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강의 작업실/대도전능(大盜全能)

[대도전능] 17화 납치당한 소녀

와룡강입니다 2025. 1. 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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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납치당한 소녀

 

 

 

봄날의 소주(蘇州)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백화(百花)가 만발하고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수로(水路)에는 꽃놀이 나온 유람선들이 가득하다.

물산이 풍부한데다가 기후까지 좋은 소주가 항주(杭州)와 함께 지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선유객잔(仙遊客棧)은 천여 개가 넘는 소주의 객잔들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하다.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잘 관리를 해온 덕분이다.

전체가 수로에 휘감겨 있는 선유객잔은 안쪽으로도 물길이 나있어 손님을 태운 배들이 들고 나기도 한다.

선유객잔 깊은 곳에는 물길과 담장으로 에워싸인 독채 객실이 있다. 하룻밤 투숙하기 위해서는 삼백냥 넘는 거금을 지불해야하는 최고급 객실이다.

몇 칸의 방과 거실 등으로 이루어진 독채 주변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무사들은 칼이나 창 등의 무기도 지녔지만 여러 개의 주머니를 허리띠에 주렁주렁 달고 있다.

주머니가 여럿 달려있는 허리띠는 어느 한 가문을 상징한다.

무림인이라면 주머니 달린 허리띠를 찬 무사들과는 절대 시비를 트지 않는다. 그들이 속한 가문이 일단 진 빚은 반드시 갚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당가보(唐家堡), 보통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이라 불리는 당씨일족이 그들이다.

사천당문이 용독술(用毒術)과 치명적인 암기(暗器)로 유명하다는 걸 모르는 무림인은 없다.

독을 쓰는 그들의 재주는 만독동천에 필적하며 각종 암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녔다.

덕분에 사천당문은 정파백도의 대표적인 명문세가들인 삼문육가의 일원이라는 지위를 수백년 간 유지해오고 있다.

 

***

 

천마련의 횡포가 나날이 자심(滋甚)해지고 있소.”

!

팔비나타(八臂那陀) 당천성(唐天星)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사천당문의 가주인 그는 성격이 불같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이 격렬할 뿐 아니라 손속도 독해서 자신과 가문에 죄를 지은 자는 천리고 만리고 쫓아가 기필코 응징한다.

덕분에 당천성은 우내칠절 다음 서열인 십팔패왕(十八霸王)의 일원으로 꼽힌다.

십팔패왕은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한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유력자들을 일컫는다.

십팔 년 전, 궤멸직전까지 몰렸던 천마련은 사자천존 초대협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기사회생,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소.”

당천성은 분노서린 눈으로 동석한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실내에는 두 명의 노인과 한명의 소녀가 있다.

노인들 중 한명은 날카로운 인상에 칼을 차고 있으며 다른 한 노인은 대머리에 바위덩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을 지녔다.

칼을 지닌 노인은 삼문육가 중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장로 팽산(彭山)이다.

근육질의 대머리 노인은 역시 삼문육가에 속하는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장로 악균(岳鈞)이다.

두 노인은 당천성의 은밀한 연락을 받고 가문을 대표해서 소주로 왔다.

실내에 있는 마지막 한명은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다.

막 피어난 꽃처럼 생기발랄한 미모의 소녀는 당천성의 막내딸이다.

이름이 당아연(堂雅姸)인 그녀는 일찍이 사천제일미인(四川第一美人)으로 불리며 당천성의 자랑거리가 되어왔다.

물론 구대문파나 우리 삼문육가는 아직 공격당하고 있지 않지만... 정파백도에 속한 군소문파와 가문들 중 상당수가 천마련에 항복하거나 멸문지화를 당해버렸소.”

당천성의 분노에 찬 토로가 이어졌다.

군소문파와 가문들을 일소한 천마련의 다음 표적이 구대문파와 삼문육가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당천성의 우려가 괜한 노파심이 아니라는 걸 팽산과 악균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태의 발단은 십팔 년 전에 있었던 사자천존의 이해 못할 은퇴였다.

