안쪽으로 와락 무너져 내리며 밀로(密路)가 나타났다.

어둑하면서도 눅눅한 습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어둑한 통로가 무너진 흙벽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 갈태독이 생전에 모아놓았다는 수억냥 값어치의 재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문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통로 안쪽을 기웃거렸다.

통로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무공을 지니지 않은 요문천으로서는 그냥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문천은 석실의 벽에 걸려있는 원통형의 등을 벗겼다.

동영의 인자들이 어둠 속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하는 그 등은 아주 밝지는 않다.

대신 완전히 밀폐되어 있어 비바람이 불 때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가 있는 구조다.

등을 든 요문천은 조심스럽게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요문천이 통로 안쪽으로 멀어짐에 따라 석실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또르르!

헌데 어둠 속에 누워있는 철접의 눈 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요문천이 치료를 해주는 도중에 정신이 돌아왔던 것이다.

(미안해 지로! 널 지켜주지 못한 못난 누나를 용서하거라!)

철접은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자책과 절망에 찬 오열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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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물 속의 참극(慘劇)

 

 

 

요문천은 주먹만한 돌을 주워 우물 안쪽으로 던져보았다.

첨벙!

잠시 기다리자 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이 우물에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문천은 철접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요문천은 무언가 깨닫고 서둘러 우물 턱으로 올라섰다.

휘익!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우물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너무 무모했나? 내 생각이 틀렸으면 우물물에 빠져 익사할 텐데...)

뛰어내리자마자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출렁!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래로 추락하던 요문천의 몸은 도로 위쪽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생각했던 대로다.)

몸이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요문천은 안도했다.

우물은 상당히 깊은데 지상에서 칠, 팔장쯤 되는 곳에 그물이 쳐져 있었다.

재질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가늘면서도 탄력이 아주 좋은 밧줄로 짜여진 그물이다.

아마도 동영의 인자들이 침투와 탈출 등에 사용하는 밧줄일 것이다.

철접이 우물 안으로 뛰어내렸음에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 그물 덕분이었다.

텅 텅!

요문천은 그물 위에서 몸이 퉁겨지는 사이에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우물은 몹시 깊어서 달빛이 흘러들지 못하는 바람에 상당히 어둡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우물의 한쪽 벽에 크지 않은 동굴이 있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동굴 입구가 매끈한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물 속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동굴이 숨겨져 있었구나.)

요문천은 그물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동굴로 다가갔다.

(혹시 저 동굴이 갈태독이 천독친왕부의 어딘가에 만들어 놓았다는 보물창고의 입구가 아닐까?)

동굴로 다가가며 요문천은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독친왕 갈태독이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았었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천독친왕부가 죽음의 귀역이 되고 갈태독이 실종되면서 그의 재보 역시 세상에서 사라졌다.

만일 갈태독이 숨겨놓은 재보를 찾아낸다면 단번에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족함이 없이 자란 요문천인지라 재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태독의 보물 창고와는 관련이 없더라도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요문천은 흥분을 억누르며 동굴로 기어들어갔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아서 엉금엉금 기어야 들어갈 수 있다.

헌데 동굴로 기어들어가면서 요문천은 섬뜩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굴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피가 흐른 후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끈적이는 감촉이 양손과 무릎에 느껴진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다.)

요문천은 동굴 바닥 전체에 피가 덮여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서리를 쳤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그 여자 혼자 흘린 피는 아니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동굴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동굴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의 양은 엄청 나서 한 사람이 흘릴 수 있는 정도의 피가 아니다.

마르기 시작하여 끈적이는 피에 섞여 가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피도 손바닥에 느껴진다.

그 피는 아마도 철접이 동굴을 기어들어가는 동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일 것이다.

(그 여자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앞서서 이 동굴을 기어들어갔다. 대량의 피를 흘리면서...)

 

요문천이 몸서리를 치며 기어가는 동안 동굴은 점점 넓고 높아졌다.

