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무협소설/금포염왕(錦袍閻王)'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20.04.07 [금포염왕] 제 20장 어둠 속의 눈동자 2
  2. 2020.04.06 [금포염왕] 제 20장 어둠 속의 눈동자 1
  3. 2020.04.05 [금포염왕] 제 19장 끈질긴 추적자들 3
  4. 2020.04.04 [금포염왕] 제 19장 끈질긴 추적자들 2
  5. 2020.04.03 [금포염왕] 제 19장 끈질긴 추적자들 1
  6. 2020.04.02 [금포염왕] 제 18장 신녀문의 성지 3
  7. 2020.04.01 [금포염왕] 제 18장 신녀문의 성지 2
  8. 2020.03.31 [금포염왕] 제 18장 신녀문의 성지 1
  9. 2020.03.31 [금포염왕] 제 17장 무림칠절 2
  10. 2020.03.30 [금포염왕] 제 17장 무림칠절 1
  11. 2020.03.29 [금포염왕] 제 16장 억지 혼례식 2 2
  12. 2020.03.28 [금포염왕] 제 16장 억지 혼례식 1
  13. 2020.03.28 [금포염왕] 제 15장 쫓기는 소녀 2
  14. 2020.03.27 [금포염왕] 제 15장 쫓기는 소녀 1
  15. 2020.03.26 [금포염왕] 제 14장 검주 유소기
  16. 2020.03.25 [금포염왕] 제 13장 몽선도를 얻다 2
  17. 2020.03.25 [금포염왕] 제 13장 몽선도를 얻다 1 1
  18. 2020.03.24 [금포염왕] 마두들이 준 기연 3 1
  19. 2020.03.23 [금포염왕] 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 2
  20. 2020.03.23 [금포염왕] 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 1
  21. 2020.03.22 [금포염왕]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 2
  22. 2020.03.22 [금포염왕]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 1 1
  23. 2020.03.21 [금포염왕] 제 10장 향로 속의 무공비결 3
  24. 2020.03.20 [금포염왕] 제 10장 향로 속의 무공비결 2 1
  25. 2020.03.20 [금포염왕] 제 10장 향로 속의 무공비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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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둠 속의 눈동자 (2)

 

 

삼십 장 정도 더 들어갔을 때 동굴이 갑자기 높아지고 넓어졌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마치 광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등을 펴고 심주은을 추켜올려 업으면서 임청우는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맥이 미미하게 뛰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어.”

심주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중...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임청우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주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청우의 분노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들어선 지하광장은 높이 오장에 너비는 십 장 정도 되는 곳인데 임청우 등이 나온 것과 비슷한 동굴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중과 노파가 따라 들어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굴이 많아서 자신들이 어느 동굴로 숨었을지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광장을 가로 질러 맞은편에 있는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일단은 곧 추격해올 추적자들로부터 숨는 것이 급선무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길 봐!”

임청우의 등에 업혀있는 심주은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더듬거렸다.

츠으으!

임청우가 들어가려던 동굴에서 오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동굴 안쪽에서 파란 불덩어리 두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잡으며 말했다.

아까 동굴 초입에서 만났던 그 괴물이다.”

바로 그 순간 파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껌벅껌벅하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발길을 그 동굴을 향해 돌렸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 그쪽으로 가지마.”

겁에 질린 심주은이 임청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는 의연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죽음 가운데서 생을 찾을 수 있는 법이야.”

물론 심주은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했지만 심주은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서도 어떻게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임청우는 심주은이 아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으!

임청우가 동굴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파란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임청우는 걸음을 빨리하여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과는 달리 제법 커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 !

동굴 안쪽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이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임청우는 하마터면 발을 헛딛을 뻔했다. 동굴 바닥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그 연못 주변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한 겨울의 고드름처럼 가득 늘어져 있다.

파란 눈동자 네 개가 종유석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괴물이 두 마리인가?)

임청우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실소했다.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연못물에 비친 그림자였던 것이다.

임청우는 동굴 벽 쪽에 붙어서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들의 언저리를 잡고 연못을 지나갔다.

하지만 연못을 건넜을 때 그곳에 있던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어디선가 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임청우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예상을 깨고 눈동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유소기가 그 할망구를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동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설사 그렇다 해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자네 편이 되어줄 수 없으니까.”

묵궁 진패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하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지금 죽을 수는 없네.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네.”

, 그 이유 때문에 유소기가 우리를 기만하고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는 것을 묵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네.”

 

임청우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보니 바위에 두 사람이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소기...! 검주 유소기가 여기까지 들어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에 업힌 심주은도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유소기와 나는 지독한 악연으로 맺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동굴 속에서 그를 만난다면 정말 살아나기는 글렀겠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말을 주고받는 인물들은 칠절 중 지존수(至尊手) 사마명과 묵궁(墨弓) 진패선이었다.

물론 그들을 본 적이 없는 임청우로서는 두 사람이 그 이름도 쟁쟁한 무림칠절중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때 묵궁 진패선이 일어서며 말했다.

만용으로 귀중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부모의 복수보다는 지나치게 유소기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네.”

지존수 사마명은 아픈 곳을 찔린 사람모양 입을 열지 못했다.

진패선은 묵궁을 앞세우고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마명은 무명지가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패선, 자네는 모를 걸세. 난 유소기가 처음부터 싫었네. 기회만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걸세.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고...”

독백을 마친 사마명도 곧 일어나 진패선이 사라진 쪽으로 가버렸다.

임청우가 있는 곳은 아마도 그들이 먼저 지나온 길인 듯 했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저 사람도 아마 유소기와 같은 칠절 중의 한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동료인 유소기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칠절이란 존재가 무림에서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구나.)

안의 도적은 막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유소기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감이 들었다.

그때 심주은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차라리 그들을 만나는 게 나아. 유소기를 만나면 살아날 방법이 없어.”

심주은이 말하는 그들이란 물론 중과 노파다.

그녀로서는 임청우가 그 파란 눈을 좇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임청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피하려다 만나는 경우도 있어. 특히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는...”

심주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떻게 된 게 임청우의 말에는 반박할 말도 없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임청우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난 그 파란 눈이 무섭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츠으으!

다시 그들 앞에 파란 눈이 나타났다.

임청우는 검을 굳게 잡고 다가가며 속으로 말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병()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윤즉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만 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알고 나면 두려움이란 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임청우는 파란 눈을 따라서 걸어갔고, 심주은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

 

임청우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파란 눈을 따라 가느라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란 눈은 갈래진 동굴을 여러 개 지나서 그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놓았다.

그곳은 유황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동굴 속에 안개처럼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부글부글!

작은 온천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있다.

온천이다!”

임청우는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어떤 의서에서 온천이 사람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심주은의 내상을 치료하는 데에 이 온천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츠으!

그때 파란 눈동자가 온천위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내 사르르 빛을 잃고 온천으로 가라앉았다.

임청우는 사라지는 눈동자 뒤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눈동자는 실로 눈동자만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갑자기 온천에서 깡마른 손이 하나 솟아나와 임청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

임청우는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발목을 잡고 있는 깡마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임청우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었던 청강사자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다.

!

청강사자검이 그 손목을 베어버렸다.

순간 임청우의 발목을 잡고 있던 깡마른 손과 베어진 손목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수증기 속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임청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현실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괴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추춧!

온천의 물이 약간 솟구치면서 갑자기 물을 밟고 귀신같은 몰골의 노파가 나타났다.

말라붙은 젖가슴과 듬성듬성한 체모... 깡마른 몸은 해골에다 껍질을 씌워 놓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노파는 파랗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임청우를 바라보았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한걸음 물러섰다.

...”

등에 업힌 심주은은 그만 혼절해버린 뒤였다.

당신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임청우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임청우는 노파가 귀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노파가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화악!

내민 노파의 손에서 강한 흡입력이 쏟아져 나와 임청우를 끌어당겼다.

임청우는 공력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의 공력은 삼괴 중 철선동시의 공력을 온전히 흡수한 후에도 더욱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의 임청우의 공력은 살아있을 때의 철선동시보다도 삼할 이상 고강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내공에 있어서 임청우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데...

슈욱!

임청우는 마치 마차에 끌려가는 강아지나 다름없이 벌거벗은 괴노파의 손으로 딸려갔다.

(... 정말 귀신이란 말인가?)

임청우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노파의 모습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도 없으니 두려움이 왈칵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끌려갔을 때 임청우는 전력을 다해서 청강사자검을 던졌다.

파웃!

푸른빛이 뿌연 수증기 속을 가르며 번갯불처럼 노파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성공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노파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화악!

노파는 임청우의 좌측으로 돌아서 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 요물!”

추악한 얼굴에 몸서리치며 임청우는 주먹으로 노파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나 주먹에 와닿는 느낌은 마치 솜뭉치를 두드린 듯한 것이었다.

(안돼!)

임청우가 대경실색하여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노파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임청우는 이내 천지가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득해지는 그의 귓전으로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심주은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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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둠 속의 눈동자 (1)

 

 

동굴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너구리같은 작은 짐승의 굴인 것 같았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을 뽑아 앞쪽으로 세운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야생 짐승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짐승의 똥이 많이 있으면 어쩌지? )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푹신한 곳에 부딪혔다. 앞서 들어가던 임청우가 멈추는 바람에 그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만 것이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임청우의 엉덩이에 박았던 얼굴을 급히 떼며 심주은은 눈을 부라렸다.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킨 임청우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에 짐승이 있다. 맹수인지도 모르겠어.”

동굴 안쪽에서 파란 빛을 내뿜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임청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 동굴 안에는 무언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런 때에...)

임청우의 어깨 너머로 눈동자들을 본 심주은은 초조와 긴장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던 귀를 찢을 듯하던 휘파람 소리도 어느덧 뚝 그쳤다. 노파와 중이 동굴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그런데도 앞쪽에 무언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뒷덜미에 칼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급해진 심주은은 전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찔러버려! 찔려서 죽여 버려!”

심주은의 재촉을 받은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으로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난다고 한다.

임청우는 노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안쪽에 있는 것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혹 호랑이라 하더라도 무섭지는 않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는 공력이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가공한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기걸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안쪽에 있는 짐승을 죽이더라도 소리는 내지 말아야 한다.)

들키지 않으려면 눈앞에 있는 시퍼런 눈동자를 지닌 괴물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야한다.

결심을 한 임청우는 온 정신을 청강사자검에 모아서 앞으로 내질렀다.

번쩍!

푸른빛이 뇌전처럼 두 개의 눈동자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한데 검봉(劍鋒;검의 끝)이 찌르는 순간 눈동자들은 깜빡하더니 사라져버렸다.

좁은 동굴 안이라 무언가 움직였다면 공기의 요동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청강사자검을 아래위로 내저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귀신?)

섬뜩한 전율이 임청우의 머리끝에서 일어나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그놈을 찾았는가?”

늙은 노파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눈에 띄는 게 없소.”

사내의 음성이 이어졌다. 기걸승중 중의 목소리다.

그 놈의 새끼가 둘째의 몸뚱이를 완전히 부셔 놨어. 잡아서 모가지를 끊어버려야 속이 풀리겠어.”

으으으..."

노파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아마도 노파가 상처 입은 거지를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임청우는 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신처럼 사라진 눈동자 따위는 밖에 있는 잔혹한 노파와 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심주은도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중이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저께서 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구려.”

만리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 멀리 있으면 쉽게 맡을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 있으면 잘 파악하기 어려운 게지.”

노파의 음성이 이어졌다.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봐, 아가씨를 잡아간 그놈의 무공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니 조심하고...”

대답대신 꽝! 하는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중이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장력으로 쓰러뜨렸던 것이다.

중은 만리향의 향기가 남아있는 일대의 나무들과 바위들을 모조리 부셔버릴 심산인 것같았다.

! 콰드드!

중의 양손을 갈쿠리같이 오그리고 한 번씩 내저을 때마다 시뻘건 강기가 회오리치면서 뻗어나가 나무와 바위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 사람이 손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꽝 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은 등쪽에서 찬바람이 확 이는 것을 느꼈다.

빨리 들어가!”

심주은은 임청우를 떠밀면서 급히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다!”

노파가 소리치며 동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땅에 닿을 듯 낮게 날아서 그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다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움직이지마! 숨도 쉬지마.”

그러나 임청우는 검을 들고 앞으로 한 바퀴 구른 다음에 입구쪽으로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는 심주은의 두 발 사이에 들어갔다.

날아 들어오는 노파를 베기 위해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스스!

갑자기 심주은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무스름한 바위벽으로 변해버렸다.

임청우는 심주은이 기이한 술법을 쓰는 것을 몇 번 목격하기는 했지만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의 몸이 석벽으로 변해버리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임청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데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노파는 수평으로 날아 들어오다가 심주은의 등에 머리를 부딪히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리향의 향기가 동굴 안에 가득하건만 석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 심주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직선으로 뚫린 굴이라 어디 숨을 만한 데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기어야 할 정도로 낮은 곳이니 천장에 붙을 수도 없다.

심주은이 동굴 속에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어진 노파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셋째, 네가 들어와 봐라! 이 안에 숨어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요.”

중은 몸을 기괴하게 구부리더니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꾸물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가 옆으로 비켜서자 중이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막다른 석벽에 다다랐다.

바로 이곳이군요.”

중은 심주은의 등에 손바닥을 붙이면서 말했다.

안이 비어있습니다.”

부우웅!

말하는 중의 손바닥이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공력으로 석벽을 부셔버릴 심산이었다.

헌데 중의 손바닥이 막 심주은의 등을 때리려고 할 때였다.

안돼!”

!

임청우가 대갈일성을 발하며 청강사자검으로 중의 배를 찔렀다.

!”

중은 황급히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고 물러섰다. 그의 승포자락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수 있는 것은 유가술(愉加術)을 익힌 덕분이다. 이 유가술을 펼치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비단결보다도 더 질기고 부드러워 어떤 예리한 병기로도 상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그의 몸이 석벽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검이기에...)

중이 경악할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에 서있던 석벽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중이 귀신에 홀린 듯이 어리둥절 하자 그자의 뒤에서 노파가 떠밀면서 소리쳤다.

환술이다! 놈을 잡아!”

 

***

 

임청우는 심주은을 등에 업고 무작정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임청우가 중의 배에 청강사자검을 찔러 넣은 직후 심주은은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었다.

이에 임청우는 급히 심주은을 안고 동굴 안쪽으로 피한 것이다.

(언젠가는 저 중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살수를 휘두르다니...)

임청우는 분노하고 있었다. 심주은이 중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청우의 오해였다.

심주은은 노파가 날아 들어오면서 등을 머리로 받았을 때 이미 심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임청우와 자기의 목숨이 자신이 펼치고 있는 환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었었다.

그러다가 중이 등에 손바닥을 댄 직후 피를 토하며 쓰러졌었다.

임청우가 중에 의해 심주은이 내상을 입은 것으로 오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굴은 상당히 좁다.

뒤쪽에서 검이나 도, 아니면 장력이라도 날아온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앞으로 무작정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쉬익!

중과 노파는 땅에 닿을 듯 말듯 낮게 날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견딜 수 있겠어?”

...”

심주은의 대답은 견딜 수 있겠다는 건지 못 견디겠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도망 가보았자 막다른 곳만 나올 뿐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그녀를 내려놓고 눕게 한 다음에 자기도 반듯하게 누웠다.

청강사자검의 검광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옷자락 아래로 검을 감추었다.

중과 노파가 자기의 위로 날아가려 할 때 아래에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중과 노파도 쉽사리 자신들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휘릭!

한데 앞서서 날아오던 중이 갑자기 임청우에게서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냐?”

하마터면 중에게 부딪힐 뻔한 노파가 소리쳐 물었다.

피 냄새요. 아마 놈이 앞에 있는 모양이오.”

중은 신중하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을 찔렀던 검에서 피를 닦아내지 않았을 뿐인데 중은 그 피 냄새를 맡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노파가 소리쳤다.

통채로 날려버려!”

그랬다가는 동굴이 무너질 것이오. 너무 깊이 들어왔소.”

중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황금으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자도 임청우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워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주인께서 우리가 떠나올 때 주신 혈승(血蠅)이 있소.”

중은 금합(金盒)을 열면서 말했다. 금합 속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시뻘건 파리 수십 마리가 들어있었다.

혈승은 만리향을 싫어하니 소저껜 아무 해가 없을 것이오.”

혈승이란 피를 빠는 파리를 말한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독충으로 떼를 지어 날면서 스치는 것은 무엇이거나 뼈를 남기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심주은은 중의 말에 크게 놀라 자신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급히 전음으로 임청우에게 말했다.

나를 끌어 당겨서 몸 위에 올려! 어서!”

그러나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혈승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옷자락 소리는 중과 노파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청우는 자기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이 혈승이란 말을 하자 자기는 왜 품속에 있는 독중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혈린사 척포를 생각하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이 그로 하여금 그같은 생각을 일깨워 준 셈이었다.

임청우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여 품에서 몽선도를 꺼냈다.

중은 금합 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승들을 주문을 외워 깨웠다.

혈승들이 한 마리 두 마리 깨어나며 왱왱소리가 조용한 동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몽선도에서 척포가 머리를 내민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척포의 머리에 달려있는 황금빛 뿔이 금합과 같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가랏!”

중은 척포의 뿔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혈승들을 날려 보냈다.

! !

혈승들은 구름떼처럼 날아올랐으나 척포를 향해 가지는 않았다. 비록 미물이기는 하지만 천적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척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쏴아아!

척포의 입에서 하얀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혈승들은 소리없이 녹아내렸다.

심지어 중이 들고 있던 금합까지도 척포의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중은 괴성을 지르며 금합을 던져버리고 뒤로 몸을 날렸다.

으앗!”

노파도 뒤로 튕겨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임청우는 재빨리 일어서서 심주은을 업고 동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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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3)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거지는 두려움과 함께 의혹을 느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은 임청우는 관도를 벗어나 근처의 산으로 치달아 올라갔다.

가늘어지긴 했어도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임청우는 점점 더 험하고 외진 산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임청우가 상대해 주지도 않자 거지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거지는 수많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을 벴던 사람이었다.

죽을 위기도 수없이 넘겼으며 적의 간계에 빠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를 구해준 대장군(大將軍)을 보필하여 무수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적을 신중히 대하고 몸을 사리는 침착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인의 적이 자기를 유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거지는 임청우와의 거리를 좀 더 벌리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지는 문득 빗속을 흐르는 만리향의 향기를 맡았다.

만리향 향기는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거지는 임청우에게 온 정신을 다 쓰느라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소저!”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임청우를 쫓아가며 고함쳤다.

이놈! 우리 아가씨를 내려놔라!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감히 손대려하느냐?”

임청우는 내심 아차! 했다.

(저 거지가 결국 알아버렸구나. 내가 주은을 유괴해서 달아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구나. 빨리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숨어야 할 텐데...)

뒤를 돌아보니 거지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쫓아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따라오던 방금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청우는 가성(假聲)을 쓰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쫓아온다면 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거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송곳이 바닥에 꽂히듯 우뚝 멈추어 섰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 그분 소저를 죽인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겠다.”

멈춰선 거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를 쫓아오지만 않는다면 맹세코 이 여자를 죽이진 않겠다.”

임청우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를 올라가며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멈춰 섰던 거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다시 달려오며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어떤가? 나는 소저의 종이나 마찬가지이니 소저께서 욕을 당하더라도 내가 죽은 이후에야 당해야 할 게 아닌가?”

임청우는 거지의 충성심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의 위쪽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거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임청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소저께서 욕을 당하신다면 아마도 주인께선 내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이 늙은 거지를 죽이고 말 것이다.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소저를 구해내야 한다. 구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소저를 편안히 돌아가시게 라도 해야 한다.)

거지는 심주은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쐐액!

자기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거지는 맹렬히 도약해서 임청우를 덮쳐갔다.

카앗!”

단번에 거리를 오장까지 좁힌 거지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수 십 줄기의 주전이 빗속을 뚫고 날아갔다.

그 소리만도 무시무시하여 임청우는 도저히 자기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에 그는 심주은을 안은 채 곤두박질치듯이 앞쪽으로 납작 엎드렸다.

퍼퍼퍽! 퍼석!

거지가 뿜어낸 주전들은 임청우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앞쪽의 바위들을 뚫고 들어가거나 깨트렸다.

죽어라!”

그 사이에 다시 삼장쯤으로 거리를 좁힌 거지가 임청우에게 덮쳐들며 살수를 펼치려 했다.

콰르르르릉!

바로 그 순간 거지가 뿜어낸 주전에 격중된 바위 하나가 흔들리더니 임청우쪽으로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사태다!)

임청우는 경악하며 자기를 향해 굴러오는 큰 바위에 왼손을 갖다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덮쳐들고 있는 거지는 있다는 것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삼천 근이 넘는 큰 바위가 임청우의 손에 떠밀려 붕 떠오르며 그의 몸을 넘어갔다.

!”

그 바람에 거지는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며 바위를 밟고 다시 날아올라야만 했다.

쿠르르릉!

바위가 굴러가면서 다른 바위를 건드리고, 그 바위는 다시 다른 바위를 밀치면서 산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위로 올라가!”

이불에 쌓여 있던 심주은이 갑자기 임청우에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얍!”

임청우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껑충 날아올라 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

뒤쪽에서 거지가 벼락같이 고함을 치면서 두 대의 주전을 쏘아 보냈다.

왼손을 뒤로 휘둘러서 한대의 주전을 흩어버리는 순간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나머지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부터 두 대의 화살 중 거지가 정말 공력을 들인 것은 허벅지를 관통한 그것이었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임청우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나뒹굴 뻔했다.

으헤헤헤!”

공격이 성공하자 득의한 거지가 신룡처럼 솟구쳐 올라 임청우를 따라붙었다.

!

그리고는 임청우의 몸 옆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이불자락을 낚아챘다.

실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청우는 꼼짝도 못하고 심주은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불을 헤쳤다.

소저!”

임청우가 놀라 소리칠 때였다.

!”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심주은은 이불자락을 잡고 날아올라 펼쳐지는 이불로 앞을 가린 채 임청우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위를 굴려!”

그녀는 근처에 있는 큰 바위들을 향해서 장력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가 굳이 바위를 굴릴 것도 없었다.

쿠르르르릉!

이미 아래에서 시작되고 있던 산사태의 영향으로 흔들린 바위들은 산이 무너지듯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

거지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튀어오른 커다란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산사태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마치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듯, 땅이 진노하는 듯, 산사태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근처의 지형을 바꾸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심주은은 알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마저 놓아버린 채 임청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연의 힘은 어떤 인간에게라도 두려움과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임청우도 심신이 지진을 만나 흔들리는 것같이 놀랐다.

이름 없는 야산의 한 비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산사태가 이럴진데 하물며...

영원한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일백년 인생은 전광석화에 불과할 따름이고 무궁한 천지의 작용에 비한다면 인간의 역사(役事)란 그저 물결이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잠시 만들어놓는 파문과도 같은 것이리라.

 

***

 

쏴아아아!

완전히 지형이 변해버린 산비탈로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린다.

임청우는 젖은 이불을 끌어올려 심주은의 알몸을 감싸주었다.

심주은은 거지를 삼켜버린 산비탈을 바라보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기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를 죽여버렸어. 그를...”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임청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완전히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말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알기로는 임청우는 심성이 중후하고 착해서 결코 모진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산비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길을 따라서 눈을 돌리던 심주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피유우우웅!

퍼부어지는 빗줄기를 거스르며 땅에서부터 유성(流星) 하나가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신호용의 불꽃인 기화(旗火).

거지는 무시무시한 산사태에 휩쓸리고도 뛰어난 무공 덕분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 기화가 올라갔으니 그것을 발견한 노파와 중이 달려올 것이다.

심주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젖은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 옷들은 임청우가 그녀와 함께 이불속에 넣어 왔던 것이다.

옷을 걸친 심주은은 허둥대며 임청우의 손을 잡고 바위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삐이이! 삐익!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빗속을 뚫고 세찬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기와 승이 벌써 가까이 왔다.)

심주은의 다급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청우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걸쳐주었다.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피해야겠다. 다시 열이 나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어.”

임청우의 부드러운 말에 심주은은 감격하여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산의 반대쪽은 우거진 숲이었다.

비와 바람 속에서 나무들은 호곡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은 숲 속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달려갔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바람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삐이익! 삐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모든 소음을 뚫고 두 사람의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기걸승이 벌써 산을 넘어 숲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주은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몸에서 나는 만리향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고 말거야.”

동굴을 찾아야 할텐데...”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임청우가 미소를 지으며 심주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닥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일이야. 내가 동굴을 찾는 것은 지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주은은 총명한 소녀이지만 임청우처럼 도학(道學)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기가 뭐라고 해도 임청우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념하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체념한 심주은은 처연한 어조로 말할 때였다.

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돼.”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끌고 나아가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룬 것도 하늘이 정한 것이라면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럼 너는 이런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야하지 않겠어?”

! 난 그렇게는 못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인데 무조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말도 안돼.”

심주은은 자기가 처한 상황도 잊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무심코 남편이란 말을 내뱉고 나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 심주은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임청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삐이익!

그 사이에 휘파람 소리는 불과 백여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쩌억!

그 뒤를 이어 번갯불이 하늘을 동서로 길게 찢고 지나가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임청우는 앞쪽에 있는 큰 나무의 뒤에 가리워져 있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실로 천행이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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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2)

 

 

임주은은 근 한 달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탁본을 옮겨 적었었다.

탁본의 글자들은 아주 작아서 알아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구결들을 옮겨 적자니 신경의 소모가 다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내공을 익힌 몸인지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헌데 오늘 밤 임청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더해 자신의 마음까지 울적해지면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덜컥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의원을 데리고 오겠어.”

