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강의 작업실/구중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11.30 [구중천] 제 3장 비구니의 신세한탄
  2. 2021.11.29 [구중천] 제 2장 도왕 치우
  3. 2021.11.28 [구중천] 제 1장 새벽의 방문자
  4. 2021.11.27 [구중천(九重天)] 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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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비구니의 신세한탄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위치한 천불곡은 마치 딴 세상같이 조용했다. 기승스런 모랫바람도 천불곡 안으로는 불어들어 오지 않았다.

한데 모랫바람 대신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등룡풍의 코를 찔러왔다.

좁은 천불곡 안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여기저기에 수많은 여승들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에 회색승포를 걸친 여승들, 그녀들은 모두 지극히 고통의 표정으로 죽어 있었는데 불문의 제자들답지 않게 손에 손에 병장기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등룡풍은 눈 앞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참경을 둘러보며 무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나 말고 또 이 반야암을 찾아온 자들이 있었군!”

그는 급히 나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그는 세심한 눈으로 여승들의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승들의 사인(死因)은 가슴에 맞은 내가장력이었다. 그녀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 혈장인이 여승들의 젖무덤을 무참하게 으스러뜨리고 심장까지 바스러뜨린 것이다.

등룡풍의 초롱한 눈빛이 지혜롭게 빛났다.

(손바닥 자국으로 보아 침입자는 모두 여덟 명이다!)

그는 십여 구의 시체를 모두 살펴본 후 몸을 일으켰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나귀의 등에서 녹슨 칼 도왕 치우를 내려 품에 안고 천불곡 안으로 들어섰다.

골짜기 한 굽이를 돌자 반야암이 저 만큼 보였다.

반야암은 절벽의 중간쯤에 세워져 있었다. 절벽을 반쯤 파서 세운 동굴 암자인 반야암까지는 백여 개의 계단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데 그 계단 주위에도 수십 명의 여승들이 죽어 있었다.

 

등룡풍은 총총히 걸음을 옮겨 반야암으로 올라갔다.

“......!”

헌데 반야암의 본전(本殿)으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멈칫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반야암 안에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룡풍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암자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전면에는 바로 깎아 만든 거대한 불상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 사 장이 넘는 거대한 좌불상(座佛像)은 손바닥 하나가 어른보다 더 컸다.

불상 앞에는 불단이 놓여 있었다.

불단 위에는 높이가 두 자 가량 되는 향로가 있었고 지금 그 향로 안에서는 미약한 향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본전으로 들어선 등룡풍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아미타불...... 소시주는 누구를 찾아 오셨지요?”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미약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 불단 앞에 한 명의 여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애로운 인상의 중년여승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는지 아직도 그 여승의 용모에는 옛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단아하고 차분한 몸가짐, 그 속에 배어 흐르는 은은한 기품......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왔다.

중년여승은 일신에 회색승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지금 그 회색가사는 온통 검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합장하고 앉은 주위에는 팔 인(八人)의 괴인이 반원형으로 중년여승을 포위한 채 쓰러져 있었다.

흡사 흉신악살을 연상케 하는 혈의인들이었는데 괴이하게도 그 자들의 전신에는 붉은 털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것은 등룡풍의 집을 찾아왔던 야수혈마과 흡사한 형상이었다.

그자들은 고통으로 이지러진 표정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헌데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다만, 오공에서 피와 뇌수를 흘린 채 죽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무서운 내가강기에 대뇌와 내장이 박살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등룡풍은 중년여승을 향해 급히 합장하며 말했다.

“소생은 등룡풍이라 합니다. 추망(醜亡)이란 분의 부탁을 받고...... 반야신니란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츠읏!

순간 중년여승의 눈가로 언뜻 한 줄기 이채가 흘렀다.

“빈니가...... 반야라고 해요. 추망이 무슨 일로 소시주를 보내셨지요?”

그녀는 나직이 탄식하며 물었다. 그 말에 등룡풍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 대사께서 반야신니이십니까?”

그는 해연히 놀란 눈빛으로 중년여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신니(神尼)라 불리어 반야신니가 아주 늙은 노비구니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승은 이제 많이 되었어야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을 뿐이었다.

반야신니-!

실상 그녀는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다만 한 가지 지고한 불문신공을 연마하여 나이를 먹는 것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등룡풍의 놀라운 표정에 반야신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니가...... 너무 젊어 의심이 가시나요?”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 앞으로 다가가 치우신도를 반야신니에게 바치며 말했다.

“추망이란 분은 이 칼을 신니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부르르......

도왕 치우를 보자 반야신니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치우(蚩尤)...... 도왕(刀王) 치우......”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치우신도를 받아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옥으로 빚은 듯 해맑고 아름답다. 관세음보살의 관음옥수를 연상케 하는 섬섬옥수.

등룡풍은 격동을 금치 못하는 반야신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녹슨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피울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추망...... 은 달리 말이 없었나요?”

반야신니가 녹슨 치우신도를 쓰다듬으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있었습니다!”

등룡풍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우에 천황(天皇)의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요!”

“......!”

반야신니는 멍하니 등룡풍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등룡풍이 전하는 말은 지극히 중요한 것일 텐데도 그녀는 듣지 못한 듯 멍하니 반야암 밖의 거친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분은...... 다른 말은 하시지 않았나요?”

문득 반야신니는 망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한시도 신니를......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등룡풍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부르르......

순간 반야신니의 전신이 뇌전을 맞은 듯 격렬하게 떨렸다.

주르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문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그 분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등룡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반야신니의 옥용이 문득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도왕 치우를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합장했다.

그런 그녀의 옥용으로 햇살같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애롭고 아름다워 흡사 관음보살이 현신한 듯했다.

“추망!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반야신니는 기쁨의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눈을 들어 등룡풍에게 고소를 지어 보였다.

“추태를 보였어요. 용서하세요.”

“아...... 아닙니다 신니!”

등룡풍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치우신도를 다시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다시 시주가 맡아 주셔야겠어요. 왜냐하면...... 빈니는 곧 입적(入寂)해야만 하기 때문이예요.”

그 말에 등룡풍은 대경하여 물었다.