잠시 후에는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었는데 요문천의 양손과 무릎은 동굴 바닥을 뒤덮고 있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다.

동굴 천장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그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어 그리 어둡지 않다.

요문천은 달빛에 의지하여 바닥을 살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어진 동굴의 바닥에 여러 가닥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사람이 대량의 피를 흘리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이다.

(아마도 여기가 영락폐하를 습격했던 인자들의 비밀 거점이었을 것이다.)

요문천은 핏자국을 따라 걸어 들어가며 깨달았다.

영락제를 암살하기 위해 중원으로 잠입한 동영 이가류의 자객들은 오래전부터 인적이 끊긴 이곳 천독친왕부를 은신처로 삼았을 것이다.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죽음의 귀역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으니 은신처로 천독친왕부만한 곳은 없다.

이 우물 속의 은밀한 동굴은 이가류의 인자들이 천독친왕부를 거점으로 삼은 후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일 테고...

(영락폐하에 대한 암살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살아남는 자는 이 동굴로 피신한다는 약조가 사전에 있었겠지.)

요문천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멀지 않은 앞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요문천의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불빛쪽으로 걸어갔다.

 

불빛은 동굴의 끝에 자리한 한 칸의 석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요문천이 문이 부서진 그 석실로 다가갈 때였다.

안돼! 안된다!”

석실에서 그리 높지 않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나직하지만 내장을 칼로 긁어내는 듯한 처절한 고통이 실려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요문천은 서둘러 석실로 다가갔다.

오장육부를 다 토해내는 듯한 울음소리의 주인이 철접임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

 

부르르!

석실로 들어서던 요문천의 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석실 안에는 요문천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벽에 걸린 원통형의 등이 흘려내는 불빛 아래 여섯 구의 시체가 석실 바닥에 널려있다.

입구에 가까운 곳에는 이남이녀(二男二女)가 죽어있다.

이남이녀 중 부부로 보이는 삼십대의 남녀는 무릎을 꿇은 채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아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은 자세로 죽어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줄줄 흘러나오는 남녀는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넣고 왼팔로는 서로의 몸을 감싸 안고 있다.

회생불가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동반자살을 한 모습이다.

이남이녀의 다른 한 쌍은 부녀지간으로 보인다.

아직 앳된 모습이 보이는 소녀가 목이 부러져 죽어있으며 그 소녀의 시체 위에 중년의 남자가 엎드린 자세로 죽어있다.

소녀는 왼쪽의 팔과 어깨가 강한 힘에 으스러져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반면 중년 사내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무수히 나있지만 치명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내의 입과 코에서 검푸른 피가 흘러나와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몸을 적시고 있다.

아마도 중상을 입은 딸이 고통스러워하자 아비가 딸의 목을 졸라 죽인 후 자신도 독을 먹고 죽었을 것이다.

나머지 두 명은 노인과 소년이다.

노인은 석실 가운데쯤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작은 칼로 배를 그어 자결을 한 모습이다.

노인의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 그의 하체와 바닥을 뒤덮고 있다.

그 노인의 앞쪽에는 앳된 소년이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다.

소년의 다리 하나는 허벅지쯤에서 잘려나갔으며 길게 갈라진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있다.

소년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어 다닌 듯 내장이 터져서 오물과 피로 바닥이 칠갑아 되어 있다.

소년은 고통에 몸부림을 친 흔적은 바닥뿐만 아니라 석실의 벽에도 남아있다.

소년이 양손으로 마구 긁은 흔적이 입구 맞은편의 벽에 남아있는 것이다.

벽을 얼마나 세게 긁었는지 소년의 열 손가락은 손톱이 모두 빠지거나 부러져 있고 손가락 끝은 문드러진 상태다.

(그 아이다!)

벽 쪽으로 기어간 자세로 죽어있는 소년을 본 요문천은 전율했다.

 

<미안해 누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어젯밤 동대루의 기루에서 뛰쳐나와 철접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트리던 순진해보이던 소년이 배가 갈라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것이다.