당시 무림맹과 천마련의 대결은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사자천존은 모두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이었다. 그의 영도 아래 무림맹은 마도무림의 결맹인 천마련을 압도하고 있었다.

천마련은 모든 전선에서 패퇴했다.

어쩔 수 없이 천마련은 총단이 자리한 거야택(巨野澤)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려 했다.

하지만 천마련에게 승산은 거의 절망적일 정도였다.

철면마존은 사자천존을 이길 수 없고 무림맹의 객관적인 전력도 천마련의 몇 배였다.

천마련의 인간들은 멸절을 각오했다.

그랬는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겼다.

사자천존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무림에서 사라진 것이다.

사자천존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무림맹은 공황에 빠져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야택을 뛰쳐나온 천마련에 의해 무림맹은 허무하게 와해되고 말았다.

 

우리 산동악가도 천마련에 복속한 문파들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중이오.”

산동악가의 장로 악균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동악가는 거야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그 때문에 천마련의 위협을 어떤 문파나 가문보다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당천성이 천마련의 횡포에 맞설 대책을 논의하자는 전갈을 보내자 산동악가는 장로들 중 수석인 악균을 파견했다.

정파백도는 다시 무림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야만 하오.”

하북팽가의 장로 팽산이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하북팽가 역시 산동악가 정도는 아니지만 거야택에서 그리 멀지 않다. 당천성의 제안에 즉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자천존을 보필했던 사대장로(四大長老)께서 검후(劍后) 대려화(代麗華)소저를 옹립하여 무림맹의 재건을 시도하고 계시오.”

당천성이 말했다.

우리 삼문육가도 이번 기회에 다시 무림맹에의 가입을 서둘러야만 할 것이오.”

물론 무림맹을 중심으로 정파백도가 일치단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전에 우리들 삼문육가가 먼저 결맹을 하는 것이...”

의견을 개진하던 팽산은 흘깃 옆을 보았다.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은 당아연이 하품을 하고 있다.

영애가 많이 지루한 것같소.”

팽산이 웃으며 말했다.

... 죄송해요.”

하품하던 당아연은 급히 소매로 입을 가리며 부친의 눈치를 보았다.

천마련의 감시로부터 두 분 장로님을 만나러 온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딸아이와 유람하는 것처럼 꾸민 것인데...”

당천성은 막내딸에게 눈치를 주며 혀를 찼다.

다행히 팽산과 악균은 너그럽게 웃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니 어른들의 딱딱한 얘기가 지루하기만 할 거요.”

당소저는 방으로 가서 쉬는 게 좋겠구먼. 먼 길 와서 피곤하기도 할 테니...”

그래도 돼요?”

당아연은 반색하며 부친을 보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봐야 방해만 되니 네 방으로 가서 쉬어라.”

당천성은 한숨을 쉬며 가보라 손짓을 했다.

그렇게 할게요. 혹시 시키실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발딱 일어난 당아연은 거실 입구로 갔다

문주께서는 막내 따님이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으시겠소.”

팽산이 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가에서 태어난 게 가엾어서 정을 좀 지나치다 싶게 주고 있는 편이외다.”

당천성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천당문에는 가외불출(家外不出)이라는 엄격한 가규가 있다.

문중의 비전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며느리에게는 전수하지만 딸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사천당문의 딸들도 물론 무공은 익힐 수 있다.

다만 그녀들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일반적인 것들뿐이다.

사천당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용독술과 암기술은 배우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

비록 본인이 명목상으로는 가주지만 실권은 어머니와 마누라가 쥐고 있는 불쌍한 신세요.”

당천성이 자조하며 말했다.

악균이 동조했다.

무림세가에 며느리로 들어오는 여자들이 어디 보통 재원들이겠소? 저희 산동악가도 실질적인 가주는 주모이신 악대부인(岳大夫人)이라고 할 수 있소.”

