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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3)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거지는 두려움과 함께 의혹을 느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은 임청우는 관도를 벗어나 근처의 산으로 치달아 올라갔다.

가늘어지긴 했어도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임청우는 점점 더 험하고 외진 산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임청우가 상대해 주지도 않자 거지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거지는 수많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을 벴던 사람이었다.

죽을 위기도 수없이 넘겼으며 적의 간계에 빠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를 구해준 대장군(大將軍)을 보필하여 무수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적을 신중히 대하고 몸을 사리는 침착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인의 적이 자기를 유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거지는 임청우와의 거리를 좀 더 벌리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지는 문득 빗속을 흐르는 만리향의 향기를 맡았다.

만리향 향기는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거지는 임청우에게 온 정신을 다 쓰느라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소저!”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임청우를 쫓아가며 고함쳤다.

이놈! 우리 아가씨를 내려놔라!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감히 손대려하느냐?”

임청우는 내심 아차! 했다.

(저 거지가 결국 알아버렸구나. 내가 주은을 유괴해서 달아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구나. 빨리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숨어야 할 텐데...)

뒤를 돌아보니 거지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쫓아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따라오던 방금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청우는 가성(假聲)을 쓰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쫓아온다면 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거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송곳이 바닥에 꽂히듯 우뚝 멈추어 섰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 그분 소저를 죽인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겠다.”

멈춰선 거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를 쫓아오지만 않는다면 맹세코 이 여자를 죽이진 않겠다.”

임청우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를 올라가며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멈춰 섰던 거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다시 달려오며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어떤가? 나는 소저의 종이나 마찬가지이니 소저께서 욕을 당하더라도 내가 죽은 이후에야 당해야 할 게 아닌가?”

임청우는 거지의 충성심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의 위쪽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거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임청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소저께서 욕을 당하신다면 아마도 주인께선 내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이 늙은 거지를 죽이고 말 것이다.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소저를 구해내야 한다. 구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소저를 편안히 돌아가시게 라도 해야 한다.)

거지는 심주은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쐐액!

자기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거지는 맹렬히 도약해서 임청우를 덮쳐갔다.

카앗!”

단번에 거리를 오장까지 좁힌 거지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수 십 줄기의 주전이 빗속을 뚫고 날아갔다.

그 소리만도 무시무시하여 임청우는 도저히 자기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에 그는 심주은을 안은 채 곤두박질치듯이 앞쪽으로 납작 엎드렸다.

퍼퍼퍽! 퍼석!

거지가 뿜어낸 주전들은 임청우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앞쪽의 바위들을 뚫고 들어가거나 깨트렸다.

죽어라!”

그 사이에 다시 삼장쯤으로 거리를 좁힌 거지가 임청우에게 덮쳐들며 살수를 펼치려 했다.

콰르르르릉!

바로 그 순간 거지가 뿜어낸 주전에 격중된 바위 하나가 흔들리더니 임청우쪽으로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사태다!)

임청우는 경악하며 자기를 향해 굴러오는 큰 바위에 왼손을 갖다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덮쳐들고 있는 거지는 있다는 것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삼천 근이 넘는 큰 바위가 임청우의 손에 떠밀려 붕 떠오르며 그의 몸을 넘어갔다.

!”

그 바람에 거지는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며 바위를 밟고 다시 날아올라야만 했다.

쿠르르릉!

바위가 굴러가면서 다른 바위를 건드리고, 그 바위는 다시 다른 바위를 밀치면서 산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위로 올라가!”

이불에 쌓여 있던 심주은이 갑자기 임청우에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얍!”

임청우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껑충 날아올라 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

뒤쪽에서 거지가 벼락같이 고함을 치면서 두 대의 주전을 쏘아 보냈다.

왼손을 뒤로 휘둘러서 한대의 주전을 흩어버리는 순간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나머지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부터 두 대의 화살 중 거지가 정말 공력을 들인 것은 허벅지를 관통한 그것이었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임청우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나뒹굴 뻔했다.