임청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가지마.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마.”

임청우는 애원하는 심주은의 눈동자를 보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곁에 누웠다.

맞닿은 몸이 불같이 뜨거웠다.

심주은은 갑갑한 듯이 옷을 풀어헤쳤다. 이미 정신은 거의 잃어버린 듯했다.

헉헉!”

심주은은 고열에 신음하며 임청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거추장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쳐서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풋풋한 소녀의 살 냄새가 임청우의 코를 자극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꼭 끌어안은 채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이마를 불어서 식히고, 벌겋게 상기된 가슴을 후후 불어서 식혔다.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고열에 신음하던 심주은이 헛것이 보이는 듯 손을 휘저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부! 약속을 꼭 지키겠어요. 꼭이요.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진 않겠어요.”

사부를 소리쳐 부르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제발 날 잡아가지 마세요. ... 난 아버지를 위해 희생당하고 싶진 않아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난 나대로 살아가겠어요!”

고개를 연신 도리질하면서 심주은은 뱀처럼 임청우의 몸을 휘감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의 몸도 어느덧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 심주은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훅훅 불어서 몸을 식혀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였다.

이봐 친구! 몹시 급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천장에서 굵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임청우는 흠칫하며 심주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자기 몸으로 심주은의 알몸을 가려준 임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약을 가진 게 있소? 천궁과 당귀, 구기근 등이 들어있는...”

호오! 열을 내리는 약을 말하는군. 어디 보자... ()장로가 억지로 주다시피한 약이 어디 있기는 있을 텐데...”

말소리가 다시 천장에서 들려왔다.

한데, 자네 부인인가?”

임청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

대답대신 천장을 뚫고 무엇인가 임청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임청우는 왼손을 휘둘러 재빨리 그것을 나꿔챘다.

한 알의 단약이었다.

나 말인가? 하하하! 말하지 않겠네. 자네 부인을 훔쳐봤으니 복수하려고 할 게 뻔한데 내가 왜 말하겠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게. 내가 본 건 자네 부인의 얼굴 밖에는 없으니까. 하하하!”

그 인물은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력이 충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도 될 것같았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흔들면서 입을 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이를 악다물고 숨을 쌕쌕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아무리 입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임청우는 단약을 자신의 입안에 넣어 녹인 다음 심주은의 입술 속으로 침과 함께 흘려 넣어 주었다.

 

***

 

새벽이 되자 빗발이 가늘어졌다.

임청우는 곤히 잠든 심주은의 알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발그레한 심주은의 뺨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가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알몸으로 안겨들던 심주은의 모습이 가득했다.

품속에서 몽선도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척포... 넌 오래 살았으니 아는 게 많겠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마 알고 있겠지?”

척포가 고개를 내밀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하느냐는 듯이 다시 들어가 버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건달에 불과하다. 막연히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임청우는 생각에 잠겼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잠룡물용(潛龍勿用),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 했으니 지금의 나는 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러야 하는 잠룡과 같다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갈고 닦는데 힘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여색(女色)을 가장 경계해야 하고 중년에는 의욕(意慾)이 과한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욕심(慾心)이 많은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주은을 피치 못해 잠시 안았는데도 마음이 이다지도 흔들렸으니 그 말은 과연 옳다. 여색을 경계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가 없겠구나.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자고로 영웅의 무덤은 미녀의 가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임청우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귀를 쫑긋했다.

아이쿠! 스님! 지금 방마다 살펴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러시면 저희 집은 장사를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주인의 음성이었다. 벌써 일어나서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셋째, 그놈이 말이 많군 그래. 알아듣게 이야기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임청우의 귀에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든 노파의 것인데 여전히 낭랑한 느낌이 깃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이다!)

임청우는 벌떡 일어섰다.

귓구멍이 좁아서 그런 모양이오.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 것 같소.”

음산한 사내의 음성과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객점을 울렸다. 주인이 아마도 귀를 잘리거나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객점이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야한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품에 집어넣고 심주은 곁으로 달려갔다.

심주은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임청우는 옷가지와 함께 이불로 심주은을 둘둘 말아서 안아들었다.

이어 객점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임청우는 문득 그녀의 탁본에 생각이 미쳤다.

베개 밑을 들춘 임청우는 기름종이에 싸인 탁본과 책을 꺼내 품속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노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놈은 무조건 죽여 버려라!”

누님의 말씀대로 하겠소.”

늙은 거지의 대답이다.

 

새벽같이 객잔에 들이닥친 자들은 바로 심주은을 찾아다니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우두머리는 심주은으로부터 기()라고 불린 노파였다. 이 노파는 심주은처럼 한 가닥의 천잠사를 무기로 쓰는데 수법이 잔혹, 악랄하여 적의 목을 끊어버리는 데 명수였다.

두번째는 걸()이라는 거지로 술에 내공을 불어넣어 쏘아 보내는 주전신공(酒箭神功)을 달통한 자였다. 그의 주전신공은 특이하여 술은 완전한 화살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승()으로 세 사람 중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자였다. 수십 종의 괴이한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하나하나가 신병이기와도 같았다.

종남산의 첫 만남에서 기, , 승은 우협의 명성에 눌려 임청우를 포기하고 도망쳤었다.

그렇긴 하지만 세 사람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 무공에 있어서는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에 비해 그다지 뒤진다고 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휘익!

임청우는 이불로 감싼 심주은을 안고 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통해 객실을 뛰쳐나간 임청우는 단번에 맞은 편 건물 지붕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다른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빗속을 내달렸다.

배운 적이 없어서 임청우는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력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달한지라 임청우의 달음박질은 웬만한 고수가 펼치는 경신술보다도 오히려 빨랐다.

 

기걸승의 삼인은 심주은의 종적을 쫓아서 남양의 객점까지 왔었다.

사실 심주은의 몸에서는 만리향의 향기가 끊이지 않고 풍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만리향의 향기를 맡아왔던 세 사람이 심주은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원래 심주은의 몸에서 풍겨나는 만리향은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혹시 적에 의해 유괴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심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적이 심주은을 유괴해간다고 하더라도 만리향의 향기 때문에 금방 탄로가 나고 말 것이다.

한데, 그 만리향이 이제는 가출한 심주은에게로 그녀 아버지의 수하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걸승 세 사람은 만리향의 향기를 쫓아 객점에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을 윽박질러 찾아보려 하다가 주인이 반대하는 통에 그의 한쪽 고막을 터뜨리고 객점을 수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파는 몸을 훌쩍 날려 이층의 계단으로 올랐다.

이미 중은 객실의 방문들을 열어젖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밖에서부터 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놈이 도망쳤소. 쫓아갈 테니 여기 일은 누님이 알아서 해주시오.”

 

***

 

새벽이지만 성문은 벌써 열려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비 때문에 발이 묶여있던 상인들을 관부에서 배려한 것이다.

거지는 일찍 열린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임청우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임청우의 발걸음이 비록 빠르기는 했지만 일류고수인 거지가 볼 때에는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거지는 삽시에 임청우의 오장 뒤에까지 따라 붙으며 말했다.

흐흐흐... 성문을 나가는 순간이 네놈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임청우는 거지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거지는 자신의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가 임청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임청우가 심주은을 안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처럼 느긋하게 행동을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긴 해도 거지는 임청우가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쫙 벌렸다.

슈앙!

그러자 거지의 입에서 우유빛의 술 화살, 주전(酒箭)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와 임청우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임청우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듣는 즉시 왼손에 공력을 모아서 뒤로 휘둘렀다. 비록 공력을 발출할 수는 없지만 모으는 일은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다.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실린 임청우의 손이 휘둘러지면서 거지가 쏘아 보낸 주전은 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거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그의 주전을 맨손으로 막아낸 인물은 없었다.

거지의 주전은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보다 오히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어떤 놈이기에 저다지도 공력이 강하단 말인가?)

세치 두께의 철판도 거뜬히 뚫을 수 있는 주전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러 흩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거지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저토록 대단한 공력을 지닌 놈이 도망은 왜 간단 말인가?)

주전을 간단히 받아내는 가공할 공력을 가진 자가 경공술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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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1)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

타는 듯한 여름이 거의 끝이 날 무렵에서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이는 바람에도 부풀부풀 일어나던 땅거죽의 먼지는 쏟아지는 비에 흙탕물이 되어 씻겨 내려갔다.

갈라졌던 연못의 바닥은 물을 머금으며 조갯살처럼 불어올라 틈을 매웠다.

강렬한 햇빛에 시들다 못해 검게 타들어가던 나무들도 춤추듯이 가지를 너울대며 일어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상은 폭우 속에서 조용한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접경에 자리한 남양(南陽)을 거센 빗줄기가 난타하기 시작한 후로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성안의 백성들의 환호도 이제는 잠잠해졌으며, 관민이 모두 지붕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주루와 기루, 객점들이 열 지어 서있는 남양의 번화가에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손님은 그들의 집안에 충분하리만큼 있었기 때문이다.

()과 성() 사이를 넘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행인들이 모두 객점에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가뭄 끝에 홍수 진다더니... 이러다가 수재(水災)를 겪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남양의 번화가에 자리한 객점 이층 객실 창가에 서성이던 임청우가 걱정스런 듯이 입을 열었다.

거리를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새까맣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심심하면 내 일이나 도와줘.”

탁자에 앉아서 하얀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적어가던 심주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임청우는 탁자로 다가가서 탁본을 뜬 화선지를 펼쳐 들었다.

심주은이 탁본을 편히 볼 수 있게 해준 임청우는 눈을 다시 창문쪽으로 돌렸다.

비가 쏟아져도 너무 많이 쏟아진다.

이정도가 되면 이제 우()가 아니라 염려스러울 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일, 언제쯤 끝나지?”

임청우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심주은은 말 시키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제 이틀만 더 하면 끝날 거야.”

임청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종남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짜기를 나온 후 임청우와 심주은은 이곳 남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임청우가 대안탑에서 횡재(?)한 금과 은으로 객점의 가장 좋은 방에 투숙했다.

그후 한 달 동안 심주은은 음식까지 방으로 시켜 먹으면서 탁본해온 신녀문의 무공을 책으로 엮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탁본의 글씨들은 깨알보다는 크다고 할지라도 개미보다는 작았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일 뿐 아니라 물이라도 묻는 날에는 글씨가 흐려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땀에도 글씨가 손상될 수 있었다.

심주은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무공들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그러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단단한 책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를 덩달아서 두문불출하게 된 임청우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꾹 참고 오늘까지 견디어 왔다.

물론 그동안 임청우에게도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주은이 모르는 사이에 그는 용조층층공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불심연화지의 수련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무공은 아직까지는 무공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연화지는 이마 위에 있는 신정혈(神廷穴)에 공력을 쌓는 것인 만큼 다른 무공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비록 임청우의 공력이 상당히 늘었다고 하지만 불심연화지를 밖으로 발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성(三成) 이상의 성취를 필요로 한다.

또 용조층층공의 운용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순수한 내공일 뿐이다.

권법이나 장법 등의 무공과 연계되지 못한다면 용조층층공은 알 속에 있는 닭이나 마찬가지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저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청우의 공력이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임청우의 지금 공력은 철선동시의 죽기 전 공력보다 오히려 삼할 정도 더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임청우가 내공을 발출할 수 있는 무공을 단 한 가지도 익히지 못한 때문이었다.

진기가 실오라기만큼도 흩어지거나 빠져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몸속을 돌아다니기만 한 결과 임청우는 공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은 것이다.

 

생각하기와 탁본을 들여다보기, 그리고 옮겨 쓰기를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는 심주은을 바라보던 임청우는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동안 보고들은 견문으로만도 무공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된 그다.

임청우는 자기가 익힌 두 가지의 무공 모두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은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해서 알 수도 있을 것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

임청우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그가 지닌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는 순수한 내공일 뿐이고 다른 하나는 특이한 공력으로 특이하게 운용하는 수법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임청우는 다시 심주은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탁본을 뜨던 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간 그는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임청우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떠오르던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잡힐 듯 말 듯한 영감...

하지만 그것은 좀체 잡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이 확실하게 떠올라주기를 기다렸다.

심주은은 임청우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얼굴빛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들었나? )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계속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는 것이 주화입마에 든 증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내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심주은은 생각을 바꾸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식 가져 왔습니다.”

문 밖에서 점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식사를 가져다주는 점원이었다.

문 열렸어.”

심주은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면서 임청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덜컹 열리는 순간 임청우는 잡힐듯하던 빛이 일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안에 넣었던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향긋한 음식냄새와 함께 점원이 재주 좋게 몇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들고 들어와 탁자에 놓았다.

그제서야 심주은은 임청우의 표정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당황했다. 일생에 있어서 그같은 순간은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인데 그것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 그만두자 그만둬.”

임청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탁자로 걸어갔다.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누구에게 한 말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에 씻기듯이 영감은 사라져 버렸고 식탁위의 음식들도 임청우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심주은은 그런 임청우의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같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임청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

 

밤이 깊어갔다.

탁본을 옮겨 적던 심주은은 탁본과 책을 함께 싸서 둥글게 만 후에 침상의 베개 밑에 넣었다.

임청우는 마치 불가의 고승처럼 좌관(坐觀)을 하고 창가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지 않을 거야?”

심주은이 침상가에서 물었다.

임청우는 대답대신 일어나서 불을 껐다.

그의 잠 자리는 침상아래의 바닥이었다.

비록 억지 혼례를 올린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한 이불을 덮어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임청우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침상위의 베개를 하나 끌어내리며 바닥에 누웠다.

그때 부드러워서 비단결같은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여기서 자.”

심주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한 후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임청우는 그녀의 저의를 알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심주은은 등을 보인 채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지만...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못해. 심지어 황제(皇帝)조차도...”

황제조차 그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심주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심주은의 손이 그의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한데... 아버진 나를 황제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어. 황제는 이미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는데...”

심주은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진 기(), (), (), 그 세 사람 외에도 부하들을 많이 풀었을 거야. 하지만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

만약... 그들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죽여버리겠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심주은의 말이었지만 섬뜩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사연이 복잡하구나.)

임청우는 자신이 몰랐던 심주은의 면모를 엿본 기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한 사람을 찾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고, 천하를 제패할 마음도 있다고 하더니... 이젠 아버지가 황제에게 자기를 시집보내려 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심주은의 본심을 엿본 임청우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와 혼인을 한 것은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주은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 정신을 모아야할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틀림없이 마가 침입하게 될 텐데...)

걱정이 된 임청우는 심주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풍겨나는 위엄과 고귀한 자태로 보아 그녀의 신분이 아주 높다는 것은 익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심주은의 신분 따위는 임청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만물제동이라는 이치에 따라서 그는 만물의 같은 점을 중시하는 터이기 때문이다.

임주은은 임청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고 떨리는 거지? 몹시 추워.”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손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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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3)

 

 

바깥의 계곡도 어두웠지만 동굴 안쪽은 더욱 깜깜하다.

심주은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정말 칠흑같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대안탑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용조층층공을 몸속에 쌓게 된 이후로 어둠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임청우였다.

하지만 이 동굴의 짙은 어둠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내민 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로 십삼보, ()으로 육보, () 구보, () 삼보...”

앞서가는 심주은은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임청우는 혹시 어둠 속에서 심주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당겨지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심주은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임청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심주은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심주은이 문득 멈추어 섰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임청우의 손목을 잡아서 자기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내게서 떨어지면 안돼.”

임청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며 혼자 앞서 갈 때는 언제고 이제 다 온 듯하자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

하지만 그 직후 임청우는 발밑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원래 들이키던 숨을 가쁘게 빨아들였다.

끼에에엑!”

그 바람에 자기가 듣기에도 흉한 소리가 목구멍으로 터져 나왔다.

쐐액!

임청우의 몸이 돌덩이처럼 세차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심주은의 맥박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이번에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다 온 모양이야.”

심주은이 속삭였다.

휘청!

순간 두 사람은 몸은 공중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밑을 떠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주위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헌데 어둠이 그 빛에 밀려 물러가며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자신들 주변에 빙 둘러 서있는 것이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임청우는 긴장하며 그 그림자들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수십 겹으로 휘감고 있던 휘장이 걷혀지듯 어둠이 물러가며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자들이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람이다!)

이윽고 임청우는 자신과 심주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아직 모습은 완연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궁장차림을 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심주은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하며 낭낭한 음성으로 외쳤다.

소녀 심주은,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로서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조사이신 구천신녀(九天神女)님을 뵙습니다.”

임청우는 그녀가 절을 하자 덩달아 절을 했다.

그런데 심주은은 임청우가 절을 할 때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절을 받은 사람이 답례하는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일어서다니...

특별히 예의를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지만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가 완연히 밝아지며 아홉 여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진짜 사람이 아니라 아홉 개의 인형이었구나.)

임청우와 심주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었다.

아홉 개의 인형은 모두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배꽃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형들의 모습이 그 정도이니 그 인형의 원형이었던 여인은 얼마나 아름답고 요염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임청우와 심주은이 도착한 석실에는 그 아홉 개의 인형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의 중앙에는 임청우와 심주은이 내려온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형들의 뒤쪽 석벽에는 인형과 똑 같은 얼굴에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수 만 가지의 화려한 꽃들의 그림이 나무 모양을 한 세 개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임청우가 물었다.

설마 저 그림이 이 밖에 있는 계곡을 그린 것은 아니겠지?”

임청우가 물은 것은 믿기지 않아서였다.

세 개의 봉우리로 보아 벽에 그려진 풍경은 바로 이 동부 밖의 계곡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부 밖의 계곡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 늪지대 주변에 깔려 있을 뿐 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벽화에는 무수하게 많은 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해.”

심주은이 인형들의 새끼손가락들을 천잠사로 이어 묶으며 말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황하의 물이 조금씩 이 계곡으로 스며들어서 급기야는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원래 이곳에 있던 신녀문도 물에 잠겨 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남쪽의 무산으로 옮겨가야 했었다고 해.”

임청우가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물에 잠기기 전에 이 계곡에 신녀문이란 문파가 있었다면 이곳은 혹시...?”

신녀문의 조사동(祖師洞)이야. 폐쇄되고 난 후 여기 들어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야.”

천잠사로 아홉 인형들의 손가락을 각기 하나씩 묶은 심주은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르르르!

인형들은 손가락이 각기 조금씩 젖혀지면서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걸 확인한 심주은이 빠르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신녀들의 등을 봐. 보고서 외울 수 있는 한 많이 외우도록 해! 나중엔 아무리 사정해도 가르쳐 주지 않을 테니까.”

“...?”

임청우가 무슨 소린가 하는데 팔을 내린 인형들이 빙글 돌면서 등을 보였다.

스르르!

그리고 인형들이 걸치고 있던 궁장들이 어떤 힘에 의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궁장이 흘러내리고 백옥을 깎아 만든 인형들의 눈부신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백옥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의 등에는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이 음각되어있었다.

심주은은 서둘러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화선지와 먹물이 들어있는 대나무 연적을 꺼냈다.

그리고는 인형들의 등에 먹물을 바르고 탁본(濯本)을 뜨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홉 장의 탁본이 만들어졌고 그녀는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임청우는 가까이에 있는 인형의 등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글들이 심오한 무공구결과 신비한 이술(異術)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많이 안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알고 있었다.

하나를 알아도 바로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미 임청우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빼어난 무공구결이 숨 쉬고 있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의 구결은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의 공력도 구결을 운용하기만 하면 따라서 몸속을 돈다.

임청우는 배움이 일천하여 무학의 지고한 이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뭔가를 배우고 이룬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굳어지기 전에 그 위에 또 다른 것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당장은 버티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래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무너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르게 올린 탑보다 오래 견딜 리는 만무하다.

천년을 가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세우고 역사에 남을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임청우다.

섣불리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청우가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백옥 인형들의 흘러내렸던 옷들이 다시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종아리를 지나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둔부를 거슬러서 옷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입혀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탁본한 화선지들을 재빨리 말아서 기름종이로 몇 겹으로 감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의 볼일은 다 끝났어. 나를 꽉 잡아! 신녀들은 뒷모습이지만 알몸을 본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스르르르!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옷이 입혀진 신녀들이 돌아서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암흑천지로 변하며 임청우와 심주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파앗!

두 사람은 강렬한 빛에 눈을 가렸다.

동굴 밖의 태양빛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판처럼 네모난 대리석들이 깔려있는 넓은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임청우에게 심주은이 속삭였다.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곳이야. 한걸음이라도 잘못 떼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아서 나가지 못해.”

들어올 때 칠흑처럼 어두웠던 곳은 복잡한 동굴이 아니라 바둑판처럼 넓은 광장이었던 것이다.

입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문이 열리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는 동안에는 입구가 사라지도록 만들어진 기관인 듯 했다.

심주은은 다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네모난 대리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똑 같이 걸었다.

심주은이 걸음을 떼면 따라서 발을 들었고, 그녀가 발을 딛으면 따라서 한걸음 옮겼다.

꾸불꾸불 걸어가며 삼십 여 번의 방향을 바꾼 후에야 두 사람은 벽과 붙어있는 마지막 대리석을 밟을 수 있었다.

그그긍!

그 대리석을 밟는 순간에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사방이 캄캄해졌다.

덜컥!

두 사람의 앞쪽에 있던 벽이 밖으로 넘어가며 출구가 생겨났다.

그들이 처음에 들어왔던 곳이었다.

심주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간이 조마조마했네.”

?”

임청우가 앞장서서 출구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실 난 조사님들을 속였거든.”

심주은이 얄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조사동은 한번 열리면 백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열 수 있어. 그런데 조사동에 들어온 제자는 백옥 인형들의 등에 적혀있는 무공과 술법들을 일각(一刻) 동안만 볼 수 있어. 얼마를 기억했든지 일각이 지난 후에는 우리처럼 쫓겨 올라오고 말아.”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드드드!

동굴을 나선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내딛자 넘어졌던 암벽이 다시 올라가면서 원래의 환상신녀의 그림이 나타났다.

임청우가 돌아보니 문을 여는 고리가 숨겨져 있던 바위도 어느 새 원상대로 회복되어 고리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 동안에 신녀문의 최고의 무공과 술법들을 얼마나 익힐 수 있겠어? 고작해야 한, 두 가지가 끽이지!”

심주은은 암벽에 새겨진 환상신녀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사부님이 그 사실을 일러주었을 때 이미 작심하고 있었어. 아예 탁본을 떠서 나오기로 말이야. 이제 신녀문의 모든 무공과 술법들은 내 손 안에 있는 거야!”

자랑스럽게 말하는 심주은을 보며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왜 그렇게 가슴을 졸였는지 알만 했다.

그렇게 무공을 익혀서 어디에 쓸려고?”

임청우가 묻자 심주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림제패(武林制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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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2)

 

 

정신 차려! 이봐, 정신 차려!”

찰싹! 찰싹!

심주은은 임청우를 나무위로 끌어올려 놓고 뺨을 연신 때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데다가 늪 속에 잠겨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임청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주은은 손가락으로 임청우의 입과 코와 귀를 판 후에 가슴을 눌렀다.

몇 번 누르자 임청우의 입과 코로 진흙이 쿨럭쿨럭 흘러나왔다.

그러나 임청우는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뛰고 있던 맥박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임청우를 착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임청우와는 만난 지 채 하루도 안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이다.

하지만 충동적이긴 해도 혼례를 올렸으니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이윽고 결심을 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몸 위로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코를 입으로 물고 세게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임청우의 콧속에 들어차있던 진흙이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입안에 든 진흙을 뱉어내고 다시 임청우의 콧속에 든 진흙을 빨아내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자신이 임청우의 코를 물고 있긴 하지만 입맞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 사실에 심주은의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외간 사내와 살갗도 닿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코를 물고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런 게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자 차갑게 식어가던 임청우의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아오는 것같았다.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르길 얼마 후 푸! 소리와 함께 임청우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살아났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심주은은 진흙투성이의 몸으로 임청우에게 기댄 채 잠이 들고 말았다.

 

***

 

임청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방문이 없는 방 속에 누워있는 듯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하늘은 뿌옇게 보이기는 했지만 달도 없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것인가?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면 극락인가?)

임청우는 늪으로 떨어지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황의소녀 심주은을 생각하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을 생각해볼 때 자기보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임청우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뭔가가 자기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따뜻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심주은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지만 그래도 얼굴의 진흙은 깨끗이 닦아낸 모습이었다.

임청우는 한쪽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척포를 발견하고서야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계집애가 날 살렸겠구나.)

전후의 상황을 파악한 임청우는 감격하여 심주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 주변의 진흙이 떨어져 나가며 드러난 새하얀 볼...

새근새근 쉬는 듯 마는 듯 부드러운 숨결...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심주은의 입술로 가져갔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심주은의 입술을 만져보려고 하니 자기의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도저히 그런 손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얼굴을 심주은의 얼굴 앞으로 살며시 가져갔다.

심주은의 숨결이 볼을 스치면서 달콤하게 느껴졌다.

(... 안돼!)

심주은의 숨결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임청우는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임청우야! 임청우야! 네가 색마가 되려느냐?)

자신의 망령된 행위를 자책하며 임청우는 정좌를 하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분명 자기의 마음과 몸임에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심주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이해하지 못할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임청우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사는 인간의 중대사이지만 그 생사도 성인(聖人) 왕태(王駘)를 변하게 하지는 못하며, 또 비록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파멸의 동반자로 만드는 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풍랑을 만났을 때는 옛 성현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아야만 한다.

(왕태라는 분은 표면의 인상을 초월한 진실의 이치를 밝게 알아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모든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따른 것이라 여기고 변화의 근본에 있는 부동의 도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같은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장자(莊子) 내편(內篇) 중 덕충부(德充符)에는 여러 명의 불구자가 등장하는데 임청우가 생각하고 있는 왕태라는 사람도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발꿈치를 잘라서 걸을 수 없게 하는 월()이란 형벌이 있었다.

