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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마검칠식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깊은 밤중이지만 강변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원 안팍에는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 장원은 제왕성의 분타중 한 곳이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장원 중에서도 대청 일대가 가장 환하다.

여러 개의 등이 밝혀진 대청 안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속에는 수의를 걸친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누워있다.

사우의 시체가 걸치고 있는 수의의 가슴 부분은 피로 물들어 있다.

관의 뒤쪽에는 사우가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위사들은 고개를 떨 군 채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주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청 안으로 들이쳤다.

철위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틈엔지 대청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은 제왕성의 외(外)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그가 급보를 받고 수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려온 것이다.

궁무독과 동행한 인물들은 대조적인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깡마르고 훤칠한 체격의 백발노인인데 옷자락에는 <銀>자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줄이 은실(銀絲)로 새겨져 있다.

이 백발노인이 제왕성 사대무력집단 중 은위사대(銀衛士隊)의 대주인 백월사신(白月死神)이다.

다른 노인은 백월사신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의 소유자다.

체격이 장대하고 대머리인데 옷자락에는 <銅>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푸른 줄이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빚어진 듯한 인상의 이 대머리 노인이 동위사대(銅衛士隊) 대주인 독두태보(禿頭太保)다.

“총... 총관님!”

“분합니다 총관님!”

궁무독 일행을 본 십여 명의 철위사들은 분루를 흘리며 엎드렸다.

“속하들도 대주님을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보고하기 위해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속하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

철위사들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오열했다.

그들의 이마가 삽시에 피로 물들었다.

“닥쳐라!”

쾅!

하지만 궁무독은 발을 구르며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드드드!

궁무독의 내공이 실린 진각(振脚)과 고함으로 인해 대청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내공의 심후함만으로도 궁무독이 사우를 간단히 능가하는 고수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밖에서 경비를 서던 철위사들이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청 안의 철위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계집처럼 질질 짜지 마라. 너희들의 대주를 위한다면 복수를 위해 가슴 속에 칼을 갈아야하지 않느냐?”

궁무독은 살기 어린 눈으로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철위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 떨군 채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못난 인간 같으니... 이름도 없는 놈에게 죽임을 당해서 제왕성의 이름에 먹칠을 해?”

궁무독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사우가 남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제왕성의 위명이 실추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노부가 사(査)대주의 사인을 살펴보겠소이다.”

그때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이 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해주시오 백(白)대주.”

궁무독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른 외상은 없고...”

백월사신은 관 속에 누워있는 사우의 시체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들어왔다

“가슴에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군.”

슥!

백월사신은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을 젖혀 보았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우의 가슴에는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등까지 뚫려있었다.

“이건!”

“헉!”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구멍을 보는 순간 백월사신뿐 아니라 독두태보와 궁무동의 입에서도 비명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 사대주의 등까지 뚫려있는 상처의 측면이 나선형으로 파여 있군. 그렇다는 건...”

백월사신은 덜덜 떨며 손으로 상처의 측면을 만져보았다.

특이하게도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의 측면은 나선형의 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검칠식! 천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천마구절기(天魔九絶技)중 마검칠식이오.”

궁무독이 전율하며 말했다.

“마... 마검칠식이라면 십팔 년 전에...”

독두태보는 너무 놀라 헉헉 대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무후님... 영창공주님을 시해한 흉수가 쓴 무공도 마검칠식이었지.”

백월사신이 이를 부득 갈며 내뱉었다.

(맙소사! 역시 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법은 마검칠식이었구나.)

(십팔 년 전 주모님이 시해 당하신 것과 같은...)

무릎을 꿇고 있던 철위사들도 전율했다.

 

십팔 년 전, 마교 교주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치기 위해 제왕성에 잠입했었다.

그리고 달마묵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지키던 흑백신귀에게 종적이 발견되어 쫓기게 되었다.

무사히 제왕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자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안주인인 무후 주영창, 즉 영창공주의 거처로 들이닥쳤었다.

그곳에서 귀면지존은 갓 돌을 맞은 제왕성의 소성주 섭무궁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영창공주를 살해했었다.

영창공주는 귀면지존의 검에 찔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절명했었다.

그리고 십팔 년 만에 영창공주를 죽게 만든 마공, 마검칠식의 흔적이 냉혈철심 사우의 시신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 마검칠식은 마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악랄하고 치명적인 검법인데...”

“총관! 드디어 십팔 년 전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 같소.”

독두태보와 백월사신이 극도의 흥분으로 떨며 궁무독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의 대주를 살해한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궁무독은 두 노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있는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약관도 안된 애송이었는데...”

강유와 대결했다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철위사 장흔이 일행을 대표하여 보고했다.

“살아계실 때 대주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놈이 사용한 다른 무공은 칠절 중 소요신군 강조의 것이었습니다.”

“소요신군 강조!”