“다...... 다치셨습니까?”

반야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혈왕천(血王天)의 야수팔흉(野獸八兇)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요. 빈니는 그들을 반야신강(般若神罡)으로 격살했지만...... 빈니 역시 그들의 혈영강살에 내부가 흔들려 오래 버티지 못해요!”

그녀는 주위에 쓰러져 있는 팔 인의 흉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수팔흉(野獸八兇).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등룡풍은 그들이 반야암의 여승들을 죽인 장본인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눈앞의 이 연약해 보이는 여승 반야신니에게 내부가 박살당해 절명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흉악무비해 보이는 거한들!

그들 팔 인이 일개 여승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등룡풍을 놀라게 만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빈니의 신상 얘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문득 반야신니는 그윽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등룡풍은 단정히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반야신니는 나직이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벌써 사십 년 전이군요. 곤륜(崑崙)에는 한 분의 고승(高僧) 밑에 곤륜삼정(崑崙三鼎)이라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는 낮고 조용한 음성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곤륜파(崑崙派)!>

 

그들은 백 년 전까지 무림구대문파에 드는 당당한 명문정파였다.

하지만 백 년 전, 서역 성숙해(星宿海)에서 일어난 하나의 마파(魔派)와의 충돌로 인해 전정영이 괴멸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적룡마교(赤龍魔敎).>

 

그것이 그 문파의 이름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그 옛날 천하를 피로 물들였던 마교(魔敎)의 후예였다고도 한다.

천 년 전, 마교는 구중천과 충돌하여 양패구상하고 지상에서 쓰러졌다. 한데, 그 위대한 천년마교의 후예를 자처한 인물이 성숙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적룡마존(赤龍魔尊)!

 

이것이 그 대마왕(大魔王)의 이름이었다.

적룡마존은 서역마도를 통합하여 적룡마교라는 조직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구중천(九重天)을 무너뜨리고 중원무림을 장악하여 마교의 천하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중원으로 물밀듯 들이닥쳤다.

그들 적룡마교와 최초로 무딪친 것이 바로 곤륜파였다. 곤륜은 밀종(密宗)의 불문신공과 도가(道家)의 현문신공(玄門神功)을 함께 지닌 명문대파였다.

그러나 곤륜파의 천년저력으로도 노도 같은 적룡마교를 막지 못했다.

결국, 곤륜파는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 무너진 곤륜의 문호를 일으켜 세울만한 뛰어난 삼 인(三人)의 제자가 곤륜파에 나타났다.

 

-호연굉(胡燕宏).

-추망(追亡).

-반화련(潘火蓮).

 

이름하여 곤륜삼정(崑崙三鼎)!

바로 이들 삼 인이었다.

세 사형매는 곤륜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 사람은 곤륜산의 어느 빙곡(氷谷)에서 세 권의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미항마결(須彌降魔訣).

-축골천형경(縮骨千形經).

-반야진결(般若眞訣).

 

이 비급들은 오백 년 전 천축제일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일세 고승 수미천존(須彌天尊)의 유물이었다.

하나하나가 인세에 다시없는 초절기들을 얻은 세 사형매는 뛸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세권의 비급을 각기 한권씩 수습하며 나누어가졌다.

대사형 호연굉이 수미항마결을, 둘째인 추망(追亡)이 축골천형경을, 그리고 막내인 반화련(潘火蓮)이 반야진결을 연마하기로 했다.

세 가지 불문신공을 얻은 세 사형매 곤륜삼정은 곧 폐관과 함께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그들은 이내 무서운 고수로 화해갔다.

한데, 세 사형매가 함께 생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즉, 대사형 호연굉이 막내사매 반화련을 짝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화련에게는 이미 은근히 사모하는 정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추망(追亡)이었다.

추망은 태어날 때부터 추괴한 용모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마음이 충후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함께 생활하면서 추망의 군자다움을 발견한 반화련은 은근히 추망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추망 또한 사매 반화련에게 연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추괴한 용모 때문에 섣불리 마음을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엇갈린 연정(戀情), 그것이 모든 화근의 발단이었다.

어느날 호연굉은 마침내 반화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당연히 반화련은 그런 호연굉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히고 더불어 자신이 추망을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고백했다.

그녀의 말에 호연굉은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내 무서운 질투로 변했다. 호연굉은 그 자리에서 득달같이 반화련을 덮쳐 겁탈하려 했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벌어진 일인지라 반화련은 호연굉에게 능욕당할 위기에 처했다. 호연굉은 반화련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거칠게 그녀의 처녀를 깨뜨리려 했다.

위기의 순간, 마침 외출했던 추망이 돌아왔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호연굉에게 능욕당하는 것을 본 추망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호연굉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두 사형제 간에 일장혈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과는 기습당한 호연굉의 패배였다.

 

“두고 봐라! 곤륜파는 내 손으로 뿌리까지 멸망시킬 것이다!”

 

패배한 호연굉은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달아났다.

그리고, 추망 역시 반화련이 이미 호연굉에게 능욕당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곤륜을 떠나갔다.

그 후 호연굉의 종적은 무림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추망은 천면신마(千面神魔)란 이름으로 천하를 떠돌며 호연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사형 호연굉에게 강간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충격을 받은 반화련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녀가 바로 반야신니였으며 사십 년 그 이전에 일어난 비극의 전말이었다.

 

* * *

 

등룡풍은 반야신니의 탄식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영민한 머리를 굴렸다.

(천면신마는 자신이 야수혈마의 수미천강에 격중되어 내부가 모두 으스러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혈왕천의 제이인자 야수혈마가 바로 호연굉일까?)

그때 반야신니가 그의 상념을 깨며 우울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삼 년 전에 이사형은 빈니에게 마지막 서찰을 보냈어요.”

“......!”

“그 서찰에 의하면...... 사형은 한 가지 상고신병(上古神兵)의 종적을 쫓다가 우연히 호연굉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고 했어요!”

등룡풍은 그 말에 흠칫하며 도왕 치우를 기리켰다.

“그 상고신병이란 것이 이 녹슨 칼(刀) 입니까?”