왕태라는 인물도 월형을 받은 죄인이었지만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공자와 함께 노나라를 양분할 정도였다.

왕태는 서있을 때도 특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앉아 있을 때도 특별한 논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텅 빈 머리로 왕태를 찾아갔던 사람이라도 충실한 마음을 갖고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왕태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성인이다. 나도 한 번 뵙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만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해도 스승으로 공경하고 싶을 정도이니 하물며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은 당연할 테지.

단지 노나라뿐만이 아니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을 정도다.>

 

또 말하기를,

 

<사물을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몸속에 있는 간과 쓸개의 사이라도 초나라와 월나라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같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곧 하나이다.

이와 같이 만물제동(萬物諸同)의 입장에 있는 자는 눈귀의 듣고 보는 쾌락에도 마음이 이끌리는 일 없이 자기의 마음을 그 덕에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 모두가 하나인 세계에서 놀게 하는 것이다.

왕태와 같은 인물이 만물을 볼 경우에는 그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개개의 사물이 상실되어가는 현상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발이 잘린 것쯤은 마치 흙덩이를 털어 버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분한다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 임청우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만물제동이라는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만물을 볼 경우에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그것의 세상에 융화하려는 점을 파악함으로써 만물제동의 이치에 이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심주은을 보니 이젠 그녀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만물제동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가만히 앉아 심주은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척포가 돌아와 그의 품속에 있는 몽선도 속으로 찾아들어갔다.

한데 피로에 지친 심주은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임청우는 계곡을 솥발처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이라 비록 희미하게 보였지만 마치 가지를 옆으로 벌리고 우뚝 서있는 전나무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틀림없었다.

세 개의 봉우리는 그 배치의 절묘함으로 인해서 번갈아가면서 계곡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계곡에는 하늘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모양으로 보이는 봉우리의 그림자 두개가 합해지면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그 신기한 자연의 조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바로 여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엉뚱한 곳만 찾았으니...”

감격한 듯한 심주은의 음성이 들렸다.

심주은은 깨어나자마자 임청우의 시선을 쫓다가 나무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이곳이 바로 자기가 찾으려던 그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

 

임청우와 심주은은 진창에 빠진 생쥐같은 몰골로 암벽 앞에 섰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절세가인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그림이 음각되어 있었다.

심주은은 버드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바위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열리며 원형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문고리야. 하지만 함부로 밀면 이렇게 되고 말지.”

심주은이 두 손바닥을 붙여 꼭 누르며 말했다. 납작하게 되어 버릴 것이라는 소리였다.

임청우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함부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심주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 문고리의 작동원리를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싶으면 직접 당겨보면 되잖아!”

대답이 궁해진 심주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볼 일이 없어.”

임청우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심주은은 그의 능청에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매섭게 도끼눈을 뜨고 한번 쏘아본 후에 천잠사의 한 쪽 끝을 고리에 묶었다.

(어디 내게 까불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한 번 혼나 보라구.)

심주은은 고리에 천잠사를 묶고 멀찍이 물러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 있으면 다쳐. 이리와!”

이어 심주은이 손짓하며 부르자 임청우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헌데 임청우가 막 그녀에게서 한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

심주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잠사를 힘껏 잡아당겼다.

원형의 고리가 앞으로 재껴지는 순간 신녀문의 상징이라는 환상신녀의 모습이 그려진 암벽 전체가 마치 벼락 치는 듯한 기세로 앞쪽을 향해 넘어졌다.

!

굉음과 함께 일어난 강한 바람이 임청우를 덮었다.

암벽은 임청우의 뒷머리를 거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임청우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경직되었다.

화악!

폭풍같은 바람이 등을 떠밀어 임청우를 심주은의 품에 안기게 한 후, 더욱 강하게 떠밀어 두 사람을 함께 일장여 거리까지 날려버렸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였는지라 심주은은 꼼짝 못하고 임청우를 안은 채 돌밭에 나뒹굴었다.

아야!”

임청우의 몸에 깔린 심주은이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가 등을 찌를 뿐 만 아니라 임청우의 몸이 내리누르니 견딜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높이 떴다가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임청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 짓눌리자 심주은은 심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형언하지 못할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임청우 역시 어떤 열기에 휩싸여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 보니 심주은은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새근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심주은은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임청우가 암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환상신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던 곳에는 월동문 모양을 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검주 유소기 등도 환상신녀의 형상이 남아있는 암벽 근처에 신녀문의 성지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암벽 바로 뒤에 입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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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1)

 

 

황의소녀 심주은도 임청우가 정신을 잃는 순간에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전적으로 임청우가 몸으로 받았기에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은 차렸으나 몸이 차가우면서도 끈적거리는 것에 잠겨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당연히 숨도 쉴 수가 없다.

(우리가 추락한 절벽 아래에 늪이 있었구나.)

심주은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달았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쪽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난 것도 아니다.

늪 속으로 얼마나 깊이 잠겨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우린 늪의 뻘 속에 깊이 잠겼을 것이다.)

심주은은 정신을 잃은 임청우를 한 팔로 껴안고 남은 팔과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빨리 늪의 표면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고 만다.)

죽음이란 말이 눈앞에 떠오르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임청우의 늘어진 몸 이외에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심주은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두려움과 공포로 심주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특하고 당돌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일 뿐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있어서 남과 다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의 공포 속에서 심주은은 오직 팔다리만을 허둥거렸다.

한데 어느 순간 임청우를 잡고 있는 팔 위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심주은의 팔을 타고 올라온 가늘고 긴 그 물체는 목을 지나 머리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심주은의 긴 머리카락을 가는 몸으로 휘감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은 그 물체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심주은과 임청우의 몸을 끌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놀라던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엇엔가 단단히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힘껏 당겼다.

슈우우욱!

심주은은 자신의 몸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추악!

어느 순간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

하아! 하아!”

마침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심주은은 시원한 공기와 함께 진흙마저도 들이마셨다.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든 가릴 게제가 아니었다.

막혔던 숨통을 틔운 심주은은 서둘러 임청우를 늪 밖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임청우의 얼굴에서 진흙을 벗겨 주었다.

얼굴에서 진흙이 제거되었음에도 임청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임청우는 왼손에 든 청강사자검은 죽어라 움켜쥐어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 걸고 있던 혈도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겨우 한숨 돌린 심주은은 자기의 머리카락이 늪지에 자라있는 키 작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알았다. 키는 작지만 둥치는 상당히 굵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어서 우산이나 버섯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대체 무엇이 내 머리카락을 끌고 올라와 나뭇가지에 걸었을까?)

심주은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이 걸려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헌데 그녀가 임청우를 끌어안고 나뭇가지에 올라갔을 때였다.

쉬쉭!

그 나뭇가지 위에 붉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녀를 향해 새빨간 혀를 내밀었다.

!”

!

심주은은 기겁하며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강력한 장력이 정통으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뱀은 끄떡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두개의 황금빛 뿔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 붉은 뱀의 정체를 알아본 심주은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질식사를 면했다 했더니 독물들의 제왕이라는 금관혈린사를 만나고... 난 참 운이 지독하게도 없구나.)

심주은은 소매 속에 있는 천잠사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며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천잠사는 어떤 보검에도 잘리지 않는 보물이다.

하지만 천잠사가 금관혈린사의 독에도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심주은 앞쪽에서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짐승은 바로 임청우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척포였다.

원래 척포는 겹쳐 말린 두 장의 몽선도를 집으로 삼아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 생긴 집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임청우가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져 늪 속에 처박혔으니 척포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화가 났지만 몽선도에서 빠져나온 후 심주은의 머리카락을 꼬리로 말아서 늪 밖으로 끌고 나왔던 것이다.

한 때 몸길이가 삼장에 이르렀던 영물인 척포인지라 심주은과 임청우를 끌고 올라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늪에 빠진 후 심주은이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 올라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늪의 표면에 작용하는 장력(張力)은 묽디묽은 아래쪽과 비할 바가 아닌 때문이다.

만일 척포가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심주은은 척포를 노려보았고 느닷없이 얻어맞아서 화가 난 척포도 심주은을 마주 노려보는 묘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주은도 여자인지라 뱀이란 생물은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고 싫었다.

하지만 물러서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에 심주은은 조금도 눈빛을 양보하지 않고 척포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늪에서 멀지 않은 절벽 근처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가 칠절에게 각기 흩어져서 임청우를 찾으라 명령하는 소리였다.

(위험해!)

풀쩍!

심주은은 임청우를 껴안은 채 다시 늪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주은의 몸은 이내 늪으로 잠겨 안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심주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금붙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쉬쉬!

척포는 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 저었다.

쏴아!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흰 안개를 내뿜었다.

츠츠츠!

척포가 뿜어낸 하얀 안개에 닿자 심주은의 머리카락에 달려있던 금붙이 장식은 얼음처럼 녹아서 늪에 잠겨들었다.

심주은은 척포가 자신을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알 리가 없다. 그저 늪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모든 신경을 돋우어 주변의 동정을 살치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녀는 곧 다급하게 들려오는 퉁소소리를 들었고 자신들 위쪽으로 유소기가 천리전음으로 말하며 날아가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턱까지 찬 심주은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숨 돌리려는데 유소기가 다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유소기는 지존수 사마명을 베려다가 도군의 중재로 검을 거두고 몽선도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뽀록!

심주은이 황급히 머리를 늪 속에 밀어 넣은 자리에 거품이 일어났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심주은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한갓 바램으로 끝나고 말았다.

요망한 것!”

유소기의 대노한 음성이 늪 속에까지 들려왔다.

심주은은 낙담했다.

(틀렸다. 이미 저자는 내가 숨는 것을 본 모양이다.)

늪 속에서 검을 맞고 죽기는 싫었다.

맑은 공기라도 한 번 더 숨 쉬고 죽고 싶었다.

촤아!

자포자기한 심주은은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번쩍!

순간 한줄기 백광이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래야 결코 피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죽었구나!)

심주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직후였다.

끼익!”

괴상한 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울렸다.

심주은은 자신이 베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다가 앗차! 싶었다.

유소기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닌 나무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금관혈린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황급히 늪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만 앞에서 날아오던 유소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화악!

유소기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벼락같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었다.

심주은은 임청우를 잡지 않은 왼손을 얼굴 앞에 세우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스스슷!

순간 그녀의 모습이 작은 바위처럼 변해버렸다.

환술(幻術)을 쓰다니... 신녀문의 제자인가?”

!

유소기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면서 발길질로 척포를 멀리 차날려 버림과 동시에 심주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올리며 말했다.

심주은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얼굴에 묻은 진흙 때문에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럼 구태여 나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겠다.)

그녀는 즉시 임청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며 두 발로 임청우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했다.

그래요. 나는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예요. 즉시 내 머리를 놓도록 하세요.”

유소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이대 제자... 그럼 정정(貞貞)보다 한 배분 아래인가? 한데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

유소기의 독백같은 말을 들은 심주은은 약간 당황했다. 정정은 그녀가 사부로 모신 여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소기가 사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심주은은 즉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초면인 분이 사문의 일을 물으면 내가 대답할 것 같아요?”

심주은은 당돌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유소기가 화를 내고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입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소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성미까지 정정을 빼닮았구나. 그래, 혹시 이 근처로 떨어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하나를 보지 못했느냐?”

내심 안도한 심주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아무도 살지 못해요. 이곳이 비록 늪이기는 하지만 저 절벽은 워낙 높아서 돌바닥에 떨어진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에요. 시체가 요행히 나무위에 걸쳐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늪은 바닥이 없어서 뭐든지 삼켜버리니까요.”

한데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유소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심주은을 약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주은은 잘못 대답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난 아직도 사흘 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해요.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요.”

유소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잠시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라.”

유소기가 잡아 올렸던 머리채를 내려놓자 심주은은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늪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늪 속에 잠겨있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댄 게 정말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유소기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몽선도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물건인가? 그토록 얻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깊은 늪 속에 잠기고 말다니... 금포염왕을 대적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잠시 후 유소기의 천리전음에 따라 모여든 칠절은 계곡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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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칠절(武林七絶) (2)

 

 

!”

휘릭!

유소기는 다급성을 지르며 뒤로 몸을 뒤집으며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으로 돌아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밑이 절벽이라는 것은 임청우가 던진 물건을 잡는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군 지청천도 폭넓은 칼에 무언가를 받아들고 벼랑 끝에 내려서고 있었다. 도군은 무공이 유소기보다는 조금 쳐져서 손이 아닌 칼로 물건을 받아낸 것이었다.

유소기는 손에 넣은 얇은 책을 펼쳐보았다. <일옹청풍일지>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찌직!

혹시나 싶어서 몇 장 넘기던 유소기는 책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영악한 놈!”

유소기는 이를 갈며 절벽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길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도군도 손에 든 장자(壯子)를 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삘릴리...

그때 그들의 뒤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퉁소소리가 들려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입에 퉁소를 물었으며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있는 중년인, 바로 칠절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소(神簫)였다.

놓쳤다.”

유소기가 돌아서면서 동료들에게 내뱉았다.

그가 서있는 곳으로 나머지 칠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진 벼랑 가에 둘러서서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비객 소도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어떻게 할 텐가?”

유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벽을 내려간다. 시체라도 뒤져서 찾아내도록 하자.”

유소기가 앞장서자 모두 그 뒤를 따라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내려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몽선도를 찾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

 

절벽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임청우는 죽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강적을 피하기 위해 절벽을 택했을 뿐 죽으려면 그 자리에서 죽었지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죽는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는 절벽에서 살아날 방법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황의소녀의 몸에서 나는 은근한 체향과 체온이 몸으로 전해온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내심 체념하며 소리쳐 물었다.

이름이 뭐야?”

황의소녀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반짝 뜨며 대답하고 물었다.

심주은(沈珠隱)! 네 이름은?”

슈앙!

임청우는 아래가 더욱 검어지는 것을 보면서 소리쳤다.

제기랄... 다 내려온 것 같다. 저승에서 가르쳐주마.”

그는 심주은이라는 이름의 황의소녀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였다.

!

끈적끈적한 풀 속으로 몸이 묻히는 것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임청우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약한 냄새...)

정신의 자락을 놓치면서도 임청우는 자신이 무언가 지독한 악취의 구덩이로 잠기는 것을 깨달았다.

 

***

 

계곡은 온통 검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땅에 기듯이 깔려있어 어깨높이에 달하는 것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이곳에서 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계곡이고 크지도 않은 숲이다.

바위들에는 이끼와 버섯, 이름 모를 기이한 풀들이 자라있어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주(劒主) 유소기를 비롯하여 도군(刀君), 신소(神簫), 뇌문신권(雷紊神拳), 지존수(至尊手), 비객(飛客), 묵궁(墨弓) 등의 칠절은 반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내려온 절벽 아래의 기이한 풍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융단처럼 땅을 덮고 있는 이런 곳에서 천길 절벽위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 계곡에서는 절벽 위에서는 보이던 반달마저도 보이지 않아 칠흑같이 어둡다.

칠절은 유소기의 신호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서 계곡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휘이익!

유소기는 바람을 몰고 나지막한 나무들을 밟고 달리면서 떨어진 흔적을 찾느라고 눈을 빛냈다.

그러나 위에서 떨어진 방향으로 봐서 그 근처가 분명할 것 같은 데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추락하는 도중 바람에 휘말려서 다른 쪽으로 떨어졌는가 보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기 위해 몸을 날릴 때였다.

부웅! 부웅!

갑자기 퉁소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렸다. 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신소, 찾았는가?”

유소기는 몸을 날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퉁소소리 보다 더 넓고 잔잔하게 계곡을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삭이는 듯이 낮은 음성이다.

바로 천리전음(千里傳音)이란 수법을 펼친 것이다.

부우우웅!

퉁소소리는 계곡의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소를 제외한 칠절들은 긴 그림자를 끌면서 일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신소 강상곡(姜想曲)은 굳은 얼굴로 퉁소를 입에서 뗐다.

무슨 일인가?”

가장 먼저 달려온 비객 소도성이 물었다.

신소 강상곡이 퉁소로 자신의 뒤쪽 암벽을 가리켰다.

어둠 속의 암벽은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높이 솟아 그들을 덮칠 듯이 보였다.

환상신녀(幻想神女)...!”

뒤이어 도착한 유소기가 암벽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자르듯이 내뱉었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며 어깨를 드러낸 절세미녀의 모습이 음각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버드나무가지를 들었으며 다른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있다.

지존수 사마명(司馬明)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신녀문(神女門)이 근처에 있단 말인가? 이 계곡에는 건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환상신녀의 모습이 이곳에 있는 한 신녀문은 이곳에 있다. 모두 의견을 말해보게. 신녀문과 충돌을 불사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날 것인지.”

유소기가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은... 신녀문과 부딪혀서는 안돼. 신녀문을 없애는 건 별 것 아니겠지만, 그 계집들 중 단 한명이라도 살아나간다면 무산(巫山)의 할망구를 무림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뇌문신권 방일휘(方一揮)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산의 할망구를 제거한 후라면 모를까 그전에는 신녀문을 건드려서는 골치만 아플 뿐이야.”

묵궁 진패선(陳覇善)이 뇌문신권 방일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때 지존수 사마명이 불쑥 말했다.

혹시 무산의 할망구가 늙어 죽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소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육지신녀(六指神女)는 신녀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다. 신녀문의 이술(異術)을 십중팔구는 익힌 그녀를 범상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

유소기의 말에도 지존수 사마명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근년에 신녀문의 제자가 무림에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신녀문은 제자를 택 해지 못해서 문을 닫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소 강상곡이 그런 지존수 사마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녀문을 없애버릴 심산이로군.”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다. 난 성결한 척하면서 온갖 잡술을 부리는 계집들을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우리 모두를 끌어들일 셈인가? 큰일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나?”

유소기가 지존수 사마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핫! 유소기, 너야말로 이곳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닌가?”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말했다.

모두들 생각 해보라구. 여기 어딘가에는 몽선도가 떨어져 있어. 몽선도라면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신녀문인가 하는 계집들이 겁이 나서 물러난다는 게 어디 말이라도 되는가?”

신소 강상곡과 비객 소도성, 뇌문신권 방일휘등이 일제히 불안한 시선을 유소기에게 보냈다.

유소기의 관옥같은 얼굴에 싸늘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살기(殺氣)였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하지만 유소기,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죽게 되면 네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는 힘들어질 걸?”

유소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이 어깨의 백금검을 잡아갔다.

화악!

유소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존수 사마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언제라도 발출할 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백금검의 검병(劒柄;검의 손잡이)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객 소도성도 신소 강상곡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었구나!)

지존수 사마명은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유소기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서면 그들도 동조하여 유소기의 독주를 견제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유소기는 자신들과 같은 칠절이기는 하지만 그 무공에 있어서는 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합공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유소기가 동료가 없음으로 인해 겪는 불편은 견딜 수 있지만 수모를 받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르르릉!

백금검이 차디찬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유소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존수 사마명의 이마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장내에 팽배했다.

신소 강상곡등은 손에 땀을 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졌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도군 지청천이 두 사람 사이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

이어 폭넓은 칼이 지존수 사마명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지존수 사마명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도군 지청천의 칼이 마치 만근의 무게로 그를 내리 눌렀다.

(으으으음...)

지존수 사마명은 내심 신음을 삼켰지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군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살려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과해라!”

문득 도군이 입을 열었다.

지존수 사마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마명 뿐 아니라 도군을 제외한 칠절 전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 그들은 머리가 약간 어찔 하는 것을 느꼈다.

도군이 입을 여는 것은 적과 상대할 때뿐이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한 것이었다.

도군의 목소리는 특이한 음공(音功)이 실려 있어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지존수 사마명은 지체없이 손을 쫙 펼쳤다.

열 개의 손가락이 오리발처럼 쫑긋해졌다.

파팟!

지존수 사마명이 이를 악무는 순간 그의 양쪽 손 무명지(無名指)가 각기 폭발하면서 떨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터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다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유소기가 검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몽선도를 찾는다. 만일 신녀문의 제자들과 부딪힌다면 가차없이 죽여라. 몽선도를 찾아내든 못 찾든 여기서 나가는 대로 무산의 육지신녀를 제거한다.”

유소기가 뒤돌아 걸어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지존수 사마명의 사과를 받은 대가로 그의 제안도 받아들인 것이다.

칠절의 우두머리로서 손가락 두 개를 날려버린 지존수 사마명의 무거운 사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도 가슴이 아프겠군. 처가(妻家)나 다름없는 신녀문을 제거하라고 했으니...)

앞서가는 유소기의 완강한 등을 보며 신소 강상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마명은 유소기의 살수를 피할 순 없겠어. 어리석은 친구같으니...)

고개를 떨군 채 지혈을 하는 지존수 사마명의 옆을 지나며 신소 강상곡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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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칠절(武林七絶) (1)

 

 

우워어어어어!”

길고 웅혼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다. 그가 이리로 오고 있다.”

임청우는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빠르게 달리는 황의소녀의 향긋한 체향에 젖어 있다가 기겁하며 외쳤다.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멀리서 시작되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났다.

장차 금포염왕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되는 기린아 검주 유소기!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검법은, 검법은 배웠어?”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를 밟으며 달리던 황의소녀가 임청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대답이 없었다.

속은 것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든 황의소녀는 다시 소리쳐 물었다.

그럼 뭘 배웠어?”

아직 아무 것도...”

하아...”

임청우의 대답이 황의소녀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

그 사이에 오십여 장 밖에 이른 유소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휘익!

황의소녀는 땅으로 뛰어내려와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비정 냉혹한 성격의 유소기는 아마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드드드드!

한데 갑자기 숲이 흔들렸다.

콰콰콰쾅!

앞쪽에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두 사람을 향해 쓰러졌다. 누군가 숲 속의 거목들을 일도양단하여 두 사람의 행로를 저지한 것이다.

!”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황의소녀는 몸을 굴려 근처의 바위 뒤로 피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지만 피할 곳이라고는 그 바위뿐이었다.

쿠르르릉! 콰드드드!

거대한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지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엎드려!”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피한다고 피한 바위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허리를 힘껏 채었다.

하지만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직후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황의소녀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장정 서너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임청우가 두 손으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임청우는 키가 반자 정도 작아졌다.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임청우 자신도 몰랐다.

도망가!”

나무를 떠받친 채 임청우가 소리쳤다.

! !

임청우가 떠받치고 있는 나무 위로 또 다른 나무들이 넘어지고 있었다.

임청우의 허리가 휘청이고 키는 점점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드러난 팔목과 얼굴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황의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청우는 사방에서 넘어온 나무들을 하나의 나무 위에 받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들보나 다름이 없었다.

임청우가 쓰러진다면 황의소녀는 물론이고 임청우 자신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바위 옆이기는 하지만 크지 않은 그 바위도 아마 박살나버릴 것이다.

황의소녀도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임청우의 곁에 서서 나무를 떠받쳤다.

어서 빠져나가!”

임청우는 비지땀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황의소녀는 힘겨운 얼굴로 살풋 웃어보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받쳤다.

임청우의 부담이 약간 줄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런 상태는 아무런 대책도 될 수 없었다.

황의소녀 역시 자신들이 결국에는 깔려 죽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군(刀君),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을 놓칠 뻔했네.”

나무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동산 밖에서 검주 유소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낭낭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실린 목소리다.

 

휘익!

유소기는 사방에서 가운데를 향해 촘촘히 쓰러져 거대한 노적(露積)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거목들 위에 내려섰다.

파라라랏!

그의 몸에 걸쳐진 청삼이 펄럭이며 바람소리를 냈다.

유소기의 십여 장 쯤 앞쪽에 쓰러져 있는 거목 위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폭이 넓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이마가 넓고 눈과 코, 입과 귀, 모두가 큼직큼직한 사람이다. 완강한 턱은 그가 결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 백의의 도객이 칠절 중 검주 유소기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가공할 고수 도군 지청천(池靑天), 바로 그였다.

도군은 유소기의 인사말에도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달아나는 앞쪽의 나무들을 베어 가로막은 것은 바로 도군이었다.

그놈이 어수룩한 겉보기완 달리 아주 교활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굴리려 해도 굴릴 수가 없겠군.”

유소기는 쓰러진 나무들이 층층이 겹쳐 이룬 노적 형상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웃었다.

추릿!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소기는 검을 뽑았다.

백금검이 무지개같은 흰빛을 뿜었고,

쿠르르르! 콰콰쾅!

아름드리나무들이 토막토막 베어지며 수레바퀴처럼 비탈진 쪽으로 굴러갔다.

촤아아아!

작은 나뭇가지들과 잎들은 유소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높이 솟구쳤다.

도망쳤구나!”

갑자기 유소기의 표정이 변했다.

“...!”

좀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군의 눈도 번쩍 빛을 발했다.

거목에 부딪혀 박살나버린 바위 곁에는 두 쌍의 발이 깊이 박혔던 흔적만 있을 뿐,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시체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휘익!

유소기는 이를 부득 갈며 몸을 날렸다.

거목들이 토막 나서 굴러가는 쪽이었다.

도군도 말없이 몸을 날렸다.

 

퉁퉁퉁퉁!

수레바퀴 같이 굴러가는 거목의 잘린 토막들은 다른 나무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바위 위로 튀기도 하면서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황의소녀와 임청우는 그 나무토막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로 굵은 나무속을 파내고 그 안쪽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몇 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라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만한 구멍을 파내기엔 충분했다.

임청우가 두 손으로 나무를 바치고 있는 사이에 황의소녀는 혈도를 써서 재빨리 속을 파냈었다.