팽산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가문이나 사정을 대동소이하구료.”

이래저래 우리들 수컷들만 불쌍한 세상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당천성의 말에 팽산과 악균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

 

아유 이제야 살 것 같네.”

당아연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왔다.

이 좋은 계절에 천하명승 소주까지 와서 이 무슨 궁상이람. 꼰대들의 얘기는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같으니 목욕이라도 해야겠어.”

당아연이 겉옷을 벗으며 욕실로 갈 때였다.

파팟!

누군가의 손가락이 당아연의 등쪽 혈도를 빠르게 찍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混穴)들이었다.

하악...!”

당아연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무너졌다.

어떤 자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암습을 가한 것이다.

스륵!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지는 당아연의 몸을 사내의 억센 팔이 끌어안았다.

(먼발치에서 본 대로군. 공포귀면(恐怖鬼面)이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오라고 했던 무결점의 순음지체(純陰之體)인 계집이다.)

당아연을 끌어안은 사내의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 정신을 잃으면 안돼!)

당아연은 흐려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혼혈이 찍힌 탓에 주변 사물은 급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순음지체는 계집 중의 계집... 단순히 만지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당아연의 몸을 어루만지며 사내는 숨결도 거칠어져 갔다.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맛도 보지 못하고 넘겨야하다니 아깝긴 하군.)

사내가 당아연의 아랫도리를 더듬어갈 때였다..

흐려지는 당아연의 시야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도자기가 들어왔다. 장식용인 그 도자기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제발 소녀를 구해주세요 아버지!)

내공을 쥐어짜낸 당아연은 도자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당아연의 손바닥에서 암경(暗勁)이 터져나갔다. 그리 강하지 않은 잠경이었지만 도자기를 넘어트리기에는 충분했다.

(아차!)

사내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도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장창!

하지만 한발 늦어서 도자기는 탁자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

 

“!”

“!”

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천당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당아연이 들어간 방문 안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삼문육가가 먼저 결맹을 한 후 무림맹에 재가입하자는 팽장로님의 의견에는 기본적으로 동의...”

와장창!

당천성의 말이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끊겼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

(당가주 막내딸의 방 쪽이다!)

팽산과 악균이 용수철 튕겨지듯 일어났다.

아연아!”

!

당천성은 이미 한쪽 벽을 박살내며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벽 너머가 당아연의 방이었다.

무슨 일이오 문주?”

영애가 다치기라도 했소?”

팽산과 악균도 부서진 벽을 통해 당천성을 따라갔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사천당문의 무사들도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깨진 도자기만 보일 뿐 당아연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연아! 여기 있느냐?”

당천성이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게 두 노인과 무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욕실에서도 당아연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주! 어찌 된 거요?”

영애는 욕실에도 없소?”

팽산과 악균이 욕실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무래도... 딸년이 납치당한 것같소.”

당천성이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납치!”

그런...”

노인들이 경악할 때였다..

네놈들! 허수아비냐? 대체 무얼 하고 있었어?”

당천성이 방으로 뛰어든 무사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가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겠습니다.”

사천당문 무사들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당천성의 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연이의 신상에 불미한 일이 생기면 네놈들 모두 살 생각은 하지 마라. 당장 개방(丐幇)을 통해 무림맹에 연락해라. 이번 일도 결국 무림맹 때문에 벌어진 셈이니 아연이의 신상에 변고가 생기면 우리 사천당문과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존명!”

즉시 개방의 소주분타(蘇州分舵)를 찾아가 분부 전하겠습니다.”

사천당문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방을 뛰쳐나갔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떤 대담한 놈이 노부들이 지척에 있음에도 당소저를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팽산과 악균은 놀라고 당황하여 당천성의 눈치를 보았다.

(천지신명이시여. 못난 당천성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테니 제발 딸년을 지켜주시옵소서.)

수하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서는 당천성의 얼굴은 분노와 초조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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