반야신니는 그 물음에 문득 고소를 지었다.

“그것은 저 고금제일인 육합성황(六合聖皇)이 남긴 여섯 자루 신병 중의 하나예요. 치우신도(蚩尤神刀)를 보고 녹슨 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주밖에 없을 거예요.”

“......!”

등룡풍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반야신니는 낮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사형의 서찰에 의하면 호연굉은 구중천에 가입하였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만 적었을 뿐 구중천의 어느 문파인지는 적어놓지 않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바로 야수혈마......!)

등룡풍은 자칫 큰소리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천불곡 밖에서 무서운 내공이 실린 장소성이 들려왔다. 마치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장소성이었다.

그 소리는 곧장 모래바람을 뚫고 날아와 반야암을 온통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

“......!”

순간 등룡풍과 반야신니의 안색이 동시에 홱 변했다.

“야수팔흉의 괴수가 오고 있어요!”

반야신니는 다급히 품 속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한 권의 얇은 양피비급과 하나의 영웅건(英雄巾)이 그것이었다.

 

<반야진결(般若眞訣).>

 

빛바랜 양피비급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축의 고승 수미천존이 남긴 세 가지 불문절기 중 하나였다.

호연굉이 가져간 수미항마결이 공격전용임에 비해 반야진결은 수비전용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반야진결로 일어나는 반야강기는 최강의 호신기공이었다. 잘못 반야신강을 가격하면 적은 그 몇배의 반탄강기에 휘말려 내부가 모조리 으스러지고 만다.

야수팔흉이 죽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멋모르고 반야신니를 혈영강살로 내쳤다가 반진당해 내부가 으스러져 절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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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왕 치우

 

 

 

자면제왕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등룡풍은 서둘러 나무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웃기는 늙은이군! 살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는 냉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츠츠츠!

몸을 돌려 세우는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용의 흔적이 급격히 엷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룡쇄심인은 본래 자면제왕이 자랑하는 독문살수였다. 그것에 격중되면 대뇌에 직접 타격이 가해져 죽고 만다. 그 무서움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무서운 자룡쇄심인이 소년 등룡풍의 살갗도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종(藥宗)의 후예를 건드린 빚은 꼭 기억해 두겠다 자면제왕 독고황!”

등룡풍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급히 부엌 옆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검박하게 정돈된 방 한쪽에는 튼튼해보이는 나무 침대가 놓여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등룡풍은 급히 나무침상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긍......!

그러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침대가 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등룡풍은 뛰듯이 지하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중앙에는 약을 달이는 커다란 청동단로(靑銅丹爐)가 놓여있고 사방 벽에는 수많은 약병과 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석실 한편에는 쇠로 만든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철제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인물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물론 자면제왕에게 천면신마라 불린 회포노인이었다.

“너무 지체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다!”

등룡풍은 급히 침상의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막 회포노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팍!

돌연 회포노인의 손이 강철수갑같이 등룡풍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악!”

등룡풍은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절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번쩍!

“......!”

회포노인의 눈이 벼락치듯 떠지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을 노려보았다.

“깨...... 깨어나셨군요!”

등룡풍은 고통 속에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너는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와 어떤 관계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등룡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등 아래에서 한 권의 고경(古經)을 꺼냈다.

그것은 다 낡은 양피지의 책자였다.

 

<약종천황경(藥宗天皇經)!>

 

고서(古書)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의성(醫聖) 편작(騙鵲)이 지은 세 권의 의경(醫經)중 한 권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편작은 약종경(藥宗經), 기의경(奇醫經), 천독경(千毒經) 등 삼 편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약종천황경은 바로 그 중 약종경(藥宗經)이었다.

약종경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의 구분, 이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약을 채취하러 천하의 험산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그에 쓰이는 한 가지 절정 경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탄신폭등비(彈身暴騰飛)라는 그 경신절기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고래로 약종경(藥宗經)을 연마한 편작의 후예를 약종일맥(藥宗一脈)이라고 일컫는다.

약종일맥의 의생들은 약을 쓰고 해독하는데 있어 단연 환우제일이었다.

 

흠칫 놀라던 등룡풍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천외약종이란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저의 아버님 함자가 사(獅)자 추(追)자 되십니다.”

그 말에 회포노인의 눈에 한 가닥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천외약종 등사추는 올해 이미 백 살이 넘었는데...... 게다가 그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거늘......!)

그는 내심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천외약종(天外藥宗) 등사추(登獅追)!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였다.

당대 약종일맥의 종사인 그는, 그러나 이십 년 전 한 가지 일로 중원무림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인들의 질책에 밀려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변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면 이미 백 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십 오륙세 정도된 어린 소년 등룡풍이 천외약종의 아들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회포노인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부가 결례했다면 용서하게, 소형제!”

회포노인은 등룡풍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이어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면......”

등룡풍은 급히 말리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포노인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은 탓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네, 소형제! 노부는...... 곧 한줌 독수(毒水)로 녹아들 것이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장께서 천년시독(千年屍毒)에 중독된 것은 알지만 제가 능히......”

등룡풍은 회포노인을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독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네! 천년시독의 해독정도야 약종일맥의 후예인 소형제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겠지. 하지만 사실 노부는 그외에도 한 가지 지독한 불문신공에 맞아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상태라네!”

“아!”

등룡풍은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는 회포노인이 중독된 것 외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회포노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를 다치게 한 자는...... 방금 나타났던 야수혈마(野獸血魔)라는 자이네. 그 자는...... 수미천강인(須彌天罡刃)이라는 불문항마절기를 지녔는데...... 그것이 노부의 내부를 산산이 바스러 뜨려놓았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회포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검푸르게 변해갔다. 그것은 천년시독이 대뇌까지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포노인은 개의치 않고 힘겨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본래 중(僧)이었네. 법호는...... 추망(醜亡)...... 하지만 무림인들에게는...... 천면신마(千面神魔)라고 불리웠지!”

“천면신마!”

등룡풍은 긴장된 음성으로 나직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천면신마라 자처한 회포노인,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면신마의 고통은 극에 이른 듯했다. 그는 안면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네. 이...... 물건을...... 천불동(千佛洞) 반야암(般若庵)의...... 반야신니(般若神尼)에게...... 전해 주게!”