거대한 청동향로도 간단히 베었던 혈도다.

청동에 비하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나무를 파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압사(壓死)를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헌데 유소기는 나무들을 일일이 들춰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잘라서 굴려버렸었다.

그 바람에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숨은 나무토막도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소기의 검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 나무를 베었다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두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황의소녀가 나무 구멍 안쪽에 숨고 임청우는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입구를 등지고 서서 버티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 상태로 나무토막은 연신 회전하며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있다.

아차하면 임청우의 몸이 통나무 밖으로 튕겨나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임청우는 팔과 다리에 힘을 한껏 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팍팍팍!

백광이 번득이며 통나무 토막들이 둘로 갈라졌다. 유소기가 비탈을 따라 날아 내려가면서 한꺼번에 십여 개씩의 통나무 토막들을 베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잎이나 가는 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다가 돌풍을 타고 올라갔을 리는 없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이 통나무 속에 숨었으리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백 여 개의 통나무가 다시 둘로 나눠지며 빠르게 비탈을 굴렀다.

통통통!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옆으로 굴러 내려가는 길이가 짧아진 통나무들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숨어있는 통나무가 베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은 머리위로 비스듬히 받치고 혈도는 몸 옆의 나무 벽에 밀어붙였다.

혹시 유소기의 검이 그들이 숨어있는 통나무를 벤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청강사자검과 혈도에 저지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임청우는 자신의 옷자락이 통나무 밖으로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유소기는 백금검으로 굴러가는 통나무들을 자르다가 냉소를 머금었다. 굴러가는 통나무들 중 하나의 중간쯤에서 펄럭이는 임청우의 옷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휘익!

즉시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은 유소기는 허공에서 요자번신(鷂子翻身)의 수법으로 몸을 굴린 후 그 통나무 앞을 가로막았다.

!

마주 보고 있던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통나무가 갑자기 멈추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

황의소녀가 눈물을 찔끔 쏟으며 비명을 지를 때였다.

통나무가 수직으로 홱 쳐들려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두 사람을 밖으로 쏟아냈다.

!”

엄마야!”

임청우는 바닥에 나뒹굴고 황의소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휘익! 터텅!

통나무를 한손으로 간단히 잡고 흔들어서 두 사람을 쏟아낸 유소기는 빈 통나무를 뒤로 던져버렸다.

(검주 유소기!)

(... 틀렸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눈앞에 서있는 임풍옥수같은 용모의 중년인 유소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텅 터터터텅!

그 사이에도 유소기 뒤쪽에서 나머지 통나무들이 요란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손을 젓자 수십 개의 통나무들은 간단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수만으로도 유소기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통나무들은 조금 더 굴러간 후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임청우의 얼굴을 본 유소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백옥같이 맑던 임청우의 얼굴이 불과 반나절 만에 검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황의소녀는 유소기의 추적을 따돌릴 목적으로 임청우의 얼굴을 검게 만들었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유소기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몽선도!”

하지만 유소기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청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에게서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소?”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대안탑에서 인()이 포함된 재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유소기는 검집으로 황의소녀를 가리켰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 예쁜 소녀가 화를 당하게 된다.”

황의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지도 않았음에도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뼛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임청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왔는지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큰 백의의 중년인이 그의 뒤에 칼을 뽑아든 채 서있었다. 도군이었다.

순간 임청우는 칠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굳이 뺏으려 하니 나는 죽어도 뺏기지 않겠다.)

임청우는 오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유소기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져가시오.”

임청우는 소리치며 두 개의 물건을 각기 동북쪽과 동남쪽을 향해서 던졌다.

임청우는 무공은 모르지만 공력만은 아주 높다.

! 피핑!

임청우가 힘을 다해 던진 두 개의 물건은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 파팟!

유소기와 도군의 몸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라 각기 하나의 물건을 쫓아갔다. 그들의 신속함은 먹이를 덮치는 표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임청우는 유소기와 도군이 몸을 날리자마자 황의소녀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내달렸다.

얼굴 앞에서 찬바람이 이는 순간 임청우는 황의소녀를 힘껏 껴안으며 땅을 박차고 껑충 뛰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몸은 까마득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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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2)

 

 

신랑이 기가 막혀하는 가운데 혼례가 거행되었다.

비록 맑은 물 한잔과 수탉 한 마리만 탁자위에 올려놓고 맞절을 하는 간단한 혼례이긴 했지만 틀림없는 혼례였다.

신랑측의 혼주(婚主)도 있었고 신부측의 혼주도 있었다.

자기의 몸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부려지고 일으켜지는 데야 임청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개방의 전대고수 부부가 주관한 거지같은 혼인이 끝났다.

첫날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식을 마친 후 할머니가 황의소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남자는 원래 밥통 같아서 뭣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단다. 네가 잘 가르쳐야 할 거야. 우린 근처 숲에서 자고 아침에 올 테니 그렇게 알아라.”

...”

할머니의 말에 황의소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범하고 뻔뻔스러운 데가 있는 소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노부부는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혈도가 찍힌 임청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장승처럼 서있을 뿐 옴쭉달쭉할 수도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렇게 벼락 치듯이 혼례를 올리게 될 줄은 꿈엔들 생각지 못했다.

아니 혼례라는 것 자체도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임청우인 것이다.

두 부부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장승처럼 서있는 그를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 나를 때리면 아내를 때리는 천한 남자란 소리를 들을 것이고 도망친다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겠지? 우협의 제자도 우협같은 성인군자일 테니 결코 그런 말을 듣지 않겠지? 그랬다간 우협이란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임청우는 화가 나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사부님의 명성을 내가 해칠 수는 없다. 네 말대로 이미 억지로라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부부가 되었으니 너를 때리지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짓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게 나와 부부가 된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해 주겠다.)

한데 황의소녀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져갔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내가 좀 엉뚱한 짓을 한 것은 인정해. 난 가끔 이러니까. 하지만, 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었어. 아버지의 부하들은 나를 잡아가려고 하고, 내가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한데... ”

소녀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걸승(妓乞僧)... 아버지의 충실한 개인 그들이 네가 우협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두 도망 가버리지 않았어? ... 이미 그때 결심했어. 너와 혼인하겠다고...”

임청우는 비로소 황의소녀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신과 혼례식을 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수하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신과 부부가 된 것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긴 싫었어.”

당돌하면서도 거침없어 보였던 황의소녀였다.

한데 그녀가 지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임청우는 가슴이 찡해왔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동시에 단전에서 한줄기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막혀있던 혈도들이 순식간에 타통되어 버렸다.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소녀의 어깨에 얹었다.

“...!”

황의소녀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 미안...”

임청우도 놀라 그녀의 어깨에서 급히 손을 뗐다.

... 어떻게 혈도를 풀었지?”

황의소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임청우와 황의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순간이 계속됐다.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이 소저, 아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 데, 그래도 성미는 여간 사나운 것 같지가 않다. 어머니처럼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만... 미리 손을 써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어머니의 성격은 무시무시하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혼인을 올리게 된 황의소녀도 자기의 뺨을 때리는 둥, 그 성미에 있어서 결코 녹녹한 것 같지가 않다.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다시 농산에서의 괴로운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다.

임청우는 어느 책에선가 본 구절을 떠올리며 혼잣말 처럼 천천히 말했다.

똑똑한 남자는 나라를 세우고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망친다고 하던데...”

! 나라를 세우기나 하라구. 망치는 건 그 이후의 문제니까.”

황의소녀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이런 산속에서 꼬마들이 반역을 획책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침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깜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임청우가 막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슈우!

침실 안쪽에서 뭔가가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오척 단구에 뚱뚱한 몸을 한 중년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침실에는 거실과 연결된 방문 말고는 작은 창문 밖에 없었다.

임청우는 어떻게 뚱뚱한 중년인이 침실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데 뚱보 중년인은 당황하는 임청우를 보며 오히려 놀란 듯했다.

? 들은 것과는 다른데.”

사삭!

임청우는 번개처럼 자기의 얼굴을 더듬고 물러서는 손을 느꼈다.

임청우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뚱보 중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뭘 칠한 것도 아닌데...”

그때 임청우 뒤에서 황의소녀가 나서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혹시 칠절 중 비객(飛客)이라 불리는 소대협(蘇大俠)이 아니신가요?”

맞아, 내가 바로 비객 소도성(蘇道盛)이다. 넌 누구길래 어린 아이 주제에 날 알고 있는 것이냐?”

중년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키가 작고 뚱뚱해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인,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라는 칠절 중의 비객 소도성이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그 뚱뚱한 몸이 어떻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리가 길기가 하나 몸이 날렵해 보이기를 하나...

굴러다닌다면 믿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황의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천하제이(天下第二)의 경공술을 가지신 비객 소도성을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겠어요?”

하하핫! 내가, 이 비객 소도성이 천하에서 두번째라고? 그것 참 웃기는군. 그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있으니 한번 놀아보자구나. 그래 그럼 제일은 누구냐?”

소도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청우는 소도성이 말한 <>라는 소리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 너를 찾고 있는 검주 유소기지 누구겠나?”

그가 왜 나를 찾습니까?”

하하핫! 너는 그에게 볼일이 없겠지만 그는 아마도 단단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소도성이 임청우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검주 유소기의 임청우에 대한 볼일, 두 말할 것도 없이 몽선도를 뺏으려는 일이었다.

황의소녀가 다시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무림칠절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을 걸요?”

마면혈도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무비옹을 믿고 있는 모양이군.”

소도성이 가소롭다는 말했다.

황의소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보다 빠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 그는 바로 일왕(一王), 금포염왕이라구요.”

일왕... 그라면 나보다 빠를 수도 있겠지. 설마 일왕이 저 놈의 배후에 있단 말인가?”

소도성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빠르기로 유명한 비객이지만 감히 금포염왕보다 빠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마하니 일왕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죠?”

황의소녀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임청우가 그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다시는 우협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부라면 자기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임청우는 소도성에게 말했다.

칠절은 모두 강도를 일삼는 무리입니까?”

소도성의 눈이 번쩍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칠절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은가?”

만만치 않다는 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같이 들리는군요.”

소도성은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그만두자. 나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인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굳이 살인을 하고 싶진 않다.”

황의소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임청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칠절이 다 오는 모양이야. 어서 도망쳐야해. 만약에 검주 유소기와 도군(刀君), 신소(神簫) 등이 도착하면 도망칠 래야 칠 수도 없어.”

임청우의 몸이 움찔했다.

소도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도망치려고? 이 소도성 앞에서?”

황의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정확하게 맞췄어요.”

“...?”

그녀의 서슴없이 하는 말에 소도성이 긴가민가하는 순간이었다.

스스슷!

갑자기 임청우와 황의소녀의 몸이 안개에 휩싸인 듯이 흐릿해졌다.

내 앞에서 달아나겠다? 어림 반문어치도 없은 생각이지.”

소도성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여유있게 웃었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번개처럼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날아나갔다.

으헉!”

스팟!

그러나 초가집을 뛰쳐나온 소도성은 채 삼장도 가지 못해 다급한 비명과 함께 더 빠르게 물러났다.

두 개의 나무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있는 눈에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실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황의소녀의 천잠사다.

으으...”

소도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빠른 속도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허리가 잘릴 뻔 했다.

공력이 높아 허리를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천잠사에 닿은 옷은 예리한 검에 베인 듯이 잘라져 버렸고 허리에도 붉게 금이 그어졌다.

놀람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여우같은 년!”

!

소도성이 발을 한번 구르는 순간 그의 뚱뚱한 몸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헌데 소도성이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슷!

천잠사가 감겨있는 나무 뒤에서 황의소녀와 임청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 도망가야 해! 비객 소도성을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오래 속일 순 없어. 금방 속은 줄 알고 돌아올 거야.”

황의소녀가 임청우의 손을 끌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들 사이로 달렸다.

황의소녀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따라가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의 얼굴을 힐끗 보아도 그 검은 얼굴이 진지하게 보인다.

결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마... 경신술도 모른단 말인가? 우협의 제자가...)

어쩌면 우협의 제자이기에 경신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협이라면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일협으로서의 그 가공할 무공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 만전만패의 기인이 아니던가?

!

마음이 급해진 황의소녀는 자기보다 키가 큰 임청우의 허리를 끼고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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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1)

 

 

일각 정도 걸었을 때 임청우는 멀리 보이던 불빛을 십장 밖에 두고 있었다.

불빛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따라 숲을 헤맬 때 이 집을 보았었다.

초가집으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청우는 초가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소리는 여전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음성인지 여자의 음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소리는 임청우가 가까이 가는 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당연히 황의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미 나쁜 계집애가 삐쳐서 어디론가 샜나 보다 생각하면서 임청우는 뒷걸음질로 초가집에서 물러섰다.

그에 따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장 정도 물러나도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다만 웅웅 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가까이 가면 작아지고 물러서면 커지는 말소리라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

하지만 용기를 낸 임청우는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다시 초가집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던 사람입니다.”

초가집 문 앞에 이른 임청우는 무게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

갑자기 문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임청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초가집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긴장한 임청우는 쓸 줄도 모르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이 순간에는 그쳐버렸다.

어둠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임청우는 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끌듯이 미끄러뜨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발에 느껴지는 거친 바닥이 자기가 살았던 농산의 모옥과 비슷했다.

임청우는 발끝으로 앞을 더듬으며 살쾡이처럼 소리없이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긴장은 실이 당겨지듯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몸은 자신의 무게를 잊어버렸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

임청우의 발이 각목을 더듬어 냈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의 다리라 생각하며 옆으로 돌았다.

그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임청우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그 푸른 그림자들은 흐느적거리며 날아올라 임청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덮쳐들었다.

카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유부의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임청우는 검을 뽑아 앞에 있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파앗!

청광이 일면서 푸른 그림자가 두 조각이 되었다.

위위위윙!

동시에 그것들은 임청우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

악귀의 울부짖음은 같은 괴성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푸른 그림자들은 다시 배로 늘어났다.

눈앞이 팽팽 돌며 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푸른 그림자들에 갑자기 눈과 입이 생겼다.

크아아!”

임청우가 놀라는 순간에 그것들은 임청우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으합!”

임청우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양손으로 푸른 그림자들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푸른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냄새가 났다.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는 검소한 거실인데 임청우는 그 가운데에 조각조각 찢어진 푸른 천 조각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나오시오.”

임청우는 내동댕이쳤던 검을 주워 칼집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 사람도 아니군.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임청우가 들어온 문의 반대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황의소녀가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임청우는 그녀를 응시하고 물었다.

갑자기 황의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투 제발 좀 쓰지 않을 수 없어? 속이 니글거리지도 않아?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그만 서로 편한 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내게 감히 존대말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 대신...”

“...”

억울하면 너도 나처럼 편하게 말해.”

황의소녀는 빠르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해도 크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까칠한 계집애가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했다.

황의소녀가 자신과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그녀가 싫지는 않다.

임청우도 딱딱한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고 싶다.

미인에게는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임청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황의소녀가 열어놓은 방문에서 농사꾼 차림의 늙은 부부가 나왔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고 온화해보였으며 할머니는 작은 키에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훗날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아이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임청우는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의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있었다.

과묵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천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고 탁자로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저건 우리 부부의 이불이지. 마련한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바꿀 때도 되었어. 그러니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단다.”

임청우는 문득 그 할머니가 자기가 만난 적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저 아이에게 다 들었단다. 네 얼굴이 검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올바르고 기상이 훌륭하니 용모에 그렇게 구애될 것은 없단다. 대장부는 그 행동으로 말하지 얼굴을 파는 것은 기생오라비나 하는 짓이란다.”

임청우는 어리둥절했다.

자기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다고는 할 수 없다. 씻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이 이미 우협 장백승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 황의소녀가 검게 변하는 약을 다시 발랐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며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다독거리며 또 말했다.

효자는 부모의 그릇된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다. 비록 한때는 불효소리를 듣더라도 훗날 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효란다.”

임청우는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

할머니, 대체 무슨...”

흠흠...”

임청우가 말을 하려는 순간 황의소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막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단다 얘야. 우리도 너와 같은 나이에 혼인을 했단다. 아무 말 말고 오늘 밤 여기서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혼례를 올려?)

임청우는 어리벙벙한 심정이 되어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할아버지가 주워 모은 푸른 천들을 받아서 한쪽에 있는 아궁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영감! 오늘이 길일이 맞죠?”

그렇소.”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임청우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혼례준비를 할 테니 너희들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황의소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그녀에게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의 침실은 자그만 했다. 하나의 침상과 밖의 것보다 약간 작은 탁자가 하나 있으며, 벽쪽으로는 낡은 옷장이 붙어있다.

황의소녀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임청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왜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지.”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지.”

“...”

지금 하도록 하겠어.”

황의소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임청우는 다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롱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의소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큰일!

임청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빛나자 황의소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협의 제자, 그리고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며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네가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우협의 제자가 아니라면 넌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은 목숨일 거야.”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더구나 소녀가 큰일을 해보자는 대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가 결심한 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지 않은가?

황의소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쫓기고 있어. 그들은 아버지의 부하들인데 나를 잡아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말거야. 한데, 난 무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임청우가 물었다.

황의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한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거야. 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네가 말하는 큰일인가?”

임청우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그 여자만 죽일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몇 달 동안 무림을 돌아본 바로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첫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너야.”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고 있다.

무림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청우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가...

황의소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아?”

임청우는 야심으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만 같은 눈이다.

한데 그 일과 혼례가 무슨 상관이 있나? 왜 그런 일로 사람을 우롱하려는 거야?”

임청우가 말머리를 돌렸다.

황의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건 거짓말은 약간 했지만 장난은 아니야. 어차피 여자는 시집을 가야해. 그렇다면 적당한 상대를 발견했을 때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나?”

임청우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황의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에게.”

임청우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다니. 난 너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맘대로 해라.”

황의소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벌써 부부싸움을 하느냐? 하지만 그건 침실에서 소리를 낮추고 해야지 방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되는 것이란다.”

임청우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소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말다툼 한번 했다고 여자를 버리고 떠날 셈이냐? 이 할머니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할머니는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리고 임청우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콰득!

너무도 신속하고 재빠른 솜씨에 임청우는 꼼짝 못하고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벌써 할머니가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임청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오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풀고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란다. 다시는 여자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녀는 임청우의 혈도를 다시 풀어줄 기세였다.

그때 황의소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풀어주지 말아요. 도망가고 말거예요.”

걱정 말거라. 우리 부부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우협의 제자란 말예요.”

!”

황의소녀의 외침에 할머니는 놀란 듯이 임청우를 다시 보았다.

임청우의 왼손에 들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 얼핏 보기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그 검을 보는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우협의 제자였구나. 우협께선 안녕하시냐? 만나거든 개방의 종가(宗家)부부가 안부하더라고 전해라.”

혈도를 풀어주면 절 버리고 도망 가버릴 거예요.”

황의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애야, 네 사부께선 우리 개방의 은인이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선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일단 혼례를 치르고 나면 풀어주고 사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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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2)

 

 

아람드리 나무가 즐비한 숲속을 황의소녀는 순식간에 십여 리나 달렸다.

숲속으로도 오솔길은 나있고, 두 갈래의 오솔길에 마주치게 되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황의소녀는 혈도를 짚은 채 겨드랑이에 끼고 왔던 임청우를 오른쪽 길 옆 숲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임청우는 장작처럼 뻣뻣하게 던져져 수풀 속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지만 이내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곁에 내려앉기도 했다.

잠시 후, 길게 바람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기걸승 세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 역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거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벌써 며칠 째 종남산에서 술래잡이라니...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데 막상 잡을 순 없고...”

노파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거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냐?”

그쪽으로 가기는 아마 갔을 거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린 역시 소저를 잡지 못할 거요. 아마도 소저에겐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어려서부터 장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 깊고 깊은 심처에서 그녀가 어떤 재주를 배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 재주도 없고 단지 우리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아직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소?”

거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파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그건 이상해. 더구나 소저의 몸에선 끊임없이 만리향 냄새가 풍기는데 말이야.”

문득 중이 입을 열었다.

소저는 주인을 닮았소. 도무지 그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질 않소.”

거지와 노파가 흠칫했다.

중이 계속 말했다.

우린 주인을 대하듯이 소저를 대해야 할 것 같소. 주인의 생각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명령만 충실히 수행하듯 소저의 생각을 예측할 필요 없이 무작정 쫓기만 하면 언젠가는 소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자기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쫓는다. 우린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주인이나 소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노파와 중은 만리향의 냄새가 흐르고 있는 왼쪽길로 주저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지는 오른쪽 길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그들을 뒤쫓아 갔다.

임청우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을 죽이려 하는 건가? 내가 책에서 보고 배운 건 모두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었단 말인가?)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듣기로는 노파 등의 주인이란 사람은 황의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락!

갑자기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임청우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임청우는 자신의 눈까풀이 무거워져 내려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혈도가 찍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청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숲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리고, 그 땅을 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눈앞에는 영롱한 두 개의 별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멍청이! 이제야 깨어났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임청우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영롱한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임청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푹 자고 난 덕분인지 몸이 아주 홀가분했다.

비록 미음 한 그릇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허기도 사라졌다.

몸이 편해진 탓인지 황의소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불쾌한 감정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확인하며 임청우는 물었다.

? 나를 이리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남을 잘 속이기 때문이야.”

황의소녀가 해실해실 웃으며 대답했다.

임청우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는 속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쓰륵쓰륵!

아래쪽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지가 기우뚱거린다.

그들이 있는 곳은 키가 이십 여장에 달하는 거목의 가지 위였다.

임청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속이 좁은 사람이나 여자와는 다툴 바가 못 된다 했다. 바람소리거니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공간에 가득한 바람만 느껴질 뿐 땅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려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우며 황의소녀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말을 던졌다.

임청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층층으로 얹혀진 가지들 중 하나를 내려왔을 때 위쪽에 있는 소녀가 또 던지듯이 말했다.

검주 유소기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내가 보기에 넌 유소기를 영원히 속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해. 또 유소기의 손아귀를 벗어날 만한 능력도 없고.”

휘익!

임청우가 손과 발을 멈추고 있는 앞으로 황의소녀가 나비가 날 듯 부드럽게 날아내려 왔다. 그녀가 내려선 가지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황의소녀는 임청우에게서 망설임을 읽고 말했다.

나도 쫓기고 있지만 사실 기걸승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들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들은 나도 어떻게 하지 못했어.”

임청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의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뱉었다.

나도 너 정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뭔가가 임청우의 양쪽 귀에 걸려있었다. 그의 발을 묶은 적이 있던 천잠사였다.

임청우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황의소녀가 돌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는 우악스럽게 황의소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난 죽을 고비라면 수백 번도 더 넘겼다. 우리 어머니조차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셨다. 그런 나를 죽고 사는 것으로 협박하려하다니...”

임청우의 손힘은 황의소녀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할 만큼이나 엄청났다.

그의 몸속에 있는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밖으로는 뿜어낼 수 없다하지만 고강한 공력임에는 분명한 때문이다.

우협의 제자가 여자나 괴롭히는 사람이야?”

황의소녀가 작지만 뾰족하게 소리쳤다.

순간 임청우는 뱀에 물리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청우에게 있어 마음속의 사부인 우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백번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황의소녀의 손목을 풀어준 임청우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지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임청우는 늘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발아래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임청우는 황의소녀가 기걸승 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리향의 향기를 높은 나무 위에서 바람에 실어 날려버리는 것이다.

기걸승이 어느 정도 높이 까지 솟아오르지 않고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되질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왜 이 근처에서만 맴도는 거지?”

임청우가 물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황의소녀는 화난 듯이 쏘아붙이며 나비처럼 날아서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협의 제자인 것 같은 이 녀석은 어떤 면에선 전혀 우협을 닮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이나 상하게 하는 짓 따윈 진짜 우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임청우도 묵묵히 황의소녀를 따라 나무를 내려갔다.

잘 들어! 너나 나나 여기 계속 있다간 다 죽어.”

이윽고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잠자코 내 뒤만 따라와.”

임청우는 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의소녀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쁘게 눈망울을 굴리며 숲속으로 유연한 물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만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

 

숲속을 헤맨 것도 두 시간 정도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그녀는 여전히 그 숲 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중요한 그 무엇을 찾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마침내 임청우가 물었다.

대체 찾고 있는 게 뭐야?”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황의소녀가 빠르게 말했다.

어두워서 쉽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찾아야 돼. 그곳만 찾을 수 있다면 넌 유소기에게서, 난 기걸승으로부터 쫓기지 않아도 될 거야.”

임청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이루려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전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이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포함된다면 우린 전혀 찾을 필요가 없지.”

임청우의 말에 황의소녀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임청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우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남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나도 좋아하진 않아.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해. 설혹 여기에 그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대현(大賢)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인다고 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은 또한 아주 현명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이나 아주 현명한 것이나 모두 일반에서 유리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없어 생기는 혼돈일 것이다.

이 순간에 황의소녀의 심정이 그랬다.

임청우가 어리석은 것인지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면, 남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고금에 걸친 불변의 진리 중 하나일 것이다.

 

쓰륵! 쓰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임청우가 앞장을 서고 황의소녀가 뒤따른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갔다. 그는 황의소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임청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경신술을 배우지 못했었다. 물론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바보같이... 경신법을 펼치면 금방 갈 텐데...)

황의소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면 되지 꼭 하늘 가린 곳이라야 돼? 허세는 혼자 다 부리면서...)

임청우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는 이미 알았다.

그녀는 임청우가 잘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임청우를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삿!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따라오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불빛을 향해 갔다.

비록 경신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몸속에는 용조층층공이란 공력이 숨 쉬고 있기에 그 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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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1)

 

 

산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보이는 곳에 주점(酒店)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점 앞에 내 놓은 의자와 식탁에는 다섯 명의 손님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임청우는 길가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주인을 찾았다.