으헤헤헤!”

공격이 성공하자 득의한 거지가 신룡처럼 솟구쳐 올라 임청우를 따라붙었다.

!

그리고는 임청우의 몸 옆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이불자락을 낚아챘다.

실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청우는 꼼짝도 못하고 심주은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불을 헤쳤다.

소저!”

임청우가 놀라 소리칠 때였다.

!”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심주은은 이불자락을 잡고 날아올라 펼쳐지는 이불로 앞을 가린 채 임청우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위를 굴려!”

그녀는 근처에 있는 큰 바위들을 향해서 장력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가 굳이 바위를 굴릴 것도 없었다.

쿠르르르릉!

이미 아래에서 시작되고 있던 산사태의 영향으로 흔들린 바위들은 산이 무너지듯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

거지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튀어오른 커다란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산사태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마치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듯, 땅이 진노하는 듯, 산사태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근처의 지형을 바꾸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심주은은 알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마저 놓아버린 채 임청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연의 힘은 어떤 인간에게라도 두려움과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임청우도 심신이 지진을 만나 흔들리는 것같이 놀랐다.

이름 없는 야산의 한 비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산사태가 이럴진데 하물며...

영원한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일백년 인생은 전광석화에 불과할 따름이고 무궁한 천지의 작용에 비한다면 인간의 역사(役事)란 그저 물결이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잠시 만들어놓는 파문과도 같은 것이리라.

 

***

 

쏴아아아!

완전히 지형이 변해버린 산비탈로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린다.

임청우는 젖은 이불을 끌어올려 심주은의 알몸을 감싸주었다.

심주은은 거지를 삼켜버린 산비탈을 바라보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기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를 죽여버렸어. 그를...”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임청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완전히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말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알기로는 임청우는 심성이 중후하고 착해서 결코 모진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산비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길을 따라서 눈을 돌리던 심주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피유우우웅!

퍼부어지는 빗줄기를 거스르며 땅에서부터 유성(流星) 하나가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신호용의 불꽃인 기화(旗火).

거지는 무시무시한 산사태에 휩쓸리고도 뛰어난 무공 덕분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 기화가 올라갔으니 그것을 발견한 노파와 중이 달려올 것이다.

심주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젖은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 옷들은 임청우가 그녀와 함께 이불속에 넣어 왔던 것이다.

옷을 걸친 심주은은 허둥대며 임청우의 손을 잡고 바위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삐이이! 삐익!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빗속을 뚫고 세찬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기와 승이 벌써 가까이 왔다.)

심주은의 다급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청우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걸쳐주었다.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피해야겠다. 다시 열이 나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어.”

임청우의 부드러운 말에 심주은은 감격하여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산의 반대쪽은 우거진 숲이었다.

비와 바람 속에서 나무들은 호곡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은 숲 속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달려갔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바람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삐이익! 삐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모든 소음을 뚫고 두 사람의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기걸승이 벌써 산을 넘어 숲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주은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몸에서 나는 만리향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고 말거야.”

동굴을 찾아야 할텐데...”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임청우가 미소를 지으며 심주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닥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일이야. 내가 동굴을 찾는 것은 지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주은은 총명한 소녀이지만 임청우처럼 도학(道學)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기가 뭐라고 해도 임청우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념하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체념한 심주은은 처연한 어조로 말할 때였다.

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돼.”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끌고 나아가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룬 것도 하늘이 정한 것이라면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럼 너는 이런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야하지 않겠어?”

! 난 그렇게는 못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인데 무조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말도 안돼.”

심주은은 자기가 처한 상황도 잊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무심코 남편이란 말을 내뱉고 나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 심주은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임청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삐이익!

그 사이에 휘파람 소리는 불과 백여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쩌억!

그 뒤를 이어 번갯불이 하늘을 동서로 길게 찢고 지나가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임청우는 앞쪽에 있는 큰 나무의 뒤에 가리워져 있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실로 천행이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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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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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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