그는 침상 옆에 놓인 길쭉한 물건을 등룡풍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말에서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소중하게 안고 있던 물건이었다. 둘둘 만 무명천의 끝으로 삐죽하게 녹슨 칼자루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등룡풍은 엄숙한 안색으로 이어지는 천면신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면신마의 음성은 끊어질 듯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반야...... 신니에게 그것을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해 주게. 천황(天皇)의 종적은...... 중원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제...... 지후(地后)께서...... 일어나셔야만...... 그놈들 구중천(九重天)을 막을 수 있다고......!”

“......!”

등룡풍은 긴장된 표정으로 천면신마를 주시했다.

아! 이미 천면신마의 손 끝은 검푸른 독수로 녹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면신마는 사력을 다해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주게나. 노부...... 추망(醜亡)은...... 한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그것이 천면신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쿵!

마침내 그는 모로 쓰러졌다.

그러자,

츠으......

기다렸다는 듯 이내 그의 신체는 급격히 검푸른 독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면신마,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

등룡풍은 멍하니 독수로 변한 천면신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천년시독! 정말 지독하구나!”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편히 잠드시기를.....! 노인장의 유언은 잊지 않겠어요.”

그는 경건하게 합장하며 천면신마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려 보았다.

“반야암(般若庵)...... 반야신니(般若神尼)......!”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등룡풍은 침중한 안색으로 천면신마의 시체를 거두었다. 시체라고 하나 시퍼런 독수와 몇 줌의 녹지 않은 모발이 전부였지만......

툭......!

헌데 등룡풍이 천면신마의 회색장포를 집어들자 무엇인가 발 끝으로 떨어졌다.

“......!”

그것은 검은색의 가죽주머니였다.

등룡풍은 허리를 굽혀 가죽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한 권의 비급과 여러가지 변장도구가 들어 있었다.

등룡풍은 먼저 비급을 꺼내 펼쳐보았다.

 

<천면경(千面經).>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천면......경?”

등룡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비급을 한 장 넘겨보았다. 그러자 깨알같이 빽빽한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

등룡풍은 호기심을 느끼며 비급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추망(醜亡)은 우연히 천축(天竺) 유가문(兪家門)의 비급 반부를 얻게 되었다. 그것에는 골격과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축골역형신공(縮骨易形神功)의 구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래 추괴한 용모를 지녔던 노납은 뛸 듯이 기뻐했으며 축골역형신공을 연구하여 천 개의 얼굴(千面)을 지니게 되니...... 뭇 중생들이 노납을 일컬어 천면신마(千面魔宗)이라고 했다...... 중략...... 노납의 공부가 모자라 축골역형신공의 마지막 단계인 전능환영결(全能幻影訣)을 연마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노부 필생의 한 가지 원한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대충 그러했다.

천면경은 천면신마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천면신마는 오래 전에 멸망한 천축 유가문의 비급 반부를 얻었었다. 그의 천면절기는 바로 그 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 비급의 절기로 천 개의 얼굴을 지녀 천하를 우롱할 수 있었다.

등룡풍은 모르고 있었으나 천면신마란 이름은 무림최고의 신비로 통했다.

등룡풍은 천면경을 덮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후인을 만나면 전해 주어야지!”

문득,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천면신마가 건네준 길쭉한 물체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인데 이 노인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 했을까?”

그것은 아주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무명천을 통해 싸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등룡풍은 조심스럽게 무명천을 풀어보았다.

순간,

“칼(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무명천 속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칼(刀)이었다.

하지만 등룡풍이 놀란 이유는 그 칼이 너무도 볼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길이는 석 자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칼 전체에는 녹이 덕지덕지 앉아 있어 도저히 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녹슨 칼의 손잡이에는 흐릿한 전자체(篆字體)로 도명(刀名)이 새겨져있었다.

 

-도왕(刀王) 치우(蚩尤).

 

그것을 본 등룡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왕? 이 녹슨 쇠붙이가 칼(刀)의 제왕(帝王)이라고?”

그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무명천으로 다시 도왕 치우를 둘둘 말아 쌌다.

“어쨌든 부탁을 받았으니 반야암이란 곳에 전해 주기는 전해 주어야지!”

등룡풍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치우신도를 조심스럽게 싸들고 석실을 나섰다.

 

* * *

 

쉬-이잉!

거친 모래바람이 뿌옇게 옥문관 일대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황량한 바람 속으로 흐릿한 태양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朝),

마침내 하루가 열리는 아침인 것이다.

태양이 떠올라 추위는 다소 덜해진 듯했다. 하나, 거칠고 사나운 모랫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불동(千佛洞).

 

옥문관 너머 서역쪽 삼십여 리 부근에는 가파른 절벽이 하나 서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석벽을 파고 그곳에 수많은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하여 천불동, 또는 막고굴(莫古窟)이라 불리웠다.

당대(唐代)에 천축(天竺)을 다녀온 신라국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往吾天竺國傳)을 남긴 동굴의 암자도 바로 이곳 천불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문득 모랫바람 속으로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세찬 바람을 뚫고 옥문관 쪽에선 일인(一人) 일기(一騎)가 나타났다. 아니, 그중 일기는 말(馬)이 아니라 한 필의 늙은 당나귀(驢)였다.

당나귀의 등 위에는 전신을 온통 두터운 천으로 감싼 한 명의 소년이 타고 있었다. 소년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눈에 들어갈까 봐 당나귀의 갈기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었다.

따각...... 따각......

늙은 당나귀는 소년을 태우고 천천히 천불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힘은 없으나 그 대신 노련한 그 당나귀는 기승스런 사풍 속에서도 제대로 천불동을 찾아온 것이었다.

“반야암(般若庵)은 저쪽이었지!”

소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전면을 주시했다.

등룡풍! 소년은 바로 등룡풍이었다.

