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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2)

 

 

임주은은 근 한 달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탁본을 옮겨 적었었다.

탁본의 글자들은 아주 작아서 알아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구결들을 옮겨 적자니 신경의 소모가 다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내공을 익힌 몸인지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헌데 오늘 밤 임청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더해 자신의 마음까지 울적해지면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덜컥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의원을 데리고 오겠어.”

임청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가지마.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마.”

임청우는 애원하는 심주은의 눈동자를 보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곁에 누웠다.

맞닿은 몸이 불같이 뜨거웠다.

심주은은 갑갑한 듯이 옷을 풀어헤쳤다. 이미 정신은 거의 잃어버린 듯했다.

헉헉!”

심주은은 고열에 신음하며 임청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거추장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쳐서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풋풋한 소녀의 살 냄새가 임청우의 코를 자극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꼭 끌어안은 채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이마를 불어서 식히고, 벌겋게 상기된 가슴을 후후 불어서 식혔다.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고열에 신음하던 심주은이 헛것이 보이는 듯 손을 휘저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부! 약속을 꼭 지키겠어요. 꼭이요.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진 않겠어요.”

사부를 소리쳐 부르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제발 날 잡아가지 마세요. ... 난 아버지를 위해 희생당하고 싶진 않아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난 나대로 살아가겠어요!”

고개를 연신 도리질하면서 심주은은 뱀처럼 임청우의 몸을 휘감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의 몸도 어느덧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 심주은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훅훅 불어서 몸을 식혀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였다.

이봐 친구! 몹시 급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천장에서 굵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임청우는 흠칫하며 심주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자기 몸으로 심주은의 알몸을 가려준 임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약을 가진 게 있소? 천궁과 당귀, 구기근 등이 들어있는...”

호오! 열을 내리는 약을 말하는군. 어디 보자... ()장로가 억지로 주다시피한 약이 어디 있기는 있을 텐데...”

말소리가 다시 천장에서 들려왔다.

한데, 자네 부인인가?”

임청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

대답대신 천장을 뚫고 무엇인가 임청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임청우는 왼손을 휘둘러 재빨리 그것을 나꿔챘다.

한 알의 단약이었다.

나 말인가? 하하하! 말하지 않겠네. 자네 부인을 훔쳐봤으니 복수하려고 할 게 뻔한데 내가 왜 말하겠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게. 내가 본 건 자네 부인의 얼굴 밖에는 없으니까. 하하하!”

그 인물은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력이 충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도 될 것같았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흔들면서 입을 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이를 악다물고 숨을 쌕쌕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아무리 입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임청우는 단약을 자신의 입안에 넣어 녹인 다음 심주은의 입술 속으로 침과 함께 흘려 넣어 주었다.

 

***

 

새벽이 되자 빗발이 가늘어졌다.

임청우는 곤히 잠든 심주은의 알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발그레한 심주은의 뺨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가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알몸으로 안겨들던 심주은의 모습이 가득했다.

품속에서 몽선도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척포... 넌 오래 살았으니 아는 게 많겠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마 알고 있겠지?”

척포가 고개를 내밀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하느냐는 듯이 다시 들어가 버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건달에 불과하다. 막연히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임청우는 생각에 잠겼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잠룡물용(潛龍勿用),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 했으니 지금의 나는 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러야 하는 잠룡과 같다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갈고 닦는데 힘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여색(女色)을 가장 경계해야 하고 중년에는 의욕(意慾)이 과한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욕심(慾心)이 많은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주은을 피치 못해 잠시 안았는데도 마음이 이다지도 흔들렸으니 그 말은 과연 옳다. 여색을 경계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가 없겠구나.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자고로 영웅의 무덤은 미녀의 가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임청우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귀를 쫑긋했다.

아이쿠! 스님! 지금 방마다 살펴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러시면 저희 집은 장사를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주인의 음성이었다. 벌써 일어나서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셋째, 그놈이 말이 많군 그래. 알아듣게 이야기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임청우의 귀에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든 노파의 것인데 여전히 낭랑한 느낌이 깃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이다!)

임청우는 벌떡 일어섰다.

귓구멍이 좁아서 그런 모양이오.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 것 같소.”

음산한 사내의 음성과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객점을 울렸다. 주인이 아마도 귀를 잘리거나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객점이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야한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품에 집어넣고 심주은 곁으로 달려갔다.