음식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건네 준 후에 다가왔다. 육십이 넘은 노인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이다.

임청우는 삶은 돼지고기와 만두, 그리고 술을 주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없이 눈이 옆 자리로 계속 돌아가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행과 함께 앉아있던 옆 자리 사람이 그런 임청우가 못마땅한지 음식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놓고 먹기 시작했다.

!

다행히 주인이 음식을 빨리 가져왔다.

?”

헌데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보았다. 식탁에 놓인 것은 그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한 그릇의 미음이었던 것이다.

급체에 걸려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네. 먼저 그것을 먹고 나면 주문한 것을 가져다주겠네.”

늙은 주인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을 굶은 후이니 기름진 음식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미음부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임청우는 주인의 성심에 감동하며 미음 그릇을 들고 한입에 마셔버렸다. 미음은 이미 식어있어서 먹기도 쉬었다.

한데 미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임청우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있던 다섯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차! 했다.

에워싼 사람들은 검을 멘 세 명의 중년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임청우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청우는 혈도가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이란 참으로 경우가 없구나. 낯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보기만 하면 뺏으려 드니...)

임청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연이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을 멘 중년인들 중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본인는 화산파(華山派)의 상승칠검(常勝七劒)중 오검(五劒) 척광태(擲光太)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내 사제로 육검(六劒) 마진산(馬晉山)과 칠검(七劒) 동호복(董毫福)이다.”

임청우는 농산을 내려와 소림사니 무당파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미음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상승삼검의 맞은편에 서있던 두 청년 중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만상보(萬商堡)의 진가형제(眞價兄弟). 소형제는 그 칼을 우리에게 팔 생각이 없는가?”

만상보는 무림인들 중에서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와, 상인들 중에서 야심이 큰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은 중원 천하에 발을 뻗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고팔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생명을 팔고 사는가 하면 무림의 온갖 기보(奇寶)와 신병이기(神兵異器), 무공비급(武功秘級)을 거래하기도 했다.

진가형제는 만상보의 수천 명 상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들로 실제에 있어서는 무림인들이 그들을 진가형제(眞假兄弟)라고 불렀다.

그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

상승오검 척광태가 검을 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진가형제!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이자는 마면혈도의 칼을 지니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형제가 가고 나면 혈도를 혼자서 차지하겠다는 것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소리친 자는 음식을 임청우가 보지 못하도록 돌려놓고 먹던 청년이었다.

진가형제중 형쪽인 그자는 임청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그 칼을 우리에게 팔기만 하면 자네의 목숨은 우리가 지켜주겠네.”

한데 그자는 손바닥이 뜨끔함을 느끼며 황급히 임청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던 무쌍층층공과 용조수가 합쳐진 공력, 즉 용조층층공이 은연중에 발동하여 그자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그 공력의 대단함은 감히 자기들 진가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자는 즉시 아우의 소매를 끌면서 은밀히 말했다.

가자, 이번 장사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하는 것 같다.”

“...?”

진가형제의 아우쪽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두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주점의 뒤로 돌아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척광태 등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가형제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눈앞의 소년에게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척광태는 아무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쩌면 혈도의 주인인 마면혈도가 주위에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척광태의 시력과 청력으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청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음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이 어떻게 마면혈도의 성명병기인 혈도를 가지고 있을까?)

척광태가 은근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임청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슷!

마치 안개가 이는 듯 하더니 임청우 곁에 서있는 동호복의 뒤에 황색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척광태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며 소리쳤다.

사제! 피해라!”

 

한 인간의 생명은 전우주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어느 누군가가 판결의 취지문에 써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우주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생명은 전혀 고귀할 것도 없는 다른 어떤 사실들 앞에 맥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 말은 너무 고매해서 사람에게서조차 멀리 떠올라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승칠검의 다섯 째 척광태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동호복은 외침을 듣는 순간에 움찔했지만 죽음의 손길로부터 피하지는 못했다.

미친 마귀의 눈빛을 한 그 황색 가사의 중()은 합장하듯이 손바닥을 모았고, 두 개의 동발(銅鉢)이 합쳐지듯 그 손바닥이 합쳐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던 동호복의 머리는 압착기에 눌린 계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척광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엔 불신과 공포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직후 척광태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

묘한 콧소리와 함께 척광태의 시체 뒤에 한 명의 노파(老婆)가 나타났다.

손에는 금방 사용되었을 법한 가는 천잠사를 감고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것 같은 노파다.

그렇지만 결코 곱게 늙지는 못했다.

세파가 스쳐가며 만든 주름살일랑은 차치하고라도 얼굴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근육들이 남아있는 것은 노파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긴장이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임청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상승칠검중 육검 마진산이 죽는 모습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엔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차르르륵!

문득 임청우의 눈앞에 한 폭의 족자(簇子)가 펼쳐졌다.

비단폭이 스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족자 뒤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거지가 서있다.

거지가 임청우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거지의 눈빛은 종이를 태울 만큼 강렬하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임청우는 단지 보았다고 했을 뿐인데...

으하하하!”

그 즉시 거지의 살벌한 눈빛이 가시면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킬킬킬!”

거의 동시라 할만큼 노파와 중도 덩달아서 웃었다.

삼인의 웃는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임청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공력이 뛰어난 고수들의 웃음소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뒤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 신체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노파가 웃음을 뚝 그치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있느냐?”

임청우도 즉시 되물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거지가 큰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늙은이가 이걸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분명히 여기서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분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임청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체에 걸릴까봐 미음부터 내주었던 주점 주인을 생각하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끈 치솟는 무엇이 있었다.

네놈이 감히 흥정하려는 건가?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

날카롭고도 높은 소리의 음성으로 노파가 말했다.

임청우는 이 순간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는 그가 숲속에서 불과 얼마 전에 본 황의소녀였다.

그리고, 높고 낮은 휘파람 소리의 주인들이 바로 이들 세 명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한데 이들이 왜 엉뚱하게 자기를 닦달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끊어놓기까지 하는가?

황의소녀를 쫓기만 한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닦달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그러해야할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아왔기에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선 미워하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청우의 속에서는 빙산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던 자들이 이젠 한갓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 중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소저를 이놈은 봤다고 하니 어쩌면 이놈과 소저는 아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면서 중을 쳐다보았다.

중이 근처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이 근처에 계신 줄 알고 있소이다.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소.”

중이 임청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반반하군.”

하지만 그 반반한 임청우의 목에는 어느 새 노파의 천잠사가 감겨져 있다. 살짝 힘주어 당기기만 하면 무처럼 성둥 베어지고 말 터이다.

임청우의 입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이 있으면...”

나지막하고 탁한 음성이지만 폭발할 듯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은 세 사람의 이목을 그에게 끌었다.

임청우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노파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슴이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는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릇됨을 용납하지 않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천지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것은 우협 장백승을 은연중에 닮아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걸승(妓乞僧), 즉 기녀 차림의 노파와 거지 중은 그제서야 임청우의 면목을 바로 대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몰골이지만 한 자루의 보검과 보도를 가지고 있다.

청강사자검(靑鋼獅子劒)!”

거지가 먼저 임청우의 검을 알아보고 경악하며 주춤 물러섰다.

! 휘익!

노파와 중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장 밖으로 피했다.

... 넌 우협 장백승과 어떤 관계냐?”

임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무엇이건 벨 것 같은 검기가 청강사자검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만 가자! 만리향(萬里香)으로 봐서 소저는 아직 종남산(終南山)을 벗어나진 않았다.”

노파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지며 거지와 중에게 말했다. 그 음성에서만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거지와 중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임청우는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책속에 매장 당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덜컹!

길가 주점의 좌측 숲에 있던 굵은 나무 한 그루의 껍질이 열리더니 황의소녀가 튀어나왔다.

슈우우웅!

소녀는 임청우의 곁을 스치면서 그를 나꿔채 숲으로 달려갔다.

임청우는 순간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꼼짝없이 소녀에게 끌려 허공을 날아갔다.

황의소녀가 날아가는 곳은 노파 일행이 간곳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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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임청우는 발에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듯이 질풍같이 대안탑을 달려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일 때는 발끝에 힘을 불끈 주자 순식간에 뛰어 넘어 버렸다.

마치 바람처럼 대안탑을 내려온 후에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 저 저...”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해댔다.

 

임청우는 담장을 뛰어넘고 메말라 버린 화원을 뛰어 넘으며 자은사를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지.”

대안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까지 들어온 임청우는 나무 뒤에 몸을 붙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십 리는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 데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숨도 가쁘지 않다.

그러나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뱃가죽은 등에 붙어 혹시 위장을 삭혀버리지나 않을 까 싶을 정도다.

허기로 인해서 눈알이 팽팽 돈다.

(잘못 왔구나 잘못 왔어. 인가(人家)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임청우는 속으로 후회하며 나무열매라도 어디 없는가 싶어 살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그의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듯 하더니 무언가 싸늘한 감촉이 목에 느껴졌다.

!”

임청우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우연히 익힌 용조층층공으로 인해 그의 몸은 아주 재빨랐다.

그러나 임청우가 한 걸음을 채 옮기기 전에 다시 뭔가가 번쩍 하더니 그의 목에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슷!

임청우의 눈앞에 한 사람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임청우의 목에 닿아있는 것은 그 중년인의 검이었다.

푸른색 장삼을 차려입은 중년인은 삼척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손가락질 하듯이 검으로 임청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임청우는 중년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협 장백승의 절대적인 위엄과는 또 다른 것이 중년인에게는 있었다.

임풍옥수(臨風玉樹)의 용모와 입가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 맑은 빛을 발하는 눈은 서글서글한 봉목(鳳目)이었다.

백금(白金)으로 만들어진 눈부신 보검은 입고 있는 청삼(靑衫)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번 보기만 한다면 어떤 여인이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내놔라!”

청삼인(靑衫人)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음성이 마치 연인(戀人)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다감(多情多感)하다.

임청우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혈도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청삼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미녀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릴 때마저도 아름다웠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임청우는 남자가 찌푸리는 눈살도 그처럼 황홀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속에도 은연중에 위엄이 있고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빼어난 기상이 있는 난초(蘭草) 같은 사람이었다.

!

백금으로 만들어진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혈도를 튕겨냈다.

혈도는 칼집에서 빠져나와 삼장 밖에 있는 바위 속에 깊이 박혔다.

내놔라!”

청삼인이 다시 말했다.

백금검은 어느새 다시 그의 목에 붙어있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청삼인이 노리는 것이 바로 몽선도라는 것을 알았다.

혈도를 지니고 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달라고 부탁을 하면 몰라도 막무가내로 뺏으려 드는 사람에게 몽선도를 내놓기는 싫었다.

해서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물러섰다.

무슨 말입니까? 제게 뭘 내놓으라는 말인지...?”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놔라. 대안탑에서부터 너를 쫓아왔다.”

청삼인은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가 능히 웃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검주(劍主) 유소기(劉蘇起) 대협 아니십니까?”

청삼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유소기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말라는 엄포로 들렸다.

청삼인은 일왕일협삼괴칠절 중 칠절의 우두머리이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기를 쓰고 피하려던 바로 그 검주 유소기였다.

임청우는 유소기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찾으시는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그 두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검주 유소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비록 남다른 데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그에게 몽선도를 넘겨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몽선도를 넘겨주었다면 혈도를 주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강시놈에게 속은 모양이구나.)

휘익!

유소기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즉시 몸을 날렸다.

조호이산지계(鳥虎移山之計)!

소년으로 하여금 혈도를 가지고 도망치게 하여 자신을 유인한 후 그 사이에 두 놈은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죽이고 물건을 찾아보지 않은 걸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남의 것을 억지로 뺏으려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청우는 유소기의 몸이 다시 번쩍하더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대하고 좋은 사람은 좋게 대하면 되는 일이다.”

검주 유소기는 임풍옥수 같은 용모와는 달리 임청우의 가슴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으로 새겨졌다.

다짜고짜 상대방을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강도(强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청우는 바위에 박힌 혈도를 뽑아서 다시 허리춤에 끼웠다. 혈도의 무게가 근 이십 근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무거운 줄을 몰랐다.

() 안으로 들어가서 뭐든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배가 고프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제 그만 가려고? 남을 속이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던데...”

갑자기 임청우의 뒤에서 맑고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

임청우는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천천히 돌아섰다.

혈도가 꽂혔던 바위의 위에서 머리에 화려한 금장식을 달고 있는 예쁜 소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의(黃衣)를 입은, 얼굴이 손바닥만한 소녀였다.

그러나 뽀얀 얼굴에 보석처럼 빛을 반짝이는 눈을 가졌으며, 짓궂게 웃음 짓는 두 볼에는 볼우물이 패여 있다.

나이는 임청우와 비슷하게 보였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임청우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소저야 말로 대단하군. 검주 유소기를 감쪽같이 속였어. 그도 소저가 그곳에 있는 줄은 몰랐을 테니...”

소녀가 처음부터 반말을 했기에 임청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소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나도 그를 속였어. 이번 한 번만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백 번도 더 속일 수 있겠지. 하지만 넌 벌을 받아야 해.”

임청우는 자신의 눈앞에 누런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짝!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틈에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뺨을 때리고 다시 바위위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귀신처럼 재빠른 솜씨였다.

임청우의 어머니도 그를 때릴 때 빨랐지만 소녀의 솜씨는 기척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빨랐다.

황의소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게 반말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어. 그 사람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뿐이지.”

임청우는 입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켰다.

자기 또래의 계집애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짐짓 대범한 척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버릇없는 것을 자랑하는 계집애는 또 처음 보겠군.”

황의소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바보같은 자식이 제 신분 천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말을 함부로 하네. 하는 짓이 귀여워 약간은 마음에 들었는데...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수밖에...)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빛냈다.

임청우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여기에 더 있다간 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질 나쁜 계집애를 또 건드려 놨으니 어떻게 나올지는 뒤를 짐작할 수 없다.

(모른 척하고 빨리 이 자리를 떠는 것이 상책이다.)

험험!”

임청우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소녀의 뒤를 가만히 보았다.

“...?”

황의소녀는 어리둥절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 누가...?)

(이때다!)

임청우는 있는 힘을 다해서 산아래를 향해 달렸다.

! !

(아이쿠!)

그러나 임청우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며 앞으로 넘어져 땅에 세차게 머리를 찧었다.

채 두 걸음도 떼지 못했다.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조이고 있다.

호호호! 네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러도 소용없어.”

황의소녀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실이 잡혀있었다. 임청우의 빰을 때릴 때 이미 그녀는 천잠사(天蠶絲)를 그의 발에 살짝 걸어 놓았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생각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잔머리를 굴리는 상대는 잔머리를 굴려서 상대할 수가 없다. 원래의 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높이가 오장인 나무라면 그 뿌리는 오십 장에 달한다. 이런 나무라면 바람이 불어도 가지만 흔들릴 뿐 뿌리를 뽑아 올리지는 못한다. 흔들면 흔들리는 데로 가만히 두지만 결코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임청우는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의연한 기세가 일어났다. 마치 천년 거목인양 무게가 있는 태도였다.

황의소녀가 변해버린 그의 기세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임청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황의소녀를 묵묵히 응시하던 임청우는 왼쪽 발에 묶여있는 천잠사를 풀어버렸다.

너 너...”

황의소녀가 화가 나서 입을 열었지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임청우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에게서는 마치 우협 장백승을 닮은 듯한 기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돌아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삐익! !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소리가 높은가 하면 다른 한 소리는 낮아서 마치 서로 화답하는 것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황의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무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따라서 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와의 일을 통해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하나이고 외물(外物)은 수천, 수만 가지로 그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데, 외물에 따라 나를 이리저리 흔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자신을 굳게 지키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버린 심정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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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2)

 

 

쉭쉭!

임청우는 자신의 가슴에 올라앉아 얼굴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척포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으악!”

임청우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척포의 목을 움켜잡고 패대기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 배가 고파도 서로 잡아먹기 없다고 했는데...”

헌데 임청우가 바닥에 패대기쳐진 척포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치는 순간이었다.

!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며 기와가 와르르 쏟아졌다.

몸이 저절로 튀어 올라 무려 삼장이나 되는 천장에까지 솟구쳤던 것이다.

어이쿠!”

콰당탕!

임청우은 낭패한 몰골로 다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

마지막에 떨어지던 기와 한 장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간밤에 떨어진 청강검에 다쳤던 그 머리건만 기와만 산산조각 나고 머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임청우가 패대기쳤던 척포만이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화를 내며 코앞에서 쉭쉭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는 실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간밤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자기 때문에 철선동시가 죽은 것도, 우협 장백승이 왔다가 자신의 몸속에 든 색혈지독을 제거해주고 두 구의 시체를 태워버린 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마면혈도의 혈도(血刀)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氷魂鐵扇)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도 두구의 시체가 없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네가 먹었냐?”

임청우는 눈을 부라리며 척포에게 물었다.

하지만 척포는 고개를 저었다. 결코 먹지 않았다는 시늉이다.

꿈이었나 하고 생각해봐도 목이 없는 아미타여래의 불상이라든가, 반으로 잘려진 비로자나여래의 불상이 어젯밤의 일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군다나 등의 상처는 신통하게 아물었지만 한쪽에 떨어져 있는 철선동시의 왼팔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졸여졌다.

어디선가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연히 임청우의 눈이 사방을 살피게 되었다.

문득 바닥에서 누런빛이 비치는 곳이 두 군데나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밤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가 있던 곳이다.

(한데 나는 어째서 석가여래 앞에 놓여있었지? 이게 바로 부처님의 조화인가?)

임청우는 기이하게 생각하며 석가여래를 향해 합장한 후에 철선동시의 시체가 재가 되어 사라진 곳으로 갔다.

반짝이는 것은 녹아버린 누런 황금이었다.

옆에는 은도 함께 녹아있었다.

그리고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몽선도다!)

이미 몇 차례나 몽선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기에 임청우는 펼쳐보기도 전에 그것이 몽선도라고 생각했다.

쫘락!

펼쳐보니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지랑이가 아롱지는 듯한 꽃밭에서 신선으로 보이는 노인이 죽장을 짚은 채로 허리를 숙여 꽃을 구경하는 그림이다.

신선의 모습도 생생하고 꽃도 생생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신선 주위에는 아지랑이같은 것이 흐르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꿈결같은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임청우는 황금과 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즉시 마면혈도가 있던 자리에 있는 양피지도 집어들었다.

그림은 두 개의 양피지가 이어진 것이었다.

마면혈도의 양피지에는 궁장을 한 절세가인(絶世佳人)이 그려져 있는데, 한 송이 부용꽃을 들고 고개를 젖힌 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나 그 표정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지 임청우는 호호호호! 하고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함께 얻었던 몽선도를 둘로 나누어 가질 때 여색을 밝히는 마면혈도는 주저 않고 절세가인을 택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단 한번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임청우는 여인의 미모에 넋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장의 그림을 함께 생각해 볼 때 꽃을 구경하는 노인을 보고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꾸르르르!

한동안 몽선도의 감상에 빠져있던 임청우의 뱃속에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극심한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보고 있던 두 장의 양피지를 함께 겹쳤다.

헌데 임청우가 도르르 만 양피지를 막 품으로 넣으려고 할 때였다.

휘익!

갑자기 척포가 날아올랐다.

임청우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척포는 말린 양피지의 가운데에 난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신기하게도 척포의 몸은 그리 길지 않은 양피지 속에 모두 들어가 꼬리도 머리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놈이 무슨 신통력을 부린 모양이다.)

임청우는 신기해하면서도 내심 꺼림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친구라고 하기는 하지만 척포는 성질이 급하고 흉악한 데가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을 품속에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찜찜하지 않을 수 없다.

척포! 당장 나와! 나오지 않으면 불에 태워버린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척포는 임청우의 으름장에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더욱 깊숙이 움추리며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척포는 우협 장백승이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시체를 삼매진화로 태워버릴 때에도 몽선도는 벌겋게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결코 불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영물인 척포가 생각할 때 그것은 예사 보물이 아닌 것이다.

척포는 몽선도를 집으로 삼는다면 자신의 위엄이 더욱 높아질 것같은 허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허영이 아닐 수도 있지만...

탁탁탁!

임청우는 바닥에 대고 몽선도를 두들겼다.

그래도 척포는 나오지 않았다.

배는 고파 죽을 지경인데, 그리고 무엇이나 살 수 있는 금과 은이 두 무더기나 눈앞에 있는 데도 척포와 말도 안되는 다툼을 벌이노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침내 임청우가 항복하고 말았다.

좋다! 내가 졌다. 하지만 만약에 내 몸에 긁힌 자국이라도 하나 내는 날에는 앞뒤로 끈을 꽁꽁 묶어 불속에 집어넣어 버릴 테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고집 부릴 때도 마찬가지고!”

척포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알았다는 시늉을 한다.

요놈!”

임청우는 잽싸게 머리를 잡고 끌어내려고 했지만 척포는 그보다 더 빨리 쏙 들어가 버렸다.

고집불통같으니...”

임청우는 투덜거리며 몽선도를 품속에 넣고 바닥에 녹아있는 금은을 챙겼다.

그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숙님! 틀림없다니까요. 어젯밤의 그 거지새끼가 탑 위에 올라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대로 뒀다간 대안탑이 거지 소굴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그 건방진 지객승이구나!)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막아섰던 젊은 지객승의 것이었다.

(여기 올라와서 부서진 향로와 불상을 물어내라고 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금 한 무더기는 남겨두고 가야겠다.)

임청우가 서둘러 금과 은이 녹아있는 곳으로 갈 때였다.

지덕(智德)! 네 녀석은 어찌 그리 입이 험하냐? 입을 깨끗이 함도 수도라는 것을 모르느냐?”

늙구수레한 목소리가 지객승을 꾸짖는 것이 들려왔다.

대저, 험한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가장 가까운 귀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험한 말을 내뱉는 것이 버릇이 되면 마음도 자연 거칠어지느니라. 그런고로 남을 꾸짖을 때도 엄한 말로 자신도 꾸짖는 말을 써야만 하지 함부로 그 행위를 비방하거나 욕설을 해서는 결코 아니 되느니라.”

노승의 준엄한 목소리에 지객승의 음성이 쑤욱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는 품속에 넣은 금과 은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띠를 졸라맨 후 우협 장백승이 준 청강검을 챙겨들었다.

그런 후에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마면혈도의 혈도와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이 눈에 들어왔다.

(흉악한 병기(兵器)를 절에 남겨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가져가서 깊은 계곡이나 물 속에 던져버려야겠구나.)

휘익! !

임청우는 재빨리 달려가 빙혼철선을 소매 속에 넣고 혈도를 허리춤에 끼웠다.

그 직후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하며 자신의 발을 내다보았다.

틀림없이 자기의 발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빨라졌지?)

임청우가 철선과 혈도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순식간에 도달해 버렸던 것이다.

한쪽 발을 들어 발바닥을 보았지만 기름이 묻어있지도 않다.

다른 발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척포 때문에 놀랐을 때도 단번에 삼장이나 솟구쳐 머리를 천장에 박았었다.

어쩌면 간밤에 마면혈도가 일러주던 무쌍층층공의 구결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깊이 연구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육조(六祖)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저 말만 왼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지덕 너도 스스로 닦음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래에서 노승이 지객승에게 훈계하는 음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하나......!)

!

임청우는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휘이익!

귓가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발이 땅을 밟을수록 힘은 솟구치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휘이익!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치 날듯이 해서 내려갔다.

으앗! 귀신!”

지객승이 자기의 머리를 훌쩍 뛰어 넘어 내려가는 임청우를 보고 기겁해서 소리치며 엎드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수염이 허연 노승은 연신 아미타불을 중얼거리며 벽면을 더듬고 있었다. 이미 혼은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대략 일각의 시간이 지나서야 지객승은 고개를 들었다.

사숙이 염불을 외우며 벽을 더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이 빠져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눈치다.

지객승은 사숙의 소매를 끌면서 말했다.

사숙! 요괴는 이미 사라진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노납은 지금 남아있는 요괴들을 쫓았느니라.”

노승이 황망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지객승이 씨익 웃자 노승은 용기를 쥐어 짜내어 앞장 서서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이리로 와 보거라. 이제는 요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데 요괴가 분탕질을 쳤을까 싶어 그것이 걱정스럽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노승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헌데 노승을 따라 칠층에 올라온 지객승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 잘린 아미타부처님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사숙께선 벌써 득도하신 모양이구나. 올라와 보지도 않고 요괴들이 분탕질 친 것 까지 아시다니...)

지객승은 사숙의 다리가 후들거린 것은 이십장이 넘는 대안탑을 노구의 몸으로 올랐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리고 존경이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때 노승은 눈을 감은 채 아미타불을 외고 있었다.

(부처님...제발... 이 어리석은 중을 굽어 살피소서. 나이어린 사질(師姪)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만은 면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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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1)

 

 

여름의 짧은 밤이건만,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 지나가고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뎅뎅뎅!

자은사의 범종이 울리면서 승려들이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고 예불소리가 멀리멀리 퍼져갔다.

대안탑은 자은사를 굽어보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뚝 서있다.

헌데 대안탑 입구 근처의 대리석 바닥에는 심하게 우그러진 호리병이 뒹굴고 있다. 간밤에 칠층에서 떨어진 임청우의 호리병이었다.

휘이익!

문득 대안탑 앞으로 마치 신선이 하강하는 듯이 허공을 밟고 천천히 내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육척에 달하는 거구에 소매 자락이 넓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일신에서 풍기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기도는 마치 천신을 보는 듯했다.