뿌연 모랫바람 속으로 두 개의 절벽이 맞닿은 아늑한 골짜기가 바라다 보였다. 그 골짜기는 천불곡(千佛谷)이라 불렸으며 그 끝에 한 채의 암자가 절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반야암(般若庵).>

 

그 암자가 바로 반야암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반야암에는 여승들, 즉 비구니들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곡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등룡풍도 몇 번 천불동에는 왔었으나 반야암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등룡풍은 힘들어 하는 늙은 당나귀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푸르르.....!

당나귀는 한 차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 느린 걸음을 옮겨 천불곡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헌데 천불곡의 입구로 들어서던 등룡풍은 깜짝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연 무엇을 발견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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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새벽의 방문자

 

 

 

-옥문관(玉門關)!

 

중원의 끝자락에 자리한 야만(野蠻)과 풍요(豊饒)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

잘 알려진 대로 옥문관은 중원에서 서역(西域)으로 드나드는 관문이다. 옥문관을 넘어서면 인간은 문명의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자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만 한다.

전한(前漢)시대 월지(月氏)를 찾아나섰던 장건(張騫) 이래 야심과 청운의 꿈을 품고 옥문관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불귀고혼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가 다 알겠는가?

때는 여명(黎明) 무렵이다.

쉬이잉! 쐐애앵!

비단폭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를 머금은 삭풍(朔風)이다. 옥문관 너머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황야에서 불어오는 이 삭풍에는 다량의 모래까지 섞여 있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삭풍의 기세등등함 때문인지 옥문관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량한 분지 중앙에 사암(砂岩)을 쌓아 구축한 성벽 안쪽에는 천여 채의 가옥들이 넓은 대로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시사철 서역에서 불어오는 드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옥문관 일대의 가옥들은 모두 지붕이 낮은 토담집들이었다.

두두두......

문득 여명의 적막을 깨고 남쪽으로부터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한 필의 건마(建馬)가 옥문관의 남쪽 대로로 쫓기듯 달려들어 왔다.

푸르르!

건마는 먼길을 달려온 듯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고 있는데 전신에서는 피같이 검붉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것은 땀이 아니었다.

피(血)!

건마의 전신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후두둑......

건마가 지나는 땅에는 검붉은 피와 땀이 뒤섞여 뿌려진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인물이 말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일신에 빛바랜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그 역시 타고 있는 말과 같이 전신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원래 회색이던 그 사람의 장포는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말갈기에 파묻고 있어 용모와 나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회포인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두두두......

일인일마(一人一馬)는 기승을 부리는 삭풍을 뚫고 옥문관의 대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헌데, 대로의 북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히히힝-!

돌연 건마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너무 지치고 탈진하여 마침내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쿠-웅!

선혈을 지면으로 흩뿌리며 건마의 몸뚱이는 거칠게 길 중간으로 나뒹굴었다.

“크-윽!”

그와함께 말 등에 타고 있던 회포인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길바닦에 나뒹굴었다.

후두둑!

회포인이 나뒹군 주위는 삽시에 그의 몸에서 뿌려진 선혈로 검붉게 물들었다.

“미...... 미련한 축생(畜生)! 너마저 노부를 죽이려느냐?”

회포인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며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제서야 드러난 회포인의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포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설령 유의하여 뇌리에 새겨두었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푸르르.....!

회포인을 태우고 온 말이 간신히 비칠거리며 일어서더니 주인에게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미물! 그래도 노부가 주인인 것을 잊지 않았느냐?”

회포노인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말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히힝-!

두두두......!

그러자 말은 주인이 정말 자기를 때리는 것으로 알고 깜짝 놀라 울부짖으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본 회포노인은 안색이 홱 변했다.

“아...... 안돼, 돌아와라!”

회포노인은 다급히 부르짖으며 일어났다.

두두두!

하지만 놀란 말은 길길이 날뛰는 모래바람을 뚫고 삽시에 노인의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으...... 천불동(天佛洞)이 지척인데...... 여기서 이 지경이 되다니......!”

말이 달아나자 회포노인은 낙심하여 신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크-윽!”

콰당탕!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해 회포노인은 다시 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기력이 쇄진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헌데 노인은 정신을 잃고서도 예의 무명천으로 싼 길쭉한 물체를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쉬-이잉! 고오오!

다시 칼날 같은 모래바람이 옥문관의 아침하늘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스으...... 스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포노인의 몸은 점점 휘날리는 모래 속으로 파묻혀 갔다. 오랜 시간 지속된 출혈과 삭풍에 실려온 한기로 인해 노인은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 어느 집에서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설사 깨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날같이 매서운 모래바람이 두려워 밖에 나올 엄두도 못낼 것이므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문득 대로의 우측에 있는 나지막한 토담집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리더니 누군가의 머리가 조금 열려진 나무문 틈으로 불쑥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여우털로 만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칠팔세 가량 되었을까? 서북 변방의 아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에 섬세한 윤곽을 지닌 소년이었다. 짙은 검미와 곧은 콧날, 유난히 붉고 선명한 입술이 흰 피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소년의 두 눈은 더없이 맑고 초롱초롱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게 반짝이며 지혜로 가득 찬 소년의 두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끌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 사람이잖아!”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던 소년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며 동그랗게 떠졌다.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회포노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소년은 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휘이잉!

집을 나서는 순간 드센 모래바람이 소년의 크지 않은 체구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뛰듯이 회포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지독하게 다쳤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하겠는 걸!”

소년은 회포노인의 온몸이 무수한 상처로 뒤덮인 것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차!”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회포노인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넣어 질질 끌고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회포노인의 몸은 의외로 무거워 소년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년은 회포노인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간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주위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닦고 급히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쉬-이잉!

다시 거센 모래바람이 대로를 스치며 회포노인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채 일다경(一茶更)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화라락!

거친 모래바람을 타고 하나의 인영이 회포노인이 쓰러졌던 곳에 날아내렸다.

“......!”

길에 내려서자마자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는 이 인물은 구척의 당당한 체구에 검붉은 자색(紫色)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이 노인은 얼굴에도 은은한 자색(紫色)이 떠돌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배에까지 닿아있는 긴 수염 역시 짙은 자색을 띠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자면인(紫面人)의 눈은 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가 강인하면서도 사나운 인상을 풍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삼엄하고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화드득-!