심주은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임청우는 옷가지와 함께 이불로 심주은을 둘둘 말아서 안아들었다.

이어 객점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임청우는 문득 그녀의 탁본에 생각이 미쳤다.

베개 밑을 들춘 임청우는 기름종이에 싸인 탁본과 책을 꺼내 품속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노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놈은 무조건 죽여 버려라!”

누님의 말씀대로 하겠소.”

늙은 거지의 대답이다.

 

새벽같이 객잔에 들이닥친 자들은 바로 심주은을 찾아다니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우두머리는 심주은으로부터 기()라고 불린 노파였다. 이 노파는 심주은처럼 한 가닥의 천잠사를 무기로 쓰는데 수법이 잔혹, 악랄하여 적의 목을 끊어버리는 데 명수였다.

두번째는 걸()이라는 거지로 술에 내공을 불어넣어 쏘아 보내는 주전신공(酒箭神功)을 달통한 자였다. 그의 주전신공은 특이하여 술은 완전한 화살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승()으로 세 사람 중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자였다. 수십 종의 괴이한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하나하나가 신병이기와도 같았다.

종남산의 첫 만남에서 기, , 승은 우협의 명성에 눌려 임청우를 포기하고 도망쳤었다.

그렇긴 하지만 세 사람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 무공에 있어서는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에 비해 그다지 뒤진다고 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휘익!

임청우는 이불로 감싼 심주은을 안고 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통해 객실을 뛰쳐나간 임청우는 단번에 맞은 편 건물 지붕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다른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빗속을 내달렸다.

배운 적이 없어서 임청우는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력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달한지라 임청우의 달음박질은 웬만한 고수가 펼치는 경신술보다도 오히려 빨랐다.

 

기걸승의 삼인은 심주은의 종적을 쫓아서 남양의 객점까지 왔었다.

사실 심주은의 몸에서는 만리향의 향기가 끊이지 않고 풍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만리향의 향기를 맡아왔던 세 사람이 심주은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원래 심주은의 몸에서 풍겨나는 만리향은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혹시 적에 의해 유괴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심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적이 심주은을 유괴해간다고 하더라도 만리향의 향기 때문에 금방 탄로가 나고 말 것이다.

한데, 그 만리향이 이제는 가출한 심주은에게로 그녀 아버지의 수하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걸승 세 사람은 만리향의 향기를 쫓아 객점에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을 윽박질러 찾아보려 하다가 주인이 반대하는 통에 그의 한쪽 고막을 터뜨리고 객점을 수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파는 몸을 훌쩍 날려 이층의 계단으로 올랐다.

이미 중은 객실의 방문들을 열어젖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밖에서부터 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놈이 도망쳤소. 쫓아갈 테니 여기 일은 누님이 알아서 해주시오.”

 

***

 

새벽이지만 성문은 벌써 열려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비 때문에 발이 묶여있던 상인들을 관부에서 배려한 것이다.

거지는 일찍 열린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임청우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임청우의 발걸음이 비록 빠르기는 했지만 일류고수인 거지가 볼 때에는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거지는 삽시에 임청우의 오장 뒤에까지 따라 붙으며 말했다.

흐흐흐... 성문을 나가는 순간이 네놈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임청우는 거지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거지는 자신의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가 임청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임청우가 심주은을 안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처럼 느긋하게 행동을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긴 해도 거지는 임청우가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쫙 벌렸다.

슈앙!

그러자 거지의 입에서 우유빛의 술 화살, 주전(酒箭)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와 임청우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임청우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듣는 즉시 왼손에 공력을 모아서 뒤로 휘둘렀다. 비록 공력을 발출할 수는 없지만 모으는 일은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다.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실린 임청우의 손이 휘둘러지면서 거지가 쏘아 보낸 주전은 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거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그의 주전을 맨손으로 막아낸 인물은 없었다.

거지의 주전은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보다 오히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어떤 놈이기에 저다지도 공력이 강하단 말인가?)

세치 두께의 철판도 거뜬히 뚫을 수 있는 주전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러 흩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거지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저토록 대단한 공력을 지닌 놈이 도망은 왜 간단 말인가?)

주전을 간단히 받아내는 가공할 공력을 가진 자가 경공술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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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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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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