각진 얼굴의 중심부에 자리한 각진 눈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하고 천천히 내려서는 전신에서 풍기는 가공할 기도는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바로 일왕일협삼괴칠절 중에서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천하의 기인 우협 장백승이었다.

우협 장백승은 어제 낮에 대안탑에 왔었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었다.

그러나 서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찾아본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대안탑이었다.

서안에서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숨을 곳이라고는 대안탑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대안탑을 찾아온 것이다.

휘릭!

우협 장백승은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대안탑 안으로 귀신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휘이잉!

잠시 후 대안탑 칠층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장백승이 올라왔다.

번쩍!

동시에 한줄기 홍광이 빛살같은 기세로 장백승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낱 미물이...”

장백승의 눈이 횃불같은 광채를 내쏘았다.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홍광이 기겁하며 뚝 떨어져 내리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백승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실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상들이 처참히 훼손되고 키 큰 향로가 두 쪽이 나서 뒹굴고 있다.

그 난장판 가운데 두 구의 시체와 한명의 소년이 한 덩이가 되어 누워 있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한 참상이건만 장백승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빛이 없다. 마치 원래부터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예상대로 여기에 있었군!”

장백승은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슬쩍 뻗었다.

!

고색창연한 청강(靑鋼) 보검이 한쪽 구석으로부터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뚜벅뚜벅!

장백승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가 임청우를 안아 올렸다.

쉬익!

그때 다시 홍광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임청우가 누워있던 바로 밑에서였다.

번쩍!

하지만 그 홍광은 이번에도 장백승의 눈빛을 받고는 찔끔하며 도망쳐버렸다.

쉬쉬쉬...

그래도 홍광은 장백승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홍광은 물론 간밤에 대안탑 밖으로 떨어졌던 척포였다.

천하 독물들의 제왕이며 뱀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금관혈린사 척포였지만 우협 장백승의 눈빛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장백승은 척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청우를 석가여래의 무릎 앞 단상에 내려놓았다.

인연이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억지로 맺을 수는 더욱 없는 일... 네 몸 속의 독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다음의 인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장백승은 사방이 웅웅 울리는 그 특유의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바닥에 임청우의 왼쪽가슴이 완전히 덮여버렸다.

그 사이에도 척포는 계속 장백승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는 마면혈도의 시체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철선동시 사이에서 장백승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백승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척포는 장백승의 등을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장백승의 몸에서 뿜어지는 장엄한 기도는 척포를 자꾸 주눅 들게 만든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독이 오를 데로 오른 척포는 쉬익! 하고 푸른 독기를 뿜었다.

화악!

푸르스름한 독무(毒霧가 피어오르며 장백승의 등 뒤로 몰려갔다.

푸스스!

그러나 장백승의 몸 두자 밖에 이른 독무는 태양에 녹는 안개처럼 사르르 사그라져버렸다.

척포가 독무를 내뿜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척포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사삭!

그놈은 빠르게 꽁무니를 흔들며 목이 잘려진 아미타여래가 있는 단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척포가 생각할 때 우협 장백승은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팔백 년 넘게 산 척포는 용이 되기 위해 천하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도(修道)해왔었다.

각 명산에 사는 갖가지 이물(異物) 괴물(怪物)을 만나보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 척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물론 척포에게도 두려운 대상은 있었다.

농산에서 수도할 때 만난 어떤 인간은 반 쯤 용이 된 척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인간 외에 다른 인간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던 척포다.

헌데 오늘 또 한명 척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간밤에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시 색혈지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터득한 덕분에 그의 몸속에 있던 색혈지독과 빙골산의 독기는 일제히 마면혈도의 몸으로 옮겨가 버렸었다.

임청우는 그후 무쌍층층공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도 흡수했었다.

이에 철선동시는 최후의 발악으로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에 주입했었다.

무쌍층층공과 용조수 공력은 융화되면서 용조층층공(龍爪層層功)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공력이 되었다.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한 덕분에 그 용조층층공이 단번에 육층통(六層通)에 이르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색혈지독에 의해 피가 굳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임청우의 몸은 충만한 공력에도 불구하고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의 상태를 살펴본 우협 장백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하니 저 두 놈이 죽어가면서 이 아이에게 공력을 주입해 주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돌아 본 후에 다시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런 공력은 저 두 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헤어진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공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백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자 머리 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임청우의 신발을 벗겨 낸 후 발가락을 툭 쳤다.

그러자 발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검붉은 피가 붕어 알처럼 송골송골 올라왔다. 도저히 피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진득한 농도다.

색혈지독이 임청우의 몸속 피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번쩍!

다음 순간 장백승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백광이 일어났다.

화악!

그 빛은 이내 임청우의 몸으로도 퍼져나갔다.

그러자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얼음이 녹듯이 축 쳐졌다.

츠츠츠!

이어 임청우의 칠공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장백승의 몸에서 일어난 강렬한 기운은 임청우의 몸에서 독연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백승은 극렬한 양강기공으로 색혈지독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다.

마침내 임청우의 피부가 원래의 색을 회복했다.

장백승은 임청우의 가슴에서 손을 떼면서 임청우의 얼굴을 슬쩍 쓰다듬었다.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장백승은 임청우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었다. 임청우의 얼굴에 옅긴 해도 검댕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

장백승의 손이 스쳐지나가면서 검댕이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이 일어나 머리 뒤로 떨어졌다.

짙은 검댕이 제거되자 관옥같이 희고도 붉으스레한 동안이 드러났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오관은 반듯하고 온화하면서도 곧은 심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년의 얼굴이다.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장백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뚫어지게 임청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장백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쪽인가? 조천영(趙千英)인가 아니면 유소기(劉蘇起)인가? 그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그 두 사람을 닮았으니... 게다가 이 아이의 근골은 노부가 세 번 째로 보는 놀라운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그 두 사람 중의 누군가의 자식이 틀림없을 듯한데...”

조천영은 일왕(一王)인 금포염왕의 이름이다.

장백승은 일찌기 금포염왕을 만났을 때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그리고 칠절의 우두머리인 검주 유소기를 보았을 때 훗날 언젠가는 금포염왕에 필적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놀라워했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두 사람을 모두 닮았으면서도 그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근골을 가진 임청우를 만난 것이다.

임청우의 근골의 뛰어남은 그가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알아본 바이지만 임청우의 얼굴마저 금포염왕과 검주 유소기를 닮았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장백승은 여기에는 무슨 알지 못할 어떤 연유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임청우의 아버지가 될 만한 자로 조천영과 유소기 외에는 더 꼽을 자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장백승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청강검을 임청우의 가슴에 놓아주었다.

네가 깨어나면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싶지만... 너를 구해준 것이 내 제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이만 떠난다.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장백승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고 있다.

문득 엇갈린 지붕으로 빠져나가려던 장백승이 손을 흔들었다.

휘익!

장백승의 소매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더니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향해 뻗어갔다.

장백승의 몸은 지붕 밖의 하늘로 사라져 버렸고 그가 떨친 뜨거운 경풍은 두 구의 시체에 이르렀다.

사르르르---

그러자 놀랍게도 두 마귀의 시체는 한 무더기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푸스스스!

시체들은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더니 마침내 재조차 남기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우협 장백승!

백전백패(百戰百敗), 만전만패(萬戰萬敗)의 대영웅 우협 장백승,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지만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그의 측량할 수 없는 가공할 무공의 한 측면이었다.

헌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신이 재가 되어 흩어진 자리에는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무쇠 토막이 하나씩 있었다.

!

두르고 있던 띠가 터지면서 두 개의 무쇠 토막은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펼쳐졌다.

환하게 펼쳐진 그것은 달아오른 얇은 철판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 철판 위에는 백색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있었다.

그 글자들은 철판이 식어감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식어버린 철판은 다시 도르르 말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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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3)

 

 

<이놈아, 잘 듣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마면혈도가 처량한 음성으로 전음입밀을 보낸다.

 

<성공한다면 살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우리 둘은 저 시체 놈의 밥이 될 것이다. 저 얼어 죽은 시체 놈은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걸 아주 좋아하니 죽어도 우린 도살 될 것이다.>

 

순간 임청우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잡아먹힌다는 것은 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전율이다.

 

<무쌍층층공은 정신을 온화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눈 꼬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밀실에서 문을 잠그고 편안하게 자리를 편 다음,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베개 높이는 두치 오푼으로 하여 반듯이 누워 눈을 막고 기를 가슴속에 넣어 닫아 버리고, 자그마한 털을 코위에 올려놓아도 떨어져 내리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삼백 호흡을 거듭하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없게 한다.>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도 나는 정신이 온화하다. 하지만 뒤의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득이 있겠는가? 당신이나 나나 죽게 될 것은 정한 이치 같은데...)

임청우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마면혈도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계속 들려준다.

 

<아침 저녁은 음양이 바뀌는 시간이니, 아침의 오경초(五更初)에 난기(暖氣)가 이르게 되고, 눈이 떠지는 것은 상생(相生)의 기가 오르는 것이며, 이름하여 양기가 동하고 음기가 소멸한다고 한다. 저녁의 일몰 후에는 냉기가 심하고 추위가 몸에 스며, 침실로 들어가 앉아, 잠을 자는 것을 하생의 기가 이른다고 하여 양기가 소멸하고 음기가 동한다고 한다. 오경초에는 난기가 이르고 해가 진 뒤로는 냉기가 이른다. 음양의 기는...>

 

마면혈도의 이마에 땀이 베인다.

그러나 그 땀은 금방 얼어붙어 얼음이 되어 버린다.

마면혈도의 음성은 가늘어지고 점점 떨려 발음이 온전하지 않다.

임청우는 차츰 마면혈도의 말에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면혈도가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음성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게다가 마면혈도의 무쌍층층공은 어떤 면에서는 불심연화지의 구결과도 비슷한 곳이 있기도 했다.

철선동시는 막바지 공격에 힘을 쏟고 있다. 밀랍같이 창백하던 그자의 얼굴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돋아나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되었다.

죽이려는 자는 죽이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죽어가는 자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하며 모든 힘을 그쪽으로 쏟고 있다.

마면혈도는 오직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운용하여 철선동시의 공력을 흡수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철선동시의 공력은 마면혈도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따라서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상, 마면혈도도 임청우의 생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단지 임청우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진기를 운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무쌍층층공을 최소한 사성(四成)까지 성취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임청우의 공력으로 흡수함으로써...

원래 무쌍층층공은 무림의 절정신공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면혈도는 태산(泰山)의 한 석실에서 우연히 그 비급을 얻어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무공을 따라가지 못해 칠성(七成)에 달한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만약에 팔성(八成)이 되기만 해도 그의 무공은 칠성일 때의 두 배가 되고, 구성(九成)이 되면 칠성의 네 배가 되는 것이니 무쌍층층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림사에 있어서 무쌍층층공을 팔성이상으로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무쌍층층공의 존재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얻은 사람이 무쌍층층공의 매력에 푹 빠진 때문이다.

무리하게 일성이라도 더 익히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십이성 다 익히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다가 늙어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면혈도가 무쌍층층공을 무림으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만약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익히기만 한다면 이미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철선동시의 공력은 꼼짝없이 임청우의 것으로 융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제발...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한 마디라도 알아듣고 진기를 움직여 봐라.)

마면혈도는 구결을 외우면서 속으로는 애원하고 있었다.

 

<...음양의 기는 이와 같이 번갈아 가며 출입을 걷듭하여 천지, 일월, 산천, 해하, 인축, 초목 등 일체 만물은 그 체내에서 대사를 거듭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그 일진일퇴함이 꼭 밤낮의 교대나 해수의 간만과 흡사하다. 이것이 천지순환의 도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며 임청우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이 괴물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성인(聖人)들의 말씀과 진배가 없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마면혈도가 읊는 구결에 심취되어 갔다.

무쌍층층공의 구결들은 그가 읽은 다른 책들, 그리고 불심연화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같으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어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깊이 심취한 만큼 마면혈도가 외는 구결은 한자도 빠짐없이 임청우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재워지고 있었다.

임청우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데 마면혈도의 음성은 급격히 가늘어지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졌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구결에 따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모아주기 만을 바라며 스스로 생각해도 그다지 가망 없는 일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미 그자의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공력으로 구사하는 전음입밀에 이어 배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을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펼치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임청우의 몸에 쌓였던 서리는 거의 사라지고 단지 얼굴과 피부만이 거무스름할 뿐인데...

 

<아침마다 오방(午方:남방(南方)을 말함)을 향하고, 두손을 무릎위에 놓고, 천천히 무릎 관절을 누르며, 입으로부터 탁기(濁氣)를 내뱉고... 현목(玄牧)의 문(), 천지(天地)의 근()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득 여기까지 들었을 때 임청우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속을 흘러 다니던 기이한 힘이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헌데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듣고 있는 동안 그 힘들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치 손을 갖다 대면 만져질 것같은 실체로 느껴졌다.

기분뿐이겠지만 자신의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것같기도 하다.

임청우는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느끼며 경이에 눈을 떴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웠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철선동시의 거친 공력은 자신의 몸을 거쳐서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의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듯이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철선동시의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아무 저항없이 통과하여 마면혈도의 몸에 그대로 이르렀다.

동시에 임청우의 몸속에 남아있던 빙골산의 독기와 색혈지독도 그 힘을 따라서 마면혈도의 몸으로 깡그리 옮겨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 임청우의 몸이 빈 대롱이 되어 들어온 물을 모두 다른 쪽 끝을 통해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청우의 내관(內觀:속을 봄)이 시작되면서 막혀있던 빈 대롱이 뻥 뚫리며 거침없이 물이 흘러가는 것과 똑 같았다.

 

<...이리하여 태화(太和)의 기가 기해(氣海)에 이르고 자연히 용천에 이르면 온몸이 흔들리고 두 다리도 오그라져 굽게 되고 자리에 앉으면 마디마디가 우두둑하고 소리가 나게 된다. 이것을 일층통(一層通)이라고 한다. 일층통에서 이층통으로 계속 연성하여 삼층통에서 오층통에 이르게 되면...,십이층통에 이르게 되면 마음 속에 허무함을 유지하고 유연(悠然)한 기도 갖추어져서 덕으로는 대자연과 합하고 도로는 천지와 융화되리니...>

 

마면혈도의 음성은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명도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질긴 말대가리... 이제야 겨우 죽었구나!)

마면혈도가 죽은 것을 확인한 철선동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몸 속의 독기를 임청우의 몸으로 옮기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임청우는 마면혈도가 전했던 구결을 다시 한번 천천히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속에 있던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이 철선동시의 통제를 벗어나 임청우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팔기경(八氣經)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수만 마리의 벌들이 여왕벌의 뒤를 쫓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

철선동시는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경략을 돌면서 그의 공력으로 융화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십이정경(十二正經)이란 수태음 폐경, 수양명 대장경, 족양명 위경, 족태음 비경, 수소음 심경, 수태양 소장경, 족태양 방광경, 족소음 신경, 수궐음 심포경, 수소양 삼초경, 족소양 담경, 족궐음 간경의 열 두가지 경략을 말하고,

팔기경(八奇經), 또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란 양교맥, 음교맥, 양유맥, 음유맥, 대맥, 충맥, 독맥, 임맥의 여덟 경략을 말한다.

순식간에 화선지에 엎질러진 먹물이 번져가는 기세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모든 경맥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리자 철선동시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지 못했다.

모든 공력으로 마면혈도를 공격했던 철선동시다.

헌데 그 공력들이 회수되지 못하고 그만 임청우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

마침내 모든 공력이 소진되어 버리자 철선동시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죽고 말았다.

임청우는 자신의 경맥을 따라서 도는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익히면서 내공이란 어떤 것인 가를 어렴풋이 알았던 것이다.

더우기 그의 몸속을 분탕질 치면서 돌아다니던 용조수의 공력이니 더욱 낯설지 않았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해 용조수 공력을 거침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버렸다.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용조수의 공력은 과연 대단한 것으로 임청우는 단숨에 무쌍층층공을 육층통(六層通)까지 익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공력은 무쌍층층공으로 운용되되, 그 속성은 용조수의 공력인지라 세상에 전혀 없는 엉뚱하고도 기이한 것이 되어버렸다.

뚜두둑! 뚜둑!

임청우의 몸에서 끊임없이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이 오그라들었다가 펴지는가 하면 몸이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 하나하나가 무쌍층층공의 일성 일성 터득해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면혈도가 몸을 자벌레처럼 구부릴 수 있었던 것도 무쌍층층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느 틈엔가 임청우의 등에 박혀있던 철선동시의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던 임청우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다가 잠잠해졌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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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2)

 

 

(우라질...)

철선동시는 생사를 도외시한 마면혈도의 공격에 진땀을 흘렸다.

독기가 임청우의 몸속으로 퍼져나가면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었는지라 공력의 운행이 전 같을 수가 없다.

철선동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말대가리는 같이 죽기만 바랄 뿐이다. 이대로 공력을 겨룬다면 결국엔 둘 다, 아니 이 쥐새끼는 원래 죽을 놈이었으니 셋 다 죽게 된다.)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한 철선동시는 독심을 품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저 말대가리를 먼저 죽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헛!)

마면혈도는 갑자기 철선동시의 공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가 그랬던 것처럼 독기를 억누르고 있던 공력마저 풀어서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공력은 철선동시가 마면혈도보다 심후하다.

그 때문에 임청우의 모든 경맥에서 마면혈도의 공력이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 속에서는 두 절정고수의 공력이 충돌하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장은 공력에 충격을 받아 망가지기 직전이 되었으며 혈관은 팽창하고 심장은 박동을 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차디찬 서리로 뒤덮여 하얗게 변해있다.

그 서리 아래의 피부는 독기로 인해 시꺼멓게 변색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철선동시가 전력으로 공격을 하여 마면혈도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임청우의 몸을 덮고 있던 서리는 점차 줄어들고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두터운 서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철선동시가 심후한 공력으로 공격하면서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빙골산의 독기마저 마면혈도의 몸에 밀어 넣은 때문이다.

마면혈도는 이미 빙골산의 독기에 중독당한 상태였다.

헌데 더 많은 빙골산의 침습을 받게 되자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면서 공력이 점점 위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임청우의 몸속에서 벌어지던 공력의 충돌이 잦아들고 빙골산의 독기도 감퇴했다.

빙골산이 빠져나가면서 한기가 수그러들자 임청우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으...)

정신을 차렸지만 임청우는 신음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지독한 한기 때문에 입과 혀가 얼어붙은 때문이다.

정신이 되돌아오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온몸이 쇠망치에 수없이 맞아 짓이겨진 것같다.

뼈란 뼈는 다 부러지고 근육은 갈가리 찢어진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그 때문에 몸뚱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통제할 수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듯 속이 니글거리기까지 한다.

헌데 가까스로 힘을 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리에 덮인 이마에서 송알송알 땀을 쏟고 있는 마면혈도와 눈길이 부딪혔다.

(허억!)

흉측하면서도 기괴한 마면혈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접한 임청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반면 마면혈도는 뛸 듯이 기뻤다.

할 수만 있다면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얼어 죽은 시체 놈! 내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미련한 그답지 않게 머릿속으로 절묘한 계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몸에서 즉시 자신의 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우르르!

그러자 철선동시의 공력이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 마면혈도의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반격하지 않고 굳게 방비만 하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기이한 힘을 느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울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워보았지만 몸속을 누비는 기이한 힘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 힘은 살아있는 뱀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임청우의 몸속을 제멋대로 헤집고 다닌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이다.

임청우는 헛된 노력은 포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전히 혼미하고 멍한 정신을 온전히 하는 게 그것이었다.

임청우는 북두무랑에서 보았던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끝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하며 자기 몸속에 깃든 북두칠성을 확인했다.

그러자 온몸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이 점차 잦아들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귓속으로 모기가 앵앵거리는 듯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마면혈도가 눈을 껌뻑한다.

임청우는 그자의 얼굴이 정말 말 귀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입과 코 부분은 영락없이 말이다.

그런 입에서 인간의 말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른하고 권태롭게까지 느껴지는 마음이 된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말을 들은 척 만척했다.

 

<네 손목을 잡고 있는 얼어 죽은 시체같은 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마면혈도의 가느다란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와하하하하!)

임청우는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 했다. 마면혈도의 잔학성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바 있는 그였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농산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 딴에는 임청우를 설득해보려고 철선동시의 험담을 한 것이다.

그같은 수작은 임청우에게 인간이 얼마나 뻔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누가 누굴 보고 나쁜 놈이라는 건가?)

임청우의 혀끝에서 마면혈도의 양심을 찌르기 위한 말이 맴돈다.

그러다가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자의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놀랐다.

(이 말대가리 귀신은 입이 두갠가?)

마면혈도가 진짜 말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 소름이 끼친다.

불심연화지를 깨우치기 전까지는 무공을 배워본 적이 없는 임청우다.

당연히 공력을 써서 특정 대상에게만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리 없다.

임청우가 놀라고 있을 때 마면혈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만약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눈을 한번만 깜박여라. 그럼 노부는 죽어도 너는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임청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몇 권의 의서를 읽어보았기에 자기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두 가지의 치명적인 극독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으니 해독하기 전에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

그리고 마면혈도가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지는 이미 경험한 임청우였다.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겨온 마면혈도가 굳이 임청우 자신을 살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시체같은 철선동시도 후회하느니 어쩌니 하더니 지금은 자신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 있다.

임청우로서는 마면혈도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말해도 믿지 못할 터였다.

만에 하나 마면혈도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손목을 잡고 있는 철선동시가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믿을 말을 믿지.)

임청우는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마면혈도를 흘겨보았다.

말을 닮은 그자의 얼굴은 다시 봐도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헌데 마면혈도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임청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자의 눈에는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설마 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게 진심인 건가?)

임청우는 흠칫했다.

(속은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마면혈도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되지 않을 소리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도 해서 될 것과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저 흉악한 마귀의 흉악한 수법을 배워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요사스런 수법을 익혀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건 몸을 해치게 마련인데...)

임청우의 단호한 표정을 본 마면혈도는 당황했다.

(쥐새끼 정도로 생각했던 놈이 뼈마디가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군. 구슬리자면 꽤 힘이 들것 같군.)

그 사이에 철선동시의 공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어 심장이 터질 것같은 압박이 전해진다.

잠시 전력을 다해 방어한 후 마면혈도는 간절한 어조로 다시 임청우에게 말했다.

 

<노부의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은 대성하기만 한다면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절세의 신공이다. 노부는 비록 칠성(七成)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강호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되었다.>

 

마면혈도의 간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요지부동,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우협 장백승의 모습이 마치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박힌 임청우다.

무쌍층층공 어쩌고 아무리 떠든다 하더라도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마면혈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중한 공력을 허비하며 억지로 말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우르르르...

철선동시는 마면혈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임청우의 몸으로 색혈지독을 옮기기 전에 공력이 소진되어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면혈도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생각에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철선동시의 맹공격에 궁지에 몰린 마면혈도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임청우가 장백승에게 들은 것 외에는 무공이니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벽창호라는 사실도 모른 채 안간힘을 다해 말을 이어갔다.

 

<무쌍층층공은 일성(一成)을 익히게 되면 맨손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있고, 이성(二成)을 익히면 일성의 두 배가 되며, 삼성(三成)은 이성의 두 배가 되고, 사성(四成)은 삼성의 두 배가 된다. 자질과 인연이 닿아서 십이성(十二成)을 대성하게 된다면 무림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래도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어조가 사뭇 애원조다.

그래도 마음이 돌덩이 같은 임청우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임청우는 목숨마저 체념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을 떨게 만들던 한기도 이미 많이 가셨다.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서리가 덮여 얼음이 되었다.

임청우의 몸속에서 빙골산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선동시의 공력이 몸속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한기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다만 몸을 자꾸 무겁게 하는 그 무엇이 약간 불편할 따름이다. 그것도 실상은 철선동시가 그의 몸 안으로 불어넣은 색혈지독 때문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는 자신이 그처럼 애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임청우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다.

(이 어린놈은 바보 멍청이인가? 죽을 사람이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는가? )

철선동시의 공력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데 겨우 찾아냈다 싶은 마지막 수법은 사용도 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마면혈도는 억울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속으로 자기는 재수가 정말 없는 놈이라 생각하며 전음입밀로 말한다.

 

<좋다, 이놈아! 내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네놈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말대로 해야 할 것이다.>

 

말투가 거칠어지고 떨려나온다.

빙골산의 독기를 방비하지 않은 탓에 이미 한 치 두께로 얼어붙은 서리가 마면혈도의 몸을 덮고 있다.

그러나 마면혈도가 뭐라 하던 간에 임청우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잠잠히 있었다.

철선동시의 심후한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경유한 후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비유하자면 미친 들소 떼가 비좁은 골목길을 치달리며 닥치는 대로 짓밟고 뭉개버리는 형국이었다.

우둑! 우두둑!

손목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왔다가 발목으로 빠져나가는 철선동시의 공력이 경맥과 근육을 제멋대로 뒤틀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그리 큰 고통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망망하기 이를 데 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한 기억이 정신을 육신에서 분리해주고 있는 덕분이다.

임청우는 어느덧 자신의 육신이 두 악귀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남의 일처럼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몸을 잊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상태에 은연중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두 괴인은 임청우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더구나 알 생각도 없다.

단지 서로가 임청우를 이용하여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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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1)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겠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났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 된 임청우는 필사적으로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어갔다. 조금이라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임청우가 힘겹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에 박혀있는 철선동시의 팔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물위에 떠있는 조각배의 돛대처럼...

(불심연화지라는 무공이 이번에도 나를 살려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떠올렸다.

불심연화지를 수련한 덕분에 끔찍한 고열을 극복했었다.

어쩌면 불심연화지가 이 지독한 냉기에서도 자신을 살려줄지 모르는 일이다.