거센 삭풍이 자면인의 옷깃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하지만 자면인은 미동도 않고 우뚝 선 채 매섭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번쩍!

그러던 어느 순간 여우털 모자를 쓴 소년이 들어간 집쪽을 주시하던 자면인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일어났다.

자면인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년의 집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검붉은 자색의 광채가 번져나오는 자면인의 눈에 소년의 집 문설주에 한줄기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들어왔다.

“흥! 천면신마(千面神魔)! 그렇게도 구차하게 살고 싶었는가! 쥐새끼같이 이런 오두막집에 기어들어가다니......!”

자면인은 얄팍한 입술 끝을 올리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쾅!

다음 순간 자면인은 발로 거칠게 나무문을 걷어찼다.

쉬-이잉!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친 모랫바람이 집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

자면인은 매서운 눈길로 빠르게 집 안을 살펴보았다.

열려진 나무 문 안쪽은 넓지 않은 거실인데 천정에는 수많은 약봉지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거실 저 편으로 부엌과 방으로 통하는 문 두 개가 보였다.

한데 맨 흙이 드러나 있는 거실 바닥에는 금방 흘린 듯한 선혈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자면인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천면신마! 언제까지 쥐새끼같이 숨어 있을 작정인가?”

그러면서 집 안쪽에 대고 우렁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세요? 저희 약포(藥鋪)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요!”

약간 짜증이 섞인 소년의 음성이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끼-익!

이어 부엌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걸어나왔다. 물론 회포노인을 구한 그 소년이었다.

“......”

한데, 소년을 보는 순간 자면인은 그만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소년은 몸 여기저기에 온통 시뻘건 피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오른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왼손은 목이 잘린 닭을 움켜쥐고 있다. 그 닭은 방금 전에 목이 잘린 듯 다리와 날개를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자면인의 얼굴이 일순 낭패로 물들었다.

(닭피였는가?)

순간 그는 질풍같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집안을 둘러보았다.

“......”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큼직한 두 눈에는 은은한 조소의 빛이 떠돌았다. 자면인이 그것을 보았다면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으음......”

한 차례 집안을 둘러번 자면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건 뭐냐?”

자면인은 자색의 광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의 손에 들린 닭을 주시했다.

자면인의 살기어린 시선을 접한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이...... 이거요? 보시다시피 제 아침거리인데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바람에 이렇게 난장판이 되었어요.”

그는 모가지 잘린 닭을 들어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면인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의 태도에서 조금도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지만 자면인은 의심을 다 풀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소년은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용풍(龍風). 등룡풍(登龍風)이라고 해요.”

“등룡풍......”

자면인은 소년의 이름을 입 안으로 되뇌이며 다시 한 번 대청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천정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약봉지에 이르렀다. 아마도 소년 등룡풍의 집은 약포를 하는 듯했다.

자면인은 다시 등룡풍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안에 어른들은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등룡풍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버님과 저 단둘인데...... 아버님은 장성 너머로 채약하러 가셨어요.”

“그래?”

번-쩍!

무심코 중얼거리던 자면인의 눈이 돌연 급격한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검미를 곤두세우며 형형한 시선으로 등룡풍의 아래 위를 살폈다.

(대단한 골격이다!)

꽉 움켜쥔 자면인의 손으로 문득 땀이 배어흘렀다. 그제서야 그는 소년 등룡풍의 골격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알아본 것이다.

소년의 체격은 일견하여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실로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골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면인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으나 눈앞의 소년 등룡풍같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골격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이...... 것은 어쩌면 전설 중의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마로 문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용골호형지체(龍骨虎形之體)-!

달리 제왕지상(帝王之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골격 중 가장 완벽한 품상을 일컫는 말이다.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임독이맥(任督二脈), 천지현관(天地玄關)이 타통되어 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차 천지현관이 닫히고 임독이맥이 굳어져 버린다. 그래서 지혜가 아둔해 지며 무공을 연마하는 자는 내공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용골호형지체는 달랐다. 그 골격을 지닌 인물은 나이가 들어도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천지현관은 언제나 활짝 열려져 있으며 임독이맥은 영원히 굳어지지 않는다.

내공을 연마하면 막힘없이 증가하여 범인이 백 년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용골호형지체의 인간은 단 일 년이면 얻을 수 있게 된다.

천지현관이 막혀 있지 않아 그의 지혜는 막힘이 없으며 무공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용골호형지체를 지닌 인간이 일견하여 연약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몸이 어머니의 태내에 있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왕품골(帝王品骨)-!

인간 중 가장 완벽한 용골호형지체의 골격을 지닌 소년, 바로 그 소년 등룡풍이 지금 자면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놈이 무공을 연마하면 십 년이 못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적수가 없게 된다!)

자면인은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짝 마름을 느꼈다.

그는 등룡풍을 주시하며 내심 침중하게 생각을 굴렸다.

(이놈은...... 후일 구중천자(九重天子)가 되려는 본좌의 최대최강의 적수가 될 놈이다. 게다가 만일 구중천(九重天)의 다른 놈들 손에 이놈이 들어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면인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자광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열 배 강해졌다.

츠-읏!

순간 등룡풍은 작렬하는 듯한 자면인의 눈빛에 들고 있던 닭을 놓치며 휘청 물러섰다.

(눈이...... 타는 듯하다!)

자면인의 두 눈은 뚫어질 듯 등룡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죽이든지 아니면 본좌의 제자로 삼든지 해야만 한다!)

그의 눈이 문득 살기로 붉게 물들었다.

쩌정!

다음 순간 그의 손 끝에서 벼락치는 듯한 자색의 벼락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등룡풍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 사람......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비칠비칠 물러섰다.

자면인은 그런 등룡풍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쩌저정-!

자색벼락이 흐르는 그의 오늘손이 점점 치켜 들려졌다. 그의 손이 내려쳐지면 등룡풍은 채 싹도 피워보기 전에 한줌 피모래로 화할 판국이었다.