궁무독과 백월사신, 독두태보는 전율하며 눈을 부릅떴다.

 

* * *

 

산중의 밤은 더욱 어둡다.

휘익!

섬전초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속도를 줄이는 그놈 앞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섬전초는 절벽 끝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절벽 끝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섬전초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아래쪽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는 계곡인데 그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끼이...

섬전초의 등이 긴장으로 활처럼 굽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면서도 섬전초는 소리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곡 막다른 곳의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동굴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피운 모닥불이 타고 있다.

모닥불에는 물기가 있는 쑥대가 얹혀져 있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극성스러운 모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운 모깃불인 것이다.

강유는 동굴을 등지고 모닥불을 앞에 둔 위치에 앉아있다.

상의를 벗은 상태인 강유는 사우와 싸우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납작한 도자기 용기에 들어 있는 고약을 손가락으로 떠낸 강유는 상당히 깊게 갈라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 고약은 어머니 냉상영이 비상약으로 챙겨준 금창약(金瘡藥)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유 옆에는 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단도 한 자루와 몇 개의 약병, 갈아입을 속옷과 먹다 남은 건량,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한 다발의 가느다란 밧줄등이 그것이다.

모두 강유가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에 들어있던 물건들이다.

정작 봇짐을 싼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 물건들 외에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봉투도 함께 놓여있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개봉(開封)의 동북방 삼백여리 쯤에 자리한 양산(梁山)이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황금성이 있는 금릉과는 오히려 백여 리쯤 멀어진 상태다.

제왕성의 인간들은 당연히 진상파가 금릉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추격대의 주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예상한 진상파는 목적지를 금릉과 반대쪽인 개봉으로 바꿨다.

천년고도인 개봉에도 황금성의 분점(分店)이 있다.

그것도 보통 분점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거대한 분점이다.

금릉의 황금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개봉의 분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성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진상파는 금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개봉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다만 강유의 상처가 가볍지 않고 진상파 자신도 밤눈이 어두운 것을 감안하여 오늘 밤은 양산의 깊은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강유가 등지고 앉아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입구에서 오장쯤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온다.

동굴 끝의 바닥에는 마른 풀잎과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에 진상파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동굴 입구를 볼 수 있도록 가로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는 강유의 봇짐을 쌌던 천이 덮여 있다.

밤이 깊었지만 진상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는 있으나 두 사내의 모습이 번갈아 뇌리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사내는 물론 강유와 모용준이다.

(같은 인간이고 사내인데 어찌 그렇게 다를까?)

진상파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데 반면 또 다른 사내는 생면부지인 나를 구해주려고 목숨을 도외시했었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유모인 구숙정과 짐승처럼 뒤엉키던 장면을 떠올리고 새삼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것에 담긴 영혼에는 천양지차가 날 수 있구나.)

감았던 눈을 뜬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돌려 동굴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강유가 진상파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앉아서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다.

강유의 몸에 가려서 모닥불의 불빛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 강유...)

상의를 벗고 있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처녀인 나를 배려해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을 대비하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상파는 시선이 자꾸만 강유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협객이며 대장부... 어쩌면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살을 드러낸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살인을 했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강유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필살일초에 당해 죽어가며 눈을 부릅뜨던 냉혈철심 사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었지만 한 인간의 목숨을 내손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과 비탄에 잠길 가족이 있을 텐데...)

상처에 고약을 바르는 강유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몸에 묻었던 그자의 피는 씻어버렸으나 내 영혼에는 살인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게 될 테지.)

깊은 한숨이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림인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경험하자 후회와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란 놈은 너무 심약해서 무림인으로서의 거친 삶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구나.)

강유가 우울하게 한숨을 쉴 때였다.

사박!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진상파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저... 밤이 이미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강유는 멋쩍어져서 벗어놓았던 상의를 집어 앞을 가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탓인지 쉽게 잠 들 수가 없군요.”

진상파가 강유 뒤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주무셔야...”

말하던 강유는 움찔했다. 진상파의 손이 강유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고약 통을 잡았기 때문이다.

“등 쪽 상처에는 손이 닿지 않으실 테니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강유의 뒤쪽에 무릎을 꿇은 진상파가 고약 통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강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등을 진상파에게 맡겼다.

진상파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떠낸 금창약을 강유의 등 쪽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녀가 아버지 이외의 사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진상파의 손가락이 살에 닿자 강유의 몸에 움찔 경련이 치달렸다.

(이런 느낌이로구나.)

강유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진상파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몸을 만지는 느낌은 이토록 흥분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었어.)

진상파는 가빠지는 숨결을 강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유 역시 심장이 거칠게 뛰노는 것을 행여나 진상파가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분이 외의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경험이로구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강유였다.

(만일 분이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난리가 나겠지?)

그 와중에도 분이의 화난 표정이 떠올라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그 직후의 일이었다.

반짝!

모닥불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강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 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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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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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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