“네놈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린 금포염왕을 이기고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얼어 죽은 네놈의 욕심때문이다.”

뒤쪽에서 마면혈도가 분통이 터져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도 내심 후회막급이었다.

(기습으로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내 무공을 너무 과신했다. 저놈이 그런 괴상한 수법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손을 썼더라면 마면혈도가 비장의 수법을 숨기고 있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었을 철선동시였다.

마면혈도는 어쩌면 철선동시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척하여 방심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지만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이제는 일어나 땅조차 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제기랄... 제기랄...)

철선동시는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의 품속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반부의 몽선도가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마면혈도의 품에 나머지 반부의 몽선도가 있다.

그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무림에 전해지고 있었다.

평생 억눌려 지내왔던 금포염왕이란 절망적인 존재!

같은 삼괴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을 종 부리듯 하던 무비옹의 횡포!

그들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는 최후,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제 몽선도의 비밀을 풀어서 무공을 연마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작은 실수 하나로 말미암아 고금제일의 고수가 되기는커녕 곧 죽어야만 한다.

그 사실에 철선동시는 미칠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철선동시의 머릿속으로 번갯불 같은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막힌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이다.

(저 말대가리의 색혈지독(索血之毒)은 천년설삼(千年雪蔘)같은 영약이 없으면 해독할 수 없다. 그렇지만 꼭 해독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철선동시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내게는 정종 무공인 용조수 공력이 있고, 이 공력을 이용한다면 다른 놈 몸에 내 몸 속의 독을 옮겨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아직 화경(化境)에 달하지 못해 직접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머리가 나쁘거나 자질이 둔한 자가 절정의 무공을 깨우쳐 익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절정의 무공을 소유한 자는 그 외모가 어떻든 간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근골과 머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철선동시는 물론이고 비록 머리회전이 조금 늦기는 하지만 마면혈도 역시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다.

죽음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 철선동시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한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빙골산에 중독된 쥐새끼를 돌아보았다.

등에 자신의 팔이 박혀있는 임청우가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휘릭! 털썩!

“흐흐흐... 네놈은 이 나으리의 빙골산에 중독되었으니 곧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을 것이다.”

철선동시는 몸을 나무토막처럼 굴려서 임청우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임청우는 몸속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는 냉기를 몰아내보려고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겨우 입문한 불심연화지의 구결로 빙골산이란 극독을 몰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갈수록 의식이 희미해져 오는 중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주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갈까마귀가 우짖는 것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가만 둬도 죽을 지경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건가?)

불끈 오기가 치밀면서 화가 났다.

휘릭! 털썩!

철선동시는 다시 몇 바퀴 굴러서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청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떤 방법이오?”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저 마두가 죽을 때가 되자 참회를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다.

사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넙죽 대답하고만 자신이 멍청이같다.

스스스!

자신에게 화가 나 입을 벌리는데 턱이 달달 떨리고 입에서 차가운 흰 김이 나온다. 이미 빙골산의 독기가 뼛속 깊이 스며든 증거다.

철선동시는 임청우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색혈지독을 모두 옮겨버리기 전에 임청우가 죽어버린다면 고심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말짱 도로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철선동시는 듣기 싫은 음성이지만 최대한 목청을 가다듬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까지 섞어서 임청우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이 나으리는 지금 너무도 고통스럽다. 으으... 저 말대가리가 칼에다 지독한 극독을 묻혀놓았기 때문에 나도 곧 죽게 될 것이다.”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소?”

임청우가 벌벌 떨면서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큭큭큭...”

철선동시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마면혈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시시!

웃는 마면혈도의 입에서 피가 쿨럭쿨럭 쏟아지다가 이내 동결되어 버린다.

그자의 얼굴은 마치 철선동시의 다치기 전의 모습처럼 하얗게 변해있다. 서리가 얼굴을 뒤덮은 때문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임청우가 쉽게 속지 않자 철선동시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애처로운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네 녀석의 중독을 풀어주고 싶다.”

말하는 철선동시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몸도 급격히 굳어지고 있다.

색혈지독이 철선동시가 내공으로 형성한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의... 의심하지... 마라. 전... 적으로... 너를 도와주려는 거뿐이다.”

안면의 근육이 굳어지며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소리가 웅얼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의 말이 어눌해졌을 뿐 아니라 임청우 자신도 지독한 한기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유달리 강인한 몸을 타고 난 덕분에 아직까지는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고 평소의 습관과 버릇에 따라 반사적인 행동과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와 달리 임청우는 독에 저항할 수 있는 공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은 점차 굳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청우의 그런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철선동시는 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임청우의 손이나 발목,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해독약은... 내 옷... 속에 있다. 나는... 너무 고통... 스럽다. 내 옷에서... 해독약을... 꺼내는 즉시 내... 겨드랑이의... 소요혈(笑腰穴)을 눌러... 주기 바란다. 죽는... 것만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

임청우가 속아 넘어가서 겨드랑이를 누르려고 하면 철선동시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내공으로 빙골산의 독기를 억제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선동시의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숨에 깨달았다.

“교활한 놈!”

팟!

마면혈도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뒤집어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가 확 튕겨 올렸다.

“네놈 뜻대로는 안된다!”

털썩! 콱!

몸을 굽혔다가 펴는 반동으로 튀어 올랐던 마면혈도는 임청우 곁으로 떨어지며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철선동시에 의해 이용당하기 전에 먼저 임청우를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콱!

그러나 철선동시도 마면혈도와 거의 같은 순간에 임청우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빠지직! 우두둑!

두 마두는 임청우의 발목과 손목을 잡자마자 전력을 기울여 공력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지독한 한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임청우였다.

그런 그의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체는 끓는 기름에 담가진 것 같고 상체는 얼음구덩이에 던져진 것같다.

산 채로 몸이 둘로 찢어지는 것같기도 하다.

“끄으윽...”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 끔찍한 고통에 임청우는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다.

고통이 너무도 엄청난 탓에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두칠성의 힘을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용하지 않은 후로 수백 년이 지난 대안탑 칠층의 먼지 쌓인 바닥에 조각 편(片)자 비슷한 형태로 누운 세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마면혈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빙골산은 원래 해약(解藥)이 없는 지독한 독이다.

철선동시가 마치 강시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빙골산을 오랫동안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선동시가 빙골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독되지 않은 것은 어떤 특별한 묘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몸속에 빙골산의 독기가 서서히 쌓이면서 내성(耐性)이 생긴 것뿐이다.

철선동시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면혈도로서는 내공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마면혈도는 늘 내뱉던 말처럼 얼어 죽은 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억울한 노릇이다.

나쁜 짓으로 말하자면 자기 못지않게 철선동시도 했다.

더구나 나쁜 짓으로나 무공으로나 전혀 미칠 수 없는 대형(大兄) 무비옹도 있다.

무비옹은 몰라도 최소한 철선동시와는 함께 죽어야 한다.

헌데 철선동시는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을 빌어서 배출하려고 한다.

철선동시와 함께 죽자면 임청우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임청우만 죽이면 철선동시도 따라 죽게 된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빙골산에 저항하던 내공마저 풀어버렸다.

우르르!

대신 임청우를 죽이기 위해 임청우의 발목에 자리한 태계혈(太溪)에 모든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심맥을 모두 끊어 주겠다 쥐새끼야!)

어차피 죽을 목숨, 마면혈도는 물귀신처럼 한명이라도 더 물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자 철선동시도 다급해졌다.

무공에 있어서 그는 마면혈도보다 약간 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임청우가 마면혈도의 손에 죽지 않도록 보호해한다.

(저놈의 말 대가리가...)

철선동시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임청우의 몸속으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을 주입했다.

우르르!

손목에 있는 혈도인 맥문(脈門)을 통해서 철선동시의 대해와도 같은 공력이 주입되며 임청우의 내장과 심맥을 두텁게 감쌌다.

마면혈도가 주입한 내공과 철선동시의 내공이 임청우의 몸속에서 호각으로 대치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 마면혈도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임청우의 몸에 쏟아 넣었다.

덕분에 철선동시의 우세한 내공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철선동시는 공력을 임청우의 몸속에 쏟아 넣으면서 색혈지독도 함께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츠츠츠!

그러자 임청우의 하얗게 서리로 뒤덮힌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갔다.

철선동시는 흠칫하며 독기를 줄이고 공력을 더 많이 주입하여 임청우의 심맥과 오장을 보호했다.

임청우는 빙골산에 중독된 후라 색혈지독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죽이려고 독을 밀어 넣으면서 죽지 않게 공력으로 보호해주어야 하다니...)

철선동시는 기가 막힌 상황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임청우가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철선동시 자신의 기발한 계획도 말짱 헛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머리가 쭈뼜해졌다.

그와 함께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철선동시가 보인 찰나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면혈도가 직접 공력을 움직여 공격해온 것이다.

우르르!

마면혈도의 공력이 맹렬히 밀고 올라왔다.

철선동시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고서야 겨우 마면혈도의 공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타고서 말이 달리듯이 급박하게 쫓고 쫓기고, 밀고 밀리면서 치닫는 데도 깨어날 줄 몰랐다.

자신의 몸이 두 사람의 전쟁터가 되리라곤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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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2)

 

 

임청우는 윗부분이 반쯤 날아가 버린 불심연화로 속에 고동의 알맹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수평혈도참에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갈 뻔 했다.

생각하면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척포도 크게 놀랐는지 다시 호리병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는다.

(칼이 수천 근도 넘을 구리 향로를 소리 없이 베어버리다니... 척포 이놈은 저 무시무시한 칼날아래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혈도의 가공할 위력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둘러 붉은 빛줄기를 철선동시에게 퍼붓는 것이 보였다.

우우웅!

마치 붉은 피의 파도가 몰려가는 듯하다.

마면혈도의 끔찍스런 용모와 함께 어우러진 그 광경은 마치 무서운 그림책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정말 사부님이 이기지 못한다고 할 만하구나. 세상에 저보다 더 무서운 무공이 있을 수 있을까?)

마면혈도의 도법을 본 임청우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견문이 짧은 임청우로써는 처음 보는 가공한 장면이었다.

카카캉!

하지만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괴이한 강기의 막을 형성하여 혈도의 도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화악! 파지직!

두 가지 힘이 부딪히며 예리한 경풍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삭!

마면혈도의 발에 밟힌 아미타여래의 머리가 과자부스러기처럼 가루가 되어버렸다.

“끼요오오!”

마면혈도는 괴성을 지르며 더욱 세차게 혈도를 휘둘렀다.

“몽선도를 내놔라!”

철선동시 역시 혈도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며 갈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카카캉!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마면혈도의 혈도를 튕겨내었다.

촤라락!

뒤이어 그자의 빙혼철선이 접혔다가 확 펴지면서 마치 칼처럼 마면혈도의 목을 베어갔다.

마면혈도는 혈도의 끝부분으로는 용조수의 강기를 막고, 손잡이 부분으로는 빙혼철선을 가로막았다.

치이익! 빠카카캉!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 불똥이 튀었다.

휘익!

철선동시는 껑충껑충 뛰면서 바람처럼 재빠르게 물러섰다. 그의 모습은 이야기로나 듣던 강시와 다름이 없다.

두 괴물의 움직임은 귀신이 놀랄 정도로 빨랐다.

마면혈도의 혈도에서 뿌려지는 붉은 빛과 함께 용조수를 펼치는 철선동시의 손톱에서도 푸른빛이 귀화처럼 튀어나와 사방으로 치달린다.

철선동시의 그 기다란 손톱에는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강시가 말대가리에게 이기겠구나.)

임청우는 코 윗부분만 빼꼼히 불심연화로 밖으로 내민 채 구경하며 생각했다.

(발목이 잘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빼앗으려는 걸 보면 몽선도라는 게 정말 중요한 물건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 철선동시는 농산에서도 몽선도를 탐내는 듯한 말을 했었다.

그 사이에도 참혹한 싸움은 이어졌다.

철선동시의 발목은 지혈을 하지 않아서 피가 줄줄 흘러 대안탑 칠층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깨의 살이 움푹 뜯겨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난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용조수와 빙혼철선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의 생각처럼 두 괴물 간의 우열은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가 내뿜는 혈광은 점점 위축되는 반면 철선동시의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은 접혔다 펼쳐졌다를 마음대로 하면서 마면혈도의 요혈을 노리고, 용조수는 가공할 기세로 상대를 핍박한다.

카카캉!

마면혈도는 철선동시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진짜 강시인 듯 껑충껑충 뛰는 철선동시의 경신술은 기이하면서도 빠르다.

마면혈도는 지금까지는 거의 위치를 옮기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철선동시의 공격을 감당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둑! 콰직!

마면혈도가 한걸음씩 물러날 때마다 그자의 발이 대리석 바닥으로 푹푹 파고들었다.

(얼어 죽은 놈이 무공을 속이고 있었구나. 대체 어디서 소림사의 용조수를 배운 것일까?)

마면혈도의 흉측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쫘악!

마면혈도가 생각하면서 생긴 실날같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철선동시의 용조수가 그자의 왼쪽 소매 자락을 뜯어놓았다.

손톱에 직접 닿지도 않은 팔목이 화끈거린다. 용조수의 경풍에 스친 것이다.

팔을 뒤로 물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마면혈도의 팔은 팔꿈치에서부터 뜯겨 나갔을 것이다.

(위험했다.)

마면혈도의 등골로 식은땀이 쫙 흘렀다.

반면 얼어 죽은 시체처럼 창백한 철선동시의 얼굴에는 득의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촤라라랑!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머리를 노렸다가 빙글 돌며 아랫배를 찌르고 들어갔다.

촤악!

동시에 용조수는 마면혈도의 혈도 중간쯤을 비스듬히 가격하고 있었다.

(승부가 났다!)

임청우는 내심 소리쳤다.

마면혈도에게는 뒤로 물러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거나 피할 방법 역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면혈도는 과연 삼괴 중의 일인다웠다.

스악!

마면혈도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빙혼철선을 스쳐 보내며 혈도의 손잡이로 철선동시의 팔꿈치를 가격했다.

철선동시는 팔이 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손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면혈도는 아슬아슬하게 철선동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크카카캇!”

화악!

회심의 일격에 실패한 철선동시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팟! 쏴아!

마면혈도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뒤로 날아갔던 철선동시는 벽을 차고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다.

철선동시는 날아들면서 손을 어지럽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샤샤샥!

순간 철선동시의 손에서 수십 수백의 손 그림자가 생겨났다.

새로 생긴 그림자가 먼저 생긴 그림자를 밀면서 노도같이 마면혈도를 향해 밀려갔다.

드드드!

그 가공할 위세에 반만 남은 불심연화로마저 진동했다.

무릇, 강호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진실한 절기 하나 둘쯤은 결코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기 마련이다.

마면혈도도 이같은 생사의 존망에 처하자 숨기고 있던 비전의 수법을 펼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휘익!

갑자기 마면혈도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꺾이며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무슨 짓을...)

철선동시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번쩍!

직후 그자의 발 앞에서 붉은 빛이 벼락같이 솟구쳤다.

“헉!”

철선동시는 기겁을 하면서 빙혼철선을 아래로 휘둘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크악!”

쩍!

철선동시의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이 동시에 베어져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후두두둑!

피 보라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마면혈도는 자벌레처럼 몸을 뒤로 꺾어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며 혈도를 베어 올렸던 것이다.

바로 혈왕도법 중의 최후 절초인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휘익!

반격에 성공한 마면혈도는 한 바퀴 굴러 자세를 바로 했다.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린 철선동시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것이 그자의 눈에 들어왔다.

화악!

마면혈도는 내친김에 철선동시의 목을 벨 심산으로 철선동시를 덮쳐갔다.

퍽!

하지만 그 직후 접혀진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철선동시는 쓰러지면서 빙혼철선을 던졌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에 흥분한 마면혈도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철선동시에게 덮쳐갔었다.

날아드는 빙혼철선에 자진해서 몸을 들이민 격이 된 것이다.

퍼억!

가슴에 빙혼철선이 박힌 마면혈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엎어졌다.

쿠당탕!

균형을 잃은 철선동시의 몸이 불심연화로에 부딪혔다가 아무렇게나 처박힌 것과 거의 동시였다.

 

후두둑!

임청우는 흠뻑 피를 뒤집어썼다. 철선동시의 팔 다리가 잘려지며 뿜어진 피가 가까이에 있던 불신연화로에 흩뿌려진 것이다.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엉뚱하게도 대안탑 안에서 피비를 맞았다.

드드드!

끈적거리는 불쾌감에 이어 불심연화로가 넘어갈 듯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철선동시의 몸뚱이가 부딪힌 때문이다.

(어이쿠! 이러다간 들키고 말겠다.)

임청우는 요동치는 불심연화로를 바로 하려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퍼억!

그 직후 등덜미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그 바람에 철선동시의 몸이 부딪혀 흔들리던 불심연화로가 기우뚱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콰당탕!

임청우는 밖으로 굴러 나와 약사여래불 앞에 모질게 엎어졌다.

휘익!

엎어지는 임청우의 손에서 벗어난 호리병이 천장의 틈을 통해 대안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으으으...”

등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손발이 떨려온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왼팔이 높이 날아올랐다가 임청우의 등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시퍼런 손톱은 떨어지는 기세로 임청우의 등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임청우는 전신의 맥이 빠지며 학질에 걸린 듯이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온몸으로 확 퍼져가는 끔찍한 냉기에 비하면 등줄기의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으으으...”

임청우는 이빨을 달달 마주치며 무작정 앞으로 기어갔다.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몸속에 깃들어있는 북두칠성의 힘을 깨우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두 마두에게서 멀어져야만 한다.

그때 마면혈도가 엎어졌던 몸을 겨우 뒤집으며 거친 음성을 천천히 내뱉었다.

“크크큭! 숨어있던 쥐새끼가 벼락을 맞았군. 저 강시 놈의 빙골산(氷骨散)은 해약이 없는 극독인데...”

마면혈도는 임청우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불심연화로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다만 호흡이 정제되지 못하고 거친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철선동시도 마찬가지였다.

“끼끼끼... 말대가리, 네놈도 혈도에 색혈사(索血蛇)의 독혈(毒血)을 발라놨었군. 덕분에 셋 다 살아나기는 틀렸어.”

철선동시가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진 채 키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자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에 묻어있던 색혈사의 독혈이 그의 피를 응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 독기는 심장을 향해 가면서 모든 피를 굳혀버린다.

싸우는 동안에는 몸의 움직임이 급격하여 피가 솟구쳐 나왔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은 피가 상처에서부터 심장 쪽으로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철선동시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기 위해 혼신의 공력으로 색혈사의 독혈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팟!

“썩을 놈!”

한숨 돌린 마면혈도가 가슴에 박힌 빙혼철선을 뽑아 던지며 악다구니를 썼다.

푸악!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빙혼철선에도 철선동시가 사용하는 빙골산이 묻어있었다.

빙골산은 극심한 냉기를 품고 있는 특이한 독약이다. 이에 중독된 자는 얼어 죽게 되는데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썩지 않는다.

빙골산의 독기에 의해 마면혈도의 가슴 상처에 서리가 앉으며 허옇게 변하고 있었다.

용조수에 살이 뜯겼던 그자의 어깨는 공력의 운행이 중단된 탓에 벌써 서리가 두텁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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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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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1)

 

 

(사부...)

척포에게 당하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있던 임청우는 우협 장백승이란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임청우는 이미 장백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스럽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철선동시의 입에서 우협 장백승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온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우협... 그가 왜 나를...”

마면혈도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중얼거렸다.

철선동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냉소를 했다.

“자네는 물론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

마면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가 또 말했다.

“하지만 우협이 검주 유소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겠지?”

마면혈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철선동시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한 발을 턱 걸치며 말했다.

“자네는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만, 우협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 더우기 우협은 지금 자네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는 중이지.”

“우... 우협이 날 죽이려 뒤쫓고 있었다니...”

극도의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린 마면혈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했고 마면혈도도 자신이 사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마면혈도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검주 유소기라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인데... 사부는 그 유소기라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라고도 하고...)

임청우가 의혹에 휩싸여있을 때 마면혈도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철선동시, 자넨 어떻게 우협이 나를 뒤쫓는 것을 알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우협을 만났었네.”

철선동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세 번이나?”

마면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래 세 번! 마지막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네.”

철선동시는 발을 올려놓았던 아미타여래의 머리를 의자삼아 앉으면서 말했다.

“언제... 우협이 언제부터 날 쫓고 있었는가?”

마면혈도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식은땀이 난 모양이었다.

“그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우협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수(漢水)에서였네. 그는 어부에게 자네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고,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굽신거리며 모른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우협은 곧 가버렸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몰래 다가가 그 어부를 죽여 버렸네.”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마면혈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그 어부의 계집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지.”

철선동시의 말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면혈도는 말같이 생긴 추악한 용모 때문에 여자의 환심을 사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만 보면 여염집 규수와 과부, 여승과 처녀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겁탈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면혈도에게 겁탈당하고 죽거나 미쳐버린 여자는 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우협을 만난 건 우리가 함양(咸陽)의 기루에 숨었을 때일세.”

진시황의 궁전이 있었던 함양은 서안의 북서쪽 육십여리 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도 자네는 계집을 끌어안고 뒤엉켜있었는데, 기루 안으로 들어서는 우협을 창가에 앉아있었던 내가 운 좋게 먼저 보았지. 기세로 보아 우협은 우리가 그 기루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네.”

“그날 기루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자네였군.”

마면혈도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두 마두는 검주 유소기를 피하기 위해 농산에서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민산산맥(岷山山脈)을 넘어 한수까지 갔었다.

헌데 한수에 이르렀을 때 철선동시는 유소기뿐 아니라 우협 장백승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급히 방향을 바꾸어 민산산맥을 다시 넘어서 함양으로 갔었으며 그후에 황하 줄기를 따라 내려와 서안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로 우협을 본 건 어디서였는가?”

마면혈도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로 이곳 자은사!”

철선동시의 짧은 대답에 마면혈도는 침묵했다.

 

서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은사를 찾아왔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소기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헌데 철선동시가 또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은사를 도로 나와 근처 객점에서 한잠 늘어지게 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자은사를 찾아온 것인데 철선동시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자은사에 들렀을 때 우협 장백승도 자은사에 있었던 것이다.

철선동시는 장백승이 한번 돌아보고 간 곳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은사의 대안탑을 은신처로 선택했었다.

철선동시의 그같은 생각도 몰랐다니...

마면혈도는 내심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사부가 자은사에 왔었구나!)

임청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협 장백승이야말로 임청우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황을 건드렸었는데...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우협까지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모양이다. 아마 계집들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고 다닌 게 우협을 화나게 했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마면혈도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힐끔 철선동시를 쳐다보았다.

철선동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속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얼어 죽은 놈은 근 한 달 째 내게 선심을 쓰고 있다. 물론 선심을 쓰는 목적은 내 손에 있는 몽선도의 반쪽을 넘겨받는 것이겠지.)

마면혈도는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되지 안돼. 죽었다 깨어나도 몽선도는 넘겨줄 수 없다.)

마면혈도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지만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과, 진 빚은 꼭 갚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다.

헌데 벌써 수차에 걸쳐 철선동시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면혈도를 괴롭혔다.

철선동시는 아닌 척하면서 마면혈도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이내 실망했다.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마는 성격의 마면혈도이건만 자신에게 몽선도를 바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선도는 쉽게 내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철선동시는 흉악한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협만 아니라면 검주 유소기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마면혈도가 우협을 자극했기 때문에 쫓겨 다닌다는 듯한 말투다.

마면혈도는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냈다.

“내가 적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선동시! 설마 너 혼자서 검주 유소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철선동시가 백납처럼 하얀 얼굴에 강시처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유소기는 우리 삼괴 다음 서열인 칠절에 속한다. 비록 그놈이 칠절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하하핫!”

순간 마면혈도가 큰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입과 턱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얼어 죽은 놈! 유소기가 근처에 없다고 그런 허풍을 치다니...”

마면혈도는 웃음을 뚝 그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왜 도망만 쳤느냐? 나 마면혈도도 유소기의 삼검(三劒)을 당하지 못하고 겨우 도망쳤는데... 설마하니 네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단 말이냐?”

“키키키... 자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빙혼철선(氷魂鐵扇)은 유소기의 검보단 반 푼 정도 무섭고 자네의 혈도보단 두 배 정도 강하지.”

철선동시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웃는 그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팟!

“이제 보니 네놈은...”

마면혈도는 무엇을 느꼈는지 바람처럼 신속하게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카캇! 말대가리가 제법이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카카캇! 네놈이 직접 바치지 않으니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화악!

철선동시가 그림자처럼 마면혈도를 쫓아가며 손톱으로 할퀴는데 그 수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스악! 서걱!

철선동시는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풍만으로도 마면혈도의 가슴부위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그럴진대 손톱에 직접 할퀴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헛! 용조수(龍爪手)!”

마면혈도가 놀라 소리치며 피했다.

용조수는 응조수(鷹爪手)와 함께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중 하나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무공은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사에서도 절전되어 익힌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뜻밖에도 얼어 죽은 귀신같은 몰골인 철선동시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마면혈도조차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쩍!

마면혈도는 혈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붉은 고리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도의 혈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용조수의 위력은 과연 놀랄 만했다.

파카캉!

혈도의 측면을 후려친 철선동시의 손톱은 다음 순간 마면혈도의 얼굴을 할퀴려 들고 있었다.

“크카카캇! 용조수를 알아보았으면 순순히 반부의 몽선도를 내놓으시지.”

철선동시의 살벌한 공격을 그러나 마면혈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수평혈도참(水平血刀斬)!”

번-쩍!

아침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듯,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노도같이 철선동시에게 밀려갔다.

쩌어억!