등룡풍은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그로서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헌데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흐흐흐흐! 놀라운데? 당당한 제왕천(帝王天)의 천주(天主) 자면제왕(紫面帝王)께서 무공도 모르는 소년을 헤치려 하다니......!”

돌연 문 밖에서 한 줄기 싸늘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자면인, 자면제왕(紫面帝王)의 입에서 벼락치는 듯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꽈르릉!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홱 뒤집히며 집 밖으로 한 줄기 자색벼락을 후려쳐냈다.

빠카카캉!

직후 철벽(鐵壁)을 두드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썩 집안을 뒤흔들었다. 그와함께 마치 폭풍이 불어닦친 것같은 엄청난 돌풍이 문밖의 대로를 휩쓸어 자욱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

그러나 직후 자면인은 강력한 반탄력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집밖의 누군가가 마주 쳐낸 강력한 장력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던 것이다. 자면제왕은 자칫 그 반진에 밀려 한 걸음 밀려날뻔 했던 것이다.

자면제왕이 어깨를 들썩일 때였다,

“크읏! 자전신강(紫電神罡)! 역시 명불허전인데......!”

쿵쿵!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집밖에서 누군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휘청휘청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거푸 다섯걸음을 물러나서야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저놈은...!)

몸을 세운 그 인물을 바라본 자면제왕의 날카로운 눈에서 번뜩 이채가 흘러나왔다.

나타난 인물은 일신에 피칠을 한 듯 붉은 혈포를 걸친 거한(巨漢)이었다. 구척이 넘는 당당한 거구를 지닌 인물인데 기이하게도 그자의 몸 전체에는 핏빛의 털(血毛)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털이 나지 않은 곳은 얼굴의 앞부분 외에는 없었다. 흡사 거대한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괴인(怪人)이었다.

혈모괴인(血毛怪人)의 두 눈에는 핏빛 안광이 벼락치듯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자면인에 못지 않은 패도적인 눈빛이었다.

“혈왕천(血王天)의 제이인자...... 야수혈마(野獸血魔)!”

혈모괴인을 본 자면인의 입에서 앓는 듯한 한 소리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큿! 역시 무섭소. 자칫 천주(天主)의 손에 극락구경을 할 뻔했구료.”

야수혈왕이라 불린 괴인은 음침한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웃는 그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오싹한 느낌을 준다.

자면제왕은 집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왕천까지 이번 일에 흥미를 느꼈다니 놀랍군.”

“크큿! 별 말씀을...... 육합천병(六合天兵)에 흥미를 지닌 것은 비단 당신의 제왕천이나 우리 혈왕천 뿐만이 아니외다.”

야수혈마는 음침하게 말을 받으며 흘깃 자면제왕의 뒤에 서있는 소년 등룡풍을 주시했다.

직후 그의 눈에서도 은은한 경악의 빛이 흘렀다. 아수혈마 역시 등룡풍의 뛰어난 골격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자면제왕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몸을 약간 움직여 등룡풍의 모습을 가렸다. 이어, 그는 야수혈마의 흥미를 등룡풍에게서 옮기려는 의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혈왕천의 여제(女帝) 혈모(血母)께서도 천면신마를 쫓아 이곳까지 오셨소?”

“혈모께서는......”

야수혈마는 두 눈을 야릇하게 번뜩이며 무엇이라 말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삐이익-!

돌연 한 소리 날카로운 호각성이 서북방에서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회포노인이 타고온 말이 달아난 곳이었다.

“......”

“......”

자면제왕과 야수혈마는 동시에 흠칫했다.

“천면신마의 종적이 발견된 듯하구료. 노부는 이만 실례하오.”

피-잉!

다음 순간 야수혈마는 히죽 웃으며 유령같이 모랫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도 아니고 야수고 아닌 기분 나쁜 놈!”

자면제왕은 야수혈마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언젠가 네놈의 보기 싫은 껍질을 노부의 손으로 벗겨 버린다!”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흘렀다.

이어 그는 다시 등룡풍에게로 돌아섰다.

“......!”

등룡풍을 바라보는 자면제왕의 눈빛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변했다.

등룡풍은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생사가 몇 차례나 뒤바뀌고 있음을 알고 내심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자면제왕은 결심을 한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으면 너를 본좌의 제자로 삼겠지만...... 치우신도(蚩尤神刀)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팟!

그는 말과 함께 등룡풍의 미간을 향해 섬전같이 일지(一指)를 찔렀다.

“악!”

쿵쿵!

순간 등룡풍은 미간을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비칠 물러섰다. 그런 그의 미간에 어느 틈엔가 은은한 자색의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등룡풍의 이마에 새겨진 용무늬를 본 자면제왕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흐흣! 너는 노부의 자룡쇄심인(紫龍碎心印)에 제압당했다! 일 년 내로 노부가 그것을 풀어 주지 않으면 너는 대뇌가 녹아 들어가 죽고 만다. 살고 싶다면...... 청해(靑海)의 제왕보(帝王堡)로 노부 자면제왕 독고황(獨孤皇)을 찾아와랏!”

자면제왕은 등룡풍에게 음산하게 웃어보이고는 유령같이 몸을 날렸다.

스으......

이내 자면제왕의 모습은 등룡풍의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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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구중천 -九重天

 

                       제1권

 

 

 

서장(1)

 

               九重天, 아홉의 神話

 

 

 

구중천(九重天)!

아홉 겹(九重)의 하늘(天)-!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가 신비(神秘) 속에 싸여 있다고 하여 구중천(九重天)이라는 아홉 겹의 하늘이 세상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자 또한 없었다.

신비(神秘)와 공포(恐怖)의 아홉 하늘!

그 아홉 개의 하늘(九重天)이 열리는 순간 강호.....무림에 종말이 도래한다는 전설(傳說)은 이미 낡디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뇌왕의 하늘(雷王天)!

-빙하의 하늘(氷河天)!

-혈왕의 하늘(血王天)!

-화왕의 하늘(花王天)!

-유령의 하늘(幽靈天)

-독마의 하늘(毒魔天)!

-제왕의 하늘(帝王天)!

-번뇌의 하늘(煩惱天)!

-신비의 하늘(神秘天)!