소년은 바로 철접의 동생인 용차랑이었다.

그리고 철접은 용차랑의 시체 뒤쪽, 늙은 인자 시바타가 할복한 근처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다.

눈물이 말라버린 듯 철접의 눈에서는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요문천은 이내 이 석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차렸다.

철접의 어린 동생도 영락제에 대한 암살에 참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에 늙은 인자 시바타와 네 명의 남녀 인자가 용차랑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이미 되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용차랑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었을 것이고 당주의 어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늙은 인자 시바타는 할복을 했을 것이다.

동행한 네 명의 남녀 인자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했고...

지로... 지로...!”

중얼거리던 철접의 입에서 꺽꺽 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철접은 쥐어짜듯 말하며 동생의 시체 쪽으로 기어갔다.

너를... 너를 꽁꽁 묶어서라도... 여기 남겨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맥이 빠져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용차랑의 시신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

털썩!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내 용차랑에게 기어가려던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충격과 비통이 극에 달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소저!”

요문천은 급히 철접에게 달려가 그녀의 가는 목에 손을 대어 진맥을 해보았다.

철접의 목에 손을 대는 순간 차가운 한기가 느껴져서 요문천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몸이 마치 시체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내 느리게나마 뛰고 있는 맥이 느껴져 요문천을 안심시켰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심장을 아주 느리게 뛰도록 조절하고 있다. 그 때문에 몸이 냉혈동물의 그것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문천은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철접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요문천은 철접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다량의 출혈을 한 상태고 또 심장 근처를 금검존이 어검술로 날린 낙일금검에 꿰뚫리고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았다.

철접은 신진대사를 느리게 조절하여 기력의 소모를 최대한 늦춰왔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심장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덕분에 왼쪽 가슴이 낙일금검에 꿰뚫렸으면서도 즉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낙일금검이 꿰뚫은 상처 부위의 체온을 극한까지 낮춰서 출혈을 막고 있다. 동영의 인자들이 자신의 몸속 장기와 신진대사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요문천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관통상을 입은 가슴을 제외한 철접의 몸에 난 다른 상처들에서는 양은 적지만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동생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철접은 정신을 놓은 상태다.

이대로 방치하면 오래지 않아 철접도 죽어버릴 게 확실하다.

(치료를 해줘야한다.)

요문천은 결심하며 철접을 석실 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그녀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늘 목숨을 내놓고 사는 인자인 만큼 효과가 빠른 비상약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뭉클!

철접의 저고리 속으로 집어넣은 요문천의 손에 차갑지만 부드러운 살덩이가 만져진다.

(날씬한 외양과 달리 의외로 풍만한 젖가슴을 지녔구나.)

요문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모인 섭대낭을 제외하면 난생 처음 만져보는 여자의 젖가슴인 탓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크기는 유모 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탄력은 훨씬 뛰어나고 매끄럽다.)

요문천은 침을 삼키며 손을 철접의 품속으로 깊이 집어넣었다.

철접의 젖가슴은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매끄러우면서도 갓 쑨 묵처럼 탱탱한 탄력을 지니고 있다.

떨면서 그 젖가슴 주변을 더듬던 요문천의 손에 곧 가죽 주머니가 하나 만져졌다.

(찾은 것같다.)

요문천은 서둘러 그 가죽 주머니를 철접의 품 속에서 꺼냈다.

상당히 크고 묵직한 주머니다.

(자객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있겠구나.)

요문천은 서둘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투둑! !

그런 후에 거꾸로 뒤집자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여러 가지 물건이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진다.

아주 얇은 표창 십여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주머니들 서너 개, 그리고 몇 개의 약통등이다.

약통들은 충격을 받아도 쉽게 훼손되지 않도록 유리나 도자기 대신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다양했다.

물약이 든 작은 병의 형태도 있고 고약이나 분말 형태의 약이 든 납작한 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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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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