칠층 중앙에 서있던 불심연화로의 상반부가 혈도의 도기에 베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퍼억!

석가여래의 허리도 무참히 베어져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팟!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왼쪽 발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혈도참은 마면혈도의 삼십이초(三十二招) 혈왕도법(血王刀法) 중 최후의 이(二) 초식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다.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만났을 때도 마면혈도는 수평혈도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철선동시는 수평혈도참의 존재를 몰랐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말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할 철선동시가 아니었다.

화악!

잘려진 발목 때문에 허공에서 불안한 몸짓을 보이면서도 철선동시는 용조수 중의 절초를 펼쳐냈다.

쫘악!

마면혈도의 어깨에서 옷과 함께 피 묻은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왔다.

휙! 휘릭!

피차 피를 본 두 사람은 훌쩍 물러나 이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도 무시못할 중상을 입었지만 작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할 뿐이었다.

촤라락!

철선동시가 접은 채 들고 있던 빙혼철선을 펼쳤다.

스윽!

마면혈도는 혈도를 비스듬히 내려서 철선동시의 하체를 겨누었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순간적인 방심이 만들어낸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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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3)

 

 

(바로 이것이었구나! 현장법사는 명산에 수장하는 심정으로 이 향로 안에 글을 새겨 두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절묘한 방법이다. 책이라면 손상될 수도 있겠지만 구리로 만든 향로라면 천년이 아니라 수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여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 향로는 향불을 피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재를 비우기 위해 들어올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임청우는 끔찍한 고통과 신열에 시달리면서도 오른손으로 향로의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톱보다 조금 큰, 즉 발톱만한 글자들이 향로 안쪽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임청우는 윗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더듬어 내리며 읽었다.

 

<노납 현장은 황상(皇上)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홀로 장안을 출발하여 간다라를 거쳐 마침내 천축에 이르렀다.

-중략(中略)-

십팔 년이 지나 노납은 일백오십 개의 불사리(佛舍利)와 여덟 체의 불상(佛像), 육백오십칠 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중략-

자은사에 대안탑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하기 이십칠 년, 노납의 나이 고희에 달했으며 번역하지 못한 책은 오직 한 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노납의 실책인가? 아니면 삼세를 굽어 살피시는 불타의 뜻이신가? 노납이 천축에서 가져온 경전 중 마지막 한부가 불법을 설파한 것이 아닌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노납은 삼 년의 망설임 끝에 그 마지막 한 부를 번역했다.

하지만 그 내용의 가공함으로 인하여 감히 세상에 흘리지 못하고 노납이 머물던 대안탑 칠층에 불심연화로(佛心蓮花爐)를 만들어 깊이 숨기는 바이다.

뜻이 있는 자는 구할 것이오, 인연이 있는 자는 얻을 것이다.

행하는 자는 불타의 자비를 잊지 말 것이며, 전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글을 읽은 임청우는 고소했다.

“불심연화로! 역성(譯聖)께서는 자신이 애써 만든 불심연화로가 한낱 떠돌이 임청우의 무덤이 될 줄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현장이 그토록 고심한 내용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 자신은 이 향로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생을 마쳐야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천명(天命)이라면, 은밀하게 숨겨져 온 비전(秘傳)을 접하게 된 것 또한 천명이 아니겠는가?

줄이 바뀌면서 갑자기 문장이 바뀌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

임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글자들 보다 약간 크게 쓰여진 굵은 글자는 <불심연화지>였다.

(이럴 수가...!)

제목에 이어진 내용을 읽어가던 임청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처럼 생소하고 기이한 문장을 그는 한 번도 대해본 적이 없었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이야기할 때는 모든 성인(聖人)들과 비슷했으나 신체의 굴신(屈身)에 대한 구절에서는 도가의 양생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마치 한 줄에 꿰인 수백 개의 곶감들처럼 어떤 오묘한 원리에 의해 이어져 있었다.

인체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 부분에서는 의서를 읽는 듯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기(氣)라는 것에 대한 부분에서는 마치 무서(巫書)를 읽는 듯이 황당무계하면서도 신비한 감이 있었다.

임청우는 그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불심연화지의 구결에 빠져들어 몸이 아픈 것조차 잊어버렸다.

입으로는 연신 구결을 중얼거리며 눈은 망연히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는 구결을 더듬었다.

구결을 외워감에 따라서 몸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뜨거운 열기가 생겨났다.

그 열기는 배꼽 아래 세치 쯤 되는 곳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생겨났다.

아지랑이같고 연기같던 열기는 이내 뭉쳐져 불덩이처럼 변하더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랫배와 명치를 지나 가슴 앞쪽을 통과한 불덩이같은 기운은 얼굴로 올라왔다.

턱 중앙을 지나 코 위로 흘러간 그 기운은 미간을 약간 더 올라간 위치에서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마치 불이 붙은 솜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임청우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거듭 반복하여 읽었다.

읽을수록 머릿속은 선명해지고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신열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 글속에 이처럼 신비한 힘이 있을 줄이야.)

임청우는 뛸 듯이 기뻤다. 몸의 상태가 구결을 외움에 따라 표가 날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을 안 것이다.

네 번을 거듭 읽고 나자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임청우는 눈을 감은 후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그에 따라 그의 몸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배꼽 아래쪽에서 꾸준히 생겨난 기운은 이마의 튀어나온 부분까지 상승하여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꽃같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같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얼음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 속성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임청우는 농산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진기한 약초를 채집하고 또 복용해왔었다.

덕분에 임청우의 몸속에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양의 영약 기운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청우가 내공심법의 구결을 외자 단전에 잠복하고 있던 그 영약 기운은 구결을 따라 앞머리의 신정혈(神庭穴)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공력을 단전(丹田)에 모은다.

그에 반해 임청우가 암송하고 있는 불심연화지는 단전이 아닌, 이마 위에 자리한 신정혈에 공력을 모으는 특이한 내공심법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움에 따라서 임청우의 몸에서 신열은 사라지고 부어올랐던 팔의 부기도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한데 임청우가 도취된 듯이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을 때였다.

 

“지독한 유가놈! 하지만 제 놈도 설마 우리가 이 대안탑에 숨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큿큿!”

임청우의 귓가로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면혈도란 자다!)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들린 음성은 바로 비련곡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달아났던 마면혈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청우가 너무 놀라 숨조차 멈춘 직후 아래층에서 또 하나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말대가리! 또 검주 유소기를 과소평가하는군. 이곳을 찾지 못하길 바랄 수 있을 뿐, 찾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다간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나게 될 걸?”

철선동시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 까마귀가 우는 듯한 역겨운 음성이었다.

(저 괴물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마치 내가 가는 곳마다 일부러 쫓아오는 것같다.)

임청우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인 척포를 깨웠다.

임청우가 호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자 척포가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내밀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쉿!)

임청우는 자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때 다시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하지만 우리가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유소기 놈쯤이야 간단히 찢어죽일 수 있지!”

츠으!

마면혈도의 음성을 들은 척포의 눈이 붉은 빛을 쏘아냈다.

척포는 농산의 비련곡에서 마면혈도와 싸울 때 그자의 혈도에 맞아 상당수의 비늘이 상하는 타격을 입었었다.

그 원한이 뼛속에 사무쳐 있었던 모양이다.

쉬쉭!

척포는 혀를 날름거리며 호리병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금 나가면 안돼!)

임청우는 다급히 척포의 머리를 눌렀다.

끽!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척포의 머리가 호리병 속에 밀려들어가 버렸다.

(휴! 큰일 날 뻔했다. 만약 이 녀석이 뛰쳐나간다면 저는 몰라도 나는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지.)

임청우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척포는 임청우가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호리병 속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기 시작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주둥이로 쿡쿡 찍어대는 데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웃을 수가 없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속으로 욕을 했다.

(만약에 들통이 나게 되면 네 녀석을 호리병 채 불속에 넣어서 구워버리겠다.)

막상 척포를 욕하고 나니 우습지만 그놈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말귀신과 얼어 죽은 강시는 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가?)

임청우는 대상을 바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농산에서 두 번이나 보고 수백 리나 떨어진 이 대안탑에서까지 만난단 말인가? 귀신은 저놈들 안 잡아가고 뭣하며 벼락은 눈이 멀기라도 했나?)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평소에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던 욕도 마음속으로 실컷 해댔다.

그러는 사이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대안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칠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조바심이 나서 미칠 지경인데도 척포는 여전히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라 뱀 새끼야!)

임청우의 얼굴이 숫제 울상이 되었다.

 

“제길. 유소기 그 개같은 놈만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 다닐 필요도 없는데...”

마면혈도는 칠층의 바닥을 밟으면서 소리쳤다.

철선동시가 속이 뒤집어질 것같은 역겨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유소기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자네를 뒤쫓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자에 비하면 유소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면혈도는 안색이 홱 변하며 급히 물었다.

“이봐, 철선동시! 마황이 나를 뒤쫓기 시작한 기미라도 있나?”

마면혈도의 어조는 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그동안 철선동시에게 한 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황은 멀리 있고 그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철선동시가 냉소하며 대답한다.

“그? 그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가?”

마면혈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입가로 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자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니 패할 걱정은 할 필요 없네.”

“그럼 들을 필요도 없군. 그만하지.”

마면혈도는 석가여래의 무르팍에 걸터앉으면서 손을 저었다.

철선동시는 그런 그자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갑자기 마면혈도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휘익!

그자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철선동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면혈도에 비해 키가 작은 철선동시가 발까지 땅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흔들렸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유소기보다 더 무섭다는 자가 나를 이길 수 없다니... 그런 개같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마면혈도는 고함을 치면서 철선동시의 멱살을 흔들었다.

휘익!

순간 철선동시의 발이 빙글 돌아가며 마면혈도의 턱과 겨드랑이 아래를 동시에 노렸다.

쩌엉!

경쾌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면혈도는 철선동시를 집어던지고 혈도를 뽑아들었다.

철선동시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있었으면 턱이 부서졌거나 팔이 떨어졌을 것이다.

휘릭!

철선동시는 몇 바퀴 맴을 돈 후에 아미타여래의 어깨 위에 내려서면서 소리쳤다.

“말대가리!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네놈은 돌대가리야. 기껏해야 그 정도까지만 생각할 줄 아는 걸 보면...”

“개 수작마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얼어 죽은 놈이 칼 맞아 죽은 놈으로 변할 것이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번쩍!

혈광이 번득이는 순간 철선동시는 아미타여래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비로자나불의 머리위로 피했다.

쿵!

혈도에 베어진 아미타여래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쩍!

마면혈도는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그대로 철선동시를 베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철선동시의 가슴 앞자락이 길게 베어졌다.

휘릭!

철선동시는 급히 비로자나불 뒤로 뛰어내려 숨었다.

“끼압!”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마면혈도는 공력을 돋우어 괴성과 함께 비로자나불을 양단해버렸다.

쿠르르르!

비로자나불이 두 조각이 되어 좌우로 나누어졌다.

순간 철선동시가 좌측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이 미친 말대가리 놈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것 아니냐? 네놈을 쫓는 사람이 우협 장백승이라 해도 내말이 틀렸다고 할 테냐?”

순간 마치 시간이 멎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마면혈도가 우뚝 서버렸다.

그자의 몸이 석고처럼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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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2)

 

 

대안탑은 총 칠층이다.

각층의 높이는 삼장(三丈;9미터)이나 되어 천장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임청우는 난간을 잡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수십 번의 힘든 걸음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더 이상 계단이 없는 것을 느끼고서야 임청우는 자신이 이층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삼층에 이르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삼층에는 수많은 서가(書架)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다.

임청우는 불경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지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서가를 살펴보고 더듬어 보아도 단 한권의 책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불경들은 모두 어딘가로 옮겨지고 먼지 쌓인 서가들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임청우는 다시 사층으로 올라갔다.

사층이라고 해서 삼층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역시 텅 빈 서가들만이 근 백 여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휘유! 저 많은 서가에 불경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대체 몇 권이나 됐을까?”

임청우는 서가에 꽂혀있었을 불경들의 숫자를 생각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대안탑에 자기가 볼 것이라고는 빈 서가들뿐인가 싶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승려들이 불경 번역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방 벽에 하나씩 나있는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있다.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층을 지나고 육층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고, 마지막 칠층에 올라섰을 때는 밖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천장을 올려다 본 임청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안탑의 천장은 삼각형의 판자를 여러 장 엇갈리게 기대놓은 형태였다. 뾰족한 윗부분은 단단히 맞물려 있지만 아래쪽은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어서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비와 눈은 들어올 수 없지만 바람과 빛은 그대로 통과한다.

위로 올라올수록 밝아진 이유는 바로 그같은 천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임청우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칠층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대신 달이 떠올라 창백한 달빛이 지붕에 나있는 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달빛 덕분에 자세히 볼 수 있는 칠층의 구조는 다른 층들과 달랐다.

서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대신 네 좌의 불상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가운데에는 임청우의 키만큼 큰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香爐)가 세 발로 버티고 서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왼손을 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고,

남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인 비로자나여래(毘盧蔗那如來)이며,

북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나누어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였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향로의 아랫부분에는 황동을 입혀서 만든 연화(蓮花)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연꽃무늬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대안탑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였다.

임청우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현장법사께서 쓰셨던 의자라도 구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불상 넷과 향로 하나가 전부라니...”

실망하자 허기가 더욱 심하게 밀려왔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 임청우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 천장에 난 틈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비로자나여래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러자 비로자나여래의 백호(白毫:불상의 미간에 박혀있는 보석)가 빛을 발하며 향로의 한 부분을 비추었다.

헌데 백호를 통해 달빛이 반사된 향로 표면에는 물결이 일렁이듯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어!”

임청우는 그 신비한 광경에 벌떡 일어섰다.

 

<관표(觀表)>

 

향로로 다가가 살펴보니 단 두자인 글씨는 이러했다.

“관표? 겉을 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임청우는 나직하게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비로자나불의 백호에서 비친 빛이 글씨를 만들었다면 다른 불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임청우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번에는 달빛이 아미타여래를 비출 것이다. 그때 무슨 글씨가 나타나는지 봐야겠다. 아마 관표에 이어지는 글일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차서 달이 움직여 아미타여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달빛이 마침내 아미타여래를 비추었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청동향로를 응시했다.

달빛은 아미타여래의 백호에 반사되어 청동향로에 비춰졌다.

그리고 임청우의 짐작대로 두자의 글씨가 물결이 일렁이듯이 나타났다.

 

<망피(望皮)>

 

나타난 글자는 이러했다.

임청우는 먼저 나타났던 <관표>와 함께 읽어 보았다.

“관표망피(觀表望皮)?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고 적어놓은 듯한 글이로군.”

임청우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서상 달빛이 다음으로 비출 대상은 약사여래였다.

임청우는 끈기를 갖고 달빛이 약사여래를 비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넘어가도 달빛은 약사여래를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달빛은 약사여래뿐 아니라 석가여래도 비껴갔다.

“계절에 따라서 달이 움직이는 길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지금은 약사여래와 석가여래에게 달빛이 닿지 않는 때인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임청우는 실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임청우는 청동향로의 세 다리 중 하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쓸 대상이 없어지자 허기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관표망피... 관표망피...)

임청우는 허기를 잊을 목적으로 향로에 나타났던 글씨들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청우의 머릿속으로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대구(對句)는 <속을 보는 것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가 아니겠는가?)

임청우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알맹이를 보려면 속을 보라는 뜻이다!)

임청우는 흥분하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보라는 속이 불상의 속은 아닐 테고... 이 향로의 속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노자(老子)도 좋은 책은 명산(名山)에 수장(收藏)한다고 했듯이 옛사람들은 책을 숨기기 좋아했다. 어쩌면 현장법사께서는 이 향로 속에 가장 귀중한 책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없는 힘을 쥐어짜 자기 키만한 향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향로의 둥그런 배 부분의 직경은 여섯 자가 넘지만 입구는 상당히 좁아서 직경이 채 두자가 안된다.

향로 입구에 올라앉은 임청우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둥근 항아리 형태인 향로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은 거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임청우는 향로의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이 향로는 너무 커서 향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둡고 깊은 향로 속은 마치 어머니 뱃속 같다.

위에서 들여다보아서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향로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임청우는 몸을 일으켰다.

향로가 깊긴 하지만 자기키보다는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휙!

임청우는 주저 없이 향로 속으로 뛰어 내렸다.

헌데 그는 향로의 입구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캉!

왼손에 들고 있던 우협 장백승의 청강검이 향로 주둥이에 가로로 걸려버렸다.

“억!”

뛰어내린 기세와 체중에 의해 홱 채여지면서 왼팔이 어깨로부터 쑥 빠져버렸다.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둥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어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바보같이...!”

향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를 때였다.

빡!

향로 주둥이에 걸려있던 청강검이 떨어지면서 임청우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했다.

백회혈은 인체의 급소중의 급소다.

또한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청강검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악!”

백회혈에 불똥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임청우는 향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웅크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 배속에 든 태아와도 같아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으으으! 정수리리가 뚫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임청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엇갈린 구조의 지붕 틈 사이로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보인다.

(아직 밤이로구나.)

임청우는 뜨뜨 미지근한 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 밤인지 아니면 하루나, 또는 그 이상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 올리려던 왼팔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다시 졸도할 뻔 했다.

다쳤던 팔이 부어올라 소매가 팽팽해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한 여름이다.

여름의 융성한 화기(火氣)는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것은 겨울이 한기(寒氣)가 융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겨울이 추울수록 불이 자주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의 오묘한 법리라고 할 수 있다.

고열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거나 죽게 될 것이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농산의 깊은 산중에서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의서(醫書)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덕분에 의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지간한 병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

(침이라도 있으면 꽂아보련만...)

임청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겐 흔한 쇠침 하나도 없었다.

열을 내릴 수단이나 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이 계절에 얼음을 구하는 것은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는 황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찬물로 몸을 식히기엔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거늘 몸을 식힐 물이야 말해 무엇 하랴?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겨우 향로 속에서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몸이 되는구나.)

임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있어서 나 임청우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을 알기나 할까?)

임청우는 한탄하면서 향로의 벽에 기댔다.

신열(身熱)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불현 듯 머릿속으로 비련곡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쇠 부채로 뿜어낸 한기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었다.

하지만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리자 정신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청우는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고열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점차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방향과 시간조차 없는 별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멀리서 북두칠성이 그 국자같은 오묘한 형상을 뽐내고 있었다.

북극성 쪽으로 국자의 손잡이 끝을 향한 채 천천히 돌아가는 북두칠성을 보고 있자니 흐려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련곡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한 차례 유영하자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은 회복되었지만 육신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은 더 뜨거워져 불덩이 같고 어깨에서 빠진 왼쪽 팔에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로구나.)

임청우는 허탈해졌다.

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살해위협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 깊은 향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임청우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에 맞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조용하게 순응하고 싶었다.

“...?”

헌데 늘어뜨린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 감각은 마치 주물로 부어 놓은 활자(活字)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정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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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1)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우는 검댕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비련곡을 빠져나왔다.

검댕을 묻혀 시꺼멓게 변한 임청우의 얼굴에서는 볼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만 눈에 띨 뿐이었다.

사실 얼굴에 검댕을 바르는 건 임청우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임청우의 얼굴만 보면 화를 내고 죽이려 들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이래 임청우는 수시로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잘 씻지 않았다. 검댕을 묻히면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목욕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정성껏 씻은 기억은 거의 없는 임청우였다.

물론 얼굴에 검댕을 바른다고 해서 어머니의 학대가 줄어들지는 않았었다.

 

농산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임청우인지라 가장 은밀한 길만 골라서 빠져 나왔다.

그 덕분인지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만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산을 벗어난 임청우는 서안(西安)을 목적지로 삼았다.

농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가 서안이다.

그 서안에 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농산 밖의 세상은 벌써 몇 달 째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청우는 관도(官途)로 서안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져 음식은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기갈이 심할 때에는 황하의 탁한 물을 들이키고 배가 고플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서 생긴 웅덩이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었다.

무작정 황하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서 보름이 지났을 때 중원 제일의 고도(古都)인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서안은 한(漢)대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렸고 당(唐)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전설이 살아 숨 쉬었던 곳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중국을 일통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향한 집념이 피어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뭄의 고통은 서안 곳곳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버텨온 고도 서안은 그 역사의 힘으로 자연의 시련마저 견디는 듯했다.

여전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

임청우는 옛 건물들로 가득 찬 서안의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적 드문 산속 깊은 곳에 살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처에 나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한 구경거리들이다.

물론 서안은 임청우에 대해서 결코 감탄하지 않았다. 그의 몰골은 거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골뿐 아니라 형편도 거지보다 못했다.

거지는 구걸이라도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임청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구걸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거지 역시 직업인만큼 강한 직업의식이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나 바가지 들고 나서서 될 수 있는 게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다.

민심이 흉흉한 때인 만큼 도둑질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임청우는 그같은 경우를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이처럼 임청우의 배는 하루에 한번 채워지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척포는 언제나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게다가 놈의 식성은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놈은 어디서든지 아침이 되면 호리병 속에서 기어 나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면 불과 일각도 되기 전에 임청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몰려와 구더기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척포란 놈은 오만하게 황금빛 뿔이 달린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뱀들 사이로 들어간다.

몰려온 뱀들은 가지각색의 기기묘묘한 모양과 색깔을 갖춘 독사들이었지만 척포가 가까이 가면 모두 <날 잡아 잡슈!> 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꼼짝도 않는다.

척포는 그 뱀들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길이가 같은 놈을 물색한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수백 마리의 뱀을 걸러 보낸 후 자기와 길이가 꼭 같고 굵기도 꼭 같은 독사를 발견하면 한 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린 후에 아가리를 쫙 벌려 독사의 머리부터 삼켜버린다.

임청우는 몰려왔던 뱀들이 모두 음식으로 보였지만 그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한두 마리라면 잡아서 배를 채우련만, 수백 수천 마리가 되고 보니 한 마리 먹겠다고 덤비다간 되려 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물과 물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에서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농산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엔 눈을 빨갛게 하고 있지도 않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속에 몰입하여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

 

일옹청풍일지를 펼쳐들고 중얼중얼 읽으면서 임청우는 역사의 현장인 자은사(慈恩寺)로 갔다.

그저께 저녁부터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한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어서 꼬르륵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도 서안에 왔으니 자은사와 대안탑(大雁塔)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우협 장백승으로부터 받은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청강검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자은사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씩씩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玄獎)은 직접 천축으로 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범어로 씌여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있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이대(二大) 역성(譯聖)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구마라습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백마사(白馬寺)인 반면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바로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이었다.

높이가 무려 이십일장(二十一丈;63미터)에 달하는 대안탑은 밑변이 정방형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각뿔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분주했을 대안탑이지만 이제는 폐쇄되고 인적이 끊어졌다.

오직 대안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자은사 승려들만이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대안탑이 멀리 보이는 자은사 정문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글쎄, 너 같은 거지는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까.”

지객승(知客僧)으로 보이는 젊은 중이 소년을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왼손에 고색창연한 보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서 눈만 반들거리고 있으며 입은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검은 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훤칠한 키와 손에 든 보검 외에는 거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은 물론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밀어내려는 지객승의 손을 뿌리치며 무게 있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단지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오.”

“하하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럼 형편이 좋은 거지도 있던가?”

지객승이 큰소리로 비웃으며 다시 임청우를 밀어내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지객승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끔과 동시에 옆으로 슬쩍 비키며 발을 걸었다.

“어이쿠!”

지객승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스님께 구걸하지 않았소. 그런 나를 거지라고 할 수 있소? 나를 모욕한 댓가라 생각하시오.”

임청우는 빠르게 말하고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객승이 씩씩거리며 일어섰을 때 임청우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거지새끼야!”

지객승은 발바닥에 부리나케 뒤쫓아 들어갔다.

 

일단 절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아무도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객승도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포기해 버렸는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임청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년 고찰 자은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설전(無說殿)과 비로전(毘盧殿)을 돌아본 후에 대안탑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십장이 넘는 웅장한 대안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대안탑의 형상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산을 연상케 했다.

올려다보면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는 대안탑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임청우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집을 짓는다면 저같이 천년을 갈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사람으로 났으면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하리라!”

지는 석양을 보면서 야망을 일깨운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임청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에 몸을 떨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사로잡혔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대안탑에서 불경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

삼론종(三論宗), 성실종(誠實宗), 열반종(涅槃宗), 찰론종(擦論宗), 지론종(持論宗)은 물론이고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마저도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청우의 독백처럼 현장이 세웠던 대안탑은 천년을 가는 집이었고, 현장이 행한 바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큰일을 하리라.)

임청우는 마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苛)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숙! 혹시 어린 거지새끼 한 놈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가 대안탑 근처에 있는 극락전(極樂殿) 쪽에서 들려왔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미 고약한 지객승이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임청우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대안탑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나무나 건물이 없었다.

타타탁!

지객승이 다른 중으로부터 임청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임청우는 이내 지객승을 발견했지만 지객승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만든 대안탑의 그림자가 임청우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임청우는 출입을 금하는 붉은 줄이 쳐져있는 대안탑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대안탑으로 들어온 즉시 문 옆의 벽에 바싹 등을 붙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꺼져버린 거야!”

대안탑 주변에서도 임청우를 찾지 못한 지객승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임청우는 지객승을 속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밖은 아직 훤한데도 대안탑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대안탑에는 사방에 하나씩 창문이 나있지만 벽돌을 쌓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려던 임청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잘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대안탑에서 자고 가면 어떨까? 여기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자고 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임청우는 밖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대안탑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그 옛날 언젠가는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졌으며 수많은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으리라.

과거로 흘러가버린 밝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임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더듬어 가노라니 난간이 만져졌다.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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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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