 

이것이 구중천(九重天)이라고 했다.

세상사람들이 아는 것은 다만 그 아홉 하늘의 이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구중천에 대한 세인들의 그같은 무지(無知)와 경외감(敬畏感)은 그 아홉 하늘에 신비와 공포를 한층 더하게 만들었다.

아홉의 하늘 중 단 하나의 하늘만 열려도 구주팔황(九州八荒)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변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아홉 겹의 하늘(九重天)!

아홉의 야망(野望)-!

길고도 파란만장한 천년풍운(千年風雲)은 바로 그곳 구중천에서 시작된다.

 

* * *

 

<구중천(九重天)!>

 

그들의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천여 년 전이었다.

당시 구주팔황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변황(邊荒)에서 일어난 무서운 악마(惡魔)의 추종자들인 천년마교(千年魔敎)였다.

천마노조(天魔老祖)라는 전설 속의 대마종(大魔宗)이 천년마교를 세운 후, 그들은 천여 년 간 무적(無敵)을 구가했다.

아무도 마교(魔敎)의 아성을 깨뜨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고금이래 지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가장 강한 상고무림의 여섯 개의 조직-영겁육패(永劫六覇) 중에서도 최강으로 통했다.

더욱이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 앞에 천년(千年)의 수식을 붙여 천년마교(千年魔敎)라고 자칭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교의 무리는 막강하고 위대했었다.

한데 천년 전 어느날이었다.

그 위대한 마교가 단 일백 일 만에 하나의 신흥세력(新興勢力)과의 싸움에서 패망하여 지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중원의 아홉 곳에서 돌연 일어난 아홉 개의 무서운 신흥세력들!

그들이 바로 구중천(九重天)이었으며,

그것이 향후 천여 년 간 무림을 공포로 떨게 만든 아홉 겹의 하늘-구중천의 전설의 시작이었다.

흡사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나 저 위대한 마교 천하무적의 신화를 깨뜨린 구중천-

한데,

마교를 깨뜨린 직후 구중천은 일제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왜 구중천의 아홉 하늘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구중천 내부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후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구중천은 단 한번도 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의 현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천년무림사가 바로 저 구중천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점철되었음을....!

또한 구중천이 언젠가 무림의 막후 지배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전율스러운 막강한 힘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구중천 사이의 전면적인 대쟁패(大爭覇)의 날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그것을 아는 자는 아마도 지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다. 구중천의 무리가 아닌 이상은......

 

아홉의 하늘(天)-!

아홉의 야망(野望)-!

 

그것이 바로 구중천(九重天)이며, 그들의 진정한 신화(神話)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직은....!

 

 

 

서장(2)

 

                                六合天兵, 여섯의 傳說

 

 

 

구중천(九重天)이 아직 그 싹(芽)도 보이지 않았을 아득한 옛날,

그곳에 한 명 광인(狂人)이 있었다.

그는 허황되게도 인간의 몸으로 신(神)이 되기를 원했던, 미쳐도 단단히 미친 광인(狂人)이었다.

 

-육합성황(六合聖皇)!

 

후세에 그 광인은 그같은 이름으로 불리웠다.

광인이기는 하였으되 그의 무공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기에 성황(聖皇)이라는 최고 최대의 찬사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고금최강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었다.

육합성황(六合聖皇)!

그는 평생을 무공 한 가지에 미쳐 살았었다. 오죽했으면 그는 신혼 첫날밤에 다시 무림으로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그는 수많은 강자(强者)들과 싸우고 명인(名人)들에게 도전하며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승부(勝負)는 바로 그의 유일한 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숱한 싸움을 겪었고...... 그러면서 그는 막강해져 갔다.

그렇게 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그 무공에 미친 광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더 이상 자신을 능가하는 자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이 세상이 생긴 이래 그 광인 육합성황을 능가하는 강자는 결코 없었다. 저 전설의 천마노조(天魔老祖)라고 해도 결코 그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만족해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룻밤을 함께 지낸 그의 아름답던 아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외간 남자와 사통(私通)했으며 그나마 이미 죽어 한 줌 흙이 된 후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굶어 죽었다고 했다.

고향을 떠날 때는 검던 육합성황의 머리는 이미 새하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정녕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있다면 다만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는 허망한 명성 뿐....!

그렇게 한 명의 광인(狂人)은 쓸쓸하게 죽어갔다.

죽어가면서 육합성황은 자신의 마지막 능력을 짜모아 여섯 자루 병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여섯 자루의 병기,

그것은 각기 한 자루 씩의 검(劍), 도(刀), 편(鞭), 자(尺), 도끼(斧), 장(杖)이라고 했다.

 

-사일천황검(射日天皇劍)!

-도왕(刀王) 치우(蚩尤)!

-만독신마편(萬毒神魔鞭)!

-번뇌철척(煩惱鐵尺)!

-파천혈부(破天血斧)!

-지존묵장(至尊墨杖)!

 

이것이 육합성황이 죽어가며 만든 여섯 자루의 병기였다.

육합성황은 그 여섯 자루 병기에다가 자신의 필생 절학을 새겨넣었다고 전한다.

 

<육합천병(六合天兵).>

 

평생을 무공에 미쳐 살았던 한 명 광인이 남긴 그 여섯 자루의 병기는 그렇게 불렸다.

육합천병은 그 후 천하각지로 흩어졌다.

그것은 그 후 무림패왕의 상징이 되었다. 왜냐하면 육합천병을 얻는 자는 곧 천하무적이 되기 때문이다.

육합천병은 하나하나가 가히 하늘을 깨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육합천병 위에 새겨진 육합성황의 절학이었다.

고금제일인이었던 육합성황-!

그의 절기를 한 가지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곧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 미친 광인이 남긴 여섯 자루의 신병(神兵)-!

그것이 다시 세상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수없는 혈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났건만 육합천병은 여전히 무림인들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채 천하에 떠돌고 있었다.

미친 세상에 던져진 여섯 자루의 미친 마물(魔物)-!

그것이 바로 육합천병이었다.

광기(狂氣)와 허무(虛無)로 주조(鑄造)된 마물 육합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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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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